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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대담] 21세기 영웅소환 프로젝트② 세종 - 세조 

문화강국과 부국강병 이끈 쌍두마차 

대담 = 이배용 전 한국학중앙연구원장(세종 전문가)·박현모 여주대 교수(세조 전문가) / 진행·정리 윤석만 기자 sam@joongang.co.kr / 사진 신인섭 기자
세종: 집현전 설치, 의정부서사제 도입 등 유교이념에 충실한 태평성대 열어
세조: 마키아벨리식 통치로 경국대전 편찬, 직전제 도입과 같은 치세 남겨

한글 창제 등 수많은 업적으로 신생국인 조선을 동아시아의 문화 강국으로 만든 성군 세종. 왕위 찬탈이라는 오명을 딛고 아버지 세종의 뒤를 이어 나라를 부국강병으로 이끈 세조. 두 부자(父子)는 신생 국가인 조선의 국격(國格)을 한 단계 높이며 500년 역사의 기틀을 다졌다.


▎1. 정부의 공인을 받은 세종대왕의 어진. / 2. 합천 해인사에 봉안된 세조 영정.
역사 속 위대한 영웅들이 다시 태어난다면 지금의 한국 사회를 어떻게 바라볼까? 영웅들의 눈에 비친 현실과 문제점. 그리고 대안은 무엇인가? <월간중앙>은 위인들의 삶과 정신을 본받아 현대사회의 문제점을 짚고 해법을 찾아보고자 ‘21세기 영웅소환 프로젝트’를 기획해 연재한다.

1회(10월호) ‘조선 역사상 가장 위대한 콤비 류성룡과 이순신’에 이어 2회에서는 조선을 문화강국과 부국강병의 길로 이끈 두 임금 세종과 세조를 현대 사회로 소환했다. 단순 사료적인 접근을 넘어 두 영웅의 정신세계를 깊이 이해하고 있는 권위자들이 대담에 나서 그들의 삶과 철학을 통해 우리의 현실을 통찰하고 나아갈 길을 모색한다.

조선의 초기 모습은 현대사와 여러 측면에서 닮았다. 일제 강점과 6·25 전쟁으로 역사적 단절을 경험한 우리는 1960년대 이후 비로소 안정된 산업화의 길을 걷게 된다. 불과 반세기 만에 산업화·민주화를 동시에 이루었고 선진국의 반열에 올랐다. 그리고 지금 우리 앞에는 물질적 성장에 걸맞은 정신적 성숙을 통해 우리의 국격을 한 단계 높이는 과제가 남아 있다.

1392년 태조 이성계는 고려에서 조선이라는 새로운 국가를 출범시켰다. 세 번째 임금 태종은 강력한 카리스마를 바탕으로 정적들을 물리치고 왕권을 강화했다. 중앙집권국가를 이룩한 조선은 세종(재위 1418~1450)에 이르러 각종 제도를 정비하고 학문과 예술이 융성하며 산업까지 발전했다. 그의 아들 세조(1455~1468년)는 ‘부왕(父王)’의 전통을 이어 더욱 견고하고 안정된 나라를 만들었다.

정치의 근본은 ‘백성’


전쟁의 참화를 딛고 본격적인 발전의 길로 들어선 지난 60여 년의 시간은 조선 초 세종과 세조가 재위했던 기간과 비슷하다. 선진국의 문턱에서 턱걸이를 하고 있는 우리에겐 역사상 유례없는 태평성대를 이끌었던 성군 세종과 그의 아들 세조의 혜안이 그 어느 때보다 필요하다.

이 대담에는 40여 년간 세종 연구에 매진한 이배용 전 한국학중앙연구원장과 조선왕조 연구의 권위자인 박현모 여주대 교수가 참여했다. 대담은 ‘한글날’ 직후인 10월 10일 중앙일보 대회의실에서 진행됐다. 두 사람은 각자 개인의 생각이 아닌 세종과 세조의 관점으로 이야기를 나눴다. 개인 의견일 경우 따로 밝혀두었다.

1432년 11월 7일. 어전회의에서 세종은 “백성이 법 조항을 모두 알 게 할 순 없지만 형법의 주요 내용을 이두문으로 번역해 반포하는 게 어떻느냐”고 제안했다. 그러나 신료들은 세종의 제안에 정색했다. 특히 이조판서 허조의 반대가 거셌다. 그는 “간악한 백성이 법을 알게 되면 죄의 크고 작은 것을 헤아려 두려워하지 않고 제 마음대로 농간하는 무리가 생길 것”이라고 말했다. 그러자 세종은 “백성이 법을 몰라 죄를 짓게 하고, 범법자를 벌 주는 것은 조사모삼(朝四暮三)의 술책이 아니냐. 백성들이 법을 알게 해서 범죄를 피하도록 하라”고 지시했다. 이듬해인 1433년 백성이 관리들의 비리를 고발하지 못하도록 한 ‘수령고소금지법’을 개정할 때도 세종은 백성의 말을 듣는 통로를 봉쇄해선 안 된다고 강조했다.

세조_ “부왕께서는 늘 백성을 정치의 근본이라고 하셨습니다. 실록에서도 원래 임금이 없었는데 ‘백성이 하려는 일을 혼란스럽지 않게 하려고 임금을 세워 다스리게 했다’고 말씀하셨지요?”


▎1. SBS 드라마 <뿌리깊은나무>에서 이도 세종대왕 (한석규 분)은 백성과 가까운 임금의 모습으로 그려졌다. / 2. 세종대왕은 집현전을 설치해 인재를 양성했다.
세종_ “주상에게도 과인이 어릴 적부터 많이 이르지 않았는가. 군주는 언제나 나라의 근본인 백성을 제일 먼저 생각해야 하네. 백성 없이 어떻게 군주가 있겠는가.”

세조_ “그런데 지금의 한국 사회를 보면 정치가들이 왕조시대였던 조선보다도 오히려 백성을 높이 생각하지 않는 것 같습니다. 개인의 출세와 사리사욕만 앞세울 뿐이지요.”

세종_ “과인 역시 동의하네. 정치가의 핵심은 ‘애민(愛憫)’이네. 자신보다는 국민을 편히 살 수 있게 해주는 방법을 먼저 생각해야지. 그런데 요즘 정치인들은 자신의 표와 권한에만 집착하는 것 같아 안타까울 따름일세.”

세조_ “대통령도 중요하지만 그를 보좌하는 정치가들도 큰 문제라고 생각합니다. 요즘 정치인들은 권력이 있으면 추종하다 힘이 약해지면 배신하기 일쑵니다. 그래도 조선에는 목숨을 내놓고 간언하는 선비들이 있지 않았습니까?”

세종_ “동의하네. 정치인들이 같은 당내에서도 계파로 나뉘고, 갈등이 생기면 봉합할 생각은 않고 오히려 일만 키우고 있으니 이것이 ‘붕당정치(朋黨政治)’가 아니고 무엇이겠는가?”

세조_ “국가의 중요한 목적이 있으면 정적과도 손을 잡고 문제를 해결하는 데 집중해야 합니다. 목표가 명확하면 이런저런 상황을 탓할 게 아니라, 어떻게든 현실을 뛰어넘고 과업을 이뤄야지요.”

국가 흥망의 조건 ‘인재’, 요람이 된 집현전


▎이배용 전 한국학중앙연구원장
세종의 역할을 맡은 이 전 위원장이 잠시 개인 의견을 피력했다. “세종이 오늘의 현실을 본다면 아마도 ‘갈등과 분열’을 가장 큰 문제점으로 꼽았을 겁니다. 이를 해결해야 할 정치인들이 오히려 서로 싸우고만 있으니 정말 가슴 아파할 일이죠.” 그는 갈등을 해결했던 세종의 지혜가 나온 원천을 ‘역사 공부’에서 찾았다. “즉위 후 세종은 고려사를 면밀히 연구합니다. 고려의 흥망성쇠를 통해 현재의 조선에 필요한 게 무엇인지 고민을 하죠. 그리고 그 해답을 인재의 육성에서 찾습니다. 세종의 고려 연구는 김종서와 정인지에게 139권 75책에 이르는 방대한 ‘고려사’를 완성케 하면서 종지부를 찍습니다.”

1420년 3월 16일. 23세의 젊은 왕 세종은 즉위 2년 되던 해 궁내 가장 경치가 좋은 경희루 앞에 집현전을 설치했다. 태조 때 만들어졌지만 유명무실했던 집현전을 정1품 영전사 2명이 관할하는 오늘날의 ‘씽크탱크’로 확대 개편했다. 이곳에서 세종은 태종 때 60여 회에 불과했던 경연을 1898회나 진행했다. 신진 학자들과 밤낮을 가리지 않고 토론하며 국가의 발전을 연구했다. 훈민정음의 창제와 실록의 편찬, 삼강행실과 농사직설 등 각종 서적의 발행으로 혁혁한 공을 세웠다. 특히 집현전이 키운 박팽년·신숙수·성삼문·정인지 등의 젊은 학자들은 신생국가인 조선이 기틀을 다지는 데 큰 역할을 했다. 그러나 세조는 1456년 단종의 복위를 추진하던 사육신이 집현전 출신이었던 것을 빌미로 집현전을 폐지했고 7년 후 그와 비슷한 역할을 하는 홍문관을 설립했다.

세종_ “정치가든 경영자든 인재와 미래를 알아보는 혜안이 필요하네. 신라 선덕여왕이 김춘추와 김유신을 알아보고 통일의 역군으로 만든 것도 인재를 잘 쓸 줄 알았기 때문이지.”

세조_ “인재가 중요한 것을 저 역시 통감합니다. 소자 역시 집현전 역할을 할 수 있도록 홍문관을 만들었지만 급조된 조직으로는 부왕 때와 같은 ‘씽크탱크’ 역할을 할 수 없었습니다.”

세종_ “리더가 모든 것을 알 수는 없지만 각 분야에 식견을 갖고 있어야 하네. 그러려면 높은 위치에 올라갈수록 더 많이 공부하고 연구해야 하는 것일세. 그런데 지금 사회에선 지도층이 공부를 너무 하지 않는 것 같아 아쉽네.”

세조_ “부산의 관노였던 장영실을 중국에 유학까지 보내고 정3품 대호군으로까지 승진시킬 만큼 부왕께선 인재등용을 중시하셨지요. 하지만 지금 한국 사회는 과거 집현전처럼 인재를 키우는 요람 역할을 잘 못하고 있는 것 같습니다.”

세종_ “제일 안타까운 것은 젊은 세대들이 너무 기가 죽어 있는 것일세. 문제는 지금의 기성세대가 우리 문화에 대한 자긍심, 남과 더불어 사는 품성 등 옳은 가치들을 중시 여기지 않았기 때문이지. 지금의 대한민국이 한 단계 더 높은 국격을 지닌 나라가 되려면 교육에 더 큰 신경을 써야 하네.”

세조_ “지금의 교육 시스템은 20세기 산업화를 성공시켰던 모델입니다. 4차 산업혁명 시대에는 새로운 교육이 필요하지요. 창의성을 키우는 열린 교육을 해야죠. 또 한 가지는 정부 산하의 국책 연구기관들이 죽은 지식만 쏟아낼 게 아니라 미래에 필요한 살아있는 연구를 하도록 해야 합니다.”

1430년 세종의 어가 행렬이 도성 근처를 지나고 있을 때였다. 그때 세종에겐 밭에서 일하고 있는 만삭의 여종이 눈에 들어왔다. 그 자리에서 세종은 “밭에서 갑자기 애를 낳으면 위태로우니 산전에 미리 쉴 수 있도록 하라”고 지시했다. 관비인 여종들에게 산전휴가를 주는 ‘공처노비 산아휴가법(公處奴婢産兒休暇法)’이 제정된 경위다. 앞서 1426년 세종은 이미 여종들에게 출산휴가 100일을 주도록 했다. 1434년에는 산후 산모와 아이를 보필할 수 있게 남편에게도 한 달의 출산휴가를 주도록 제도를 바꿨다. 출산휴가를 법으로 정한 세계 최초의 사례다.

세종_ “요즘엔 노동인권, 복지, 저출산 정책 등으로 표현하지만 근본은 ‘생명존중’일세. 노비도 하늘이 낸 백성인데 사람답지 못한 대접을 받아서 쓰겠는가. 우리 사회의 그늘에 있는 사람들이 따뜻한 데서 살 수 있도록 돕는 것, 그게 위정자들이 가장 중히 생각해야 할 것이야.”

계유정난을 바라보는 세종의 생각은


▎세종은 부정청탁을 방지하는 김영란법과 유사한 ‘여수구죄지법’을 시행했다.
세조_ “신료들이 재임 기간에만 토지를 배분할 수 있도록 직전제(職田制)를 도입한 것도 부왕의 가르침에 따른 것이었습니다. 누수되는 재정을 막아 백성의 삶을 평안케 만들고자 한 것이었죠.”

세종_ “요즘 ‘김영란법(부정청탁 및 금품 등 수수의 금지에 관한 법률)’으로 온 사회가 시끄럽네만 공직자들의 청렴은 예나 지금이나 매우 중요한 가치일세. 과인이 만든 ‘여수구죄지법(與受俱罪之法)’도 같은 목적 아니겠는가.”

세조_ “공직자들의 비리는 언제나 문제인 것 같습니다. 높은 자들이 백성 위에서 군림하고 ‘갑질’하는 것을 막아야만 태평성대를 이룰 수 있지요.”

실록에 따르면 1424년 세종은 3정승과 대제학, 이조판서 등을 불러 사헌부가 제안한 ‘여수구죄지법’에 대해 의견을 묻는다. 뇌물을 준 자와 받은 자를 엄히 가려내 벌을 주도록 하는 법이다. 그러나 영의정 유정현은 “저 같은 늙은이가 먹을 것을 좀 받아먹는 것이 무슨 해로울 것이 있겠느냐”며 반대 의견을 펼친다. 이조판서 허조도 “먹는 것을 주고받는 건 해로울 게 없는데 하필 모든 걸 금할 필요는 없다”고 주장한다.


▎“세종과 세조는 재임시 여진족 토벌을 나갑니다. 세종은 회의를 통한 의사결정이 63%, 명령이 29%였지만 세조는 명령이 75.3%, 회의가 20.9%입니다. 하지만 세조는 세종(1만5000명) 때보다 더 적은 병력(1만2000명)으로 더 높은 공과를 세웠습니다.” / 박현모 여주대 교수
하지만 세종은 당시 조정 신하들이 뇌물에 연루돼 탄핵된 사실을 열거하며 법 제정의 필요성을 강조했고, 사헌부는 ‘여수구죄지법’을 공표했다. 박 교수는 “세종 이후 기득권층의 반대로 ‘여수구죄지법’은 큰 힘을 발휘하지 못했지만 뇌물 수수를 엄히 처벌하는 최초의 ‘김영란법’이었다”고 설명했다.

1450년 1월 명나라 사신의 조선 방문을 앞두고 조정에서는 누가 그들을 맞을 것인지를 놓고 논쟁을 벌인다. 와병 중인 세자(문종)를 대신해 어린 세손(단종)이 나갈지, 아니면 왕자인 수양(세조)이 나갈지 의견이 엇갈렸다. 그러나 세종은 둘째 아들인 수양이 그 역할을 대신하도록 결정했다. 몇 달 후 즉위한 문종이 2년 만에 죽고 어린 단종이 왕이 된 직후인 1453년 수양은 ‘계유정난(癸酉靖難)’을 일으켜 2년 후 왕위에 오른다.

세종_ “비록 네가 과인의 뒤를 이어 치세(治世)를 펼친 것은 인정하지만 조카를 폐위시키고 임금에 오른 행위는 용납할 수 없구나. 1445년에 너를 ‘진양대군’에서 ‘수양대군’으로 관호를 바꾼 것도 수양산(首陽山)에 들어가 현실정치를 초월해 살았던 백이, 숙제처럼 해주길 바라는 마음이었다.”


▎2012년 부산 동구 부산역광장에서 열린 대선 유세에 수많은 인파가 몰렸다.
세조_ “부왕께서는 어릴 적부터 소자를 늘 ‘대호(大虎)’라고 불러주셨습니다. 명나라 사신을 접견할 때 저를 대표로 내보내신 것도 형님인 문종을 대신하라는 뜻으로 해석했습니다. 선왕 중에서 정종과 태종은 형제 승계를 하셨습니다. 셋째이신 부왕께서도 두 형님들을 대신해 왕위에 오르시지 않았습니까?”

세종_ “바로 그것 때문이다. 신생국인 조선이 기틀을 다지려면 장자 계승의 원칙이 서야 했다. 네게 바랐던 것은 너의 지략과 용맹으로 세손인 단종의 든든한 후원자가 되길 바랐다. 형인 주나라의 무왕을 도와 은나라를 멸하고 국가의 기틀을 다진 ‘주공(周公)’처럼 말이다.”

세조_ “실로 소자는 부왕의 뜻을 받들었습니다. 형님께서 재위하는 동안엔 철저히 몸을 낮췄습니다. 김종서와 황보인, 안평대군이 국정을 좌지우지하며 저에게 명나라 외교 임무를 맡길 때도 묵묵히 따랐습니다. 그러나 김종서가 저를 제거하고 안평을 왕위에 올리려는 모반의 상황을 미리 감지했고, 그 때문에 계유정난을 벌인 것입니다.”

실제 역사에서 수양대군은 1453년 10월 10일 무사를 대동하고 김종서의 집을 찾아가 그를 죽인다. 이후 조계사 근처에 단종의 임시거처를 만들어 신료들을 모이게 하고 정적들을 살해했다. 수양대군은 영의정부사라는 관직에 올라 인사권과 병권을 장악하며 최고 권력자가 됐다. 이 전 위원장은 “상생의 리더십을 펼친 세종은 인륜을 매우 중시했다”며 “세종이 살아 있었다면 수양대군의 모반을 결코 좌시하지 않았을 것”이라고 말했다. 박 교수는 “권력을 바라보는 인식의 차이에서 비롯된 문제”라며 “원하는 것은 꼭 이루는 세조의 리더십에선 계유정난도 하나의 과정이었다”고 설명했다. 권력 획득의 정통성을 놓고 벌인 두 영웅의 논의는 자연스레 2017년 대선과 개헌으로 이어졌다.

2017년 대선 주자들에게 바란다


▎1. 영화 <관상>에서 수양대군과 세조를 연기한 이정재. / 2. 세조 대에 편찬에 들어가서 성종 대에 완성된 경국대전.
1436년 세종은 의정부서사제(議政府署事制)를 실시했다. 이전까지는 임금이 직접 6조(이조·호조·예조·병조·형조·공조)를 관할해 직접 보고를 받았다. 그러나 재임 18년 때부터는 3정승이 먼저 6조의 업무를 전해 듣고 중요한 내용만 임금에게 고하도록 했다. 중요한 문제는 임금과 의정부가 합의 후 국사를 처리했다. 왕의 권력을 강화했던 선왕 태종의 정책과는 반대로 신권을 인정하며 균형의 정치를 표방한 것이다.

그러나 세조는 달랐다. 세조는 부왕 세종이 도입한 의정부서사제를 폐지하고 과거의 육조직계제(六曹直啓制)를 부활했다. 신권을 약화시키고 왕권을 강화하는 조치였다. 또 신료들의 이야기를 듣는 언관활동은 세종(월평균 4.8회)에 훨씬 못 미쳤다(2.7회).

세종_ “선왕 태종께선 조선의 기틀을 다지고자 왕권 강화를 필수로 내세우셨지. 그러나 당시엔 너무 많은 숙청이 있었네. 좋은 정치란 백성의 의견을 듣는 것에서부터 시작한다고 보네. 정도전처럼 왕권과 신권이 대등할 정도는 아니더라도 합리적인 선에서 권력의 배분은 필요한 것이지.”

세조_ “소자는 부왕의 생각과는 다릅니다. 예나 지금이나 권력의 본질은 나눠 쓸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최종 책임은 대통령에게 있습니다. 국정의 효율성을 높이기 위해선 추진력이 필요합니다. 최근 논의되는 개헌의 방식에서 의원내각제나 이원집정부제 등은 권력을 분산시켜 수권자가 아무 일도 못하게 될겁니다.”

세종_ “분단된 현실과 미래의 과업을 놓고 보면 개헌 논의에서 대통령제가 내각제보다는 현명하다고 보네. 다만 특정 정치집단의 논리가 아니라 국가의 존립과 발전, 국민의 안위와 행복 측면에서 개헌이 논의돼야 한다고 생각하는 것일세.”

세조_ “그런 의미에서 소자는 대통령 중임제가 가장 현실적인 대안이라고 생각합니다. 단임제로는 대통령이 국정을 제대로 펴보지도 못하고 임기가 끝날 겁니다.”

세종_ “대통령이 중간에 국민의 평가를 받으며 견제와 균형의 원리를 지키고, 또 연임을 통해 연속성을 확보한다면 합리적인 권력 배분이 이뤄질 수 있다는 점엔 공감하네.”

세종의 생각을 이야기하던 이 전 위원장이 설명을 덧붙였다. “태종이 구축한 ‘중앙집권’이라는 토대가 있었기에 세종의 리더십이 더욱 큰 효과를 발휘할 수 있었습니다. 왕조 국가였던 시대적 상황을 감안하면 세종의 통치는 오늘날로 치면 매우 이상적인 민주주의였죠.” 이 전 위원장은 농민 부담을 덜기 위해 시작한 조세제도 ‘공법(貢法)’의 도입 과정을 예로 들었다. 공법은 토지의 비옥도에 따라 등급을 나누는 전분 6등제, 풍년과 흉년의 정도에 따른 연분 9등제를 말한다. 그는 “합리적인 조세제도를 만들기 위해 세종은 10년이 넘는 시간 동안 16만 명의 의견을 조사할 만큼 민의를 수렴하는 리더였다”고 말했다.

자주정신 바탕으로 한 실리외교


▎경기도 진접읍에 있는 세조와 정희왕후 윤씨의 광릉.
반면, 박 교수는 전쟁과 같은 위기 상황에선 세조의 리더십이 세종보다 효과적일 때도 있다고 말했다. “세종과 세조는 각각 1433년과 1460년 여진족 토벌을 나가는데 이때 의사결정 방식과 결과는 매우 대조적입니다.” 박 교수는 “세종은 회의를 통한 의사결정이 63%, 명령이 29%였지만 세조는 명령이 75.3%, 회의가 20.9%로 정반대의 모습을 보인다”고 말했다. 그러나 세조는 세종(1만5000명) 때보다 더 적은 병력(1만 2000명)으로 더 높은 공과를 세웠다. 세조는 세종이 ‘진실로 우리의 원수’라고 표현하면서도 번번이 놓쳤던 여진족 추장 이만주의 목까지 베었다. 박 교수는 “마키아벨리 같은 통치 방식으로 저평가를 받고 있지만 세조의 영민한 리더십은 경국대전 편찬, 직전제 도입과 같은 치세를 남기며 조선을 부국강병의 길로 이끌었다“고 말했다.

1432년 12월 9일. 북쪽의 오랑캐가 백성을 약탈하는 일이 잦아지자 세종은 회의를 소집했다. 신료들은 국경의 경비를 강화하자는 주장(허조)과 오랑캐를 쳐부수자(황희)는 두 의견으로 나뉘었다. 또 출병시 명나라에 사전보고할 것인지 문제가 논의에 올랐는데 이 역시 의견이 엇갈렸다. 합의점을 찾지 못하자 세종은 북방의 정확한 상황을 파악한 후 다시 논의키로 했다.

두 달이 지난 1월 11일 오랑캐의 횡포가 심해지자 세종은 대신들을 설득했다. “우리 백성을 죽이고 사로잡아가는데 나라가 두고만 보는 것은 옳지 않은 일이다.” 이후 세종은 적극적인 영토 확장정책을 펴 압록강에 최윤덕을 파견해 4군을, 두만강에 김종서를 파견해 6진을 설치하며 오늘날의 국경선을 확보했다.

세종_ “비록 중국이 큰 나라지만 우리가 그 앞에 위축될 것은 없네. 강국의 체면을 살려주되 우리의 실리를 추구하는 것이 중요하지. 또 백성을 지키는 것은 국가의 당연한 의무일세. 왜구의 소굴인 대마도를 정벌한 것도 같은 이유였네.”

세조_ “소자 또한 부왕의 가르침에 힘입어 조선의 국방을 튼튼히 하는 데 노력했습니다. 헌데 요즘 한반도는 북한과 그 주변의 열강들로 인해 더욱 어지러운 상황입니다. 이럴수록 우리가 강력한 힘을 가져야 하고 주체적인 역할을 해야 합니다. 통일도 우리가 주도권을 가져야만 이룩할 수 있습니다.”

세종_ “통일은 현 시대의 가장 큰 과제일세. 일제강점 이후 어떻게 되찾은 나라인데, 또다시 후손들에게 분단을 대물림하겠는가. 통일의 문제를 최우선을 생각하지 않는 것은 위정자들이 역사에 큰 죄를 짓는 것임을 꼭 명심해야 하네.”

세조_ “북핵 등 대북정책의 해법도 지금의 6자회담보다는 우리가 더 큰 주도권을 가져야 합니다.”

세종_ “외교는 힘만으로 되는 것이 아니야. 지금 통일을 위해 당장 시작할 수 있는 것은 문화교류라고 보네. 처음 한글을 만들고 나니 여성과 일반 백성까지 문화의 주체가 됐지. 계층간 문화교류가 활발해지며 조선은 더 큰 문화강국이 되었네. 문화의 통일이 곧 한반도 통일이 초석이 될 걸세.”

역사는 미래로 가는 열쇠


▎1. 국보 제 70호 훈민정음은 세종의 주요 치적으로 꼽힌다. / 2. 세종대왕 탄신 615주년인 2012년 서울 경복궁 근정전에서 세종조회례연이 거행됐다.
세종 즉위 4년(1422년) 선왕인 태종이 죽자 1424년부터 실록 편찬 작업이 시작됐다. 변계량을 책임자로 1426년 정종실록 6권이 완성됐고, 1431년엔 황희와 맹사성의 책임 아래 태종실록 36권이 편찬됐다. 실록이 완성되자 세종은 아버지인 태종의 실록을 보고 싶어했다. 그러나 맹사성은 “전하께서 실록을 보신다면 후세 임금도 똑같이 하실 것입니다. 사관도 왕이 볼 것을 염려해 사실을 모두 기록하지 못할 것이니 진실함을 후세에 어떻게 전하겠습니까” 하며 직언한다. 세종은 결국 뜻을 굽혔다. 반면 1498년 신하들의 반대를 무릅쓰고 실록을 본 연산군은 피비린내 나는 ‘무오사화(戊午士禍)’를 일으킨다.

세종_ “역사는 오래된 미래일세. 과인도 어려운 일이 있을 때마다 과거의 치세를 살펴보곤 했지. 올바른 역사의식을 갖는 것은 나라의 발전을 위해 꼭 필요한 일이네.”

세조_ “중국의 동북공정과 일본의 갖은 역사왜곡이 자행되는 상황에서 우리의 역사를 바로 알리는 것은 매우 필요한 일입니다.”

세종_ “역사가 정통성을 가지려면 당사자들이 아닌 제3자를 설득할 수 있는 타당성과 포괄성을 가져야 하지. 예를 들어 일본의 만행을 제3국에 알리려면, 사안별로만 접근해선 설득력이 약해지네. 위안부 문제, 명성황후 시해 등 통합적으로 접근해야 다른 나라들로부터 지지를 받을 수 있지.”

세조_ “세종실록에는 부왕께서 선왕의 사초를 보려 했다는 기록까지 실릴 만큼 투명합니다. 그 부분에서는 저의 부족함을 인정합니다.”

세조 때 편찬을 시작한 단종실록의 공식 명칭은 ‘노산군일기’다. 실록에서 단종은 노산군으로, 수양대군은 아직 왕위에 오르지 않은 상태였지만 이미 세조로 표현돼 있다. 박 교수는 “세종실록이 역사적으로 높은 평가를 받는 이유는 객관성이 뛰어나고 군신간의 대화와 서술이 구체적이기 때문”이라며 “세종이 생각했던 역사편찬의 핵심은 후대에 믿음을 주는 것”이라고 말했다. 이 전 위원장은 “세종은 민족적 자긍심이 매우 컸던 분”이라며 “오늘날 스스로를 비하하는 자학의 역사관을 본다면 개탄했을 것”이라고 밝혔다.

끝으로 세종과 세조는 우리 사회가 처한 위기의 근본 원인으로 ‘리더십의 부재’를 꼽았다. “15세기 후반부터 조선의 국운이 기울고 급기야 임진왜란까지 일어난 것은 리더십이 없었기 때문이다. 지금 대한민국도 과거 조선이 그랬듯 중대한 기로에 서 있다. 오직 국민을 생각하는 마음으로 매일 고민하고 한길을 걸어가는 리더가 있다면 그 어떤 난국도 헤쳐갈 것이라 믿는다.”

- 대담 = 이배용 전 한국학중앙연구원장(세종 전문가)·박현모 여주대 교수(세조 전문가) / 진행·정리 윤석만 기자 sam@joongang.co.kr / 사진 신인섭 기자

201611호 (2016.10.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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