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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명호의 ‘조선왕조 스캔들’ (24)] ‘요동정벌’ 이성계, 왕자의 난을 당하다 

총신(寵臣) 지키려다 애자(愛子) 잃은 임금 

신명호 부경대 사학과 교수
태조, 외교문서 문구 트집잡아 정도전 압송 요구하는 명(明)의 요구 거부… 장고(長考) 끝에 꺼내든 요동정벌, 정안대군에게 정변 일으킬 빌미 제공

▎홍무제의 압송 요구를 피하기 위해 요동정벌 카드를 꺼내 들었던 정도전은 정적 이방원에게 무인정사(戊寅定社)의 빌미를 제공하게 된다. 사극 <용의 눈물>에서 정안대군 이방원(유동근 분)이 자신의 심복인 하륜(임혁 분, 오른쪽)·이숙번(선동혁 분)과 함께 정도전을 치러 가고 있다. / 사진·중앙포토
1396년(태조 5) 2월 9일, 태조 이성계는 명나라 예부(禮部)의 외교문서를 접수하고 큰 충격에 빠졌다. 한 해 전 태조가 보낸 외교문서에 명나라 황제 홍무제가 크게 분노해 조선 사신을 억류했다는 내용이었다. 사신을 억류했다는 것은 다음 단계로 조선과의 전쟁까지도 각오했음을 의미했다.


▎봉화백(奉化伯) 정도전의 초상. 그는 조선왕조 창업공신으로 나라의 기틀을 다지는 데 큰 공을 세웠지만 태조의 다섯째 아들 이방원과 정치적 갈등을 겪다 비참한 최후를 맞았다.
1395년 10월 10일, 태조는 명나라 황제에게 다가오는 신년을 축하할 목적으로 하정사(賀正使)를 파견했다. 그 하정사 편에 황제의 신년을 축하하는 표문(表文)과 황태자의 신년을 축하하는 전문(箋文)을 함께 보냈다. 표문과 전문은 전례에 따라 작성했으며 당시의 실력자 정도전이 총괄했다.

하정사를 파견할 때만 해도 양국 사이에 특별한 외교 갈등이 없었다. 태조와 정도전은 조선 건국 이전부터 공민왕의 친명 노선을 지지하던 입장이었다. 당연히 조선 건국 이후에도 양국 간의 친선관계를 증진하기 위해 크게 노력했다. 태조는 즉위 바로 다음날, 명나라에 사신을 보내 고려의 멸망을 알리면서 자신의 즉위를 허락해달라고 요청했다. 뿐만 아니라 새로 건국한 나라의 이름까지 명나라 황제가 결정해줄 것을 요청했다. 그 결과 홍무제는 태조의 즉위를 공인했고, 나아가 나라 이름도 ‘조선’으로 확정해주기까지 했다.

이런 배경에서 태조는 한 해 전 10월에 하정사를 보냈고, 11월에는 자신의 고명(誥命: 국왕 임명장)과 인신(印信: 국왕 도장)을 요청하는 사신도 보냈다. 그때만 해도 태조는 홍무제가 기꺼이 고명과 인신을 보내줄 것으로 믿어 의심치 않았다.

하지만 1396년 2월 9일에 접수한 명나라 예부의 외교문서는 기대와는 정반대였다. 그 문서에 의하면 무엇보다도 신년 축하차 보낸 표문과 전문이 문제였다. 홍무제는 그 문서 안에 자신을 모욕하고 희롱하는 글귀가 있다고 오해하고 대로했다. 분노한 홍무제는 조선 사신을 조사해 정도전이 표문과 전문을 총괄했다는 사실을 확인했다. 홍무제는 조선 사신을 억류하고 일부만 귀국하게 했는데 그 편에 외교문서를 보내면서 정도전 압송(押送)을 요구했던 것이다. 홍무제는 만약 정도전을 압송하지 않으면 군대를 일으키겠다는 협박까지 했다.

황제의 오만방자한 횡포와 협박


▎태조 이성계는 위화도 회군을 통해 최영 등을 제거하고 조정을 장악했다. 북한 신의주와 중국 단둥 등의 사이에 있는 위화도 전경. / 사진·중앙포토
당연히 태조는 크게 고민했다. 전혀 예상하지 못한 일이었기 때문이다. 게다가 태조는 도대체 어떤 글귀가 홍무제를 분노하게 했는지 도무지 짐작할 수 없었다. 그것은 정도전도 마찬가지였고, 조정 중신들도 마찬가지였다. 그래서 온갖 억측이 난무했다. 공민왕 이래의 관행대로 쓴 표문이고 전문인데 거기에 무슨 문제가 있단 말인가? 그럼에도 홍무제는 왜 그렇게 분노했단 말인가? 이유 없이 분노했다면 괜한 생트집을 잡으려는 것이 아닐까? 분명한 이유 없이 생트집을 잡는 것이라면, 그것은 어쩌면 전쟁 명분을 쌓기 위한 술수인가? 만약 그렇다면 조선은 어떻게 해야 하는가?

이런 의문과 고민으로 태조는 심각하게 고민했다. 당시 상황에서 태조는 둘 중 하나를 선택해야 했다. 만약 홍무제가 진정으로 전쟁 명분을 쌓고자 생트집을 잡는다면 그에 대비해 정도전을 보호하며 전쟁을 준비해야 했다. 반대로 정말로 어떤 글귀에 분노했다면 그것을 해명하기 위해 정도전을 명나라로 보내야 했다.

명나라와 전쟁 준비냐 아니면 정도전을 보호하느냐 양자택일을 두고 고민하던 태조는 우선 홍무제의 본심이 무엇인지 알아내고자 했다. 태조는 지난번의 표문과 전문은 정도전이 총괄한 것이 아니라 정탁과 김약항이 썼다고 하는 해명서와 함께 김약항을 명나라로 압송해서 보냈다. 정탁은 병이 들어 압송하지 못한다고 했다. 김약항은 2월 15일 명나라로 갔다. 명나라 예부의 외교문서를 접수한 지 6일 만이었다.

정도전을 대신해 죽음의 길에 나서게 된 김약항을 딱하게 여긴 태조는 “그대를 아까지 않음은 아니나, 여러 번 명나라의 명령을 어겼기에 해명하고자 보내는 것이니 그대는 좋은 말로 대답하고 실수가 없도록 하라”는 위로 겸 당부를 했다.

당시 한양에서 명나라 수도 남경까지 갖다 오려면 빠른 길로 대략 넉 달이 걸렸다. 따라서 김약항을 압송한 결과를 알기 위해서는 넉 달 정도 기다려야 했다. 하지만 그 결과를 알기도 전에 더 심각한 상황이 발생했다.

전년 11월에 고명과 인신을 요청하기 위해 파견했던 사신 중 일부가 3월 29일에 귀국했다. 이번에도 홍무제는 표문의 내용을 문제삼아 조선 사신을 억류하고 일부만 귀국시켰다. 그들 편에 보낸 친서에서도 홍무제는 태조를 가리켜 “간악하고 간사하며 교활하고 사특하다”고 맹비난했다. 아무리 대국의 황제라고 해도 이웃나라의 국왕에게 이런 비난을 쏟아내는 것은 이만저만 외교결례가 아닐 수 없었다. 설상가상 명나라 예부의 외교문서에는 이런 내용까지 있었다.

“지금 조선은 명절을 당할 때마다 사람을 보내 표문과 전문을 올려 축하하니 마치 예의가 있는 듯이 보인다. 하지만 문장 사이에는 경박하고 모욕하는 표현이 있다. 근자에 국왕의 고명과 인신을 요청하는 표문을 보냈는데 그중에 주(紂: 은나라의 폭군) 임금의 일을 인용했으니 더더욱 무례하다. 그것은 혹 조선 국왕의 본의인가? 아니면 신하의 희롱과 모욕인가? 또는 조선 국왕의 인신이 표문에 찍히지 않아서 조선 사신이 중도에 조작한 것인가? 모두 알 수 없는 일이다. 이 때문에 조선에서 파견한 사신을 돌려보낼 수 없다. 만약 표문을 짓고 교정한 인원을 모두 보낸다면 사신을 돌려보내겠다.”[<태조실록> 권9, 5년(1396) 3월 29일]


▎명태조 주원장(홍무제)의 초상. / 사진·중앙포토
위의 내용은 매우 엄중한 의미를 함축하고 있었다. 홍무제는 1395년 10월의 표문에 이어 11월에 보낸 표문에도 자신을 모욕하고 희롱하는 글귀가 있다고 오해하고, 그 글귀가 누구의 작품인지 집요하게 캐물었던 것이다. 즉 그 글귀가 조선국왕 즉 태조의 본의인지, 아니면 신하 즉 정도전의 장난인지, 아니면 조선 사신의 조작인지 알 수 없다고 했는데 이는 태조에게 분명히 해명하라는 주문이었다.

더구나 홍무제는 자신을 모욕하고 희롱하는 글귀 작성에 연루된 모든 사람을 명나라에 압송하라 요구했는데 이는 아무리 황제라고 해도 오만방자한 횡포이자 협박이 아닐 수 없었다. 왜냐하면 이것은 만약 태조가 연루됐다면 태조마저도 압송하라는 요구와 마찬가지인데 이런 요구는 인접국의 국왕에게 강요하기 어려운 외교 결례였다.

앞뒤 정황으로 볼 때, 당시 홍무제는 지난해 10월의 표문과 11월의 표문 모두를 정도전이 작성한 것으로 확신하고 있었다. 따라서 홍무제는 혹 태조가 이런 사정을 잘 모를지도 모른다고 짐작했고, 그래서 정도전의 잘못을 지적하며 반드시 그를 압송하라 요구했던 것이라 할 수 있다.

이런 사실은 정도전을 보호하기 위해 그 대신 김약항을 압송한 것이 홍무제의 분노를 누그러뜨리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불타오르게 할 것임을 예고했다. 분명 홍무제는 자신을 모욕하고 희롱하는 글귀를 표문에 넣은 장본인이 정도전이라고 확신하고 있었다. 그것은 다른 사람이 아니라 조선 사신이 직접 밝힌 사실이었기 때문이다.

홍무제의 뿌리깊은 ‘승(僧)·적(賊)’ 콤플렉스


▎제2차 왕자의 난 이후 세제(世弟)의 위(位)에 오르고 있는 정안대군 내외. 정안대군(유동근 분)의 오른쪽은 훗날 원경왕후가 되는 민씨 부인(최명길 분)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태조가 정도전을 보호하기 위해 그는 표문 작성에 관여하지 않았다고 변명하며 다른 사람을 보낸다면 홍무제는 분명 태조가 자신을 속이려 한다고 생각하며 더더욱 분노할 것이었다.

1396년(태조 5) 6월 11일, 명나라 사신 일행이 한양에 도착했다. 태조가 정도전 대신에 압송한 김약항이 남경에 도착해 제출한 해명서를 받아본 후에 홍무제가 보낸 사신이었다. 예상대로 홍무제의 분노는 전혀 풀리지 않았다. 홍무제는 정도전을 압송하라는 기왕의 요구를 되풀이하는 것에서 더 나아가 명나라에 억류한 조선 사신들의 가족도 함께 압송하라고 요구했다.

그런데 이런 요구 이외에 홍무제는 태조에게 의외의 제안을 했다. 혼인을 맺자는 제안이었다. 자신에게는 손녀가 많이 있고 태조에게는 손자가 많으니 이들 중의 한 명을 서로 혼인시키자는 것이었다. 요컨대 혼인동맹을 맺자는 제안이었다.

홍무제가 정도전을 압송하라 요구하면서 혼인동맹을 제안한 이유는 분명했다. 태조의 본심을 떠보기 위함이었다. 홍무제는 두 차례 표문을 정도전의 장난이라 확신하고 있었는데 태조가 보낸 해명서에는 정도전이 전혀 관계없다는 내용이 있었다.

그렇다면 이 해명서는 태조의 본의인가, 아니면 정도전의 장난인가? 만약 태조의 본의가 그렇다면 결국 자신을 모욕하고 희롱한 글귀는 그 같은 태조의 본의를 받아 정도전이 표현한 것에 불과했다. 그렇다면 태조가 자신을 모욕하고 희롱한 주범이며, 그것은 곧 태조가 자신을 황제로 인정하지 않은 것이므로 결국 자신의 혼인동맹을 거절하리라 예상할 수 있었다. 그다음은 물론 전쟁이었다.

반대로 태조의 본의가 그런 것이 아니라면 결국 자신을 모욕하고 희롱한 글귀는 정도전의 장난이 될 수밖에 없었고, 태조는 그런 사실을 몰랐을 가능성이 높았다. 그렇다면 이제라도 그런 사실을 알게 된 태조가 자신의 혼인 제안을 받아들이면서 정도전을 압송할 것이라 예상할 수 있었다. 그 다음은 물론 양국 간의 평화우호였다. 결국 홍무제는 태조에게 전쟁이냐 아니면 정도전이냐 양자택일을 강요한 셈이었다.

이런 강요에 조정 신료들은 두 편으로 갈렸다. 한쪽은 정도전을 보내야 한다고 주장했고, 다른 쪽은 보내지 말아야 한다고 주장했다. 보내지 말아야 한다는 쪽은 물론 정도전과 그 측근들이었다. 반면 보내야 한다는 쪽은 정안군 즉 이방원과 그 측근들이었다.

그런데 당시 조선 사람들은 홍무제를 그토록 분노하게 만든 글귀가 도대체 무엇인지, 또 무엇 때문에 홍무제가 그런 글귀에 그토록 분노하는지 전혀 알지 못했다. 훗날 알려진 일이지만 홍무제의 어릴 적 경험이 문제였다. 홍무제는 가난한 농민의 아들로 태어났고 어려서 고아가 됐다. 살길이 없자 어린 홍무제는 스님이 돼 걸식하며 살았다. 조금 나이가 들어서는 홍건적에 투신했다. 이렇게 살다 보니 제대로 공부를 하지 못했다. 그래서 황제가 된 후 홍무제는 자신의 과거와 미천한 공부에 큰 열등감을 느꼈다.

이 결과 홍무제는 자신에게 올라오는 상소문에 스님을 의미하는 승(僧) 또는 도적을 의미하는 적(賊) 같은 글자를 보면 과민 반응했다. 뿐만 아니라 승과 같은 중국 발음인 생(生) 또는 적과 같은 중국 발음인 칙(則)이라는 글자에도 지나치게 민감했다. 지식인들이 자신을 중이나 도적으로 멸시하며 황제로 인정하지 않는다고 지레짐작했던 것이다.

그 결과 홍무제가 황제에 오른 후, 명나라에서는 승·적·생·칙 같은 글자가 들어간 상소문을 홍무제에게 올렸다가 이유도 모른 채 죽어나간 사람이 부지기수였다.

제 발로 명에 간 이방원 측근 하륜과 권근


▎<용의 눈물>에서 은밀한 대화를 나누고 있는 정도전(김흥기 분)과 신덕왕후 강씨(김영란 분). 정도전·남은 등에 힘입어 세자로 책봉된 신덕왕후의 막내아들 방석(의안대군)은 제1차 왕자의 난 때 목숨을 잃었다. / 사진·중앙포토
홍무제가 정도전을 압송하라 요구한 것도 사실은 이 때문이었다. 따라서 정도전이 명나라에 가서 앞뒤 정황을 잘 설명하면 해명될 가능성도 있었다. 하지만 그 이유를 전혀 알지 못하는 정도전은 절대로 명나라에 가지 않으려 했다.

그런데 실록에 의하면 명나라 사신이 왔을 때 무슨 사정인지 정도전에게 중병이 들었다고 한다. 배가 마치 북처럼 부풀어오르는 병이었다. 이것은 진짜일 수도 있었지만 꾀병일 수도 없었다. 어쨌든 태조는 일단 이것을 핑계로 정도전을 보내지 않으려 했다.

하지만 명나라 사신은 정도전이 완쾌될 때까지 기다리겠다고 하며 한 달이 지나도록 움직이지 않았다. 이런 와중에 정도전의 핵심 측근인 남은은 절대 정도전을 보내면 안 된다는 상소를 올렸다. 태조는 강제로 정도전을 압송하든가 아니면 홍무제의 요구를 딱 잘라 거절하든가 결단을 내려야만 했지만 그렇게 못하고 시간만 끌었다.

그때 과감하게 먼저 결단을 내리고 움직인 사람들은 정안군 즉 이방원 쪽 사람들이었다. 정안군의 핵심 참모인 하륜이 명나라에 직접 가서 해명하기로 한 것이었다. 아울러 권근 역시 표문을 지은 모든 책임을 자신이 지고 해명하겠다며 자청하고 나섰다. 하륜과 권근 등은 1396년(태조 5) 7월 19일 한양을 떠나 남경으로 향했다. 명 사신이 정도전 압송을 요구한 지 한 달여 만이었다.

하륜과 권근의 명나라행(行)은 두 가지 면에서 정안군에게 큰 기회였다.

첫째는 대의명분에서 정도전 쪽을 압도할 수 있었다. 홍무제의 압송 요구에 정도전은 겁을 먹고 병을 핑계로 응하지 않았다. 반면 하륜과 권근은 압송요구가 없는데도 자청해 갔다. 당연히 정도전은 겁쟁이가 됐고 하륜과 권근은 용기 있는 사람이 됐다.

둘째로 홍무제가 문제삼는 표문의 글귀가 괜한 생트집인지 아니면 정말 문제가 있는 것인지 확인할 수 있었다. 이는 조선이 명나라와 전쟁을 하느냐 마느냐를 최종적으로 결정하기에 앞서 반드시 확인해야 할 정보였다. 이런 핵심 정보를 정도전 쪽이 아닌 정안군 쪽 사람들이 먼저 확보하게 된다는 것 자체가 정안군에게 큰 기회였다.

하륜과 권근은 9월 11일, 남경에 도착했고 곧 홍무제를 만났다. 그때 홍무제는 하륜에게 왜 정도전은 오지 않았느냐고 물었고 하륜은 병 때문에 못 왔다고 하면서 그 대신 권근이 자청해서 왔다고 대답했다. 그러자 홍무제는 권근에게 조선에서 보낸 표문을 꺼내 보이면서 “조선의 몇몇 유생이 감히 나를 희롱하고 모욕하는 글귀를 지어 두 나라 사이의 틈을 만들고 백성의 재앙을 일으킨단 말인가?” 하고 따졌다.

“정도전을 보내지 않겠다면 전쟁 각오해라”


▎제1차 왕자의 난 이후 옥좌에서 물러난 태조 이성계가 국사(國師) 무학대사(박병호 분, 오른쪽에서 둘째)와 여진족 출신의 의제(義弟) 퉁두란(佟豆蘭, 강인덕 분)의 위로를 받고 있다.
이로 본다면 홍무제는 괜한 생트집을 잡는 것이 아니라 표문의 특정 글귀를 문제삼는 것이 분명했다. 더 이상의 기록이 없어 확인할 수는 없지만 그때 홍무제는 표문의 특정 글귀를 가리키며 따졌을 것이 분명하다.

당시의 정황으로 보건대 하륜과 권근은 남경에 도착한 직후 홍무제가 왜 표문을 문제삼는지 은밀하게 탐문했을 것이다. 그리고 그 이유가 열등감의 발로라는 사실도 알아챘을 것이다. 그런 준비가 있었기에 하륜과 권근은 홍무제의 물음에 당황하지 않고 곧바로 대응할 수 있었다.

권근의 신도비명에 의하면 홍무제의 질문에 권근은 “소국이 대국을 섬기려면 표문이 없으면 되지 않는데 신 등은 저 바다 귀퉁이에서 성장해 배운 것이 신통치 못한지라 우리 왕의 충성을 황제에게 각별히 아뢰지 못했는데 이는 진실로 신 등의 죄이지 우리 국왕의 죄가 아닙니다”라고 대답했다.

이어서 권근은 태조 이성계가 위화도회군을 한 사실을 들어 태조 이성계는 절대로 홍무제를 희롱하거나 모욕할 사람이 아니라고 누누이 변명했다. 이런 해명 덕분에 홍무제는 태조에 대한 의심을 풀었다.

그렇지만 정도전에 대한 의심을 풀지는 않았다. 그것은 하륜과 권근이 태조를 위해서는 적극 해명했지만 정도전에 대해서는 병들었다는 말 이외에는 해명하지 앉았기 때문이다. 어쨌든 태조에 대한 의심이 풀렸다고 판단한 하륜은 먼저 귀국길에 올라 11월 4일 한양에 도착했다. 홍무제는 하륜 편에 외교문서를 보냈는데 그 문서에서 남경에 억류한 조선 사신들을 석방하겠다는 뜻을 전했다. 뒤이어 1397년(태조 6) 3월 8일에 권근도 무사히 귀국했다. 이렇게 해서 홍무제의 오해에서 비롯된 표문 문제는 해결되는 듯했다.

그러나 뜻하지 않은 일이 또 벌어졌다. 홍무제가 제안한 혼인 문제 때문이었다. 1396년(태조 5) 6월 11일에 도착한 명나라 사신을 통해 홍무제의 혼인 제안을 받은 태조는 그에 대한 회답 사신을 11월 23일에 보냈다. 그 당시는 하륜이 귀국해 홍무제의 오해가 풀렸음을 알렸기에 혼인 제의를 수락한다는 의미로 말 12필을 선물로 보냈다. 이 말들은 1367년(태조 6) 봄 남경에 도착했다.

홍무제는 자신이 직접 말들을 조사했는데 말안장 등에서 천(天) 자를 거꾸로 쓰고 또 현(玄)과 십(十)자를 쓴 종이가 발견됐다. 이를 본 홍무제는 “저 사람들이 어째서 나를 이렇게 무시한단 말인가?”라며 대로했다.

말안장에 글자를 쓴 종이가 첨부된 이유는 말을 구별하기 위해 천자문을 써 붙였기 때문일 가능성이 높았다. 하지만 홍무제는 곡해(曲解)했다. 거꾸로 씌어진 천(天) 자를 보고 분노했다는 사실에서 홍무제는 태조가 자신을 죽게 하거나 희롱하고자 이렇게 했다고 의심했던 듯하다.

홍무제는 곧바로 혼인 파기를 선언하면서 정도전을 압송하라는 외교문서를 태조에게 보냈다. 만약 정도전을 압송하지 않으면 전쟁을 불사한다는 협박도 있었다. 심지어 홍무제는 분풀이 차원에서 명나라에 억류했던 조선 사신들을 집단 처형하기까지 했다.

‘요동정벌’은 무지와 오해의 소산


▎태조 이성계의 어진(御眞). / 사진·중앙포토
정도전 압송을 요구하는 홍무제의 문서가 조선에 도착한 시점은 1397년(태조 6) 4월 17일이었다. 다음해 5월까지 홍무제는 정도전 압송을 요구하는 문서를 수 차례 보냈으며 협박 수위도 점점 높였다. 홍무제는 조선에서 오는 표문은 모두 정도전의 장난이라 확신했고 그 확신에서 조선을 침략할 가능성은 점점 높아졌다.

따라서 태조가 전쟁을 피하려면 정도전을 보내 해명하는 것이 제일 좋은 수였다. 하지만 정도전은 명나라에 가면 죽는다는 두려움 때문에 가려 하지 않았다. 무지와 공포의 소산(所産)이었다. 정도전은 명나라로 가는 대신 다른 수를 들고 나왔다.

첫째는 정안군 일파의 숙청이었다. 정도전은 자기 대신 명나라에 갔다가 무사히 돌아온 권근을 모함하고자 했다. 다른 사신들은 처형됐는데 권근만 살아 돌아온 것은 뭔가 수상하다는 명분이었다. 만약 이 모함이 성공한다면 자신을 명나라로 압송하라는 정안군 일파의 주장은 사라질 것이 분명했다. 하지만 태조는 권근의 충성심을 높이 사서 숙청하지 않았다.

그러자 정도전은 둘째로 요동정벌을 들고 나왔다. 명분은 국가 자존심과 영토회복 등 거창했다. 하지만 정도전에게 요동정벌은 크나큰 자기모순이었다. 고려 말에 정도전은 우왕과 최영의 요동정벌을 망국의 전쟁이라 반대하며 위화도회군을 주도했다. 그런 그가 갑자기 요동정벌을 들고 나온 것은 명나라로 압송되는 것을 회피하기 위한 술책이라는 비난에서 자유로울 수 없었다. 당연히 요동정벌에 대한 반대가 드높았다.

하지만 태조는 정도전의 요동정벌에 적극 동조했는데 이 또한 무지와 공포의 소산이었다. 1398년(태조 7) 6월부터 태조는 요동정벌 준비에 들어갔다. 자연히 반대 목소리도 높아졌다. 이런 갈등 상황에서 1398년(태조 7) 8월 26일 정안군은 제 1차 왕자의 난을 일으켜 정도전을 살해하고 태조를 왕좌에서 물러나게 했다. 명분은 정도전이 요동정벌을 준비하며 왕자들을 몰살시키려 했다는 것이었다.

돌아보면 제1차 왕자의 난 직전에 제기된 정도전의 요동정벌은 무지와 오해의 소산이었다. 정도전은 홍무제가 조선을 공격하기 위해 생트집을 잡으려 표문을 문제삼는다고 오해했다. 그래서 그런 홍무제에게 갔다가는 변명도 하지 못하고 개죽음을 당하리라는 공포심에 떨다가 요동정벌을 들고 나왔다.

<대학연의>는 무지와 오해에 대한 경계로 ‘격물치지(格物致知)’를 제시한다. 세상에 대해 무지하거나 오해하지 않기 위해서는 세상을 잘 살펴 정확한 지식을 쌓아야 한다는 것이 격물치지이다. 하지만 역사상 수많은 인물이 자신의 이익과 공포에 사로잡혀 격물치지를 제대로 못하고 무지와 오해에 떨다가 패가망신했으니 슬픈 일이다.

신명호 - 강원대학교 사학과를 졸업하고 한국학중앙연구원 한국학대학원에서 박사학위를 받았다. 현재 부경대 사학과 교수와 박물관장직을 맡고 있다. 조선시대사 전반에 걸쳐 다양한 주제의 대중적 역사서를 다수 집필했다. 저서로 <한국사를 읽는 12가지 코드> <고종과 메이지의 시대> 등이 있다.

201612호 (2016.11.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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