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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격정토로] 손영길 前 준장이 밝힌 ‘윤필용 사건’의 진실 

“가장 가까운 친구에게 배신당했다” 

글 정용수 기자 jeong.yongsoo@joongang.co.kr / 사진 김상선 기자 kim.sangseon@joongang.co.kr
■ 2015년, 사건 발생 42년 만에 대법원 판결 통해 ‘쿠데타 시도’ 오명 벗어
■ 전두환·노태우 등 초급장교 때 우정과 의리 나눠… 위로 올라가면서 경쟁심 발동한 듯
■ 하나회는 참군인 되자는 취지에서 만든 순수친목단체였지만, 훗날 성격 변질돼
■ 박정희 대통령 못다 이룬 꿈 대신 이루려 했지만 별 달고 곧바로 강제 예편
■ 우리나라 사병들 충성심 강해… 육사에서 지휘관 품성 교육 잘 시켜야

역사는 승자의 기록이다. 그 승리는 영원할 수도, 또 찰나의 순간에 승자와 패자가 바뀔 수도 있다. 그러면 역사도 바뀐다. 당사자들이 살아 있는 현대사에서 이 같은 역사의 역전극은 종종 일어난다. 그러나 모든 것을 잃은 패자에게는 역사가 바로 선들 되돌릴 수 없는 과거가 된 뒤다. 역사에서 가정이 무의미한 이유다


▎손영길 전 수경사 참모장이 <월간중앙>과 만난 6시간 가까이 ‘윤필용 사건’의 진실을 밝혔다. 인터뷰 도중 감정이 북받친 듯 눈물을 훔치고 있는 손 전 참모장.
1980년대 한국사회에서 ‘만약’이라는 가정이 가장 많이 붙는 사건 중 하나가 ‘윤필용 사건’이다. 1973년 3월, 군 고위 인사들이 고(故) 박정희 전 대통령을 몰아내고 이후락 중앙정보부장을 권좌에 올리려고 했던 것으로 알려진 쿠데타 음모사건이다. 이 사건으로 윤필용(2010년 7월 사망) 전 수도경비사령관(수경사·현 수도방위사령관·중장)과 손영길(84) 수경사 참모장(체포 당시 15사단 부사단장), 김성배 육군본부 진급인사실 보좌관(이상 준장) 등 10여 명이 옥살이를 하고, 군복을 벗었다.

특히 손영길 전 참모장은 정규 4년제 육사 1기(전체 11기)로 박정희 대통령의 전속부관을 두 차례 지내며 4년 넘게 보좌했다. 그는 육사 11기 동기생 중 선두주자로 꼽혔던 인물로 현대사를 뒤흔든 하나회의 창설 멤버이기도 하다.

공교롭게도 이 사건으로 손씨가 군복을 벗은 뒤 전두환·노태우 등 육사 동기들은 승승장구했다. 각각 11~12대, 13대 대통령을 지냈다. 그래서 “손영길이 있었다면 한국 현대사는 바뀌었을 것”이라는 말이 나오기도 했다. 손씨는 윤필용 사건으로 복역 후 미국으로 떠났다가 사업가로 돌아왔고, 페인트 제조회사를 경영했다.

올해 5월에는 5억원을 육군사관학교 발전기금으로 기부할 정도로 탄탄한 재력도 가졌다. <월간중앙>은 330분 동안 손영길 전 수경사 참모장으로부터 현대사의 굴곡에 얽혀 있는 사연을 들었다.

42년 만에 번복된 법의 심판


▎윤필용 수경사령관이 1973년 손영길(맨 오른쪽) 참모장의 진급 축하파티에서 술을 따르고 있다.
지난해 5월 21일, 대법원 전원합의체(주심 권순일 대법관)는 기존의 판례를 뒤집는 판결을 했다. 이 판결이 있기 전 법원은 “사면을 받았다면 재심청구 대상이 존재하지 않게 되므로 해당 사건의 재심청구가 부적법하다”고 봐왔다. 사면을 받은 사람은 이미 죄가 없어졌기 때문에 법원이 심판해야 할 대상이 없다는 이유에서다.

그러나 대법원은 “특별사면이 있었다는 사정만으로 재심 청구권을 박탈하는 것은 재심 제도의 취지에 반한다”며 “사면을 받은 경우도 형사소송법 420조에서 정한 ‘유죄의 확정 판결’로 재심청구 대상이 된다고 봐야 한다”고 결정했다. “이 경우 재심 재판을 진행하는 법원으로서는 사면을 이유로 면소(免訴) 판결을 내려서는 안 된다”며 “사건의 실체에 대한 심리를 다시 진행해 유·무죄 판단을 내려야 한다”고 판단했다.

대법원은 윤필용 사건으로 징역 12년형(15년형 선고 후 3년 감경, 1년 복역 후 병보석→형집행정지→사면)에 대해 무죄를 선고했다. 손씨가 국가를 상대로 낸 재심청구가 받아들여짐으로써 그는 사건 발생 42년 만에 올가미에서 벗어날 수 있게 됐다.

그는 40년이 지나서야 재심청구를 했다. 청구가 늦어진 이유에 대한 그의 설명은 이렇다.

“당시 윤필용 장군과 나, 김성배 장군이 (사건에) 연루됐다. 김 장군이 2007년인가 2008년 재심을 청구했다. 무죄가 됐다. 김 장군은 우리와 전혀 관계가 없는데도 잘못 걸린 거지. 하루는 김 장군이 나를 찾아와서 ‘당신도 명예회복을 해야 하지 않겠느냐’고 하더라. 재심을 청구해보란 얘기였다. 그런데 ‘재심을 청구하면 돌아가신 각하(박정희 전 대통령)께 누를 끼치는 것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어서 하지 않았지. 나중에 그가 또다시 재심 얘기를 꺼내면서 ‘각하께서 저 세상에서 더 좋아할 것 아니냐’고 해서 생각을 고쳐먹었다. 그래서 육군본부에 재심을 청구했다. 전역한 사람이라 육군에서 재심할 수 없기 때문에 군법회의를 할 수 없다고 했다. 결국 민간법원(고등법원)에서 다루게 됐다. 재판에서 검찰은 ‘사면된 사건을 왜 재심을 하느냐’며 기각돼야 한다고 했다. 난 ‘내가 죄가 없다는 걸 심판을 받겠다’고 주장했다. 고등법원에서 무죄가 나왔는데 검찰에서 상고하는 바람에 작년에야 대법원에서 판결이 난 것이다.”

그는 이어 “내 자랑 같지만 재판 과정에서 판사가 ‘아까운 지휘관 하나를 잃었다’는 말을 했다”며 “그것으로 한을 덮을 수 있게 됐다”고 말했다. 이 판결로 손씨는 5억원의 배상금을 받았다. 명예훼손에 대한 국가의 경제적 보상이었다. 무엇보다 무죄가 확정되면서 역사의 패자에서 벗어날 수도 있었다.

100일 만에 진 ‘별’


▎1973년 4월 육군 보통군법회의 법정에 선 윤필용(오른쪽) 수경사 사령관과 손영길 참모장.
손씨의 군생활은 탄탄대로였다. 전방에서 소대장과 중대장을 지냈고 요직을 두루 거쳤다. 1961년 5월 16일 박정희 소장의 ‘혁명’ 이후엔 줄곧 그의 옆을 지켰다. 그러던 1973년 3월 어느 날이었다.(손씨는 정확한 날짜는 기억하지는 못했다) 그는 “수경사 참모장으로 있다가 1973년 3월 12일 15사단 부사단장으로 부임한 지 일주일 정도 뒤”라고만 기억하고 있다.

점심식사를 마치고 방에서 업무를 보고 있는데 사단 보안 대장(현 기무부대장)이 그를 찾아왔다. “사령관(당시 강창성 보안사령관, 육사 8기)이 좀 만나자고 합니다”라는 말을 전했다. 강원도 화천군 사창리를 떠나 4시간을 달렸다. 오후 8시쯤 서울에 도착한 차량은 반포대교 북단으로 향했다. 서슬 퍼렇던 시절, 보안대에는 ‘서빙고 분실’이 있었다. 그곳에 들어가면 제대로 걸어나오는 사람이 없다는 말이 나올 정도로 고문과 구타로 유명한 곳이었다. ‘뭔가 잘못 됐구나’라고 직감하는 순간 차량은 서빙고 분실 경내에 도착했다. 강창성 사령관도 없었다. 아무런 설명도 듣지 못한 채 그는 조사실로 끌려가다시피 했다.

곧바로 심문이 시작됐다. “불어! 쿠데타 혐의를 인정해!”라고 강요했다. 모든 게 반말이었다. 조사관들은 군복을 입고 있었지만 계급장이나 명찰은 없었다. 그는 “말도 안 되는 소리를 하지 말라”며 버텼다. 그러자 전기고문과 물고문이 이어졌다.

“차라리 묶어놓고 몽둥이로 내리쳤다면 견딜 수 있었을 텐데 정말 말도 못하는 고통이었다. 계급장도 없는 놈들이 고문하는데 그걸 보고 군대에 아주 실망했다. 더러운 군대를 그만둬야겠다고 마음먹었다. 그런데 각하(박정희 대통령)께서 나에게 참군인의 길을 가르쳐주셨는데 각하를 배신할 수는 없었지. 하지 않은 일을 어떻게 했다고 할 수가 있겠나? 죽더라도 버텨야 한다는 생각이었지.”

날이 밝자 보안사 참모장이라는 사람이 찾아왔다. 서류 한 장을 내밀었다. 예편(전역) 신청서였다. 강창성 사령관이 예편신청서를 받아오라고 했다는 설명도 있었다. 고문을 받는 동안 들었던 군복을 벗어야겠다는 생각이 그 얘기를 듣는 순간 바뀌었다. “나는 쿠데타를 일으킬 생각도 없다. 내게 왜 이러느냐”며 언성을 높이며 버티자 그날 오후 부대로 복귀시켜줬다. 그러나 그것은 윤필용 사건의 시작이었다. 다시 일주일이 흐른 뒤 손씨는 서울에서 내려온 보안대 요원들에게 끌려갔다. 그해 1월 1일 군복에 달았던 별이 100여일 만에 떨어지는 순간이었다.

윤필용 사건은 쿠데타 모의사건으로 알려져 있다. 그러나 절반의 진실이다. 윤필용을 포함해 누구의 공소장에도 쿠데타 모의와 관련한 죄목이 없다. 손씨가 알고 있는 윤필용 사건의 내용은 이렇다.

“1972년 12월 연말쯤 (박) 대통령을 모시고 경호실장(박종규)하고 신범식(서울신문사 사장)이 골프를 쳤대. 골프를 치다가 신범식이 각하께 얘기했다는 거야. ‘각하를 앞으로 잘 모시려고 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대통령께서 건강이 좋지 않으셔서 뒤로~’라면서 이후락을 후견인으로 앉히려는 움직임이 있다는 얘기를 했다는 거야. 대통령이 ‘나를 뒤에서 모셔? 누가 그래?’라며 격노했고, 골프를 마친 뒤 박종규 경호실장에게 ‘박 실장! 아까 신범식이 말한 놈이 누구야? 알아봐!’라고 했어. 박종규가 신범식에게 물었고, ‘윤필용이 술 먹으면서 얘기를 했다’는 거지. 박종규가 전두환 대령을 시켜서 윤 장군에게 물어봤고, 윤 장군은 ‘무슨 소리냐. 난 그런 얘기한 적 없다. 내가 몇 일 전 각하께 보고했는데 아주 건강하시더라. 박종규를 직접 만나 설명하겠다’고 했대. 전두환이 보고했고, 박종규가 걱정 말라고 했다는 거야. 그런데 난데없이 3월에 그 문제가 터진 거지.”

“윤필용이 술자리에서 한 말이다”


▎1967년 8월 17일 당시 중령이었던 손영길(오른쪽) 전 참모장이 수도경비사령부 30대대장 이·취임식 후 청와대에서 박정희 전 대통령 내외와 기념촬영을 했다. 맨 왼쪽은 손씨 후임으로 30대대장을 맡은 전두환 전 대통령.
서빙고실의 조사는 3주간 계속됐다. 밤낮이 없었다. “쿠데타 혐의를 인정하라”며 악몽 같은 고문의 연속이었다. 그는 끝내 쿠데타 혐의를 인정하지 않았다. 결국 보안대에서 적용한 혐의는 5가지다. 특정범죄가중처벌법과 업무상 횡령, 도망방조죄, 총기불법소지, 대통령 긴급조치법 위반이다. 쿠데타와 관련한 혐의는 없었다. 지난해 대법원이 무죄를 판결한 것도 이 5가지에 대한 것이다.

“윤필용 사령관이 배구를 좋아해서 팀을 육성하려고 했지. 돈이 없으니 후원회를 만들었지. 이사 20명에게 200만원씩 내도록 했어. 모두 4000만원을 만들어 그 이자(사채)로 배구부를 운영했어. 하루는 누가 찾아와서 500만원을 낼 테니 이사를 시켜달라 하더라고. 그래서 간사인 한국일보 광고 국장한테 말하라고 했지. 그런데 내가 500만원을 내도록 했다고 보안사가 꾸민 거지.

횡령도 그래. 윤필용 사령관의 지인들이 부대에 올 때마다 지휘하는데 돈이 많이 들 거라며 금일봉을 줬어. 그 돈을 나더러 관리하라고 했지. 윤 장군이 필요하다면 건네주고, 가계부를 만들어서 관리했는데 이걸 윤 장군과 내가 공동으로 공금을 횡령했다고 몬 거야. 부대 운영비도 아닌, 지인들이 준 돈을 가지고 부대 운영을 한 것뿐인데 말이지.

문화공보부 장관을 지낸 신범식 씨가 ‘서울신문에 가보니 사설을 쓸 마땅한 사람이 없다’고 해서 윤필용 사령관이 나더러 좀 알아보라고 하더라고. 군에 대한 인식이 투철하고 정직한 사람으로 말야. 그래서 수소문해보니 육사 13기생 유갑수 중령이 있더라고. 서울대 위탁교육을 마치고 미국에서 박사학위를 받아 왔지. 그런데 미국 유학을 다녀온 터라 일정기간 제대가 안 된다고 하더라고. 그래서 육군본부 과장을 만나서 물어봤는데 문제없다는 거야. 그대로 윤 장군에게 보고한 게 전부야. 그런데 이 친구를 전역시킨 것이 도망방조죄라는 거지.

월남전 때 미군이 준 M16 소총과 엽총, 박 대통령이 준 권총, 일본에 사는 처남이 준 엽총이 있었어. 일부는 내무부에 신고했는데 이걸 총기불법소지죄라고 한 거지. 그 당시엔 군인이 총을 가지고 다녔는데도 말이지.

긴급조치위반도 그래. 1972년에 대통령이 사채를 동결하는 긴급조치를 내렸어. 기업들이 사채 갚느라 영업을 잘 못하니 사채를 동결하고 이자를 낮춰서 얼마 동안 갚으라는 것이었지. 그때 장군 월급이 6만원이었는데 내 재산은 1100만원이었어. 그때 많은 사람이 사채를 놓고 이자로 살고 있었는데 내가 자진 신고하겠다고 하니 제일은행에 다니는 사람이 ‘긴급조치는 기업사채를 얘기하는 것이니 개인사채는 괜찮다’고 해서 그냥 있었어. 그런데 보안사에서 어떻게 알았는지 이걸 걸었더라고. 결국 쿠데타 혐의를 뒤집어씌워 군복을 벗기려다 사령관(윤필용)이나 나나 끝까지 버티니까 말도 안 되는 하질 인간을 만들어 대통령조차 손을 못쓰게 한 거지.”

피로 맺은 형제가 배후?


▎전두환 전 대통령이 2010년 7월 25일 고 윤필용 전 수경사령관 빈소가 마련된 서울삼성병원 영안실에 들어서고 있다.
윤필용 사령관과 손영길 참모장은 1972년 유신체제가 구축된 뒤 날개를 달았다. 박정희 대통령의 신임도 더 커졌다. 그래서 이들을 쿠데타 모의 혐의로 몰아 잘나가던 두 사람을 ‘한 방’에 보내려고 보안사를 내세웠었다는 게 손씨의 주장이다. 쿠데타 혐의가 없자 파렴치범으로 몰아 박 전 대통령도 포기할 수밖에 없도록 사건을 꾸몄다는 설명이다.

군사법원 판결 직후 모 언론에서 손씨가 술과 여자를 좋아했다는 내용에서부터 판결문 전체를 실었던 것도 보안사 등 보이지 않는 힘이 작용했기 때문이라고 주장했다. 일종의 모략이었다는 얘기다.

당시 사건과 관련해 가해자로 생각하시는 분들에게 직접 들은 얘기는 없었나?

“74년인가 병보석으로 풀려 집행정지 상태로 집에 있을 때 전두환이 찾아왔었지. 사건과 관련된 얘기는 없었어. 그런데 1980년 미국으로 떠나기 전 사건 당시 보안사령관이었던 강창성 씨와 만났지. 그가 항만청장을 하고 있을 땐데 두세 차례 만나자는 기별이 왔어. 처음에는 만나지 않으려 했는데 만나보는 것도 좋다는 생각에 나갔어. 중국집이었어. 그런데 내가 궁금했던 건 전혀 얘기를 안 하더라고. 항만과 관련한 얘기만 하는 거야. 식사가 끝날 때쯤 물었지. ‘제게 무슨 잘못이 있습니까? 형무소도 갔다 오고, 군복도 벗으면서 아무리 반성해도 잘 모르겠습니다. 말씀을 좀 해주십시오’라고. 그랬더니 ‘자네는 잘못이 없어. 그러나 지금은 얘기를 못하네’라는 대답이 돌아오더라고. 내게 전역지원서를 내라고 하고, 보안사를 동원해 자백을 받아내려고 했던 사람 입에서 ‘잘못이 없다’고 하니 참….”

윤필용 사건의 배후에 전두환·노태우·신범식 등 동기생들이 있다는 것이 손씨의 생각이다. 2시간 넘도록 두 팔을 소파 팔걸이에 올리고 꼿꼿한 자세를 유지하던 그는 전두환 이야기가 나오자 소파 끝에 걸터앉으며 목소리에 힘을 실었다.

“전두환이하고 나는 둘도 없는 친구야. 그런데 내게 어떻게 그럴 수 있어? 우린 육사 축구부도 같이하고(전 전 대통령은 골키퍼, 손씨는 최종 수비수) 한마음, 한 뜻으로 국가에 충성을 다하자고 맹세한 동기였어. 생명을 같이하자고도 했는데…. 내게 어떻게 그럴 수 있냐는 말이지. 아는 사람들은 다 알 거야. 내 사건의 주모자가 몇 사람 있지. 박종규 경호실장, 전두환·노태우·신범식이야. 우리가 소대장·중대장을 할 때는 정의와 대의로 지냈는데 위로 올라가면서 사리(私利)가 생겼던 것 같아. 초급장교 때나 중견간부 때는 서로가 의지하며 하나였는데 경쟁심이 생겼던 것이지. 친구 간에 너와 내가 없을 때는 좋았는데 ‘나’를 강조하다 보니 ‘너’가 생긴 거지. ‘너’가 생기니까, 경쟁 대상이 생기고….

재판 과정에서도 전두환 얘기가 나왔어. 내가 데리고 있던 부하(이종구 30대대장)가 증인으로 나왔지. 청와대 헬기장 공사를 하고 파철(破鐵)이 생겼는데 경호실장이 나더러 처리해서 부대운영비로 쓰라고 했어. 검찰은 그걸 공금횡령으로 봤고. 파철을 처리해서 쓰라고 한 걸 보고 들은 부하들이었는데 ‘거기에 대해서 전혀 모릅니다’라고 하더라고. 정말 때려죽이고 싶었지. 법정을 나오면서 ‘어떻게 그런 거짓말을 할 수 있느냐’고 물었더니 ‘(재판정에) 올 때 전두환 형님을 만났는데 (검찰이) 물으면 절대 모른다고 하라’고 했다는 거야.”

1993년 4월 2일 서울 용산구에 있는 동빙고아파트(군인아파트)에 군인들의 이름이 적혀 있는 종이가 살포됐다. 하나회 명단이었다. 그해 초 동기회장 선출을 두고 육사 31기생들이 하나회와 비하나회로 양분돼 선술집에서 서로 주먹질을 하는 사건도 발생했다. 동기생들이 뒹굴며 난투극을 벌인 후에야 진정됐다.

이 사건을 계기로 군정 종식을 슬로건으로 내걸었던 김영삼 대통령은 하나회에 대한 대대적인 숙청작업을 진행했다. 1963년 하나회가 결성된 지 30년 만의 일이다. 하나회는 전두환·노태우 두 명의 대통령이 권좌에 오르는 데 핵심적인 역할을 했다. 그러나 하나회 창립을 주도한 손씨는 하나회는 정치적인 목적으로 만들어진 게 아니라고 했다. 훗날 권력에 욕심을 가진 자들에 의해 변질됐다는 것이다.

박정희 사단장의 눈에 띈 손영길 중대장


▎손영길 전 참모장은 지금도 박정희 전 대통령의 친필 휘호를 신주단지 모시듯 한다.
하나회를 직접 만든 게 맞나?

“내가 만들었어. 그런데 정치단체가 아니었어. 하나회가 왜 하나회냐? 한마음 한 뜻으로 국가에 충성을 다하자는 뜻이지. 육사를 졸업하고 임관해보니 장군이나 장교나 모두 출신이 달라. (비육사 출신 장교들이) ‘육사놈들이 뭘 알아?’라며 시기하더라고. 물론 그 사람들이 고생을 많이 했지. 그런데 육사는 군에서 대우가 다르니까 시기한 거야. ‘육사 출신들이 저것밖에 안돼?’라는 얘기를 듣는 게 싫었어. 그 사람들의 기대에 어긋나면 우리 후배들의 진출에도 문제가 있을 테고. 일반 장교들에게 ‘육사 출신들은 다르구나, 저들에게 맡길 수 있어’라는 신망을 주려면 잘해야 돼. 잘 하려면 우수한 사람들이 마음을 합쳐서 열심히 해야 될 것 아냐? 부정 없이 참군인이 되자는 뜻에서 만든 것이 그거(하나회)야. 친목단체였지.”

누가 주도해서 만든 것인가?

“나랑 전두환·노태우·김복동…. 열 사람이 만든 거야. (육사 4년제) 2기가 배출될 때 우수한 애들을 찾아서 ‘절대 발설하면 안 돼’, ‘군인이 돼야 해’라고 격려하면서 (회원을) 모은 거지. 우리 사건(윤필용 사건)이 난 뒤 문제가 됐다면 보안사에서 잡아냈겠지. 내게는 하나회에 대해선 전혀 묻지 않았어. 하나회가 불순단체, 정치단체였으면 그것까지 처벌했어야지. (세간에서는 육사 출신들이) 대통령 되려고 만든 단체라고 하는데 전혀 아니야. 난 아니었지만 전두환은 야심이 있었는지도 모르지.”

서울시 종로구 내수동에 있는 손씨의 사무실 벽 한복판에는 ‘자주국방태세 확립’이라는 글씨가 적힌 액자가 걸려 있다. 1971년 1월 6일 손씨가 연대장 시절 박정희 대통령이 직접 써준 신년휘호였다. 그는 평생 그 액자를 고이 간직하고 있다. 손씨는 박정희 대통령을 진짜 애국자로 기억했다.

“각하는 진짜 애국자야. 국민을 그렇게 염려하고 사랑하는 애국자는 없어. 우리가 이렇게 못사는 것은 다른 나라들은 전부 개화하는 동안 우리 선조들은 게으른 데다 양반·상놈 타령했기 때문이라는 거야. 사단장 ‘별’ 달았는데 미군에서는 소령이 왔어. 그만큼 푸대접을 받은 거지. 우리가 열심히 안 하면 우리 후손도 똑같아. 누군가 희생해야 돼. 우리가 거름이 돼야 해. 다른 사람이 1시간 하면 우린 10시간 해야 돼. 우리 후손들은 이렇게 살면 안 될 것 아니냐고 했어. 대물림하면 안 된다고 했어. 아주 애국자셨지.”

박 대통령을 처음 본 게 언제인가?

“내가 각하(손씨는 박 대통령을 각하라고 칭함)를 처음 만난 건 1957년쯤이지. 육사를 졸업하고 소위로 임관해 7사단 3연대 1대대 1소대장으로 갔어. 정호용을 비롯해 동기생 7명이 7사단에 갔지. 소대장을 마치고 중대장 할 때 각하께서 사단장으로 오셨어. 그때는 참 살기가 어려워 (병사들이) 휴가 나갔다가 귀대하지 않는 경우가 많았어. 군대생활은 매일 산에 가서 나무하고 막사 짓고 하니 힘들고, 휴가 갔다 복귀하면 집에 일할 사람이 없으니 그냥 머무는 거지. 그런데 나는 부대에서 병사들과 먹고 자면서 힘든 생활을 함께하다 보니 서로 정도 들고 점차 미귀대자가 줄었어. 사단에서 사고뭉치로 취급 받던 아이들이 우수소대, 우수중대가 됐지. 중대장 때 각하께 인정을 받은 거야. 중대장을 마치고 부산지역으로 전출을 갔어. 그런데 5·16이 터진 거야. 그날 저녁 전두환이가 전화했더라고. ‘야 영길아, 큰일났어. 혁명하신 분들이 우리 동기들이 혁명을 지지하지 않는다고 반(反)혁명죄로 처벌하겠대. 네가 박정희 장군을 잘 아니까 말씀을 드려봐’라는 내용이었어. 난 동기들과 18일에 혁명 찬성 성명을 발표하려고 했었거든. 그래서 곧바로 서울에 왔더니 서울역에 전두환이가 나와 있더라고. 함께 사무실로 갔지. 지금 서울시 의회로 쓰는 건물이야. 비서실에 박태준 씨가 있어서 여차여차 해서 왔다고 설명했지. 각하를 만나게 해주더라고. 그래서 사정을 설명해드렸더니 이미 상황이 끝났으니 걱정하지 말라고 하셨어. 대신 부산으로 내려가지 말고 전속부관을 하라고 하면서 리벌버 권총 한 정을 주시더라고. 그렇게 각하를 모시기 시작한 거지.”

이제는 마음으로 용서해줘야 할 때


▎현역 시절 손영길 장군. 그는 꿈에 그리던 별을 단 지 100일 만에 쿠데타 음모사건에 휘말려 군복을 벗는 비운을 맞았다.
윤필용 사건으로 군복을 벗은 그는 가장 억울한 것이 ‘각하의 뜻을 이루지 못한 것’이라고도 했다. “각하는 내게 군인의 사생관(死生觀)을 가르쳐준 분이다. 각하가 대통령은 되셨지만 군 최고지휘관은 되지 못했다. 나는 군사령관이 돼 각하의 못다 이룬 꿈을 대신 이뤄드리려 했지. 그런데 별을 달고 100일 만에 군복을 벗었어. 각하가 나를 구해주시지 않았지만 그건 참모들이 일을 꾸며 각하가 도저히 손을 쓰시지 못하게 했기 때문일 거야. 그 사건이 없었으면 내가 인생의 어두운 면을 볼 수 있었을까?”

손씨는 지난해 대법원이 무혐의 판결을 한 뒤 5억원의 배상금을 받았다. 그는 고민 끝에 이 돈을 육군사관학교 발전 기금으로 기부했다. 그는 “육사에 기탁한 5억원은 내 인생과 맞바꾼 돈”이라고 했다. 군에서 쫓겨난 42년에 대한 보상금이다. 그는 처음에는 이 돈을 어떻게 써야 할지 고민했다. 이미 먹고 살 만큼 돈을 모았다. 1남 4녀의 자녀도 모두 번듯하게 살고 있어 5억원을 좋은 일에 써야겠다고 마음먹었다.

1980년 사면을 받은 뒤 김우중 전 대우그룹 회장이 페인트 제조회사를 마련해줬고, 제품을 대우자동차 등에 납품하면서 살 만해졌다. 손씨가 30경비 대대장 시절, 김 전 회장의 지인이 딸을 외국에 유학 보냈다. 달러가 귀했던 시절이라 경호실장에게 부탁해 편의를 한 번 봐준 것이 인연의 시작이었다. 이후 김 전 회장과는 호형호제하며 지낸다고 한다.

“지휘관은 사병들의 임금과 복지에 대해 책임져야 해. 우리나라 사병들 충성스러워. 자기(지휘관) 명령에 의해 목숨을 바치는데 그들의 인권과 복지는 지휘관들이 책임져야지. 부당한 것은 지휘관이 막아야 해. 그게 지휘관이야. 좋은 건 자기가 다 갖고 부하들을 어렵게 하는 게 지휘관이야? 육사에서 교육부터 잘해야 해. 품성교육부터 시켜야지. 지식이 지혜가 돼야 하고, 지혜가 인격화되도록 해야 해. 또 품성이 돼야 하고. 그런 뜻에서 육사교장에게 교육을 잘 시켜야 한다면서 기부하게 됐지. 육사는 간성(干城)을 만들어야 하고 ‘저 사람들이 군을 지키면 우리 생명과 안전도 지켜주겠다’는 신뢰를 줘야 하고 사랑을 받아야 해. 지금 육사에 다니는 아이들이 내 손자 뻘인데 그들은 나의 전우이기도 해. 군인들은 절대로 정치하면 안돼. 군인들은 국가를 위해 목숨을 바쳐야지 어디 정치를 해? 그런 후배들이 됐으면 좋겠어.”

그는 자비를 베푸는 이에게는 적이 없다는 뜻의 자비부적(慈悲不敵)이란 말을 가슴에 담고 산다고 한다. 누구를 용서하고 하지 않고를 떠나 생의 마지막 순간까지 배움의 자세를 유지하기 위해서다. 그러면서도 전두환 전 대통령에 대해선 서운함을 감추지 않았다. 두세 번 골프장에서 만나 “요즘 어디 있느냐, 언제 한 번 보자”는 말을 들은 게 전부다. 한 번 식사를 하자는 기별이 왔지만 선약이 있어 만나지 못했다. “생명을 함께하기로 했던 둘도 없는 친구가 왜 정치를 해서 본인은 물론이고 자녀들까지 고생시키느냐”며 안타까움도 드러냈다. 마음으로나마 이제 용서해줘야 할 때라고도 했다.

- 글 정용수 기자 jeong.yongsoo@joongang.co.kr / 사진 김상선 기자 kim.sangseon@joongang.co.kr

[박스기사] “인생의 갈 길 비춰주셔서 감사합니다” - 43년 전 손영길 예비역 준장이 작성한 옥중일기


▎손영길 전 참모장이 1973년 옥중에서 쓴 일기.
1973년 9월 29일 구름

아침 일찍이 눈을 떴다. 오늘은 안양 민간교도소로 이감되는 날이다. 4명의 전우들을 두고 떠난다는 고독감과 섭섭한 감 그리고 교도소에서 겪은 6개월간의 영어생활의 가지가지가 머릿속에 떠오른다. 옆에 누워있던 신 대령, 신재기 대령이 6시 기상나팔이 불고 약 20분 뒤에 눈을 떴다. 옆방에 있는 김성배 장군이 아침 산보 가자고 재촉, 우리 일동 6명은 매일의 일과처럼 행하던 새벽교회 예배와 산책을 하였다. 나는 새벽 예배기도에서 ‘하느님이여 남게 되는 4명의 전우에게 하느님의 사랑과 가호와 건강과 굴하지 않는 굳건한 희망을 주십사’고 기도하였고. 형언치 못하는 고난의 지난 6개월 영어생활에서 병을 주는 대신 건강을 주시었고, 남을 저주하지 않고 그들을 용서할 수 있는 마음의 힘과 인생의 갈 길을 비춰주심에 대하여 감사하였다. 그리고 나의 존경하는 부모님의 만수무강과 사랑하는 아내와 아이들에게 하느님의 가호와 사랑이 계셔 주시길 기도하였다. 오늘 이 육군 교도소를 떠나면 다시는 돌아올 것 같지 않는 마지막 날이라 생각하니 그나마 섭섭하다. 나와 사령관(윤필용)은 아침 8시30분 임 소령의 안내로 안양으로 떠날 차비를 마쳤다. 마중에는 교도소장 최상익 대령을 위시해서 양 부소장, 교도 과장 그리고 우리를 수발해주는 몇몇 하사관들과 김성배 장군, 지성환 대령, 신재기 대령, 송석환 소령 등이 나왔으며 특히 특경사령관 조천성 장군께서 일찍 나와 떠나는 우리를 마중, 전송해주었다.

모두 눈에는 눈물을 가누지 못하고 흐느껴 울며, 떠나는 인사마저 목메어 이야기 못하고 무언의 악수로 헤어졌다. 우리는 10시경 안양에 도착했다. 안양교도소 삼거리에 닿으니 우리가 타고 있는 차가 정차했다. 권익현 대령이 나와서 차를 세우는 것이었다. 권 대령의 안내로 도로 옆에 있는 다방에 갔다. 다방에 가니 유학성 장군과 김진구 장군, 권섭 씨가 와 있었다. 우리는 약 10분 함께 차를 마시고 서로 마음의 이야기도 나누지 못한채 눈물 어린 눈으로만 서로 축복하며 헤어졌다.

그래서 안양교도소로 향해 차를 타고 떠나 2~3분 후에 교도소에 도착했다. (수감)수속을 밟고 우리들이 입고 있던 군복, 청운의 뜻을 품고 그렇게 참된 이 나라의 군인다운 군인이 되겠노라고, 어떠한 유혹도 물리치고. 몇 번이고 사선 속에서 죽음보다도 더 귀중하며 애호했던 군복, 성스러운 군복을 벗어주고 푸른 죄수복을 받아 갈아 있었다. 죄수번호도 받았다. 수의복을 입는 우리를 옆에 지켜보고 있는 군 수행 교도관 임 소령은 그만 그 자리에서 울기 시작했다. 참지 못해서 얼굴을 돌리며 담당 민간 교도관에게 목멘 목소리로 “꼭 저 푸른 수의를 입어야 합니까. 지금 입고 왔던 군복을 그대로 입히면 아니 됩니까. 좀 입게 해주세요”

간곡히 부탁을 하는 것이다. 우리는 이미 군교도소에서 떠나올 때 어떠한 고난이 닥쳐 오더라도 조금도 불평 없이 감당하기로 결심하고 떠나온지라 오히려 우리가 임 소령을 달래 우리의 영치품을 부탁하고 감방으로 안내 받았다. 철창을 열고 복도를 지나 감방을 향하니 밖에 나와 있는 죄수들이 우리가 이감되는 것을 알아차렸는지 구경꾼의 얼굴에 자신의 형상을 잊을 정도였다. 어떤 동 2층으로 안내 받았다. 2층 계단을 오르니 그 왁자지껄하던 복도와는 달리 조용히 텅 빈 복도와 문이 닫힌 감방들뿐이며 아무도 없었다. 우리들 둘뿐이다. 9호실은 나의 감방이며, 사령관은 나의 실에서 건너 다음 방 11호 감방이었다.

나는 감방에 들어가자마자 간수는 나의 감방 묵직한 철문을 철커덕하며 닫고 열쇠를 채워버리고 사라졌다. 지금부터 나의 안양교도소 생활은 시작되는 것이다. 비교적 우리를 대해준 간수들은 친절하였다. 마음속의 고마움을 간직하며 나는 나의 감방에서 나의 삶을 정리하였다. 14시경 교도소장의 부름을 받고 소장 방에서 면접하였다. 면접은 소장 인사였다. 아마 소장은 소장을 아는 여러 사람들이 소장에게 우리에 관해 잘 돌봐달라는 부탁들이 있었던 것 같았다.

소장은 대단히 친절한 분이며, 인격적으로 우리를 대해주었다. 면접을 마치고 돌아와서 16시 30분경 저녁밥을 먹었다. 밥은 예상대로 보리쌀과 콩뿐인 잡곡밥이었다. 나는 한 숟가락, 한 숟가락 열 번, 스무 번씩 꼭꼭 씹으며 한 그릇을 다 먹었다. 부식은 마늘장아찌였다. 식사를 마치니 이윤수 대령이 감방으로 면회 왔다. 몇 가지 교도소 생활에 도움이 되는 얘기를 해주었다. 나의 수번은 290번. 나의 감방은 4동 상층 9호실이다. 하느님이여 오늘 하루도 무사히 보냈습니다. 밤은 점점 어두워 갑니다. 내가 사랑하고 존경하는 모든 분들에게 이 밤을 무사히 보낼 수 있도록 기도해 올립니다.

201611호 (2016.10.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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