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 생활

Home>월간중앙>문화. 생활

[리버럴 아츠의 심연을 찾아서] 워싱턴 대사관로의 나라별 상징물 둘러보니… 

조형물과 동상도 국익·국력의 대변자 

글·사진 유민호 월간중앙 객원기자, ‘퍼시픽21’ 디렉터
177개 대사관이 자리한 매사추세츠 거리는 각국의 역사와 문화 경연장… 간디, 마오쩌둥, 케말파샤, 처칠 등 국부(國父)들이 치열한 외교전을 펼치는 듯

▎미국 외교가의 중심을 이루는 워싱턴DC 매사추세츠 대사관로 전경.
“그대가 정치에 관심이 없다고 해서 정치가 그대를 무관심하게 대하지는 않을 것이다.”

기원전 5세기 고대 그리스 아테네의 지도자 페리클레스(Pericles)가 남긴 명언이다. 도시국가 아테네는 인류 역사상 처음으로 직접민주주의를 실현한 곳이다. 노예와 여성과는 무관하지만 왕이나 귀족이 독차지하던 정치가 일개 시민의 손에 떨어진 출발점은 바로 아테네다. 시민 한 명 한 명이 국가와 자신의 운명을 동일시하면서 일치단결한다. 결국 침략자 페르시아도 물리친다. 당시의 지도자가 바로 페리클레스다.

정치에 관심이 없다고 해서 정치에서 벗어나 살 수 없다는 말은 기원전 5세기 아테네의 현실을 100% 반영한 명언이다. 민주주의를 통해 모든 문제를 논의하기에 일단 결정된다면 싫든 좋든 집행된다는 의미다. 민주주의 나라 아테네에서의 정치는 선택이 아닌 운명에 해당된다.

“그대가 국제정치에 관심이 없다고 해서 국제정치가 그대를 무관심하게 대하지는 않을 것이다.”

2016년 말 한반도를 배경으로 한, 한국인에게 해당될 법한 ‘경구(警句)’다. 사실 페리클레스가 말한 정치는 국제정치를 의미한다. 아테네는 그리스 내 다른 도시국가들과의 합종연횡 정치를 통해 생존해나간다. 당시 정치 중 가장 중요한 것은 국내가 아니라 생존 자체가 걸린 다른 도시국가와의 정치, 즉 국외정치를 의미한다. 오늘날의 국제정치에 해당된다. 2016년 말 한국의 모습은 나침반 하나 없이 표류하고 있는 망망대해 속의 범선으로 와 닿는다. 내우(內憂)와 외환(外患)이 서로 경쟁을 하듯 치고 나간다. 북한 핵은 내우이자 외환의 동인(動因)이다.

워싱턴의 핵, 매사추세츠


▎셰리든 장군은 미국 육군의 초석을 다진 인물이다.
외환을 해결하는 것은 외교다. 모두가 인정하겠지만 21세기 외교의 중심은 미국이다. 수도 워싱턴 DC는 21세기의 로마, 글로벌 외교의 핵에 해당된다. 한반도를 백척간두 위기로 몰아세우고 있는 북핵 문제의 해결무대도 결국은 워싱턴이다. 전 세계가 워싱턴과의 외교에 매달리는 것은 당연하다. 현재 워싱턴 내 외국 대사관은 177개에 달한다. 177개 나라가 외환을 막고 생존과 번영을 위한 워싱턴 외교에 총력을 기울인다.

‘엠버시 로(Embassy Row)’로 통하는 지역은 177개 대사관의 대부분이 들어선 외교의 중심 거리다. 대사관촌(村)인 셈이다. 어디를 출발점으로 하느냐에 따라 다르겠지만, 대체로 워싱턴 북서쪽 매사추세츠 애비뉴(Massachusetts Avenue)가 앰버시로, 즉 대사관촌의 중심이다.

매사추세츠 안의 4차선 도로를 중심으로 길 양쪽으로 각국의 대사관이 길게 늘어서 있다. 필자에게 워싱턴은 글로벌 국제정치를 주도하는 태풍 속의 눈으로 와 닿는다. 매일 아침 접하는 세계 곳곳의 엄청난 뉴스들의 진원지가 바로 워싱턴이다.

정작 출발점인 워싱턴은 너무도 조용하다. 자살폭탄으로 낮과 밤을 새는 중동의 비극과 달리, 워싱턴의 일상은 태풍의 눈처럼 고요하다. 필자는 워싱턴 시내에서 차를 몰 때, 가능하면 매사추세츠를 통해 돌아간다. 거리 속에서 묻어나는 특이한 분위기를 즐기기 위해서다. 매사추세츠는 태풍의 눈인 워싱턴의 핵에 해당된다.

눈 속의 동공(瞳孔)이라고나 할까? 적막한 워싱턴 가운데서도 가장 한적한 곳이 바로 매사추세츠다. 거리는 보기에 따라 신비하게 느껴질 수도 있다. 조용한 분위기와 더불어, 길게 늘어선 대사관의 건물 자체가 19세기 유럽풍이다. 1900년 파리만국박람회를 배경으로 한 영화에 등장해도 손색이 없다.

9월 초 오스트리아 비엔나에서 온 친구와 점심식사를 함께 하려고 매사추세츠에 들렀다. 2100번지 페어팩스(Fairfax) 호텔이다. 최근 세상을 떠난, 레이건 대통령의 영부인 낸시 여사가 즐기던 사라다와 샌드위치로 유명한 곳이다. 주차하기도 비교적 쉽고 붐비지 않는 곳이기에 평소 약속장소로 애용한다. 굳이 페어팩스 호텔로 잡은 이유는 맞은편 2107번지 인도 대사관을 의식해서다. 요가에 관심이 있다면 인도를 흘려 넘길 수 없을 것이다. 인도 대사관 앞에는 간디 동상이 들어서 있다.

점심식사 후 호텔 반대편의 간디 동상 쪽으로 걸어갔다. 1999년 3월 세워진, 비폭력 평화운동에 나설 때의 모습을 재현한 것이다. 몸을 가린 무명천 하나가 전부다. 물레를 돌리며 국산품 장려운동에 나설 때의 모습이다. 비엔나의 친구는 간디를 그렇게 높게 평가하지 않는 듯했다. “아마 인도인의 절반 정도가 간디를 좋아할 듯하다. 나머지는 반감을 가질 듯하다. 간디가 제1차 세계대전 당시 인도인의 영국군 참여를 주장한 사실을 아는가?”

세상 어디에도 완벽한 것은 없다. 19세기 말 유럽의 해방자로 등장한 나폴레옹에 대한 21세기 프랑스 내 호불호 평가도 5대 5로 갈려져 있다. 동상을 보면서 인도 대사관이 왜 간디를 인도의 상징으로 거리 한복판에 내세웠는지 생각했다. 간디를 영국의 하수인 정도로 비판할 수도 있겠지만, 그럴수록 분열을 넘어서 하나로 묶기 위한, 이른바 ‘역설의 동상’이 아닐까 생각해봤다.

동상이나 조각이 반드시 모두의 동의와 찬미 속에 세워질 수도, 필요도 없다. 베이징의 톈안먼광장에 걸린 마오쩌둥(毛澤東) 초상화가 만세와 찬미의 대상에 국한되지는 않는다. 나쁜 지도자가 다시는 안 나오도록 노력하자는 의미의 상징물일 수도 있다. 반면교사와 비슷하다. 간디가 범했을 수도 있을 실수나 잘못을 기념물을 보면서 개선해나가면 된다.

“식사를 하니까 갑자기 졸음이 몰려온다. 미안하지만, 호텔로 돌아가야겠다.” 비엔나 친구는 간디를 보면서도 하품으로 일관했다. 유럽에서 온 지 이틀 뒤이기에 시차가 남아 있는 듯했다. “가기 전에 다시 만나 요가에 대해 얘기를 나누자.”

체코 ‘자유의 수호자’ 토마스 마사리크


▎워싱턴 대사관로에서 가장 유명한 조형물 중 하나인 인도 대사관 앞의 간디 동상.
비엔나 친구가 사라지면서 2시간 정도 여유가 생겼다. 소화도 할 겸 걷기로 마음먹었다. 풍경은 스피드나 눈높이에 따라 다르게 와 닿는다. 자동차, 자전거, 도보, 달리기 가운데 무엇을 선택할지에 따라, 같은 풍경이라도 다르게 느껴진다. 사실 지금까지 작정하고 매사추세츠를 관찰한 적은 한 번도 없다. 자동차로 스쳐 지나가거나, 비자 신청 관계로 이런저런 나라의 영사관을 찾았을 뿐이다.

특별히 관심을 둔 것은 매사추세츠 대사관촌 곳곳에 세워진 기념조각이나 동상이다. 각국 대사관 앞에 세워진 얼굴인 만큼 각 나라가 심혈을 기울여 제작한 조형물이라 볼 수 있다. 미적인 수준만이 아니라, 21세기 로마를 무대로 한 각국의 자세나 결의 같은 것을 파악할 수도 있다. 국제정치의 최중심 거리에 세워진 조각이나 동상은 그 나라의 의식수준을 반영한 것이라 볼 수 있다.

인도 대사관 앞에서 20m 정도 서쪽으로 걸어가자 반대편에 5m 높이의 동상이 눈에 들어온다. 토마스 마사리크(Thomas Masaryk)란 이름이 걸려 있다. 1918년부터 1935년까지 체코슬로바키아 대통령을 지낸 인물이다. ‘자유의 수호신이자 민주주의 창시자’라는 문장이 새겨져 있다. 필자는 마사리크 동상의 제막식을 지금도 생생하게 기억한다. 2002년 9월로, 당시 대통령 바츨라프 하벨이 직접 와서 행한 제막식이다. 프라하 태생으로 미국 국무장관에 오른 올브라이트(Madeleine Albright)도 참석한 행사로, 당시 워싱턴에서 크게 화제가 됐다. 바츨라프 하벨은 남아프리카 공화국의 넬슨 만델라, 한국의 김대중 전 대통령과 더불어 미국이 가장 존경하던 20세기 민주주의의 화신이다. 당시 국빈으로 방문한 바츨라프 하벨은 가는 곳마다 미국민들의 환영을 받았다.

마사리크는 히틀러의 체코슬로바키아 침략 이후 실권한다. 이후 소비에트가 들어서면서 체코슬로바키아는 공산위성국으로 전락한다. 마사리크는 1968년 프라하의 봄 당시 국민적 영웅으로 부활한다. 냉전종식과 함께 주권을 되찾으면서 마사리크가 국부와 같은 존재로 워싱턴에 세워진 것이다. 2002년 당시 필자가 주목한 부분은 슬로바키아 전 대통령 미칼 코박(Michal Kováč)이다. 체코슬로바키아는 1993년 나라를 체코 2, 슬로바키아 1의 비율로 나눠 독립한다. 이른바 벨벳 혁명(Sametová Revoluce)이다. 하벨은 체코, 코박은 슬로바키아의 수반에 올라선다. 비록 각자의 노선을 고집하며 갈라선 두 사람이지만, 과거의 대통령에 대한 존경심은 누구 못지 않았다. 필자는 통일 후 한국 대사관 앞에 세워질 동상이나 기념 조각을 생각해봤다. 한국이나 북한이 아닌, 한반도 전체를 아우르는 인물로 누굴 꼽을까? 남과 북 지도자 모두가 고개를 끄덕일 체제·이념·시대·지역을 넘어선 인물은?

그리스 대사관은 마사리크 동상을 바로 마주하고 있는 맞은편에 들어서 있다. 처음 알았지만, 그리스의 정식 국명은 헬레니스 공화국(Hellenic Republic)이다. 아담한 3층 건물의 그리스 대사관은 바로 왼쪽에 4m 높이의 동상을 끼고 있다. 2009년 그리스 의회가 세운 것으로 엘레프데리오스 베니제로스(Eleftherios Venizelos)가 주인공이다.

고대의 명성에 못 미치는 현대 그리스 조각품


▎1. 마사리크는 두 나라로 나뉜 체코와 슬로바키아의 정신적 지주에 해당된다. / 2. 그리스 대사관 앞의 베니제로스 입상은 19세기 말 그리스 독립 당시의 영광을 재현했다.
불과 8년 전에 세워진 것이지만, 바닥에 새겨진 글자가 잘 안 보인다. 대사관 정문으로 통하는 입구도 뭔가 낡아 보인다. 편견일지 몰라도 그리스 경제 위기가 워싱턴 대사관에까지 밀어닥친 듯하다. 베니제로스는 1864년부터 1936년까지 생존했던 정치가다. 사회개혁에 나선 인물로 그리스에서는 근대 그리스의 아버지로 통한다. 그리스는 1821년, 400년간에 걸친 오토만 제국 식민지에서 벗어난다. 독립 이후 어지럽던 정치상황을 수습한 인물로, 특히 크레타 섬과 에게해의 주변 섬들을 그리스 영토로 만드는 데 공을 세운다.

베니제로스 동상을 바라보면서 떠올린 것은 2500년 전 고대 그리스 당시에 제작된 조각품들이다. 국부에 해당되는 근현대 그리스 지도자의 조형물 수준이 너무도 초라하다. 박물관에서 만난 고대 그리스 청동이나 대리석 조각의 100분의 1수준에도 못 미치는 듯하다. 현대 예술을 고대 그리스 수준에 비교하기는 어려울 것이다. 그러나 고대 그리스와 피로 연결된 헬레니스 공화국조차 과거의 수준에서 한참 뒤떨어져 있다는 점이 놀랍다. 국력은 곧 문화다. 21세기 그리스에서 고대 그리스 문화의 흔적을 찾는 것 자체가 무리일지 모르겠다.

모든 것이 그러하듯 무너뜨리기는 쉬워도 세우기는 어렵다. 한때 찬란한 문명과 문화를 세운 나라들이라고 하지만, 과거의 영광을 다시 되살린 예는 극히 일부에 그친다. 대부분은 과거의 영광을 되새기는 슬로건 속에서 살아간다.

그리스 대사관 왼쪽에는 대사관촌을 대표하는 큰 네거리가 들어서 있다. 남북전쟁 당시 북군 장군으로 활약한 필립 셰리든(Philip Sheridan)을 기념해 만든 셰리든 서클(Circle)이다. 그곳에 1908년에 세워진 셰리든 장군의 청동상은 매사추세츠에 세워진 수많은 조각품 가운데 비교적 오래된 것이다.


▎터키 대사관의 케말 입상은 받침대가 없어 행인의 눈높이에서 볼 수 있다. 그가 주도했던 민주주의 이념에 기초한 청동상이다.
엠버시 로에 대사관이 들어서기 시작한 것은 1930년대 들어서다. 대공황이 시작되면서 워싱턴 최고의 부촌 건물들이 부동산업자에게 넘어간다. 건물 하나하나가 비교적 크고, 스타일도 고풍스럽고 분위기도 조용하다는 점에서 대사관용으로 전용된다. 외국 대사관이 하나둘 몰려들면서 대사관촌으로 변해간 것이다. 대사관촌에 셰리든 장군의 동상이 들어선 것이 아니라, 각국의 대사관이 장군의 이름을 딴 로터리를 에워싸기 시작한 것이다.

미국은 독립 이래 지금까지 외국과의 전쟁을 통해 세계 강자로 군림해왔다. 미국 육군의 모토는 ‘우리는 항상 이긴다(We always win)’다. 그 같은 막강 미군의 초석을 다진 인물이 바로 육군참모총장으로도 일한 셰리든 장군이다. 로타리 안에 세리던 장군이 말을 타고 진격하는 모습의 동상이 있다. 보고 있으면 ‘섬뜩’한 느낌도 든다. 그 어떤 나라라도 미국의 이익에 반한다면 곧바로 달려들어 점령하겠다는 의미로 해석될 수도 있다.

셰리든 서클에 인접한 남쪽 거리에는 한국인의 눈에도 익은 입상이 들어서 있다. 터키 근대화를 일군, 무스타파 케말 아타튀르크(Mustafa Kemal Ataturk)다. 180㎝ 정도의 높이로 실제 모습을 재현한 듯하다. 비교적 최근인 2013년에 세워졌다. 입상 바로 뒤의 건물은 원래 터키 대사관 자리로, 현재는 대사의 관저로 사용되고 있다.

꽃으로 둘러싸인 케말의 모습은 50대 나이인 필자의 ‘국민학교’ 시절 기억을 떠올리게 한다. 40여 년 전 한국인 대부분이 존경의 대상으로 복창했던 위인이 바로 케말이다. 터키가 어디에 붙은 곳인지도 몰랐지만, 알렉산더나 나폴레옹과 동급의 수준에서 케말을 숭배했다. 케말은 군인 출신의 혁신 정치가다. 비슷한 입장에 있던 박정희 대통령의 롤모델이었던 셈이다. 실제 터키에 가면 케말에 대한 흠모와 존경이 남다르다. 정치적 차원의 찬미가 아니라, 평범한 국민의 마음속에 파고든 터키의 명실상부한 국부(國父)다. 정치와 종교를 분리하고, 알파벳을 통한 문자 정비는 케말의 최대 치적 중 하나다.

워싱턴의 한국 영사관 앞의 ‘필립 제이슨’ 입상


▎한국 영사관 앞에 세워진 서재필 박사의 동상. 독립운동가이자 한국 최초의 미국 시민권자다.
지난여름 발생한 군사 쿠데타 이후 상황을 보면, 과연 터키의 정치가 케말의 뜻을 받드는 방향인지 의문이 생긴다. 외신이 전하듯 쿠데타 음모를 바로잡는다는 미명 아래 터키인 10만여 명에 대한 체포와 구금, 추방이 이어지고 있다고 한다. 필자는 누구보다도 터키를 자주 찾고, 이스탄불의 구석구석을 사랑한다. 그러나 가까운 시일 내에 시리아와 같은 잔인한 내전이 터키에 일지도 모른다는 불안감을 지우기 어렵다. 20세기 터키 정치의 원점은 “케말이라면?”으로 집약될 수 있다. 현재 벌어지는 터키의 상황을 보면 케말을 부정하는 방향으로 나아가는 듯하다. 레슬링 선수 출신으로 미네소타 주지사에 올랐던 제시 벤추라를 만난 적이 있다. 그의 집무실에서 보았던 작은 동판 글은 아직도 기억에 선명하다. “영웅을 영웅으로 받아들이지 못하는 나라만큼 불행한 나라도 없다.”

케말 입상에서 서쪽으로 1분 정도를 걸어가다 보면 태극기가 눈에 들어온다. 한국 영사관이다. 정확한 주소는 매사추세츠 2320번지다. 원래 한국 대사관으로 사용된 곳으로 해방 직후인 1949년 7월에 구입한 건물이다. 당시 어떤 경로를 통해 구입했는지 모르겠지만 매사추세츠 내 최적의 장소를 잡은 듯하다. 영사관 앞에는 필립 제이슨(Philip Jaisohn)이란 이름의 한국인 입상이 들어서 있다. 처음에는 누구인지 몰랐다. 서재필 박사다. ‘한국의 민주주의와 독립을 위해 싸운 한국계 미국인 제1호’라는 비문이 들어서 있다. 2008년 세워졌다. 서재필 박사에 대한 얘기는 하루 종일 써내려가도 모자랄 것이다. 한국 근·현대사의 거목이다. 어떤 과정을 거쳐 서재필 박사가 영사관 앞에 세워졌는지 궁금하다. 그러나 여러 측면에서 볼 때 적절한 선택이 아닐까 생각된다.

서재필 박사의 인생과 관련해 필자가 주목한 부분은 두 가지다. 먼저 1890년 6월 10일, 제1호 미국 시민권자가 된 배경이다. 당초부터 미국인이 되려고 한 것이 아니라, 어쩔 수 없이 한국을 떠난 것이 이유다. 갑신정변에 실패하면서 역적으로 몰린다. 남은 가족 전원이 자살한다. 그 와중에 미국에서의 망명 생활을 시작하면서 어쩔 수 없이 시민권자가 된 것이다. 시민권자였기에 살아남아서 독립운동과 문화운동을 벌일 수 있었다. 병역과 세금을 기피하기 위한 것이 아니라 생명보호와 독립·문화운동을 위한 보험으로서의 시민권이다.

두 번째는 한국 최초의 미국 시민권자가 고학으로 명문 대학을 마친 인물이란 점이다. 세계 각국의 미국 이민사를 통틀어 제1호 이민자가 미국 내 대학 졸업생인 경우는 극히 드물 것이다. 이민대국 미국은 유럽에서 온 2류, 3류 국민들을 통해 집대성된 나라다. 사실, 서재필 박사는 정확히 말해 박사(Ph.D)는 아니다. 콜롬비아 대학에서 세균학을 전공한 의사란 점에서 닥터란 호칭이 붙여졌다. 19세기말 아시아인으로 미국 대학을 마친 사람은 손에 꼽을 정도다. 1893년 뉴욕 콜롬비아 대학에서 의학 과정을 마쳤다는 사실 하나만으로도 특별하다. 공부와 노력을 통한 성공은 한국인이 가진 자랑스러운 유전자일 듯하다.

제로메, 엠네트… 민족의 시련 대변하는 위인들


▎18세기 말 아일랜드 애국자 로버트 엠멧은 매사추세츠 거리에 세워진 조형물 가운데 가장 젊다.
한국 영사관 반대편, 정확히 말해 매사추세츠 2343번지는 크로아티아 대사관이다. 바로 앞에는 얼굴을 아래로 떨군 채, 머리를 움켜진 좌상이 들어서 있다. 벌거벗은 모습이다. 통상 자랑스럽게 얼굴을 든 채 매사추세츠에 서 있는 것이 대사관 앞 조형물의 모습이다. 크로아티아 조각상의 경우, 반대로 땅을 내려다보며 고뇌하는 인물상으로 대체돼 있다. 서기 341년부터 420년까지 생존한 성(聖) 제롬 신부(St. Jerome The Priest)의 상이다. 가까이 붙어서 얼굴 표정을 자세히 살펴봤지만, 어떤 모습인지 읽기가 어렵다.

크로아티아는 1991년 유고공화국에서 독립한 신흥국가다. 중세 당시 베니스 공화국의 영향권에 있었기에 문화유산이 넘친다. 400만 명에 불과한 인구를 기반으로, 관광사업에 힘을 쏟으면서 곧바로 선진국으로 발돋움한다. 뒤돌아보면 파란만장한 역사를 가진 나라다. 발칸반도에 위치해 있기에 이념·종교·민족 간의 충돌이 끊이지 않았다. ‘크로아티아=내전’을 떠올리는 사람도 적지 않을 것이다. 척박한 역사였지만, 로마 가톨릭을 근간으로 한 종교가 끈질긴 생명력의 출발점이라 믿는다.

제롬 신부의 고뇌에 찬 모습은 크로아티아 국민들이 겪은 고난과 인내의 상징으로 와 닿는다. 언제부턴가 종교는 세속에서 통하는 악행을 정당화하는 수단으로 활용되고 있다. 인간·가족·사회·국가의 품과 격을 높이는, 역사의 주춧돌로서의 종교는 흑백필름 속으로 흘러가버렸다. 종교가 가진 강하면서도 아름다운 부분이 제롬 신부를 통해 새삼 확인해볼 수 있다.

로버트 엠멧(Robert Emmet) 공원은 제롬 신부 동상에서 20m가량 떨어진 곳에 위치한 작은 공간이다. 연미복 차림의 젊은 남성 동상이 들어서 있다. 아일랜드 애국자 엠멧이다. 1778년에 태어난 엠네트는 25세 나이에 형장의 이슬로 사라진다. 영국 국왕에 대한 반역죄다. 개신교 가족에서 태어난 엠멧은 미국 독립운동을 지지한 인물이기도 하다. 아일랜드인 대부분은 가톨릭 신자다. 청교도 국가인 미국의 독립을 지원하면서 아일랜드 독립을 목표로 한 것이다. 동상 아래의 비문에는 미국인에게 전하는 그의 목소리가 실려 있다. “나는 워싱턴 대통령이 미국에 행한 것과 같은 약속을 아일랜드인에게 행하고 싶다….”

흥미롭게도 엠멧 동상은 대사관 터와 무관한, 워싱턴 국립공원 소유지에 들어서 있다. 워싱턴시 스스로가 결정해 세운 동상이다. 220년 전 미국의 독립을 지원한 유럽인이었다는 점도 중요하지만, 경찰·소방·경비와 같은 직업에 특화돼 있는 ‘미국의 허리’ 아일랜드인의 파워를 실감할 수 있는 증거로 다가선다.

엠멧 공원에서 30m 정도 걸어가면 한국 대사관이 눈에 들어온다. 유럽풍의 다른 대사관과 달리, 콘크리트로 지어진 현대판 건물이다. 1990년 토지를 매입해 착공에 들어가 1992년 11월에 대사관 업무를 시작했다고 한다. 당시로서는 엄청난 예산이 소요된 역작이다.

현재 한국 대사관은 다른 그 어떤 나라의 대사관 건물보다도 크다. 내일을 알 수 없는 불투명한 나라가 한국이라 하지만, 워싱턴에 세워진 대사관을 보면 그렇지도 않다. 백년대계를 바라보고 만든 건물이다. 난립하는 지방정부의 초대형 청사신축 붐과 같은, 무조건 크게 짓자는 발상과는 전혀 다르다.

만약 2016년 엄청난 예산이 필요한 대사관 확장공사 계획이 제안된다면 어떤 결과가 나올까? 20세기말 이뤄졌던 과감한 결정이 이뤄질 수 있을까?

스토리텔링이 느껴지지 않는 한국 대사관 조형물


▎한국 대사관 앞의 원구 조형물. 대사관 개설 50주년을 기념하는 비문이 붙어 있다.
한국 대사관 바로 앞에는 해석하기 힘든 원구(圓球) 작품이 들어서 있다. 정문 바로 앞의 작은 정원 안에 원구 6개가 세워져 있다. 지구의 6개 대륙을 의미하는 것인지 모르겠지만, ‘2000년, 주미 한국대사관 50주년’이란 글자가 새겨져 있다. 기증자는 대통령 선거에 가끔씩 등장하는 한국의 재벌 2세다. 어떤 연유에서, 어떤 의미로 세워진 것인지 모르겠지만, 한 나라의 대사관 앞에 새워진 작품치고 너무도 어색하다. 크고 작고의 문제가 아니라, 한국과 무슨 관계를 갖는지가 궁금하다. 한국의 역사·전통·문화에 관한 스토리텔링이 느껴지지 않는다. 포스트모더니즘 작품인지 모르겠지만, 제대로 관리도 안 해서 낡은 싸구려 조형물로 비친다. 한국사회 전체가 그러하듯, 하드 분야는 누구보다도 강하다. 소프트가 문제다. 백년대계를 염두에 둔 건물이지만, 바로 앞에 들어선 재벌 2세의 기증품은 너무도 척박하다.

일본 대사관은 한국 대사관 바로 옆에 있다. 중간에 작은 아파트 건물이 들어서 있지만, 두 대사관만 본다면 인접해 있다. 매사추세츠의 주소가 한국은 2450, 일본은 2516이다. 일본 대사관이 1931년 세워진 점을 감안하면 한국 대사관이 나중에 들어선 셈이다. 한국 대사관은 5층, 일본 대사관은 2층 건물이다. 낮은 건물이기 때문이겠지만, 일본 대사관은 뭔가 ‘꽉 찬’ 느낌이 든다. 공식파티에 가끔씩 참가하지만, 실제 정문을 통해 안으로 들어가는 보안 시스템도 아주 특별하다. 아마 워싱턴에서 가장 삼엄하지 않을까 싶다. 1996년 12월 17일, 페루 일본 대사관에서 벌어진 납치사건이 배경에 있다. 그 전에는 모두에게 대사관을 개방했지만, 페루 테러사건 이후부터는 전 세계 일본 대사관의 문이 닫혔다.

흥미롭게도, 일본 대사관 앞에는 조형물이 하나도 없다. 대사관 바로 옆에 영사관도 있지만, 동상이나 예술작품이 하나도 없다. 단순하다. 굳이 찾아내자면 대사관 정문 위에 걸린 일황을 상징하는 황금문양만이 눈에 들어온다. 한국 대사관의 경우 영사관 대사관 외에 문화원 앞에도 조각물이 들어서 있다. 돌하루방이다. 조각물로 보자면, 3대 0인 셈이다.

각자 다른 해석을 내놓겠지만, 필자는 한·일 간의 캐릭터를 실감할 수 있는 부분이 조각물 3대 0에 있지 않을까 싶다. 적극적으로 뭔가를 표현하는 것이 한국, 반대로 숨기거나 표현하지 않으려는 것이 일본이다. 울고 웃고 화를 내는 것이 한국인이다. 무표정을 유지하면서 자신의 마음을 드러내지 않는 것이 일본인이다.

“외교는 우리를 죽일 수도 있다”


▎2층 건물인 일본 대사관은 1996년 페루 일본 대사관 인질사건 이후로 경비가 아주 삼엄해졌다.
다음 약속 시간이 가까워졌기에 매사추세츠 끝부분에 해당되는 3100번지까지 뛰어갔다. 영국 대사관이다. 영국은 자타가 공인하는 미국의 제1 우방이다. 식민지 종주국이었지만, 전 세계를 주도하는 앵글로색슨계의 대표주자가 미국과 영국이다. 대사관 건물의 크기는 한국에 비해 다소 작다. 대사의 관저가 함께 들어서 있기에 공간적으로는 아주 넓다. 현재 500명 외교관이 일한다고 한다.

영국 대사관의 명물은 대사관 바로 앞 작은 공원에 들어선 처칠 동상이다. 약 2m 높이로 오른손은 승리의 ‘V’자, 왼손은 지팡이와 시가를 든 모습이다. 1966년 세워진 것으로 아주 특별한 걸음걸이의 형상으로 세워져 있다. 오른발은 워싱턴시 소유의 땅에, 왼발은 영국대사관 토지에 들어선 모습이다. 영국에서 미국으로 들어간다는 의미다. 소련이나 중국에서 만들어졌다면 미국에 대한 침략 정도로 해석될 수 있겠지만, 미국, 영국 두 나라만의 특별한 의미가 처칠 입상을 통해 증명되는 듯하다. 영국인은 물론, 영국의 피를 가진 미국인이라면 누구 하나 예외 없이 들르는 명소이기도 하다.

“국내정치는 우리를 이기고 지느냐의 문제로 몰아넣을 뿐이다. 그러나 외교는 우리를 죽일 수도 있다.”

존 F 케네디 전 대통령의 말이다. 한반도의 특수한 상황이라 볼 수도 있겠지만, 내우가 아무리 드세다 해도 외환이 주는 영향력에 비하면 ‘새 발의 피’에 불과하다. 정치세력 모두가 막장의 끝으로 간다 해도 수백만 명의 죽음으로 이어지지는 않는다. 외환은 다르다. 한국전쟁은 좋은 본보기다. 매사추세츠 거리는 바로 외환을 막는 최전선에 해당될 듯하다. 독립이나 시련은 대사관 앞의 조각이나 동상이 갖고 있는 공통점에 해당된다. 2016년의 외환, 즉 북핵 문제가 달아오를수록 워싱턴발 뉴스도 늘어날 것이다. 국제정치에 무심하다고 해서 국제정치가 한국을 무관심하게 대하지는 않을 것이다. 태풍의 눈, 눈 속의 동공에 주목하지 않을 수 없는 이유다.

유민호 - 미국 워싱턴에 있는 에너지·IT 컨설팅 회사 ‘퍼시픽21’의 디렉터. ‘딕 모리스 선거컨설턴트’ 아시아 담당. 연세대 정치외교학과를 졸업하고 서울방송(SBS) 기자로 일하다가 1994년 일본 마쓰시타정경숙 15기로 입숙해 5년 과정을 마치는 동안 125개 나라를 순회했다. 조지워싱턴 대학 E-Politics 프로젝트 디렉터, 일본경제산업성 연구소(RIETI) 연구원을 지냈다. <백악관에서 일하는 사람들> <중국 소프트파워> <미슐랭을 탐하다> 등 다수의 저서가 있다.

201611호 (2016.10.17)
목차보기
  • 금주의 베스트 기사
이전 1 / 2 다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