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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승중 교수의 ‘그리스 문명의 결정적 순간’(9)] 아테네 민주주의 성립과 두 영웅의 탄생 

독재 종식을 향해 도도히 행진하다 

김승중 캐나다 토론토대 희랍미술고고학과 교수 seungjungkim@gmail.com
그리스 민주주의를 창시한 클레이스테네스 개혁의 동력…폭군 살해자로 나선 하르모디오스와 아리스토게이톤의 거사 뒷이야기

기원전 6세기 판 아테나이아의 행렬 속에서 일어났던 히파르쿠스의 죽음은 클레이스테네스의 민주 개혁운동을 초래했다. 그것은 부도덕한 권력의 압제를 스스로의 힘에 의해 걷어내려 했던 위대한 노력이었다. 민주주의 파괴에 맞서 용기 있는 투쟁에 나선 우리 국민의 자화상도 여기에 서렸다.


▎오늘날의 도시 아테네를 배경으로 보이는 아고라 광장(Agora). 아크로폴리스(Acropolis)에서 북서쪽으로 바라본 방향이다. 중앙에 보이는 건축물이 헤파이스토스 신전, 그 오른쪽에 아고라 입구가 있다.
우리는 지금 BC 514년, 8월 중순의 무더운 한 여름날에 아테네에 와 있다. 도깨비시장 바닥도 저리 가라 할 만큼 북적거리는 아고라 광장의 입구 밖에서 서성거리며, 남녀노소를 불문하고 모여드는 아테네의 시민들을 하나둘씩 지켜보고 있다. 오늘은 바로 4년 만에 한 번 돌아오는 그 유명한 범 아테네 페스티벌, 판 아테나이아 행진(Panathenaic Procession)이 있는 날이다. 헤라클레스 인형을 집에 두지 못하고 들고 나온 꼬마들, 모처럼 장롱에서 꺼내어 뻣뻣하게 풀먹인 히마티온(himation: 고대 그리스인들이 즐겨 입었던 망또. 직사각형의 긴 천을 휘마는 것으로 인도의 복장과 유사성이 있다)을 입고 나온 그들의 할아버지들, 시청에서 일하는 멋쟁이 건넛집 아저씨, 오래간만에 씻고 나온 얼굴이 훤해 언뜻 알아보지 못했던 생선 장수 아저씨, 그리고 나누어 받을 제사상 고기를 담아갈 장바구니를 들고 나온 옆집 아줌마…. 웅성거리며 들떠있는 그들의 기운에 동화되어, 우리는 어느 순간 나 자신도 모르게 이들의 삶의 하루를 목격하는 나그네가 되고 말았다. 몇 십만 명이 넘는 아테네 시민과 함께 자리하며 곧 판아테나이아 행진을 앞장서 이끌 귀족층들이 바쁘게 준비하는 모습을 관심 있게 지켜본다.


▎티라니사이드 동상 중 하나(왼쪽)가 중년의 나이를 덥수룩한 턱수염으로 표현하고 있다. 바로 아리스토게이톤 (Aristogeiton)의 모습이다. / 사진제공·김승중
어쩌면 이리도 훤칠하고 멋질까. 아테네에서 키 크고 잘생겼다는 젊은이를 다 모아놓은 듯하다. 확실히 귀족들은 다른가 보다. 이집트에서 특별히 비싸게 수입해온 색소로 물들여진 비단같이 고운 옷들에 현란하게 빛이 반사되어 눈이 부실 정도이다. 아, 저기 아테네의 군주(tyrant), 히피아스(Hippias)가 보인다. 그리고 그 옆에서 총리 역할을 하는 그의 동생 히파르코스(Hipparchos)가 그의 귀에 입을 대고 소근소근 뭐라고 말을 한다. 예술을 사랑하고 문화적인 행사를 담당하는 인기 좋은 히파르코스가 그답지 않게, 오늘은 왠지 안절부절하는 기색이 역력하다.

모든 이의 부러움과 애착의 대상인 하르모디오스


▎파르테논 신전의 판 아테나이아 프리즈의 한 블럭. 행렬을 준비하는 모습을 그렸다. / 사진제공·김승중
밤잠을 설친 사람마냥 그의 안색이 말이 아니다. 판 아테나이아 축제를 준비하느라 그렇게도 스트레스가 많이 쌓인 것일까? 귀엣말을 듣고 나서 히피아스는 호탕하게 웃음을 터트리며, 동생의 등을 탁탁 치며 걱정하지 말라는 듯 손을 휘젓는다. 그런데 히파르코스는 여간해서 마음이 안 놓이나 보다. 형에게 항의하는 투로, 이마에서 송골송골 솟아나는 식은땀도 아랑곳하지 않고, 무슨 말을 정신 없이 이어간다. 이에 히피아스는 화를 내며 동생에게 따끔하게 한마디하며, 말들이 서 있는 저쪽으로 가라며 손짓을 한다. 풀이 죽은 히파르코스는 억지로 행사준비를 마치러 형의 곁을 떠나간다. 이날이 바로 아테네의 역사에서, 아니 고대 그리스뿐만이 아니라 어쩌면 전 인간 세계의 역사를 통틀어 보기 드문 운명적 순간이라고 한다면 당시 아테네인들 중에 누가 그것을 믿었을까?

판 아테나이아 같은 행사 날에는 주로 집안에 머물며 시간을 보내는 귀족 가문의 아리따운 아가씨들도 오랜만에 외출을 해서 행진 준비를 하는 날이다. 몇 달간 손수 짠 화려한 복장을 선보이며, 팔랑거리는 베일 속에서 힐끗힐끗 눈길을 주는 요정 같은 아가씨들. 수레를 끌 말을 손질해 준비하는 건장한 청년들 중 하나가 이들에게 넋을 잃고 한눈을 파느라, 그만 손에 쥔 고삐를 놓칠 정도로 말이 휙 뒷발로 서는 바람에 엉덩방아를 찧고 넘어지고 만다. 얼굴이 빨개진 청년을 보고 자지러지게 웃음을 터뜨리는 아가씨들도, 이내 아테나 여신의 사제 어른께 꾸중을 듣고 조용히 한다. 이 아리따운 아가씨들은 아테네의 최고 귀족 가문들 중에서도 치열한 경쟁을 뚫고, 가장 아름답고 인품이 훌륭하다는 이유로 선발된, 오늘 카네포로스(kanephoros: 신성한 바구니를 든 자)로서의 역할을 맡게 될 이들이다. 온 아테네가 지켜보는 가운데, 이들은 이를테면 사교계의 데뷔땅뜨(debutante)와도 같이 화려하고도 공식적인 선을 보이게 되는 것이다.

그런데 이 카네포로스를 맡을 아가씨들 사이에서 수군수군 심상치 않은 말이 들린다. 머리에다 바구니를 일 준비를 하기 위해 집에서 꽂고 나온 꽃 치장을 풀면서 ‘아라메’라고 불리는 한 아가씨가 친구인 다른 아가씨들에게 소곤소곤 묻는다.

“얘, 근데 하르모디오스(Harmodios)의 여동생 있잖아, 그 애는 도대체 어떻게 된 거야? 우리와 함께 연습할 때는 꼬박꼬박 나오더니.”

“어머, 너 못 들었니? 그 애 탈락되었대. 히파르코스 군주님께서 막판에 직접 탈락시켰다는데 처녀가 아니었다나 봐, 글쎄.”

“아니… 어찌 그걸 아셨대?”

“쳇, 그러게! 그 여우 같은 계집애가 말이야, 카네포로스로 뽑히려고 히파르코스 군주님을 꼬시려다가 발각되었다지?”

“아냐. 내가 듣기론 히파르코스 군주님이 하르모디오스를 꼬시려다 거절당해서, 공연히 그 여동생을 문제삼아 본때를 보여주시려고 한 거라는데?”

“아이… 어떻게! 어쨌건 그 집 완전히 쫄딱 망했네. 창피해서 어떻게!”

정말로 안됐다는 눈치를 주며, 처음 말을 꺼낸 아라메는 혀를 차며 고개를 살짝 돌린다. 그리고 그녀는 슬쩍 눈을 들어, 넋이 나간 듯 먼 곳을 뚫어지게 바라보고 있는 한 청년을 눈여겨본다. 키가 훤칠하고 황금빛의 곱슬머리와 신적인 아름다움을 몸에 지닌 이 청년은 바로 모든 이의 부러움과 애착의 대상인 하르모디오스(Harmodios)다. 이 아가씨도 그를 멀리서 바라보며 내심 가슴 설레기만 했던 터이다. 이렇게 가까이서 보니 역시 헛소문이 아니었다. 그는 정말로 신적인 존재 같다고 생각이 될 정도로 눈부시게 아름다웠다. 그런데 왠지 그는 슬픈 얼굴을 하고 있다.


▎하르모디오스와 아리스토게이톤이 히파르코스를 죽이는 장면이 도기화에 종종 보인다. 그들의 포즈를 눈여겨보면 티라니사이드 조각 동상에 표현된 모양과 일치한다. 독일 뷔르쯔부르크 박물관 소장. / 사진제공·김승중
여동생의 수치를 생각하고 있는 걸까, 그는? 하늘하늘한 하얀색 키톤(chiton) 사이로 비치는 단단한 가슴의 근육도 풀이 죽은 듯, 그 앳된 얼굴이 갑자기 어른스럽게 보인다. 그녀는 갑자기 말할 수 없는 사랑의 감정을 느꼈다. 그녀는 자신의 손에 든 귀한 머리 장식을 바라보며 갑자기 후회하는 마음이 생겼다. 너무 일찍 풀었나? 하르모디오스가 자기를 볼 기회가 생기기도 전에 열심히 치장한 머리를 풀어버렸다는 생각이 든 것이다. 그러나 그에게는 벌써 동성 애인이 있지 않은가? 연상의 중산층 남성 아리스토게이톤(Aristogeiton)이 하르모디오스의 에라스테스(erastes: 고대 그리스 동성애 형식에 따르면 이는 나이가 더 많은, ‘사랑을 주는 자’라는 뜻)라는 것은 진실로 모든 사람이 알고 있는 사실이다. 그리고 하르모디오스는 아리스토게이톤의 에로메노스(eromenos: 고대 그리스 동성애 형식에 따라 어린 나이로 ‘사랑을 받는 자’라는 뜻) 격이 되는 것이다. 그 둘의 사랑은 그 어느 누구도 깨지 못하는, 죽음도 가르지 못할 전설적인 사랑이라고들 한다. 하물며 히파르코스 군주님의 애정도 거부했다고 하지 않았는가? 하르모디오스가 하루 빨리 나이가 들어, 자기를 부인으로 삼아주면 얼마나 좋을까 생각하며 그녀는 한숨을 내쉬었다.

그렇지 않아도 하르모디오스의 곁으로 다가오는 아리스토게이톤이 보인다. 넋이 빠져있던 하르모디오스는 언제 그랬냐는 듯이 벌떡 일어나 그의 애인을 정답게 맞이한다. 그리고 그 주위를 둘러싸고 있던 호플라이트(hoplite: 직경 80㎝의 방패를 든 중장보병) 병사들도, 그 둘을 보고 무언가 아는 듯한 눈치를 주며 낮은 목소리로 쏙닥거린다. 그렇지 않아도 시내에서 군복차림을 한 병사들을 보는 것도 참 드문 일이다. 무기를 차는 것은 보통 금지되어 있지만, 오늘만은 행진에 참여하는 이유로 이들은 검을 차고 있고, 많은 사람이 바글바글한 이곳에서 칼날을 손질하며 무기와 방패를 정돈하는 와중에 쇠가 챙챙거리는 소리가 왠지 불길한 느낌으로 다가온다. 형언할 수 없는 긴장감이 도는 가운데 하르모디오스는 점점 얼굴이 불그스름해지며 힘없이 처져있던 그의 몸과 근육이 마치 반신반인인 헤라클레스와도 같이 팽팽하게 부푸는 듯했다. 그리고 순식간에 하르모디오스는 눈앞에서 사라져버렸다.

페르시아 전쟁만큼이나 결정적인 역사적 모멘트


▎BC 477년에 크리티오스와 네시오테스가 만든 폭군 살해자의 동상. 여기 보이는 작품은 로마시대의 사본이다. 나폴리 고고학 박물관 소장. / 사진제공· 김승중
곧 날카로운 비명과 함께 대혼란이 물밀듯이 밀려와 눈 깜짝할 새에 주변을 덮친다. 아고라 광장의 입구에서 너도나도 쏟아지듯이 사람들이 도망치는 모습이 보인다. 히파르코스가 암살당했다는 외침이 여기저기에서 들려온다. 그리고 그를 찔러 죽인 사람은 다름 아닌 하르모디오스라는 소리도 들린다. 둘 다 그 자리에서 즉사했다는 소식과 함께. 아라메는 가슴이 덜컹 내려앉는 것을 느끼지만,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생각할 겨를도 없다. 어리둥절할 뿐이다. 이 사람 저 사람에게 치여, 머리며 옷이며 모두 풀어지고, 더럽혀지고, 찢겨나갔다. 정신을 차리자마자 그녀는 저만치 손에 쥐고 있던 꽃 머리장식이 지나가는 사람들에게 짓밟혀서 내팽개쳐진 것을 보고, 자기도 모르게 문득 몇 분 전의 하르모디오스의 슬픈 모습을 떠올린다. 방울 같은 눈물이 상처 난 손등에 뚝뚝 떨어져 따갑다. 그녀는 곧 애절한 마음을 가다듬고 눈물을 삼키며 한 발자국씩 아고라 광장의 입구로 다가갔다.

하르모디오스와 아리스토게이톤의 이야기는, 고대 그리스 역사상 페르시아 전쟁만큼이나 결정적인 역사적 모멘트다. 고대 역사가인 헤로도토스, 투키디데스, 그리고 아리스토텔레스 같은 사상가가 그 자세한 내력을 전한다. 한마디로 말하자면, 이 두 아테네 시민이야말로 그 동기가 어떠했든 독재자를 암살하고 고대 그리스 역사상 대대로 이어져왔던 소수 독재정치를 종결시키고 민주주의의 탄생을 불러온 영웅으로 받들어졌던 것이다. 아테네 공식적인 인식체계가 그러하고, 민중의 여론이 그러했다는 사실만은 분명하다. 기록상으로도, 미술로 보는 증거로도 그러하다.

장본인을 죽이지 못한 실패한 쿠데타?


▎파르테논 신전의 판 아테나이아 프리즈의 한 블럭. 신성한 역할을 맡은 시민 여성들의 손에 든 접시 같은 물건이 헌주(libation)를 붓는 성스러운 도기이다. 사제한테서 설명을 듣고 있는 듯하다.
그러나 흥미롭게도 고대 역사가들이 전하는 이야기를 지켜보면 그렇게 간단치만은 않다. 투키디데스가 아테네의 영웅인 이 둘을 신랄하게 비판하는 대목이 특히 주목할 만하다. 그가 설명하기를, 하르모디오스와 아리스토게이톤의 행동은 민주주의 이상을 가지고 실행한 영웅적인 행동이 아니라, 사적인 애정관계와 질투심에서 비롯된 무모한 짓이라는 것이다! 독재자의 동생 히파르코스가 하르모디오스에게 두 번이나 사랑을 요청했는데 하르모디오스는 이를 거부하고 선배이자 연인인 아리스토게이톤에게 일러바치기까지 했다는 것이다. 화가 날대로 난 히파르코스가 하르모디오스의 여동생을 아테네에서 가장 명예로운 카네포로스의 하나로 일부러 선정했다가, 처녀가 아니라는 이유로 공식적으로 수치를 주었다는 것이다.

하르모디오스와 아리스토게이톤은 그리하여 BC 514년에 4년마다 한 번씩 일어나는 대 판아테나이아의 행진을 틈타, 독재자 형제를 암살할 계획을 세웠다고 한다. 이날이야말로 의심을 받지 않고 그들 곁에 무기를 들고 접근할 수 있는 유일한 기회였던 것이다. 그 외에도 소수의 병정과 함께 쿠데타 같은 일을 꾸미고 있었다고 보는 견해가 주류를 이룬다. 페르시아 전쟁을 계기로 처음으로 인간의 역사를 체계적으로 기록한 헤로도토스에 의하면, 히파르코스는 판 아테나이아 행진의 전날 밤 자신이 죽는 예언적인 꿈을 꾸었다고 한다. 그래서 헤로도토스는 오히려 그가 죽은 것에 대해 놀라움을 금치 못한다. 거기 있었던 자기들의 병정 중 하나가 히파르코스와 긴밀히 이야기 나누는 것을 목격한 그들은 자신의 계획이 탄로날 것을 두려워한 나머지, 서둘러서 일단 히파르코스를 죽였다고 전한다. 이 어긋난 계획 때문에 하르모디오스는 그 자리에서 경비원의 창을 맞고 즉사했고, 아리스토게이톤도 당장에는 경호대를 피했지만 히피아스에게 곧 체포되어 고문을 당하고 결국엔 죽임을 당했다고 한다. 어떻게 보면 형 히피아스가 진정한 독재자라고 한다면, 이 두 사람의 거사는 당사자를 죽이지 못한 실패한 쿠데타라고 볼 수도 있다. 그렇지 않아도 동생을 잃은 히피아스는 전보다 훨씬 심한 폭군정치를 자행했다고 투키디데스는 전한다. 그는 동생을 잃기 전, 동생과 함께 통치했을 때는 매우 온건한 정치가였다는 것이다.


▎BC 600년에 제작된 아르케익 형식의 쿠로스(kouros) 석상. 왼발을 앞세우고 뻣뻣한 포즈를 취한 쿠로스는 보통 귀족 중심적 이상형을 표현한다고 본다. / 사진제공·김승중
그러나 그로부터 4년 뒤(BC 510)에 놀라운 일이 일어났다. 히피아스의 아버지인 페이시스트라토스(Peisistratos)가 군주로 있던 시절에 아테네에서 추방당한 알크메오니드(Alcmeonid) 가문의 후손들이 당시 스파르타의 도움을 얻어 독재자 히피아스를 끌어내리는 데 드디어 성공했던 것이다. 그리고 이 알크메오니드 가문의 후예 중 가장 특출한 인물인 클레이스테네스가 스파르타의 세력을 성공적으로 견제, 그리고 2년 뒤인 BC 508년 아테네의 정권을 장악했다. 그리고 그는 곧바로 체계적인 정치 개혁을 실행하였다. 이른바 ‘클레이스테네스의 개혁’이 바로 인류역사상 희랍의 민주주의로 칭송되는 개혁의 시초를 의미하게 되는 것이다. 이 개혁의 자세한 내용은 조금 뒤에서 언급하기로 하고, 일단 하르모디오스의 이야기로 돌아오자! 히파르코스의 죽음 이후 이렇게 단기간 내에 히피아스를 끌어내리고 민주주의를 창시한 클레이스테네스 덕분에 하르모디오스와 아리스토게이톤은 곧 티라니사이드(Tyrannicides: 폭군 살해자)라는 영예로운 명칭을 얻었다. 그리고 민주주의를 창시한 진정한 영웅들로 추대되고, 아테네에서는 그들을 숭배하는 컬트도 설립되었다.

어떤 학자들은 아마도 독재자를 무너뜨리는 일에 스파르타의 역할을 최대한 축소시키기 위해서 클레이스테네스 자신이 오히려 이 두 아테네 시민의 클레오스(kleos: 영웅의 영광)를 전략적으로 강조한 것이라고 보기도 한다. 클레이스테네스가 아고라에 세운 이 둘의 조각상은 그 당시 잘 알려져 있는 조각가 안티노르에게 의뢰한 것일 확률이 높다. 신화적인 인물이 아닌, 역사적인 실제 인물의 조각상을 아고라 광장에 세워 추대하는 현상은, 그리스 역사상 전례 없는 사건이었다.

정확히 언제 처음으로 티라니사이드 조각상을 아고라에 세웠는지는 확실치 않다. 페르시아 전쟁 당시 페르시아의 왕 크세르크세스 1세가 아테네를 침범했을 BC 480년에 안티노르가 조각한 티라니사이드 상 원본을 약탈해갔다고 전한다. 당시 페르시아의 수도인 수사(Susa)에 전리품으로 이 그리스 민주주의 영웅들을 세워놓았다고 하는데, 이는 벌써 BC 480년쯤에 오면 그들이 상징하는 그리스의 핵심인 민주주의의 정신과 정체성이 형성되었다는 사실을 새삼 돋보이게 한다. 150년 후에 알렉산더 대왕이 페르시아를 침범했을 때 몸소 수사에 서 있던 티라니사이드 원상을 다시 되찾아 왔다고 할 정도로 고귀한 상징물이었던 것이다. 그리고 안티노르의 원품을 약탈당한지 몇 년도 채 안 된 BC 477년에 즉각 크리티오스와 네시오테스(Kritios and Nesiotes)라는 아티스트에게 다시금 티라니사이드 조각상을 청탁하였다는 기록이 비문에 똑똑히 새겨 전해지고 있는 사실은, 어떻게 보면 기적적인 일이다. 그 동안 발견된 몇몇의 로마시대 사본은 바로 이 두 번째 티라니사이드 조각상의 모습을 하고 있고, 그중에 가장 대표적인 예가 바로 나폴리 국립 고고학 박물관에 소장된 그 유명한 작품이다.


▎파르테논 신전의 판 아테나이아 프리즈의 한 블럭. 동쪽 면에 특히 여성들이 많이 보인다. / 사진제공·김승중
BC 477년 작 티라니사이드 동상은 정확한 제작연도와 특별한 스타일 때문에 서양 미술사의 발달과정에서, 그 역할은 더할 나위 없이 중요한 문제이지만, 여기서 한 가지만 언급하겠다. 아르케익 스타일의 뻣뻣한 포즈를 취한 쿠로스 석상이 근 150년간 BC 6세기를 전후로 그리스 문화의 토대가 되는 불변의 귀족적인 이상을 표현한 미술 장르라고 한다면, 동(銅)으로 만들어진 티라니사이드의 파격적이고 다이내믹한 모습의 구성은 그 형태의 자유로움이 돋보이는데, 이는 보는 이로 하여금 참여를 권장하는, 진정한 민주주의적 표현이라는 것을 말해주고 있다.

티라니사이드라고 칭한 이 두 시민이 그 자리에서 죽음을 택했기에, 그들의 동기가 정확히 무엇이었든 아테네 시민들이 이들을 영웅으로 추대할 수 있었던 것이다. 그리고 그들의 자손은 대대로 대단한 특권을 누렸고, 그들의 무덤에서 영웅 추모의 제사를 지내고 제물을 바치며, 헤라클레스와 같은 영웅을 섬기듯이 섬겼다. 영웅으로서의 인기는 그 당시 도기화를 보아도 짐작이 간다. 역사적인 표현을 꺼려하는 그리스인들도 티라니사이드에 관해서는 아무런 거리낌 없이 폭군을 암살한 그들의 업적을 여지없이 표현해냈다. 그러나 민주주의의 진정한 영웅은 다름 아닌 정치가 클레이스테네스였다. 그가 이룩해놓은 개혁이 토대가 되어 그야말로 진정한 민주주의의 정치 형태가 발달할 수 있었던 것이다.

클레이스테네스의 대담하고 파격적인 조치


▎판 아테나이아 프리즈의 한 장면. 성수가 담긴 물병 히드리아(Hydria)를 지고 행진하는 히드라포로이(Hydraphoroi). 물병 운반은 아테네 시민이 아닌 특별 외국인(metic)들의 일이었다.
이 새로운 형태의 정부를 유지하기 위해서는 민중들에게 그들이 섬길 수 있는 새로운, 리얼한 영웅을 창조해야만 했던 것이다. 개개인에게 새로운 권리와 힘을 부여하는 민주주의의 정신을 전달하기에는 누구라도 영웅이 될 수 있다는 메시지보다 더 효과적인 것이 있었을까? 헤라클레스와 같은 신화적 존재나, 먼 조상을 받드는 귀족 중심적인 사회제도는 그 이전의 올리가르키(oligarchy: 소수 독재정치)의 이상에 더 걸맞은 관습이었던 것이다. 클레이스테네스가 이 두 사람을 영웅으로 승화시킨 것은 정말로 대담한, 파격적인 조치였다고 볼 수 있다.

민주주의라 함은 그 원어로 데모스(demos, 민중)와 크라토스(kratos, 힘)가 합쳐진 말이다. 그러기에 그 어원의 뜻은 민중에게 힘을 준다는 의미이다. 헤로도토스가 가장 처음으로 이 말을 쓰지만, 그의 <역사>는 BC 5세기 중반 이후에 쓰여진 작품이고, 클레이스테네스가 직접 이 용어를 썼다는 증거는 없다. 하지만 그의 개혁의 핵심이 바로 아테네의 영토를 139개의 다른 동등한 구역(이 구역도 데모스라고 불렀다)으로 나누었던 것이다. 그리고 그 구역에 따라 모든 아테네의 시민을 10개 부족(phylai)으로 나누었다. 그 이전의 4대족의 정치적 구성은 전적으로 가족친척 관계에 따른 시스템이면, 클레이스테네스의 개혁이 낳은 10대족의 조직은 오로지 그들의 지리적인 위치인 데모스에 따라 편성이 되었기에 훨씬 더 동등한 중성적 체제라고 볼 수 있다. 클레이스테네스는 이러한 새로운 정치적 분할을 통해 이전의 낡은 연줄 즉 영향 채널을 모두 혁파해버렸다.

고대 그리스의 민주주의 제도는 그 안을 자세히 들여다보면, 우리가 알고 있는 20세기 이후의 민주주의와는 아주 다른 체제임을 알게 될 것이다. 모든 시민이 동등하게 참가하는 진정한 직접민주주의인 반면, 그 ‘시민’이라는 정의가 터무니없이 좁기도 하다. 30세 이상의, 정규시민 부모 아래 태어난 남자만이 그에 속하고, 모든 여자와 노예, 그리고 30세 미만의 젊은이들, 메틱(metic)이라 불리는 외국인이나 외시민(주변의 도시국가에서 온 사람도 포함)이 모두 시민층에 속하지 않았다. 아테네의 경우, 시민층은 도시국가 전체 인구의 10% 미만에 불과했다. 민주주의라는 것은 단지 아테네에서만 보는 현상도 아니었고 다른 도시국가들도 많은 다양성과 발전을 보였다. 이 제도의 구체적인, 그리고 실질적인 혹은 실천적인 일면들은 다음회에 이어서 보기로 하겠다.


▎판 아테나이아 프리즈에 표현된 제물이 될 소를 행진시키는 아테네 시민들.
여기서 마지막으 로 선보일 작품은 파르테논 신전(Parthenon)에서 가장 유명한 부분, 이른바 판 아테나이아의 프리즈(Panathenaic Frieze)이다. 파르테논 신전이라는 장대한 마스터피스에 관한 자세한 이해는 앞으로 더 본격적으로 논할 기회가 있으리라 믿는다. BC 5세기 중반 이후에 지어진 아테나-파르테노스(Athena Parthenos: 처녀여신 아테나)라는 장엄한 성전 그 자체가 바로 그리스 민주주의 발전 과정의 클라이맥스적 표현이다. 나오스(Naos: 신전의 내부구조인 방)의 4면을 둘러싸고 있는 전체 160m 길이의 양각의 프리즈는 그 내용이 판아테나이나 행진의 실행을 표현했다고 해서 ‘판아테나이아 프리즈’라 불린다. 클래시컬 스타일의 절정을 나타내는 이 양각상들은 그 모든 표현이 극도로 아름답게 절제되었으며, 그 얼굴에 나타난 표정도 쉽게 해석해낼 수 없는 총체적이고도 포괄적인 깊이를 함축하고 있다. 그 모든 인물의 동등함이 민주주의의 정신인 이소노미아의 표현이라 하겠다. 그리고 인간세의 사건들의 표현이 이와 같이 신들의 공간에서 그들과 어깨를 나란히 하며 동등한 위치를 차지할 수 있다는 사실은 휴머니즘의 전시라고도 할 수 있는 것이다.

민주주의의 정신인 이소노미아의 표현


▎파르테논 신전 동쪽 면(입구)의 모습. 안쪽으로 보이는 기둥들 위에는 원래 판 아테나이아 프리즈가 얹혀 있었다. / 사진제공·김승중
그렇지 않아도 앞부분에서 읽은, 히파르코스가 암살당한 날의 이야기를 상상하여 쓴 단편적 기술은 이 판 아테나이아 프리즈에 영감을 받아 쓴 것이다. 이 프리즈는 아고라 광장의 입구에서부터 시작하여 아크로폴리스 위에 있는 파르테논 신전의 앞까지 걸어가는 과정을 나타내고 있다. 이 행렬이 성전의 서쪽 면에서부터 동쪽에 이르기까지 차례로 표현되어 있다. 건물 서쪽 면에 위치한, 행렬의 초기를 나타낸 프리즈는 말을 다듬고 수레를 준비하는 과정을 보여준다. 남쪽과 북쪽 면으로 이어지는 행렬은 곧 10개의 다른 그룹으로 분류될 수 있는 병사들, 젊은이들, 중년의 남자들, 말을 타거나 걷는 사람들을 볼 수 있다. 이들을 클레이스테네스 개혁의 10대족의 대표라고 보는 견해도 있다.

그리고 좀 더 동쪽으로 걸어가면 곧 제물로 바칠 동물들을 끄는 사람들, 그리고 각종 물병, 쟁반, 바구니 등을 든 남성과 여성들을 볼 수 있다. 이 여성들이 바로 어린 나이에 선정된 아레포로스(arrhephoros)이며, 좀 더 큰 아가씨들은 카네포로스(kanephoros)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동쪽 면 벽에는 12명의 올림포스 신이 모두 옥좌에 앉아서 중간에 일어나고 있는 일을 목격한다. 이 장면은 바로 아레포로스들이 그동안 정성 들여 수놓아 짠, 아테나 여신상에 입힐 페플로스(peplos)를 접는 장면이다. 결국에 판 아테나이아 페스티벌 행진은 아테나 여신상에게 4년마다 한 번씩 새 옷을 선사하는 의식과, 제물로 바칠 희생동물을 죽여서 제사를 지내고 고기를 모두에게 나누어 공급하는 것으로 끝을 맺는다. 그리고 근 열흘간 벌여지는 축제와 운동경기 등, 아테나 여신의 생일을 빌미로 모든 시민이 함께 겨루고, 즐기고 도시국가의 정체성을 확고하게 만드는 기회를 제공하는 일이, 바로 이 축제의 목적이다.


▎판 아테나이아 행렬의 종착지인 아테네의 아크로폴리스. 신성한 바위(Sacred Rock)라고도 불리는 아테네 도시국가의 성스러운 종교 중심지다.
아테네의 아고라 광장 북서쪽에 월계수로 뒤덮인 자그마한 그늘진 구석이 있다. 이즈음 광장에 내리치는 무지막지한 땡볕은 아폴로신이 잠시 낮잠을 자느라 신경을 꺼버린 결과가 아닐까? 따가운 광선을 피해 이 구석에 앉아있는 한 여인의 고요하고 섬세한 윤곽이 잡힌다. 한 달에 한 번씩 꼬박꼬박 이 자리를 찾아오는 이 여인의 손에는 꽃으로 빚은 머리장식이 쥐어져 있다. 그녀 옆에는 바로 티라니사이드 동상이 세워져 있다. 무시무시한 동작의 포즈를 취한 두 영웅. 그 어느 누구도 그 앞을 지나가면서 검이 언제라도 자기 머리에 내려쳐질지 모르는 긴장감을 느끼지 않을 수 없다. 사람들이 말하기를 민주주의 이념에 어긋나는 생각을 하는 자들은 티라니사이드 앞을 지나가면서 그 순수하지 못한 마음을 정화시켜야 한다고들 한다.

오직 민의 투쟁을 통해 획득되는 역사적 체험의 결실


▎판 아테나이아 프리즈의 동쪽 면에서는 12명의 올림포스 신이 옥좌에 앉아 페플로스(peplos)를 접는 장면을 목격한다. 왼쪽부터 헤라와 제우스신, 두 명의 카네포로스와 여사제, 그리고 남사제와 페플로스를 접는 아이(arrhephoros), 그리고 아테나 여신과 헤파이스토스가 맨 오른쪽에 보인다. / 사진제공·김승중
아라메는 곧 자리에서 일어나 동상 쪽으로 걸어간다. 그녀는 손에든 머리장식을 조심스럽게 하르모디오스의 발 옆에다가 살짝 놓는다. 그리고 그녀는 곧 눈을 들어 그 찬란한 광채에 눈이 멀어도 좋겠다는 표정으로 하르모디오스의 상을 바라본다. 문득 12년 전 그 운명적인 날에 처음으로 그를 바라본 순간이 눈앞에 아른거린다.

“그날 죽지 않았으면 당신도 이제 결혼할 나이가 되었겠군요. 허나 대신 당신은 이렇게 영원히 눈부신 금빛의 찬란한 청년의 모습을 하고 있네요. 사랑스런 내 딸이 어느새 아홉 살이 되어 명예로운 아레포로스(arrhephoros)로 선정되었답니다. 내주에 판 아테나이아 행진에 참여하기 위해 아테나 여신의 페플로스를 죽도록 열심히 일년 내내 짰답니다. 그 어린 것이 혼자 행렬에 참가하는 동안, 잘 좀 지켜봐주시리라 믿어요. 결국 당신 때문에 못 걸은 그 행렬 말이에요….”

내가 이 글을 쓰고 있는 지금, 대한민국에는 민주주의를 열망하는 국민들의 함성이 판 아테나이아의 행렬보다도 더 장엄한 역사적 장관을 빚어내고 있다. 기원전 6세기 판 아테나이아의 행렬 속에서 일어났던 히파르쿠스의 죽음이 과연 어떠한 동기에서 일어난 사건인지를 불문하고, 그 사건이 클레이스테네스의 개혁운동을 초래하였고 아테네 민주주의의 단초가 되었다는 것은 움직일 수 없는 사실이다. 아테네의 민주주의와 오늘 우리가 말하는 민주주의는 매우 다른 것이지만, 국민 대다수가 법 앞에서 동등한 기회와 권리를 갖는다는 기본정신은 크게 다를 바가 없다. 클레이스테네스의 개혁은 솔론의 인간적인 법률개혁 이래로 지속적으로 진행되어온 역사적 흐름의 만개라 할 수 있다.

우리 민족도 일제의 강점에서 해방되고 서구적 의회민주주의제도를 도입한 이래 꾸준히 그 제도에 부합하는 국민적 의식을 개발하려고 노력하여왔으며, 여러 형태의 압제권력에 저항하여왔다. 내가 보기에 ‘박근혜-최순실 게이트’는 참주정치(tyrannia)의 마지막 유산일 듯하다. 이제 국민 모두가 스스로 티라니사이드가 되고자 하는 것이다. 부도덕한 권력의 압제를 스스로의 힘에 의하여 걷어내버리려고 하고 있는 것이다.

거국적인 광화문 앞 광장의 행렬은 여태까지 세계사적으로도 유례를 보기 힘들었던 민주의 행렬이다. 이러한 자각적 행동을 통하여 대한민국은 서구전통과는 다른 자기체질에 맞는 새로운 민주의 체제를 발전시켜나갈 것이라고 굳게 믿는다. 민주는 오직 민의 투쟁을 통하여 획득되는 역사적 체험의 결실이다.

김승중 - 서울대학교 천문학과를 졸업하고 미국에 유학했다. 프린스턴대 천체물리학과에서는 우주론을, 콜롬비아대학 예술사고고학과에서는 희랍미술을 전공해 각각 박사학위를 받았다. 콜롬비아 박사과정에 들어가기 전에는 버지니아대학에서 미술사학 석사코스를 밟았다. 이 시기 다양한 현지발굴 프로젝트에 참여하여 고고학의 생생한 지식을 얻었다. 현재 캐나다 토론토대학교에서 희랍미술고고학을 가르치고 있다.

201612호 (2016.11.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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