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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층추적] 20년간 겉돈 검찰 개혁의 끝은? 

검찰 지휘하는 검찰총장 선거로 뽑아야 하나 

오이석·정선언·심서현·송승환기자 oh.iseok@joongang.co.kr
‘싹쓸이’ 수임, 비상장 주식 보유, 스폰서 의혹 고위 검사들 줄줄이 구속… 공직자비리수사처 신설하고 수뇌부 충원 방안 혁신해야 한다는 목소리도
2007년 정상명 검찰총장이 검찰을 떠나며 “검찰은 정치적이지 말아야 하며, 중립과 독립을 지켜낼 것”을 주문했다. 그간 정 총장을 전후한 많은 검찰인사는 손에서 칼을 내려놓으며 국민의 신뢰를 받는 검찰이 되라고 말해왔다. 그러나 2016년 대한민국 검찰은 아직도 개혁의 대상이라는 오명 속에서 출구전략을 고민하고 있다.


▎정의의 여신상. 법을 대표하는 상징물이다. 그러나 한국의 검찰 역사에는 정의보다는 ‘정치’ 검찰의 꼬리표가 따라다닌다. 검찰이 수십 년간 정권 수호의 ‘칼잡이’ 역할을 해왔기 때문이다.
“무사는 얼어 죽더라도 겻불을 쬐지 않는다.”

전·현직 엘리트 검사들의 각종 비리가 세상에 알려지자 검사들이 주문처럼 내뱉은 말이다. 이 말은 후배 검사들에게 존경받아온 이명재 전 검찰총장의 ‘2002년 1월 취임사’ 중 한 구절이다.

검사들은 이 문구를 정치적 중립과 독립, 그리고 청렴성을 강조하기 위해 사용했다. 거악 척결의 첨병으로 자부심을 강조해왔다. 그러나 최근 검사들은 이 말을 자조와 함께 사용하고 있다. 겻불(돈과 권력)을 쬐다(좇다) 수사를 받게 된 전·현직 검사들이 잇따라 드러나면서다.

이 전 검찰총장은 당시 사상가 몽테스키외의 꿈을 인용하기도 했다. “검사가 활동하기 때문에 시민은 평온을 누린다는 몽테스키외의 기대와 꿈은 무너졌다”며 “검찰이 마땅히 지녀야 할 권위와 믿음에 상처를 입어 국가와 사회의 안정이 염려된다”고도 했다. 14년 전 이 전 총장의 우려는 오늘에 더 부합하고 있다.

검사의 피의자 폭행 사망 사건으로 퇴임한 이 전 총장은 “검사는 서민의 백마 탄 왕자가 돼야 한다. 후배들도 서민의 백마 탄 왕자가 되어주길 바란다”고 했다. 그러면서 “의연하되 누운 풀잎처럼 겸손한 자세로 최선을 다한다면 검찰의 위상이 바로 서는 날이 멀지 않을 것”이라고 했다.

그러나 현실은 다르다. 서민의 백마 탄 왕자나 누운 풀잎처럼 겸손한 검사를 찾긴 쉬운 일이 아니다. ‘싹쓸이 사건’ 수임으로 구속기소된 전직 검사장 홍만표 변호사, 검찰사상 처음으로 구속된 진경준 전 검사장, 대한민국 의전 서열 2위였던 전 국회의장의 사위 김형준 부장검사의 고교동창 스폰서 의혹까지….

이들의 낯뜨거운 행보는 검찰을 세상사람들의 조롱거리로 만들었다. 국민은 이들의 모습을 보며 검사의 삶이 비리로 점철돼 있다고 생각한다. 서민의 백마 탄 왕자가 되어줄 대부분의 검사는 산더미처럼 쌓인 사건에 파묻혀 지내고, 잘나가는 검사들은 권력과 출세를 지향하기 위해 노력하는 모습만 드러나고 있다.

2016년 대한민국 검찰, 그들은 어디로 가고 있을까?

소수 검사에서 생활 검사로


▎대검찰청 정문. 최근 국내 성인남녀 1000명에게 중앙일보가 검찰수사의 공정성에 대해 묻자 응답자의 89.9%가 “돈이나 인맥에 영향을 받는다고 생각한다”고 답했다.
사법시험의 역사는1947년 조선변호사 시험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1950년 고등고시 사법과로 바뀐 뒤, 1963년 오늘날의 사법시험 체제를 갖추었다.

1950년 고등고시 사법과를 통해 탄생한 법조인은 모두 14명이었다. 이 가운데 전주지검장 등을 지낸 설동훈 변호사와 고(故) 서정각 변호사 등 3~4명이 검사로 임용됐다. 검사가 된 이들 중 일부는 판사가 되기도 했다.

1964년 시행된 사법시험 1회 합격자인 이건개 변호사의 동기는 41명에 불과했다. 이 가운데 대부분이 판사와 검사로 임용됐다. 당시 고시 출신인 검사들은 그 수가 적어 대우도 남달랐다. “현재 서울중앙지검과 동서남북·의정부지검을 다 포함해 검사가 800명쯤 된다. 내가 검사일 땐 45명 정도였다”고 이 변호사는 말한다.

검사가 임용되면 관할 경찰서장이 찾아와 인사를 했다. 검사가 유치장 감찰을 나가면 경찰서장이 서장실에서 대기하다가 브리핑을 했다. 새파란 평검사에게 머리가 하얀 경찰서장이 ‘영감님’이라고 부르며 따라다니던 때다.

2016년 검사 수는 2058명이다. 재미있거나 대우를 받는 일도 없다. 법에 따라 수사권과 기소권을 갖는 막강한 권한이 있지만 호랑이 담배 피우던 시절 얘기는 이제 찾아보기 힘들다. 오히려 과거를 따라가면 비리 검사로 사회로부터 철저하게 비판받는 대상이 될 뿐이다.

물론 극소수 엘리트 검사가 좋은 대우를 받기도 한다. 일부는 검사 신분으로 얻을 수 있는 소위 ‘대접’을 받으며 살다 재판에 넘겨지기도 했다. 진경준 전 검사장과 김형준 부장검사가 대표적이다.

최근 사법시험(이하 ‘사시’) 합격자 수 1000명 시대에 접어들었다. 로스쿨 제도가 도입되면서 올해 마지막 사시가 치러졌다. 40여 년 만에 폐지되는 사시는 앞으로 로스쿨 출신만 응시할 수 있는 변호사시험으로 대체된다. 4년 전부터 로스쿨 출신이 검사로 임용되면서 검찰은 이제 사시출신과 로스쿨 출신이 공존하고 있다.

현재 로스쿨 출신은 전체 법조인의 10% 내외에 불과하지만 사시 폐지로 인해 앞으로 신규 임용 검사 중 로스쿨 출신의 비중이 빠르게 높아질 예정이다.

이에 따라 그간 사회적으로 높은 대우를 받던 검사는 ‘생활 검사’가 됐다. 일례로 검사 인력의 80%가 고소고발 사건을 다루는 형사부 검사다. 이들은 매달 200건에 달하는 사건을 처리하고 있다. 옆방의 검사가 무얼 하는지 알지 못할 정도로 사건 수가 많다. 시간에 쫓겨 주말을 반납한 건 예사다. 가족과 일상을 즐기는 것도 쉽지 않다.

서울중앙지검 장진영 검사는 “일반 형사부서는 한 달에 약 200건, 지방은 300건 정도를 검사 한 명이 처리한다. 주말에도 하루씩 나와서 일하고, 가족들이 많이 희생을 하고 있다”고 말했다. 실제 대한민국 검사 1명당 월 평균 사건 처리 수는 약 261건이다.

최근 국내 성인 남녀 1000명에게 <중앙일보>가 검찰 수사의 공정성에 대한 생각을 물었다. 응답자의 89.9%가 “검찰 수사가 돈이나 인맥에 영향을 받는다고 생각한다”고 답했다. 응답자의 42.3%는 “검찰이 국내 사정기관 중 가장 권한이 강한 조직”이라고 했다. 한때 ‘나는 새도 떨어뜨린다’는 말을 듣던 국정원(32.7%)이 그 뒤를 이었다.

‘대통령을 비롯한 권력 실세가 검찰 수사에 영향을 미친다고 보느냐’는 질문에 88.2%가 ‘매우 그렇다(42.7%)’와 ‘어느 정도 그렇다(45.5%)’고 답했다. ‘정치검찰’이란 인식이 깊게 자리잡고 있는 걸 그대로 보여준 결과다. 이 조사는 김형준 전 부장검사 사건이 폭로되기 전인 8월 24일과 25일 양일에 걸쳐 진행됐다.

검찰 역사에서 정치검찰의 꼬리표는 항상 따라 다녔다. 검찰이 군사정권부터 수십 년간 정권 수호의 ‘칼잡이’ 역할을 해왔기 때문이다. 1950년 6월 이승만 정부에서 김익진 검찰 총장을 서울고검장으로 좌천한 인사가 그 시작이었다. 1963년 박정희 정권에서 36세의 사단법무참모를 검찰총장에 앉힌 일도 유명하다.

1993년 문민정부가 출범하며 검찰조직을 뼛속까지 바꿔야 한다는 목소리가 정치권과 법조계를 중심으로 시작됐다. 국민에게서 나온 권력을 쥔 검찰이 정부가 아닌 국민에게 되돌아가도록 해야 한다는 것이 그 이유였다.

행정부의 외청에 불과한 검찰을 바꾸려는 20여 년에 걸친 ‘검찰개혁’ 대장정은 김영삼(YS) 정부 출범을 계기로 본격화됐다. YS 정부는 검찰총장이 정치권의 눈치를 보지 않는 시스템을 만들어보려 했다.

“정치 검찰을 타파하라”


▎2009년 노무현 전 대통령이 박연차 게이트로 대검 중수부의 수사를 받다 스스로 목숨을 끊는 사건이 발생했다. 꿈쩍도 않던 검찰은 전직 대통령의 죽음에 대한 책임론이 거세지자 궁지로 내몰렸다.
일례로 1996년 검찰총장이 집권당과 정권의 눈치를 보지 않도록 퇴임 뒤 2년간 모든 공직에 임명될 수 없도록 한 규정(구 검찰청법 제12조4항)을 만들었다. 그러나 이 조항은 1997년 헌법재판소가 직업선택의 자유를 침해한다며 위헌 결정을 내려 역사 속으로 사라졌다.

영장 전담 판사가 검찰이 청구하는 구속영장을 심사하는 구속적부심제가 도입(1997년)된 것이 당시 유일한 검찰 견제의 성과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런 검찰 개혁 시도보다 검찰권 장악을 위한 흔적이 더 두드러진다.

검찰 주요보직 인사의 출신지 추적을 통해 가늠해볼 수 있다. YS 정부 때 법무장관과 검찰총장, 대검 중수부장과 공안 부장의 임기 중 출신 지역은 부산·경남(PK)이 다수였다. 또한 당시 5년간 장관 5명과 검찰총장 4명이 임명됐는데 이중 PK출신이 6명이었다. 권력형 비리와 대형 화이트칼라 범죄 등 거악 수사를 담당하는 대검 중수부장과 선거 사건 관리를 담당하는 공안부장 역시 PK 출신이 다수였다.


▎대검찰청 중앙수사부는 검찰총장 지시를 받아 움직이는 조직으로 편파수사 논란에 휩싸여오다 2013년에 결국 폐지됐다.
검찰을 장악하려는 모습은 진보와 보수를 가리지 않았다. 김대중(DJ)정부 역시 호남 출신을 검찰 수뇌부 전면에 내세웠다. 그동안 숨죽이고 살던 호남 출신이 당시 총장, 중수부장, 검찰국장, 지검장 등을 장악했다. 충청 출신의 약진도 눈에 띈다. 충청 출신의 김종필 총리 덕에 서울중앙지검장에 충청 출신이 4명이나 임명됐기 때문이다.

검찰을 견제하기 위한 노력도 있었다. 미국의 제도를 모방한 특별검사제(이하 ‘특검’)를 도입된 것이다. 하지만 이는 DJ정부의 의지에 전적으로 따른 결과물은 아니었던 것으로 평가되고 있다. 게다가 특검은 지금까지 10여 차례 시행됐지만 그 효용성에 대한 논란이 여전하다.

DJ정부와 같은 정치적 신념을 갖고 있던 참여정부 역시 PK출신을 중용했다. 검찰개혁에 가장 파격적인 노력을 기울였지만 역시 주요 보직자는 PK출신을 앉혔다. 호남 출신 검사들도 빠지지 않고 주요보직을 거쳤다. 주요 보직에 배치된 대구·경북(TK)출신 인사는 3명에 불과했다.

참여정부의 검찰 개혁은 이전 정권과 다른 움직임을 보였다. YS와 DJ는 검찰 내부 인사 중 동향 출신을 주요 보직에 앉혀 검찰을 장악하는 것에 치중했다. 과거사 청산을 위해 국정원 등을 숙청하는 데 공을 기울인 반면 참여정부는 검찰 개혁에 공들였다.

가장 파격은 법무행정을 총괄하고 검찰 인사판을 짜는 법무부장관에 판사 출신의 강금실 변호사를 앉힌 것이다. 민변 회장 출신의 강골 40대 여성 변호사를 통해 남성 중심으로 검사동일체 원칙으로 똘똘 뭉친 검찰 조직을 쇄신하겠다는 당시 노무현 대통령의 개혁 메시지라는 것이 주된 평가였다.

노 대통령은 강 장관의 첫 검찰 인사안에 대해 “그동안 검찰의 독립성·중립성을 지키지 못한 검찰 지휘부에 대해 책임을 묻는 것”이라고 평했다. 이때 검사들은 법무부가 갖고 있는 예산권·인사권을 검찰총장에게 넘기라며 거세게 저항했다. 그 결과 2003년 3월 9일 검찰 역사상 전무후무한 대통령과 검사의 직접 대화의 장이 만들어졌다.

평검사들은 노 대통령을 향해 ‘점령군’이라며 인사권 행사의 불만을 그대로 드러냈다. 이에 노 대통령은 인사권자가 인사하는 것에 반발하는 분위기에 불쾌함을 표했다. 실제로 2003년 대법원 산하 사법개혁위원회 논의 주제 선정 때 형사소송법 개정 등 검찰과 관련된 사안은 검찰의 강한 반발을 고려해 논의 시기를 가장 뒤에 하도록 했다.

당시 사개위 출범 준비를 담당했던 한 법조계 인사는 “검찰의 반발과 사회적 파장이 큰 안건은 가장 나중에 논의하자는 의견을 (청와대 측과)주고 받았다”고 말했다. 참여정부는 막강한 검찰권의 근간이 되는 형사소송법과 검찰조직 관련 법 개정을 통해 검찰의 권한과 운신의 폭을 법률로 제한하려고 노력했다.

대표적인 변화는 검사 직급의 일원화와 검사동일체 원칙의 삭제다. 총장 이하 검찰이 한 몸으로 움직이도록 하는 요소를 원천적으로 제거한 것이다. 또한 이의제기권을 명문화해 부당한 지시에 따르지 않아도 되도록 했고 검찰총장도 국회의 인사청문회를 받도록 했다.

이어 2007년 형소법을 개정해 재정신청제도 범위를 확대한 한편 구속 전 피의자심문을 필수화했다. 검찰의 브레이크 없는 권한을 법원이 통제하도록 한 셈이다. 여기에 공판중심 주의를 도입해 미국처럼 법정에서 검찰과 피의자가 동등한 상황에서 재판에 임하도록 했다.

‘강북’ 눈치 보는 ‘강남’… 전관예우의 시작


▎지난 9월 우병우 청와대 민정수석이 박근혜 대통령이 주재한 국무회의에서 참석했다. 한때 ‘꺼진 불’로 불리던 우 수석은 변호사 개업 2년 만에 민정수석 자리를 꿰차며 정권의 실세로 떠올랐다.
눈여겨볼 대목은 국민참여재판 도입이다. 이 재판은 국민이 직접 검찰 수사와 공소 유지에 관여하고 판단하도록 하는 성과를 가져왔다.

검찰은 참여정부 때 검찰 권한이 대폭 줄었으며 악성 피의자가 법 제도를 악용하는 사례가 늘어 수사 상황이 악화됐다는 주장을 해왔다. 그러나 권한 상으로 보면 참여정부가 검찰·경찰의 수사권 조정(2005년), 검찰의 기소 독점에 대한 제도적 변화 등의 시도를 했으나 실패했다.

결국 강금실 장관과 천정배 장관 등 외부 인사 2명을 법무부 장관에 앉혀 검찰의 문민화를 시도했다는 기억만 남게 됐다. 참여정부는 천정배 장관 이후 김승규(2004년)·김성호(2006년)·정성진(2007년) 등 검사 출신 3명을 장관으로 임명했다.

이후 이명박 정부에서는 다시 TK출신 수가 늘어나며 정권과 코드가 맞는 인사들이 대거 주요 보직에 앉게 됐다. 이런 분위기는 박근혜 정부 들어서 더 명확해졌다. 2013년 4월 대검 중수부가 사라진 뒤 검찰의 가장 중요한 보직이 된 서울 중앙지검장은 이번 정권 임명자 4명 중 3명이 TK출신이었다. 그중 한 명인 김수남 지검장은 현재 검찰총장이 됐다.

지난 정권과 이번 정권은 검찰 출신의 청와대 민정수석이 검찰에 대한 장악력이 커 안팎으로 잡음이 생기고 있다. 최근 들어 민정수석은 모두 검사 출신이 독차지하고 있다. 검찰 고위직을 지낸 전관 출신 변호사는 몸값이 비쌀 뿐 아니라 검찰 인사에도 영향 준다는 말 때문에 현직 검사들이 그들을 홀대하는 게 쉽지 않다.

‘꺼진 불’로 불리던 우병우 민정수석이 변호사 개업 2년 만에 정권의 실세가 되며 검찰 인사를 쥐락펴락하는 자리에 오른 것은 그 대표적인 예다. 민정수석실은 대통령의 임기 중 인사권과 공직 기강을 잡는 가장 중요한 권력부서다. 검사의 인사 검증과 함께 수사 정보도 받아 사실상 검찰을 관리하는 역할도 맡는다.

‘강남’에 위치한 외청인 검찰이 ‘강북’의 눈치를 볼 수밖에 없는 이유다. 대부분의 민정수석이 검찰 출신이다. 검찰을 떠난 뒤 변호사로 개업해 사건을 하다 청와대로 향했다. 그들 중 일부는 법무부장관이 되기도 했다. 결국 현직 검사 입장에서는 실체 여부를 떠나 잘나가던 선배들이 언제든 다시 지휘라인에 와서 자신들의 명줄을 쥘 가능성이 높다는 점을 의식할 수밖에 없다.

주요 보직을 거친 홍만표 변호사가 개업 후 대형 사건 싹쓸이를 통해 120여 채의 오피스텔을 보유하게 된 것도 검찰 전관의 힘으로 볼 수 있다. 또 다른 대표적 전관은 안대희 전 대법관이다. 대법관 6년 임기를 빼면 사실 안 전 대법관은 검사라고 표현하는 게 더 정확하다.

안 전 대법관은 참여정부 시절 대검 중수부장을 지내며 ‘국민검사’ 별명을 얻었다. 노무현 전 대통령의 가장 나이 어린 사법시험 동기였던 그는 중수부장과 대법관을 거쳐 변호사가 된 뒤 많은 돈을 벌었다. 박근혜 정부 때 총리 후보로 내정됐지만 높은 사건 수임료를 받았다는 이유로 구설에 오르자 스스로 총리 후보 자리에서 내려왔다. 이후 변호사로 다시 돈을 모아 총선에 출마하기에 이른다.

최교일 전 서울중앙지검장은 경북 영주 출신으로 이명박 정부 당시 주요 보직을 두루 거친 후 변호사 생활을 하다 다시 정계에 입문했다. 이처럼 죽은 권력과 살아 있는 권력의 경계가 모든 영역에서 허물어지며 검사들은 그들의 선배들이 어떤 라인을 갖고 있는지 촉을 세울 수밖에 없게 된 셈이다.

자연히 정치검사들이 늘어날 수 밖에 없고, 바른 말하는 내부의 목소리가 희미해질 수밖에 없는 게 현재 검찰을 둘러싼 시스템이다. 이를 기반으로 정부가 검찰권을 장악하기 위해 활용해온 것이 청와대 파견 검사다. 엘리트 검사들을 청와대로 파견받아 검찰 수사와 내부 상황을 모두 파악해 검찰권 장악에 활용한다. 군사정권부터 이어져 내려온 제도다.

YS정부에서는 검찰 독립을 지켜주겠다는 의미를 담아 현행 검찰청법 44조의2 (검사의 파견 금지 등)에 ‘검사가 대통령비서실에 파견되거나 대통령비서실의 직위를 겸임’할 수 없도록 한 규정을 만들었다. 이는 검사가 정치적 영향으로부터 독립해 국민에 대한 봉사자로 그 직무를 공정하게 수행할 수 있도록 하기 위한 조치였다.

당시 국회 제도개선특별위원회가 만들어 국회 본회의를 통과했고, 1997년 1월 13일부터 시행됐다. DJ정부는 이 제도의 신설 이후 청와대에서 근무하던 검사들을 모두 검찰로 복귀시키고 민정수석비서관, 사정비서관, 민정비서관 등을 비검사로 인선하거나 검사직에서 퇴직한 지 7년쯤 지난 인사를 앉혔다.

그러나 노무현 정부는 2003년 4월부터 검사 사직 후 청와대 근무라는 방식을 사용해 이 조항을 편법적으로 운영했다. 대신 민정수석과 비서관, 행정관들 상당수를 순수 변호사 출신이거나 판사 출신 변호사를 선발했다.

위기 때마다 셀프개혁 나선 검찰


▎검사장 출신 홍만표 변호사가 지난 9월 정운호 네이처리퍼블릭 대표의 법조비리 의혹과 관련해 피의자 신분으로 서울중앙지검에 출석했다. 그는 개업 후 전관 출신이라는 점을 악용해 대형사건을 싹쓸이했다는 의혹을 받았다.
공식적으로 참여정부에선 9명의 검사가 사직서를 내고 청와대에서 근무했으며, 이들 중 4명은 노무현 정부 집권 중에 검찰에 복귀했다. 또 4명은 이명박 정부 출범에 맞춰 청와대 근무를 종료하고 곧바로 검찰에 복귀했다. 원칙대로 검찰에 복귀하지 않은 인물은 신현수 변호사 1명에 불과했다.

이명박 정부는 2008년 2월 25일부터 임기 내내 검사 사직-청와대 근무-검찰 복귀라는 공식을 이어갔다. 사실상 검사의 청와대 파견을 유지한 셈이다. 22명의 검사가 사직서를 내고 청와대에서 근무했으며, 22명이 모두 MB 정부 집권 중 또는 임기 종료 직후인 2013년 2월 28일자로 검찰에 복귀했다. 상당수는 현재까지 승승장구하고 있다.

박근혜 정부는 2013년 3월부터 같은 방식으로 검사의 청와대 파견을 유지하고 있다. 정부 출범 후 현재까지 12명의 검사가 사직서를 내고 청와대에서 근무했다. 이 가운데 1명만 변호사로 개업했다. 올해 4명의 검사 출신이 새로 청와대에 합류했다.

올 초 청와대 근무 검사들의 복귀 인사에서 특이한 모습이 포착됐다. 과거 청와대 근무 검사들은 복귀 시 고검이나 법무연수원, 지역 검찰청 등으로 보내 검찰 내부의 인사 흐름에 방해가 되지 않도록 했다.

하지만 박근혜 정부 근무 검사들은 검사장 승진 1순위 자리나 검찰 정보의 길목으로 통하는 주요보직에 ‘낙하산’으로 꽂혔다. 박 대통령은 지난 대선에서 “검사의 법무부 및 외부기관 파견을 제한하고, 법무부에는 특별한 사정이 없는 한 변호사 또는 일반직 공무원이 근무하도록 하겠다”는 공약을 내건 바 있다.

2013년 5월 28일 국무회의에서 ‘법무부 및 외부기관 파견 검사의 단계적 감축’을 포함한 140개 국정과제를 확정하기도 했다. 그러나 법무부에는 여전히 70개 안팎의 직위에서 검사들이 일하고 있다.

이런 와중에 검사들의 잇따른 비리와 수사 중 벌어진 사건사고는 검찰이 스스로 개혁에 나서는 고육지책을 내놓게 만들었다. 우선 2009년 노무현 전 대통령이 대검 중수부의 수사 중 스스로 목숨을 끊는 사건이 발생했다. 그 이전까지 수많은 사건 관련자가 자살해도 수사에 대한 비판이 일부 있었을 뿐이다.

꿈쩍도 않던 검찰은 전직 대통령의 죽음에 대한 책임론이 거세지자 궁지로 내몰렸다. 결국 법무부와 검찰은 공보준칙을 만들었다. 피의사실 공표가 문제가 된 데 따른 대책이었다.

이듬해 부산지역 건설업자의 검사 스폰서 폭로로 다시 위기를 맞자 2010년 6월 검찰은 스스로 개혁 방안을 내놓았다. 현직 검사를 앉히던 대검 감찰부를 감찰본부로 확대 개편하는 방식이다. 감찰본부장은 검사 출신이 아닌 외부 인사로 임명하겠다고 했다.

또 민간으로 구성된 감찰위원회를 만들어 감찰업무를 총괄키로 했다. 검사의 범죄를 수사하는 특임검사제를 만들어 시행하고 검찰시민위원회를 만들어 수사와 기소권을 국민에게 돌려준다는 모양새를 갖췄다. 미국식 기소배심 제도 입법을 추진하겠다고도 했다.

그러나 발표 때 호언장담하던 모습과 달리 제한적으로 시행되거나 운영 방식이 달라졌다. 일례로 검사 출신이 아닌 외부 인물로 앉히겠다던 감찰본부는 현재 검사 출신 본부장이 임명됐다. 민간인으로 채워 감찰 전 과정에 참여토록 하겠다던 감찰위원회는 감찰 결과를 듣고, 그 징계수위를 정해 총장에게 권고하는 역할만 담당하고 있다.

검찰 개혁안의 골자는 검찰권 행사의 투명성을 보장하고 총장과 검찰의 권한을 분산시켜 정치적 영향에 휘둘리지 않겠다는 것에 있었다. 그러나 결과적으로 검찰총장의 권한이 분산되기보다는 다양한 방식의 칼이 쥐어지고, 칼을 사용하는 데 명분을 만들어주는 꼴이 됐다.

당시 개혁안을 준비한 전직 검찰 고위 인사는 “제대로 운용만 하면 국민 신뢰와 함께 검찰권도 그대로 지킬 수 수 있는 좋은 방안이었지만 운용의 묘를 살리지 못하고 있다”고 지적했다.

그로부터 2년이 지나 2012년 김광준 부장검사 사건에 이어 검사의 피의자 성추문 사건 등으로 검찰에 위기가 닥치자 한상대 검찰총장은 중수부 폐지를 앞세워 검찰개혁에 대한 목소리를 높였다. 그러나 대선을 앞둔 상황에서의 정치적 상황에 따라 대응한다는 내부 반발을 불러왔다.

후임으로 자리에 오른 채동욱 검찰총장은 2013년 4월 검찰개혁심의위원회를 만들어 구체적인 검찰 개혁에 나섰다. 수사 잘하는 검사로 이름 난 채 총장은 중수부 문패를 걷어내고 검찰에 비판적인 외부 인사를 위원으로 참여시킨 검찰 개혁심의원회를 통해 개혁방안을 만들었다.

2016년 벼랑끝에 선 ‘칼잡이’들


▎진경준 전 검사장이 지난 7월 넥슨의 비상장 주식을 뇌물로 받은 혐의로 서울중앙지검에 출석했다. 엘리트 검사의 부정부패 사건이 터지자 검찰은 안팎으로 쇄신의 요구를 받게 됐다.
이때 공들여 준비한 것이 수사체계 개선안이다. 검찰은 그 동안 내부 감찰 강화 등에 공들였다. 그러나 본질은 수사 방식과 투명성에 있었다.

수사 전문가인 채 총장은 관련 내용에 대한 외부 인사의 의견을 적극 수렴하면서 그 내용에 부합하는 개혁안을 만들었다. ① 피의사실 공표 시비 ② 수사 진행 상황 및 결과에 대한 불안정성 ③ 수사의 장기화로 인한 인권침해 ④ 지휘부 설치 문제(부패범죄 관련)를 해결하겠다는 것이 주요 내용이었다.

특히 정치적 중립성과 공정성 시비에 대한 해소 방안으로 특별수사에 대한 국민 참여 확대 실현과 특별수사심의위원회 설치, 특별수사 관련 검찰시민위원회 심의 대상 확대, 특임검사 수사 대상 확대 등을 고민했다. 선거에 영향 미치는 수사활동을 자제하고 피의사실 공표를 엄중하게 처벌하겠다는 입장을 준비했다.

수사 착수 6개월 이상 경과한 사건의 수사 지연사유를 철저히 심사하는 장기미제심사관도 도입할 계획을 세웠다. 대검 반부패부 선임연구관을 심사관으로 하겠다고 했으나 검찰에 이런 제도가 도입될 뻔했다는 사실을 아는 이는 극히 드물다.

이와 함께 일선청에서 정치적 중립성과 공정성을 의심받는 수사를 진행하면 수사를 중단하고 수사방법을 변경하는 등 지휘·감독 업무를 적극적으로 하겠다는 포부도 밝혔다. 그러나 채 총장이 혼외자 사건으로 물러나면서 가장 파격적이던 개혁안은 역사 속으로 사라졌다.

김수남 총장은 올해 초 대검 중수부처럼 수사할 수 있는 힘이 필요하다며 부패범죄특별수사단을 구성했다. ‘세미(semi)’ 중수부라 불린 특수단은 대우조선해양을 첫 타깃으로 수사에 박차를 가하고 있다.

그러나 3월 진경준 검사장의 120억 원대 넥슨 비상장 주식 보유 사건을 시작으로 내부 문제가 곪아 터져 나왔다. 남부지검에선 부장검사의 폭언 등으로 시달린 검사가 자살하는 사건까지 발생했다. 검사동일체-상명하복 문화가 만들어낸 부작용이라는 동료 검사들의 목소리까지 나왔다.

결국 검찰은 지난 7월 진경준 검사장 사건과 김홍영 검사 자살사건에 대한 조사 결과를 발표하는 시점에 검찰개혁안을 발표했다. 김주현 대검차장을 중심으로 고검장들을 팀장으로 한 4개 TF 구성했다. ‘셀프개혁’을 비웃기라도 하듯 지난달 초 김형준 검사 사건이 터졌다. 진경준·김형준 잇따른 두 엘리트 검사의 부정부패 사건으로 검찰은 이제 막다른 길에 서게 됐다.

조직이 관리해준 자력으로 승승장구하던 검사들이 조직과 자신의 권력을 그동안 주변 사람들에게 원조를 받는 데 사용했다는 점에서 충격은 거세게 다가왔다. 특히 김형준 부장검사가 친구 김모 씨에게 사건 무마를 위해 어떻게 노력했는지 소상하게 설명하는 대목은 그동안 검찰을 불신하면서도 마음 한구석 정의로운 검사라는 믿음을 갖고 있던 국민의 작은 희망마저 꺼트리고 말았다.

공직자비리수사처 도입에 대한 정치권 등의 목소리가 힘을 받는 이유다. 그러나 이에 대한 반대여론도 만만치 않다. 공수처는 또 다른 권력기구를 만드는 것이란 점이다. 검찰의 권한 이상의 힘을 갖게 되고 정권을 위한 전가의 보도가 될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기 때문이다.

대신 검찰을 지휘하는 검찰총장을 선거로 뽑거나(대한변호사협회 案), 총장 인사청문회에서 그간 검사로서 담당했던 사건의 기록 전체를 파헤치자는 의견(김종빈 전 검찰총장)도 나오고 있다.

20여 년 검찰개혁 대장정을 버텨낸 검찰이었다. 이번에는 쇄신할 수 있을지에 대해 세간의 관심이 모아지고 있다.

- 오이석·정선언·심서현·송승환기자 oh.iseok@joongang.co.kr

201611호 (2016.10.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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