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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석주의 인류의 ‘등대(燈臺)’를 찾아서(11)] 쿠바인의 영원한 친구 체 게바라(Che Guevara) 

“리얼리스트가 되자. 그러나 가슴속엔 불가능한 꿈을 간직하자!” 

장석주 전업작가
순수 이상을 좇아 한평생 ‘밤의 전투’를 벌였던 게릴라… 지성과 저항정신을 갖췄던 ‘완전한’ 남자의 치열한 삶

▎사진·중앙포토
여기 한 사내가 있다. 사자의 갈기같이 거칠게 자라난 긴 머리칼, 텁수룩한 수염, 비쩍 마른 얼굴, 때로는 부드럽지만 형형하게 빛나는 눈매를 가진 사나이. 별이 하나 그려진 베레모를 눌러 쓴 그를 가리켜 사람들은 ‘20세기 혁명의 아이콘’ 혹은 ‘전사 그리스도’라고 했다.

1967년 10월 9일 볼리비아에 위치한 한 작은 학교에서 볼리비아 특수부대원의 총에 맞아 죽은 이 사내는 ‘에르네스토 게바라 데 라 세르나(Ernesto Guevara de La Serna)’라는 긴 이름을 갖고 있었다. 사람들은 그의 긴 이름을 줄여 ‘체’라고 다정하게 불렀다.

체는 아르헨티나에서 태어나 어린 시절을 보낸 뒤 의사, 혁명전사, 게릴라 전술가, 쿠바 국립은행 총재, 재무장관, 외교관으로 살다가 돌연 안데스 산악지대에서 벌어진 게릴라전에서 볼리비아 특수부대 군인들에게 붙잡혀 죽음을 맞는다.

쿠바혁명의 지도자 피델 카스트로는 체에 대해 “활달한 성격을 가진 다정다감한 인물로 사랑하지 않을 수 없었다”고 회고했다. 프랑스 철학자 사르트르는 그를 “지성과 저항정신을 두루 갖춘 ‘완전한’ 사람”이라고 평하기도 했다. 미국 시사주간지 <타임>지도 20세기를 움직인 100인 가운데 한 명으로 체를 꼽는다.

쿠바의 심장, 아바나에서 ‘체’를 만나다


▎라틴 아메리카 안데스의 한 계곡에서 체 게바라가 동료와 볼리비아 정부군과 벌이는 게릴라전 전략을 상의하고 있다. 그는 인생 전반에 걸쳐 혁명의 신념을 고수했다. / 사진·중앙포토
국내 대학가에서 이른바 ‘체 게바라 붐’이 인 것은 소련을 비롯한 동구권의 공산주의가 무너지고 난 뒤다. 체가 죽은 지 약 40년 뒤 국내 한 출판사에서 작가 장 코르미에의 <체 게바라 평전> 번역본이 베스트셀러가 된 게 그 시발점이었다.

이때부터 대학가에서 체 게바라 평전 읽기의 열풍이 거세졌다. 그 결과 체의 초상이 프린트된 티셔츠를 포함해서 여러 상품이 쏟아져 나왔다. 심지어는 대학가 술집 벽면에 베레모를 쓴 체의 초상이 심심찮게 등장하기도 했다.

체 게바라는 쿠바, 볼리비아와 아프리카에서 게릴라전을 치르는 동안에도 훗날 제 3세계에 적용가능한 사회주의 이론을 개발하기 위해 끊임없이 공부했다. 이 과정에서 그는 “혁명의 극기, 희생정신, 혁명적인 노동의 중요성”을 행동으로 보여주는 데 노력했다.

이어 마르크스·레닌주의 이념을 가장 혁명적인 방식으로 실천했다. 체는 쿠바의 혁명가 피델 카스토르의 말대로 “순결하고, 용감하고, 모든 것에 초연하고, 욕심 없는, 인류 역사상 가장 훌륭한 인물”이었다.

당시 카스트로가 이끄는 쿠바 혁명정부는 남미의 인민해방을 위해 싸우다가 전사한 체를 위해 다음과 같이 결정했다.

“첫째: 30일 동안 조기를 게양하고, 오늘 자정부터 3일 동안 공적인 모든 행사를 연기한다.

둘째: 체가 전투하다 영웅적으로 숨진 날을 국경일로 정하고, 이를 위해 10월 8일을 ‘게릴라 영웅의 날’로 정한다.

셋째: 후세에 그의 모범적인 삶이 길이 남도록 여러 가지 운동을 전개할 것이다.”


우연히 짐을 정리하던 중 10여 년 전 노트에서 멕시코를 거쳐 쿠바를 여행하고 돌아와 썼던 기록을 찾아냈다. 2005년 2월 나는 한국문예창작협회의 교수들과 멕시코 과달라하라 대학이 주최한 멕시코 문학인과의 교류에 참가한 뒤 쿠바 아바나로 날아갔다.

‘미지의 나라’ 쿠바로 간다는 생각에 크게 설렜다. 그곳에서 작가 헤밍웨이와 ‘강철 영혼’의 혁명가 체 게바라가 남긴 삶의 흔적을 만날 거란 기대감으로 심장 박동은 빨라지고 마음은 한껏 부풀었다.

이동하는 내내 이 혁명가가 남긴 말을 되새겼다. “우리 모두 리얼리스트가 되자. 그러나 가슴속에는 불가능한 꿈을 간직하자!” 당시 노트에 남긴 여행기를 공개한다.

먼 여행을 다녀왔다. 멕시코의 수도인 멕시코시티와 제 2의 도시인 과달라하라, 그리고 쿠바의 수도 아바나와 휴양지 바라데로에 머문 게 전부였지만 도쿄와 로스앤젤레스를 경유했고 돌아올 때는 샌프란시스코와 도쿄를 거치는 길고 지루한 여정이었다.

멕시코에서는 사라진 마야와 잉카제국의 흔적을 더듬어봤다. 달의 피라미드와 태양의 피라미드, 프리다 칼로와 1968년 민중항쟁이 있었던 문화광장에 도착했을 때는 눈물이 솟구쳐 올랐다.

체 게바라와 헤밍웨이의 흔적을 찾아서 쿠바 혁명기념관과 국립미술관을 찾았다. 데킬라와 인디오·스페인계 백인 간의 혼혈들, 평양의 김일성 종합대학을 나와 북한 억양이 짙은 한국말을 구사하는 쿠바 여행가이드 청년, 흥청거리는 밤의 카페들, 살사 댄스, 대서양의 수정 같은 바다, 희고 고운 해변의 모래들, 헤밍웨이가 말년 한때를 보낸 아바나의 집….

열흘 동안 비행기만 열 번을 갈아타는 고된 여정이다. 그럼에도 대지에 발을 디디면 거침없이 그곳을 즐겼다. 바라데로 해변에서 종일 바다에 몸을 담그고 수영했다. 그새 얼굴과 팔 다리가 강렬한 태양빛에 그을려 까맣게 변했다.


쇄빙선처럼 두꺼운 얼음을 깨고 먼바다로 나아갔다 돌아오니 집은 고요한 상태로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집의 익숙한 것들이 주는 안도감으로 한밤중 잠입한 밀항자와 같은 서먹함을 희석해본다.

집에서 키우던 개가 그새 여섯 마리의 새끼를 낳아 거실을 차지하고 있었다. 서울의 한 대학에 편입학 시험을 본 딸아이는 웃으며 합격 소식을 전해왔다.

익숙함을 떨치고 나아가는 여행은 내 안에 없는, 부재에 대한 경계의 확장이자 우리 의식 안에 침잠해 있는 익숙한 것, 낡은 것을 낯선 것, 새로운 것으로 교환하는 것이다. 혹은 생의 새로운 가능성에 대한 탐색일지도 모른다. 풍경을 해체하고 난 뒤 드러나는 넓이와 깊이는 그걸 바라보는 주체의 내면의 깊이에 상응한다. 보는 자만이 풍경을 지배한다.

의사가 되고 싶었던 혁명의 아들


▎1950년대 쿠바혁명을 이끌었던 ‘혁명동지’ 체 게바라(왼쪽)와 피델 카스트로. 쿠바혁명 완수 직후인 1960년 두 사람이 대중을 향해 손을 흔들고 있다. / 사진·중앙포토
지배한다는 것은 저 바깥을 자기 안으로 끌어당긴다는 뜻이다. 낯선 것이 발명되는 찰나다. 그때 안과 바깥은 상호 삼투하면서 빛이 넘치는 누리는 비로소 풍경의 실존을 허락한다.

쿠바의 수도 아바나는 공산주의 국가의 폐쇄성으로 숨막힐 줄 알았는데 사람들은 활달하고 분위기는 자유로웠다. 아바나 공항의 텔레비전은 대부분 한국 제품이었고 공항 카트에도 한국의 가장 유명한 전자제품을 만드는 기업의 로고가 붙어 있었다.

아바나에 머무는 동안 이곳저곳을 돌아다녔는데, 이곳 도심에서는 쿠바 소년들이 관광객에게 “원 달러! 원 달러!”하고 외치며 달라붙었다. 소년들은 체 게바라의 초상이 새겨진 쿠바 동전을 손에 들고 흔들어 보였다. 미국 달러와 쿠바 동전을 맞교환하자는 뜻이었다.

덕분에 나는 체의 초상이 새겨진 쿠바 동전 몇 개를 손에 넣었다. 혁명가의 초상은 비단 동전만이 아니라 우표, 담배, 맥주 상표에도 있었다. 뿐만 아니라 아바나 시의 혁명광장 건물 외벽에도 철로 만들어진 거대한 체의 초상이 자리잡아 위용을 과시했다. 그는 죽은 뒤에도 갖가지 상품들의 브랜드가 되어 쿠바 경제의 부흥에 일조를 하고 있었다.


▎체 게바라와 아내 일다. 두 사람은 평소 자본주의 종말과 세계의 미래에 대해 의견을 주고받으며 사랑을 싹 틔웠다.
체 게바라는 아르헨티나 출신이다. 1928년 6월 14일 그의 어머니는 남편과 함께 만삭의 몸으로 배를 타고 부에노스아이레스로 떠났다. 예정보다 일찍 진통이 오자 서둘러 배에서 내려 가까운 친척 집에서 출산했다. 조산 탓에 아이는 천식을 앓았다.

그의 부모는 천식을 앓는 아이를 잃을까 두려워서 좋은 병원을 찾아 자주 집을 옮겼다. 어린 체는 가난한 광부나 호텔노동자의 자녀들과 주로 어울려 놀았다. 공화파와 프랑코파로 편을 갈라 전쟁놀이를 하는 것을 특히 즐겼다. 마누엘 베를라노 학교에 입학을 할 즈음 체는 칠레 시인 파블로 네루다의 시를 곧잘 암송하곤 했다.

이 무렵 체는 천식 발작을 일으키곤 했는데 작가 장 코르미에는 <체 게바라 평전>에서 이렇게 쓴다.

“어린 체는 두 번에 걸쳐 찾아왔던 심한 천식 발작 때문에 할 수 없이 학교를 쉬어야 했다. 이 기간 동안 그는 프랑스 문학에 조예가 깊었던 어머니가 빌려주신 책을 비롯해 아버지의 서재에서 가져온 책을 닥치는 대로 읽었다.

어느새 그는 소설 <로빈슨 크루소>, 심리학자 프로이트의 저서까지 장르를 가리지 않고 섭렵한 게걸스러운 독서광이 됐다.”(장 코르미에, 평전, 49쪽)

인생을 바꾼 오토바이 여행


▎쿠바의 수도 아바나 시내의 한 건물 벽에 체 게바라의 얼굴이 그려져 있다. 쿠바 전역에서는 혁명가 체 게바라의 초상을 쉽게 만날 수 있다. / 사진· 중앙포토
1946년 아르헨티나는 후안 페론 대통령이 권부를 장악하고 통치하던 시절이다. 이때 체는 열여덟 살이었다. 데안 푸네스 대학에 합격한 그는 토목분야를 전공할 생각을 굳히고 있었다.

대학 입학 전 몇 달 동안 체는 돈을 벌기 위해 교량과 도로를 건설하는 회사에서 서류 정리하는 일을 했다. 이듬해 체는 토목분야를 전공하기로 했던 마음을 바꿨다. 부에노스아이레스의 의과대학에 진학한 것이다.

의학 공부에 매진하면서도 그는 럭비, 축구, 수영 따위의 운동을 하며 신체 단련에도 힘썼다. 고작 스무 살에 의사가 된 그에게 새로운 기회가 찾아왔다. 산프란시스 코데차나르 나병원에서 일하는 형이 그에게 병원 일을 해볼 생각이 없느냐고 제안한 것이다.

850㎞ 떨어진 병원을 향해 자전거를 타고 긴 여정을 떠났다. 그가 챙긴 것은 옷 몇 가지와 독립운동가 네루가 쓴 <인도의 발견> 한 권이 전부였다. 이 여행에서 체는 아르헨티나의 농부와 떠돌이 노동자 같은 민중이 살아가는 모습을 세세하게 관찰할 수 있었다.

여행을 마친 후 그는 여러 계층의 친구들을 폭넓게 사귀는 한편 도서관 사서나 배에 올라타 선원 일 따위를 하며 돈벌이를 했다. 생계를 책임지면서도 그의 뜨거운 독서열은 식지 않았다. 책을 읽느라 밤을 새우는 일이 잦았다. 이 지독한 독서 습관은 훗날 게릴라 생활을 할 때도 이어졌다.

다른 사람이 지쳐 깊은 잠에 곯아떨어질 때도 그는 혼자 깨어 책 읽기에 몰두하곤 했다. 1951년 체는 의과대학을 무사히 졸업했다. 이때 그는 친구 알베르토와 함께 칠레를 향하는 긴 여행 계획을 세운다. 아르헨티나 중부의 코르도바에서 시작해 체가 태어난 로사리오를 거쳐 안데스 산악지방으로 이어지는 꽤 길고 험한 여정이었다.

1951년 12월 29일 두 사람은 구형 중고 오토바이에 텐트, 침낭, 도로지도 등을 마대자루에 싣고 위대한 여정을 시작했다. 그들이 칠레의 수도 산티아고에 도착한 것은 여행을 떠난 지 두 달이 지나서였다. 두 사람은 여행 내내 잦은 고장을 일으키며 속을 썩인 오토바이의 장례식을 치렀다.

그 뒤 체는 구리를 채굴하는 광산촌인 추키카마타를 방문했다. 훗날 그에게 운명의 장소가 된 곳이다. 이곳에서 체는 광부들이 열악한 환경 속에서 저임금에 시달릴 때 광산업자는 떼돈을 벌어들인다는 사실을 알았다. 그 구리광산은 노동 착취의 현장이었던 것이다. 최초의 투자액을 단 나흘 만에 회수할 수 있을 정도였다.

“체는 이 광산에서 새로운 힘으로 무장한 뒤 대지로 내려왔다. 정의로운 인술을 펼치는 의사가 되겠다던 젊은 이상주의자는 다른 사람을 위해, 무엇보다 가난한 사람을 위해 행동하겠다는 신념을 갖게 됐다.”(장 코르미에, 평전, 86~87쪽)

체는 1953년 원하던 의학박사 학위를 얻었다. 당시 쿠바에서는 피델 카스트로라는 젊은 혁명가가 이끄는 학생들이 쿠바 동부의 산티아고에 있는 병영을 습격하는 일이 잦았다. 혁명의 격동기가 그렇게 지나고 있었다.

그는 당시 혁명 수뇌부가 취한 정책에 실망했다. 인디오와 같은 소수민족이 정책에서 소외되는 것을 목도하며 이 혁명이 민중을 위한 것이 아님을 깨달은 것이다. 그리고 절망에 차서 어머니에게 편지를 쓴다.

“게릴라는 밤의 전사다”


▎한 쿠바인이 체 게바라의 초상을 걸고 있다. 아르헨티나의 중산층 가정에서 태어난 그는 쿠바혁명을 위해 분투했다. 쿠바 국민이 그를 사랑하는 이유다. / 사진·중앙포토
“비록 볼리비아에는 무서운 기세로 자유의 바람이 몰아치고 있습니다. 하지만 제가 보고 있는 이 혁명의 미래는 암울하기만 합니다. 권력을 쥔 자는 인디오의 머리 위로 살충제를 마구 뿌려댑니다. 이런 식으로는 근본적인 해결책을 얻을 수 없습니다.”

이 무렵 체는 첫 번째 아내가 될 페루 출신 여성 일다 가데아를 만났다. 1953년 12월 체는 그녀의 활달한 성격에 한순간에 반했다. 특히 두 사람은 러시아의 작가 톨스토이와 고르키, 도스토예프스키의 작품을 즐겨 읽었다는 공통점을 발견하고 크게 기뻐했다.

이들은 만날 때마다 읽은 책에 대한 소감을 나눴고 자본주의의 종말과 세계의 미래에 대해 의견을 주고받았다. 이어 일다는 페루 출신의 망명객에게 체를 소개하는 한편 쿠바인들과도 연결해줬다. 사실 체는 이전까지는 주로 ‘에르네스토’라고 불렸지만 이 무렵부터 그를 ‘체’라는 이름으로 부르는 사람이 많아졌다.

1955년 7월 체는 한 작은 아파트에서 쿠바의 혁명가 피델 카스트로와 만난다. 피델은 체가 마음에 들었고 체 역시 카스트로를 좋아했다. 체는 카스트로의 첫인상을 다음같이 전했다.

“카스트로는 위대한 정치지도자입니다. 그는 자신이 어디를 가야 할지를 알고 있고, 강인함으로 무장했으면서도 온화한 스타일의 소유자이죠.”

두 사람은 많은 얘기를 나누지 않았지만 거대 자본과 군사력을 앞세운 제국주의의 침탈에서 라틴아메리카를 지켜야 한다는 필요성에 공감했다. 그 뒤 카스트로 정기적으로 체와 일다의 집을 찾아와 함께 식사했다. 이들은 비밀경찰의 눈을 피해 주로 늦은 밤시간에 만나는 일이 잦았다.

이 무렵 카스트로는 뉴욕의 한 호텔에서 자금 모금을 위해 미국 내 쿠바 반정부단체의 모임을 열었다. 이 모임에서 그는 “1956년, 우리는 자유를 얻거나 순교자가 될 것이다”라고 선언했다. 체는 이 전쟁에 뛰어들기로 마음을 굳히고 곧바로 실행에 옮겼다.

1956년 12월 체는 중위 계급을 달고 의무대장으로 첫 게릴라전을 치렀다. 그로서는 ‘전쟁의 첫경험’이었다. 이곳에서 그는 전우와의 의리에 매료됐다.

“혁명군의 대장인 카스트로에 이끌려 이 일에 몸담은 뒤 지금까지도 강한 회의를 떨쳐버리지 못했던 건 사실이다. 그러나 나는 마치 모험소설 속에서나 읽을 법한 우정과 그처럼 순수한 이상을 위해 타국의 해변에서 죽어도 좋다는 확신을 그들과 함께 나누고 있는 것이다.”(장 코르미에, 평전, 171쪽)

체가 게릴라전에서 거둔 영웅적 승리는 전설로 바뀌어 차츰 쿠바 전역으로 퍼져나갔다. 혁명군의 비밀 라디오방송에서 날마다 체가 전투에서 세운 공적을 내보낸 탓이다. 반면 쿠바 정부의 언론 매체들은 연일 체를 공산주의자로 낙인찍는 방송을 내보냈다. 그를 체포하려고 거리마다 수배 전단으로 도배된 사실이 연일 보도됐다.

전역에서 체를 좇는 가운데 그는 잠잘 시간뿐 아니라 밥을 먹거나 씻을 여유조차 없는 전투 중에도 쉴 틈이면 아무데나 주저앉아 배낭에서 녹색 노트를 끄집어냈다. 정부군과 전투를 치르느라 초주검이 된 상태에서도 시를 읽었다. 그가 읽은 시는 다음과 같다.

“영원한 목마름, 어두운 수로들/ 끊임없는 피로, 가없는 고통이여.”(파블로 네루다, ‘스무 편의 사랑의 시와 한 편의 절망의 노래’에서)

세계 역사상 가장 매력적인 반군(叛軍) 지도자


▎1956년 체 게바라는 카스트로와 뉴욕의 한 호텔에서 자금 모금을 위해 미국 내 쿠바 반정부단체의 모임을 열었다. 그는 이후 중위 계급을 달고 의무대장으로 게릴라전에 뛰어들게 된다. / 사진·중앙포토
“오늘, 아무도 날 찾아오지 않았습니다./ 이 오후, 난 너무 조금밖에 죽지 못했습니다.”(세사르 바예호, ‘검은 사제들’에서)

“황혼 속에서 늘 지니고 있던 책이 떨어져버렸고,/ 상처 입은 한 마리 개처럼 내 망토는 내 발 아래로 굴러 내렸다.”(파블로 네루다, ‘스무 편의 사랑의 시와 한 편의 절망의 노래’에서)

“영원한 아침의 언저리에서/ 우리 모두 함께 아침식사를 하게 될 그날은/ 결코 데려와 달라고 하지 않은 이 눈물의 계곡에/ 언제까지 머물러야 하는 걸까”(세사르 바예호, ‘검은 사자들’에서)

체는 배낭을 베개 삼아 머리를 뉜 채 시를 읽으며 어떤 구절은 마음에 새겼다. 체에게 시는 기초 교양 그 이상의 의미였던 것이다. 시는 정신의 양식이자 생명을 약동하게 하며 그 존엄을 지키는 원동력이었다.

특히 그는 니콜라스 기옌의 시 ‘비가들’에서 “오, 친구들이여 이리 와 내 이름을 보시구려!/ 멀고 자유로운 내 이름, 공기처럼 자유롭고 머언……”이라는 대목처럼 공기처럼 자유롭고 살게 될 먼 미래의 생을 꿈꾸기도 했다.

쿠바 독재정권의 정부군과 반군의 전쟁은 계속됐다. 체는 반군을 이끌고 어둠을 틈타 강을 건너고 산을 넘어 도시 전역에서 전투를 벌였다. “게릴라는 밤의 전사이다. 따라서 우리는 야행성 존재가 되기 위한 모든 감각을 소유해야 한다.” 체의 지론이다.


▎체 게바라는 첫 게릴라전에서 승리한 뒤 “혁명군의 대장인 카스트로에게 이끌려 이 일에 몸담았다. 타국의 해변에서 죽어도 좋다는 확신을 그들과 나누며 지내겠다”라고 말했다.
밤의 전투에 숙련된 체와 반군들은 도처에서 승리를 거뒀다. 당시 체의 모습을 평전은 이렇게 묘사한다.

“거의 광기에 가까운 신념과 헌신, 승리에 대한 기대감으로 부풀어 있던 그 며칠 동안 체는 거의 잠을 이룰 수가 없었다. 지프에서 잠깐 눈을 붙이거나 하면서 마테차보다는 엄청난 양의 커피를 마셨다.

그는 누군지도 모르는 사람들이 건네주는 대로 음식을 받아먹었다. 그 열흘 동안의 전적은 믿기지 않았다. 정부군은 초소 열두 곳, 지방수비대와 경찰서, 여덟 군데의 도시와 마을, 여섯 곳의 주둔지를 포기했다. 체는 800명의 정부군 포로와 1000점 이상의 무기를 습득했다.

아바나에서는 대통령 바티스타가 미국 언론을 의식하며 산타클라라에서 반군을 산산조각 내버리겠다고 장담하며 체면 세우기에 급급했다.”(장 크로미에, 앞의책, 380~381쪽)

여러 도시가 반군에 함락되었다는 승리 소식이 전해질 때마다 성당의 종이 일제히 울렸고 군중은 거리로 뛰쳐나와 ‘자유 쿠바 만세!’를 외쳤다.

언제나 끝은 있는 법. 정부군과의 질긴 전쟁이 끝났다. 쿠바는 피델 카스트로 혁명군의 수중에 들어갔다. 카스트로는 새 정부를 꾸리면서 체를 국립은행 총재로 임명했다.

당시 카스트로는 쿠바의 얼굴이자 목소리이며 정신이었다. 그의 동생 라울 카스트로는 혁명을 위해 헌신하는 뛰어난 조력자였다. 그리고 체는 카스트로가 이끄는 혁명정부의 두뇌였다. 체는 쿠바에서 ‘놀라운 능력과 지성, 그리고 세련된 유머를 가졌으며 카스트로보다 매력적이면서도 동시에 가장 위험한 인물’로 인정받고 있었다.

미국의 언론매체 <타임>지는 체에 대해 “우수가 묻어나는 미소를 입 꼬리에 흘리면서 냉정하고도 치밀한 방식으로 쿠바를 이끌고 있다”고 평하기도 했다.

볼리비아 해방을 위해 몸바치다


▎체 게바라의 초상. 그는 생전에 프랑스 사상가이자 작가인 보부아르와 사르트르와 우정을 나눴다. 이들과 밤을 새워 대화를 나눌 수 있을 정도로 철학의 조예가 깊었다. / 사진·중앙포토
1961년 2월 카스트로는 체를 산업부 장관으로 임명했다. 혁명 정부의 일이 어느 정도 안정되자 체는 다시 독서에 빠져 들었다. 그의 자택에 2000여 권의 장서가 진열됐다. 맨 위에는 마르크스, 레닌, 스탈린의 저서와 함께 쿠바 역사를 다룬 책이 놓여졌다.

바로 그 아래 칸에는 중국과 쿠바혁명을 다룬 책이 자리 잡았다. 이 밖에도 물리학과 수학 계통의 책과 소설가 로맹 롤랑과 막스 풀-푸셰의 <프랑스 시선>, 당대 사상가들의 전기도 있었다. 체는 철학자 키에르케고르, 하이데거, 카뮈가 주장한 실존주의에서부터 인류학, 사회학, 심리학, 철학, 문학 등 분야를 가리지 않고 공부했다.

그 결과 프랑스 사상가 몬느 드 보부아르와 사르트르가 그를 방문했을 때 밤을 새워 대화를 나누며 특별한 지성을 뽐낼 수 있었다. 체는 현실에 안주하지 않았다. 쿠바를 넘어 볼리비아 해방전선에 뛰어들어 다시 게릴라전을 벌이기 시작했다.

당시 체의 심경은 전선에서 틈틈이 쓴 일기에 고스란히 나타난다. 불행히도 체의 일기는 1967년 10월 7일에서 더 이상 이어지지 않고 끝났다.

10월 8일 아침은 날씨가 추웠다. 사람들은 다 점퍼를 꺼내 입었다. 체가 이끄는 게릴라 부대가 주둔하던 안데스의 한 계곡은 2주 전부터 볼리비아군 병력에 포위돼 있었다. 체와 게릴라 대원은 거세게 저항하며 지옥 같은 행군을 계속했다.

이 과정에서 체는 볼리비아 군 부대의 기관총 진지의 조준 선 안에 들어갔다가 일제 사격을 당하고 말았다. 그 사격에 체의 부대원 여럿이 죽었다. 체 역시 오른쪽 장딴지 아래에 총을 맞았다. 이에 연발 권총을 빼 들었지만 총알이 남아 있지 않았다.

결국 볼리비아 특수부대원에게 체포되고 말았다. 이날 밤 볼리비아의 한 특수부대 장교가 체를 향해 욕설을 퍼부으며 한 줌이나 되는 그의 수염을 잡아 뽑았다. 이 장교는 체로부터 아직 잡히지 않은 볼리비아 게릴라에 대한 정보를 캐내고자 했지만 체가 협조를 거절하자 고문을 멈추지 않았다. 이에 체는 묶인 두 손으로 자신을 모욕한 장교의 뺨을 후려쳤다.

그러자 심문하던 군인들이 순식간에 달려와 체의 손목을 뒤로 해 꼼짝할 수 없도록 묶었다. 심문 겸 고문은 계속 진행됐지만 장교들은 아무 소득도 얻지 못했다. 체는 남자답고 강경한 인물이었다. 모욕적인 상황에서도 속을 드러내지 않았다.

이날 밤 11시경 정부군 군인 세 명이 체로부터 소지품을 빼앗았다. 그들이 빼돌린 물품은 롤렉스 시계, 단검, 독일제 권총, 미국 달러와 볼리비아 페소 따위였다. 셀리치라는 군인이 체의 가방을 차지했다. 체가 평소 등에 매고 다니던 홀쭉한 배낭 속에는 녹색의 작은 노트가 들어 있었다.

이 녹색 노트에는 칠레 시인 파블로 네루다의 서사시 ‘모두를 위한 노래’, 세사르 바예호의 시들, 쿠바의 니콜라스 기옌의 ‘오르노스의 돌’ 같은 시 69편이 필사돼 있었다. 체의 사망 이후 이 녹색 노트는 40여 년 동안 베일에 가려져 있어야만 했다.

미국 정부와 CIA는 이미 오래전부터 체를 제거하는 ‘쿠바 작전’을 계획했었다. 이 시기에 체가 체포되자 자연히 미국은 볼리비아 측에 ‘체를 죽이라’는 명령을 보냈다. 10월 9일 체를 앞에 두고 볼리비아 정부군은 잠시간 망설였다.


▎쿠바의 체 게바라 기념비석. 그는 쿠바에서 ‘놀라운 능력과 지성, 그리고 세련된 유머를 가졌으며 카스트로보다 매력적인 인물’로 인정받고 있다. / 사진·중앙포토
“삶은 고통스럽지… 하지만 난 그 고통을 몰라”


▎체 게바라의 <볼리비아 게릴라 일지> 초판. 쿠바혁명 직후 미국은 체 게바라를 제거하는 ‘쿠바작전’을 계획했다. 이 시기 그가 볼리비아 정부군에 붙잡히자 미국은 ‘체를 죽이라’고 명령했다.
감히 체를 총으로 쏘지 못하는 무언의 내적 갈등에 시달린 것이다. 한참을 망설이던 한 정부군이 결국 눈을 질끈 감은 채 벨기에 산 UZI의 방아쇠를 당겼다. 체의 지퍼 달린 웃옷은 금세 피로 물들였다. 총소리를 들은 사제가 들어와 체의 감지 못한 눈을 감겨줬다.

생전에 체가 즐겨 읽던 세사르 바예호의 ‘검은 사자들’에는 이런 구절이 나온다.

“삶엔 고통스럽지, 너무나 힘든…… 하지만 난 그 고통을 몰라.” 그 시구와 같이 죽은 체의 얼굴은 삶의 고통 따위는 전혀 모르겠다는 듯 평온해 보였다.

“육체가 있는 내 어머니가 나타나시고 내 머리를 어머니의 무릎에 누인다. 그러면 어머니가 내게 건조하고 충만한 사랑으로 ‘내 늙은 아이’라고 말하며 내 머리를 쓰다듬어줄 때 나는 그녀의 가죽 같은 투박한 손놀림을 느끼고 마치 그녀의 눈에서 목소리에서 흘러 넘치는 사랑을 느낀다.”

체는 마지막 순간 환각 속에서 어머니가 나지막이 부르는 ‘내 늙은 아이’라는 소리를 들었다. 그리고 어머니의 품에 안겨 투박한 손길로 자신을 쓰다듬는 걸 느끼며 편안하게 눈을 감고 생을 마감했다.

장석주 - 전업작가. 충남 논산 출생. 1979년 조선일보·동아일보 신춘문예에 시와 문학평론 당선으로 등단했다. <월간문학> 신인상(1975년)과 해양문학상(1976)을 수상했다. ‘고려원’ 편집장을 거쳐 청하 출판사를 운영했다. 지금까지 시집, 비평집, 인문서 등 70여 권을 펴냈다. 대표 저서로 <일상의 인문학> <마흔의 서재> <철학자의 사물들> 등이 있다.

201612호 (2016.11.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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