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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버럴 아츠의 심연을 찾아서] 예수 영화 '벤허'를 통해 본 인류의 어제와 내일 

밀레니얼 세대 고전의 결말을 뒤집다 

유민호 월간중앙 객원기자, ‘퍼시픽21’ 디렉터
악마숭배까지는 아니더라도, 악마 공존론이 이들 세대의 이데올로기에 내재돼 있어… 1980년대 중반 이후 태어난 미국 청년들, 모순 관계인 실리와 명분을 동시에 추구

▎2016년 새롭게 탄생한 영화 <벤허>는 시대정신을 반영했으나 흥행에는 실패했다.
5년 전부터 카시오(Casio) 전자시계를 사용한다. 계산·방수·알람·라이트 기능까지 붙어있는 만능 다기능 디지털 손목시계다. 배터리 하나에 5년은 간다. 15달러에 구입했다. 싸구려 시계를 통해, 가난 나아가 청빈까지 논하려는 사이비 프롤레타리아 얘기를 하자는 것이 아니다.

카시오 시계는 십대의 필자에게 잊을 수 없는 기억으로 남아 있다. 고등학교 재학 중이던 어느 날, 급우 중 한 명이 이 전자시계를 차고 왔다. 필자가 처음으로 경험한 디지털 세계다. 별천지로 와 닿았다. 시계 자랑을 하는 급우가 그렇게 부러울 수가 없었다. 급우 모두가 달려들어 시계의 기능을 하나씩 테스트했다. 1초, 1초 움직이는 시계침과, 계산 기능까지 딸린 압축형 첨단 테크놀로지. 예쁜 디자인과 더불어 그런 작품을 만든 일본에 대한 동경도 기억난다.

반일보다 극일이 대세이던 시대였다. 21세기 청년이 경험한 아이폰 충격에 못지않은 기억이 카시오 디지털 시계에 배어 있다. 부모에게 사달라고 매달리고 싶었지만, 차마 입에 올릴 수가 없었다. 당시 일제 카시오 전자시계 가격은 약 2만원 선이었다. 신입사원 한 달 월급 수준이다. 얼마나 갖고 싶었는지, 카시오 시계가 꿈에도 나타났다.

시계 관련 기사를 읽다가 카시오 디지털 시계가 원형 그대로 ‘아직도’ 생산·판매되고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됐다. 아마존 닷컴에 들어가 뒤져보니까 ‘그때 그 당시’의 기억들이 통째로 널려 있었다. 까마득하게 잊혀진, 먼저투성이 타임캡슐을 꺼내는 느낌이라고나 할까.

장난감 가격 수준의 시계 생산국은 일본이 아니라 메이드 인 차이나다. 20달러가 드는 특급 우송편으로 곧바로 구입했다. 하루 만에 도착했지만, 사춘기의 욕망과 기억을 실은 시계에 대한 기다림은 남달랐다. 그동안 차고 다니던 유럽산 시계를 대신해 카시오로 바꿨다. 카시오 시계를 찬 40년 전 친구에 대한 ‘경쟁심리’도 있겠지만, 기억을 통해 ‘회춘(回春)’으로 연결될 수 있다는 점에서 애용하게 된 것이다. 남길 것도 없고 갖고 갈 것도 없지만, 무덤까지 함께 갈 몇 안 되는 물건 중 하나가 카시오 디지털 시계다.

어제와 오늘을 비교하고, 더불어 내일을 가늠하는 것은 세월의 성숙함이 가져다주는 아름다운 지혜에 해당한다. 사물 하나를 대하면서도 단편적·일방적이 아닌, 입체적 쌍방향 차원에서 이해하려 노력한다. 20대 식의 혁명은 못하겠지만, 개혁이나 개선을 가능하게 만드는 것이 세월의 성숙함이다. 물론 부끄럽고 후회스러운 어제가 대부분일 듯하다. 그러나 열심히 찾아보면 좋은 기억과 추억으로 새겨진 시간도 적지 않다. 친한 친구, 돌아가신 부모와 함께 사진을 찍었을 당시의 추억 하나만으로도 풍부한 삶을 되살릴 수 있다.

세기말 공포 속에서 태어난 <벤허, 예수의 얘기>


▎마차경주 흥행사, 세익 일데림으로 나오는 모건 프리먼(왼쪽)은 주인공에 맞먹는 역할을 맡았다. / 사진·중앙포토
카시오 시계에서 보듯 물적 욕망에 근거한 형이하학적 기억이 전부는 아닐 것이다. 어린 시절 백지상태의 머릿속에 깊게 새겨진, 뭔가 영원하고 깊은 형이상학적 추억도 인간 모두에게 공평하게 나눠져 있다.

20세기 후반이 영상의 시대임을 감안하면 한국인 그 누구라도 ‘특정 영화’에 관한 기억을 갖고 있을 것이다. 영화는 세월의 흐름 속에서 어제·오늘·내일을 되돌아보게 만드는 가장 형이하학적 소재가 아닐까 싶다. 보고 즐기는 것만이 아닌 느끼고 새기는 영화, 즉 고전에 속하는 영화가 주된 대상이다.

필자가 말하는 고전으로서의 영화는, 한 번에 그치는 것이 아닌 다른 감독에 의해 수차례 새롭게 각색, 윤색되면서 등장하는 명화다. 원작 소설에 기초해 같은 내용의 영화를 몇 번이나 다른 각도에서 재조명하는 식의 고전이다. 추석을 맞아 한국에서 상연된 <벤허>는 그 같은 고전명화의 대표격이 아닐까 싶다. 한국인에게 <벤허>라고 하면 윌리암 와일러 감독에다, 찰턴 헤스턴이 주연한 1959년작 <벤허>를 가장 먼저 떠올릴듯하다. 올해 추석시즌에 등장한 <벤허>는 티무르 베크맘베토브 감독 영화로 주연은 잭 휴스턴이다.

찰턴 헤스턴 주연의 영화는 <벤허>를 세계적 고전명화 대열에 올린 작품이다. 아카데미상도 휩쓴다. 이후 2016년도 작품을 비롯해 모두 세 번의 영화가 더 만들어진다. 벤허는 사실 1959년도 이전에 이미 미국민에게 잘 알려진 작품이기도 하다. 영화 이전에 소설로 베스트셀러에 오르면서 세상에 널리 알려진 것이다.

놀랍게도, 작가는 군인이자 뉴멕시코 주지사로 재직한 류월리스(Lew Wallace)란 인물이다. 문학가가 아닌 전장과 정치의 최전선에 선 사람이 책의 저자다. 원제는 <벤허, 예수의 얘기(Ben-Hur: A Tale of the Christ)>다. 벤허를 통해 예수의 흔적을 간접적으로 더듬는 성화(聖話)에 해당된다. 스토리는 잘 알려져 있듯이 유대인 벤허와 로마군인 메살라와의 우정·갈등·복수에 관한 것이다.

유대교도로서의 벤허와 로마 시민으로서의 메살라가 갖는 세계관의 충돌이 갈등의 정점에 서 있다. 결론은 무력으로 이스라엘을 통치하려던 메살라가 사랑에 기초한 유대인 벤허에게 패하면서 끝난다. 소설이 출간된 것은 1880년이다. 19세기 말 인류는 세기말적 공포에 젖어든다. 종교를 대신해 나타난 제국주의와 자본주의 이데올로기가 세상을 어둡게 만들던 시기다. 1917년 러시아혁명은 그 같은 고통이 폭발한 역사적 증거다.

인간적 상상력에 기초한 월리스의 소설은 구원의 메시지로 미국 전체로 퍼져나간다. 흥미롭게도 월리스는 장군으로서 직접 경험한 전쟁터의 기억을 소설 속에 포함시킨다. 영화 <벤허>의 상징에 해당되는, 대규모 스펙터클 게임인 마차경주와 해전이다. 할리우드가 존재하지 않던 시기지만, 마차경주와 해전으로 상징되는 초대형 엔터테인먼트 스토리가 카우보이 미국민의 마음을 사로잡는다.

소설을 직접 눈으로 실감하고 싶어하는 사람들이 늘어나면서 원작에 기초한 극장 공연도 1899년 뉴욕 브로드웨이 극장에 등장한다. 실제로 무대에 수십 마리 말을 등장시켜 원통형 무대를 되돌리는 식으로 로마 당시 마차경주 장면을 재현한다. 대형 해전도 비슷한 형식으로 창조해 무대에 선보인다. 당시 사람들이 열광한 것은 예수의 얘기가 아니다. 해전과 마차경주와 같은 로마 글라디에이터 스타일의 엔터테인먼트다.

감독이 악의 상징 메살라를 살려둔 이유


▎영화 <벤허>(1959)로 남우주연상을 수상한 찰턴 헤스턴이 32회 아카데미 시상식에서 트로피를 받고 포즈를 취하고 있다.
대형무대 엔터테인먼트로서의 <벤허>가 대성공으로 이어지자 막 등장한 무성영화에도 진출한다. 1907년과 1925년 무성영화로 제작된다. 부실한 장비로 인해 마차경주 장면을 찍던 도중 제작진의 사망사고도 발생한다. 시속 50㎞ 이상으로 이뤄지는 무성영화시대의 마차경주 촬영은 목숨을 건 도박이기도 하다. 1959년 찰턴 헤스턴의 벤허는 19세기말부터 시작된 벤허붐을 최대 제작비와 최첨단 장비로 압축해 재현해낸 걸작이라 볼 수 있다.

2016년도 <벤허>의 미국 상연은 8월 중순에 시작됐다. 워낙 광고도 많이 하고 해서 일찍부터 상연을 알고 있었다. 개봉한 지 1주일 만인 8월말 영화관에 들렀다. 토요일 오후인데도 생각보다 사람이 적어서 깜짝 놀랐다. 영화평을 보니까 별 다섯 개 가운데 두 개에 불과하다. 사실 영화평은 직접 보기 전에 예단(豫斷)케 만드는 ‘김빠지는 저주’다. 영화평에는 별 다섯 개지만 실제 보면 별 한 개에도 못 미치는 황당한 경우도 있다. <벤허> 관람객의 대부분은 노년층이다. 대부분 1959년 벤허를 기억하는 사람들일 것이다. 2016년도 영화를 보러 온 것이 아니라, 1959년 찰턴 헤스턴을 떠올릴 수 있는 기억 재생용 소재일지 모르겠다. 필자 역시 찰턴 헤스턴의 기억을 되살리면서 2016년 영화의 새로운 측면을 발견하자는 것이 극장에 들른 가장 큰 이유다.

21세기판 베르디의 오페라 <라트라비아타(La Traviata)>는 19세기말 프랑스 사교계가 아닌, 포스트모더니즘 시대 뉴욕 맨해튼의 펜터하우스를 배경으로 한 느낌이다. 주인공인 비올레타는 왈츠에나 어울리는 고전적인 옷에서 한참 떨어져 있다. 코와 귀에 건 수십 개의 액세서리와 함께 핫팬츠에다 탱크톱 차림의 깜찍한 아이돌이 아이폰 시대의 비올레타다. 처음에는 놀랍고도 부정적으로 느껴지겠지만, 문신과 힙합 차림의 남자 주인공 알프레도도 두세 번 보면 익숙해진다. 거룩한 성웅 이순신 장군도 좋지만, 월스트리트 출신의 헤지펀드 매니저로 한국에 불어닥친 금융위기를 극복한, 21세기판 금융영웅 이순신에 관한 각색된 얘기도 괜찮을 듯하다. 16세기 왜구나 한국금융을 초토화시키는 21세기 외국 금융계나 크게 다를 바가 없기 때문이다.

2016년 벤허를 57년 전과 비교할 때 크게 달라진 부분은 네가지로 압축된다. 먼저 결론 부분의 스토리다. 벤허를 괴롭히던 메살라가 마차경주 사고에도 불구하고 마지막에 살아서 벤허와 함께 웃음을 나누면서 걸어간다. 찰턴 헤스턴의 <벤허>에서는 메살라가 마차경주 도중 사고를 당한다. 부상으로 죽기 마지막까지 벤허에게 저주를 퍼붓는다. 2016년 1959년 작품 관계없이 모든 <벤허> 영화 속에서의 선과 악은 분명하다.

회개하지 않는 악마도 용서되는가


▎1959년 윌리엄 와일러 감독이 리메이크한 영화 <벤허>는 오늘날에도 고전영화의 걸작으로 꼽힌다. / 사진·중앙포토
벤허는 선, 메살라는 악이다. 선은 영원히 기억되지만, 악은 죽음으로 세상에서 사라진다. 로마서 6장23절에서 예수는 ‘죄의 삯이 죽음’이라고 말했다. 2016년 러시아 출신 감독이 만든 <벤허>의 마지막은 죄와 악의 상징인 메살라가 벤허와 함께 장난을 치는 장면이다. 한국에서의 흥행이 어떻게 될지 모르겠지만, 미국에서 <벤허>는 거의 파산상태에서 막을 내렸다. 투자액의 절반 정도만 건졌다. 이유를 여러 가지로 풀 수 있겠지만, 영화의 마지막 부분 즉 결론이 너무도 황당하기 때문이지 않을까 판단된다. 악이 선과 함께 공조하는 영화다. 왜 벤허를 못살게 군 메살라를 살려둘까?

메살라 생존 스토리는 소셜네트워크서비스(SNS) 시대의 청년문화의 단면이라고 필자는 확신한다. 모두 함께 윈-윈(Win-Win)이다. 불법 이민, 불법 체류자들이 자신의 복지와 인권을 내세우며 항의나 시위에 들어가는 시대다. 이런저런 이유로 불법으로 들어왔지만, 같은 인간으로서 다른 사람과 똑같은 권리와 복지를 누릴 수 있다고 말한다. 불법 체류라는 이유로 제대로 된 직장에 취직을 못하도록 하는 법도 폐지돼야 한다고 말한다.


▎러시아혁명 90주년을 맞아 시가행진을 벌이는 모스크바 시민들. 러시아혁명은 세기말적 공포가 폭발한 역사적 증거다.
놀랍게도 미국인 가운데 그 같은 논리에 동의하는 사람들이 늘고 있다. 특히 밀레니얼 세대의 경우 ‘인종·문화· 배경 관계없이 평화와 더불어 모두가 함께’라는 논리에 적극 찬성이다. 밀레니얼 세대란 1980년대 중반부터 2000년대 초 사이에 태어난, 21세기 미국 청년문화의 핵이다. 멀리는 금융재벌에 반대하는 ‘아큐파이 월스트리트(월가를 점령하라)’ 행동대에서부터, 동성애 결혼 허용과 성전환수술자의 화장실 선택권과 같은 논의의 핵심에 선 세대다.

모든 정보는 공유하고 비밀 없이 공개되는 평등사회가 밀레니얼 세대의 꿈이자 이데올로기다. 아무리 이슬람국가(IS)가 난리를 쳐도 전쟁 반대, 흑인과 무슬림에 대한 차별 금지를 전면에 내세운다. 무슬림에 대한 경계나 부정적 발언이 이뤄질 경우 트럼프나 히틀러쯤으로 처리된다. 한국식으로 풀이하자면 늙고 추한 ‘꼰대’다.

메살라의 생존은 바로 이 같은 밀레니얼 세대의 가치관에 기초한 결론에 해당된다. 한때 벤허를 미워한 악인이지만, 이제 함께 나가자…라는 메시지다. 물론 예수는 회개할 경우 천국이 가까워진다고 말했다. 문제는 생존한 메살라가 과연 회개를 했는가라는 점이다. 영화 속에서는 그 같은 단서를 찾기 어렵다. 비약한다고 말할지 모르겠지만, 장차 밀레니얼 세대 논리가 업그레이드될 경우 악마도 친구가 될 수 있다고 말할듯하다. 악마 숭배까지는 아니더라도, 악마 공존론이 밀레니얼 세대의 이데올로기에 내재돼 있기 때문이다.


▎2011년 ‘월가를 점령하라’는 슬로건을 외치는 시위대가 미국 워싱턴 국회의사당 앞을 행진하고 있다. / 사진·중앙포토
밀레니얼 세대가 이해하고 느끼는 신의 모습


▎정보가 공유되는 평등사회를 지향하는 밀레니얼 세대에게 페이스북 설립자 마크 저커버그는 롤모델이다. / 사진·중앙포토
2016년 영화 속에서 크게 달라진 두 번째 부분은 아랍 출신 마차경주 흥행사, 세익 일데림(Sheik Ilderim)에 관한 부분이다. 흑인 배우 모건 프리먼이 역을 맡았다. 2016년 영화 속에서 아랍 흥행사는 영화 속 주인공에 맞먹는 역할을 맡고 있다. 찰턴 헤스턴 영화에 나타난, 춘향전의 방자와 같은 역할이 아닌, 선과 악의 흐름을 결정하고 벤허의 미래를 선도하는 전지전능 신처럼 느껴진다. 의상, 헤어스타일, 목소리, 자세도 신에 버금간다. 1959년 영화 속에서는 아랍 출신으로서의 흑인이지만, 2016년은 흑인으로서의 아랍 출신이란 부분에 방점을 찍고 있다. 흑인 대통령까지 낳은 미국의 현실을 반영한 각색이라 볼 수 있지만, 필자가 보면 배보다 배꼽이 더 큰 배역 설정으로 여겨진다. 벤허와 메살라에 대한 초점을 흐리게 하면서까지 전지전능 흑인이 끼어들어 스토리를 주도한다. 그러나 그 같은 ‘편견’은 필자와 같은 시대흐름에 뒤진 장년세대 이상에 해당될 뿐이다. 밀레니얼 세대처럼, 1959년 영화를 안 본 사람들이라면 전지전능한 흑인 배역에 대한 이질감이 거의 없을 것이다.

세 번째 달라진 부분은 곳곳에 등장하는 예수에 관한 부분이다. 믿기 어려운 얘기지만, 장면 곳곳에 예수가 너무도 ‘인간적으로’ 분명히 살아 움직인다. 얼굴을 드러낸 채 말도 하고 표정도 읽을 수 있다. 찰턴 헤스턴 영화에서는 예수는 뒷모습만 비쳐진다. 예수의 얼굴이나 표정은 맞은편에 선 상대의 연기를 통해 간접적으로 읽을 수 있다. 엑스트라 수준의 배역인 로마 군인의 복잡한 얼굴 표정은 1959년 영화 속 명장면 중 하나다. 끌려가는 벤허에게 예수가 물을 권하려 한다. 로마 군인은 주지 말라고 하면서 채찍을 휘두르려 한다. 그러나 로마 군인은 예수의 얼굴을 바라보다가 뭔가를 주저한다. 눈에 드러나지 않는 예수지만, 로마 군인의 표정을 통해 충분히 와 닿는다. 분위기와 상황을 통해 느껴지는 간접적인 체험이 한층 더 오래가고 인상적이다.

2016년 영화는 다르다. 벤허에게 물을 주는 예수, 나중에 벤허로부터 물을 얻어 마시는 십자가를 진 예수가 너무도 확실히 노출돼 있다. 얼굴·목소리·자세가 전부 드러나 있다. 예수는 더 이상 신비롭지도 신성하게 여겨질 필요가 없는, 옆집 아저씨와 같은 이미지로 와 닿는다. 바로 밀레니얼 세대가 이해하고 느끼는 신의 모습이다.

워싱턴의 정평 있는 여론조사기관 퓨(PEW, ww w.pewresearch.org)가 조사한 2010년도 미국인의 종교관에 따르면, 신을 믿지 않는 밀레니얼 세대가 47%에 달하는 것으로 나타났다. 같은 기간 무신론자는 X세대인 40~50대가 39%, 베이비붐(Baby Boomer) 세대인 60대가 35%, 사일런트(Silent) 세대인 70대가 32%, 1928년 이전에 태어난 80대 이상의 그레이티스트(Greatest) 세대가 29%라 답했다. 밀레니얼 세대의 절반 정도는 신의 존재 자체를 믿지 않는, 신이 필요 없는 무신론자에 해당한다. <벤허> 영화 속에 등장하는, 리얼리티 방송에서나 볼 수 있을 법한 예수의 모습은 밀레니얼 세대의 종교관을 반영한 것이라 볼 수 있다. 신성하고 신비로운 예수가 아닌, 모두에게 숨김없이 노출된 오픈 예수인 것이다.

마지막으로 네 번째로 달라진 부분은 로마 장군 퀸투스 아리우스에 관한 스토리다. 1959년 영화에서 전함에서 노를 젓던 벤허를 자신의 양자로 입적시킨 인물이다. 메살라에 의해 노예로 추락한 벤허지만, 전쟁 중 아리우스를 구하면서 로마 시민으로 부활한다. 아리우스는 자신의 후계자로 재산과 권력을 나눠주지만, 벤허는 가족을 되찾고 복수를 위해 메살라를 찾아간다. 흥미롭게도 2016년 영화에서는 아리우스라는 인물 자체가 완전히 사라진다. 노예로서 전함 갤리아에서 노를 젖던 벤허 스스로가 바다 속에서 기적적으로 살아남는다. 이후 흑인 아랍 흥행사의 절대적인 도움으로 메살라에 맞서 이긴다. 흑인의 위상을 높이기 위한 각색인 동시에, 독립성이 강한 밀레니얼 세대 가치관에 맞춰진 스토리라 해석된다.

밀레니얼 세대는 스스로의 인생을 개척해나가기를 좋아한다. 시대의 유행어인, 벤처, 파이어니어, 엔트러프레니어, 인큐베이터 같은 캐릭터를 흠모한다. 페이스북의 마크 저커버거는 밀레니얼 세계관 속의 영웅에 해당한다. 그러나 주목할 부분이 하나 있다. 독창성, 창조성을 부르짖는 밀레니얼 세대지만 정작 경제적 문제에 관해서는 부모에 전적으로 의존한다. 대학을 마쳐도 독립하지 않고 부모와 함께 사는 밀레니얼 세대는 전체의 35%에 달한다. 용돈도 부모로부터 받는다.

밀레니얼 세대는 독립하지 않는 이유를 부모 탓으로 돌린다. 부모인 베이비붐 세대가 함께 살고 싶어하기 때문에 할 수 없이 얹혀산다는 식이다. 클린턴 전 대통령 부부와 무남독녀인 첼시의 관계를 보면 그 같은 변명이 통할 듯하다. 밀레니얼 세대 첼시는 일 한 번 안 한 백수다. 부모 덕분에 여기저기 얼굴을 내밀지만, 경쟁력이 없기에 결국 부모가 만든 단체인 클린턴 재단 공동이사장에 취임한다. 결혼과 더불어 500만 달러 짜리 집을 구입하기도 한다. 결혼 전에는 부모와 함께 살았고, 결혼 후에는 부모와 가까운 동네에 거주한다. 전부 부모가 만들어준 삶이다.

로마는 바로 악의 총본산이다


▎이라크 전쟁 당시 조지 W 부시 미국 대통령은 전 세계 국가에 미국의 친구인지 적인지 분명히 밝히라고 요구했다. / 사진·중앙포토
실제 행동을 보면 너무도 다르지만, 밀레니얼 세대는 독립과 창조를 생명으로 여긴다. 아리우스로부터 도움을 받아 성공하는 것이 아니라, 혼자의 힘으로 목표를 달성한다는 것이 밀레니얼 세대가 강조하는 입으로서의 가치관이다. 원수를 사랑하자고 말하지만, 이스라엘의 원수인 로마 장군의 도움으로 목표를 달성해서는 안 된다는 것이 밀레니얼 세대의 생각이다. 현실적 실리는 챙기지만, 대의명분은 원대하다.

상연 때마다 조금씩 각색되는 <벤허>지만 동양적 사고로 볼 때 근본적으로 이해가 안 되는 부분이 하나 있다. 메살라에 대한 판단이다. 메살라는 로마의 힘을 믿고 로마의 법과 질서를 전 세계에 확산시키려는 신념을 갖고 있다. 벤허가 유대교에 기초한 유일신인데 반해, 메살라는 로마 황제가 유일신에 해당된다. 로마에 인생을 걸고 전쟁에 참가해 무공을 세운다. 이스라엘로 부임을 하면서 당시 독립을 원하던 유대인들을 공략해야 할 임무를 맡게 된다. 이스라엘의 지배자인 벤허에게 협력할 것을 요청하지만, 거부당한다.

이후 메살라는 작은 실수를 저지른 벤허를 로마의 적으로 규정하면서 갤리어 노예로 떠넘긴다. 어릴 때 친구를 감옥에 집어넣고, 벤허 집안 자체를 풍비박산낸 점은 분명한 악행이다. 그러나 로마를 위해 사(私)를 버리고 공(公)에 집착하는 군인 메살라의 책임감이란 측면에서 보면 다른 해석이 가능해진다.

사실 벤허만 해도 100% 선이라 부르기 어려운 부분이 많다. 아무런 대책 없이 친구의 요청을 거절하면서 로마의 힘에 반대하는 것이 이스라엘 지도자로서의 자세일까? 좀 더 유연한 자세로 로마와 대화를 나눌 수도 있을 텐데 유일신 사상에 근거해 로마의 모든 것을 근본적으로 부정한다. 통 크고 멋있을지는 몰라도 결코 현명하지 못하다. 자신이 잘못 판단하거나 행동할 경우 다른 이스라엘인이 피해를 입게 된다.

그러나 벤허는 끝까지 메살라의 요청을 거부한다. 이 모든 모순에도 불구하고, 벤허는 신의 축복 속에 살아남는 선으로, 메살라는 변명의 여지가 없는 악의 화신으로 규정된다. 2016년 영화에서 메살라가 살아난 것은 선악 여부와 무관한, 밀레니얼 세대 세계관에 의해 각색된 것에 불과하다. 2016년 영화에서도 메살라는 악이다.

메살라에 대한 동정은 동양인이라면 너무도 당연히 느낄 수 있을 듯 하다. 미국인은 어떨까? 필자의 친구인 미국공영 라디오(NPR RADIO)에서 일하는 40대 중순 여성에게 물어봤다. 답은 간단하다. “영화에서 로마는 악이다. 부분적으로 옳은 구석이 있을지 몰라도 통하지 않는다. 착한 악, 부지런한 악, 귀여운 악, 피해를 주지 않는 악, 책임감이 강한 악, 눈물이 많은 악… 전부 다를 듯하지만, 악은 악이다. 신에 어긋나는 모든 것이 전부 악이다. 영화에서 로마는 바로 악의 총본산이다. 로마를 지지하는 모든 것이 악이다.”

어머니를 악마로 만든 모차르트


▎1. 음악의 신동으로 불린 모차르트. / 2. 서울 서초구 예술의전당 무대에 올려진 모차르트의 오페라 <마술피리>. / 사진·중앙포토
이 친구의 설명에 따르면, 부분적·상대적 판단을 허용하지 않는 것이 악이다. 악으로 단정된 순간, 절대적·일방적 기준에 의해 단죄될 뿐이다. 중간에 벤허의 가족을 몰래 도와준다고 해도, 노예로 간 벤허를 풀어주도록 힘을 쓴다고 해도 메살라는 악에 불과하다. 유다가 예수를 밀고한 것을 아무리 뉘우친다고 해도 신에 맞선 악은 결코 용서받을 수 없다.

벤허에서 볼 수 있는 선악에 대한 확실한 구별은 원칙과 가치라는 측면으로 풀이될 수 있다. 메살라에 대한 동정에서 보듯, 때에 따라 선악도 임의적으로 해석될 수 있는 곳이 동양이다. 정치적으로 대충 타협하면서 선을 넘나드는 식의 사고나 행동을 유연하다고 말한다. 천안문 망루에 서서 공산 독재자들과 손을 잡은 박근혜 대통령의 모습도 동양적 정치감각으로 본다면 대단히 유연하다고 볼 수 있다.

서방은 다르다. 부시 대통령은 이라크 침략 당시 전 세계 모든 국가에게 미국의 친구인지 적인지를 분명히 밝히라고 말한다. 돌이켜보면 사담 후세인도 선으로서 규정될 수 있는 부분이 적지 않다. 그러나 그는 악이다. 서방의 선악의 기준은 기본적으로 신과의 관계를 염두에 둔 것이다. 인간의 논리인 정치에 의한 타협이 선악의 기준이 될 수가 없다. <벤허> 속 등장인물에 대한 시각차는 기본적으로 동과 서가 가진 가치와 원칙의 문제에 관련된다.

사실 선악 문제와 관련해 동양인의 사고와 유리된 얘기가 서양의 고전에서는 넘치고 넘친다. 모차르트가 남긴 오페라 <요술피리(Die Zauberflöte)>의 스토리를 살펴보자. 왕자 타미노는 어둠의 여신으로부터 자신의 딸인 파미나 공주를 구해달라는 요청을 받는다. 위기 때 도움을 주는 요술피리도 왕자에게 제공된다. 파미나 공주가 있는 곳은 지혜의 신인 자라스트로(Sarastro)다. 어둠의 여신의 남편이다.

그러나 왕자 타미노는 갖가지 모험을 하는 동안 어둠의 여신이 사악하고, 지혜의 신이 옳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 우여곡절 끝에 모두가 힘을 합쳐 어둠의 여신을 물리치고 자라스트로의 축복 하에 타미노와 파미나가 결혼한다.

오페라를 본 사람이라면 동양인이 이해하기 어려운 몇 가지 난관에 직면하게 될 것이다. 어머니를 악당으로 만들고, 악당 어머니가 딸에게 칼을 주면서 아버지를 죽이도록 명령하기도 한다. 아무리 그래도, 동양권에서는 딸에게 칼을 주면서 아버지를 죽이라는 어머니와 관련한 스토리가 없다.

모차르트가 막장 스토리에 근거해 오페라로 만들었다고 볼 수 있겠지만, 서실 서방의 사고로 보면 막장 어머니·아버지·자식·가족에 대한 얘기는 그다지 특별하지도 않다. 인간 자체가 막장이란 전제 하에서 모든 얘기가 시작된다. 어머니·어버지·왕·스승·상사… 그런 사람이기에 특별하다고 생각하는 사고 자체가 서방에는 없다. 동양이 그런 환상적 사고를 보편적으로 만들어 확산해낸 것에 불과하다. 한국 신문에 거의 매일 등장하는 혈육이나 조직 내 막장 스토리는 서방 시각에서 볼 때는 너무도 일상사적 사건에 해당된다.

모순을 내보이는 서양, 미사여구와 명분으로 덮는 동양

그리스 비극 <오이디푸스>에서 보듯, 아버지를 죽이고 어머니와 결혼해 자식을 낳는 근친상간이 고전적 스토리의 중심이다. 오이디푸스 같은 인간이 되지 말라는 교훈으로서의 비극이겠지만, 거꾸로 뒤집어 보면 그 같은 인간형이 많았다는 것도 부인할 수 없다.

서방은 그러한 인간적 모순을 숨기지 않고 모두에게 펼쳐 보여준다. 동양은 살벌하고도 모순된 상황과 현실을 미사여구와 명분으로 뒤덮는다. 좋은 부분만 강조하는 과정에서 아예 본능적·원초적 현실을 도외시하고 무시하게 된다. 바이블을 보면 아브라함이 자식인 이삭을 신에 대한 제물로 죽이려 하고, 노아는 술에 취해 자신의 딸과 관계를 갖은 뒤 후손을 낳는다.

어릴 때 ‘과연 그런 일이 있을 수 있을까’라고 되물었지만, 사실 현실을 보면 비슷한 일들이 꼬리를 물고 있다. 갑자기 터진 것이 아니라, 인류가 시작된 이래 지속된 비극적 인간사다. 그 같은 사실을 어떻게 이해하고 판단할지에 대해 동과 서가 전혀 다르게 표현할 뿐이다.

카시오가 되든 <벤허>가 되든 어제와 오늘 그리고 내일을 통시적으로 살펴볼 소재는 무궁무진하다. 세월이 흐를수록 어제의 논리가 아름답다고 느낄지 모르겠다. 오늘은 물론 내일에 대한 반감도 강해질 듯하다. 그러나 역사는 항상 오늘의 새로운 가치를 통해 미래로 발전된다. 아무리 아름답더라도 시간이 지나면 진부해진다. 2017년 신년이 되면 카시오 시계에 이어 300달러짜리 애플워치를 하나 장만할 생각이다. 더불어 <레 미제라블> 영화 1935년판, 1978년판, 1998년판의 작품을 비교해 시청하는 ‘숙제’도 올해 중에 끝낼 생각이다.

유민호 - 미국 워싱턴에 있는 에너지·IT 컨설팅 회사 ‘퍼시픽21’의 디렉터. ‘딕 모리스 선거컨설턴트’ 아시아 담당. 연세대 정치외교학과를 졸업하고 서울방송(SBS) 기자로 일하다가 1994년 일본 마쓰시타정경숙 15기로 입숙해 5년 과정을 마치는 동안 125개 나라를 순회했다. 조지워싱턴 대학 E-Politics 프로젝트 디렉터, 일본경제산업성 연구소(RIETI) 연구원을 지냈다. <백악관에서 일하는 사람들> <중국 소프트파워> <미슐랭을 탐하다> 등 다수의 저서가 있다.

201610호 (2016.09.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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