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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포츠 화제] ‘낭만복서’ 홍수환, 링 위의 인생을 말하다 

“진정한 복서는 비극적으로 사라지는 영혼 ” 

글 정영재 스포츠 선임기자 jerry@joongang. co. k / 사진 김현동 기자 kim. hd@joongang. co. kr
77년 파나마의 영웅 카라스키야에게 2회 네 번 다운당하고 3회 역전 KO승 거둔 경기, 어제 일처럼 생생해… 세계적으로 권투는 여전히 돈 되는 스포츠, 가짜 선수 불러다 시합 붙인 한국 복싱의 인기 몰락은 자업자득

▎‘원조 챔피언’ 홍수환의 복싱인생이 조만간 영화로 제작될 예정이다. 홍수환은 “영화를 통해 70년대 사회상을 보여주고 싶다”고 말했다.
홍수환(66) 한국권투위원회(KBC) 회장을 지난 7월 지인의 상가(喪家)에서 만났다. 그는 특유의 달변으로 옛날 얘기들을 풀어놨다. 1974년 남아공 더반에서 아놀드 테일러를 네 번 다운시키고 세계챔피언이 됐을 때 비하인드 스토리, 그리고 1977년 파나마에서 엑토르 카라스키야에게 2회에 네 번 다운당하고 3회 역전 KO승을 거둔 ‘4전5기’ 스토리 등등. 워낙 강렬하게 각인된 장면이지만 당사자로부터 생생한 이야기를 들으니 옛 기억이 또렷하게 떠올랐다.

그는 카라스키야에게 네 번 다운당한 상황을 유쾌한 목소리로 얘기했다. “내가 어릴 적 녹용 같은 걸 많이 먹어서 맷집이 좋거든. 그리고 파나마 오기 전에 하체 훈련을 하도 많이 해서 다운당해도 일어날 수 있었어. 2회 마치고 코너로 돌아가 정신 차리려고 암모니아수를 코로 훅 들이켰어. 그리고 반쯤 취한 상태에서 휘두른 주먹에 상대가 나가떨어진 거지. 크하하.”

국내에 프로복싱이 들어온 지 70년이 됐지만 한국 복싱은 유례없는 침체기에서 빠져나올 기미가 보이지 않는다. 남자 세계챔피언은 한 명도 없고, 올림픽 효자종목이었던 복싱은 리우올림픽에 함상명 혼자 출전했다. 그것도 다른 나라 선수가 출전을 포기하는 바람에 얻은 기회였다.

오랫동안 세계챔피언으로 유명세를 치르다가 이제 한국 프로복싱계를 이끄는 수장을 맡게 된 홍 회장은 이런 현실을 타개하고자 힘을 쏟는다. 그는 “복싱만이 갖는 낭만과 매력을 회복하고, 세계적인 스타 선수를 키워내야 한국 복싱이 살아날 수 있다”고 말했다.

홍 회장과 8월 12일과 29일, 두 차례 다시 만났다. 두 번 다 서울 세종문화회관 옆 빈대떡 가게에서였다. 홍 회장은 이곳에서 빈대떡·파전 안주로 막걸리 한잔하는 게 커다란 낙이라고 했다. 그런데 기가 막힌 타이밍에 카라스키야가 한국에 왔다고 한다. 56세가 된 카라스키야는 현재 파나마의 정치인(국회의원)으로 활동한다. 공공외교 전문기관인 한국국제교류재단(KF)의 초청으로 방한한 카라스키야는 자신이 먼저 ‘수환 홍’을 만나고 싶다고 연락해 왔다.

9월 9일 홍 회장이 운영하는 서울 대치동의 복싱체육관. 두 사람의 재회는 1999년 한 방송 프로그램을 통해 파나마에서 성사된 뒤 17년 만이었다. 카라스키야가 들어오는 순간 홍 회장은 “아미고(스페인어로 ‘친구’)”를 외치며 두 팔을 크게 벌렸다. 만면에 웃음을 머금고 천천히 다가간 카라스키야는 홍 회장을 번쩍 안아 올렸다.

홍 회장은 “경기 전에 눈싸움을 하는데 카라스키야 얼굴이 참 예뻤다. 그만큼 펀치를 안 맞았고 강하다는 뜻”이라며 “카라스키야는 비참하게 졌지만 절망하지 않고, 링보다 더 무서운 인생에서 성공했다”고 덕담을 건넸다. 카라스키야는 국회의원 배지를 빼서 홍 회장에게 달아주며 “내가 국회의원이 될 수 있었다면 수환 홍도 할 수 있다”고 말했다.

복싱은 링 위에서 치열하게 때리고 맞은 두 사람을 친구로 만들어준다. 그게 복싱의 매력이고 낭만이다. 다시 홍수환을 따라 ‘낭만 복싱’의 세계로 떠나보자.


▎9월 9일 서울 대치동 홍수환 스타복싱 체육관에서 홍수환 한국권투위원회(KBC) 회장(왼쪽)과 ‘파나마의 복싱영웅’ 엑토르 카라스키야가 만나 포즈를 취하고 있다.
1974년 7월 4일, 남아공에서 첫 세계챔피언이 됐죠. 아놀드 테일러를 네 번 다운시키고 세계권투협회(WBA) 밴텀급 타이틀을 차지한 거죠?

“난 운이 좋았어. 당시 육군 일병으로 군 복무를 하고 있었는데, 테일러 측에서 만만히 보고 1차 방어 상대로 고른 거야. 남아공 더반까지 가는 직항편이 없어서 도쿄-홍콩-스리랑카-세일추일스-요하네스버그를 거치며 비행기를 6번이나 갈아 탔어. 챔피언이 백인이고 나보다 키가 크다는 정도밖에 몰랐지.”

“백인놈 이겨달라면서 매일 랍스터 먹여줘”


▎홍수환이 카라스키야에 KO승을 거둔 뒤 환호하는 동포들에게 둘러싸여 있다.
현지에서 재미있는 일이 많았다면서요?

“경기 10일 전에 도착해 더반의 팜비치 호텔에 묵었어. 남아공에 인종차별이 극심할 때잖아. 인도 쪽에서 온 까무잡잡한 사람들이 호텔 식당에서 일하면서 차별을 심하게 당했나 봐. ‘백인놈 꼭 좀 이겨달라’면서 밤마다 내 팔뚝 두 배만 한 랍스터에다 각종 고기를 갖다 주는 거야. 그걸 먹으니 힘이 펄펄 솟고 빨리 시합을 해서 상대를 때려눕히고 싶더라니까. 그게 바로 ‘킬러스 인스팅트(Killer’s instinct·킬러 본능)’였던 것 같아.”

그곳에 한국 응원단도 있었다죠?

“링 위로 올라가고 있는데 라스팔마스 기지를 중심으로 조업하던 우리 원양어선 선원들이 태극기를 흔들면서 애국가를 부르더라고. 이역만리에서 그걸 보는 순간 가슴이 찡했지. 트레이너인 김준호 선생님한테 ‘선생님, 제가 죽더라도 타월(기권을 의미)은 던지지 마세요’ 했더니 선생님이 ‘야 인마, 네가 이겨. 턱만 들지 마’ 그러시더라고. 그 말 듣고 공 울리자마자 고개 숙이고 돌진했지. 마구 주먹을 휘두르는데 상대가 없어진 거야. 다운된 거지. 우리라고 다 보고 때리냐? 하하.” 홍수환은 아놀드 테일러를 1, 5, 14, 15회 한 차례씩 다운시킨 끝에 심판 전원일치 판정승을 거둔다. 한국시간으로 오전 7시가 조금 지날 무렵이었다. 집에서, 출근길에서 라디오 생방송을 듣고 환호하던 사람들의 귀에 홍수환과 어머니 황농선 여사의 대화가 실황으로 꽂힌다. “엄마 나 참피온 먹었어.” “그래 대한국민 만세다.”

그때 어머니와의 통화 내용이 건국 이후 가장 감동적이고 생생한 모자(母子)간의 대화가 아니었나 싶습니다.

“갑자기 라이브 연결이 된 엄마가 당황해서 ‘대한민국 만세다’ 할 걸 ‘대한국민 만세다’ 한 거야. 유신반대 데모가 한창일 때라 정국이 뒤숭숭했어. 근데 ‘대한민국’이 아니라 ‘대한국민’이라고 하니까 여당이든 야당이든, 학생이든 군인이든 모두 환호한 거야. 육군 일등병과 엄마의 대화가 대한민국을 하나로 만들어줬고, 홍수환을 더욱 빛나게 한 거지. 귀국해서 박정희 대통령이 내준 차를 타고 엄마와 내가 함께 카퍼레이드를 했어.”

당시 라디오로 실황 중계를 듣고 TV로는 일주일 정도 뒤에 본 것 같은데요.

“그때 TV 중계가 없었어. 기록영화용 35㎜ 필름으로 찍은 게 있었는데 그걸 홍콩 가서 베타 방식으로 바꾼 뒤에 MBC에서 방영한 거야. 당시에 MBC가 광고 많이 따서 돈 좀 벌었다고 하더라고.”

20여 년 뒤에 더반에 다시 가셨다면서요?

“1995년에 남아공에 갈 일이 있어서 더반의 팜비치 호텔을 찾아갔어. 와, 근데 호텔이 너무 좁고 초라한 거야. 내가 여기서 열흘간 먹고 자고 샤워하면서 챔피언 됐나 싶더라고. 와이프는 여기선 못 잔다면서 도망갔지. 우리나라가 그 새 많이 발전했구나 싶었어. 참, 아놀드 테일러는 나한테 지고 몇 년 더 선수생활을 했는데 1981년 오토바이 사고로 죽었다더군.”

“일본 선수, 일부러 KO 안 시키고 계속 두들겨줬다”


▎78년 2월 1일 WBA 주니어 페더급 챔피언 홍수환이 도전자인 일본의 가사하라 류를 꺾은 뒤 공항 입국장에서 어머니 황농선 여사에게서 꽃다발을 받고 있다.
홍수환의 친가는 평안북도 신의주다. 할아버지가 당시 선교사로부터 기독교를 받아들였고, 이후 가족 모두가 기독교 신앙에 의지하게 된다. 홍수환의 동생 홍수철은 ‘철없던 사랑’이라는 노래로 한때 잘나가던 가수였는데 지금은 목사가 됐다.

홍수환의 아버지는 월남 후 강원도의 광산을 일으켜 큰돈을 벌었다고 한다. 홍수환은 서울 장충체육관 인근 신광교회터에서 태어났다. 어머니 황농선 여사는 “너는 이상하게도 뭘 해도 된다. 교회에서 태어나서 그런가 보다”고 늘 얘기했다고 한다. 홍수환은 종로구 내수동에서 자라 사립 명문 중앙중·고를 나왔다. 중학교 때까지 야구선수를 했고, 고교 때 복싱으로 방향을 틀었는데 아버지의 영향이 컸다.

홍수환의 아버지는 광적일 정도로 복싱에 집착했다고 한다. 홍 회장의 회고다. “초등학교 때로 기억하는데(1961년 8월 19일이다), 서울운동장 정구장 특설링에서 웰터급 유망주 최익수와 일본의 마에미조가 논타이틀전을 했어. 최익수가 원사이드하게 이길 거라고 했는데 2회에 한 방 맞고 KO로 진 거야. 아버지가 충격을 받아 일어나시지 못해. ‘아빠 끝났어, 가자, 가자’고 졸랐는데도 사람들이 다 빠져나간 뒤까지 자리에서 안 일어나시더라고.”


▎서울시내의 한 육교 위에 걸린 홍수환의 승리를 축하하는 현수막.
아버지는 우리나라 선수가, 그것도 일본 선수한테 KO로 진 현실을 도무지 받아들이지 못했던 것이다. 어린 홍수환은 나중에야 그 이유를 알았다고 한다. “할아버지가 일제강점기 때 일본 순사한테 맞아 죽었다고 하더라고. 할머니가 서른넷에 혼자 되셔서 아이들을 키웠다고 해. 그래서 난 일본 선수하고 13번 붙어서 모두 이겼어. KO 시킬 수 있는 것도 일부러 안 시키고 세워 놓고 엄청 팼지. 지금 생각하면 좀 미안하기도 해. 허허.”

어릴 적부터 몸이 빠르고 머리도 좋았던 홍수환이 운동에 올인하자 아버지는 아들을 위해 녹용·뱀탕 등 몸에 좋다는 건 뭐든지 먹였다. 홍 회장은 “내가 맷집과 스태미나가 뛰어난 건 어려서 몸에 좋은 걸 많이 먹은 덕분”이라고 했다. 그랬던 아버지가 심장마비로 세상을 등지면서 홍수환의 가세는 급속히 기울게 된다. 어머니는 미군 부대에서 식당을 운영하며 가족을 부양했다. 경기도 평택의 미군부대에도 어머니가 운영하는 식당(스낵바)이 있었다. 당시 평택에서 훈련받은 카투사(주한미군 배속 한국군) 중에서 황농선 씨가 끓여준 라면을 안 먹어본 사람이 없었다고 한다.

홍수환은 1966년 장충체육관에서 김기수가 니노 벤베누티를 누르고 첫 세계챔피언이 되는 걸 보며 ‘챔프’의 꿈을 꾸게 된다. 김기수를 얼마나 좋아했던지 그가 운동을 끝내고 목욕탕을 갈 때도 따라갔다고 한다. “지금 명동 명보극장 골목으로 들어가면 목욕탕이 하나 있었어. 내가 거기까지 쫓아갔다니까. 처음 6회전 시합 뛸 때 기수 형님이 장충체육관에 오셔서 ‘저 녀석 목욕탕까지 쫓아왔던 친구야. 앞으로 크게 될 거야’라고 하셨어. 김기수 이후 8년 만에 내가 세계챔피언대를 이었지.”

홍 회장은 첫 부인(이진희 씨)을 만난 얘기도 들려줬다. 1971년 괌에서 경기가 있었다. 상대를 다운시켰는데 레프리(referee)가 카운트를 느릿느릿 세는 바람에 KO로 이길 걸 판정으로 져버렸다. 열도 받고 복싱도 하기 싫어 하와이행 비행기를 탔다. 어머니와 잘 아는 분이 하와이에서 식당을 한다고 해서 주소를 받아온 게 있었다. 그곳에서 한동안 허드렛일을 하며 지냈다. 어떻게 알았는지 어머니가 전화를 해 “수환아, 개수작 떨지 말고 빨리 오라우”라고 하셨다. 다시 서울로 돌아온 뒤 그 하와이 식당 주인의 딸과 사랑에 빠졌다. 진희 씨가 고등학교를 졸업하자마자 결혼식을 올렸다. 남아공 더반에서 챔피언이 되기 4개월 전이었다.

첫 부인과의 사이에 2남2녀를 뒀다. 그러던 중 홍수환의 인생에 ‘옥희’라는 여인이 나타난다. 당시 <주간경향>의 ‘팬과 함께’에서 사진을 찍은 게 인연이 됐다. ‘팬과 함께’는 잘 나가는 스포츠 스타와 팬이 함께 찍은 사진을 올리는 코너였다. 옥희는 풍부한 성량으로 히트곡을 만들어 내던 가요계의 샛별이었다. 무엇보다 홍수환이 옥희를 무척 좋아했다고 한다. 홍 회장의 회고다. “나한텐 옥희밖에 없었어. 당시에 정윤희·장미희·유지인이 ‘여배우 트로이카’였는데 내 눈에 들어오지도 않았어. 그러니까 옥희가 최후의 승자였지.”

‘홍수환-옥희 스캔들’로 이름 붙은 스토리는 한동안 장안의 화제였다. ‘첫 부인과 이혼-옥희와 결혼-옥희 구타사건-옥희와 이혼-옥희와 재결합’이 파노라마처럼 흘러 지나갔다. 지금은 옥희 씨에게 완전히 잡혀 산다. 첫 부인과의 사이에서 낳은 자녀들과도 자주 연락하며 지낸다. 한 번은 아들이 동네에서 흠씬 두들겨 맞고 들어온 적이 있었다고 한다. 아들을 때린 아이 집에 찾아갔지만 차마 어떻게 할 수 없었다면서 그가 명언을 덧붙였다. “참피온이 무슨 뜻인 줄 알아? 참을 줄 알고, 피할 줄 알고, 온순해야 참피온이라는 뜻이야.”

홍수환의 프로 통산 전적은 50전 41승(14KO) 4무 5패다. 홍수환에게 유일하게 두 차례 패배, 그것도 KO패를 안긴 선수가 ‘멕시코의 강타자’ 알폰소 자모라다.

두 선수가 처음 맞붙은 건 1975년 3월 14일 미국 LA에서였다. WBA 밴텀급 2차 방어전이었다. 당시 홍수환은 복싱 인생에서 가장 많은 파이트머니(8만 달러)를 받았다. 홍수환이 붉은색 왕관을 쓴 사진이 있는데 그게 당시 LA에 사는 흑인이 경기 전에 “당신이 진정한 챔피언”이라며 선물한 것이다.

자모라는 거의 대부분의 경기를 KO로 이길 정도로 강펀치를 자랑했지만 홍수환은 자모라에게 졌다기보다는 스스로에게 패한 것이었다. 홍수환은 체중 조절에 실패해 3차 계체량까지 했고, 경기 시간이 계속 바뀌면서 컨디션 조절에 애를 먹었다. 설상가상으로 경기 몇 시간 전에 꿀을 두 숟갈 먹었는데 이게 치명적인 독이 됐다. 명현(瞑眩) 현상이 나타난 것이다. 산삼이나 꿀·한약재 같은 걸 과복용하면 일시적인 어지럼증·구토·설사 같은 증세가 나타난다. “그게 확 달아 오르는데 어질어질하고, 거리도 못 맞추겠고, 술 취한 것 같은데 차라리 술이 낫지. 정말 못 견디겠더라고.” 홍수환은 4회 KO패로 허무하게 타이틀을 빼앗기고 만다.

1976년 10월, 인천 선인체육관에서 홍수환과 자모라의 리턴매치가 열렸다. 두 선수 모두 ‘인생 경기’라 할 만큼 잘 싸웠다. 그런데 심판이 명승부를 망쳐버렸다. 9회 홍수환이 자모라를 코너에 몰아넣고 강타를 퍼붓고 있는데 갑자기 심판이 끼어들어 둘을 확 갈라놓는다. 그리고 12회, 이번에는 자모라가 홍수환을 코너에 몰고 연타를 날리자 심판은 일방적으로 경기를 중단시키고 자모라의 TKO승을 선언해버린다.

“선수들 맷값·핏값 착복하는 파렴치한 아냐”


▎76년 10월 홍수환과 자모라의 리턴매치를 알리는 포스터. / 사진·중앙포토
홍 회장은 지금도 그 경기가 가장 아쉽다고 했다. “옥타비오 메이란, 그 심판이 장난을 쳤어. 그 친구가 홍수환을 죽였고, 타이슨을 죽였어. 1990년 도쿄돔에서 열린 마이크 타이슨과 제임스 더글라스 경기 주심이 메이란이었어. 8회 타이슨이 KO로 끝낼 수 있었는데 심판이 카운트를 엿가락처럼 늘여서 센 거야. 그 바람에 더글라스가 살아났고, 타이슨은 10회 KO로 졌지. 그 다음해 타이슨이 미인대회 출신 흑인 소녀를 강간해 3년간 감옥 신세 진 거잖아.”

홍 회장은 1988년 멕시코에서 열린 세계권투평의회(WBC) 총회장에서 자모라와 재회했다고 한다. 자모라가 너무 좋아하더라고 한다. 홍 회장은 “카라스키야나 자모라는 나한테 ‘멍든 친구들’”이라고 했다.

<월간중앙>은 8월 12일에 이어 29일에 홍 회장을 또다시 만났다. 그런데 그 사이에 썩 유쾌하지 않은 소식이 있었다. 한국권투위원회(KBC) 비상대책위원회가 홍수환 회장의 퇴진을 요구하며 8월 24일 기자회견을 연 것이다. 전 세계챔피언 김태식 씨가 위원장을 맡고 있는 비대위 측은 “홍 회장의 전횡과 비리로 인해 권투계가 사분오열됐고, 선수들은 대전료와 건보료 등을 제대로 지급받지 못했다. 홍 회장을 횡령 등의 혐의로 고발하겠다”고 밝혔다.

올해는 프로권투가 시작된 지 70년을 맞은 해다. 그러나 현재 권투계는 70년 전통을 자랑하는 KBC와 2002년 설립된 한국프로복싱협회(KPBF)가 있고, 지난 2014년 KBC에서 한국권투협회(KBA), 한국권투연맹(KBF)이 떨어져 나가 네 단체가 난립 양상을 보이고 있다.

홍 회장은 소송 얘기가 나오자 격앙된 표정에 목소리가 높아졌다. “선수들 맷값·핏값 떼먹은 홍수환이 그만두라고 했다지? 내가 원래 팔자가 센 놈이긴 하지만 어떻게 이런 일이 있을 수 있어. 내 주머니돈에다 특강 강의료 받은 것까지 다 써가면서 이끌어왔는데 내가 죽일 놈이 됐더구만.”

비대위 주장이 근거가 없는 건가요?

“한국권투위원회 회장 홍수환이가 버젓이 살아서 활동하고 있는데 무슨 비대위야. 한국 권투가 싹 망했을 때 ‘회장님이 지금 안 나서시면 한국 권투 죽습니다’ 하면서 맡아달라고 하던 사람들이야. 내 사비 들여서 왕십리에 사무실 운영하고, 직원들 월급 주고, 없어질 뻔한 신인왕전 살려내고 그랬는데. 이사들이라고 10원짜리 한 장 안 내던 사람들이 지금 와서 뒤통수를 치네.”

왜 이런 일이 생겼다고 보십니까?

“비영리단체인 사단법인 한국권투위원회는 인정료로만 운영이 돼요. 선수 라이선스, 매니저·프로모터 라이선스 이런 인정료 말이지. 그런데 똑같은 사업목적을 가진 단체를 4군데나 허가해줬으니 1000원 들어올 게 250원밖에 안 들어온단 말이야. 원 컨트리 원 커미션(One Country One Commision)이라는 대표성이 무너지니 이런 일이 생긴 거지.”

KBC 회장직은 유지할 건가요?

“내가 이 진흙탕에 뛰어든 건 오로지 한국 복싱을 살리려는 마음에서였어. 그리고 한국 복싱이 재기하려면 KBC를 중심으로 권투인들이 하나 되는 길밖에 없다고 믿고 있어. 홍수환 회장 있을 때 한국 복싱 부활의 전기를 만들어야지 그거 지나가면 영원히 힘들 거라는 사람들이 많아. 나는 물러나더라도 KBC를 다시 반석 위에 올려 놓고, 이분이라면 이끌어 갈 만하다고 자타가 공인할 만한 분을 모셔야지. 내가 제일 가슴 아픈 게 선수들 맷값·핏값 내가 착복했다는 거야. 이게 가슴을 찢는 거야. 먹을거리라도 만들어놓고 흔들든지 쫓아 내든지 해야지. 세계챔피언 하나도 없고, 흥행거리도 없는데, 박박 긁어야 보리쌀 한 됫박도 안 나오는데….”

“헝그리 정신보다는 프로 정신이 더 중요해”


▎홍수환이 76년 10월 인천 선인체육관에서 열린 자모라와의 리턴매치에서 다운을 당하고 있다.
프로복싱도 대한체육회 안으로 들어가야 한다는 주장을 하셨는데요.

“프로복싱은 스포츠 아닌가? 아마추어보다 국위선양을 더 한 게 프로복싱이야. 똑같은 복싱인데 러닝셔츠 입고 하고 벗고 하는 차이뿐이야. 축구도 대한축구협회 통해 프로축구에 지원하잖아. 프로골퍼 박인비도 올림픽 출전해 금메달 땄잖아. 대한체육회와 국민생활체육회가 통합되는 이번 기회에 우리는 아예 생활체육으로 들어가겠다는 거야. 그럼 대한체육회 소속이 되잖아. 우리도 대한체육회 안에 들어가 최소한의 국가 지원을 받겠다는 거지.”

프로복싱의 인기가 예전 같지 않다는 말들이 나온 지 오래됐다. 더 자극적이고 폭력적인 걸 원하는 사람들은 UFC 같은 종합격투기로 건너갔고, 부드러운 걸 원하는 사람들은 다이어트 복싱이나 샌드백 좀 두들기는 ‘생활 복싱’에 만족한다. 복싱의 전성기는 끝난 것일까?

복싱이 예전 같은 인기를 되찾을 수 있을까요?

“세계에서 제일 돈이 센 스포츠가 프로복싱이야. 작년 ‘세기의 대결’에서 파퀴아오가 1100억원, 메이웨더가 1600억원 받았잖아. 만약 1회 KO로 끝났으면 3분 안 돼서 2700억원이 왔다갔다하는 놀이야. 타이거 우즈가 1년 내내 대회 나가서 공 안 맞아 클럽 던지고 난리 쳐야 1000억원 벌잖아. F1 1년 내내 우승해야 800억원이야. 스포츠 유료채널도 복싱이 제일 비싸. 우리나라만 복싱이 죽은 거야.”

그런데 왜 한국만 이럴까요?

“프로가 돈이 안 되니까. 아마추어에서 잘하는 선수가 프로로 건너와야 할 거 아냐. 근데 안 와. 전국체전 우승하면 지자체에서 6000만~7000만원 나와. 이번에 충남 청양에 아마추어 대회 가서 보니까 선수들이 시합을 나눠서 나와. 나보다 잘하는 선수가 있으면 피해서 다른 시합을 가. 그렇게 경쟁력이 없어지니까 올림픽 못 나가는 거잖아.”

먹고살 만하니까 헝그리 정신이 없어진 건가요?

“이제는 복싱이 더 이상 헝그리 스포츠가 아니야. 요즘 4회전 뛰면 40만원 줍디다. ‘겨우 그거?’ 하겠지만 일본도 4만 엔(약 40만원)밖에 안 줘. 그런데 6, 8, 10회전으로 올라갈수록 파이트머니가 확 달라져. 바뀌는 기준이 뭐냐, 선수가 얼마나 열심히 하고 멋진 경기를 보여주느냐지. 난 ‘누굴 제일 존경합니까’라는 질문에 ‘4회전 뛰는 후배선수’라고 말해. 그냥 4회전 선수가 아니라 ‘지금 40만원 받지만 앞으로 40억짜리가 될 거다’는 각오와 꿈을 갖고 뛰는 선수를 존경한다는 뜻이지. 내 첫 파이트머니는 4회전 4000원이었어. 내가 8만 달러짜리 선수가 될 줄 알았어? 헝그리 정신보다는 프로 정신이 더 중요해.”

왜 한국 복싱이 망가졌을까요?

“자업자득이지. 잘나갈 때 가짜 선수나 형편없는 애들 불러다 시합 붙이고. 맞지도 않았는데 쓰러져서 안 일어나고. 프로복싱 기구도 우후죽순 생겨나면서 정통성도 없어지고…. 그때 프로야구가 탄생하면서 그쪽으로 다 뺏겼어. 그리고 당대 영웅들 말년이 너무 초라하고 비참해. 폼이 안 나. 권투선수가 젠틀하고 스마트해야지. 권투선수는 경우 없게 산다 하면 누가 권투 하고 싶겠어.”

“홍수환 영화, 70년대 사회상 보여줬으면”


▎<월간중앙>과의 막걸리 토크에서 가슴 깊이 담아뒀던 이야기를 풀어내는 홍수환 회장. 그는 “진정한 복서는 비참하게 쓰러지는 사람”이라고 강조했다.
홍 회장과의 두 차례 ‘막걸리 토크’에 빠지지 않고 참여한 사람이 있다. 홍 회장의 스토리를 영화로 만들기 위해 준비하고 있는 장규홍 씨다. 정치부와 경제부를 두루 거친 방송기자 출신 장씨는 우리나라에서 스포츠 관련 데이터와 자료를 가장 많이 보유한 사람이다. 인터뷰 중간중간 그는 휴대폰을 열어 홍수환의 현역 시절 사진을 보여주곤 했다. 홍 회장은 “아니 이런 사진이 있었어?”라며 감탄하고 무릎을 쳤다.

영화 작업은 어느 정도 진행됐나요?

“영화를 만들려면 투자받아야 하는데, 투자처를 이제 알아봐야지. 죽은 김득구를 소재로 한 영화(이계인 주연 <울지 않는 호랑이>), 김기수 영화(<내 주먹을 사라>), 유제두 영화(<눈물젖은 샌드백>) 다 나왔는데 날 주인공으로 한 영화는 아직 없어. 난 제3자를 내세우고 싶어. 다른 사람 줄거리를 내 줄거리로 만들고 싶은 거지. 70년대 사회상을 보여 주고, 남진·이수미 노래도 나오고, 그러다가 홍수환 인생이 저랬구나, 보고 나서 느끼길 바라.”

복싱 영화는 새드 엔딩이 많더라고요.

“인생은 다 슬픈 거 아냐? 스티브 잡스도 그렇고 무하마드 알리도 그렇고. 알리는 38세부터 파킨슨병으로 고생하다 갔잖아. 하워드 코셀이라는 스포츠 코멘테이터가 1970년 오스카 보나베나하고 시합할 때 똑바로 얘기하더라. ‘알리가 이런 시합을 처음 한다. 뭔가 문제가 있는 것 같다.’ 한 대도 안 맞고 피하던 선수가 로프에 몰려 계속 맞아주잖아. 그때 이미 파킨슨병이 끼어들었다는 거야. 헤비급 주먹은 1.5m 높이에서 2t짜리 쇳덩이를 떨어뜨리는 충격이야. 그런 주먹을 계속 맞았으니 뇌에 얼마나 충격을 줬겠어.”

회장님은 건강에 문제 없으세요?

“아직까지는 괜찮아. 건강검진도 안 받아봤어. 김기수 형이 61세에 가셨는데 난 그 형보다 다섯 살 더 살았고, 지금도 이렇게 막걸리 한잔씩 하잖아. 난 아침에 일어나면 늘 기도해. ‘하나님 저 오래만 살게 해주세요. 권투선수라고 다 일찍 죽습니까’라고. 복싱 선후배들 겨울에 쑤시고 일기예보 다 맞히는 사람들 꽤 있어. 난 후유증은 없어. 이제껏 살아온 것도 은혜지.”

진정한 복서는 어떤 사람인가요?

“비참하게 쓰러지는 사람, 비극적으로 사라지는 영혼이지. 왜? 남들 비참하게 만들어 놓고 나는 챔피언 됐잖아. 그래 놓고 나는 편하게 은퇴한다? 그건 사나이답지 않지. 알리도 트레버 버빅한테, 레온 스핑크스한테 처참하게 당했잖아. 마이크 타이슨도 에반더 홀리필드한테 그렇게 허물어졌고. 나도 많이 맞고 비참하게 지기도 했지만 그래도 권투선수가 제일 멋지지 않아?”

자리가 끝나갈 무렵, 저쪽 자리에서 계속 우리를 지켜보던 한 어르신이 다가왔다.

“나 기억 안 나? 동두천에서 침 맞았잖아. 손 아파서.”

“아~, 어르신 잠깐만요. 선생님, 킁킁이 형이라고 아세요? 복싱 코치. 그 형 때문에 선생님한테 갔죠.”

“그래요. 하나도 안 변했네. 나는 청와대 주치의를 오래 했지.”

명함과 전화번호를 교환한 뒤 어르신이 한마디했다. “네 번 다운됐다가 다음 라운드에 KO로 이기는 건 세계에서 당신밖에 없어.”

- 글 정영재 스포츠 선임기자 jerry@joongang. co. kr / 사진 김현동 기자 kim. hd@joongang. co. kr

201610호 (2016.09.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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