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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을산책] 한려수도 섬들이 한눈에… ‘바다백리길’ 

상념 잊게 해주는 바다로(路)! 

글 위성욱 기자 we@joongang.co.kr / 사진 송봉근 기자 song. bonggeun@joongang.co.kr
미륵도·한산도·비진도·연대도·매물도·소매물도 잇는 42.1km 섬둘레길… 부드러운 해풍 맞으며 원시림과 해안 절경의 사잇길을 따라 걷다

▎비진도 선착장에서 바라본 해수욕장 풍경. 오랫동안 모래와 자갈이 퇴적돼 만들어졌다. 산호빛 바다를 품고 있어 비진도에서 가장 아름다운곳이다.
섬과 섬, 고독과 사색, 비경과 풍경을 이어주는 바닷길이 있다. 2012년 국립공원관리공단 한려해상국립공원 동부사무소가 조성한 ‘바다 백리길’. 경남 통영시에 있는 미륵도·한산도·비진도·연대도·매물도·소매물도 등 6개 섬의 둘레길 42.1㎞를 이어주는 길이다. 제주 올레길과 지리산 둘레길이 자동차로 도착하는 지점에서 출발한다면 바다백리길은 육지에서 배로 이동해 길이 시작한다는 것이 다르다. 특히 바다백리길은 섬 한 곳을 반나절 정도면 다 돌아볼 수 있을 만큼 거리가 길지 않다. 그러나 이들 섬은 바람이 불어 파도가 일면 배가 끊기는 경우가 많아 자신을 쉬 허락하지는 않는다. 누구나 쉽게 갈 수는 없는 길이라서 더 매력적이다.

바다백리길의 백미는 ‘소매물도 등대길’이다. 인근 ‘매물도 해품길’은 바다 백리길의 축소판이다. ‘비진도 산호길’은 신비롭다. ‘연대도 지겟길’은 소박하고 정겹다. ‘미륵도 달아길’는 아름다운 일출과 일몰을 안고 있다. ‘한산도 역사길’은 역사와 문화를 만날 수 있다.

이처럼 바다백리길은 저마다의 독특한 아름다움을 뽐낸다. 어느 섬에 가도 원시림, 명불허전의 비경, 한려해상의 아름다운 자연경관을 만날 수 있다. 기자는 지난 8월 29~30일, 9월 5일 두 차례에 걸쳐 김아름(29·여) 동부사무소 탐방시설과 주무관의 도움을 받아 6개 섬을 취재했다.

일출과 일몰이 장관인 섬 | 미륵도 달아길(1구간·14.7㎞·5시간)


바다백리길의 시작은 미륵도(彌勒島·면적 3290만㎡, 인구 3만1084명)다. 미륵도는 섬이지만 배를 타지 않고도 갈 수 있다. 통영에서 연결된 통영대교와 충무교를 이용하면 된다. 충무교 아래 바다밑에는 1932년 일제강점기에 조성된 해저터널(길이 483m, 폭 5m, 높이 3.5m)이 있다. 차 한대가 겨우 갈 수 있는 길이지만 사람의 통행만 허용된다.

통영대교·충무교나 해저터널을 빠져나와 자동차로 20여 분 거리인 미래사부터 둘레길이 열린다. 절 옆 등산로 입구에 ‘한려해상 바다백리길’이라는 파란색 글자가 길바닥에 적혀 있다. 편백나무 숲을 거쳐 산길을 따라 40~50분 정도 올라가면 미륵산(461m) 정상이다. 이곳에 올라서니 탄성이 절로 나온다. 날씨가 좋은 날이면 정상에서 대마도, 지리산 천왕봉, 전라도 여수 돌산 등이 훤히 보인다. 강수영 관광 해설사는 “정상에서 지리산 천왕봉, 전라도 여수돌산, 대마도까지 다 볼 수 있는 날이 일년에 며칠이 안 되는데 오늘 아주 특별한 날이다”라고 말했다. 이곳은 평상시에도 일출을 보려는 사람들로 붐빈다.


▎미륵도 달아길의 종착지점인 달아공원에서 바라본 남해안의 아름다운 일몰 풍경. / 사진제공·통영시
미륵도 달아길 코스는 바다백리길 중 가장 길고 힘든 구간으로 꼽힌다. 그래서 산행이 힘든 사람은 미래사부터 오르지 않고 한려수도조망케이블카를 타고 정상으로 오른 뒤 하산하거나 산행을 이어가도 된다. 정상에서 미륵고개(미륵치)와 야소마을을 지나 희망봉(230m)과 망산(253m)까지 3시간 정도가 걸린다. 주로 소나무 숲길이 많지만 대나무숲이나 돌담길도 곳곳에 있다. 오르막과 내리막길이 번갈아 나타나 쉽지만은 않았다.


▎달아길의 시작 지점에 있는 미래사 대웅전 입구에서 불자들이 합장하고 있다. / 사진·위성욱 기자
그러나 희망봉과 망산에서 바라보는 곤리도·욕지도·매물도 등은 마치 그림처럼 아름다워 올라올 때의 피로가 순식간에 풀리는 듯하다. 희망봉에서 망산까지 오르막과 내리막이 교차하는데 그때마다 ‘다 와간다’는 희망을 가지라고 해서 희망봉이라 이름 지었다는 이야기가 있다.

이후 달아공원까지 등산로는 가파른 내리막길이다. 해질 녘에 달아공원에 도착했다면 남해바다 최고의 일몰을 볼 수 있다. 등산객 김영숙(51·여·통영시 미수동) 씨는 “달아길은 코스가 길기 때문에 초보자는 미래사에서 미륵산 정상이나 야소마을까지, 산행을 자주하는 사람은 달아공원까지 전 코스를 다 도는 것도 방법”이라고 말했다.

과거와의 소통과 사색의 섬 | 한산도 역사길(2구간·12㎞·4시간)


통영항 연안여객터미널에서 배로 20분 정도면 한산도(閑山島·면적 1470만㎡, 인구 1073명)에 도착한다. 선착장에서 내려서 오른쪽으로 가면 임진왜란 당시 이순신 장군이 삼도수군통제사 직무를 수행했던 제승당, 왼쪽으로 200~300m 정도 자동차 도로를 따라 올라가면 역사길이 시작되는 오솔길이 나온다. 이곳을 역사길이라 부른 것은 능선마다 임진왜란 때 격전이 펼쳐졌던 현장을 볼 수 있기 때문이다.

역사길 초입은 100여m 종려나무와 동백나무 숲길로 이루어져 이국적인 풍경을 자아낸다. 들머리에 창고 등 폐건물 10여 곳에 통영운하 등 각종 벽화가 그려져 있다. 10여 분 정도 가파른 길을 올라가면 학익진 전망대다. 이순신 장군이 임진왜란 때 학이 날개를 펴 듯 적을 둘러싸 대승을 거둔 한산대첩의 현장을 볼 수 있는 곳이라서 붙여진 이름이다. 왼쪽으로 소고포라는 마을이 멀리 보인다. 이 마을에 염개갯벌이 있는데 한산대첩 후 이순신 장군이 왕의 허락을 받아 염전을 운영해 소금을 판 돈으로 군량미 등 군수물자를 마련했다고 한다.


▎김아름 주무관이 한산도 미륵길 중 학익진 전망대에서 역사적인 한산대첩의 현장을 바라보고 있다. / 사진·위성욱 기자
이곳에서 다시 망산교까지 2시간 정도가 걸리는 길은 마치 인생의 굴곡처럼 다채롭다. 호흡이 가빠지는 짧은 오르막이 나타나는가 하면 편안한 산책길이 이어지고 잊을 만하면 다시 오르막길이 시작된다. 이 길이 끝나면 망산(293m)으로 올라가는 40분 정도의 가파른 길이다. 한산도에서는 가장 험한 오르막이어서 초보자들에겐 힘들 수도 있다. 망산은 이순신 장군이 이곳에 망대를 만들고 병사를 두어 대마도 등 인근 해안의 적선의 동태를 감시했던 곳이다.

이어 곰솔 군락지를 지나면 봉수대로 가는 길이다. 이 길 아래에 문어(問語)포가 있다. 임진왜란 때 일본군이 섬으로 도망치면서 길을 물었다는 데서 유래했다. 문어포 가장 높은 봉우리에는 동쪽으로 머리를 두고 있는 큰 거북선 모양의 한산대첩기념비가 있다. 일본이 이 땅을 다시는 넘보지 말라는 의미를 담은 듯하다. 봉수대에서 1시간 정도 내려오면 종착지인 진두(津頭)마을이다. 이 마을에는 한산면사무소·보건소, 한산초·중학교 등 한산도의 중요한 시설이 모여 있다. 비진도와 매물도 등 섬 학생들이 아침이면 이곳으로 통학선을 타고 등교한다.

한산도 역사길을 걷지 않고 섬을 체험할 수 있는 방법이 두 가지 더 있다. 매 시간마다 선착장 앞에서 진두마을까지 오가는 버스를 타고 해안을 내달리거나 선착장 앞 한려해상 국립공원에서 운영하는 한산탐방지원센터에서 무료로 자전거를 빌려 섬 곳곳을 둘러보는 것이다.

산호빛 바다 품은 신비의 섬 | 비진도 산호길(3구간·4.8㎞·3시간)


미륵도와 한산도가 통영에서 가까운 섬이라면 비진도(比珍島·면적 277만㎡, 인구 181명)는 통영항에서 뱃길로 40분 정도 걸리는 먼 섬이다. 비진도는 두 개의 섬이 길로 이어져 있어 멀리서 보면 마자 숫자 ‘8’처럼 보인다. 오랫동안 퇴적된 모래와 자갈이 길이 됐고 이곳에 차와 사람이 다닐 수 있는 도로를 만들었다. 한쪽은 모래 해수욕장, 반대쪽은 몽돌해수욕장이 있고 각각 산호빛 바다를 품고 있어 외항 선착장에 내린 관광객들은 그 모습에 탄성부터 지른다. 그러나 비진도의 진정한 진경은 산호길을 걸어야만 볼 수 있다. 선착장의 파란색 글씨를 따라 왼쪽으로 100여m 세찬 모래바람을 맞으며 가면 길이 시작된다.

산호길 초입의 오솔길을 지나면 45도가 넘는 경사의 오르막이 시작된다. 20분 정도 올라가자 탐방객들이 여기저기 주저 앉아 거친 숨을 몰아쉰다. 그늘길이었지만 어느새 온몸이 땀으로 흥건히 젖는다. 망부석 전망대까지 오르면 길을 포기하고 싶은 마음도 살짝 든다. 그만큼 오르막이 가파르다. 힘을 내 조금 더 올라가 미인도 전망대에 서서 해수욕장 쪽을 내려다보니 피로감이 한순간에 씻겨 나가는 듯하다. 곳곳에서 “와 멋있다, 진짜 이쁘다”는 탄성이 나온다. 성스레(28·여·경기도 파주시) 씨는 “이곳에 안 올라왔으면 후회했을 뻔했다”며 감탄사를 연발했다. 여기서 10~20분 정도 더 올라가면 선유봉전망대(312m)다.


▎산호빛 바다를 품은 비진도 해수욕장의 전경을 내려다볼 수 있는 미인도 전망대에서 탐방객들이 즐거운 시간을 보내고 있다.
그러나 일부 등산객은 미인도 전망대에서 발걸음을 되돌렸다. 오르막에 대한 두려움 때문이다. 그러나 선유봉 전망대 이후에는 평평하거나 내리막 산책길이다. 특히 해안절벽을 따라 만들어진 길과 각종 기암절벽들은 왜 산호길이 바다백리길 중 손꼽히는 구간인지를 보여준다. 산호길 곳곳에 마련된 벤치에 앉아 해안의 파도소리를 들으며 바다를 바라보고 있으면 마치 시간이 멈춘 듯한 느낌이 들 정도다.


▎비진도 선착장 바닥에 적힌 바다백리길 안내표시.
선유봉까지의 길에는 여인바위·흔들바위·망부석 등 다양한 바위가 있는데 모두 선녀와 관련된 전설이 남아 있다. 이곳이 선녀가 머물 만큼 아름다운 비경을 갖고 있어 붙여진 이름이라고 한다. 갈치바위는 이곳의 비바람이 얼마나 거칠게 몰아치는지 바다의 갈치들이 폭풍우가 치고 나면 이곳의 나무에 주렁주렁 걸렸다고 해서 붙여졌다.

선유봉을 지나 노루여전망대(벼랑에서 노루들이 자주 떨어져 죽어서 붙여진 이름)까지는 내리막 숲길이다. 이곳에서 후박나무 자생지를 지나면 비진암이 나온다. 규모는 작지만 바다를 향해 서 있는 암자가 아름답다. 절 옆으로 동백나무 군락지가 있는데 통영에서 가장 아름다운 동백꽃 사진을 찍을 수 있는 곳으로 알려져 있다. 다시 돌담길을 지나 출발지점으로 도착할 때쯤 묘소에 벌초를 하는 마을 사람을 만났다. 신현곤(60) 씨의 부인은 기자가 이런 섬에 살고 싶다고 하자 “낚시대 하나만 들고 오면 살 수 있어, 말만 잘 들으면 여기 사람들이 마늘이며 각종 필요한 것 다 줄 건데 머시 걱정이고”라며 웃었다. 황원남(63) 외항마을 이장은 “예전에는 여름 한철에만 관광객들이 왔는데 저 길(산호길)이 생긴 뒤로는 주말에 600~700명이 섬을 찾아온다”고 말했다.

동화같은, 인간미 넘치는 섬 | 연대도 지겟길(4구간·2.3㎞·1시간30분)


통영시 산양읍 달아항에서 배로 20여 분 거리에 있는 연대도(烟臺島·면적 54만㎡, 인구 93명)는 바다백리길 중 가장 짧은 구간이다. 외적의 침입을 알리는 봉화대가 있어 붙여진 이름이다. 실제 섬에서 가장 높은 연대봉(220m)에는 예전에 삼도수군통제영의 수군들이 적의 침입을 감시하던 봉화대가 있었다. 그래서일까. 지금도 연대도는 지구에 닥친 환경의 위기를 알리는 상징적인 역할을 하고 있다.

섬 선착장에서 가장 먼저 보이는 건물이 1층 마을회관, 2층 방문자센터로 사용되는 ‘패시브(passive) 하우스’다. 이 건물은 건물 안에서 발생하는 사람의 체온과 조명등의 열, 창문으로 들어오는 태양열을 활용하고 있다. 또 내부 열이 새나가지 못하게 단열을 최대한 높여 별도 난방 없이 겨울을 날 수 있다고 한다.


▎연대도 지겟길의 출발지점에 있는 연대마을. 각종 벽화와 이색적인 문패가 동화 같은 마을 분위기를 연출한다.
인근에 에코체험센터도 있다. 폐교를 리모델링해 자전거 발전기, 인간동력 놀이기구 등을 작동해보며 에너지 생산과 절약과정을 경험해볼 수 있는 시설이다. 마을 뒷산에는 마치 조립식 건물의 지붕처럼 보이는 태양광발전소 모듈(태양열을 모으는 네모난 판) 수십 개가 설치돼 있다. 주민들에게 전기를 공급하는 시설이다. 연대도가 2011년부터 ‘국내 최초 에너지 자립섬, 탄소 제로섬’으로 유명해진 이유다.

지겟길은 연대도의 이 같은 시설을 모두 둘러볼 수 있다. 선착장에서 시작된 지겟길은 연대마을을 통과하면 뒤쪽으로 태양광발전소가 보인다. 이어 몽돌해변과 북바위전망대로 해안을 낀 길이 이어진다. 이 길은 원래 예전에 섬 주민들이 지게를 지고 나무를 하러 다니던 길이어서 지겟길이라 이름 붙여졌다. 사람 한 명이 간신히 지나갈 수 있다. 연대봉의 허리와 어깨쯤의 높이로 섬을 한 바퀴 도는 것이어서 쉬면서 걸어가도 2시간이면 충분히 돌 수 있다. 여기서 연대봉(220m)을 지나 오곡도 전망대까지는 바다 전망을 보면서 갈 수 있다. 길이 끝나는 지점에 에코체험센터가 나오고 수변데크를 따라 10여 분 가면 다시 출발지인 연대마을이 나타난다. 이 마을은 동화 속 세상 같다. 문패만 봐도 미소가 절로 나온다. ‘칠공주의 집-관광버스에서 이박삼일동안 춤을 춰도 끄덕없습니다’, ‘허우두리 할머니 댁-젊을 때 한 미모하셨답니다’, ‘자연산 횟감이 매일 있는 어부의 집-민화투를 즐기시는 이야무 할머니와 함께 삽니다’는 식이다.


▎연대마을에서 바라본 선착장. 마을 쪽으로 지겟길의 일부가 보인다.
이런 문패와 집 담벼락에 그려진 바다 등 동화 같은 그림을 보면서 마을길을 걷고 있는데 한 주민이 깜짝 놀란 듯 집밖으로 나오면서 소리쳤다. “바람이 이렇게 부는데 좋은 날 오지, 얼릉 가이소 배 끊길라~.” 연대도에서 만난 홍종균(71) 씨였다. 굳은 날씨에 혹시 배가 끊겨 취재진이 집으로 돌아가지 못할까 걱정하는 마음에 달려 나온 것이었다. 마을 인근 몽돌해변에 세워둔 입간판에는 주민들의 재치가 담긴 글이 미소짓게 한다. “아이구 허리야, 너거는 놀고 가모(가면) 그마이지만(그만이지만) 우리는 치운다고 억수로(많이) 욕본다(힘들다) 아이가.”

한 번 걸으면 또 가고 싶은 섬 | 매물도 해품길(5구간·5.2㎞·3시간)


바다백리길 중에 단 한 곳만 꼽으라면 주저 없이 매물도(每勿島·면적 141만㎡, 인구 121명) 해품길(바다를 품은 길)을 추천한다. 해품길과 비진도 산호길은 사색을 하며 걷기 좋은 길이다. 코스 상당부분이 바다 풍경을 보면서 걸을 수 있는 평탄한 길이 많아서다. 여기다 해품길 주변에는 강원도 대관령의 양떼목장이나 제주 바다목장 같은 초원도 있다.

그러나 통영항에서 배로 1시간30분 정도 거리라 쉽게 갈 수 있는 곳은 아니다. 기자도 태풍으로 인해 일주일간 뱃길이 끊겨 두 번의 시도 만에 섬에 가까스로 들어갔다.

매물도에는 당금과 대항 두 개 마을이 있다. 두 곳 다 여객선이 들러 어디서든 해품길을 오를 수 있다. 당금 마을의 좁은 길을 올라가면 해품길이 시작된다. 지금은 폐교가 된 매물도분교와 동백터널을 지나 조금만 올라가면 해안과 산 사이의 넓은 초원지대가 펼쳐진다. 이곳 어디에서든 사진을 찍으면 아름다운 풍경이 담긴다. 마을을 벗어나는 언덕길 외에는 경사도 심하지 않다.


▎매물도 해품길 중 장군봉에서 하산하는 구간. 눈앞에 펼쳐지는 소매물도와 등대섬을 내려다보며 초원길을 걸을 수 있다.
바다전망이 멋진 홍도전망대를 지나면 내리막길이 800m 정도 이어진다. 끄트머리에 이정표가 서 있는 삼거리가 나온다. 이곳까지 1시간30분 정도가 걸린다. 이곳에서 아래로 내려가면 대항마을, 다시 경사가 있는 오르막길로 10~20분 올라가면 장군이 말을 탄 모습을 한 장군봉(210m)이다. 600m 정도의 오르막길은 매물도에서 가장 힘든 코스지만 가뿐 숨을 몰아쉴 정도는 아니다. 매물도는 위에서 보면 전쟁에 나가 승리를 거둔 개선장군이 말의 안장을 풀고 바다를 바라보며 휴식을 취하는 모습이란다. 그래서 말 ‘馬’자와 꼬리 ‘尾’자를 써서 마미도로 불리다가 매물도가 됐다는 설과 메밀농사를 많이 지어 매물도라 부른다는 두 가지 설이 있다. 장군봉에서는 선유도·욕지도·사량도가 보이고 날씨가 좋으면 대마도까지 볼 수 있다.

그러나 해품길의 진정한 비경은 장군봉에서 내려가는 길부터다. 인근 소매물도와 등대섬을 바라보면서 초원지대를 지나는 길은 황홀하다. 등대섬 전망대를 거쳐 ‘꼬돌개’로 가는 길에는 사람을 보면 흠칫 놀라 모습을 감추는 야생 염소도 곳곳에 있다.


▎매물도 대항마을에서 민박집을 운영하는 이응식(67·오른쪽), 조정순(58) 부부.
꼬돌개는 원래 1810년쯤 이 섬으로 이주한 정착민들이 살던 마을이 있던 곳이다. 그러나 1825년 연이은 흉년과 전염병으로 정착민 모두가 사망했다고 한다. 당시 사람들이 병으로 ‘꼬돌아졌다(고꾸라졌다)’하여 꼬돌개라는 이름이 붙여졌단다. 이들 정착민이 농사를 지었던 다랭이 논의 흔적이 아직도 남아 있다. 지금은 돌로 쌓은 축대와 잡초만 무성하다. 종착지인 대항마을에서 만난 이응식(67)·조정순(58) 부부는 원래 당금마을에서 태어나 결혼했는데 1남 2녀의 자식교육 때문에 통영에서 20여 년을 살았다고 했다. 8년 전에 다시 대항마을로 돌아와 이곳에서 민박을 하며 산다. 조정순 씨에게 이렇게 멋진 섬에 살고 계셔서 부럽다고 하자 “매일 살아보이소~. 한 번씩 와서 보니까 좋지~”라는 대답이 돌아왔다. 이응식 씨는 “뭍에 살다 섬으로 돌아오니 외로운 것이 가장 힘들다”며 “여름엔 그래도 피서객들이 오는데 겨울에는 사람 그림자도 볼 수 없어 평소엔 적막한데 이 길(해품길) 보러 사람들이 많이 오면 그게 즐거움이다”고 말했다.

바다백리길의 백미 | 소매물도 등대길(6구간·3.1㎞·2시간)


소매물도(小每勿島·면적 51만㎡, 인구 58명) 등대길은 바다백리길의 화룡점정(畵龍點睛)이라 할 수 있다. 소매물도의 등대섬은 TV 광고나 KBS <1박 2일> 프로그램을 통해 알려져 일반인에게도 유명하다. 그래서 백리길 중에서도 가장 인기다.

그러나 등대길에는 ‘천당과 지옥’이 함께 공존한다. 소매물도 망태봉(152m) 전망대에서 등대섬을 바라보면 마치 외국의 섬을 보는 것처럼 이국적인 느낌에 마치 천당에 온 듯 행복하다. 그러나 여기서 1㎞ 정도 가파른 계단을 타고 내려가 등대섬으로 갔다 망태봉까지 되돌아가려면 오르막이 너무 힘들어 마치 지옥처럼 느껴진다. 그런데도 많은 사람들은 망태봉에서 뭔가에 홀린 듯 가파른 길을 하염없이 내려간다. 바다가 두 쪽으로 갈라지는 ‘모세의 기적’을 직접 체험할 수 있는 ‘열목개’가 있어서다.

길은 소매물도 선착장에서 시작된다. 마을 길을 따라 올라가다 보면 왼쪽으로 바다백리길 안내표지판이 보인다. 소매물도 탐방안내센터를 지나 능선을 타고 남매바위로 가는 길은 비밀의 화원처럼 아름다운 숲길이 이어져 걷는 내내 지루하지 않다.


▎소매물도 등대길 초입 부분에 세워진 ‘바다백리길 게이트’.(좌) / 등대섬에서 바라본 소매물도. 소매물도와 등대섬은 평소 바다로 갈려 있으나 하루 2~3시간 물때에 맞춰 길이 70m의 열목개가 열리면 몽돌로 된 길이 드러난다.
남매바위에 얽힌 전설은 애잔하다. 200여 년 전 허씨 부부가 매물도 인근 바다를 지나다 풍랑을 만나 이 섬에 정착했단다. 몇 해가 지나 쌍둥이 남매를 나았는데 둘 중 하나가 명이 짧다고 해서 아들을 위해 딸을 소매물도에 버렸다. 그리고 부부는 아들에게 절대 소매물도로 가지 말라고 했다. 그러나 어느날 아들이 소매물도에서 작은 연기가 피어 오르는 것을 보고 호기심에 건너갔다 아름다운 처녀를 만났는데 바로 자신의 여동생이었다. 그 사실을 몰랐던 남매는 사랑에 빠져 부부가 되고자 했는데 그 순간 하늘에서 벼락이 쳐 두 남매는 커다란 바위로 변했다는 전설이다. 두 개의 바위 중 탐방로와 가까운 것이 오빠바위고 바닷가에 있는 바위가 누이바위다.

남매바위를 지나 걷다 보면 ‘매물도 보이는 곳’이라는 팻말이 나온다. 바다 너머로 매물도가 손에 잡힐 듯 가까이 보인다. 이곳을 지나 지금은 폐교가 된 소매물도 분교까지 1시간 정도 거리다. 섬의 절반 정도를 돈 셈이다. 나무계단을 올라 망태봉 정상에 있는 관세역사관을 지나면 멀리 등대섬이 보인다. 등대섬을 보는 순간 ‘아~’ 하는 탄성이 절로 나온다. 소매물도와 등대섬은 평소에는 바다 때문에 갈라져 있다. 그러나 하루 두 차례 두세 시간 물 때에 맞춰 70m 길이의 열목개가 열리면서 몽돌로 된 길이 드러난다. 연인 사이인 유환우(28)·안지연(27) 씨는 “공룡전망대에서 보이는 등대섬과 열목개의 모습이 너무 아름다워 무작정 내려왔는데 저 길로 다시 올라갈 생각을 하면 벌써부터 걱정”이다며 “그래도 일생에 한번은 꼭 와볼 만한 곳이라고 생각한다”고 말했다.

- 글 위성욱 기자 we@joongang.co.kr / 사진 송봉근 기자 song. bonggeun@joongang.co.kr

201610호 (2016.09.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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