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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점공개] 친박계 고(故)이해봉 의원이 쓴 1970년대 최태민의 행적 

“경북도 공무원 시절 최태민 서울집까지 가서 보고” 

박성현 기자 park.sunghyun@joongang.co.kr
당시 영적인 이미지는 있었으나 새마을운동을 왜곡… 측근 여성, 도지사 집무실 거침없이 드나들기도 해

▎1975년 9월 대한구국선교단과 서울시의사회의 자매결연식에 당시 박근혜(가운데) 큰영애가 참석했다. 오른쪽은 총재 완장을 찬 최태민 씨. / 사진·중앙포토
국정농단 사건의 주역 최순실 씨의 선친 최태민 씨가 1970년대 민간인 신분으로 공무원에게서 업무 보고를 받은 정황이 친박계 전직 국회의원이 남긴 회고록에서 확인됐다.

고(故) 이해봉 국회의원(새누리당)이 2012년 7월 펴낸 <바보 같은 인생-국회의원 4선, 이해봉의 독백>(이하 <독백>)에 따르면 1977년 당시 경북도 보건사회국장이던 이 전 의원은 서울 북아현동에 있는 최태민 씨 집을 방문해 ‘새마음운동’ 관련 보고를 한 것으로 나온다.

이때는 1970년대 후반으로 ‘구국여성봉사단’(총재 최태민)이 당시 박정희 대통령이 주창한 새마을운동 정신을 이어받는다는 취지로 ‘새마음운동’을 주관할 때다. 구국여성봉사단은 새마음운동 확산을 위해 시·도 단위로 ‘새마음 전진대회’를 열었다. 당시 경북도청에서 여성·부녀자 업무를 관장하던 이해봉 보건사회국장은 ‘새마음 전진대회’를 준비하고 지원하는 업무를 맡았다.

회고록 <독백>에 따르면 1977년 4월 어느 날 이해봉 국장은 경북도지사로부터 “최태민 목사를 만나 ‘(새마음 전진)대회를 잘 준비하고 있다’는 보고를 하라”는 지시를 받는다. 이 전 의원은 회고록에서 “나는 북아현동 언덕에 자리 잡고 있는 최태민 목사 집을 방문해 대회 준비 과정을 소상히 설명했다”고 기록했다. 나아가 당시 심정을 다음과 같이 밝혔다. “내가 느낀 최태민 목사는 앞에 나서지 않고 뒤에서 일을 챙기는 스타일일 것 같았다. 우리가 성직자들에게서 느끼는 영적인 이미지라고 할까. 그러나 순수한 마음에서 시작된 ‘새마음운동’이 구국여성봉사단이 생기면서부터 상당히 왜곡됐다고 생각된다.”

이 전 의원은 박근혜 대통령을 따랐던 친박계의 오랜 중진 정치인이었고, 김영삼 정부 시절 ‘박정희 대통령과 육영수 여사를 사랑하는 사람들 모임’에 국회의원으로는 드물게 참여했다. 1998년 4월 대구 달성 보궐선거에 출마한 박근혜 한나라당 후보의 선대위 부위원장을 맡기도 했다.

이 전 의원은 책이 나오고 불과 한 달 뒤인 2012년 8월 지병으로 유명을 달리했다. 당시 이 전 의원 빈소를 찾은 박근혜 새누리당 의원은 “고인은 인품이 굉장히 훌륭하셔서 많은 분이 존경했는데 갑자기 우리 곁을 떠나게 돼 마음 아프게 생각한다”고 애도하기도 했다.

<독백>은 박 대통령 집안과 정치적 행보를 같이한 이 전 의원이 생의 마감을 앞두고 집필한 회고록이자 최태민 씨와 관련한 불길한 예감을 기록한 것이라 무게감을 더한다. 이 전 의원은 책에서 “새마음 전진대회를 치르는 과정에서 ‘새마을운동이 이것은 아닌데…’, ‘새마을운동의 순수성은 어디에서도 찾아볼 수 없다’고 느꼈다”는 소회를 남긴다. 이 전 의원은 이 책에서 “대회에 참석한 여성들은 구국봉사단원으로 지역의 돈 많고, 권력지향적인 여성들로 구성돼 있었다. 아무리 봐도 새마을운동과는 거리가 있었다”고 썼다. 유신 말기 경북도 고위공무원의 눈에 비친 구국여성봉사단과 새마음운동은 외양만 그럴싸할 뿐 겉돌고 있었던 것이다.

이 전 의원은 나아가 다음과 같은 에피소드도 하나 덧붙였다. “당시 구국여성봉사단의 총무로 기억되는 여성이 있었다. 30대 중반의 나이에 인텔리고 미인이었다. 그녀는 도지사실을 거침없이 드나들면서 대회 지원을 요청했다. 혈기왕성한 젊은 국장의 눈에 아니꼽기 한이 없었지만, 직무상 대화를 할 수밖에 없었다.” 최근의 ‘최순실 파문’은 최순실 씨를 정점으로 한 측근 인사들의 전횡으로 더욱 증폭됐다. 40년 전에도 최씨의 선친인 최태민 씨와 그 측근에 의해 이와 유사한 일들이 자행됐으리라는 추측을 남기는 증언인 셈이다.

‘나는 돈이 없으며, 있어도 아버지 봐서라도 쓸 수 없다’


▎고(故) 이해봉 전 국회의원이 타계 직전에 펴낸 회고록 [바보 같은 인생- 국회의원 4선, 이해봉의 독백]. / 사진·박성현
이 전 의원은 박 대통령의 정치입문 뒷얘기도 회고록에 실었다. 1997년 대선에서 새정치국민회의 김대중 후보가 승리하면서 이회창 총재의 한나라당은 야당 신세로 전락했다. 대구시 달성군 김석원 의원(한나라당)이 곤경에 빠진 쌍용그룹 경영에 전념한다는 명목으로 의원직을 사퇴하자 1998년 4월 보궐선거가 치러진다. 새정치국민회의 엄삼탁 부총재가 공동여당 후보로 나서면서 한나라당 지도부는 고민에 빠졌다. 중앙 언론계, 체육계, 지역 출마 경력자 3~4명을 추려 엄 부총재와의 대결구도에서 여론조사를 실시했으나 턱없이 밀리는 것으로 나왔기 때문이다. 당시 한나라당 대구시당 위원장은 3선의 강재섭 의원이었고 이 전 의원은 고향이 달성인지라 지역 사정에 밝았다. 이 전 의원은 강 의원에게 이런 제안을 한다. “강 의원은 이회창 총재와도 가깝고, 서청원 사무총장과도 친하니 중앙당에 올라가 박근혜 씨를 달성에 출마 시키도록 건의해서 관철시켜야 한다. 그러지 않으면 달성이 무너지고 바로 인근인 경북마저도 영향을 받는다.”

강 의원이 중앙당에 이를 건의하면서 박 대통령은 달성군 보궐선거에 출마한다. 이해봉 전 의원은 선거운동 기간 내내 박근혜 후보와 동행하면서 달성군 표밭을 누볐다고 <독백>에 적었다. 당시 선거운동 과정의 에피소드도 함께 소개하고 있다. “선거를 치르며 제일 어려웠던 점은 아무래도 돈이었다. 운동원들에게 최소한의 밥값과 교통비를 제공할 수밖에 없었다. 박근혜 후보에게 ‘최소한의 밥값이라도 필요하다’는 이야기를 할 사람이 나밖에 없었다. 그는 냉담하게 거절했다. ‘나는 돈이 없으며, 있다 해도 아버지를 봐서라도 쓸 수 없다’는 것이었다.”


▎2012년 2월 국회 본회의장에서 얘기를 나누는 이해봉 의원(왼쪽)과 박근혜 전 한나라당 대표.
달성 보궐선거는 정권교체 후 치러지는 첫 국회의원 선거였던 탓에 여야가 모두 총력을 기울였을 법하다. 이 전 의원은 자금난에 얼마나 쪼들렸던지 다음과 같은 독백도 남겼다. “나는 이 선거를 치르면서 세상의 인심이 야박하고, 기업하는 사람은 인정도 의리도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재임 18년 동안 산업화를 위해 땀 흘렸던 박정희 대통령을 생각한다면 그렇게 무심해선 안 된다고 생각했다. 정말이지 개미 한 마리 볼 수 없었다는 표현이 딱 맞았다. 박 대통령 서거 후 가족들이 얼마나 큰 배신감과 외로움을 겪었을까 하는 생각도 들었다.”

이렇듯 박정희·박근혜 두 대통령에 대한 존경과 흠모가 넘치는 이 전 의원이었지만 회고록의 한 귀퉁이에 최태민 씨와 그 측근의 전횡을 기록해두고자 한 것은 왜일까? 행정고시 출신인 이 전 의원은 1969년 공직사회에 첫발을 내디딘 이래 정계를 은퇴한 2012년 5월까지 근 40년 동안 늘 메모를 해왔다. 이 회고록은 메모 또는 기억에 의존하며 직접 육필로 썼다고 밝혔다. 그는 <독백>의 말미에 “없던 것을 있다 하고, 있는 것을 과장하지 않았다. 있었던 사실 그대로 솔직하게 기술하였다. 행정이나 정치를 하고자 하는 후배들에게 조금이라도 도움이 됐으면 한다”고 집필의 각오를 밝혔다.

- 박성현 기자 park.sunghyun@joongang.co.kr

201612호 (2016.11.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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