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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르포│ 루쉰 전 생애 추적-길 없는 대지의 외침⑦] 혁명의 본질은 무엇일까 

매일매일의 진보와 개혁 향한 고투! 

글·사진 이희경 문탁네트워크 대표
새로운 혁명적 기운이 피어오르는 광저우로 갔던 루쉰 그가 도착해서 목격한 것은 ‘혁명’이 아닌 ‘태평’이었다

혁명은 끝이 없고 ‘아직 성공하지 않은 것’이어야 한다. 한 번에 확 뒤엎는 게 아니다. 어둡고 비좁고 답답한 참호 속에서 매일매일 반복되는 과업을 묵묵히 수행하는 것, 그것이야말로 혁명의 본질이다


▎20세기 초 상하이 최대 번화가 난징루의 모습. 루쉰은 연인 쉬광핑과 함께 1927년 10월 상하이에 도착했다. / 사진·중앙포토
인생에는 한치 앞도 내다보기 힘든 때. 어디로든 갈 수 있지만 막상 어디로 가야 할지 모르는 막막한 순간들이 있다. 루쉰에게는 1926년이 그러한 해가 아니었을까? 3월18일. 일본의 부당한 요구에 항의하러 모인 시민과 학생을 향해 중국정부가 발포를 했고 루쉰은 류허전을 비롯해 자신의 제자세 명을 잃었다. 가까이서 목격한 첫 번째 살육. 이후 루쉰은 수배자가 되어 도망을 치다가 돤치루이(段祺瑞)가 물러나자 집으로 돌아온다. 베이징에서 산 것도 벌써 16년째. 루쉰은 본의 아니게 유명해졌다. 학자라 호명되기도 했고, 문인이라 호명되기도 했고, 심지어 사상계의 선구자라고 호명되기도 했지만, 그 어떤 것도 루쉰은 아니었다. 루쉰은 ‘다시 살고’ 싶어졌고 베이징을 떠나기로 한다. 마흔여섯 나이였다.

“글은 지금까지 쓰고는 있는데, 사실 ‘글’이라기보다는 ‘욕’이라고 하는 게 더 맞을 게요. 이제는 나도 너무 피곤해서 좀 쉬고 싶은 마음이라오. (…) 근래에는 다시 살고 싶은 마음이 강해졌소. 왜일 것 같소? 말하면 아마 웃을 텐데, 첫째는 이 세상에 아직도 내가 살기를 바라는 사람들이 있기 때문이고, 둘째는 나 역시 살아서 의론도 펼치고 문학에 관한 책도 좀 내고 싶기 때문이오. (…) 요즘 내 사상은 이전에 비해 낙관적이 되었소. 그다지 의기소침하지도 않고…”(1926. 6 리삥중에게 보내는 편지/ 린시엔즈, <인간루쉰>에서 재인용)


▎광저우 황허강 72열사 공원묘지에는 광저우 출신인 홍슈취엔, 쑨원, 루쉰의 동상이 세워져 있다.(왼쪽부터)
루쉰을 열광시킨 장제스의 국민혁명


▎광저우 황허강 72열사 공원묘지. 1911년 3월 29일 반청 무장봉기 때 숨진 열사들의 시신을 모신 곳이다.
8월 26일, 베이징을 출발한 루쉰은 9월4일 샤먼(廈門)에 도착한다. 그러나 샤먼은 “제기랄, 오지 말았어야 해”라고 후회할 만큼, 베이징 못지않게, 아니 베이징보다 더 적막했다. 자신을 불러준 친구 린위탕(林語堂)한테 미안하긴 하지만 그래도 더 머물 수는 없었다. 문제는 샤먼 이후. 이제 또 어디로 가야 할까? 루쉰과 쉬광핑 사이에 오간 편지를 보면 이 시기 루쉰은 정말 헤맨 것 같다. 돈도 생활도 여자도 어느 것 하나 확실한 것이 없던 시절. 원래 확실한 것은 어디에도 없는 것 아닐까? 삶이란 다만 묵묵히 걸어가다가 어느 날 그 길의 끝에서 소실되어버리면 그 뿐! 역사적 중간물이라는 의식은 어떤 점에서는 루쉰을 자유롭게 해주었는지도 모른다. 모든 것이 세월과 더불어 지나갔고 지나가고 있고 지나가려 한다면 어떤 길이든 나서지 못할 이유도 없다. 루쉰은 쉬광핑이 있는, 그리고 새로운 혁명적 기운이 피어오르는 광저우(廣州)로 간다.

1927년 1월 18일. 광저우에 도착한 루쉰. 시작부터 떠들썩했다. 그는 중산대학에서도 가장 장엄하고 화려한 곳, “대종루(大鐘樓) 위에 떠받들어”졌고, “강당의 짝짝 하는 한바탕 박수”로 전사로 확정되었다. 수많은 사람의 환호와 기대, 방문의 대상이 된 루쉰. 하지만 실상은 밤새 설쳐대는 스무 마리 가까이 되는 쥐와 새벽부터 고래고래 부르는 ‘노동자 동무’들의 노랫소리 때문에 잠도 제대로 잘 수 없었던 상황. 난감하고 황당했을 루쉰의 표정이 상상되지 않는가? 나는 그 대종루를 보고 싶었다. 그러나 그곳의 루쉰기념관은 문이 닫혀 있었다. 알고 보니 2016년 10월 19일. 루쉰 서거 80주년을 맞아 재단장 중이었다.

루쉰이 남하할 무렵 광저우는 붉은 도시였다. 쑨원은 봉건 군벌의 지배를 타도하기 위해 광저우를 거점으로 삼아 국민당을 재정비하고, 제1차 국공합작을 성립시키며(1924년 1월), 황포군관학교를 건립한다.(1924년 3월) 마침내 1926년 7월 장제스를 총사령관으로 삼은 혁명군은 봉건군벌을 향해 북벌을 시작한다. 이들은 거침없이 북진하였고 채 1년도 되지 않아 강남 대부분의 도시를 탈환한다. 삭막하고 단조로운 샤먼시절, 유일하게 루쉰에게 기쁨을 준 것도 바로 이 국민혁명의 소식이었다. 이 국민혁명에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열광하고 있었는지는 김산의 <아리랑>에서도 잘 나타난다. 당시 조선의 젊은이들도 중국의 이 새로운 물결에 감격하면서 중국의 해방이 조국 해방의 첫걸음이라고 생각하고 자진해서 광저우로 달려갔다.

“1925년 가을 내가 광저우에 도착하였을 때 소위 중국 ‘대 혁명’에 뛰어들어 투쟁하기 위해 모인 한국인은 겨우 예순 명에 불과하였으며, 그 대부분이 의열단의 테러리스트였다. 그러나 1928년까지 팔백 명 이상의 한국인이 광동으로 속속 몰려들었다. 불과 6개월 이내에 양자강 유역까지 도달한 북벌군의 승승장구하는 급진격이 한창이었을 때 모든 혁명가가 느꼈던 환희와 열광은 지금도 기억해내기도 어려울 정도였다. 화북으로! 그리고 조선으로!-우리의 가슴은 미칠 듯이 기뻐 날뛰었던 것이다!”(김산, <아리랑>)


확실히 광저우는 여기저기 혁명 유적이 많이 남아 있었다. ‘황화강 72열사 공원묘지’는 1911년 3월 29일 반청 무장봉기 때 숨진 열사들의 시신을 모셔놓은 곳이다. 관리가 잘 되어 있었고 시민들이 휴식을 취하고 있었다.

루쉰은 광저우에 도착한 직후 ‘황화절의 잡감’이라는 글을 쓰게 된다. 황화절은 3·29 광저우 봉기를 기념하는 명절이다. 글의 첫머리에서 루쉰은 자신이 사건의 정황을 잘 모르니 자칫하면 글에서 뻥을 치게 생겼다면서 걱정한다. 그래서 불과 17년 전의 일이니 사건을 직접 목격한 사람들이 분명히 있을 것이라 생각하고 수소문했지만 도무지 찾을 수 없었다고 썼다. 하긴 고향에서 혁명가 추진(秋瑾)이 죽었을 때도 그랬고, 베이징에서 학생운동을 하던 제자들이 죽었을 때도 마찬가지였다. 대부분의 ‘구경꾼’에게 이런 일이란 잠시 애석해하거나 안주삼아 씹어대다가 금방 잊어버리는 일이니까. 하지만 3·29 봉기는 그 자체는 실패했지만 곧 우창에서 일어난 신해혁명의 성공 덕분에 혁명성공의 선구자가 되어 해피엔딩을 맞게 되었으니 다행이고 경사라고 말한다. 그러나 진짜 중요한 루쉰의 이야기는 그 다음부터다. 해피엔딩과 잊히지 않는 것, 그것이 혁명의 성공이냐는 물음! 혁명이 성공했다면서 꽃을 꺾거나 과실을 따먹는 사람만이 있고 그것을 지속적으로 길러주는 사람이 없다면 결과가 뻔하지 않겠는가? 그러니 혁명은 끝이 없고 ‘아직 성공하지 않은 것’이어야 한다. 황화절도 하루 정도 떠들썩하면 될 뿐 그 다음엔 집에 가서 푹 자고 이튿날 “반드시 해야 할 하루 일과를 열심히 해야 한다.”


▎루쉰이 중산대학에 몸담을 당시 머물렀던 백운루에서 나온 뒤에 기거했던 거처. 이곳에서 루신은 쉬광핑과 동거를 시작했다.
루쉰이 보기에 실패한 혁명을 금세 싹 잊어버리는 사람들이나 성공한 혁명을 흥청망청 즐기는 사람들이나 그들이 ‘구경꾼’의 형상을 하고 있다는 점에서는 다르지 않았다. 구경꾼은 노예처럼 둘러싸고 파리처럼 앵앵거리는 자들이다. 구경꾼과 혁명은 아무 관련이 없다. 만약 혁명이 있다면 그것은 쑨원이 이야기했던 것처럼 ‘아직 성공하지 않은 것(革命尙未成功)’으로만 존재한다. 루쉰은 그것을 매일매일의 진보와 개혁을 의미하는 ‘소혁명’이라 불렀다. 쑨원과 루쉰이 수렴하는 지점이고 루쉰이 결점 많은 평범한 인간 쑨원을, 그럼에도 불구하고 위대한 전사라고 생각하는 이유였다.

그런데 루쉰이 직접 광저우에 도착해서 목격한 것은 ‘혁명’이 아니라 오히려 ‘태평’이었다. 만약 혁명이 실제로 이루어졌다면 더 많은 ‘소리’와 ‘일’들이 벌어져야 할 터. 그러나 광저우에서는 어떠한 조짐도 없었다. 10여 년 전처럼 구시대의 인물은 의연했고, 신문·잡지의 문예도 여전했다. 대신 루쉰이 목격한 것은 거리에 나붙어있는 빨간 천의 구호들, 깃발을 높이 든 노동조합의 행진들, 황화절에 대한 떠들썩한 기념들, 그리고 자신들은 혁명 때문에 박해를 받았으니 이제 성적이 나빠도 봐줘야 하는 게 아니냐고 유세를 떠는 학생들의 어~필. 구호나 행진이나 기념이나 유세가 혁명이라면 그것은 ‘봉지혁명(奉旨革命)’, 임금의 뜻을 받들어 모셨던 구시대 관습을 리바이벌한 것에 불과한 것이 아닐까? 루쉰은 엄중하게 경고했다. 구호를 혁명으로 생각하는 한 혁명의 책원지 광저우는 언제든지 반혁명의 책원지도 될 수 있다고.(1927. 12. 17, ‘종루에서’)

붉은 도시 광저우는 붉지 않다


▎루쉰이 광저우 체류 당시 머무른 백운루 26호 고거의 팻말.
한편 1927년 4월 12일, 장제스는 국공합작의 약속을 깨고 노동자와 공산당원을 체포, 살육하는 우익 쿠데타를 감행한다. 곳곳에서 백색테러가 자행되었다. 상해에서만 300명이 살해되고 500명이 체포되었다. 4월 15일에는 광저우에서도 같은 일이 벌어진다. 2000여 명의 노동자와 공산당원이 체포되고 100여 명이 살해되었다. 2년 전 베이징에서와 같은 일이 또 벌어진 것이다. 그런데 더 끔찍한 것은 이번엔 그 살육이 혁명의 이름으로 행해졌다는 사실이다.

“혁명, 반(反)혁명, 불(不)혁명, 혁명가는 반혁명가에게 죽임을 당한다. 반혁명가는 혁명가에게 죽임을 당한다. 불혁명가는 혁명가로 간주되어 반혁명가에게 죽임을 당하거나 반 혁명가로 간주되어 혁명가에게 죽임을 당하거나 아무것으로도 간주되지 않아 혁명가 또는 반혁명가에게 죽임을 당한다.”(1927. 9. 24, ‘사소한 잡감’)

학생들이 잡혀가자 루쉰은 강하게 항의했지만 속수무책. 중산대학은 ‘당교(黨校)’이기 때문에 정부방침에 반하면 안된다고 말하는 학교 관계자들. 늘 공리와 대의를 입에 달고 살다가 어느새 장제스의 청천백일기 밑으로 기어들어간 기회주의적 문인들. 이들은 주인보다 더 사나운 ‘발바리’들이었다. 루쉰은 4월21일 중산대학을 사직하고 입을 닫는다.

“침묵하고 있을 때 나는 충실함을 느낀다, 입을 열려고 하면 공허함을 느낀다”(1927. 4. 26, <들풀> 제사)고, 그때, 루쉰은 썼다. 그리고 빠이윈러우(白云樓) 26호 2층. 오후에야 해가 드는 서향의 방 안에서 묵은 원고를 편집하면서 ‘살아있는 시간을 마치 죽은 사람처럼’ 보냈다. 무덥고 지루한 여름이 지나가고 있는 중이었다.

적막한 베이징을 탈출하기 위해 찾아간 샤먼에서 더 큰 적막에 빠져버렸고, 다시 광저우로 “꿈을 안고 왔다가 현실에 부딪히자 꿈의 세계에서 추방되어 적막만 남았다.” 1년 사이에 겪은 롤러코스트. 냉온탕의 경험. 혁명에 대한 두 번째 좌절. 청년들에 대한 깊은 실망. 가을이 되자 루쉰은 아무 미련 없이 광저우를 떠난다. 도착할 때와는 달리 이번엔 조용하게.

1927년 10월 루쉰과 쉬광핑은 상하이에 도착한다. 광저우에 더 이상 머무를 수도 없었지만 그렇다고 다시 베이징으로 갈 수도 없는 상황이다. 하여 택한 상하이행은 어쩌면 출구 없는 퇴로, 혹은 퇴로 없는 출구다. 당시 상하이는 장제스 정권의 제2의 수도였을 뿐 아니라 <웹스터 사전>에 동사 ‘상하이하다=to Shanghai’가 “아편으로 인해 마비되어, 인력을 구하는 배에 팔려버리다”라거나 “사기와 폭력으로 한바탕 싸움을 일으키다”라는 뜻으로(<상하이 모던>, 고려대학교출판부) 적혀 있을 정도로, 복마전 그 자체였다.

그런데 루쉰이 상하이에 도착하자마자 맞닥뜨린 상황은 장제스의 위협이 아니라 “창조사, 태양사, ‘정인군자’ 무리의 신월사 구성원이었던 문호들의 날카로운 포위공격”이었다.(<삼한집> 서언) ‘정인군자’ 무리들과의 논쟁이야 수년째 이어오고 있는 상황이니 특별히 이상한 일도 아니었다. 문제는 창조사, 태양사 문인들의 루쉰에 대한 공격이었다. 그들 대부분은 국민 혁명에 참여했던 젊은 청년들이었고, 장제스의 반동쿠데타와 공산당 토벌작전으로 쫓기는 몸이 된 사람들이었으며, 따라서 당시 루쉰이 유일하게 장제스 정권에 함께 대항할 수 있을 것이라 생각했던 동지들이었다. 그러니 그들의 느닷없는 공격은, 어쩌면 루쉰에게는 날벼락 아니었을까? 소위 1928년 혁명문학논쟁이 시작된다. 몇 년 후 루쉰의 정리.

문화위초(文化圍剿) - 혁명문학논쟁


▎쑨원이 1924년 3월 건립한 광저우 황포군관학교의 도서관 학습실.
“재작년에 이르러서야 ‘혁명문학’이라는 이름이 성행하기 시작했습니다. 이를 주장했던 이들은 ‘혁명의 책원지’에서 돌아 온 몇몇 창조사 원로와 약간의 신인이었습니다. 혁명문학이 성행했던 까닭은 물론 사회적 배경으로 말미암아 일반 대중과 젊은이들에게 이러한 요구가 생겨났기 때문입니다. 광동으로부터 북벌을 시작했을 때, 적극적인 젊은이들은 모두 실제 사업에 뛰어들었지만, 당시엔 아직 눈에 띄는 혁명문학운동은 없었습니다. 정치 환경이 돌변하여 혁명이 좌절을 겪고 계급적 분화가 분명해졌으며, 국민당이 ‘청당(淸黨)’이란 이름으로 공산당 및 혁명대중을 대량학살하고, 살아남은 젊은이들이 다시 억압받는 처지에 들어가게 되었습니다. 이때 비로소 혁명문학이 상하이에서 강렬한 활동을 보였던 것입니다. 그러므로 혁명문학의 성행은 표면적으로는 다른 나라와 달리 혁명의 고양에 따른 것이 아니라, 혁명의 좌절로 말미암은 것이었습니다.”(1931.7, ‘상하이 문예의 일별’)

따라서 혁명문학이 장제스의 배신에 정신이 번쩍 든 젊은 지식인들의 암중모색, 고군분투의 결과라는 것은 분명하다. 다만 불행인 것은 대부분 일본 유학생 출신이었던 창조사의 문인들이 참조한 것이 1926년 일본좌익을 풍미했던 후쿠모토 가즈오의 이론이었다는 점이다. 그런데 소위 후쿠모토주의라는 것이 일본에서조차 몇 년 못 가 퇴출돼버린 섣부르고 관념적이고 청산주의적 이론이었다. 그런데도 이들 창조파는 후쿠모토를 따라 “이제 때가 되었다. 우리는 총결산을 해야 한다. 그러나 무엇을 할 것인가? 어디서부터 시작할 것인가”(1928.1, 청팡우)라고 외치면서 문단의 선배그룹을-그들의 스펙트럼에 상관없이-몽땅 ‘아우프헤벤(지양/제거)’하기 시작했다. 특히 문단의 좌장이었던 루쉰을 공격하는 것은 이들의 전략상 필수적인 선택이었을 것이다. 창조파의 펑나이차오(馮乃超)는 “루쉰이란 이 늙은이는 늘 어두침침한 술집 한구석에 앉아서 흐뭇하게 취한 눈으로 창 밖의 인생을 내다본다”고 말한다.

루쉰은 몰락한 봉건정서를 추모하거나 낙오자의 비애를 읊조리거나 기껏해야 인도주의적 미사여구를 던지는 인물이고 이것이야말로 전형적인 쁘띠부르주아적 태도라고 비판한다. 그들에게 루쉰은 한가한 문학, 취미문학의 담지자였다.

문학이 선전이 되려면 기교를 높여야


▎황포군관학교 학생들이 사용했던 침상과 모포를 당시의 모습대로 재현한 모습.
태양사도 비슷했다. 다만 이들의 다른 점은 일본이 아니라 소련의 교조적인 문예이론을 참조했다는 점. 어쨌든 이들도 “아 Q의 시대는 이미 오래전에 죽어버렸다. 우리는 더 이상 시대의 유해에 연연하지 말고 아Q의 시신을 그의 정신과 함께 매장해버려야 한다”(1928, 첸싱춘錢杏邨, ‘죽어버린 아Q의 시대’)라고 주장했다. 이들의 공통된 인식. 문학은 사회의 상부 구조라는 점. 혁명은 프롤레타리아가 주체가 되어야 한다는 점. 문학은 개별적 자아가 아니라 프롤레타리아 계급의 의지를 표현해야 한다는 점. 한마디로 문학은 프롤레타리아 혁명의 선봉장이 되어야 한다는 주장이었다.

‘문학은 힘이 세다’라는 혁명문학진영의 모토와 비교해본다면 루쉰은 일찌감치 “문학은 무력하다”고 말한 바 있다. 글이라는 것은 피의 살육을 막지 못한다는 것. 한 편의 시(詩)가 아니라 한 대의 대포가 적을 물리친다! (1927. 4.8, ‘혁명시대의 문학’, 황포군관학교 강연) 그렇다고 문학이 천상 위에 앉아있는 고매한 것도 아니다. 그것은 그저 한때의 사회적 현상 혹은 시대의 인생기록에 불과한 것이다. 그 점에서 루쉰은 혁명문학가들이 주장하는 대로 문학이 선전이 될 수도 있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그러기 위해서라도 “먼저 내용을 충실히 하고 기교를 높여야” 한다. “형제들이여! 태양을 향하여 광명을 향하여 걸어가자! 우리는 어둠 속에서도 새벽이 올 것을 확신하고 있다. (…) 태양의 빛 아래서 우리는 소리 높여 노래를 부르겠노라”(<태양월간> 권두어) 정도의 글로는 선전조차 될 수가 없다. “모든 문예는 물론 선전이지만 모든 선전이 죄다 문예인 것은 아니”지 않을까? 루쉰이 보기에 혁명문학은 무엇보다 수준이 낮았다.


▎상하이 루쉰공원 안에 있는 루쉰 동상.
그러나 더 중요한 것은 그들이 당면한 현실의 폭력과 암흑을 정시하지 못한다는 것이다. 톨스토이를 인도주의자에 불과하다고 이미 낙후된 인물이라고 비판하는 자들이 ‘정부의 폭력, 재판행정의 희극적인 가면을 찢어버린’ 톨스토이의 몇 분의 일만큼의 용기라도 있는 것일까? 낙후된 것은 톨스토이가 아니다. 누군가의 지휘를 받거나, 이념을 간판처럼 내거는 것 자체가 낙후된 것이다. 자신이 낙후된 것인지조차 모르는 것이 바로 ‘흐뭇하게 취한 눈’인 것이다.

나는 전혀 복고주의자가 아니지만 루쉰을 읽을 때 종종 과거로 돌아간다. 아니 느닷없이 과거가 현재로 소환된다는 것이 더 맞는 말일지도 모르겠다. 혁명문학 논쟁을 읽을 때도 마찬가지인데, 나는 1980년대 20대의 내가, 1928년 마흔여덟의 루쉰에게 대들고(?) 있는 모습을 발견한다. 내가 선배들에게 그랬다. 시국이 엄중한데 당신들은 뭘 하고 있느냐고 공격했고, 싸잡아 기회주의자라고 매도했고, 기어코 동아리에서 퇴출시켰다. 그때는 삶이 절대로 이념으로 환원되지 않는다는 것도, 정치보다 무서운 것이 밥이라는 것도 알지 못했었다. 그러니 루쉰에게 그만 좀 하라고, 젊은이들에게 너무 심한 것 아니냐고, 말하고 싶기도 하다.


▎상하이 루쉰공원에 있는 루쉰기념관 내부. 상하이는 광저우와 달리 루쉰 관련 유적들이 잘 보존돼 있다.


한편 2016년 50대인 내가, 1928년 날 선 이론투쟁을 벌이고 있는 20~30대의 중국 젊은이들과 직접 맞서고 있는 느낌이 들기도 한다. “피 역시 돈과 같아서 인색해서도 안 되지만 낭비해서도 안 된다”는 것을 그들에게 알려주고 싶고, 혁명은 한 번에 확 뒤엎는 게 아니라 어둡고 비좁고 답답한 참호 속에서 매일매일 반복되는 과업을 묵묵히 수행하는 것이라는 것을 전달하고 싶어진다. 루쉰의 글자들 사이에서 싸우는 것은 루쉰과 청팡우 등만이 아니다. 나도 그들과 뒤엉켜 싸우고 있다. 어쩌면 나에게 루쉰 읽기는 늘 이런 것인지도 모르겠다. 시공간이 모였다 흩어지는 경험. 1920∼30년대의 루쉰과 함께 여기 이 자리로 다시 돌아오는 것!


▎루신의 상하이 경운루 고거. 상하이의 마지막 거처다.
적과 동지들을 동시에 상대하면서 싸우는 칼날 같은 자리, 그곳에서 휘두르는 비수의 날카로움과 단호함. 하지만 루쉰에게 이런 면모만 있었다면 나는 그를 존경했을지언정 좋아하지는 않았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현실이 늘 자신의 의도를 배반한다는 것을 알면서도 기꺼이 그 배반당하는 자리에 서 있었기 때문에 나는 루쉰을 정말 좋아한다. 내가 생각하기에 그곳 이야말로 계몽의 자리가 아니라 전사의 자리다.

계몽의 자리가 아닌 전사의 자리


▎경운루 루쉰 고거 바로 옆에 있는 루쉰의 친구인 예성타오, 펑쉬에펑, 마오둔의 고거 팻말.
장제스 국민당 정부의 언론·출판·집회·시위의 자유에 대한 탄압이 점점 심해지자 1930년 2월 ‘중국자유운동대동맹’이 결성되었다. 루쉰은 이런 사회적 투쟁의 방식을 좋아하는 사람이 아니었다. 그러나 참석했고, 자리를 지켰고, 선언문에 이름을 올리도록 허락했다. 결국 썩 내켜 하지 않았지만 자유운동 대동맹이 주최하는 분회들의 강연에 응하기도 했다. 같은 이유로 1930년 3월 결성된 ‘중국좌익작가연맹’에도 참여했다. 이번엔 과거 격렬한 논쟁을 벌였던 혁명문학파들과 함께하는 것이었다.

여전히 그들이 만들어온 강령, ‘승리가 아니면 죽음이다’같은 글이 마음에 걸렸지만 넘어갔다. 심지어 주석단에 오르기까지 했다. 그러나 여기서 유명한 에피소드 하나. 좌련 창립대회에서 루쉰은 전의를 다지고 장도를 축하하기는커녕 “나는 지금의 좌익작가들이 아주 쉽게 우익작가가 될 수 있다고 생각”한다면서 찬물을 끼얹었다는 것. 거기 모인 사람들은 아마도 고개를 절래 저었을 것이다. 그래도 루쉰은 개의치 않았다. 그가 원한 것은 지도자가 아닌 ‘사다리’였기 때문이다. 누구라도 나를 딛고 올라갈 수만 있다면, 누구라도 나를 딛고 나갈 수가 있다면, 자기의 평판 따위는 아무 상관이 없었다.

해가 바뀌고 1931년 1월. 회합을 갖던 일련의 좌익작가가 국민당 특무의 습격을 받아 전원 체포되었다. 이들 가운데 러우스, 인푸, 후예핀, 펑껑, 리웨이썬 등은 좌련 소속의 젊은이들이었다. 한 달 후 이들은 모두 총살되었다. 루쉰의 젊은 동지 러우스의 몸에는 총탄이 열 발이나 박혔다. 베이징에서 제자들의 죽음을 목격했고, 광저우에서도 역시 제자들이 살육당하는 것을 지켜봤다. 이번이 세 번째였다. 2년 후 그는 ‘망각을 위한 기념’이라는 글에서 “젊은이가 늙은이를 기념하는 글을 쓰는 게 아니라, 지난 30년 동안 내가 목도한 수많은 청년의 피가 켜켜이 쌓여 숨도 못 쉬게 나를 억눌러 이런 필묵으로나마 몇 줄 글을 쓰게 만드니…”라고 쓴다. “처자식을 건사하느라 귀밑머리 세는 게” 세속의 삶이라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젊은이들 보다 오래오래 살고 있는 삶이란 얼마나 구차하고 치욕스러운가?

나는 루쉰을 만났을까?


▎루쉰의 고거가 위치한 작은 골목길. 이 골목 안에서 루쉰과 그의 친구들이 옹기종기 모여 살았다.
1931년 9월 18일 만주사변이 발발한다. 상황은 계속 악화되어 간다. 체포되어 죽거나, 고문당해 죽거나, 총 맞아 죽어도 하나도 이상하지 않았던 시절이었다. 사람도 살해당하고, 글도 살해당하던 시절, 동지들은 노골적으로 배신하고, 어쩔 수 없이 배신하고, 아니면 루쉰이 전혀 동의할 수 없는 방식으로 투쟁을 전개한다. ‘모로 서서’ 적과 동지를 동시에 상대해야 했던 힘겨운 시절. 그리고 1933년 5월, 그러니까 앞서 말한 ‘망각을 위한 기념’을 쓴 직후, 딩링과 판츠니엔이 체포된다. 딩링은 2년 전 처형된 좌련오열 중의 한 사람인 후예핀의 아내였다.

나는 이 즈음 루쉰이 이들을 애도하는 자기만의 방법을 찾아냈다고 생각한다. 비통이 커지는 만큼 일을 두 배로 늘리는 것. 좌련오열의 희생 때에는 그들을 추모하는 간행물 ‘전초(前哨)’를 발행했고, 딩링의 행방불명 이후엔 딩링의 작품을 출판했다. 몇 년 후, 루쉰과 깊은 우정을 나눈 취추바이(瞿秋白)가 총살을 당했을 때도 마찬가지였다. 루쉰이 했던 일은 <취추바이 선집>을 간행하는 것이었다. 고된 작업이었고 자신의 육체를 갉아먹고 목숨을 단축하는 일이었다. 당시 루쉰은 자신의 ‘중간물’ 이론대로 끈질기게 버티되 서서히 사라지는 방법을 실현시키고 있었는지도 모르겠다.

딩링의 실종 직후인 1933년 6월, 루쉰도 열심히 참여하고 있었던 ‘중국민권보장동맹’의 간사, 양취엔(楊銓)이 백색테러에 희생당한다. 루쉰은 양취엔의 장례식에 참석하면서 열쇠를 챙기지 않고 나갔다고 한다. 죽을 수도 있다고 생각했을 것이다. 그래도 어쩔 수 없다고도 생각했을 것이다. 나는 이날의 사무치는 루쉰의 심정을 생각한다. 나도 사무쳤다. 1933년, 루쉰은 자신도 모르는 자신의 죽음을 향해 뚜벅뚜벅 걸어가고 있는 중이다.

이번의 루쉰 여행은 미친 듯이 더운 한여름에, 5박6일을 꽉꽉 채워서, 3개의 성과 한 곳의 직할시를 돌아다니는 힘겨운 일정이었다. 그런데 사는 게 바빠서인지 석 달 전 여행이 이미 아득하다. 하도 많은 루쉰을 봐서 내가 본 게 샤먼에서인지, 광저우에서인지, 상하이에서인지도 벌써 헷갈린다. 솔직히 말해 이미 아는 것을 다시 보는 것은 재미없다. 재현의 앎, 승인의 앎. 진부하다. 그런데 나도 역시 이미 아는 것을 다시 보고 온 것은 아닐까? 그게 아니라면 나는 무엇을 본 것일까?

우리가 루쉰의 마지막 10년이었던 상하이에 도착한 것은 8월의 아침이었다. 그런데 하늘이 너무 청명해 가을 같았다. 중국인 기사분에 의하면 상하이에서 이런 날을 보는 것은 거의 기적이란다. 우리는 그런 행운이 얼마 전 상하이를 지나갔다는 태풍 덕이라 생각했다. 그런데 우리의 여행 코디네이터 ‘쭌 언니’ 왈, 상하이의 파란 하늘은 9월에 항저우에서 열리는 G20 정상회담을 앞두고 중국 당국이 대기오염을 관리하고 있기 때문이란다. 아, 그래 여기가 공산주의 국가였지! 새삼스럽게 중국이 당이 지배하는 당국(黨國)이라는 것이 실감되었다.

광저우와 달리 상하이에서 루쉰은 아주 잘 보존되어 있었다. 지금은 루쉰공원이라 불리는 홍커우 공원 안에 위치한 상하이 루쉰기념관은 위풍당당했다. 베이징의 그것보다도 커 보였다. 그러나 이미 너무 많은 기념관을 본 터, 특별한 감흥은 없었다. 그리고 찾아간 같은 공원 내의 루쉰 무덤. 죽음까지 살아 내려 한 마지막 순간의 루쉰을 생각하면 난 당연히 그의 무덤 앞에서 숙연해질 줄 알았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그런 기분이 들지 않았다. 심지어 나는 루쉰 무덤의 난간에 잠시 걸터앉는 ‘불경’을 저지르다가 관리인에게 걸려 혼쭐이 나기까지 했다. 중국에서 루쉰은 너무 많고, 너무 잘 보존되어, 니체 식으로 말하면 철저히 ‘기념비적 역사’가 되어 있었다. 전범이 되어버린 루쉰. 루쉰을 닮으라는 명령! 살아생전 그렇게 싫어하는 방식으로 루쉰은 상하이 곳곳에 서 있었다.

다음 일정은 루쉰고거 방문. 그런데 기념관처럼 관리되고 있는 그곳은 루쉰의 마지막 상하이 거처다. 나는 루쉰이 상하이에 막 도착한 후 여관에 여장을 풀고 겨우겨우 구했던 살림집. 쉬광핑과 둘이서 각각 침상 하나, 책상 하나, 의자 하나만 단출하게 놓고 살았다던 그 집. 징윈리(景云理) 23번지가 보고 싶었다. 찾을 수 있을까? 여행 코디인 쭌언니의 도움으로 겨우겨우 찾아갔지만 그곳은 이미 철거가 상당히 진행된 지역이었다. 그곳에서 루쉰의 옛집을 찾을 가능성은 낮아 보였다. 그러나 구글 맵의 안내로 더듬더듬 찾아간 작은 골목 끝에서 우리는 ‘루쉰고거’라는 팻말을 발견할 수 있었다. 뿐만 아니라 그 옆에는 예성타오(葉聖陶), 펑쉬에펑(馮雪峰), 마오둔(茅盾)의 고거라는 팻말도 발견할 수 있었다.

남루한 고거에서 루쉰을 만나다


▎루쉰 고거 건너편에 사는 한 할머니가 자신의 집안을 공개했다. 루쉰의 옛집 역시 이 집의 구조와 크게 다르지 않았을 것이다.
사람이 살고 있어서 그 안에 들어갈 수는 없었지만 우리는 흙 속의 진주를 발견한 것마냥 신기하고 감격스러웠다. 아, 이 좁은 골목에서 루쉰과 그의 친구들이 옹기종기 모여 살았구나. 뭔가 벅찬 느낌도 들었다. 그런데 마침 그 골목에 나와 앉아 우리의 소란을 보고 계시던 할머니 한 분이 자기 집을 보여주겠다고 나서신다. 마치 한국말을 알아들으신 것처럼. 할머니를 따라, 수십 년 동안 살고 계신다는 그 집의 문을 열고 들어선 순간, 난 여행 중 처음으로 약간 울컥했다. 그곳이 너무 좁아서, 루쉰이 이런 곳에서 살았겠구나 싶어서, 그리고 여전히 이런 곳에서 누군가 평범하고 남루한 일상을 이어가는구나 싶어서. 비로소 루쉰을 만나는 느낌이었다.

마지막 여행의 포인트. 와이탄(外灘). ‘상해시 인민영웅기념 탑’이라는 남근적 상징물이 우뚝 솟아 있었고 황푸강 건너편에는 개혁개방의 상징인 상하이의 랜드마크 건축물들이 서 있었다. 그러나 나는 그것들이 무슨 공상과학영화에서 불쑥 튀어나온 것처럼 느껴져 전혀 실감이 나질 않았다. 황푸강 이쪽에는 옛날 영국조계지의 흔적인 영국식 건축물들이 고풍스럽게 서 있었다. 건물마다 빨간 깃발이 꽂혀 있었는데 한결같이 은행 아니면 증권건물이었다. 갑자기 며칠간의 강행군이 아득하게 느껴졌다. 이곳이 혁명을 치른 나라가 맞을까? 혁명은 어디에 있고, 또 루쉰은 어디에 있는 것일까? 다시 원점. 여행은 그렇게 끝나고 있었다.

이희경 - 일명 문탁. 이십대를 뜨거운 1980년대에 ‘투신’했다. 이후 잠시 길을 잃고 헤맸으나 이후 ‘연구공간 수유너머’에서 10년 동안 책을 새로 읽고, 세상을 다시 읽었다. 2010년부터 동네에서 친구들과 ‘마을에서 만나는 인문학 공간−문탁네트워크’를 꾸려가고 있다. 요즘의 화두는 마을과 대중지성이고, ‘마을학교’, ‘마을공방’, ‘마을공유지’를 실험 중이다.

201612호 (2016.11.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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