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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석주의 인류의 ‘등대(燈臺)’를 찾아서(9)] 세계 IT산업의 ‘영웅(英雄)’ 스티브 잡스 

“다르게 생각하라. 세상이 바뀐다!” 

장석주 전업작가
친부모에게 버림받은 고아에서 선불교에 빠진 괴짜 청년으로 성장… 특별한 환경에서 비롯된 창조적 직관의 힘으로 21세기 정보의 패러다임을 바꾸다

인간의 가치는 그의 선택과 의지, 업적의 총합을 통해 가늠할 수 있다. 우리는 왜 백범 김구, 안중근 의사, 마더 테레사 수녀의 삶을 흠모하고 높이 떠받들까? 이들의 가치관이 도덕적으로 훌륭한 동시에 빼어난 선택을 보여줬으며 결과적으로 나타난 업적 또한 비범한 까닭이다.

여기 한 사람이 있다. 어린 시절 가난한 집에 입양됐고 대학은 중퇴했다. 보잘것없는 신분이었으나 ‘IT산업의 영웅’이라는 아이콘을 얻었다. 사업에서 언제나 과감한 지도력을 보여줬으며 뛰어난 영감을 가졌으되 종잡을 수 없는 사람이었다.

불교의 선(禪)과 테크놀로지에 대한 이해가 깊었던 그는 현실주의적 자세로 일했다. 내면 깊은 곳에는 몽상가적 기질을 품고 있었다. 대단한 것을 발명하지는 않았지만 자기만의 독특한 규칙을 고집하는 보스였다.

우리 삶의 방식을 혁신적으로 바꿔낸 사람. 새파랗게 젊은 나이에 허름한 집 차고에서 시작한 작은 사업을 세계 최고의 기업으로 성장시킨 신화의 주인공! 바로 미국의 IT기업 ‘애플’ 사(社)의 대표 스티브 잡스(1955~2011)다.

1985년 2월 잡스는 서른 번째 생일을 맞았다. 그는 샌프란시스코 세인트프랜시스 호텔 연회장을 빌려 손님 1000명을 초대해 파티를 벌였다. 이중에는 소프트웨어 업계의 거물인 빌 게이츠도 있었다.

유명가수 밥 딜런도 초빙됐으나 그가 불응하는 바람에 재즈 가수 엘라 피츠제럴드가 대신해 노래를 불렀다. 이날 초대된 사람은 가벼운 음식과 술을 즐기며 샌프란시스코 교향악단이 연주하는 왈츠에 맞춰 흥겨운 춤을 췄다.

미국의 유명 성인잡지 <플레이보이>는 그 생일에 맞춰 잡스와의 인터뷰 기사를 실었다. 잡스는 이 인터뷰에서 “예술가로서 창의적인 방식으로 살고 싶다면 너무 자주 뒤돌아보면 안된다. 그동안 무엇을 해왔든 어떤 사람이었든 다 버릴 각오가 돼 있어야 한다”고 말했다.


▎미국의 한 ‘애플’ 매장에 스티브 잡스를 추모하는 메모가 빼곡히 붙어 있다. 세계 IT계를 주름잡던 잡스가 2011년 췌장암으로 사망하자 미국 전역에서 추모 물결이 이어졌다. / 사진·중앙포토
괴짜와 천재 사이에서


▎1984년 매킨토시 PC를 안고 있는 청년 잡스. 매킨토시는 도스 명령어 대신 아이콘·메뉴·마우스를 적용해 사용하기 쉽게 만든 혁신적인 PC였다. / 사진·중앙포토
이 뛰어난 직관력을 가진 젊은이는 자신의 인생이 변화의 격동을 타고 나가 게 될 것임을 이미 오래전부터 알고 있었다. 잡스는 출생 직후 친부모로부터 버림받아 자녀가 없던 폴 잡스 부부에게 입양됐다.

아버지 폴 잡스는 중고차를 수리해 판매하는 일을 하는 평범한 소시민이었다. 그는 틈날 때마다 자신의 새 아들에게 자동차의 세부 설계와 기술을 가르치려 했다. 잡스는 커다란 흥미를 보이지 않았으나 부자 사이는 좋은 편이었다.

당시 잡스의 정체성 안에는 “버림받음, 선택받음, 그래서 특별함”이라는 세 가지 요소가 기묘한 균형을 이룬 채 자리 잡고 있었다.

초등학교에 입학한 어린 잡스는 크고 작은 말썽을 피우는 장난꾸러기로 자라났다. 어느 날 잡스는 장난이 지나쳤다는 이유로 담당교사에 의해 집으로 돌려보내졌다. 이때 아버지 폴 잡스는 “이봐요, 우리 아이는 잘못이 없습니다”라고 교사에게 항변하며 아들을 감쌌다.

양부모는 일요일마다 루터교 교회에 참석했다. 아들 잡스가 종교적인 가르침에 따라 자라기를 바랐기 때문이다. 그러나 잡스는 열세 살이 되자 교회에 나가는 일을 스스로 그만뒀다.

아버지 폴 잡스는 넉넉한 살림이 아니었지만 “아들을 반드시 대학에 보내겠다”고 신에게 서약했다. 약속을 지키고자 제일을 성실하게 하면서 저축한 결과 잡스가 고등학교를 졸업할 무렵 대학 입학금을 댈 수 있을 정도로 돈이 모아졌다.

그러나 잡스는 대학에 가지 않겠다고 고집을 부렸다. 양부모의 설득 끝에 오리건 주 포틀랜드에 있는 리드대학교에 진학했다. 이 대학교는 미국에서 학비가 가장 비싸기로 소문난 곳이었다.

1972년 가을 리드대학교 입학식. 잡스는 자신을 포틀랜드까지 데려다준 양부모에게 제대로 된 작별인사조차 하지 않았다. 뿐만 아니라 남들 눈에 자신이 마치 고아처럼 보이길 바라듯이 행동하기도 했다.

훗날 잡스는 이날을 인생에서 가장 부끄럽게 기억하는 순간 중 하나로 꼽았다. “너무 무심한 태도로 부모님께 상처를 드렸어요. 그러지 말았어야 했습니다.”

대학교 신입생이 된 잡스는 얼마 되지 않아 선(禪)과 유명가수 밥 딜런, 그리고 마약에 심취했다. 습관처럼 도서관에서 선에 관한 책을 찾아 읽고 명상에 열중했다.

이 무렵 그는 선불교에도 깊이 빠져들었다. 선불교에 대한 심취는 젊은 시절 한때의 취미가 아니었다. 선불교의 수행을 통해 얻은 미니멀리즘적 미학과 강렬한 집중은 그의 일생에 걸쳐 나타났다.

잡스는 늘 맨발로 다녔고 눈이 올 때만 가벼운 신발을 신었다. 빈 병을 모아 반납해 푼돈을 챙겼고 일요일에는 공짜 점심을 먹기 위해 크리슈나교 사원까지 걷는 걸 마다하지 않았다.

이 보헤미안 청년은 선불교와 채식주의, 명상과 영성, 환각과 록음악, 마약으로 물든 채 타인의 시선에는 괴짜로 비칠 수밖에 없는 독특한 기질과 영혼을 자아내고 있었다.

스티브 잡스가 윤리적으로 합당한 사람이었다고 단정하기는 어렵다. 그는 매우 복잡한 내면적 도덕의식을 가진 사람이었다. 남의 눈에는 비정상으로 비칠 만큼 괴팍스러운 데가 있었다. 언제나 괴짜에 모순투성이였던 그는 말 그대로 유별난 인물이었다.

그럼에도 그가 매력적인 데는 분명 그의 철학 때문일 것이다. 대학시절 선불교에 심취했던 개인적 배경과 당시 1960년대 미국을 휩쓴 히피의 자유정신, 그리고 남다른 인문학적 통찰이 잡스의 사상을 만들었다.

평소 동양의 선 수행을 통해 단련한 집중력은 단순함에 극단적으로 애착을 갖는 성향으로 이어졌다. 그것은 그의 ‘미니멀리즘에 기반한 미의식’으로 고착됐고 이는 곧 ‘애플’사의 전 제품에 스며들었다.

전기작가 월터 아이작슨은 잡스에 대해 “그는 많은 것을 발명하지 않았지만 새로운 미래를 여는 방식으로서의 아이디어에 예술과 기술을 통합하는 데는 달인이었다”라고 평가했다.

대학시절 선불교와 마약에 심취하다


▎영화 <잡스>의 한 장면. 잡스는 대학시절 선불교에 빠졌다. 그의 독실한 선수행은 ‘미니멀리즘에 기반한 미의식’을 낳았고 이는 ‘애플’사의 제품에도 스며들었다. / 사진·중앙포토
그의 저서 <스티브잡스>에 의하면 잡스는 일반적인 윤리의 잣대로는 분명 악행으로 분류될 수 있는 반사회적 행동을 즐겨 했다. 때문에 그와 함께 일하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었다.

일례로 그는 사람을 이분법으로 분류하고 그에 따라 대접을 극단적으로 달리했다. 한때 잡스와 함께 디자이너로 일했던 빌 앳킨슨은 이렇게 회고했다.

“잡스와 함께 일하는 건 만만치 않았다. 그가 세상에는 ‘신’과 ‘골 빈 놈’만 있다는 양극화된 시각을 가졌기 때문이다. 잡스 입장에서 ‘신’에 속하는 사람은 무슨 일을 해도 괜찮았다. 잡스가 이들을 받들어 모셨기 때문이다.

그러나 나를 비롯해 ‘신’ 대접을 받던 이들은 우리가 그저 인간일 뿐이라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때로는 엔지니어링과 관련해 잘못된 결정을 내릴 수도 있다는 것을 말이다. 그래서 추앙받는 위치에서 쫓겨날까 봐 항상 두려워했다.

반면 ‘골 빈 놈’에 속할 경우 제아무리 뛰어난 엔지니어라 해도 잡스에게 인정받기 어렵다고 느낄 수밖에 없었다. 현재보다 더 나은 위치에 오를 방법이 없어진 것과 마찬가지였다.”

이렇듯 잡스가 항상 옳은 선택을 한 것은 아니었다. 그러나 이상하게도 그의 동료는 조건 없이 결정에 따랐다. 이를 두고 혹자는 잡스의 ‘왜곡(歪曲)’현상이라고 불렀다. 잡스의 왜곡에 걸려든 이들은 마치 최면에 걸린 듯 그에게 고분고분해졌다. 그 자신에게 필요한 능력을 갖춘 사람을 묘하게 잡아끄는 능력이 뛰어났던 것이다.

잡스의 한 동료는 “한마디로 잡스 만의 자기 충족적인 왜곡이었다고 할 수 있다. 불가능하다는 사실을 인정하지 않았기 때문에 동료로 하여금 불가능한 일을 해내도록 만들었다”라고 회고했다.

스티브 잡스와 어울리는 수식어는 스마트(smart)다. 그는 과연 똑똑한 사람이었을까? “잡스가 그렇게 똑똑한 사람은 아니었다”고 전기작가 아이작슨은 평했다. 그럼에도 잡스가 이제까지 없던 새로운 유형의 천재로 평가받는 이유는 무엇일까?

이에 대해 아이작슨은 “잡스의 상상력은 직관적이고 예측 불가하며 때로는 마법처럼 도약했다. 단순한 처리 능력보다는 수학자 마크 카츠처럼 불쑥불쑥 쏟아져 나오는 직관력을 주로 이용하는 ‘마법사 천재’ 유형이었다”고 말했다.

이어 “그는 마치 탐험가처럼 정보를 흡수하고 냄새를 느끼며 앞에 펼쳐진 것을 감지하는 데 능했다”고 덧붙였다.

1981년 잡스가 이끌던 ‘애플’사는 주식 공모에서 신기록을 세웠다. 이어 2년 뒤 역사상 가장 짧은 시간 안에 미국 500대 기업 그룹에 들어가는 데 성공했다. 잡스는 ‘애플’사가 500대 기업에 진입하자 인재를 더 영입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결국 그는 당시 최고의 경영자로 평가받았던 ‘펩시’사의 대표 존 스컬리를 스카웃했다. 이 과정에서 잡스는 존 스컬리에게 “평생 설탕물이나 팔면서 살기를 원하십니까?”라는 질문을 던져 그의 마음을 돌렸다고 한다.

이 질문에는 세계의 변화에 대한 날카로운 통찰력이 담겨 있다. 실제로 그는 기존의 웹사이트가 아닌 애플리케이션 기반의 디지털 콘텐트 시장을 새롭게 열었다. 세상을 변혁시키는 제품을 내놓은 것이다.

전 세계의 공동체가 디지털 시대에 걸맞은 창의적 경제를 구축하려고 애쓰던 시기에 잡스는 독창성과 상상력, 지속 가능한 혁신의 아이콘으로 우뚝 섰다. 이를 두고 전기작가 아이작슨은 잡스를 셰익스피어의 소설 <헨리 5세>에 나오는 핼 왕자에 견줬다.

핼 왕자는 열정적이지만 예민하며 냉담하지만 감상적이다. 때문에 주변에 영감을 주면서도 그 자신은 흠결 많은 왕으로 성장한다. 잡스도 양부모 아래서 성장했고 한때 인도에 종교적 순례를 떠나기도 했다. 평소 단순한 삶을 추구했지만 목표를 위해서는 피도 눈물도 없이 냉정했다.

1997년 크리에이티브 디렉터 리 클라우가 잡스의 요청으로 만든 60초 분량의 광고는 대중의 눈길을 사로잡았다. “다르게 생각하라(Think Different).” 잡스는 이 멋진 아이디어를 담은 광고 문구에 특히 열광했다.

그는 클라우가 제작한 자사의 광고에 대해 “이따금 영혼과 사랑의 순수함을 마주하는 순간이 있는데 그럴 때면 저는 늘 눈물이 납니다. 그런 순수함은 제 안으로 파고들어와 저를 사로잡지요”라고 평했다. 문제의 이 광고의 전체 문구는 다음과 같다.

“미친 자를 위해 축배를. 부적응자. 반항아. 사고뭉치. 네모난 구멍에 박힌 둥근 말뚝 같은 이들. 세상을 다르게 바라보는 사람들. 그들은 규칙을 싫어합니다. 현실에 안주하는 것을 원치 않습니다.

“평생 설탕물이나 팔면서 지낼 겁니까?”


▎잡스는 “예술가로서 창의적인 방식으로 살고 싶다면 자주 뒤돌아보면 안 된다. 그동안 무엇을 해왔든 다 버릴 각오가 돼 있어야 한다”고 말했다. / 사진·중앙포토
당신은 그들의 말을 인용할 수도 있고, 그들에게 동의하지 않을 수도 있으며, 또는 그들을 찬양하거나 비난할 수도 있습니다. 당신이 할 수 없는 한 가지는 그들을 무시하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그들이 세상을 바꾸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인류를 앞으로 나아가도록 합니다. 어떤 이들은 그들을 보고 미쳤다고 하지만, 우리는 그들을 천재로 봅니다. 자신이 세상을 바꿀 수 있다고 믿을 만큼 미친 자들…. 바로 그들이 실제로 세상을 바꾸기 때문입니다.”

잡스는 ‘다르게 생각하라’라는 주제로 내놓은 이 광고를 좋아했다. 그는 “세상을 바꿀 수 있다고 믿을 만큼 미친 사람이 결국 세상을 바꾼다”라는 주장을 진심으로 받아들였던 것이다.

바로 그 자신이 세상을 바꿀 수 있다고 믿은 미친 사람이자 그 믿음에 따라 세상을 바꾼 혁명가였기 때문이다. 그는 번개처럼 번쩍이는 뮤즈로서 이 세상을 창조의 천국으로 이끌었다. 현대 기술에 미학을 결합시킨 최초의 인간이었기에.

1974년 가을, 잡스가 실리콘밸리에서 고등학교 시절의 친구 워즈니악과 재회했다. 당시 워즈니악은 새로운 컴퓨터 연산제어장치(로직보드)를 구상 중이었다.

그러나 그의 설계를 받아주는 회사가 없었고 이를 눈치 챈 잡스는 그에게 창업을 제안했다. 1976년 잡스의 부모님 집에 위치한 작은 창고가 이들의 사무실이 됐다. 잡스는 자신의 폭스바겐 미니버스를, 워즈니악은 자신의 고성능 계산기를 팔아 이를 창업자금으로 삼았다.

이후 개발된 연산제어장치는 ‘애플Ⅰ’이라는 이름을 얻었다. 탄력을 받은 워즈니악은 키보드까지 갖춘 연산제어장치 ‘애플Ⅱ’를 설계했다. 이어 그는 이 기기(器機)를 플라스틱 재질로 된 일체형 틀로 전체를 감싸도록 마감했다.

작은 창고에서 시작된 6억 달러 성공신화


▎‘애플’사의 공동창업자 잡스(왼쪽)와 워즈니악(오른쪽)의 1976년 창업 당시 모습. 잡스는 천부적인 전자 엔지니어였던 워즈니악의 도움으로 자신의 아이디어를 실현할 수 있었다. / 사진·중앙포토
‘애플Ⅱ’는 미국에서 폭발적인 성공을 거뒀다. 2007년 잡스는 터치 스크린 형식의 ‘아이폰’을 출시했다. 작은 창고에서 시작된 사업은 이제 ‘날개’를 달게 됐다. 이는 통신사업을 혁신의 사업영역으로 발돋움시킨 주요한 계기가 됐다.

‘아이폰’은 MP3를 듣고 비디오 시청과 인터넷을 할 수 있는 새로운 휴대폰이었다. 종래에 존재하지 않던 기기에 대중이 열광한 건 당연했다. ‘애플’사는 연이어 터치스크린을 갖춘 MP3 플레이어이자 게임기기인 ‘아이팟 터치’를 선보이며 승승장구했다.

그 결과 1982년 2월 잡스는 미국의 유명잡지 <타임>의 표지 인물로 선정됐다. 당시 이 매체는 잡스를 다음과 같이 소개했다.

“23세의 잡스는 6년 전 부모님 집에 있는 작은 차고에서 창업한 자신의 회사를 성공으로 이끌고 있다. 올해 이 회사는 약 6억 달러(한화 6630억원)의 매출을 올릴 것으로 예상된다. (…) 다만 잡스는 때때로 부하 직원을 까다롭고 거칠게 대한다. 그 자신도 ‘감정을 드러내지 않는 방법을 배울 필요가 있을 것 같다’라고 인정한다.”

특이한 성격으로 주목받기도 했지만 잡스는 세계적으로 성공한 기업가로서 더욱 인정받았다. 돈과 명예를 한 손에 거머쥔 유명한 인물이 된 것이다. 그럼에도 그는 1960년대 미국을 휩쓸었던 이상주의와 히피를 중심으로 한 반문화 운동의 정체성을 여전히 유지하고 있었다.

이와 관련, 잡스가 스탠포드 대학에 특강을 초청받았을 때의 일이다. 당시 그는 양복과 신발을 벗고 탁자 위에 올라가 가부좌 자세로 앉아 학생들과 문답을 주고받았다. 학생은 애플 주가나 컴퓨터의 미래 같은 현실적인 문제에 대해 물었고 잡스는 답을 하는 형식이었다.

학생들의 질문이 끝나자 잡스는 잠시간 침묵하다가 거꾸로 질문을 던졌다. “여러분 중에 섹스 경험이 없는 학생이 얼마나 되지요?” 학생들은 쿡쿡 웃음을 터뜨렸다. 그의 질문은 이어졌다. “마약을 해본 학생은요?”

잡스의 질문 의도를 학생들은 알아채지 못했다. 그들은 물질주의에 침윤된 세대였고 관심은 오로지 경력과 취업의 범주에서 크게 벗어나지 못했기 때문이다. 잡스는 그들에게 자신이 겪은 1960년대의 풍경을 소개하기 시작했다.

“1960년대를 휩쓸던 이상주의 바람은 아직도 우리 마음속에 있습니다”라는 말을 시작으로 자신이 어떻게 ‘다른 세대’가 됐는지를 설명했다. 과거의 이상주의가 현재에 무의미한 것으로 변질됐지만 여전히 미래를 위해 가슴에 새겨둘 만한 가치가 있다는 것을 연신 강조한 것이다.

흔히 동시대에 태어나 같은 분야에서 경쟁을 벌이던 두 사람을 여러모로 견주는 사람이 많다. 스티브 잡스와 빌 게이츠, 이 두 사람은 한 궤도를 도는 두 개의 큰 별이다.

두 별은 한 궤도에 있기 때문에 중력의 상호작용으로 궤도가 얽히는 일도 생긴다. 이를 ‘연성계(連星系)’라고 하는데 이들 사이서도 자연스럽게 이런 연성계가 생겨났다.

1970년대 후반부터 시작된 PC시대는 1955년에 태어난 두 명의 활기 넘치는 대학 중퇴자로 이루어진 뚜렷한 연성계에 의해 움직이기 시작했다.

잡스는 타는 듯 강렬한 눈빛으로 상대를 쏘아보는 사람이었고 게이츠는 상대와 눈 마주치는 걸 싫어하는 사람이었다. 두 사람은 같은 해에 태어나 같은 분야에서 일했으며 대학 중퇴자라는 공통점이 있었다.

그러나 부모, 성장배경, 성격이나 능력치에서는 뚜렷하게 달랐다. 게이츠는 유명 변호사인 아버지 밑에서 유복하게 자라나 지역 최고의 사립학교를 다녔다. 그가 하버드대학에 입학했던 건 너무나도 자연스러운 일이었다.

청년시절 게이츠는 컴퓨터 마니아로 성장한 덕택에 컴퓨터 코딩을 이해했으며 분석적 처리 능력에서 뛰어났다. 논리적인 재능이 뛰어났던 것처럼 그는 평소 안정적인 품성을 가진 사람이었다.

반면 잡스는 사생아로 태어나 평범한 가정에 입양된 아이였다. 거친 사춘기를 보냈음은 물론이었다. 반항아였고 히피 생활을 자처했으며 종교적 구도자를 찾아 헤맨 적도 있었다. 이와 어울리게 직관의 기질이 뚜렷했고 낭만적인 면모도 농후한 사람이었다.

두 사람은 생래적 기질과 성격의 차이로 각자 다른 길을 걸을 수밖에 없었다. 이 같은 극명한 다름에 대해 전기작가 아이작슨은 다음과 같이 지적했다.

“완벽주의자 잡스는 모든 것을 통제하길 원했고, 그 무엇과도 타협하지 않는 예술가적 성향에 탐닉했다. 그는 ‘애플’사를 통해 하드웨어와 소프트웨어, 콘텐트를 하나의 패키지로 세밀하게 통합하는 디지털 전략의 모범이 됐다.

세기의 라이벌 ‘빌 게이츠’와의 뜨거운 경쟁


▎2007년 한 정보기술(IT) 관련 행사에 참여해 대담하는 잡스(왼쪽)와 빌 게이츠(오른쪽). 빌 게이츠는 잡스의 남다른 직관력을 부러워했다.
반면 게이츠는 비즈니스와 기술에 초점을 맞춘 영리하고 계산적이며 실용적인 분석가였다. 그는 마이크로소프트 운영 체제와 라이선스를 주저없이 다양한 제조사에 제공했다.”

게이츠는 평소 잡스가 프로그래밍에 대해 아무것도 모른다는 점에서 상대적인 우월감을 느꼈다. 이어 그는 잡스의 괴팍한 성정을 인격적 결함으로 여겼다. 그러면서도 게이츠는 잡스가 가진 사람을 매혹시키는 능력과 남다른 직관력을 부러워했다.

심지어 그 자신도 잡스에게 인간적으로 끌림을 느끼기도 했다. 그러나 잡스는 게이츠를 부잣집 도련님으로 여겼다. “게이츠는 경험과 상상력이 부족하고 편협하다”라고 평하기도 했다.

경쟁 관계에서도 왕성하게 활동해온 잡스에게 어느덧 시련이 닥친다. 2003년 10월 췌장암 진단을 받은 것이다. 그는 그 사실을 아무에게도 알리지 않았다. 이런 그의 비밀주의가 새삼스러운 것은 아니다.

1년 뒤 췌장 및 담관의 일부와 담낭, 십이지장을 잘라내고 남은 췌장과 담관을 연결하는 대수술을 받았다. 다행히 수술은 성공적으로 끝나고 그는 ‘애플’사에 복귀했다. 이후 그는 명언을 쏟아내기 시작했다.

2005년 6월 미국 스탠포드 대학에서 졸업 축하연설을 하게 된 잡스는 고민에 빠졌다. 어떻게 연설을 해야 할지 몰라 미국의 유명 대본작가인 에런 소킨에게 도움을 요청했으나 아무런 답변을 받지 못했다.

결국 잡스는 스탠포드 졸업식 전날이 되어서야 책상 앞에 앉아 연설문을 써내려가기 시작했다. 훗날 명언으로 기록된 그 유명한 ‘스티브 잡스의 연설’은 이렇게 만들어졌다. 밤샘 작업을 하는 바람에 심신은 피곤했으나 나 홀로 글쓰기를 하게 된 덕분에 제 인생을 천천히 돌아다볼 수 있었다고 한다.

연설문을 작성하기 불과 한해 전에 그는 췌장암 판정을 받았었다. 주치의는 기껏해야 석 달에서 여섯 달 정도 살 수 있을 것이라고 했지만 잡스는 수술 뒤에 불굴의 집념으로 건강을 회복해냈다.

죽음… 삶이 만든 최고 ‘발명품’


▎2005년 미국 스탠포드 대학의 졸업식에서 축하연설 하는 잡스. 잡스는 이 자리에서 “죽음은 인생을 변화시키는 계기다. 자신의 가슴이 하는 말을 따르라”고 말했다. / 사진·중앙포토
잡스는 스탠포드 대학의 졸업 축하연설에서 암 투병을 통해 얻은 죽음과 삶에 대한 깨달음을 생생히 담아 주목받았다. 그의 연설은 단순하고 명료했다. 특히 죽음에 관한 부분은 이 연설의 백미였다.

“제가 17세 때 다음과 같은 글을 읽었습니다. ‘매일을 인생의 마지막 날처럼 살아간다면 당신이 분명히 올바르게 살았다는 것을 알게 될 것이다.’

이 글은 제게 감동을 줬습니다. 그 뒤로 33년을 살아오는 동안 저는 매일 아침 거울을 보면서 스스로에게 물었습니다. 오늘이 내 인생의 마지막 날이라면? 그렇습니다. 저는 무엇인가를 바꾸어야 할 필요가 있다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내가 곧 죽는다는 사실을 기억하는 것, 그것은 인생의 중대한 선택을 도운 그 모든 도구 가운데 가장 중요한 것이었습니다. 외부의 기대와 개인적 자부심, 망신 또는 실패에 대한 두려움 등 거의 모든 것이 죽음 앞에서는 퇴색하고 진정으로 중요한 것만 남더군요.

자신이 죽는다는 사실을 상기하는 것은 현실적으로 손에 쥐고 있는 것을 아깝게 생각하는 덫을 피하는 가장 좋은 방법입니다. 우리는 이미 알몸입니다. 가슴을 따르지 않을 이유가 없지요.

얼마 전 저는 죽음의 문턱까지 갔다 온 경험이 있습니다. 따라서 죽음이 어떤 경우에는 우리 삶에 유용하다는 사실을 말할 수 있습니다. 죽기를 원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심지어 천국을 가기를 원하는 사람조차도 그곳에 가기 위해 죽고 싶어 하지는 않을 것입니다.

그러나 죽음은 우리 모두가 공유해야 하는 최종 목적지입니다. 그 누구도 피해 갈 수 없습니다. 또 그렇게 되어야만 합니다. 왜냐하면 죽음은 삶이 만든 단 하나의, 최고의 발명품이기 때문입니다.

죽음은 인생을 변화시키는 계기입니다. 오래된 것은 새로운 것을 위해 길을 만들어줍니다. 지금 새로운 것은 바로 여러분입니다. 그러나 멀지 않은 어느 날 여러분은 점차 오래된 것이 되어 사라질 것입니다.

너무 드라마틱하게 들렸다면 죄송스럽지만 이것은 사실입니다. 여러분의 시간은 제한돼 있습니다. 누군가의 인생을 사는 것처럼 낭비하지 마세요. 다른 사람의 생각으로 살아가는 도그마에 빠지지 마십시오. 자신 내면의 소리를 방해하는 다른 사람의 의견을 허락하지 마십시오.

그리고 무엇보다 중요한 것, 여러분의 직관을 따르는 용기를 가져야 합니다. 여러분은 자신이 진정 되고 싶어 하는 것이 무엇인지 이미 알고 있습니다. 그 외의 모든 것은 부차적인 것입니다.”

우리는 죽음이라는 막다른 골목에 도달한 길 잃은 여행자와 같다. 삶의 끝에 죽음이 있다는 것을 알지만 그 이후의 길을 찾아갈 수 있는 지도는 없다. 누군가는 종교를 통해 그 지도를 얻으려고 한다.

혹자는 내세와 윤회에 대한 지도를 얻었다고 자랑하지만 알고 보면 진실은 다르다. 단지 그들은 죽음이 불러일으키는 공포를 피하기 위해 종교의 다양한 주장을 이용하고 있는 것이다. 종교라는 참호 속에 몸을 숨기고 죽음의 진실을 애써 외면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

“내면의 소리에 귀 기울여라”


▎2011년 잡스의 추모식. 이날 ‘애플’사의 새 대표인 팀 쿡은 “우리는 천재를 잃었다”며 애통해 했다. / 사진·중앙포토
종교에 의탁하면서 자신의 의식에서 의심이라는 검증 기능을 거둬버리는 식으로 말이다. 대다수의 사람은 패잔병이 싸워야 할 무기와 비상식량 따위를 다 버린 채 죽음과의 대면을 피하려고 종교에 서둘러 투항하는 것으로 보인다.

이런 흐름에 따라 ‘죽음이 존재의 끝이 아니다’라고 수많은 종교는 힘줘 말한다. 또 다른 형태의 있음이 있고 그것이 지속된다는 믿는 것이다. 그러나 이것은 죽음이 지속의 중단이자 소멸이며 부정할 수 없는 종말이라는 사실을 부정한다.

그렇게 함으로써 죽음에 내재된 특성을 지워버리고 마치 죽음이 불결한 것이라도 되는 양 그것에서 멀찍이 떨어지려 몸부림친다.

“죽음은 삶을 표현하기보다는 그것을 없앤다. 죽음은 삶의 궤적을 채우는 것이 아니라 그것을 소멸시킨다.” 철학자 토드메이는 저서 <죽음이란 무엇인가>에서 이같이 말했다.

메마르게 얘기하자면 죽음은 물질적인 존재를 해체해서 원소로 돌아가는 것이다. 죽은 자는 욕망과 환상으로부터 벗어나 원소라는 초기 물질이 된다. 결국 아무것도 아닌 것에서 태어나 다시 아무것도 아닌 것으로 회귀하는 셈이다.

이렇듯 죽음이 살아 있는 모든 자에게 필연적으로 닥치며 각자가 추구하던 삶의 이상을 좌절시킨다는 것은 분명한 사실이다. 과연 죽음은 항상 삶에 부정적이기만 한 것일까?

잡스는 생전에 ‘죽음을 기억하라’는 뜻의 ‘메멘토 모리(Memento mori)’를 강조했다. 당신도 언젠가는 죽는다는 사실을 잊지 말라는 얘기도 된다. 그러면서 그는 죽음이 가진 모호성을 뛰어넘어 그것이 “삶이 만든 단 하나의, 최고의 발명품”이라고 단언했다.

이는 죽음의 핵심을 통찰하는 인문학적 비범함이 돋보이는 대목이다. 그의 죽음에 대한 통찰이 철학적이고 의미심장한 이유는 바로 그 자신이 죽음의 문턱을 가봤기 때문일 것이다.

죽음이 삶을 끝내고 존재를 소멸시키기도 하지만, 때때로 죽음은 유용한 것임을 그는 알았다. 삶의 광휘를 위해 반드시 필요한 것이라는 사실을 깨달은 것이다. 토드 메이는 죽음의 유용성을 다음과 같이 설명했다.

“죽음이 삶에 중요성을 부여하는 것 중 하나는 인간의 삶을 미래로 이어지도록 만든다는 것이다. 그래서 인간은 계획을 세우고 일에 헌신한다. 또한 관계를 구축하면서 미래를 열고 개발하는데 열정을 쏟는다.”

삶의 시간은 제한돼 있다. 그래서 삶의 시간을 낭비하는 일은 어리석다. 우리가 다른 사람의 생각으로 살아가는 도그마에 빠지지 말아야 할 이유는 분명하다.

잡스는 “내면의 소리를 방해하는 다른 사람의 의견을 거부하라”고 부추긴다. 그러면서 그는 “인생에서 정말로 중요한 것은 마음과 직관을 따르는 용기”라고 강조한다.

“인생에 집중하라”는 그의 주장처럼 평소 뜨거운 혁신의 열정으로 여러 신제품을 내놓음으로써 세계 IT계를 주름잡던 그에게도 끝은 있었다. 2011년 새해 잡스는 또다시 몸에 이상을 느껴 병가를 냈다.

이후 그는 치열하게 회복을 위해 노력했으나 신은 더 이상의 시간을 허락하지 않았다. 잡스는 그해 8월 ‘애플’사의 최고경영자에서 물러나자마자 불과 석 달 뒤 눈을 감았다.

잡스의 사망 소식이 전 세계에 주요 뉴스로 타전되기 시작했다. 세계의 눈은 그의 죽음을 가슴 깊이 기억했다. “메멘토 모리!”

장석주 - 전업작가. 충남 논산 출생. 1979년 조선일보·동아일보 신춘문예에 시와 문학평론 당선으로 등단했다. <월간문학> 신인상(1975년)과 해양문학상(1976)을 수상했다. ‘고려원’ 편집장을 거쳐 청하 출판사를 운영했다. 지금까지 시집, 비평집, 인문서 등 70여 권을 펴냈다. 대표 저서로 <일상의 인문학> <마흔의 서재> <철학자의 사물들> 등이 있다.

201610호 (2016.09.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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