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치.사회.북한.국제

Home>월간중앙>정치.사회.북한.국제

[특별기획│2017 대선주자 릴레이 인터뷰] 도올이 묻고, 남경필이 답하다 

“자주적 국가로 코리아리빌딩!” 

기획·진행=한기홍, 김포그니 월간중앙 기자 glutton4@joongang.co.kr / 사진=오상민 기자 osang@joongang.co.kr
선거구 개편, 공천제도 개혁이 개헌보다 더 시급한 과제… 아(我)의 독단을 버리고, 숙의·대화·타협하는 협치정치 구현해야
개방적인 정신으로 공동체의 다양성을 포용할 수 있는 정치인으로 도올은 남경필 지사를 꼽았다. 반드시 고생을 하고 큰 사람이라야 이 세상을 구원하는 것은 아니며, 오히려 약자의 ‘르쌍티망(원한)’에 젖은 사람은 사회에 대한 분노 때문에 전체를 포섭하지 못한다고 보았다. 남경필에게 대선 도전은 자신 안의 소년을 죽이고, 성숙한 인간으로 다시 태어나는 데에서 시작한다. 그가 내세운 대한민국 리빌딩 구상 역시 국가 자주성의 확보가 그 첫걸음이다. 도올은 남경필에게서 그 성숙한 정치의식을 발견했다. <편집자>


▎10월 6일 도올과 남경필 지사는 여의도 국회의사당 영빈관인 사랑재에서 만나 담소를 나누며 사진촬영을 했다.
한선처절(寒蟬凄切), 대장정만(對長亭晩), 취우초헐(驟雨初歇). 이것은 내가 쓴 <시진핑을 말한다>라는 책에서 시진핑이 자기 인생을 표현한 송사(宋詞) 한 구절의 주인공, 유영(柳永, 987~1053)의 ‘우림령(雨霖鈴)’이라는 사패의 첫머리에서 따온 것이다. 유영은 주방언(周邦彦)과 함께 송사의 완약파(婉約派: 사의 스타일이 아리따운 여인처럼 부드럽고 함축미가 있다는 뜻)의 대표적 사인으로 꼽힌다. 왕꾸어웨이(王國維, 1877~1927: 중국 근세학문의 요람이라고 여겨지는 개화기의 대석학)가 <인간사화(人間詞話)>에서 말한 ‘인생삼중경계(人生三重境界)’의 제2경계에 유영의 사가 하나 들어가 있다.

그런데 이 ‘우림령’이라는 사패는 당명황(唐明皇)이 사랑하는 양귀비를 그녀의 죽음을 요구하는 군대에 내어주고, 촉도로 가는 길에 장맛비가 짓궂게 내리는 중, 깊은 골짜기 잔도(棧道)를 건너는데 방울소리가 딸랑딸랑 들리자, 그 소리가 마치 양귀비가 흐느껴 우는 듯한 서글픈 느낌을 자아내어 이 애도의 곡을 지었다고 한다. ‘우림령’은 본시 매우 구슬픈 곡조의 노래인데, 송나라의 사인인 유영이 그 곡에다가 연인들의 이별을 노래하는 가사를 새로 붙인 것이다. 여기 ‘장정(長亭)’이라는 것은 경성 강변에 있던 나루터인데 단정(短亭)에 대비되는 것이다. 장정은 25리마다 있는 큰 나루터이고 단정은 그 중간중간에 있는 작은 나루터이다. 장정 앞에는 포장을 드리운 주막집(장음 帳飮)들이 두서없이 즐비하게 깔려 있고, 이별하는 사람들이 마지막 별리주(別離酒)를 들이킨다. 그래서 차마 헤어지지를 못하고 눈물을 흘리는데 난주(蘭舟: 떠나가는 나룻배를 아름답게 표현한 말)는 출발을 재촉하고 있다.

떠나는 배와 강안에 서 있는 연인이 서로 잡은 손, 서로 흐르는 눈물만을 쳐다보다가 목이 메어 결국 아무 말도 하지 못한다(경무어응열 竟無語凝噎). 이 사의 백미는 아무래도 이 한 구절에 있는 것 같다. 정감이 풍부한 사람들은 예로부터 특별히 이별을 서러워했다는데(다정자고상리별 多情自古傷離別), 아~ 더욱이 이를 어찌 감당하랴(갱나감 更那堪)! 모든 것이 차갑게 떨어지는 쓸쓸한 가을이라니(냉락청추절 冷落淸秋節)! 이별도 감당키 어려운데 게다가 모든 것이 냉락하는 쓸쓸한 가을은 더욱 감당키 어렵다는 것이다. ‘갱나감’을 중국말로 하면 ‘껑나칸’이 되는데, 이 사를 중국말로 읽을 때, ‘껑나칸’이라는 4-3-1성조의 묘미는 무한한 애조를 자아낸다. 처음에 ‘한선처절’이라 말한 것은 늦가을 매미소리가 처절하게 운다는 뜻이다. 세 번째 구인 ‘취우초헐’은 소낙비가 방금 멈추었다는 뜻이다.

내가 갑자기 왜 남경필 인터뷰를 집필해야 하는 이 순간에, 유영의 당현종 사패구절을 들먹이고 있는가? 나도 이제 공자가 말한 ‘종심소욕불유구(從心所欲不踰矩)’의 나이로 접어들었다. 그 뜻인즉 마음이 욕하는 바를 따라 행해도 그 행동이 세속에서 말하는 법도를 크게 벗어나지는 않는다는 뜻이다. 내가 쓰는 대선기획 시리즈는 하나의 파격이다. 그러나 파격이라 할지라도 규구(規矩: 컴퍼스와 곱자. 사물의 준칙)를 크게 벗어나지는 않는다. 그러나 파격이 하나의 새로운 정격으로 정착되기까지는 많은 시련이 따른다. 초기에 겪어야 하는 많은 우려와 심려를 나는 ‘취우(소낙비)’라고 표현했다. 그 소낙비가 방금 그치고 난 소조한 가을, 이별을 서러워하는 나루터에는 한선(寒蟬)이 처절하게 울어대고 있다. 나는 ‘한선처절’을 이 문장을 대하는 수없는 민중의 아우성으로 인지했다. 한선처절, 대장정만, 취우초헐!

늦가을 매미 울음소리를 민중의 아우성으로 인지


▎인터뷰 당일 사진을 촬영했던 국회의사당은 맑고 화사했다. 남 지사는 이날 도올과 대화에서 “의원내각제로의 개헌이 만병통치약은 아니다”라는 소신을 밝혔다.
최근 나는 내가 가슴속 깊이 존경하는 스승 한 분을 만나 뵈었다. 고려대학 영문과를 은퇴하신 김우창 선생님이다. 나는 하버드 대학에서 학위공부를 하는 동안에, 김우창 선생께서 객원교수로 오셔서 바로 내가 사는 곳 앞에 거처를 마련하고 계셨다. 2년 가까이 김 선생님을 모시면서 나는 너무도 많은 것을 배웠다. 학문을 하는 태도라 할까, 학문 그 자체의 궁극적 의미라 할까, 하여튼 이런 문제에 관하여 김우창 선생님은 나에게 심오한 영향을 주셨다. 학문의 의미는 결국 나의 현재적 삶의 깨달음의 역정일 뿐이라는 교훈을 몸소 무언(無言)으로 보여주셨다. 내가 한국에 돌아와 첫 글을 발표한 계기도 선생님께서 민음사 <세계의 문학> 잡지 편집주간으로 계시면서 마련해주셨다. <세계의 문학>에 실린 ‘동양학 어떻게 할 것인가?’는 매우 단순한 번역문제를 다룬 글인데, 대한민국 지성계의 가히 폭발적인 반응을 불러일으켰다. 내가 양심선언을 발표하고 고려대를 떠났다가, 노태우 정권 때 다시 복직을 시도하자 철학과 교수님들께서 일치단결, 나의 복직을 막았다. 이때도 고려대에 도올과 같은 인재가 안 돌아오는 것은 고려대의 불행이라고 말씀하시며 복직운동을 해주신 유일한 분이 김우창 선생님이셨다.

지금 이런 옛 이야기는 할 필요가 없다. 그런데 해야 할 이야기는 최근 김우창 선생님을 만나 나눈 내용과 관련된 것이다. 나는 늘 선생님의 학경(學境)에 대한 향심이 있으면서도, 30년 가까이 선생님을 찾아뵙지 못했다. 그런데 최근 작심하고 만나 뵌 것이다. 나는 뵌 김에 우리나라 미래에 관하여 정말 긴요한 과제상황이 무엇인지를 선생님께 여쭈어보았다. 선생님은 주저 없이 다음의 세 가지를 말씀하셨다. 아마도 이것은 평생을 진실하게 공부해온 노학자가 느끼는 ‘대인의 우환’과도 같은 것일 게다. 우리 모두에게 경종을 울리는 마음의 소리라서 여기 대선 인터뷰의 서막으로 소개하고자 한다.

그 첫째가, “도덕회복”이다. 이 말은 매우 진부하게 들린다. 늙은 꼰대의 상투적 얘기로 오해될 수 있다. 그러나 김우창 선생님의 이 말씀은 매우 심오한 새로운 것이다. 도덕에 관하여 20세기의 논리실증주의자들은 이모티비즘(emotivism)의 주장을 외쳤다. 모든 도덕적 명제가 결국 알고 보면 검증 가능한 아무런 근거가 없다는 것이다. “제기랄!” “예이끼!” “기분 나쁘다” 하고 아무 의미 없이 감정을 토로하듯이, 모든 도덕적 판단이 결국 발설자의 감정(emotion)을 표명하는 외마디에 불과하다는 것이다. 이것이 20세기 인류의 도덕관이 극단적인 회의주의 혹은 허무주의에 빠졌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다. 이모티비즘 이전의 근세 서양윤리관은 기껏해야 최대다수의 최대행복이라는 공리주의(utilitarianism)로 귀결된다. 그런데 어떠한 경우에도 도덕은 공리주의적 계산으로 다 해결될 수가 없다. 최대다수의 최대행복을 과연 어떻게 계산할 것인가? 행복을 과연 쾌락의 지수에 의하여 계산할 수 있을까? 신자유주의자들이 최대다수의 최대행복이라고 믿는 자본주의 체계가 과연 이 세계를 도덕적인 최선으로 휘몰아가고 있는가? 최대다수의 최대행복이 최선이 아닌 최악일 수도 있다.

김우창 선생님의 말씀은 도덕이란 이런 공리주의 계산을 뛰어넘는 우리 양심의 명령이나 보편적 선의지, 칸트가 말하는 정언명령(조건절이 없는 절대명령)과도 같은 것이며, 그 도덕이 가장 잘 표현된 것이 우리 전통사회가 가지고 있던 인의예지와도 같은 절대규범이라는 것이다. 인의예지의 정언명령을 회복하는 것이야말로 정치가의 ‘솔선수범(teaching by example)’이며 정치의 당위적 임무라는 것이다. 우리 사회는 도덕을 회복해야만 한다!

한시(漢詩)는 매 줄마다 자연을 읊는다


둘째가 “경제평등의 구현”이라고 말씀하신다. 이것은 이미 양극화·갈등의 문제로서 김종인 대표가 충분히 지적한 주제이므로 재론할 필요가 없다. 그러나 김우창 선생님은 이 경제 평등의 문제도 그 핵심은 공리주의적 계산에 있지 않다는 것이다. 다시 말해서 “너만 먹기냐? 나도 같이 먹자!”는 식의 질투·질시의 공리적 평등이 되어서는 아니 된다는 것이다. 즉 니체가 말하는 ‘르쌍띠망(ressentiment: 원망의 뜻인데, 약자의 강자에 대한 증오·복수심리)에서 우러나오는 평등이 되어서는 아니 된다는 것이다. 우리나라에서 논의되고 있는 금수저-흙수저론에 대하여도 김 선생님은 그것은 삶의 스타일에 관한 것이지 근본적인 수저계급론이 될 수는 없다고 말씀한다. 문제는 금수저이든 흙수저이든 수저의 기능은 밥을 먹는데 있다는 것이다. 모든 사람이 같이 즐겁게 밥을 먹을 수 있는 사회를 만드는 것이 중요하지, 금수저냐 흙수저냐 하는 문제에 과도하게 집착할 필요는 없다. 인간으로서 사람답게 살 수 있는 기반을 파괴하는 구조를 개혁하는 것이 중요하다.

셋째로 지적하신 문제가 자연과의 화해, 즉 환경문제였다. 김 선생님은 지속가능한발전위원회(SDC: Sustainable Development Commission)의 위탁으로 영국 경제학자인 팀 잭슨(Tim Jackson, 1957년생)이 쓴 <성장 없는 발전(Prosperity Without Growth)>이라는 책이 구현하고자 하는 정신, 세계지성들의 새로운 정신적 트렌드를 말씀하신다. 경제(economy)란 원래 ‘짜게 쓴다’, ‘절약한다’는 말이다. 즉 경제는 본시, 검약과 절약의 노모스(규범)였다. 그런데 언젠가 ‘소비가 미덕’이라는 거짓말이 판치게 되었다는 것이다. ‘성장 없는 번영’이란 곧 ‘소비 즉 낭비 없는 번영’을 의미한다. 경제학은 반드시 철학과 재결합되어야 한다.

“반소사음수(飯疏食飮水)하고 곡굉이침지(曲肱而枕之)해도 낙역재기중의(樂亦在其中矣)”라고 말한 공자의 의중을 깊게 생각해볼 때가 되었다는 것이다.

환경 말씀을 하시면서 나에게 하신 여러 말씀 중에서 나의 폐부를 찌른 명언이 하나 있다. 인간은 어떠한 경우에도 자연과 더불어 살지 않으면 행복할 수 없다고 말씀하신다. 서울사람들이 그나마 행복할 수 있는 가장 큰 조건이 바로 북한산을 끼고 있다는 것이다. 김 선생님은 영문학자로서 나에게 대오(大悟)의 한마디를 던졌다. “요즈음 한국시가 엉터리예요. 시단이 사라졌어요. 시에서 자연이 사라졌기 때문이죠. 김 선생님이 좋아하는 한시가 뭔 줄 아세요. 한시는 매 줄마다 다 자연을 읊어요. 장엄한 애국정서를 말해도 자연을 읊고, 이별의 슬픔이나 재회의 환희를 말해도 다 자연을 빌어 말하죠. 김 선생님 같은 분이 한국의 젊은이들에게 부지런히 한시를 가르쳐주어 자연의 위대함, 그 불가항력적인 권위를 일깨워주어야 합니다. 정말 부탁드려요. 인간은 자연이 없이 행복할 수 없어요.”(이상의 김우창 선생님과 나의 대화는 후즈 닷컴hooz.com 인터넷도올서원 서양철학사강의에 수록되어 있다).

유영은 나루터 이별의 슬픔을 이와 같이 말한다. “오늘밤 이 술이 깨면 나는 어디에 있을 것인가? 버드나무 흐느적거리는 강안에 누워 새벽의 찬바람, 희미해져가는 이지러진 달을 쳐다보고 있을까? 이렇게 해가 지나다 보면 좋은 시절, 아름다운 풍경이 있다 한들 뭔 소용이 있겠는가? 그런 시절이 있다 한들 천 가지의 아름다운 풍광과 정념을 과연 누구와 나눌 수 있을 것인가?(今宵酒醒何處 楊柳岸, 曉風殘月。 此去經年, 應是良辰, 好景虛設。 便縱有, 千種風情, 更與何人說)”

경기도 남 지사는 충청도 안 지사와는 매우 대비되는 인물이다. 우선 안희정은 삶의 역정이 고난의 행군이었지만, 남경필은 부잣집, 권세가 있는 집안에서 편하게 자라난 사람이다. 학교도 안희정은 고려대를 다녔고 남경필은 연세대를 다녔다. 안 지사가 막걸리타입이라면, 남경필은 역시 맥주타입이다. 옛말에 돈 10원이 있으면, 서울대학생은 문구를 사고, 연대학생은 구두를 닦고, 고대학생은 막걸리를 마신다고 했는데, 그런 기질의 차이가 분명 양자 간에 있을 것이다. 안 군은 외국유학을 하지 않았고 남경필은 비록 짧은 기간이었지만(아버지 남평우 의원의 서세로 급히 귀국. 1998년), 예일대학교 경영대학원 MBA과정을 졸업했다. 학부의 전공도 안 군은 철학이었지만, 남 지사는 사회사업이다. 인문학의 정통 분야는 아니다. 생긴 것도 안 군은 매우 강렬한 눈매와 잘생긴 콧등이 단단한 느낌을 주지만 남경필은 물끄러미 응시하는 눈동자와 아담한 콧날이 부드러운 느낌을 준다. 안 지사는 83학번이고, 남 지사는 84학번이다. 성장배경으로 보자면 나는 남경필에게 더 가깝다 말할 수 있겠지만, 아무래도 대학과 전공학문에서 받은 기질로 운위한다면 안희정과 공통분모가 더 많다. 안 군은 나의 사상적 영향을 받아서인지, 종교관이 좀 복잡하다. 그런데 남 지사는 종교관이 매우 단순하다. 누군가 안희정은 무신론자인데도 영성이 느껴지고 남경필은 유신론자인데 영성이 느껴지지 않는다라고 말했는데 양자의 어느 측면을 정확히 표현한 말일 것이다. 해방 후 우리나라 지배층을 성격 지우는 특징으로서 우리는 미국 유학생, 골수 기독교인, 친미반공 등의 성향을 들 수 있는데, 마지막 친미반공의 성향을 제외하면 남경필은 매우 티피칼한(typical: 전형적인) 지배계층에 속한다고 말할 수 있다.

남경필은 자기 스스로를 ‘오렌지족’이라고 규정하는 것을 부끄럽게 생각하지 않는다. 한 인물이 반드시 고생을 하고 큰 사람이라야 이 세상을 구원하는 것은 아니다. 약자의 ‘르쌍띠망’에 젖은 사람은 사회에 대한 분노 때문에 전체를 포섭하지 못하는 좁은 생각을 가질 수도 있다. 고생을 하지 않은 사람이 오히려 대국을 포섭하고, 다양성을 포용할 수도 있다. 그러나 나와 남경필의 가장 큰 차이는, 나는 고등학교 시절 모범생이 아니었다는 것과 성장과정에서 사경을 헤매는 실존적 고투가 있었다는 것이다. 남경필은 너무 순탄하게 컸다. 그러기 때문에 그는 청순하고 해맑은 웃음을 잃지 않는다. 누구에게든지 거부감을 주지 않는다. 사람과의 폭넓은 친화력이 그의 특징이다.

“프랑스는 비종교적, 민주적, 사회적 공화국”


▎지난해 5월 28일 중앙일보 주최 ‘신문 콘서트’에 출연해 만난 남경필 지사(가운데)와 안희정 지사(왼쪽)가 유쾌하게 웃으며 담소를 나누고 있다.
내가 그를 처음 만난 것은 2002년 12월 6일, 가회동의 어느 카페였다. 나는 그때 대선을 앞둔 이회창 후보를 인터뷰하였는데 그가 대변인으로서 배석했던 것이다. 그 후로 나는 남경필을 한 번도 만나질 못했다. 14년이 지난 오늘 나는 그를 대선의 도전자로서 다시 대하게 되었다. 사진을 찍기 위해 국회 의사당 내에 있는 사랑재를 같이 거닐었고 대화는 여의도에 있는 경기도 서울사무소에서 진행되었다.

만나자마자, 그는 나에게 ‘행복’이니 ‘하나님 앞에 선 인간의 불완전성’이니 하는 말을 읊어대서 나에게 좀 꾸중을 들었다. 행복을 인생의 목표로 삼는다는 것은 인간의 불행이나 고통, 고뇌, 불가항력적인 고난이나 재난에 대한 인식이 부족하다는 것이고, 하나님의 존재를 모든 논리의 선행조건으로 앞세운다는 것은 인간학적 깊이가 부족하다는 것이다. 정치는 신앙의 고백이 아니다. 정치가는 자신의 개인적 신앙이 어떠한 것이든지 간에 종교적 간판을 탈색시키는 것이 정당하다. 정치가는 ‘여민동락(與民同樂)’을 추구해야 하고, 보편적 가치를 표방해야 한다. 민주주의가 가장 진전되었다고 말할 수 있는 프랑스 제5공화국의 헌법, 제1조는 “프랑스는 비종교적, 민주적, 사회적 공화국”이라고 말한다. 그리고 이 삼자는 불가분의 것이라고 말한다. 다시 말해서 공화국의 민주주의적 성격과 사회주의적 성격을 동등하게 인정했는데, 그 양자에 앞서 제일 먼저 말한 것이 바로 ‘비종교적’이라는 것이다. 다시 말해서 종교를 근원적으로 탈각하는 성격을 민주의 근본으로 인식한 것이다. 그리고 또 말한다. “프랑스는 어떠한 신조든지 존중한다.” 민주사회에서는 특정한 신앙의 프라이오리티(priority: 우선 순위)가 있을 수 없다. 나는 정치인이 나와 같이 식사를 할 때 성호를 긋거나 기도를 하면 하류로 취급한다. 그는 정치의 기본을 잘 모르고 있는 것이다.

남경필은 타인에게 그러한 문제를 한 번도 지적당한 적이 없는 듯했다. 그만큼 순진하고 순수하고 자기 생각을 거침없이 표현하는 사람이었다. 신을 명사가 아닌 형용사로서 생각하는 나 같은 사람에게는 좀 적절치 못한 발언이었다. 신은 명사가 되면 무제약자가 될 수 없다. 신은 우주 밖에 있는 존재가 아니라 우주 내에서 우주의 과정에 동참하고 있는 어느 작용에 대한 형용사적 기술일 뿐이다.

남 지사는 안 지사와는 달리 자신을 ‘개헌론자’라고 규정하고 들어간다. 그러나 그와 깊게 이야기를 해보면 그 또한 단순한 개헌론자가 아님이 드러난다. 개헌은 궁극적인 목적이지만, 그것은 역사를 드라이브해나가는 하나의 이데아적 강령일 뿐, 지금 당장 해야 할 일은 개헌이 아닌 현행 법질서 내에서 시급히 해결해야 할 과제상황들이라는 것이다. 나도 이 대선기획 인터뷰를 떠맡기 전에 ‘개헌’이 과연 무엇을 의미하는지도 몰랐다. 도올의 무식함을 드러내는 고백이라 좀 쑥스럽지만 국민 대다수가 나 같을 것이라고 생각된다.

개헌이란 무엇인가? 개헌은 “헌법을 고친다”는 뜻이다. 그럼 우리가 물어야 할 더 본질적인 질문은 ‘헌법’이란 무엇이냐는 것이다. 헌법은 ‘컨스티튜션(Constitution)’이라는 영어단어의 번역일 뿐이다. 그 말이 우리고전에 원래 있는 개념은 아니다. 헌법이란 국가나 다른 기관이 그것에 의하여 다스려지는 일련의 근본적 원리나 사회규범으로서 정착된 전례들의 한 세트를 의미한다. 이 원칙이나 원리들이 함께 한 국가의 성격을 구성하기 때문에 컨스티튜션이라고 한 것이다. 컨스티튜트(constitute)라는 말은 구성한다는 뜻이다. 우리 한의학에서는 인체의 ‘체질’을 컨스티튜션이라고 하는데 모종의 상통점이 있을지도 모른다. 국가의 체질이나 국가를 구성하는 사람의 체질이나 비슷한 의미가 있을지도 모른다. 사람의 체질은 변할 수 없지만, 국가의 체질은 변할 수 있다. 그것이 ‘개헌’이라는 것이다. 개헌은 반드시 일차적으로 국회의 의결을 거치며, 재적의원 3분의 2 이상의 찬성을 얻어야 한다. 그리고 국회가 의결한 후 30일 내에 국민투표에 부쳐 국회의원 선거권자 과반수의 투표와 투표자 과반수의 찬성을 얻어야 한다. 그러니까 “개헌, 개헌” 운운하지만, 개헌은 결코 쉽게 이루어질 수 있는 사안이 아니다.

내각제는 본질 상 입헌군주제를 전제로 한 제도


▎2003년 당시 한나라당 남경필 의원과 윤여준 의원이 국회 본회의장에서 만나 대화하고 있다. 현재 두 사람은 경기도에서 함께 일하며 협력하고 있는 관계가 됐다.
그런데 왜 개헌을 하려고 하는가? 많은 사람이 현행 대통령제 5년 임기를 4년 중임제로 바꾸어, 한 번 당선된 사람이 8년 해먹자는 것으로 생각하는데 실제로 개헌을 운운하는 사람들의 99%가 이런 임기연한에 관한 관심은 없다. 그럼 왜 하는가? 권력이 집중된 중앙집권제의 ‘대통령제도’ 그 자체를 없애버리자는 것이다. 대통령을 없애자는 것이다. 대통령이 없어지면 그 대신 뭐가 들어앉는가? 그것이 바로 ‘수상’이라는 것이다. 수상은 총리와는 다른 것이다. 총리는 대통령의 꼬붕이지만, 수상은 엄연한 국가행정의 수반이다. 그럼 수상과 대통령은 뭐가 다른가? 수상은 국민의 직접선거에 의하여 뽑히는 것이 아니다. 이것이 바로 ‘의원내각제’라는 것이다. 다시 말해서 ‘총선’만 있고 대통령을 직접 뽑는 국민의 ‘대선’은 사라지게 된다. 총선에서 제1당이 된 당의 당수가 곧바로 수상이 되고, 수상이 구성하는 내각도 수상이 속한 당의 의원들이 담당하게 된다.

물론 내각을 구성하는 방식은 여러 가지가 있을 수 있다. 그러나 가장 중요한 것은 국가의 행정체계가 그 민주적 정당성을 입법기관인 국회로부터만 연역해낸다는 것이다. 내각 즉 행정부의 존립근거가 전적으로 의회신임 여부에 달려 있는 정부형태이다. 과연 이러한 의원내각제가 우리나라 사람들의 기질이나 사고방식에 더 적합한 것일까? 그렇지 않아도 부실한 국회에 더 많은 권력을 집중시킨다는 것인데 과연 이러한 내각책임제, 혹은 의회정부제(Parliamentary system)가 우리 사회를 민주화시키는 데 결정적인 공헌을 할 것인가? 과연 내각제가 우리 사회의 모든 문제를 치유할 수 있는 만병통치약인가? 우리가 옆 나라 일본보다 더 민주의식(democratic consciousness)이 높다는 자부심을 가질 수 있는 것은 바로 의원내각제가 아닌 대통령제를 가지고 있기 때문이 아닐까? 자민당계열 자체 내의 지리한 패거리싸움의 역사를 일본국민이 근원적으로 탈피하지 못하는 것이 바로 내각책임제라는 제도 때문이 아닐지?

우리가 알아야 할 것은 내각책임제라는 정부형태가 인류 역사에서 등장하게 된 그 결정적 이유는 그 제도가 입헌군주제를 전제로 해서만 의미가 있었다는 역사적 사실을 한번 상기할 필요가 있다. 내각책임제의 소이연은 역사적으로 군주의 직접통치를 차단하기 위한 것이었다. 그러나 지금 우리는 군주(monarch)를 가지고 있지 않다. 국민의식도 제도로서의 군주제 성격으로부터는 크게 탈피되어 있다. 단지 대통령의 군주흉내를 내는 권위주의 행태를 교정하면 된다. 그것은 현행 법질서 내에서도 얼마든지 가능한 것이다. 자아! 너무 복잡하게 얘기를 풀어나가지 말자! 우리나라도 이미 내각제를 실천해본 나라이다. 4·19학생혁명으로 제1공화국이 붕괴된 후 새롭게 성립한 제2공화국은 내각책임제의 헌정체계였다. 그러나 장면이 국무총리로 있었던 이 내각책임제는 5·16 군사쿠데타에 의하여 11개월 만에 종료되었다.


아마도 우리나라 최근 정치사에서 내각제 발언을 가장 줄기차게 많이 한 사람이 김종필일 것이다. 영원한 2인자였던 그에게는 체질적으로 내각제가 구미에 맞을지 모르겠으나, 진정한 리더가 되기를 꿈꾸는 자들은 내각제를 선호하지 않는다. 우리 국민도 최고의 통치자를 자기 손으로 뽑는 직선제의 스릴이나 신바람을 포기할 생각이 없다. 개헌은 실상 국회 권력자들 내에서 논의되는 푸념이다.

남경필도 의원내각제로의 개헌이 우리역사를 바로잡는 만병통치약이 아니라고 생각한다. 과연 내각제로 갈 것이냐 하는 것도 점차적 실험과정을 거쳐 결정될 문제이며, 어떠한 형태의 내각제를 우리가 가지게 될지에 관해서도 우리 정치사의 주체적 시행착오 과정을 거쳐 우리 체질에 맞는 유니크한 시스템을 개발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개헌 운운하기 전에 우리는 현행 법질서 내에서 국회의원들의 합의로만 가능한 개혁을 빨리 단행해야만 한다고 주장한다. 그 첫째가 국회의원들의 특권 내려놓기이고, 둘째가 선거구 개편이고, 셋째가 공천제도개혁이다. 첫째 문제는 국회의원 되었다고 VIP 대접 기대하지 말라는 얘기 같은데, 그런 문제는 여기서 특별히 논할 것이 없다. 중요한 것은 선거구개편과 공천제도 개혁인데 이 두 문제는 내각책임제 논의와 관계없이 별도로 진행되어야 할 문제라고 본다. 많은 사람이 내각제와 중대선거구 문제를 불가분의 한 세트로 생각하는데 그것은 매우 잘못된 인식이다. 중대선거구는 의회권력 그 자체에 대한 수술이며, 행정부조차 의회에 종속시켜야 한다는 내각제 논의와는 다른 차원의 문제이다.

우선, 중대선거구란 무엇인가? 현재 우리는 소선거구를 선거제도의 근본으로 삼고 있다. 소선거구제란 영어로 ‘the single member electorate system’으로서 하나의 선거구에서 1명의 의원만 선출하는 제도를 말한다. 여기에는 당·락이 확실히 존재한다. 이런 소선거구제도는 올림픽 금메달과 같은 것이다. 100m를 9초 60에 달리는 사람과 9초 70에 달리는 사람이 과연 실력과 디시플린(discipline: 단련)에 차이가 있을까? 그런데 금메달은 오직 최고기록자 단 한 사람에게만 주어진다.

소선거구제에서는 표를 다 똑같이 얻었어도 한 표만 더 많아도 그 사람은 국회의원이 되고, 단 한 표를 적게 얻었다는 이유로 차점자는 국회의원이 되지 못한다. 이 소선거구제가 바로 양당제가 유지되는 본원이다.

그런데 중선거구제에서는 1개의 선거구에서 2~3인의 국회의원을 선출하고 대선거구제에서는 4인 이상의 다수인을 국회의원으로 선출한다. 다시 말해서 1, 2, 3등에게 모두 똑같이 금메달을 주는 것이다. 소선거구제에서는 51% 득표한 사람에 대해 49%의 선거구민은 국회에 자신의 의사를 반영할 루트를 차단당한다. 과연 이것이 민주주의인가? 남경필은 “49% 낫싱”이라는 말을 계속하는데, 이것은 절대적으로 개선되어야 할 제도라고 강조한다. 한 선거구에서 여러 사람이 당선되는 제도는 사표(死票)를 최소화하며 다당제의 가능성을 연다. 소수대표나 새로운 정당이 의석을 확보할 수 있다. 그리고 국회의원 출마자들도 양당제의 성격이 다원화되기 때문에 정당의 브랜드보다는 그 자신의 독자적인 정책이나 비젼을 수립하는 데 힘쓰게 된다.

남경필식 협치는 행정부와 입법부가 공조하는 정치


▎도올과 남경필 지사는 국회 사랑재 주변 산책로를 함께 걸으며 한국 사회가 처한 문제의 근원이 무엇인가에 대해 폭넓은 대화를 나눴다.
이러한 중·대선거구제의 도입은 한국정치를 무조건 여·야 대립의 대결구도, 지연·혈연을 뛰어넘어 정책수립의 논리적·실천적 과제상황 속으로 떠밀어넣게 될 것이다. 이것이 진정한 민주의 시작이라고 본다. 중대선거구를 비판하는 자들은 군소정당의 난립으로 정치의 혼란이 발생할 우려가 있다고 보지만, 구더기 무서워 장 못 담그냐는 우리 속담대로 중대선거구가 단점보다 장점이 많을 것은 확실하다고 본다. 공천제도개혁도 ‘상향식 오픈 프라이머리’를 모든 당이 한날 한시에 개최하여 후보자를 민주적 선거를 통하여 뽑는다는 것인데, 그것도 매우 의미 있는 복안이라고 나는 생각했다.


▎미국 드라마 <왕좌의 게임>에서 존 스노우로 분한 키트 해링턴. 드라마에서 그는 한 현사로부터 “온전한 남자가 되라”는 조언을 듣는다. 이 드라마에 심취했던 도올과 남 지사는 현사의 강렬한 충고가 상징하는 바에 공감했다.
남경필의 모든 발상의 핵심에 깔려 있는 단어는, ‘협치(協治)’라는 것이다. 협치는 아(我)의 독단을 버리고, 숙의·대화·타협·소통의 정치를 해야 한다는 것이다. 민주주의 원칙인 삼권분립의 양대 기둥인 행정부와 입법부를 각기 민주적인 방식으로 뽑고, 그 독자적인 영역을 확보한 후에 양자가 협치할 수 있는 새로운 법제를 만들어야 한다는 것이 그의 주장의 핵심이다. 그 새로운 법제의 모델을 그는 경기도에서 실험적으로 실천하고 있다고 말한다.

작전권환수문제와 핵무장, 그리고 모병제 얘기가 결국 하나의 고리라고 말하던 끝에 그는 갑자기 재미있는 말을 꺼냈다.

“선생님! 혹시 <왕좌의 게임>(Game of Thrones: 2011년 4월부터 HBO에서 방영)이라는 미국드라마 보셨나요? 저는 지금 시즌5 중간을 보고 있는데요.”

아마도 이 말을 깨냈을 때 남경필 지사는 도올 김용옥이 이 드라마를 보았으리라는 것은 꿈에도 상상을 못했던 것 같다. 한 시즌이 10편으로 구성되어 있는데, 한 편이 대강 한 시간 전후 분량이 된다. 현재 시즌6까지 방영됐는데 나는 그 드라마 60개를 이미 다 보았다. 희랍신화에 정통한 나의 딸 김승중 교수가 이 드라마는 정말 한번 보실 만하다고 해서 보기 시작했는데, 아마도 내 눈이 침침하고 백내장기가 시력을 가리게 된 것도 <왕좌의 게임> 덕분이 아닐까, 그렇게 생각한다. 6시즌의 TV드라마가 60시간 이상 내 시력을 혹사했으니 그럴 만도 하다. 이 드라마는 미국의 톨킨(the American Tolkien)이라는 별명이 붙은 죠지 마틴(George R. R. Martin: 1948년 생)이 쓴 소설 <얼음과 불의 노래>(A Song of Ice and Fire)라는 에픽 판타지에 기초하여 수십 명의 감독이 달라붙어 만든 것인데, 아마도 보는 재미로 말한다면 이 이상의 재미있는 판타지는 만나기 어려울 것 같다. 정확한 역사적 사실을 배경으로 한 드라마가 아니기 때문에 모든 신화적 상상력이나 정치의 술수나 인간역사의 주요장면이나 철학이 압축되어 용해되어 있다. 하여튼 남 지사가 바쁜 중에도 이 드라마를 40편 이상 보았다는 것이 참 기특하게 여겨졌다.

난 60편을 옛날에 다 보았지. 우리는 <왕좌의 게임> 동창생이군.

“에엣! 참 대단하시군요. 그런데 윈터펠의 북방한계선인 나이트 워치(야경대)의 새로운 커맨더로 뽑힌 존 스노우가 북녘에 사는 야인들과 협력하기 위해 얼음장벽(Wall)을 넘어가려고 할 때 현사(賢師)를 만나는 장면이 있지 않습니까?”

이 장면에 관해서는 약간의 설명이 필요하다. 윈터펠은 웨스터로스 대륙의 북방에 위치한 나라인데 그 윈터펠의 북방 한계선에는 거대한 얼음장벽이 있고, 그 얼음장벽을 지키는 특수정예부대가 나이트 워치(Night’s Watch)이다. 이들은 독특한 윤리를 지닌 방위사단이다. 이 얼음장벽 이북에는 ‘야인’이라는 강인한 족속이 살고 있고, 또 ‘백귀’라는 좀비 족속이 무수히 있다. 이 작품의 첫 시즌 첫 작품이 ‘겨울이 오고 있다’(Winter is Coming)라는 제목으로 시작되는데 이 ‘겨울이 오고 있다’는 테마는 전 작품에 일관되어 있다. 겨울이 정말 닥치어 곧 웨스터로스의 전 대륙이 백귀에게 먹히어 버릴 수 있다는 위기감을 감지한 새 사령관(커맨더) 존 스노우(John Snow)는 자기들이 여태까지 대적해왔던 야인들과의 평화협상을 해야만 겨울과 백귀로부터 웨스터로스 전 대륙을 지킬 수 있다는 신념에 불타 있다. 그러나 야인들을 적대세력으로 설정하는 것으로만 자기들의 존재의의를 규정해왔던 특수윤리의 야경대 대원들은 모두 새 사령관 존 스노우의 야인 협상계획을 반대한다.

“존 스노우가 설득하다 하다못해 야경대의 정신적 지주인 황족 계열의 노인 현사를 찾아가잖아요. 그랬더니 그 노인이 ‘두 잇(Do it)’ 그래요. 네 생각대로 실행하라는 뜻이죠. 그리고 ‘킬 더 보이(Kill the boy)’라고 말합니다. 네 안에 있는 소년의 모습을 죽이라는 뜻이죠. 그리고 ‘비 맨(Be man)’이라고 말하죠. 온전한 인간이 되라는 뜻이겠죠. 저는 이 ‘킬 더 보이’라는 말에 너무도 깊은 감명을 받았습니다. 전작권 환수문제든 핵무기 개발문제든 우리의 새로운 국방체계를 위한 모병제안이든 이 모든 것이, 낡아빠진 반공 이데올로기와 미국 우산 속에 안주하는 것으로는 해결이 될 수 없다는 것입니다. 제가 왜 선생님을 여기서 뵙겠습니까? 저는 선생님과 토론하는 이 계기를 통해 공개적으로 ‘킬 더 보이’ 하고 싶습니다. ‘코리아 리빌딩’이란 말을 왜 제가 계속 외치겠습니까? 미국형님이 우리 문제를 다 해결해줄 수 없어서죠. 우리 민족, 우리 국가가 모두 다 함께 킬 더 보이 해야 돼요. 이것이 우리 대한민국이 도약할 수 있는 유일한 길이죠. 킬 더 보이! 비 맨!”

“겨울이 오고 있다”는 외침을 들어야


▎지난 10월 1일 충남 계룡대 대연병장에서 열린 국군의날 기념식. 남 지사는 모병제로의 전환 주장 배경에 자주적 국가로의 리빌딩 복안이 있다는 점을 강조했다.
이 릴레이 인터뷰의 기획자인 한기홍 기자는 내가 모병제 문제로 남 지사와 격돌할 것이라고 기대하고 있었다. 나는 매우 강렬한 모병제 반대론자이기 때문이다. 나는 우리 민족이 상무정신을 잃지 않아야 한다고 주장한다. 나는 국민개병제야말로 김우창 선생님이 말씀하신 새로운 규범윤리 회복의 매우 건전한 정신적 바탕이 될 수 있는 애국의 장(場)이라고 생각한다. 공리주의적 계산으로 철회할 수 없는 것이며, 결코 효율의 문제만으로 해결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남 지사는 인구감소, 국방예산, 무기체계 등에 관하여 매우 합리적인 복안을 제시했지만 나의 견해와 결코 충돌하지는 않았다. 안희정 지사가 비판하는 바, 너무 대선을 의식하여 ‘반찬가지만 올려놓는 화려한 밥상’을 차려놓는 것이 아니냐는 지적에 남 지사는 충분한 답변을 가지고 있었다.

나는 남 지사가 자신을 존 스노우와 동일시한 것에 깊은 감명을 받았다. 웨스터로스 대륙의 북방한계선은 우리나라의 휴전선과도 같다. 우리나라 보수세력은 오직 북방한계선 이북의 야인들을 적대세력으로 설정하는 것만으로 자신들의 존재 이유를 삼아왔던 야경대 대원과 동일하다. 그러나 이제 그 야경대의 일원인 존 스노우는 “겨울이 오고 있다”고 외친다. 우리나라 경제, 삼성, 포철, 현대… 모든 대기업에 겨울이 다가오고 있다. 정치도 더 이상 구태의연한 2분법 논리로 버텨낼 수 없다. 킬 더 보이! 야인과 협의하여 백귀에 대한 공동전선을 마련해야 한다고 믿고 그 거대한 북벽을 뚫고 눈보라 속으로 사라져가는 존 스노우의 모습이야말로 남경필의 가슴을 설레게 만든 새로운 진실이요, 코리아 리빌딩의 청사진이다.

나는 후학들에게 항상 말해왔다. “체제 밖의 천보보다, 체제 내의 일보가 더 중요하다.” 민중혁명조차도 때로는 체제를 바꾸지 못한다. 청와대가, 국정원이, 검찰이, 언론이, 국회가 그 내부로부터 과감한 일보의 혁명을 일으켜야 이 민족이 산다. 그런 의미에서 남경필이라는 존재는 그 존재 자체로서 이미 참신한 하나의 혁명이다.

자네 같은 젊은 투사가 여권 내에 존재한다는 것, 모든 상식을 뒤엎고 보편적 윤리를 말하려는 그 참신한 발상, 그 자체로서 이미 그대는 전 국민의 새로운 구심점이 될 수 있어! 그러나 조금 더 깊게 생각하게! 공부를 더 해야 돼! 고민을 더 해야 돼!

“저는 지금 이 시점이 새로운 출발입니다. 항상 가슴을 열고 배우겠습니다.”

- 기획·진행=한기홍, 김포그니 월간중앙 기자 glutton4@joongang.co.kr / 사진=오상민 기자 osang@joongang.co.kr

201611호 (2016.10.17)
목차보기
  • 금주의 베스트 기사
이전 1 / 2 다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