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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손관승의 파스텔 인생(8)] 다친 마음 치유하는 ‘스토리텔러’ 박상미 교수 

세상이 다 외면해도 마지막 ‘응원자’ 자청한 공감 능력자 

손관승 세한대학교 교수
어둡고 그늘진 곳 찾아 닫힌 마음 두드리는 심리치유사
“재소자들 극단적 선택엔 다 이유 있어… 치유의 핵심은 ‘그렇구나’ 한마디 공감”


▎박상미 교수는 대학생을 가르치는 초빙교수이자 동화작가이고, 인터뷰어이자 문화평론가이고, 방송인이자 다큐멘터리 영화감독이다. 그는 “아픈 마음을 치유하는 스토리텔러로 살고 싶다”고 말한다.
위로가 필요한 시절이다. 많은 이들이 아프다. 무척이나 고단하고 영혼도 지쳐 있다. 굳센 철문처럼 많은 이들의 마음이 닫혀 있고, 서로 다가갈 수 없을 정도로 거리는 너무나 벌어져 있다. 이 시대의 능력자는 그런 마음을 읽고 진정으로 함께해줄 수 있는 사람이다. 사람들의 마음을 얻지 못하면 해낼 수 있는 일이 별로 없다. 지금은 그런 세상이다. 최근 나는 페이스북에서 하나의 글을 읽고 심장이 터질 듯했다.


▎KBS 2TV ‘아침’에 문화평론가로 출연한 박 교수.
“내가 가출했을 때, 우리 아빠도 우셨을까.

그 집에서 아직도 나를 기다리고 계실까.

다시 만나면 ‘늦어서 미안해’라고 말할 수 있을까.

이미 돌아가기엔 모든 게 너무 늦었다.

선생님, 돌아갈 수 있을까요…?”

안양 여자소년원에서 매주 금요일마다 열리는 ‘박샘의 문학치유 수업’에서 열여섯 살 소녀가 쓴 글이었다. 어린 학생의 애달픈 자기고백만큼이나 그 뒤에 숨은 절절한 사연 역시 읽는 이들의 가슴을 흔들어놓았다.

“나의 학생들은 모두 벚꽃처럼 예쁜데, 전원 성경험이 있고, 가출 경험이 있으며, 그중 반은 낙태한 적이 있다. 아이들은 내게 ‘제 죄명은요…’라고 말한다. 그 단어 쓰지 말라고 해도, 아이들은 어른들이 명명한 죄명을 이미 자기 이름의 일부로 받아들인 것 같다. 내 학생들은, 전원 가난한 집 아이들이고, 불화가 심한 가정에서 자랐다. 그런 아이들만 이곳에 있다. 왜, 왜 그런 것일까. 화가 나다가, 마음을 앓다가, 끝내 몸으로 번진 오후였다.”

다른 사람의 아픔을 내 아픔으로 느끼는 감정, 그것을 가리켜 공감이라 한다면 이 사연을 전하는 사람은 절대적인 공감 능력의 소유자. 그 주인공 ‘박샘’은 문화평론가 박상미 교수다. 박 교수는 하나의 수식어로 규정하기에는 너무도 다채로운 얼굴을 가졌다. 서울여자대학교 언론영상학부에서 영상미디어제작과 영상커뮤니케이션을 강의하고 있는 초빙 교수이자 <마지막에는 사랑이 온다>라는 책을 낸 저자이며 동화작가다. 인터뷰어이자 문화평론가이고, KBS 텔레비전에서 1년 넘게 아침 생방송을 한 방송인이며 다큐멘터리 영화감독이다.

그녀의 탁월한 능력이 발휘되는 곳 가운데 하나가 어둡고 그늘진 곳에 있는 사람들의 마음을 두드리는 역할이다. 화려한 곳이 아니라 불행했던 역사의 현장을 더듬는 방식의 여행인 ‘다크(Dark) 투어리즘’이란 표현을 빌린다면, 박 교수는 이 시대의 ‘다크 스토리텔러’라 말할 수 있을지도 모르겠다.

다크 스토리텔링의 대표적인 장소라 한다면 교도소일 것이다. 전기 철조망과 높은 담벼락으로 세상과 단절되었듯이 그 안에 갇힌 사람들은 쉽게 마음을 열지 않는다. 낯선 사람을 만나면 더더욱 긴장하고 경계의 눈빛을 보인다. 그럼에도 그녀는 교도소와 소년원에서 재소자들의 굳게 닫힌 마음의 철문을 열기 위해 영화와 문학을 텍스트로 심리치유 수업을 진행하고 있다.

“믿어주는 사람 있으면 어려운 환경서도 꿈 이뤄”


▎박 교수는 미혼모와 입양아에 대해서도 관심이 많다. 장편·단편 다큐멘터리와 인권영화를 연출한 영화감독이기도 하다.
“3년 전, 경기도 여주의 소망교도소에 글짓기 학교 자원봉사를 하면서 시작되었군요. 막상 교도소에 가서 보니까 20대부터 70대까지의 남성들이 모여 있고, 학력도 초등학교 졸업부터 대학원 졸업까지 너무 다양한 거예요. 읽기와 쓰기가 잘 안 되는 분들부터 상당한 분석력을 갖춘 분들이 섞여 있으니 효과적인 수업이 안 되더라고요. 특히 사기로 형을 살고 있는 분들은 상당히 분석력이 뛰어나거든요.”(웃음)

‘바깥’ 사람이 재소자들에게 인정받기란 참으로 어렵다. 너희가 감히 우리의 처지를 어떻게 이해하느냐 하는 심리적 장벽이 도사리고 있는 까닭이다. 상처를 드러내는 일 또한 쉽지 않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녀의 강의는 재소자들의 관심을 끌었고 입소문이 나기 시작했다. 결국 법무부로부터 전국 52개 교도소 5만여 명의 재소자를 대상으로 하는 교화방송 ‘영화치유 방송’을 해보자는 제안을 받기에 이르렀다. 2016년 1월부터 영상을 통해 전국 재소자들과 만나고 있다. 어떻게 해야 굳게 닫힌 마음의 문을 열 수 있을까?

“재소자들이 죄를 짓는 행동을 했던 데에는, 극단적인 선택을 했을 때에는 다 이유가 있습니다. 결과만 놓고 얘기해선 안 됩니다. 왜 그럴 수밖에 없었는지, 이야기를 들어주어야 합니다. ‘그랬군요… 그랬구나…’ 잘 들어주다 보면 자신의 잘못은 스스로가 다 알더라고요. 훈계하고 말로 가르치려 하는 것보다 ‘그랬구나’ 말 한마디와 고개를 끄덕여주는 행동이 공감의 가장 좋은 표현이고, 추상적인 감정이 아닌 ‘실감’으로 상대에게 전달되는 것 같습니다. 치유의 핵심은 공감이라 생각합니다.”

재소자들을 대상으로 한 강의, 누가 강요하는 것도 아니고 많은 경우 자원봉사인데 왜 그렇게 열성을 보이는 걸까? 더욱이 여자로서 겁나지 않았을까?

“저는 법에 걸리지 않는 죄를 많이 짓고 살았고, 그들은 법에 걸리는 죄를 지었고, 따져보면 사람 다 죄인이잖아요. 제가 한 시사주간지에 ‘박상미의 공감 스토리텔링’을 2년 넘게 연재하면서, 자신이 꿈꾸는 분야에서 목표를 이룬 사람들을 만났거든요. 마침내 꿈을 이룬 사람들이었습니다. 40명 넘는 사람과 깊은 대담을 나누다 보니, 딱 답이 나오더라고요. 그분들의 공통점이 뭔 줄 아세요?”

“그게 뭘까요?”

“그들 곁에는 어떤 상황에서도 지지해주고 공감해주는 한 명의 사람이 반드시 있음을 알게 됐어요. 어떤 경우에도 받아주고, 믿어주는 존재가 딱 한 명만 있으면, 역경이 닥쳤을 때 놀라운 회복탄력성이 발휘되고 더 큰 성장을 해냅니다. 증명하는 연구 결과도 있어요. 카우아이 섬에서 태어난 신생아 200명의 성장과정을 40년 동안 지켜보면서 심리학자 워너가 내린 결론도 동일해요. 극빈한 삶을 산다는 배경은 동일한데, 그중에서 성공하는 아이들이 나오더라는 거예요. 그 들을 살펴보니 공통점이 딱 하나 있었어요. 믿어주고 응원해주는 어른이 한 명이라도 옆에 있었다는 거예요.”

그 응원자의 역할, 세상이 다 외면하고 버리더라도 지지해주는 마지막 한 명의 역할을 그녀는 자청한 것이다.

“교도소에서 만난 사람들과 얘기를 나눠보면, 대부분 그런 존재가 단 한 명도 없습니다. 무조건 믿어주고 공감해주는 한 사람만 있으면, 역경이 닥쳐도 자신이 원하는 일을 반드시 해내고, 반듯하게 살아내거든요. 그런데 그런 신뢰와 지지를 받아보지 못한 사람은 타인의 아픔을 공감하지 못합니다. 세상에 분노를 갖게 되고 그 분노를 조절하지 못해요. 자신의 감정 조율도 안 되죠. 사랑을 받아보지 못한 사람은 자신을 사랑할 줄도, 타인을 사랑할 줄도 모릅니다.”

<개를 훔치는 완벽한 방법> <노트북> <8월의 크리스마스> <국제시장> <써니>…. 법무부와 함께 전국 52개 교도소 전체 재소자들이 보는 ‘영화치료’ 방송으로 제작해 내보낸 강의용 영화들의 제목이다. 강의할 영화는 재소자들이 신청한 것 중에서 박 교수가 선택한다.

“<개를 훔치는 완벽한 방법>을 재소자들에게 보여주고 강의했다고 하니, 영화에 출연한 김혜자 선생님이 참 좋아하셨어요. 하루에 감사한 것 세 가지씩 쓰면 1년에 1095개의 감사한 일이 쌓인다고 하면서 감사 일기를 권했다고 하니, 원하는 재소자들에게 예쁜 감사노트를 선물하고 싶다 하셔서 댁에 가서 받아왔답니다.”

미혼모·입양아 영화 제작도 “말 아닌 마음으로”


▎박 교수가 한 교도소에서 전국 5만여 명 재소자를 대상으로 한 교화방송 ‘영화치유’ 강의를 하고 있다.
내가 박 교수를 알게 된 것은 <박상미의 낭독의 발견>이라는 이름의 팟캐스트 프로그램에 게스트로 출연하면서부터다. 그녀는 진행자였지만 게스트인 나보다 절대로 더 나서려 하지 않았으며, 아는 척하지도 않았다. 이런 경우는 매우 드물다. 많은 진행자는 게스트가 할 말을 먼저 가로채 당황하게 만들기 일쑤였고, 실제 자신이 갖고 있는 지식보다 더 많이 아는 것처럼 포장하기에 바쁘다는 것을 나는 오랜 방송생활을 통해 알고 있다. 영어로 ‘overstatement’라고 표현하는 것, 즉 스스로를 실제보다 과대포장해서 말하는, 한국 지식인들의 해묵은 습성이 있는데 그녀는 정반대였다. 마치 그녀의 최면에 걸린 듯 속에 있던 말을 술술 털어놓는 나 자신을 발견하고 놀랐다. 이야기를 끌어내는 데 탁월한 능력자였다.

“상대의 이야기를 잘 들어주는 것이 공감이라 생각합니다. 공감이란 나의 마음을 통해서 상대의 마음을 헤아리는 것입니다. 상대의 눈을 바라보고, 고개를 끄덕여주고, 손을 잡아주는 것. 말이 아닌 행동이 가장 진실된 공감이지요. 그런데 공감은 생각보다 어렵고, 위로는 더 어렵습니다. 아이를 잃은 사람에게 ‘아이는 또 낳으면 된다, 잊도록 노력하라’는 건 폭력이지 위로가 아니지요. 말로 위로하려 애쓰지 말고, 함부로 조언하지 말고, 설득하지 말아야 해요. 구체적인 감정을 토해내게 하고, 잘 들어주면 됩니다. 이미 답은 본인이 알고 있지만, 마음 그릇에 슬픔과 분노 같은 부정적인 감정들이 꽉 차있으면 더 이상 긍정적인 감정들은 담길 자리가 없거든요. 마음 그릇이 작을수록 더 아프기 때문에, 그들의 말을 잘 들어주기만 하면 됩니다. 충고나 평가를 멈출 때 공감과 소통의 대화가 시작됩니다. 충고하고 야단치고 싶은 마음이 강할 땐 차라리 말을 하지 말아야 합니다.”

나는 최근 집안에 우환이 있어 온 가족이 비상상황을 겪었다. 이럴 때 오랜만에 나타난 친척이 어설픈 처방을 내놓고 강요하는 것이 정작 환자를 간호하는 것보다 얼마나 더 큰 스트레스로 작용하는지 경험했다. 미국의 저명한 유대인 교육학자인 론 울프슨 박사는 초상집을 방문했을 때 상투적인 위로의 말이 오히려 유가족을 더 상처를 줄 수 있다고 강조한다. 오히려 묵묵히 자리를 함께하는 편이 더 낫다고 권유한다. 박상희 교수의 말과 맥락이 같다. 말하고 싶은 유혹을 꾹 참아야 한다.

“섣부른 위로는 가당찮은 교만”


▎박 교수가 2년 넘게 시사주간지에 연재해온 ‘박상미의 공감 스토리텔링’의 라디오 공개방송을 진행하고 있다.
경청과 공감, 쉬운듯하면서 가장 실천하기 어렵다. 2016년 대한민국을 지배하는 두터운 먹구름의 정체는 리더십의 추락, 신뢰의 붕괴다. 국민이 리더를 더 이상 신뢰하지 않고, 국가시스템도 전혀 작동되지 않는다. 무너져도 너무나 처절하게 무너져 내렸다. 모두 상처를 받았다. 치유가 필요한 이유다. 정치에서 시작된 신뢰의 추락과 리더십의 붕괴 현상은 마치 도미노 게임처럼 사회전반으로 번져나가고 있다. 기업, 학교, 예술, 종교, 거의 모든 분야에 걸쳐서 리더십이 시험대 위에 올랐다.

한국 리더십의 문제는 정확하게 파고들면 공감능력 결핍에서 출발한다. 리더는 혼자서 뭔가 열심히 떠들고 있지만 청중의 마음은 굳게 닫혀 있다. 리더는 주장하려 할 뿐, 팔로워의 의견을 들으려 하지 않는 까닭이다. 혼자서 떠드는 말은 그러나 독백일 뿐 대화는 아니다. 지금 이 시대가 간절히 원하는 것은 청산유수처럼 말하는 매끄러운 입, 빅마우스(Big Mouth)가 아니다. 그것은 다른 사람의 이야기를 경청해주는 큰 귀, 즉 빅 이어(Big Ear)다. 이 시대의 위기는 큰 귀의 부재(不在)와 무관치 않을 테니까.

박 교수는 소셜미디어에서도 영향력 있는 사람이다. 페이스북과 트위터 등에서 1만2000명이 넘는 SNS 팔로워를 자랑한다. 이를 통해 미혼모 행사, 교도소 강의 자원봉사자 모집이나 프로그램을 기획할 때 큰 도움을 받는다고 했다. 영화치유 수업에서는 장편보다는 단편영화를 텍스트로 많이 쓴다.

“장편영화가 소설이라면, 단편영화는 시에 가깝죠. 짧지만 상징적이고 강렬한 메시지를 전해주니까요. 페이스북 친구와 트위터 팔로워가 많은 편이에요. 나를 돌아보고, 지친 마음을 위로할 수 있는 단편영화가 있으면 페이스북에 소개합니다. 많은 사람이 함께 보고 이야기 나눌 수 있도록요. 댓글을 통해서 서로 토론도 하고요.”

양방향 소통의 이점이다. 이런 일을 하면서 남모를 어떤 에피소드가 있었을까? 아니면 영화 같은 장면도 있을까?

“영화치료 수업 때 만났던 낯익은 얼굴들이 가석방되는 모범수 가운데 발견될 때, ‘저 내일 퇴소합니다. 많이 배웠습니다. 감사한 마음 갚을 길이 없네요’라는 말을 들을 때, 울컥 눈물이 나죠. 교도소에서 수업을 하다 보면, 기억 저 깊은 곳의 상처를 꺼내놓으며 거구의 남자들이 눈물을 흘릴 때가 있습니다. 나이 든 남자가 소리 내어 울 때, 섣부른 위로를 하는 건 가당찮은 교만입니다. 지켜보는 마음들은 경건해지지요. 창살 밖 나무들도 숨죽이고 묵념하는 시간입니다.”

이 대목에서 눈시울이 뜨거워져 나는 잠시 호흡을 가다듬지 않을 수 없다. 남자의 눈물, 그것도 나이 든 남자의 눈물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잘 알기 때문이다. 우리는 감동적인 글을 읽으면 가슴 뭉클해진다. 몇 번이고 쓰러지면서도 비틀비틀 일어나 다시 걷는 사람의 동영상을 보면 눈물을 흘린다. 왜 그런 것일까. 그것은 뇌에서 분비되는 옥시토신(Oxytocin) 성분 때문이라고 폴 작(Paul Zak) 교수는 설명한다. 미국의 클레어몬트 대학원 대학에서 심리학과 경영학을 동시에 가르치고 있는 폴 작 교수는 자선단체의 모금 행사에서 공감 스토리텔링을 보여줬을 때 눈물을 흘리는 경우가 그렇지 않은 경우보다 훨씬 더 많은 기부금을 낸다는 것을 실증적으로 증명해냈다. 그 공감 호르몬이 바로 옥시토신이다.

“스토리텔링 수단만 달라… 공통분모는 마음 치유”


박 교수는 교도소 재소자들의 삶에 적극적인 관심을 기울이는 것과 별도로 입양인과 미혼모들의 삶을 다룬 영상을 잇달아 제작하고 있다. 그녀는 장편 다큐멘터리 <마더 마이 마더>와 단편 다큐 <베이비박스의 문이 열리면> <낙태>, 인권 영화 <포르노 시나리오>를 연출한 감독이다.

“제가 독일 바이로이트 대학에서 <포르노 시나리오>를 상영한 뒤에 그곳 교수들, 그리고 독일과 한국 대학생이 한데 모여 토론하는 자리가 있었습니다. 아시아 여성 인권에 대해 외국인들의 반응은 제가 예상했던 것보다 뜨거워서 놀랐어요.”

소수자의 인권을 다룬 영화, 특히 해외 입양자, 미혼모들의 삶을 영화로 찍는 이유는 무엇일까?

“박사 과정 입학 후에 운 좋게 독일 학술교류처(DAAD) 장학생으로 선발되어 방학마다 독일에 가서 공부하게 되었어요. 영화 평론을 주로 하던 시기였는데 제 손으로 영화를 찍어보고 싶었어요. 바이로이트 대학 영화전공 대학원생들과 처음으로 영화를 찍기 시작했죠. 그 무렵 독일에 입양된 사람을 알게 됐어요. 한국에 가면 엄마를 찾고 싶다, 도와달라고 했죠. 그리고 그 과정을 다큐멘터리로 찍기로 약속했어요. 그런데 이 친구가 인천공항에 도착하자마자 한국 사회에 너무 충격을 받은 거예요. ‘이렇게 잘사는 나라가 우리를 버린 거야?’ 심한 배신감만 안은 채 떠나버렸어요.”

입양 간 아이들이 대부분 미혼모의 아이들이라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빚을 갚는 심정으로 미혼모와 입양인의 삶을 영화로 찍겠다는 결심을 했다고 한다. 그 영화를 본 KBS PD가 영화 이야기를 방송으로 제작해서 출연한 입양인이 친모를 찾기도 했다고 한다. 다채로운 그녀의 활동에서 공통분모는 무엇일까?

“마음을 치유할 수 있는 얘기가 아닌가 합니다. 타인과 소통하는 스토리텔링의 수단으로 영화, 칼럼, 평론, 방송, 동화를 선택해서 쓰는 거예요. 소재에 따라 가장 효과적인 방식을 선택할 뿐, 결국 같은 얘기를 하는 거지요. 요즘은 글보다 영상의 힘이 세니까 그쪽에 조금 더 치중하고 있으니, 영상을 통해서 사회에 말을 걸고 있는 사람? 그렇게 말할 수도 있겠네요.”

박상미 교수는 바쁜 활동 와중에 올해 모교인 한양대학교에서 ‘대장금을 통해 본 한류 스토리텔링 발전방안 연구’라는 제목으로 박사학위를 취득했다. 내가 오랫동안 일해왔던 분야고 관심사여서 좀 더 깊숙이 물었다.

“독일 학술교류처(DAAD)는 참 고마운 곳이죠. 연구과제가 자신들이 추구하는 것과 맞으면 외국인들에게도 연구비를 아끼지 않죠. 여러 번 한국의 대중문화, 한류 연구에 대한 지원을 받았어요. 지금도 바이로이트 대학 우테 팬들러 교수님을 비롯한 한류를 연구하는 독일 학자들과 교류를 합니다. 3년 10개월 동안 한류 문화에 대해 해외 7개국 한류 전문가와 한류 팬 200명을 대상으로 심층 인터뷰를 진행하고 박사 논문을 썼습니다. 전 세계 인구의 0.7%의 소국에서 일으킨 파문이 한류예요. 한국인처럼 이야기에 강한 민족이 드물어요. 스토리텔링 전략을 잘 세운다면 앞으로도 한류는 확장되리라 확신합니다.”

“늘 새싹의 마음, 초심 기억하며 살고 싶어”


▎박 교수는 “전 세계 인구의 0.7%의 소국에서 일으킨 파문이 한류”라며 한류 확장을 위해 스토리텔링 전략 강화를 주문한다.
박사학위에다 석사학위도 두 개나 된다. 무엇에 그렇게 갈증이 났던 것일까?

“대학 때 아버지가 암으로 병석에 누운 후, 집안이 갑자기 기울었어요. 정말 힘들게 졸업할 수 있었어요. 대학 졸업 후 지금까지 쉬지 않고 일하고 알뜰하게 저축했어요. 그때부터 졸업은 내가 열심히 뛰면 반드시 닿을 수 있는 결승선이 되었어요. ‘학위 중독자’라고 주변인들이 비꼬건 말건, 저는 학교에 다녔어요. 삶이 풍족해질수록 공부에 목이 말랐어요. 학부와 첫 번째 석사는 문학을 전공했으니, 두 번째 석사는 심리학 공부를 했죠. 박사는 대중문화 전반을 공부하고 싶었어요. 이렇게 공부한 걸 토대로 ‘공감과 소통의 스토리텔링’을 만들어내고, 아픈 마음을 치유하는 스토리텔러로 살고 싶어요.”

사회적 문제에 관심을 가지고 영화와 글을 통해서 타인의 속마음에 귀를 기울이려 노력하다 보니, 공감능력이 계속 자라는 것 같다고 그녀는 말한다. 이처럼 부지런하고 열성적으로 사는 여자의 가방 안에는 어떤 것이 들어있을까, 궁금하지 않을 수 없다.

“제 가방은 참 복잡해요. 체력이 많이 약해서 화장품보다 종합비타민, 홍삼, 아스피린 같은 약이나 건강보조제를 꼭 챙겨 다녀요. 아프면 하고 싶은 일을 많이 못하게 되니까요. 그리고 노트와 작은 사진기를 꼭 가지고 다니죠. 저는 사람에 대해 관심이 많아요, 그래서 인터뷰도 많이 했던 것이고요. 그날의 기록은 글과 사진으로 꼭 남겨두려 애씁니다. 그것들이 모여서 제 책이 되고요.”

오래도록 준비한 것들을 이제 책이라는 이름으로 잇따라 세상에 선보일 계획이다. 이달의 파스텔 인생의 주인공에게 어떤 색을 선호하는지 물었다.

“연두색입니다. 노랑은 화려하고 초록은 너무 진해요. 연두색은 막 돋아나는 새싹의 색이죠. 늘 새싹의 신선한 마음, 초심을 기억하며 살고 싶어요.”

여자의 나이를 묻는 것은 실례지만, 나는 페이스북을 통해 그녀의 나이를 이미 알아버렸다. 이제 30대를 지나 마흔에 갓 진입했다. 내친 김에 실례를 무릅쓰고 여자 나이 마흔의 의미를 물었다.

“여자에게 마흔은 매우 상징적인 사건이에요.(웃음) 서른아홉엔 불안했어요. 내 젊음이 놓친 것들이 안타깝고, 내가 가질 수 없는 것들이 간절히 그리웠죠. 흰 머리카락이 하나씩 돋아날 때마다 내 속의 ‘젊은 여자’가 한 명씩 죽어나가는 기분이었어요. 요즘 많이 편안해졌어요. 서른아홉까지는 남의 이목에 신경 쓰며 살았던 거 같아요. 그런 삶이 내게 남긴 것은 우울과 외로움, 과한 자기 처벌이었어요. 이제는 나를 바로 세워야 할 나이라고 생각해요. 마흔은 외부의 조건에 흔들리지 않고 나를 가다듬고 바로 세워야 할 나이인 것 같아요. 늘 두려웠던 나이 오십, 이젠 기다려지는 나이예요. 이제야 비로소 내가 좋다는 생각을 합니다.”

성공보다는 성장하는 삶을 택한 자의 목소리였다. 아무리 힘들어도 마음과 정신의 근력을 회복시켜야 할 이유이기도 하다.

손관승 - 세한대학교 교수. MBC 기자와 베를린특파원, 국제 부장 등을 거쳐, iMBC 대표이사를 역임했다. 중앙대학교에서도 미디어 스토리텔링을 가르치고 있다. <괴테와 함께한 이탈리아 여행> 등 여러 권의 책을 썼다. ceonomad@gmail.com

201612호 (2016.11.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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