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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가, 기자가 되다] ‘삼포세대’의 신(新)연애방정식 

“사랑을 ‘재발명’ 하라” 

이은규 시인
연애가 소멸된 원인은 극도의 경쟁에서 비롯된 이기주의 때문… 누구보다도 치열한 삶을 살고 있는 한국의 청춘은 사랑을 포기한 게 아니라 사랑을 완성하기 위한 마라톤에 나선 것

2016년 한국의 젊은이들은 스스로를 가리켜 사랑을 포기한 세대라 칭한다. 실제로 사랑, 결혼과 담쌓은 청춘이 매년 늘고 있다. 철학자 알랭 바디우는 “인간이라면 사랑은 끝없이 대면해야 할 그 무엇”이라고 말한다. 메말라가는 그들의 사랑을 다시 소생시킬 방법은 없을까?

최근 ‘헬조선(Hell·朝鮮)’이라는 말이 언론에 자주 등장한다. 한국의 옛 명칭인 조선에 지옥이라는 뜻의 접두어 ‘헬(Hell)’을 붙인 합성어로 ‘지옥 같은 한국사회’라는 뜻이다.

우리 사회의 부조리한 모습을 지옥에 비유한 이 신조어에는 신분사회였던 조선처럼 자산이나 소득수준에 따라 신분이 고착화되는 우리 사회의 얼굴이 반영됐다. 부정적인 어감의 신조어는 이뿐만이 아니다. ‘지옥불반도’, ‘망한민국’도 헬조선과 비슷한 뜻으로 사용된다.

이와 관련된 사례를 공유하는 인터넷 커뮤니티도 있다. 이 사이트에는 청년실업, 외모지상주의, 각종 성범죄 등 다양한 주제에 대한 글이 올라온다. 대부분의 글이 우리 사회의 부조리한 모습을 비판하는 내용이다.

여기서 가장 자주 대두되는 문제는 공교롭게도 사랑이다. ‘헬조선에서 사랑을 불가능하다’고 청춘들은 입 모아 말한다. 이 시대의 젊은이들이 사랑을 포기하게 된 이유는 무엇일까?

최근 한 취업포털 사이트에서 20~30대 청년 취업준비생 848명을 대상으로 설문한 결과 응답자의 74%가 ‘취업 준비로 인해 연애를 포기했다’고 답했다. 10명 가운데 7명은 사랑에 문제가 생긴 것이다.

‘취업 준비를 하면서 포기했던 것은 무엇인가?’는 질문에는 ‘휴가 및 여행(21%)’이 1위로 꼽혔다. 이어 ‘친구와의 만남(17%)’, ‘스트레스로 인한 건강(15%)’, ‘즐겨 하는 취미생활 및 동아리 활동(14%)’ 순이었다. 휴식 없는 청춘은 시간이 지날수록 과로라는 원치 않는 결과를 견뎌야 했다. 또한 건강한 활력을 가져다줄 취미를 포기해야만 했다. 기약 없는 취업 준비로 생활고에 시달리는 것은 물론 궁극적으로 자존감마저 위태로워졌다.

사랑의 가능성, 우리 사회의 가능성


▎영화 <내 깡패같은 애인>의 한 장면. 주인공 세진이 취업 실패로 낙담하자 친구 동철은 “우리나라 백수는 자기 탓만 한다. 다 정부가 잘못해서 그런 거니 당당해라”며 위로한다. / 사진·중앙포토
이 시대의 청년에게 삶의 여유는 허락되지 않고 있다. 이들에게 사랑이 사치로 느껴지게 된 것은 어찌 보면 당연한 일일지 모른다. 사랑이라는 단어를 떠올리는 것조차 귀갓길 버스 안에서 주어지는 잠시의 명상 정도로 끝나게 되는 현실. 이제 우리 시대의 청춘은 사랑을 안 하는 것이 아니라, 사랑을 할 수 없는 비정한 현실과 대면하고 있다.

혹자는 사랑이 환상이라고 한다. 현실이 어렵다 한들 사랑이 소멸되지는 않을 거라는 얘기다. 그러나 2016년 한국의 청년세대는 ‘누군가를 사랑하기 어렵다’며 자포자기해버리고 스스로를 가리켜 사랑을 포기한 세대라 칭한다.

시위를 떠난 화살처럼 질문은 시작됐다. 이처럼 현실은 대면하기 어려운 진실을 내포하고 있는 상황에서 탈출구는 없을까? 시인 랭보는 그의 작품 <착란 1>에 다음과 같은 시문(詩文)을 남겼다.

“사랑을 재발명해야 한다.”

그렇다. 사랑이 사라졌다면 새로이 재발명해야 한다. 헬조선, 사방을 향해 힘주어 외쳐본다. 이 시대의 젊은이들에게 사랑을 허(許)하라.

그런 의미에서 2008년 ‘젊은 시의 언어적 감수성과 현실적 확산 능력을 함께 갖췄다’는 평을 받으며 등단한 박준 시인의 시를 살펴볼 필요가 있다.

박 시인은 등단 당시 “촌스럽더라도 작고 소외된 것에 대해 이야기하고 싶다”고 밝혔었다. 특히 그는 우리 사회에서 청년이 유년과 중년 사이에 샌드위치처럼 낀 슬픈 세대일지도 모른다고 평하기도 했다. 그러면서 조금씩 성장하는 청년에 대해 각별한 관심을 나타냈다.

어쩌면 성장이란 삶의 근원적인 슬픔을 깨닫는 것일지도 모른다. 실제로 그의 시에서는 청년이 이런 현실을 받아들이고 그 안에서 마주하는 고통의 순간을 어떻게 대처하는지에 대한 사유로 가득하다.

술잔에 입도 한번 못 대고 당신이 내 앞에 있다 나는 이 많은 술을 왜 혼자 마셔야 하는지 몰라 한다 이렇게 많은 술을 마실 때면 나는 자식을 잃은 내 부모를 버리고 형제가 없는 목사의 딸을 버리고 삼치 같은 생선을 잘 발라먹지 못하는 친구를 버린다 버리고 나서 생각한다// 나는 빈방으로 끌고 들어가는 여백이 고맙다고 청파에는 골목이 많아 가로등도 많고 가로등이 많아 밤도 많다고 조선낫 조선무 조선간장 조선대파처럼 조선이 들어가는 이름치고 만만한 것은 하나 없다고 북방의 굿에는 옷이 들고 남쪽의 굿에는 노래가 든다고// 생각한다 버려도 된다고 생각한다 버리는 것이 잘못된 일이 아니라고 생각한다 버릴 생각만 하는 것도 능사가 아니라는 생각도 한다// 술이 깬다 그래도 당신은 날 버리지 못한다 술이 깨고 나서 처음 바라본 당신의 얼굴이 온통 내 세상 같다

- 박준, ‘당신이라는 세상’ 전문


위의 시는 상실을 고통스러워하는 청춘의 이야기다. 시의 주인공은 후미진 도시의 술집에 이별한 연인의 허상을 그려놓고 ‘잊어버리자, 잊어버리자, 이제 그만 잊어버리자’라며 술을 마신다. 청춘의 도시에는 골목과 가로등이 넘쳐난다.

사실 도시에서 어깨가 축 쳐진 청춘의 귀가는 골목으로 숨어드는 일이기도 하다.

역설적이게도 이미 잊은 자는 다짐하지 않고, 잊어버리자는 다짐은 잊지 못했다는 사실을 환기할 뿐이다. 일어나 집으로 돌아가는 골목 풍경에 위로받고자 하지만 끝내 완전한 위로는 이루어지지 않는다.

술이 깨고 나니 오히려 더 선명해지는 그녀의 얼굴. 그리고 그 얼굴은 도시로 모였다가 흩어진 청춘들의 얼굴일 것이다. 이 지점에서 시편에 밑줄 긋기를 잠시 접어두고 세대론적 층위의 담론을 이어가 보도록 하자. 우리 시대의 청춘을 어떻게 지칭해야 할까?

최근 이곳저곳에서 들려오는 ‘N포세대’는 지난해 우리 시대의 청춘을 지칭해 만들어진 신조어다. 어려운 사회적 상황으로 인해 취업이나 결혼 등을 포기해야 하는 세대를 뜻하는 말이다. 이미 포기한 것보다 앞으로 포기할 게 너무 많아 셀 수도 없다는 뜻도 가지고 있다.

기존 ‘3포세대(연애·결혼·출산 포기)’, ‘5포세대(3포세대+내 집 마련·인간관계)’, ‘7포세대(5포세대+꿈·희망)’에서 한 발 더 나아가 포기해야 할 특정 숫자가 정해지지 않고 여러 가지를 포기해야 하는 세대라는 뜻이다. 어떠한 사회적 구조가 이토록 포기의 포기를 강요하는 것일까?

새삼 ‘분노란 무엇인가?’라는 물음이 떠오른다. 자꾸 포기하기를 강요하는 사회에서 우리는 자연히 분노라는 감정을 느끼게 된다. 실제로 최근 사회학계에서는 분노사회로서의 한국에 대한 분석이 활발하다. 분노를 어떤 방식으로 다스리고 살아야 할지에 대한 방법론도 나오고 있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근본적인 상황을 개선하기에는 역부족으로 보인다. 그렇다고 이런 노력마저 포기한다면 청춘의 미래는 잿빛 그 자체일 것이다. 개인에게 분노의 절제를 요구하는 것은 옳지 않다. 우리 사회 저변에 깔려 있는 분노 양산의 구조적 현실에 대한 보다 냉정한 통찰이 있어야 할 것이다.

“슬픔은 ‘자랑’이 될 수 있다”


▎서울 시내의 한 대학 도서관에서 학생들이 취업준비에 열중이다. 최근 한 사이트에서 20~30대 청년을 대상으로 설문한 결과 응답자의 74%가 ‘취업 준비로 연애를 포기했다’고 답했다. / 사진·중앙포토
한 사회가 분노사회로 작동한다는 것은 이미 그 사회가 공동체로서 해체적 위기를 겪고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사랑은 한 사회의 연대감의 기초이며 본질적으로 미래 세대의 가장 큰 동력과도 연관이 있다. 우리 사회를 위해서도 사랑을 포기할 수 없는 것은 바로 이 때문이다.

사랑은 어떤 사람이나 존재를 몹시 아끼고 귀중히 여기는 마음이다. 연애(戀愛)는 남녀가 서로 그리워하고 사랑함을 뜻한다. 사랑은 감정 그 자체이고, 연애는 관계로써 성립된다.

사랑하고자 하는 마음과 사랑받고자 하는 마음, 이것은 고요한 그러나 강렬한 외침이다. 우연적 필연인 듯 혹은 필연적 우연인 듯 사랑은 언제나 우리 곁에 있어왔고 있어야만 한다.

이상한 뜻이 없는 나의 생계는 간결할 수 있다 오늘 저녁부터 바람이 차가워진다거나 내일은 비가 올 거라 말해주는 사람들을 새로 사귀어야 했다?// 얼굴 한번 본적 없는 이의 자서전을 쓰는 일은 그리 어렵지 않았지만 익숙한 문장들이 손목을 잡고 내 일기로 데려가는 것은 어쩌지 못했다// ‘찬비는 자란 물이끼를 더 자라게 하고 얻어 입은 외투의 색을 흰 속옷에 묻히기도 했다’라고 그 사람의 자서전에 쓰고 나서 ‘아픈 내가 당신의 이름을 지어다가 며칠은 먹었다’는 문장을 내 일기장에 이어 적었다// 우리는 그러지 못했지만 모든 글의 만남은 언제나 아름다워야 한다는 마음이었다

- 박준, ‘당신의 이름을 지어다가 며칠은 먹었다’ 전문


시인은 ‘언제나 아름다워야 하는 마음’에 대해 적고 있다. 세계는 때때로 우리에게 불편함을 제공한다. 살아 있는 이상 개인의 고통은 소멸되지 않는다. 이런 진실을 쉽게 잊진 않겠노라는 시인의 윤리의식은 특유의 진정성 있는 언어로 전유 되어 독자의 가슴에 가는 실금의 파동을 남기고 있다.

어쩌면 사회의 모든 현상 속에는 이 같은 구성원의 마음이 내재되어 있는지도 모른다. 이 시대를 함께 살아가는 이들의 고통과 기억이 공유돼 탄생했을 이 마음에 대해 시인은 다음과 같이 썼다.

철봉에 오래 매달리는 일은/ 이제 자랑이 되지 않는다// 폐가 아픈 일도 이제 자랑이 되지 않는다// 눈이 작은 일도/ 눈물이 많은 일도/ 자랑이 되지 않는다// 하지만 작은 눈에서/ 그 많은 눈물을 흘렸던/ 당신의 슬픔은 아직 자랑이 될 수 있다// 나는 좋지 않은 세상에서/ 당신의 슬픔을 생각한다// 좋지 않은 세상에서/ 당신의 슬픔을 생각하는 것은// 땅이 집을 잃어가고/ 집이 사람을 잃어가는 일처럼/ 아득하다// 나는 이제/ 철봉에 매달리지 않아도/ 이를 악물어야 한다// 이를 악물고/ 당신을 오래 생각하면// 비 마중 나오듯/ 서리서리 모여드는// 당신 눈동자의 맺음새가/ 좋기도 하였다

- 박준, ‘슬픔은 자랑이 될 수 있다’ 전문


여기서 시인은 “슬픔은 자랑이 될 수 있다”고 말하고 있다. 떠올려보면 어릴 적 우리는 ‘철봉에 오래 매달리는 일’을 자랑스럽게 생각했었다. 하지만 어른이 된 현실에서 철봉 오래 매달리기는 더 이상 자랑이 아닐지도 모른다.

또한 섬약한 문인이라면 통과의례와도 같았던 “폐가 아픈 일도/ 이제 자랑”은 아닌 것이 됐다. 이러한 상황에서 “당신의 슬픔은 아직 자랑이 될 수 있다”고 당당히 말하는 젊은 시인. 어쩌면 좋지 않은 세상에서 충만한 것은 당신의 슬픔뿐일지도 모른다.

아마도 “땅이 집을 잃어가고 집이 사람을 잃어가는 일”이 다반사이기 때문일 것이다. 현대인은 매일 아침 “철봉에 매달리지 않아도/ 이를 악물”며 하루를 시작한다. 그럴수록 사랑은 아득하고 아득하기만 할 뿐. 그래서 “이를 악물고/ 당신을 오래 생각하면” 할수록 “당신 눈동자의 맺음새가/ 좋기도 하였”던 것이다.

아껴놓은 슬픔인 듯 아닌 듯 사랑이라는 이름, 사랑은 어쩌면 당신 눈동자의 맺음새까지 헤아리는 마음일 테다. 이처럼 타인에 대한 애정은 사랑에서 출발하고 귀결된다. 누구나 꿈꾸는 것은 나의 마음이 너의 마음과 다르지 않고 우리의 마음이 그들의 마음과 구별되지 않는 시간일 것. 그러나 현실에서의 그 시간은 불가능성으로 인해 일종의 신비 체험과 같이 느껴진다.

이 시대의 사정을 들어주고 기록하는 일은 문학의 특기다. 예술은 사회에 부유하는 마음을 가감 없이 표현한다. 그렇다면 예술은 우리의 현실을 어떻게 기록하고 있을까?

이토록 인간적인 ‘연애의 온도’


▎사랑을 소개한 한 전시회. 최근 이 전시회에 청년 관람객이 대거 몰려 화제가 됐다. 그러나 일부 관람객은 “한국에서 사랑은 불가능하다”고 말한다. / 사진·중앙포토
우리 사회에서 사랑에 대한 고요하고도 강렬한 외침은 문화적 관심도를 통해서도 가늠되고 있다.

지난 4월 서울미술관은 사랑에 대한 기획 전시 <연애의 온도: The Temperature of Love>를 선보여 화제를 모았다. 이곳에서 펼쳐진 예술적 감흥의 공간에서 현 시대의 관람객과 소통이 이뤄졌다.

이렇듯 대중의 감성이 공간으로 전환되자 많은 이가 이 전시회를 방문했다. 주목할 만한 점은 관객의 대부분 젊은이였다는 사실이다. 서울미술관 측에 따르면 이번 전시를 찾은 20~30대 관람객 수는 7만 여명에 달했다. 개관 전시 사상 역대 최다 관람객수 5만 명을 돌파한 것이다.

구체적으로 살펴보면 전시는 크게 세 개의 섹션으로 이뤄졌다. 설렘, 사랑, 이별이 그것이다. 설렘의 온도, 사랑의 시작, 그 떨리는 감정은 37℃다. 행복한 우리가 만들어내는 언제까지나 함께하고 싶은 사랑의 온도는 36.5℃라고 한다. 반면 멀어진 마음, 안타까운 우리가 마주해야 하는 이별의 온도는 35℃다. 이 세 주제에 따라 관람객은 작품과 음악이 들려주는 사랑의 일화와 마주하게 된다.

사람의 적정 체온은 36.5℃이다. 사랑의 시작 단계에서는 37℃까지 오른다. 0.5℃ 높은 온도가 포근하게 느껴지는 것. 설렘을 지나 안정감에 접어든 충만한 사랑의 온도 36.5℃. 바로 이 연애의 온도가 인간의 적정 체온과 동일하다.

끝으로 대면할 수밖에 없는 이별의 온도는 35℃로 적정 체온보다 1.5℃ 낮다. 그러니 춥다. 이토록 인간적인 연애의 온도라니….

우리는 종종 잊는다. 인간이 포유류라는 사실을 말이다. 포유류는 체온을 항상 일정하게 유지해야 하는 정온 동물이다. 때문에 포유류는 체온 유지만 가능하다면 혹독하게 추운 극지방은 물론 햇볕이 뜨겁게 내리쬐는 열대 지방과 사막, 초원 등 거의 모든 지역에서 살 수 있다.

그런데 왜 추운 극지방도 열대 지방도 아닌 비교적 사계절이 뚜렷한 우리나라에서 사랑이 어렵다고 호소하는 이가 이토록 많을까? 왜 마음에 ‘따뜻하다’ 또는 ‘춥다’라는 온도와 관련된 표현을 쓰는 것일까?

최근에 보았던 영화 <이퀄스(Equals)>의 배경은 감정이 통제된 미래사회다. 그 속에서 사랑은 생산성에 해가 되는 불필요한 첨가물 이상도 이하도 아니다. 주인공 사일러스(니콜라스 홀트 분)는 차가운 사회 속에서 니아(크리스틴 스튜어트 분)에게 강렬한 끌림을 느낀다.

사실 감정이 배제된 미래사회가 창의적 시공간은 아니다. 이는 영화 <이퀼리브리엄>에서 펼쳐진 세계관과 비슷하다. <이퀼리브리엄>이 감정의 부재라는 문제를 폭력이라는 매개로 풀어냈다면 <이퀄스>는 사랑이라는 섬세한 장치를 구축하고 있다.

이 영화의 배경은 선진국이다. 인류는 전쟁으로 지구 대부분을 파괴시키고 겨우 피해를 입지 않은 일부 지역에 선진국과 반도국을 남겼다. 선진국은 인간이 살기에 매우 완벽한 환경과 조건을 갖췄다. 지난 전쟁을 일으킨 원인을 인간의 통제되지 않은 감정에 있다고 생각한 이들은 DNA 조작을 통해 인간의 감정을 거세시켰다.

‘감정통제오류(SOS, Switched-On-Syndrome)’ 증상으로 사랑이 유일한 범죄가 되는 숨막히는 사회가 된 것이다. 그곳에서 사람들은 더 이상 먹고 살 것을 걱정하지 않고 각자가 원하는 노동에만 종사하며 살아간다. 특히 수많은 감정 중에 사랑은 가장 격리돼야 할 대상으로 이 영화는 표현한다.

사랑을 범죄시하는 가장 중요한 이유는 바로 그들의 노동에 방해가 되기 때문이다. 영화는 감정을 느끼지 못하는 사일러스가 스토커처럼 사랑에 빠져드는 과정을 통해 사랑이란 감정의 불가항력을 설명한다. 그리고 모든 사랑 영화의 공식대로 사일러스와 니아는 결국 감정의 소용돌이 속에 빠져들고 만다.

사랑이라는 감정이 느껴지면 스스로 병원에 가서 감정을 통제할 수 있는 약을 받아야 한다. 사랑을 숨기면 범죄자가 된다. 하지만 사랑에 빠진 두 주인공은 그러한 이데올로기에 문제를 제기한다.

‘감정통제’ 사회에서도 기적은 있다


▎영화 <이퀄스>의 한 장면. 사랑을 숨기면 범죄자가 되는 세상에서 사랑에 빠진 주인공은 그러한 이데올로기에 문제를 제기한다. / 사진·중앙포토
처음 사랑에 빠져들 때의 혼란도 잠시 자발적으로 병원 치료를 받은 것을 후회할 만큼 두 사람의 나날은 환희로 충만하다. 노동 생산성도 급격하게 상승된다. 그저 문제가 되는 것은 사랑을 범죄시하는 주변 동료다.

영화를 관통하는 지배적 주제가 사랑인 만큼 두 주인공들은 단지 개인적 분투로 사랑을 지켜내고자 한다. 그리고 두 주인공은 이 체제 반항적인 사랑을 절제된 표정으로 백색의 스크린에 담아낸다.

현기증에 가까운 백색의 시공간에서 붉은 사랑이 흔들리며 피어나는 것이다. 동료의 눈을 피해 아슬아슬하게 서로에게 밀착되는 그들의 모습은 금지된 사랑에 빠진 모든 커플을 연상시킨다. 사랑을 구속하는 무자비한 사회를 피해 용감하게 난관을 헤쳐나가는 그들, 그 끝은 어떠한 방향으로 귀결될까. 과연 사랑의 재발명은 완성될 수 있을까?

사랑은 끝없이 대면해야 할 그 무엇이다. 프랑스 철학자 알랭 바디우는 ‘사랑한다’는 것은 온갖 고독을 넘어 세계로부터 존재에 생명력을 불어넣을 수 있는 모든 것과 더불어 포획되는 것이라고 말한다.

이러한 관점에서 헬조선과 N포세대, 그리고 전시 <연애의 온도>와 영화 <이퀄스>는 서로가 서로를 이해할 수 있는 키워드로 작동한다. 이 키워드는 거대한 그물을 형성하며 하나의 시공간을 구축한다. 이 시공간 안에서 삶의 여러 국면이 그려질 것이다.

알랭 바디우는 사랑의 적은 경쟁자가 아니라 바로 이기주의라고 말한다. 노구의 철학자는 사랑의 절차라는 것이 주체적인 삶의 가장 고통스러운 경험 가운데 하나며, 이러한 사실을 반드시 인식해야 한다고 말하고 있다.

결론적으로 현실을 초월하기 위한 핵심적인 제안은 첫머리에서 질문했던 랭보의 주문에 따르는 것일 테다. 즉 사랑을 포기하지 말고 ‘재발명하자’는 것이다. 사랑은 체제나 법으로 환원될 수 없다. 알랭 바디우는 사랑에 대해 다음과 같이 조언했다.

“사랑에는 기적만 있는 것이 아니라 주된 책임도 있다.”

사랑은 늘 움직여야 하며, 보살펴야 하고, 자신이나 타자와 함께 결집돼야 유지 가능하다. 생각하고, 행동하고, 변화시켜야만 하는 것. 그럴 때 힘들여 노력한 일의 내재적 보상으로 행복이 존재하게 된다는 문장에 밑줄을 치자.

시위를 떠난 화살처럼 질문은 완성됐다. 그런 의미에서 우리 사회, 고군분투하는 청춘들은 이미 사랑을 재발명하는 중이다.

이은규 - 1978년 서울 출생. 한양대 대학원에서 국어국문학 박사학위를 취득했다. 2006년 <국제신문>, 2008년〈동아일보〉신춘문예 시 부문에서 당선됐다. 2012년 시집 <다정한 호칭>을 펴냈다. 이 시집에는 사라진 것과 지나간 것에 대한 연민과 오늘날 청춘에 대한 시 ‘바람의 지문’, ‘아름다운 약관’, ‘바늘구멍 사진기’, ‘아침 꽃을 저녁에 줍다’, ‘역방향으로 흐르는 책’ 등이 수록됐다.

201610호 (2016.09.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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