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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정운 ‘창조의 본고장’ 바우하우스를 가다(9)] 아홉 번째 이야기 | ‘창조’는 과연 교육될 수 있는 것인가 

‘편집의 단위’를 다양화하는 것이 핵심이다! 

사진 윤광준
위대한 예술가, 뛰어난 장인들은 모두 자기 나름의 편집의 단위를 확보하는 수단을 갖고 있었다. 창조의 대가로 일컫는 레오나르도 다빈치가 평생 노트에 끊임없이 기록했던 것은 ‘편집이라는 창조적 행위’, 즉 에디톨로지의 기본이 되는 편집의 단위를 확보하기 위한 노력이었다.
#1. 유럽의 ‘유겐트슈틸’과 일본의 ‘시라카바파’

오늘날 서양인들이 일본의 관광지에서 아주 진지한 표정으로 일본문화를 체험하는 모습을 자주 보게 된다. 오늘날 서양인들을 매혹하는 일본문화의 대부분은 종교적 의례(ritual) 수준까지 끌어올린 일본식 ‘자발적 오리엔탈리즘’의 산물이다. 서양이 원하는 동양의 모습을 적극적으로 만들어줬다는 이야기다. 동양에서 중국과 조선을 제치고, 일본이 가장 앞서 서구화될 수 있었던 것은 단순히 서양문물을 적극적으로 수용했기 때문만이 아니라는 뜻이다. 물론 이 같은 자발적 오리엔탈리즘의 흔적은 오늘날 한국과 중국의 관광지 곳곳에서 발견된다. 그러나 아주 촌스럽다. 일본만큼 교묘하고 치밀하지 못하다. 이 맥락에서 서구라는 타자의 시선을 전제로 하는 일본식 ‘자발적 오리엔탈리즘’의 전형이라 할 수 있는 야나기 무네요시의 ‘민예운동’의 성립과정을 좀 더 자세히 들여다볼 필요가 있다.

야나기 무네요시가 중학교 시절에 몰입했던 우치무라 간조의 기독교적 지식의 틀에서 벗어나 문화예술에 관한 지적 호기심을 가지게 된 것은 ‘시라카바파(白樺派)’에 합류하면서부터다. 1910년에 창간된 잡지 를 중심으로 활약한 일본의 작가들을 ‘시라카바파’라고 부른다. 시라카바파가 일본 근대문학, 혹은 일본 근대문화의 형성과정에서 차지하는 역할은 아주 특별하다. 신분제와 같은 사회적 억압에서 벗어나 자신의 내면 요구에 충실한 ‘근대적 개인’의 출현과 매우 밀접한 관계가 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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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612호 (2016.11.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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