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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집중분석] 28년 만에 청문회에 불려 나온 재벌 ‘회장님들’ 

“자발적인 건 아니지만… 대가 바라고 한 일도 아니다” 

유지혜 기자 yoo.jeehye@joongang.co.kr
‘최순실 청문회’에 9명 출석, 미르재단과 K스포츠재단 등 자금 출연에 대해 해명…강제성·대가성 여부 등 진실 규명 미흡, 이재용 부회장 빈축 샀지만 미래전략실 해체 약속

2016년 12월 6일은 재계에 치욕스러운 날로 기록됐다. 5공 청문회’가 열렸던 1988년 12월 이후 28년 만에 재계의 총수(오너)들이 대거 청문회 자리에 섰다. 최순실 국정농단 의혹사건 진상규명을 위한 국회 국정조사 특별위원회 1차 청문회에는 이재용(48) 삼성전자 부회장, 정몽구(78) 현대자동차그룹 회장, 최태원(56) SK그룹 회장, 구본무(71) LG그룹 회장, 신동빈(61) 롯데그룹 회장, 김승연(64) 한화그룹 회장, 조양호(67) 한진그룹 회장, 손경식(77) CJ그룹 회장, 허창수(76) GS그룹 회장(전국경제인연합회 회장) 등 재벌 총수 9명이 호출됐다.


▎재벌 총수들이 12월 6일 국회에서 열린 ‘박근혜 정부의 최순실 등 민간인에 의한 국정농단 의혹 사건 진상 규명을 위한 국정조사 특별위원회’에서 증인 선서를 하고 있다. 왼쪽부터 손경식·구본무·김승연· 최태원 회장, 이재용 부회장, 신동빈·조양호·정몽구· 허창수 회장. / 사진·중앙포토
“모두가 하니 따라서 냈다.”(손경식 CJ 회장)

“기업 입장에서는 정부 정책에 따를 수밖에 없는 게 현실이다.”(LG 구본무 회장)

2016년 12월 6일 국회 본청 245호실에선 한국 대기업의 민낯이 그대로 드러났다. ‘최순실 국정농단 국정조사 청문회’에 불려 나온 9개 그룹 총수들은 정부의 압력 앞에선 글로벌 기업의 위상도 소용 없다는 점을 보여줬다. 28년 전인 1988년 일해재단 청문회 때와 달라진 게 없었다. 세무조사, 검찰 수사…. 정부가 기업을 휘두를 수 있는 무기는 여전히 막강하기 때문이다.

각 기업이 원하는 민원 사항에서 혜택을 받으려고 거액을 출연한 것 아니냐는 지적을 극구 부인하는 것까지도 일해재단 청문회 때와 같았다. 1988년 청문회 당시 “1차는 날아갈 듯 냈고, 2차는 이치에 맞아서, 3차는 편하게 살려고 냈다”고 말한 정주영(1915~2001) 전 현대그룹 명예회장의 데자뷔(기시감·旣視感)였다. 하지만 28년 전과 다른 것도 있었다. 이번처럼 재벌 총수 9명이 한꺼번에 증인으로 국정조사에 출석한 것은 처음이란 사실이다. “재벌도 국정농단의 공범”이라는 ‘촛불 민심’이 만들어낸 진풍경이었다.

미르·K스포츠재단 자금 출연 ‘강제성’ 일부 인정


▎‘박근혜 정부의 최순실 등 민간인에 의한 국정농단 의혹 사건 진상 규명을 위한 국정조사 특별위원회’가 열린 12월 6일 영종도 인천국제공항 입국장에서 여행객들이 발걸음을 멈추고 TV 화면을 응시하고 있다. / 사진·중앙포토
재벌 총수들이 청문회 증인으로 불려 나온 것은 28년 만에 처음이라 일해재단 청문회에도 관심이 쏠렸다. 당시 청문회의 공식 명칭은 ‘5공화국 비리 조사 국회 특별위원회’. 전두환 전 대통령의 호를 딴 일해재단은 미얀마 아웅산 테러 희생자의 유가족을 지원한다며 1984~1987년 기업들로부터 거액을 강제모금했다.

현대(정주영·51억원), 삼성(이건희·45억원), 대우(김우중·40억원), 럭키금성(구자경·30억원), 선경(최종현·28억원), 한진(조중훈·22억원), 롯데(신격호·20억원) 등에서 509억원을 받아냈다. 이 중 정주영 현대그룹 회장과 최순영 신동아그룹 회장, 이준용 대림산업 부회장과 장세동 경호실장이 청문회에 불려 나왔다.

이번 청문회에는 일해재단에 돈을 냈던 그룹 총수의 아들들이 증인석에 섰다. 정주영 회장의 아들 정몽구 회장, 이건희 회장의 아들 이재용 부회장, 구자경 회장의 아들 구본무 회장, 최종현 회장의 아들 최태원 회장, 신격호 회장의 아들 신동빈 회장, 조중훈 회장의 아들 조양호 회장 등이다. 여기에 한화 김승연 회장, CJ 손경식 회장까지 8명의 대기업 총수가 나란히 증인석에 앉았다. 허창수 GS 회장은 청와대의 지시로 미르재단과 K스포츠재단 기금 모금을 주도한 전국경제인연합회장 자격으로 출석했다.

최순실과 안종범 전 청와대 정책조정수석은 박 대통령의 지시를 받고 2015년 말~2016년 초 두 재단의 설립에 깊숙이 관여했다. 검찰이 최순실과 안종범에게 적용한 혐의는 ‘강요’다. 기업들이 재단 설립에 필요한 돈을 내는 ‘의무 없는 일’을 하게 했다는 것이다.

증인들도 강제성을 일부 인정했다. 안종범의 지시로 직접 기업들에게 모금을 독려한 이승철 전 정경련 부회장은 기존에 설립된 재단과 미르·K스포츠재단과의 차이를 묻자(최교일 새누리당 의원) “여러 가지 세세한 부분을 청와대가 많이, 이렇게 관여하셨다는 게 차이점”이라고 말했다. 강제성이 있었느냐고 되묻자 “그런 청와대의 지시나 요청을 거절하기 어려운 상황이었다고 생각한다”고 말했다.

최태원 회장은 “기업별로 할당을 받아서 그 할당한 액수만큼 저희가 낸 것으로 사후에 제가 알았다”고 말했다. 허창수 회장은 “청와대 요청을 우리 기업이 거절하기가 참 어려운 것이 기업 하는 사람들의 입장”이라고 말했다.

재단 출연 요청을 거부해 불이익을 받았단 의혹도 제기됐다. 당시 평창동계올림픽 조직위원장으로서 미르에는 자금을 출연하고 K스포츠에는 출연하지 않은 조양호 회장은 당시 상황을 이렇게 설명했다. “대표이사가 와서 (미르에 낸 것에 더해) K스포츠에 또 추가로 하라고 해서, 저희 그룹이 평창조직위에 약 650억원을 스폰서를 하고 있었고 또 저 자신을 비롯해서 40명의 한진그룹 직원이 평창조직위를 위해서 일을 하고 있는데, 같은 스포츠인데 또 돈을 내야 되느냐, 한 번 좀 알아 봐라 그렇게 코멘트를 했더니….”

한진은 출연 요청을 받고도 K스포츠에 돈을 내지 않은 유일한 기업이다. 조 회장은 그로부터 몇 달 뒤인 5월 2일 오전 갑자기 김종덕 전 문화체육관광부 장관으로부터 조직위원장직을 그만두란 통보를 받았다. 조 회장은 “이유는 묻지 않았다” “임명권자의 뜻으로 알고 물러났다”고 말했다. 도종환 의원은 이에 대해 “K스포츠재단 자금 출연을 거절한 게 해임의 원인으로 작용했단 일각의 의견이 있다”고 지적했다.

검찰의 최순실·안종범에 대한 공소장에 따르면 박 대통령은 2015년 7월 24~25일 재벌 총수들과 단독 면담을 했다. 이 자리에서 박 대통령이 미르재단과 K스포츠재단을 설립하는 데 적극적으로 지원해달라고 요청했다는 것이다. 검찰이 박 대통령에게 공모 혐의가 있다고 판단한 이유다.

하지만 공소장은 당시 대기업 총수들의 입장은 자세히 담지 않았다. 청문회에선 독대가 한 번이 아니라 두 번 이뤄지기도 했단 사실이 밝혀졌다. 이재용 부회장은 2015년 7월 25일과 2016년 2월 17일 박 대통령을 면담했다고 확인했다.

이만희 새누리당 의원_ “대화 도중 대통령으로부터 문화융성과 체육발전을 위한 자금 출연(出捐) 요청을 받았나?”

이재용 부회장_ “당시 문화융성과 스포츠발전을 위해서 기업들도 열심히 지원을 해주는 게 우리나라 경제발전이나 관광산업 발전을 위해 좋은 일이라고, 지원을 아낌없이 해달라는 말씀이 있었다.”

이만희 의원_ “그 요청을 받았을 당시에 강압적이거나 강요당하고 있단 생각은 했나?”

이재용 부회장_ “사실 당시에 정확히 재단이나 출연 이야기는 안 나와서, 독대 당시에는 무슨 이야기였는지 솔직히 잘 못 알아들었다.”

당시의 상황에 대해 질문이 계속됐지만, 이재용 부회장은 “문화융성과 스포츠 발전, 체육 발전인지 스포츠 발전인지 이것이 우리나라 관광사업이라든지 경제 발전을 위해서 중요하니까, 삼성도 많이 지원을 해달라, 이런 말씀은 분명히 있었다”고 같은 취지의 답을 반복했다.

정몽구 회장은 2015년 7월 24일과 2016년 2월 15일 대통령을 독대했고, 신동빈 회장은 2016년 3월 14일 대통령을 독대했다. 김승연 회장은 2015년 7월 25일 대통령을 독대했다. 김 회장은 당시 박 대통령이 재단에 출연해달라는 말을 하지 않았냐는 질문에 “그런 이야기는 없었다”면서도 “(나중에) 실무자를 통해 그런(출연해달라는) 연락이 왔던 것으로 알고 있다”고 답했다.

박 대통령과 독대 뒤 이뤄진 거액 출연


▎이재용 삼성전자 부회장이 청문회 시작에 앞서 서류를 꺼내고 있다. 왼쪽은 신동빈 롯데 회장. / 사진·중앙포토
구본무 회장은 “(대통령 독대 당시) 한류나 스포츠를 통해서 국가 이미지를 높이고 그렇게 하면 경제에 도움이 된다고 말씀하셔서, 제 생각이지만 정부가 뭔가 추진하는 데 민간 차원에서 협조를 바라는 게 아닌가 이렇게 생각했다”고 말했다. “재단에 출연한 것을 나중에 알았는데, 스포츠를 발전시켜서 국가 이미지를 올린다고 그래서 국가에서 하는 재단인 줄 알았지 최순실이 하는 것은 몰랐다”고 했다.

재벌 총수들은 하나같이 대통령과 단독으로 만났을 때 미르재단이나 K스포츠 재단을 특정해 자금을 출연하라는 요청은 받지 못했다고 부인했지만, 독대 이후 거액을 낸 것은 사실이라고 시인했다. 그러면서도 “기업들은 각종 인허가상 어려움과 세무조사의 위험성 등 기업활동 전반에 걸쳐 직간접적으로 불이익을 받을 것을 우려하여 출연 지시를 따르지 않을 수 없었다”는 공소장 내용에 대해선 대부분 사실이 아니라고 답했다. 부당한 압력이 아니냐는 지적도 외면했다. 새로 어떤 정부가 들어서도 정경유착 관행의 고리를 끊기가 쉽지 않다는 불신에서 나오는 태도라는 것이 은연중 드러났다.

하태경 새누리당 의원_ “자발적으로 내고 싶을 때 내는 것이지, 정부에서 시키는 건 일단 거부해야 하는 것 아닌가? 앞으로도 다음 대통령 들어서 뭐 좀 내라고 하면 또 다 들을 건가? 청문회에 또 나올 건가?”

구본무 회장_ “국회에서 입법을 해서 막아주십시오.”

하태경 의원_ “2015년에 거의 강제에 의한 정치성 준조세가 6조 4000억원이다. 그렇다면 투명하게 준조세를 폐지하고 그 액수에 상당하는 법인세를 인상하자고 제안한다면 찬성할 것인가?”

구본무 회장_ “저는 찬성 못한다.”

하태경 의원_ “준조세는 내고 세금은 못 내겠다는 말인가?”

구본무 회장_ “그런 건 아니다.”

하태경 의원_ “그런데 왜 못 내나? 그런 게 더 떳떳하지 않나? 이런 청문회에 안 나와도 되고.”

최태원 회장_ “말씀대로 그런 효과가 난다고 생각하면 저는 찬성이다. 하지만 지금 말씀하신 것이 꼭 그렇게만 정말로 이뤄지는지에 대해서는….”

청문회에서 재벌 총수들이 두 재단에 돈을 내게 된 경위는 한 줄로 요약할 수 있다. “딱히 자발적인 건 아니었지만, 대가를 바라고 한 일도 아니다. 결정적으로 난 아주 나중에야 보고받았다”는 것이다. 이 말만 반복한 총수들의 증언은 놀라울 만큼 비슷했다.

신동빈 회장은 대통령 독대 뒤 K스포츠재단의 하남시 체육시설 건립 사업에 75억원을 지원해달라고 요청받은 사실이 있느냐는 질문에(이만희 의원) “저에 대해선 그런 일이 없었다”고 말했다. 공소장에 있는 내용이란 지적에 “제가 공소장을 직접 본 적이 없고 어떻게 쓰여 있는지 잘 모른다”고 답했다.

또 롯데가 5월 70억원을 K스포츠에 추가로 출연한 사실은 인정하면서도 “최근에 와서 10월 말이나 12월 전에 그런 보고를 받았다. 사전보고는 받지 못했다”고 설명했다. 이 같은 의사결정을 한 사람이 누구냐고 묻자 신동빈 회장은 “우리 그룹의 돌아가신 이인원 부회장님을 비롯한 분하고 해당 부서에서 결정했다”고 말했다. ‘형제의 난’과 관련한 수사, 압수수색 등을 염두에 둔 것 아니냐는 지적엔 “전혀 관계없다고 생각한다”고 답했다. 롯데는 70억원을 출연했다가 압수수색(6월 12일) 전날 돌려받았다.

정유섭 새누리당 의원은 롯데의 자금 출연이 면세점 선정 혜택으로 이어졌다는 의혹을 제기했다. 정 의원이 “이번에 롯데 잠실점(면세점)을 12월에 받을 것 같느냐”고 묻자 신동빈 회장은 “그것은 제가 알지 못한다”고 답했다. 이에 정 의원은 “받으실 것 같은데요. 저는 그렇게 봅니다”고 비꼬았다.

최태원 회장은 자금 출연 경위에 대해 “(대통령 독대 과정이나) 안종범 수석으로부터가 아니라 K스포츠재단 사람들로부터 (지원 요청을) 받았다고 들었다”고 말했다. 올봄 30억 원을 순차적으로 추가 지원하려다가 무산된 상황에 대해선 “일이 다, 최근에 문제가 나오고 난 다음에 (보고를) 받았다”고 설명했다.

“대가성 없다”, “보고 못 받았다” 되돌이표 대답


▎88년 5공 특위 일해재단 청문회에 출석해 답변하고 있는 증인들. / 사진·중앙포토
추가지원이 논의된 것이 SK가 2015년 11월 워커힐 면세점 신규 특허 발급에서 탈락한 것을 염두에 두고 차후에 면세점 분야에서 혜택을 받기 위한 것이 아니었느냐는 의혹에 최 회장은 “어떻게 해서 그런 제안이 그쪽에서 왔는지에 대해서는 제가 아는 바도 없고 면세점하고는 별 상관이 없을 것이라고 생각한다”고 말했다. “면세점 부분은 저희한테 너무 작은 사업”이라면서다. 거듭된 질문에 “대가성이라는 생각을 갖고 출연한 바는 전혀 없고 그것은 제 결정도 아니었다”고 강조하기도 했다.

이용주 국민의당 의원은 SK가 최태원 회장의 사면을 위해 돈을 냈다는 취지의 질문을 했다. 횡령죄로 유죄를 선고받고 복역 중이던 최 회장은 2015년 8월 14일 광복절 특별사면으로 출소했다. 2015년 7월 24일 김창근 당시 SK이노베이션 회장이 박 대통령과 독대한 데 대해 이 의원은 “사면이나 재판 관련해 부탁한 적이 있느냐”고 물었다. 이에 최 회장은 “그런 이야기는 없었다고 들었다”고 답했다. 이에 “당장 총수가 수감돼 있는데, 지나가는 말로라도 이번 기회에 좀 사면이니 그런 것을 검토해달라고 말하는 게 당연하지 않겠느냐”고 되묻자 최 회장은 “저는 그때 안에 있었기 때문에 확실히 정확히 알 수 없었다”고 즉답을 피했다.

박범계 민주당 의원은 김승연 회장에게 “2014년 말에 삼성테크윈을 비롯해 4개 방산업체를 삼성으로부터 매수해 한화의 재계 순위가 10위에서 9위로 상승했는데 인정하느냐”고 물었다. 업체 매수에 필요한 정부의 승인을 얻기 위해 자금 출연을 한 것 아니냐는 문제 제기였다. 김 회장은 이 질문에 “(순위 상승은) 별로 신경 안 쓴다”고 답했다. 김 회장은 미르재단에 돈을 낼 때 사내 절차를 묻는 질문에는 “이사회 의결을 거쳤다. 회계처리를 어떻게 했는지 그것까지는 기억나지 않는다”고 답했다.

CJ에 대해서는 이재현 회장의 사면을 위해 두 재단에 자금을 출연한 것 아니냐는 의혹이 제기됐다. 하지만 손경식 회장은 관련 질문에 “(대통령을 독대했을 때) 사면이나 재판 관련 이야기는 없었다”고 부인했다.

정몽구 회장은 대가나 청탁 성사를 기대하면서 기금 출연을 했는지, 기꺼이 냈는지 묻는 이완영 새누리당 의원의 질문에 “기금을 출연하는 데 대해서는 다각적인 이유가 있다. 우리가 기금 내에서 자주 하곤 한다”고만 말했다. 비슷한 취지의 질문에 김승연 회장은 “기꺼이 했다”고 답했고, 손경식 회장은 “무슨 대가를 바라고 한 것은 아니고, 모두 하니까 저희도 같이 따라서 했다”고 말했다. 조양호 회장은 “대표이사가 전경련을 통해 청와대에서 요청을 받았다고 해서 다른 기업들이 다 하면 같이 하라고 했다”고 답했다.

청문위원 17명의 질문은 대부분 이재용 부회장에게 쏟아졌다. ‘삼성 청문회’를 방불케 했다. 삼성그룹은 미르재단에 125억원을 출연했다. K스포츠에는 79억원을 출연했다. 두 재단에 기업들이 낸 출연금은 각 486억원과 288억원. 삼성이 전체 출연금의 약 26%, 즉 4분의1 이상을 부담한 셈이다. 삼성은 최순실의 딸 정유라의 승마에 35억원을 지원하기로 했다.

또 삼성물산과 제일모직 합병 당시 삼성물산의 최대주주(11.6%)였던 국민연금이 불리한 합병비율(1대 0.35, 삼성물산 1주→제일모직 0.35주)을 무릅쓰고 합병에 찬성한 것도 문제가 되고 있다. 당시 합병은 이재용 부회장 중심의 지배구조를 강화했다는 평가를 받는다. 삼성이 미르 등 지원을 대가로 얻은 혜택이 아니냐는 게 의혹의 핵심이다.

이재용에게 쏟아진 질문… 삼성청문회 방불케 해


▎1988년 국회 5공 특위 일해재단 청문회에서 노무현 민주당 의원이 자리에서 일어나 증인에게 따지듯 질문하고 있다. 이 청문회를 통해 초선의원 노무현은 일약 스타덤에 올랐다.
다른 총수들과 마찬가지로 이재용 부회장은 대가성은 강력하게 부인했다. 수십 번 반복되는 질문에 이재용 부회장은 다음과 같은 답으로 일관했다.

“저희한테 사회 각 분야에서 많은 지원 요청, 문화와 스포츠를 포함해서 여러 각계 각 면에서 들어오고 있습니다. 저희는 단 한 번도 뭐를 바란다든지 반대급부를 요구하면서 출연을 했다든지 지원을 한 적은 없습니다. 이 건(미르재단과 K스포츠재단 지원)도 마찬가지입니다.” “저희가 모든 사회 공헌이든 출연이든 어떤 경우에도 대가를 바라고 하는 지원은 없습니다.”

김한정 민주당 의원이 지난해 7월 대통령과의 독대에서 합병 이야기가 나온 것 아니냐고 묻자 이재용 부회장은 “이번에 나오기 전에 그 일자를 확인해 보니까 독대가 있었을 때는 이미 주주총회라든지 합병이 다 된 뒤의 일이었다”며 대통령 독대가 합병에 영향을 미치지 않았다는 취지의 답변을 했다.

이재용 부회장은 합병에 대해 계속해서 의혹이 제기되는데 대해 “저희가 정말 부족했던 점이 많았다. 일을 추진함에 있어서 저희 입장을 조금 더 투명하게 설득하고 공감을 받는 과정이 부족했다”고 말했다. 최순실을 언제 알았느냐는 질문에는 “정확히 기억나지 않는다. 아주 오래된 것 같지는 않다”고 답했다.

이재용 부회장은 정유라 지원 등에 있어선 부적절했다고 시인하고 여러 차례 사과했다. 삼성전자가 지난해 9월 43억 원을 들여 말 세 마리를 산 뒤 정유라에게 제공한 것을 알고 있느냐고 묻자(도종환 민주당 의원) 이재용 부회장은 “나중에 들었다”고 말했다. 또 “적절치 못한 방법으로 지원한 것을 인정한다. 세세하게 챙기지 못한 것이 정말 후회 막심하다”고 말했다. 하지만 당시 지원 결정을 내린 사람이 누구냐는 질문에는 “부적절했다”, “드릴 말씀이 없다”, “다시는 재발하지 않도록 하겠다”, “죄송하다”는 말을 되풀이하며 하며 끝내 명확한 답을 하지 않았다.

삼성이 이처럼 최순실 모녀를 지원한 이유를 묻자 이재용 부회장은 “나중에 물어보니까 어쩔 수 없었던 사정이 있었다고 들었다”고 말했다. 위원들은 ‘어쩔 수 없는 사정’이 무엇인지 집요하게 캐물었지만 역시 확답은 하지 않았다. “여러 분들이 연루돼 있고, 제가 직접 연루가 된 일이 아니라, 여기서 말씀을 잘못 드리면 잘못된 오해를 일으킬 수 있다”, “지금 검찰 조사 중이고 특검도 이뤄지기 때문에 거기에서 소상히 사실 규명이 되리라 생각한다”고만 말했다. 이에 도종환 의원이 “특검에 가서는 다 말씀하시겠다는 뜻이냐”고 묻자 “당연합니다”라고 답했다.

이처럼 재벌 총수들이 도의적 책임에는 통감하면서도 대가성은 없었고, 보고도 받지 못했다고 하는 이유는 무엇일까? 이를 인정하면 곧 뇌물공여와 배임을 저지른 혐의가 적용될 수 있기 때문이다.

형법 133조 ‘뇌물공여 등’은 뇌물을 약속하거나 공여하거나 공여 의사를 표시한 이는 5년 이하의 징역 또는 2000만 원 이하의 벌금에 처하도록 하고 있다. ‘수뢰죄’는 ‘공무원 또는 중재인이 그 직무에 관하여 뇌물을 받거나 요구하는 경우’에 적용된다. 여기서 뇌물은 ‘금전, 물품 등 재산적 이익뿐 아니라 사람의 수요 등을 충족시킬 수 있는 일체의 유형·무형의 이익’을 포함한다.(2002년 대법원 판례)

다수의 법조인에 따르면 뇌물수수 혐의의 핵심은 직무 관련성이다. 금품을 줬더라도 이를 받은 공무원의 직무와 상관이 없는 일로 주고 받은 것이라면 혐의를 적용하지 않는다. 여기서 직무는 ‘법령에 정해진 직무 및 관련 업무, 과거에 담당했거나 장래에 담당할 직무, 법령상 일반적인 권한에 속하는 직무’ 등으로 포괄적이다.

대가성 여부도 뇌물수수 혐의 성립의 중요한 근거로 작용한다. 법원에서 양형을 할 때도 중대한 참작 사유가 된다. 주고받은 액수나 대가로 받은 이익이 클수록 더 중한 형을 받을 수밖에 없다.

일해재단 모금과 관련해 검찰은 1989년 1월 5공 비리 수사 결과를 발표하면서 기업들의 기금 출연이 강요 성격도 없었고 돈을 낸 기업에 특혜를 줬는지도 확인되지 않았다고 밝혔다. 이에 따라 재벌 총수들은 대가성이 입증되지 않으며 뇌물죄의 칼날을 피해갔다.

뇌물공여죄 피의자, 강요죄 피해자 규명은 특검 몫

검찰 수사에서는 기업들을 박 대통령과 최순실·안종범 등의 직권남용과 강요로 인해 돈을 낸 피해자로 봤지만, 특검 수사에선 다른 양상이 펼쳐질 가능성이 크다.

박영수 특별검사는 임명 직후 기자들과 만나 “미르·K스포츠재단 기금 모금의 본질을 직권남용 등으로 보는 것은 구멍이 많은 것 같다. 다른 쪽으로 우회하는 것보다는 때론 직접(본질로 치고) 들어가는 게 좋을 수 있다”고 말했다. 기존 검찰 수사 결과와 상관 없이 적극적으로 뇌물 혐의를 입증하겠다는 의지로 읽히는 대목이었다.

재단 출연 자금에 뇌물의 성격이 있다면, 기업들에게는 제3자 뇌물수수(공여) 혐의가 적용될 수 있다. 형법 130조 ‘제3자 뇌물 제공’은 “공무원 또는 중재인이 그 직무에 관하여 부정한 청탁을 받고 제3자에게 뇌물을 공여하게 하거나 공여를 요구 또는 약속한 때에는 5년 이하의 징역 또는 10년 이하의 자격정지에 처한다”고 규정했다.

하지만 법리적으로 쉽지는 않은 일이다. 청문회에서 의원들이 했던 것처럼 기업들이 총수 사면, 면세점 특혜, 총수 지배권 강화 등에서 원하는 바를 이루기 위해 청탁을 한 사실을 밝혀내야 하기 때문이다. 재벌 총수들 역시 이를 잘 알기에 대가성을 부인한 것이다. 박 대통령이 독대한 자리에서 직접적인 출연 요청을 하지 않았다고 입을 모은 이유도 같은 맥락이다.

법조계에선 재벌 총수들이 사적인 이익을 달성하기 위해 거액을 내기로 결정했고, 이 과정에서 제대로 된 내부 절차를 거치지 않았다면 이들에게 배임 혐의도 적용할 수 있다고 보고 있다. 기업과 주주, 투자자들에게 의도적으로 손해를 준 셈이기 때문이다. 형법 355조는 “타인의 사무를 처리하는 자가 그 임무에 위배하는 행위로써 재산상의 이익을 취득하거나 제3자로 하여금 이를 취득하게 하여 본인에게 손해를 가한 때 5년 이하의 징역 또는 1500만원 이하의 벌금에 처한다”고 했다.

한 법조인은 “재벌 총수들이 청문회에서 재단에 돈을 낸 사실에 대해 ‘나는 보고받지 못했다’거나 ‘당시엔 몰랐고 나중에야 알았다’는 주장을 굽히지 않은 것은 배임 혐의를 의식, 자금 출연을 최종적으로 결정했다는 책임에서 벗어나려는 의도가 있는 것으로 보인다”고 귀띔했다.

기업들에 대한 혐의 입증은 곧 박 대통령의 혐의 입증으로 이어지기 때문에 중요하다고 특검은 보고 있다. 박영수 특검은 “대통령이 문화융성이라는 명분으로 통치행위를 했다고 내세울 텐데 그걸 어떻게 깰 것인지가 관건”이라며 “대기업들이 거액의 돈을 내게 된 과정이 과연 무엇인지, 거기에 대통령의 역할이 작용한 게 아닌지, 즉 근저에 있는 대통령의 힘이 무엇이었는지를 봐야 한다”고 말했다. 특검의 칼끝이 재벌 총수들을 넘어 박 대통령을 향하고 있다.

- 유지혜 기자 yoo.jeehye@joongang.co.kr

201701호 (2016.12.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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