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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밀취재] 박근혜의 운명과 18년 정치 에피소드 

“1998년 이전부터 대통령이 목표” 

박성현 기자 park.sunghyun@joongang.co.kr
정계 입문 후 치러진 세 번의 대선에 모두 출마 선언해 의지 불태워…가장 먼저 진가를 알아본 최태민 부녀와의 유착관계가 몰락의 진원지였다

“저의 부덕과 불찰로 이렇게 큰 국가적 혼란을 겪게 돼 국민 여러분께 진심으로 송구스럽습니다.” 박근혜 대통령은 12월 9일 자신에 대한 탄핵소추안이 국회에서 가결된 뒤 열린 국무위원 간담회에서 이렇게 밝혔다. 대통령의 모든 권한은 즉각 정지됐고 헌법재판소가 탄핵소추 청구를 인용하면 파면된다. 1979년 박정희 전 대통령의 급작스런 서거로 쫓기듯 청와대에서 물러나온 박 대통령은 37년 만에 불명예 퇴진을 당할지도 모르는 처지로 내몰렸다.


▎박근혜 대통령이 2013년 2월 취임식을 마친 뒤 국회를 떠나며 손을 들어 인사하고 있다. / 사진·중앙포토
“사람들에 대해 더 많이 보면 볼수록 나는 내 개를 더 사랑하게 된다.”

18세기 프로이센 왕국의 제3대 국왕 프리드리히 2세(재위 1740~1786)는 인간에 대한 환멸을 이렇게 빗대 말했다. 프리드리히 대왕은 대표적 계몽주의 군주이자 독일에서도 가장 존경받는 위인 중 한 명으로 추앙받는다. 그는 합리적 국정을 통해 프로이센의 국력을 크게 신장시켰으며, 정예 독일군의 기틀을 닦아 근대화 초기의 유럽을 대표하는 제왕으로 꼽히는 인물이다. 하지만 맞을수록 강해진다는 생각에 빠진 부왕(프리드리히 빌헬름 1세)의 폭력에 시달리며 자라서 그런지 인간관계가 폐쇄적이고, 사람보다 개의 충성심을 더 신뢰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그래서 말년에 가족과 친지들이 세상을 뜨자 기르던 애견 그레이하운드를 심정적으로 가까이했다. 그가 남긴 이 말(“Je mehr ich von den Menschen sehe, um so lieber habe ich meinen Hund”)이 그의 절망의 깊이를 가늠케 한다.

국회에 의해 탄핵당한 박근혜 대통령도 측근 3인방(이재만·안봉근·정호성)이 옷을 벗으면서 썰렁한 관저에 홀로 남았다. 1970년대부터 호흡을 함께해온 최순실 씨는 영어의 몸이 됐다. 청와대로 들어올 때 서울 삼성동 주민들이 선물한 진돗개만 덩그러니 그의 옆을 지키고 있을 듯하다. 프리드리히 대왕이 그랬듯, 박 대통령 역시 고독의 심연을 헤매고 있을 것이다.

“탄핵 표결 하루 전 청와대에서 박 대통령과 마주앉았다. 대통령은 저에게 자신의 억울함을 20분 이상 호소했다.”

박근혜 대통령 탄핵소추안 가결에 따른 책임을 지고 원내 대표직을 사퇴한 새누리당 정진석 의원은 12월 12일 박 대통령과 만남을 이렇게 설명했다. 당시 박 대통령은 관련 자료를 들고 와 자신의 무고함을 호소했다고 한다. 세상은 그의 해명에 큰 관심을 두지 않는 듯하다. 대통령의 무지와 주변에 등장하는 인물들의 국정농단에 대한 국민의 분노가 훨씬 더 크기 때문이다.

“국회의원 한두 번 하려고 나오는 게 아니다”


▎1998년 대구 달성 보궐선거에서 당선된 뒤 선거 사무실에서 지지자 들의 축하를 받는 한나라당 박근혜 후보. / 사진·중앙포토
박 대통령을 아는 이들은 ‘최순실 게이트’를 보면서 평소 풀리지 않았던 의문점들이 하나둘씩 풀리기 시작했다고 말한다. 지금 시점에서 과거를 복기해보면 무릎을 탁 치게 하는 에피소드가 적지 않다.

박정희 대통령이 김재규 중앙정보부장의 총탄에 유명을 달리한 1979년 10·26사태 이후 칩거 상태에 있던 큰영애 박근혜는 1998년 대구 달성 보궐선거로 정치권 전면에 등장한다. 만년 여당에서 졸지에 야당 신세로 전락한 한나라당(새누리당)이 아성인 대구·경북을 사수하고자 박근혜 후보를 긴급 투입한 것이다.

당시 박근혜 후보 진영을 취재한 한 언론인은 핵심 측근에게 들었다는 말을 다음과 같이 전했다. “국회의원 보궐선거에 출마한 박근혜 후보의 대리인 격인 인사를 만났는데 좀 황당한 말을 하더라. ‘국회의원 한두 번 하려고 나오는 게 아니다’라고 했다. 박근혜 후보가 국회의원 배지나 달려고 출마하는 건 아니라는 말이다. ‘우리는 대통령을 꿈꾼다’는 뜻이었는데, 나는 속으로 ‘웃기는 사람’이라고 치부했다. 20년 가까이 칩거하다 불쑥 보궐선거에 출마하면서 대통령 운운하다니….”

이때는 그 누구도 박근혜 후보가 마음속에 그렇게 크고 집요한 야심을 품었으리라 상상하기 어려웠을 법하다. 하지만 이후 정치인 박근혜의 행보는 일관되게 청와대를 향했다. 정치 입문 후 치러진 세 번의 대선(2002년, 2007년, 2012년)에서 그는 모두 출마를 공식 선언했다. 대통령을 꿈꾼다는 말은 빈말이 아니었으며, 2012년 대선에서 끝내 꿈을 성취했던 것이다.

당시 유력한 대선 후보였던 이회창 한나라당 총재와의 갈등과 긴장 관계도 그래서 형성됐는지 모른다. 이 총재에게도 박근혜 의원은 불편한 존재였다. 2001년 3월 당시 여소야대 국면에서 집권당인 민주당은 자민련과 민국당을 끌어들여 3당 정책연대를 구성했다. 이를 놓고 한나라당은 “인위적 정계개편 및 장기집권 시나리오의 일환이자 여소야대 민의에 정면으로 도전하는 행위”(김기배 사무총장), “이 정권도 권력 나눠먹기 내분으로 종말을 고할 것”(정창화 원내총무)이라는 맹공을 퍼부었다.

하지만 한나라당 부총재로 있던 박근혜 의원은 “총선 민의를 왜곡하지 않는 선에서의 정당 간 정책연대는 나무랄 일이 아니다”라고 당론을 거스르는 폭탄발언을 했다. 그는 “정당이 국회에서 세를 규합해 정책을 관철하고 법안을 통과시키는 것은 정치적 행위로서 이를 탓할 바는 아니다”라고 자신이 속한 정당의 일임에도 ‘제 3자적 입장’을 취했던 것이다.

박근혜가 말한 ‘성공하는 이의 자격요건 7가지’


▎한나라당 시절의 박근혜 의원은 이회창 총재와 갈등과 협력 관계를 형성했다. / 사진·중앙포토
박 대통령에게 늘 비판의 화살로 돌아오던 ‘유체이탈화법(자신과 직접적으로 연관된 사건이나 이야기를 남의 이야기를 하듯 말하는 화법)’은 정계 입문 초기에 그 단초를 찾아볼 수 있다. 나아가 “어느 정당도 원내 과반수를 확보하지 못한 상황에서 법안 하나라도 가결하려면 정당 간 연대가 불가피한 실정 아니냐”고 되묻고 “총선 민의 왜곡 등 정파적 야욕에 3당 정책연대를 악용하지 않는다면 정당 간 정책연대 그것만 가지고 왈가왈부하는 것은 적절치 못하다”고 조목조목 당 지도부의 원내전략을 비판했다. 이 발언은 삽시간에 정치권의 화제로 번졌으며, 깜짝 놀란 한나라당 지도부는 이 발언의 진의와 배경을 파악하느라 하루 종일 분주했다.

기성 정치권과는 각을 세우던 박 의원이었지만 대(對)언론 관계에는 공을 들였다. 언론인들도 오랜 칩거를 깨고 원내에 진입한 박정희 전 대통령의 딸 박근혜 의원에게 비상한 관심을 보였다. 언론인들과 상견례를 겸함 만찬장에서 박 의원은 ‘성공하는 방법’에 대한 퀴즈로 분위기를 이끌어갔다. 박 의원은 “세상에서 뜻을 이루자면 반드시 갖춰야 할 자격요건이 있다”면서 쌍기역(‘ㄲ’)으로 시작하는 외글자 7개를 대보라고 제안했다. 훗날 박 의원이 사석에서 자주 리바이벌하던 ‘끼’ ‘깡’ ‘꼴’ ‘꾀’ ‘꾼’ ‘끈’ ‘꿈’이 그 답이다. 좀 썰렁한 수수께끼 같지만, 이게 박 의원이 언론인들과 관계를 맺어가는 방식이었다.

당 운영과 정국 대응 방식 등으로 이회창 총재를 정점으로 하는 한나라당 지도부와 마찰을 빚던 박근혜 의원은 결국 2002년 2월 탈당해 한국미래연합을 창당했다. 최순실 씨의 남편이던 정윤회 씨가 박근혜 한국미래연합 총재의 비서실장으로 활동한다. 이 즈음 정치권에서는 박근혜 총재의 뒤에서 누가 자문그룹으로 활동하는지, 전략통은 누구인지 등에 대해 촉각을 곤두세우기도 했다. 김대중 정부 시절 여권 인사들은 물론 한나라당 의원들도 사석에서 이런 궁금증을 토로했다. “박근혜 의원이 누구의 자문을 받는지 아는가? 아무리 두드려봐도 뒤에서 백업하는 이들이 안 보인다. 그런데도 박근혜는 정치적 행보가 정확하고 흔들림이 없다. 재선 의원으로 그런 스탠스가 나오기 어렵다. 도와주는 그룹이 있는데 누구인지 도통 모르겠다.”

게다가 자연인 박근혜와 정치인 박근혜는 천양지차였다는 게 주변인들의 경험담이다. 정계 입문 전 박 대통령과 접촉한 인사들은 그의 변신에 어안이 벙벙했다. 박 대통령은 야인으로 칩거하던 시절 서울 양재동의 한 테니스클럽 회원으로 활동했다고 한다. 그와 운동을 함께했다는 한 인사의 기억이다. “박근혜 씨는 운동도 얌전하게 하거니와 웃더라도 소리를 내는 일이 없을 정도였다. 그런 그가 1998년 달성 보궐선거에 나선다고 할 때 다들 깜짝 놀랐다. 조용하고 내성적이던 그가 그 험한 정치판에 뛰어들 생각을 어떻게 했나 싶었다. 그는 정치와 전혀 무관해 보이는 사람이었기 때문이다.”

이후 정치인 박근혜 파워의 원천을 찾는 연구가 줄을 이었다. 2010년 당시 진보논객으로 불리던 5인이 <박근혜 현상>이라는 책에서 3김정치 이래 독보적 대중성을 확보해 나가던 박근혜 분석을 시도했다. 박근혜에 대한 호불호를 떠나 하나의 정치현상, 시대현상으로서 ‘박근혜 현상’을 탐구했던 것이다. 그 원인 또는 동력으로 지역구도, 원칙의 리더십, 중도적 서민주의, 진정성의 정치에서 박정희 신화, 공주의 정치 등 그에게 유리한 각종 요소가 제시됐다.

박 대통령은 2012년 대선에서 승리하면서 그렇게 꿈꾸던 대통령 자리에 올랐다. 결과론적으로 보자면 ‘박근혜’의 상품성을 가장 일찍, 또 정확하게 꿰뚫어본 이는 최태민과 최순실 부녀라고 하겠다. 박정희 대통령 시해 이후에도 박 대통령은 최태민 부녀의 시야에서 단 한 번도 벗어난 적이 없었다. 나아가 정신적, 물질적 후견인으로 오랜 세월을 함께하는 과정에서 지금의 국가적 불행을 잉태하는 유착관계를 꾸리기에 이른 것이다. ‘최순실 게이트’에서 나타나듯 최순실 일가는 박 대통령을 보필 내지 관리하는 주체로서의 인상을 강하게 풍긴다.

“묻지도 않는 걸 우리가 어떻게 먼저 입에 올리겠나”


▎2002년 ‘한국미래연합’ 창당 발기인대회에서 의장으로 선출된 박근혜 의원. / 사진·중앙포토
오랜 세월 박 대통령 주변에서 어른거리던 최태민·순실 일가의 그림자를 포착하지 못한 정치권과 달리 정보기관은 박 대통령을 지속적으로 주시한 듯하다. 김대중 정부 청와대에서 고위직을 지낸 한 인사에 따르면 박 대통령과 최태민 일가의 관계는 진작부터 정부기관의 안테나에 잡혔다고 한다. 이 인사는 “김대중 대통령은 박정희 전 대통령과 역사적 화해를 한 까닭에 1997년 집권 후 사정기관을 통해 박정희·박근혜 가족의 뒤를 캐거나 밟는 일은 하지 않았다”면서도 “이전 정부의 자료는 들여다볼 기회가 있었는데, 최태민 일가와 박근혜 씨는 내왕이 잦은 것으로 나오더라”고 증언했다. 박 대통령이 원내에 진입하던 1998년 이전의 행적을 역대 정권이 사정기관을 통해 파악하고 있었음을 시사한다.

그럼에도 최근까지도 최태민 일가와 박 대통령의 유착관계는 베일에 싸여 있었다. 이는 국회 입문 당시부터 몸에 밴 박 대통령의 보안의식도 한몫한 것으로 보인다. 박 대통령 측근인사의 말이다. “박 대통령은 국회의원 시절부터 공사 구분에 철저했다. 사적 용무는 자신이 직접 처리했다. 가족이나 친지에게 하는 전화는 자신이 직접 걸었고, 한 번도 비서진에게 전화 연결을 지시한 적이 없는 걸로 안다.”

이를 뒤집어 보면 철석 같은 신임을 보낸 ‘국회 4인방’ ‘청와대 3인방’과도 때론 거리를 둔다는 해석이 가능하다. 실례로 2009년 박근혜 의원의 미국 샌프란시스코 방문을 수행한 기자들은 사소하지만 뜻밖의 장면을 목격했다. 현지의 한인 기업을 방문한 박근혜 의원에게 기업주는 방명록을 남겨달라고 요청한다. 회사가 제공한 백지에 방문 소감을 써 내려가던 박 의원은 글자를 잘못 썼던지 새 용지를 받아 마무리 지었다. 이때 옆에 있던 비서가 박 의원이 옆에 버려둔 용지를 집으려고 팔을 내밀자 박 의원이 가볍게 제지했다고 한다. 그러고는 자신이 직접 그 용지를 반듯하게 두 번 접어 핸드백에 넣더라는 것이다. 이 장면을 목격한 한 언론인은 “자신과 관련한 물품이나 정보는 직접 챙기는 습성이 몸에 밴 이유도 있겠지만, 한편으로는 비서에게 자신의 흔적이 담긴 용지를 넘길 수 없다는 심사로도 읽혔다”고 말했다.

게다가 박 대통령이 속한 조직의 참모들은 답답하리만큼 경직되고 윗사람의 의중을 따르는 편이었다. 한 참모는 “위에서 묻지도 않는 걸 우리가 어떻게 먼저 입에 올리겠나”라며 심부름하는 철저한 비서로서의 기능을 강조했다. 그렇다 보니 좀처럼 이해하기 힘든 일도 벌어진다.

2012년 10월 26일 오전 서울 동작동 국립현충원 박정희 전 대통령 묘역에서 거행된 제33주기 추도식에서 박근혜 당시 새누리당 대선 후보가 유족대표로 행한 인사말이 대표적 사례다. 박 후보는 “조금 후면 우주강국의 꿈을 실은 나로호 3차 발사가 있다. 과학입국을 통해 부강한 나라를 만들고자 없는 살림에도 카이스트와 연구소들을 만들고 과학에 깊은 애정을 쏟으셨던 아버지께서도 아마 나로호 3차 발사를 축원하시리라 생각한다”고 말했다. 나로호는 연료 주입 연결부위 이상으로 한 시간 전에 발사 연기가 확정된 상황이었다.

‘실장님, 왜 대면보고를 요청하지 않나요?’


▎11월 29일 청와대 브리핑룸에서 3차 대국민 담화를 마치고 돌아서는 박근혜 대통령.
추도객 중에는 박 후보의 발언에 고개를 갸웃하는 이도 적지 않았을 것이다. 이미 끝난 사안을 놓고 “조금 후면 발사가 있다”는 식으로 뒷북을 친 것이다. 미리 작성된 연설문 원고를 들고 행사장에 입장한 박 후보야 그렇다손 쳐도 원고 내용을 아는 참모들은 왜 아무도 수정하려 들지 않았는지 의아할 따름이었다. 박 후보의 한 참모는 기자에게 “나로호 발사가 연기됐죠?”라고 확인까지 했다. 박 후보는 발사 연기 사실을 전혀 보고받지 못한 채 연단에 올랐고, 참모들 중 누구도 박 후보에게 달려가 관련 사실을 보고하지 못한 것이다. 당시 박 후보 진영의 순발력, 상황대처 능력이 떨어지거나 보고체계가 엉망이라고밖에 해석할 도리가 없었다.

어떤 연유에서인지 박 대통령의 참모들은 이미 다 만들어놓은 자료의 배포도 누군가의 허락을 얻어야 한다는 인상을 주는 경우가 있었다. 월간중앙은 2011년 한나라당 유력 대선 주자로 분류되던 박근혜 의원의 대선을 앞둔 SNS 및 온라인 홍보 방안을 취재한 일이 있다. 답변서를 주기로 약속한 시일에 임박해서도 의원비서실은 감감무소식이었다. 거듭된 독촉전화에도 “자료 정리는 끝났다. 곧 보내드리겠다”는 말만 되풀이할 뿐 아무런 조치도 취하지 못하고 있었다. 답답해진 기자는 직접 의원회관을 찾았다. 담당자는 “아직 위에서 컨펌을 받지 못해 대기 중”이라고 말했다. 진작 답변자료는 완성했지만 OK 사인이 떨어지지 않아 붙잡고 있다는 것이었다. 당시의 질문과 답변이 정치적으로 예민한 것도, 기밀을 요하는 것도 아니었기에 “비서진의 자율성이 유난히 떨어지는 의원실” 정도로만 여겼다. 최근 최순실 씨가 박 대통령의 연설문·보도자료 작성과 수정에 관여했다는 사실이 언론 보도와 검찰 수사 등을 통해 밝혀졌다. 지금 상황에서 당시를 유추해보면 허가를 득해야 하는 대상은 박근혜 의원이 아니라 외부에 있는 최순실 혹은 정윤회 씨였을지도 모를 일이다.

상황이 이렇다 보니 박근혜 정부 출범 후 청와대에서도 웃지 못할 일들이 벌어졌다는 후문이다. 측근 참모들조차 박 대통령이 짜준 틀에서 한 발짝도 벗어나지 않으려고 하다 보니 외부에서 온 비서들은 더 몸을 사렸다. 청와대에서 생산되는 주요 보고서나 발표문이 대통령 의중에 정통하다는 3인방(이재만 총무, 정호성 제1 부속, 안봉근 국정홍보비서관), 특히 정호성 비서관을 거치는 경우가 늘었던 것이다. 어떤 때는 사소한 자료를 들고 와 일독을 요청하는 경우도 있었다고 한다. 이처럼 여과 과정을 거쳐야 안심이 된다고 생각하는 비서관들도 더러 있었다는 전언이다.

청와대가 역동적으로 돌아갈 리 만무했다. 정권 출범 첫해부터 청와대비서실의 소통 부재와 엇박자 행보를 보면서 강원택 서울대 (정치학과) 교수는 “지금의 청와대는 비서실장조차 대통령의 눈치를 보는 것 같다”고 한마디했다. 실세 중의 실세로 불리던 역대 정부 청와대비서실장과는 격이 달라 보였던 것이다.

이와 관련해 청와대 사정에 정통한 한 여권 관계자는 다소 뜻밖의 말을 입에 올렸다. “현 정부 역대 비서실장 중에는 대통령에게 직접 보고하기보다 부속실에 보고를 해달라고 요청하는 경우가 있었다. 그래서 부속실에서 ‘직접 보고하세요’라고 권유하는 일도 나왔다. 그나마 A 비서실장이 대면보고를 많이 하는 편이었다. A 실장은 이러저러한 것을 대면보고해야겠다며 먼저 나섰다. 그에 비해 B 비서실장은 좀처럼 대면보고를 신청하지 않았다. 그래서 부속실에서 B 실장에게 ‘왜 대면보고를 신청하지 않느냐’고 묻는 경우도 있었다. 박 대통령과 전화로 용무를 다 처리한다는 답이 돌아왔다고 한다.”

“원래 내성적이라 정치와 맞지 않는 사람”


▎10월 20일 청와대서 열린 대통령 주재 수석비서관 회의. 박 대통령은 미르재단과 K 스포츠 재단에 대한 입장을 밝혔다. / 사진·중앙포토
이 관계자는 청와대 수석들도 박 대통령에게 대면보고를 하는 경우는 드물 것이라고 단언했다. 심지어 미르재단·K스포츠재단 등의 모금활동을 주도한 안종범 전 정책조정수석도 박 대통령과 독대 또는 대면보고한 경우는 거의 없었으리라는 게 그의 관측이다. 이 관계자는 “하루에 몇 차례씩 대통령의 전화를 받아 업무를 처리하는 정책조정수석이 굳이 대면 보고를 하려 들겠느냐 “고 반문했다.

박 대통령은 2015년 신년기자회견에서 기자로부터 ‘장관들과 독대 또는 대면보고를 늘릴 의향은 없느냐’는 질문을 받았다. 이에 박 대통령은 “전화 또는 e메일이 없던 옛날에는 대면보고만 해야 할 때가 있었다”면서 “지금은 대면보고보다 전화 등이 더 편리할 수 있다”는 입장을 밝혔다. 나아가 “대면보고가 그렇게 중요하다고 생각하면 대면보고를 늘려가겠지만 (청와대 비서진을 돌아보며) 그게 필요하다고 생각하느냐”라고 되묻는 등 기존의 서면보고 체계를 바꿀 의향이 없음을 내비쳤다. 청와대 비서진들은 서면보고를 선호하는 대통령의 의중을 간파하고 그에 맞게 처신했을 가능성이 크다. 이와 관련해 정두언 전 의원은 “대면보고를 하면 박 대통령과 최순실에게 동시에 할 수 없으니 서면으로 정리해오면 전달하겠다는 것”이라고 비꼬기도 했다.

대면보고 기피와 관련해 박 대통령과 정치를 같이해온 복수의 인사들은 “원래 내성적이라 정치와 맞지 않는 사람”이라고 묘사하기도 했다. 원래 정치와 거리가 있는 사람이 어떻게 하다 보니 정치를 하게 됐고, 지금 대통령으로 일하지만 적성은 아니라는 것. 이들은 “정치인이라면 모두를 아우르고 앞장서길 좋아해야 하는데 박 대통령은 전혀 안 그렇다”고 그 이유를 설명했다.

구속된 정호성 전 1부속비서관은 국회 비서관 시절부터 류마티스 관절염으로 고생했다. 박근혜 정부 출범 이후 일에 치이다 보니 청와대 사무실 소파에서 잠을 청하는 경우도 잦았다고 한다. 그래서 “허리가 더 안 좋아졌다”고 한 사석에서 말하기도 했다. 그나마 술과 담배를 안 하고 현미·채식 등 식이요법에 의존해 통증을 완화한다는 것이었다. ‘이렇게 열심히 일하는 걸 꼼꼼하게 기록해 후대에게 전해야 하지 않겠느냐’고도 물었다. 그는 “내가 있었던 일에 대해 이러저러하게 말한다면 기본이 안 된 것”이라며 손사래를 쳤다. 당시는 청와대 비화, 기밀을 외부에 발설하는 건 비서의 도리가 아니라는 일반론으로 받아들였지만, 지금 돌이켜보면 ‘기록해서는 안 될 속사정’도 많았던 듯하다.

의원 초년병 시절 박 대통령은 성공하는 이의 자격요건으로 ‘끼’ ‘깡’ ‘꼴’ ‘꾀’ ‘꾼’ ‘끈’ ‘꿈’ 등 7가지를 제시했다. 박 대통령이 빠뜨린 하나가 있다. 바로 ‘끝’이다. 진정한 성공은 마무리를 잘하는 데 있지 않을까?

- 박성현 기자 park.sunghyun@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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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01호 (2016.12.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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