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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법정논쟁] 폭력 남편과의 20년 악연… ‘살인’은 정당방위인가 

‘매 맞는 아내’의 2년 실형 그녀는 울었다 

임장혁 기자, 변호사 im.janghyuk@joongang.co.kr
법원, “잠시 중단된 폭력에는 ‘현재성’이 없고 어떤 폭력도 살인으로 막아선 안 된다”는 판례 재확인… 일각에선 “이론 집착 버리고 여성보호 위한 사법 정책적 결단 필요하다”는 목소리 높아

계속되는 폭행과 욕설로 인간 이하의 취급을 받아온 20년의 세월. 급기야 남편은 식칼을 아내 A씨의 목에 들이댔다. 집에서 도망치면 현상수배 광고까지 내면서 찾아내 폭력을 행사한 남자였다. 그가 난동을 부리던 중 바닥에 흘린 술에 미끄러져 의식을 잃은 순간은 두 사람의 질긴 악연을 끊는 순간이 됐다. A씨는 남편의 목을 졸랐다. 법원은 이 살인이 정당하지 않다고 판결했다. 도망치거나 신고했어야 한다고 했다. A씨는 살인범이 됐다. 정당방위의 범주는 과연 어디까진가?

“피고인은 살인범입니다. 그것도 자녀들이 보는 앞에서 그 아버지이자 자신의 전 남편을 목 졸라 살해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20년간 극심한 가정 폭력을 견디다 못해 지난해 6월 전 남편 문모 씨를 살해한 아내 A씨의 상고심에서 무료 변론에 나선 김상준(55) 변호사 팀이 지난 6월 대법원에 제출한 상고 이유서는 이렇게 시작한다.

A씨는 왜 남편을 죽였나


▎A씨가 검찰에 제출한 자필 진술서 사본. A씨는 “가정의 평화를 위해 순종했지만 (남편으로부터) 개 취급을 받았다”고 주장했다. / 사진·중앙포토
문씨가 A씨를 향해 주먹질을 하기 시작한 건 1995년부터였다. 동거를 시작한 지 갓 한 달 지난 때였다. 매일같이 술을 마셨고, 술에 취하면 욕설 끝에 주먹질과 발길질이 이어졌다.

도망도 소용이 없었다. 10번 가까이 가출을 시도했지만 번번이 실패였다. A씨의 눈가는 늘 멍들어 있었고, 들었던 욕설은 차마 옮길 수 없는 수준이었다. 세 아이도 수시로 욕설과 폭행에 시달렸다.

“수없이 세상을 떠나고 싶었고, 날아 다니는 새들을 보면 눈물이 나고 ‘나도 너희들처럼 새였으면 좋겠다’라고 수백 번 생각했습니다.”

아직도 기억에 생생한 2003년 말~2004년 초의 일은 A씨에게 악몽 그 자체다. 셋째 아이가 뱃속에서 자랄 때의 일이었다.

어느 추운 겨울 날 A씨는 두 아이와 무거운 몸을 이끌고 집을 ‘탈출’했다. 계속되는 폭행에 ‘이러다 다 죽겠다’는 생각이 엄습해서였다. 성당에서 운영하는 한 보호시설에 몸을 맡겼다.

그러자 문씨는 A씨를 절도 혐의자로 고소하고, 신문에 ‘1억’ 현상수배 공고를 냈다. 그러고는 A씨 부모가 사는 집에 ‘주먹’ 두 명을 데리고 찾아가 장인을 발로 차고 협박했다. 그 자리에서 “여동생 B라도 내놔라. 데리고 살게”라며 난동을 부렸다. 결국 집으로 돌아올 수밖에 없었다. 이 일이 있은 뒤로 죄송스런 마음에 A씨는 부모님께도 연락을 할 수 없었다.

생활비를 벌어다 준 적도 없는 문씨가 A씨의 인감증명 등을 찾아 빚보증을 서는 통에 A씨는 빚더미에도 앉았다. 그 뒤로도 A씨는 계속되는 욕설과 폭행을 참고 또 참았다. 구타와 욕설에 못 이겨 문씨가 먹다 남긴 음식을 먹어야 했고, 못먹는 술을 먹고 토하기를 반복해야 했다.

“가정의 평화를 위해서 순종했습니다. 너무 순종한 탓일까요? 개 취급을 했습니다.”(A씨의 진술서 중) 문씨는 교도소를 제 집 드나들 듯했다. 40번이 넘는 형사처벌을 받았다. 그때마다 A씨는 면회도 가고, 서신과 영치금도 넣어줬다.

“제발 평범한 아저씨가 되어주길 바랐지만 그는 더 악랄해져서 돌아왔습니다.”(A씨의 진술서 중)

2014년 기초생활수급자가 되려면 이혼하는 게 좋다고 설득해 어렵게 이혼했다. 그 직후 문씨는 다시 구속돼 1년6개월을 교도소에서 살았지만 출소 후 A씨와 아이들을 다시 찾아왔다.

“께름칙한 기분에 집안으로 안 들일 수가 없었습니다. 이상한 관계가 돼버린 것이죠. 아이들과 즐길 시간이 허락된다 점(접견권)을 알고 들른 것입니다. 갈 데가 없다며. 아이들이나 저나 후한이 두려웠습니다.”(A씨가 김영운 변호사에게 보낸 서한 중)

욕설과 구타는 첫날부터 다시 시작됐다. 그러기를 열흘 째. 술상 앞에 A씨를 앉혀둔 채 “네 부모와 동생들을 죽여버리겠다”는 둥 온갖 욕설과 인신공격을 퍼부었다. 비위를 맞추던 A씨가 “조용히 좀 살면 안 되느냐”며 맞서자 문씨는 A씨를 발로 걷어차고 선풍기와 화분을 집어 던지더니 식칼을 들고 와 A씨의 목에 들이댔다.

“죽여 버린다.” A씨는 문씨를 밀치고 부엌에서 마늘 찧는 몽둥이를 집어 들어 가까스로 식칼을 쳐냈다.

잠에서 깨어 A씨를 말리는 아들과 딸에게 “너희들은 고아원에나 갈 준비를 하라”며 폭언을 퍼붓던 문씨는 마루에 쏟아져 있던 술에 미끄러져 넘어져 의식을 잃었다. 순간 A씨에게 ‘지금 죽이지 않으면 아이들도 무사하지 못할 것’이라는 생각이 스쳤다. 잠시 정신을 잃은 문씨 위에 올라탄 A씨는 그 몽둥이로 문씨의 머리와 얼굴을 내리치고, 넥타이를 가져다 문씨의 목을 졸랐다. 문씨와 A씨의 20년 악연은 그렇게 끝났다.

우연히 찾아온 마지막 기회, 그리고 좌절


▎대법원 전경. 대법원은 지난 8월 A씨의 남편 살해가 정당방위였다는 주장을 받아들이지 않고 상고를 기각했다. / 사진·중앙포토
남편 문씨가 숨을 거둔 직후 A씨에게 밀려든 건 아이들에 대한 걱정이었다.

“무슨 일을 어떻게 했는지 지금도 기억이 잘 나지 않습니다. ‘엄마는 경찰서 가면 이제 집에 못 오고 감옥에 간다’고 말한 뒤 머리를 쥐어 잡고 쌀이 어디에 있는지, 세탁기는 어떻게 돌리는지, 비상금은 어디에 있는지 겨우 알려줬습니다.” (A씨가 김영운 변호사에게 보낸 편지 중)

A씨는 경찰에 자수했고, 경찰과 검찰 수사를 거쳐 살인죄로 기소됐다. 1심을 맡은 국선 윤영식 변호사는 A씨를 국민 참여재판으로 이끌었다. 정당방위를 주장했지만 지난해 10월 배심원은 전원 유죄 평결을 내렸다.

9명의 배심원 중 4명은 징역 1년3개월 실형, 5명은 징역 2년6개월에 집행유예 4년이라는 양형의견을 냈지만 재판부는 이를 받아들이지 않은 채 징역 2년의 실형을 선고했다. 지난 4월의 항소심 결론도 같았다.

마지막 기회는 우연히 찾아왔다.


▎지난 2월 서울고법 부장판사를 끝으로 법복을 벗은 김상준 변호사(55·연수원15기). 그는 A씨 사건 관련 대법원 판결을 두고 “가정폭력의 특수성에 법원이 공감하지 못한 인상을 지울 수 없다”고 말했다.
A씨 항소심을 끝으로 6년간의 국선전담변호사 활동을 마치고 갓 개업한 법무법인 정&파트너스 김영운 변호사는 상고심 무료변론을 약속했다.

항소심이 실형 선고로 끝난 뒤 “변호사님은 이제 그만하시는 건가요”라며 물끄러미 바라보는 A씨를 뿌리칠 수 없었다고 한다. 김 변호사는 “재판부가 가정폭력 피해자의 상황적·심리적 특수성에 대한 고려 없이 정당방위의 요건을 너무 형식적으로 판단한다는 생각에 오기도 생겼다. 끝까지 다퉈보고 싶었다. 하지만 내가 힘없는 국선이라 목소리가 허공에 맴도는 것은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기도 했다”고 말했다.

이때 김 변호사에게 손을 내민 사람이 지난 2월 서울고법 부장판사를 끝으로 법복을 벗은 김상준 변호사였다. 법관 재직시절부터 법심리학에 대한 관심을 바탕으로 ‘치료적 사법’ 등에 관한 이론적·실천적 해결책을 찾아온 김 변호사는 “관심 분야와 맞아 떨어지는 사회공헌의 길을 찾던 중 A씨 사건을 접하게 됐다”고 말했다.

결국 A씨는 김 변호사가 비슷한 시기 무료변론을 맡은 3명의 피고인 중 한 사람이 됐다. 3명은 모두 각기 다른 이유로 발생한 심리적 곤란 속에서 ‘죄’를 지은 이들이었다.

김상준 변호사는 “A씨는 ‘매맞는 아내 증후군(BWS)’을 겪고 있는 여성의 전형적인 심리를 보여주는 사례”라고 말했다. 이어 “이제는 우리나라에서도 남편을 살해한 가정폭력 피해자들의 정당방위 인정여부에 대한 전향적 논의가 사법적으로 수용될 때가 됐다”고 덧붙였다.

최소한 전원합의체로 끌고 가서 공개변론에라도 붙여보고 싶다는 게 김상준 팀의 소박한 꿈이었다. 김 변호사는 법심리학 전문가를 사무실에 전문위원으로 영입해 가정폭력 피해자의 심리적 특수성을 호소하는 보충 서면도 제출했다.

그러나 A씨의 마지막 기회는 너무 빨리, 그리고 너무도 허무하게 사라져버렸다. 상고이유서를 제출한 지 두 달만인 8월 24일 대법원은 ‘상고 기각’을 선고했다. 별다른 이유 설명도 없었다.

김영운 변호사는 “시작할 때부터 A씨에게도 ‘좋은 결과를 얻기 쉽지 않다. 그래도 이렇게 싸우다 보면 언젠가 당신처럼 억울한 사람이 생기지 않는 세상이 될 수 있다’고 말했지만, 두 달 만에 ‘상고기각’은 당혹스러운 결과였다”고 말했다.

A씨의 잔여 형기는 약 1년. 하지만 보육시설 등에 흩어져 지내며 엄마를 기다리는 세 아이에게는 결코 짧지 않은 시간이 남아 있다.

24년 전 김보은의 절규… 대답 없는 법원


▎1992년 이화여대 총학생회가 의붓아버지로부터 성폭행을 당하다 가해자 살해에 이른 김보은 양 구명을 위한 모금활동을 하고 있다. / 사진·중앙포토
‘정당방위’라는 개념은 원래 서부영화에서의 결투 장면처럼 비슷한 신체적 능력과 유사한 무기를 가진 두 남자의 대결이라는 그림을 담기 위해 만들어진 액자다.

신체적으로 우월한 남성이 휘두르는 압도적 폭력에 짓밟힌 피해자가 가해자가 잠든 사이나 술에 취해 의식을 잃은 상황을 이용해 반격하는 장면은 원래 이 액자에 맞지 않는 그림이다. 액자는 ‘침해의 현재성’과 ‘방위행위의 상당성’이라는 두 개의 뼈대로 구성돼 있다.

이 뼈대는 형법전에 “자기 또는 타인의 법익에 대한 현재의 부당한 침해를 방위하기 위한 행위는 상당한 이유가 있는 때에는 벌하지 아니한다”(21조 1항)라고 표현돼 있다.

김상준 팀이 시도하고자 했던 것은 대법원이 고집하는 이 뼈대를 변형시켜 A씨가 주인공인 비극적 그림을 끼워 넣는 일이었다. 그러나 A씨처럼 잠들거나 만취 상태에 있는 남편을 살해한 대부분의 여성은 아직 ‘침해의 현재성’이라는 첫 번째 뼈대도 흔들지 못했다.

과거의 정당방위와 관련된 재판 중 ‘침해의 현재성’을 가장 치열하게 다툰 사건은 ‘김보은 양 사건’이었다. 1992년 1월 대학생 김보은 양와 남자친구 김진관 군이 김양의 의붓아버지 김영오를 살해한 혐의로 체포되면서 촉발된 정당방위 인정 논란은 그해 12월 대법원 확정 판결이 날 때까지 계속됐다.

경찰조사 결과 김양은 검찰 사무직 간부였던 의붓아버지로부터 초등학교 2학년 때부터 92년까지 지속적으로 성폭행을 당해온 것으로 드러났다. 사건 전날 식칼 등을 준비해 김양의 집이 있던 충주로 내려간 김군은 사건 당일 새벽 김양이 열어준 문을 통해 집안으로 들어갔다. 그러고는 술에 취해 잠든 김양의 의붓아버지의 심장을 찔렀다. 검찰은 두 사람에게 모두 살인죄를 적용해 기소했고 징역 12년을 구형했다. ‘계획적 살인’으로 본 것이다. 1심은 김군에게 징역 7년, 김양에게 징역 4년의 실형을 선고했다.

여성단체를 중심으로 시작된 두 사람에 대한 구명운동이 확산되면서 항소심 법정엔 시선이 더욱 집중됐다. 두 사람이 최후 진술을 한 결심 공판정은 곳곳에 흐느낌이 가득했다고 한다.

“어머니 다음으로 사랑하는 보은이가 다른 남자에게 무참하게 짓밟히는 것을 알고도…. 내 자신이 아무것도 할 수 없다는 것을 느낄 때마다…. 죽고 싶은 마음뿐이었습니다.”(김군의 최후 진술 중)

“구속된 후 감옥에서 보낸 7개월이…. 지금까지 살아온 20년보다 훨씬 편안했습니다…. 더 이상 밤새도록 짐승에게 시달리지 않아도 됐기 때문입니다.”(김양의 항소심 최후진술 중)

재판의 핵심 쟁점은 의붓아버지가 ‘잠든 사이’를 김양에 대한 폭력이 계속되는 ‘현재’로 볼 수 있는지였다. 항소심에서 변호인단은 주장엔 ‘잠든 사이’는 폭력이 멈춘 순간이 아니라 폭력이 계속되는 시간의 일부로 봐야 한다는 호소가 녹아 있다.

“피고인 김보은이 9살 때 김영오로부터 최초로 강제추행을 당한 이래 계속적으로 성관계를 강요당해왔음은 물론 심지어 일상적인 감정표현 등을 포함한 일체의 행동의 자유를 김영오로부터 통제, 감시 받아오다…. 강간사실을 폭로하거나 피해자의 곁을 떠나려는 경우엔 더 가혹한 보복이 뒤따를 것이 예상돼 다른 선택을 할 여지가 없었다.”(항소심 판결문 중 항소이유 요지)

그러나 재판부는 고개를 가로저었다.

“이 사건 범행(살인)당시에는 피고인들의 법익에 대한 소위 급박한 침해가 있다고 보여지지 아니하고 살인이 피고인들이 현재의 부당한 침해를 방위할 의사로 행해졌다고 보기보다는 도리어 공격의 의사로 행해진 것으로 인정된다.”(항소심 판결문 중)

“생명보다 우월한 가치는 없다”


▎2007년 칠레에서 열린 ‘남편에게 살해당한 여성 추모행사’. 가정폭력 희생자를 뜻하는 수많은 구두가 가지런히 놓여 있다. / 사진·중앙포토
‘김보은 양’ 사건은 결국 대법원도 정당방위를 인정하지 않으면서 두 사람의 살인죄가 유죄로 확정된 것으로 끝났다. 다만 몇 가지 기록을 남겼다.

김양은 살인범 중 최초로 집행유예를 선고받은 사람이 됐다. 항소심이 김양에게 징역 3년에 집행유예 5년을 선고해 석방했고 92년 12월 22일 대법원이 원심을 확정했기 때문이다.

그보다 더 큰 여운을 남긴 건 대법원이 적어둔 미완의 ‘판결 이유’였다. 대법원은 김양과 같은 경우엔 침해의 현재성이 인정될 여지도 있다고 언급했다.

“피고인 D가 약 12살 때부터 의붓아버지인 피해자의 강간 행위에 의하여 정조를 유린당한 후 계속적으로 이 사건 범행 무렵까지 피해자와의 성관계를 강요받아 왔고, 그 밖에 피해자로부터 행동의 자유를 간섭받아 왔으며, 또한 그러한 침해 행위가 그 후에도 반복하여 계속될 염려가 있었다면, 피고인들의 이 사건 범행 당시 피고인 D의 신체나 자유 등에 대한 현재의 부당한 침해상태가 있었다고 볼 여지가 없는 것은 아니나….”(상고심 판결문 중)

그러나 대법원의 결론도 “정당방위는 아니다”였다. 방위행위의 상당성이 없다는 이유였다.

“술에 취해 잠든 피해자의 양팔을 눌러 꼼짝 못하게 한 후 피해자를 깨워 제대로 반항할 수 없는 상태에서 식칼로 피해자의 심장을 찔러 살해한다는 것은 사회통념상 상당성을 인정하기가 어렵다.”(상고심 판결문 중)

학계에서는 이 판결을 가정폭력 피해자의 방위 행위에서 침해의 현재성을 인정한 첫 판결이라는 해석도 나왔지만, 이후 유사한 사례에서 침해의 현재성이 인정됨을 전제로 정당방위 무죄를 선고한 사건을 단 한 건도 없다. A씨 사건의 항소심도 마찬가지였다.

A씨에게 징역 2년 실형을 선고한 서울고법 형사6부(부장 정선재)는 “문씨의 침해행위가 그 후에도 반복해 계속될 염려가 있어 이 사건 범행(살인) 당시 피고인(A씨)의 생명·신체 등에 대한 현재의 부당한 침해가 있었다고 볼 여지가 전혀 없는 것은 아니다”라고 제시했다. 그러나 정당방위 인정은 거절했다. 재판부는 ‘식칼을 이미 떨어뜨리고 의식을 잃은 문씨의 목을 졸랐다는 점’, ‘딸이 말리는데도 아빠가 일어나면 우리가 보복만 당한다며 살해한 점’ 등을 볼 때 자기 방위에 필요하고도 적절한 수준의 대응이라고 볼 수 없다는 것이다.

재판부는 “가정폭력으로 인해 침해되는 법익이 생명보다 우월하다고 할 수 없다”고 덧붙였다. 대법원도 항소심을 그대로 받아들였다. 김상준 변호사는 “생명에 대한 상시적인 위협과 극단적 인권유린 상태에서 좀처럼 헤어나올 수 없는 가정폭력의 특수성에 법원이 공감하지 못한 채 ‘어찌 부인이 남편을 죽일 수 있느냐’는 전통적 고정관념에 갇혀있다는 인상을 지울 수 없다”고 말했다.

극심한 가정폭력의 피해자에서 살인범으로 처지가 바뀐 여성을 정당방위를 인정해 구제하려는 사법적 시도는 미국에서 시작됐다. 미국에서는 원칙적으로 ‘불법하고 임박한’ 가해행위가 존재하고 방위행위자가 이를 격퇴하는 방위행위가 필요하다고 믿은 경우에 정당방위를 인정한다. 물론 이 믿음은 객관적으로 합리적이라고 받아들여질 수 있어야 한다.

심리학자 러노르 워커 박사가 1970년대 말 내놓은 ‘매맞는 여성 증후군(BWS·Battered Woman Syndrome)’이론은 정당방위의 틀을 넓히려는 사법적 시도의 배경으로 작용했다. 워커 박사에 따르면 가정 폭력은 ‘욕설과 트집→극심한 학대→회개와 반성’을 반복하면서 갈수록 심각해진다.

이 과정에서 학대를 받는 여성은 학대에서 벗어나려는 시도를 포기하고 극도의 우울증과 성격장애 등을 겪게 된다는 것이다. 이 같은 증상은 ‘외상후 스트레스 증후군(PTSD·Post Traumatic Stress Disorder)’과 유사하다고 한다.

처음 이 이론을 전면적으로 수용한 결과물로 1984년 ‘State v. Kelly’ 판결이 꼽힌다. 뉴저지주에 살던 켈리라는 여성은 결혼 후 7년여 동안 남편의 폭력에 시달려왔다. 어느 날 남편은 생필품을 살 돈을 달라고 요구하는 켈리를 길 에서 흠씬 두드려 팼다.

지나가던 이웃의 만류로 잠시 떨어졌던 남편이 돌아오자 켈리는 지갑 속에서 가위를 꺼내 남편을 찔러 숨지게 했다. 켈리는 법정에서 살해의 동기를 “남편이 돌아오면 나를 죽일 것 같았다”고 말했다. 이 재판에 전문가 증인으로 나선 심리학자는 BWS 이론을 제시하며 “학습된 무기력 상태에 빠진 켈리 입장에서 남편을 살해하는 것은 ‘합리적 선택’일 수 있었다”고 주장했다.

뉴저지주 대법원은 결국 이 주장을 받아들여 사건을 무죄 취지로 파기 환송했다. 이후 미국의 법원은 BWS 이론을 정당방위의 합리성 요건과 임박성 요건을 완화하는 데 활용해 왔다. 학대받는 여성의 심리적 특수성이라는 주관적 요인을 반영해 정당방위 인정에 요구되는 객관적 요건을 완화해온 것이다.

이용식 서울대 법학전문대학원 교수는 “미국이 피학대 여성의 정당방위 인정범위를 넓혀온 것은 법리적 판단보다는 정책적 결단에 가깝다”고 말했다. 당시 미국에서 여성이 매 15초마다 자신의 집에서 구타당했고, 1988년 한 해에만 1075명의 여성이 배우자에 의해 살해됐다는 연구가 나오는 등 가정폭력에 대한 경각심이 높아졌던 사회적 분위기가 재판에 영향을 미쳤다는 설명이다.

‘매 맞는 여성’의 탈출구는 어디?


▎2005년 국내서 개최된 ‘세계여성학대회’. 가정폭력으로 숨진 아내를 위한 추모공연이 진행되고 있다.
‘김보은 사건’을 거친 우리나라 법정에서도 90년대 중반 이후 ‘매 맞는 여성 증후군’을 침해의 현재성이나 방위행위의 상당성 평가에 반영하자는 목소리가 높아졌다. 그러나 우리나라에선 아직 살인범이 된 가정폭력 피해자들에게 면죄부가 부여되지 않았다.

다만 2000년대 중반 이후 ‘매 맞는 여성 증후군’ 등 가정 폭력의 피해의 특수한 심리상태를 정상참작 요인으로 반영한 판결이 늘고 있다. 2005년 서울고법 형사7부(부장 고영한, 현재 대법관)는 무차별 폭력으로 부인과 아들에게 장애를 입히고 생명에 위협을 가해온 B씨를 살해한 모자에 대한 판결에서 ‘매 맞는 아이 증후군’과 ‘매 맞는 아내 증후군’을 언급했다.

재판부는 1심에서 각각 징역 15년과 징역 12년을 선고받은 이들의 형량을 모두 징역 6년으로 감형했다. 비슷한 시기 춘천지법은 상습적인 가정폭력에 시달리다 아버지를 살해한 여중생 이모 양에게 징역 3년에 집행유예 5년을 선고해 석방하면서 ‘외상 후 스트레스 증후군’ 상태에 놓인 이양의 심리 상태를 고려했다.

그러나 지난달 A씨에 대한 대법원 선고는 우리 법원이 아직 살인범이 된 가정폭력의 피해자들에게 무죄를 선고할 준비가 되지 않았음을 보여준다. 서울중앙지법의 한 판사는 “가정폭력의 심각성에 대한 인식은 넓어지고 있지만 살인범을 무죄라고 판결할 만한 용기와 이론적 근거를 마련하지 못했다”라고 말했다.

이 판사는 “BWS이론은 가정폭력 피해자의 특수한 심리 상태를 ‘살해’라는 방위행위의 객관적 정당성과 합리성을 인정하는 근거로 보는 건 논리적 모순이 있다”고 말했다. 이어 그는 “학교폭력이나 군대에서의 폭력으로 인해 비슷한 심리상태에 놓인 사람들의 보복적 살해에도 같은 잣대를 들이댈 수 있느냐는 형평성 문제도 발생시킬 수 있다”고 지적했다.

이에 대해 이용식 교수는 “가정폭력을 신체에 대한 침해로만 보면 잠든 남편을 죽인 피학대여성의 행위를 정당방위로 볼 방법이 없다”면서도 “가정폭력을 인간의 존엄, 여성의 일반적 행동의 자유를 침해하는 행위로 본다면 잠시 폭력이 멈춘 순간도 불법적인 침해가 계속되는 상황으로 이해해 ‘침해의 현재성’을 인정할 수 있을 것”이라고 말했다.

이 교수는 또 “근본적으로는 정당방위 인정을 두고 골머리를 앓기보다 ‘비인간적인 가정폭력에서 벗어나기 위해 극단적 방법을 택한 사람을 도저히 처벌할 수 없다’고 밝히는 정책적 선언을 고민할 때”라고 덧붙였다.

- 임장혁 기자, 변호사 im.janghyuk@joongang.co.kr

201610호 (2016.09.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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