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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세기 영웅소환 프로젝트(4) 정조-다산] 조선의 소울메이트(역사상 최고의 군신) 힘 합쳐 부국강병의 길 열다 

정조 : 역사상 가장 똑똑한 임금. 바른 성품까지 겸비해 조선의 르네상스 개척
다산 : 조선의 레오나르도 다빈치. 과학·기술 발전시켜 부국강병의 길 열어 

대담 = 박석무(다산연구소 이사장)·이덕일(한가람역사문화연구소장) / 사회·글 = 윤석만 기자 sam@joongang.co.kr / 사진 전민규 기자 jeon.minkyu@joongang.co.kr
붕당(朋黨)으로 찢어져 조정의 정치가 모두 실종됐던 18세기 말 조선. 개혁의 군주 정조가 내놓은 온갖 민생 정책은 집권 사대부의 반발에 부딪히고, 과학기술의 발전으로 유교 사회를 뛰어넘고자 했던 다산은 18년간 유배를 가는데…. 암살과 모략의 위기 속에서도 굳건한 신뢰로 서로를 지켜줬던 정조와 다산은 세종 대 이후 최고의 치세를 펼치며 조선사 최고 군신으로 역사에 남는다.

▎정조(왼쪽)와 다산은 세종 대 이후 최고의 치세를 펼치며 조선시대의 최고 군신관계로 역사에 남는다. 소울메이트로 불릴 정도로 가까웠던 콤비의 백성을 위한 사상은 덜 성숙한 현대사회를 돌아보게 만든다. / 사진·중앙포토
“장차 나라를 이롭게 하려면 무엇을 해야 하겠습니까?” 중국의 사서(四書) 중 하나인 <맹자>의 양혜왕(梁惠王) 편에는 이런 질문이 나온다. 왕인 양혜가 천리를 마다 않고 찾아온 맹자에게 지혜를 구했다. 그러나 나라를 이롭게 만들고 싶다는 왕의 질문에 맹자는 꾸짖듯 말했다.

“왕께서는 어찌 이익만을 이야기 합니까. 왕이 나라의 이로움을 먼저 생각하면 신하들은 자기 가문의 이익을 먼저 생각하고, 백성과 선비는 자신의 이로움만 좇게 됩니다. 위에서 아래로 이익만 좇으면 나라가 위태로워집니다. 인의(仁義)를 최우선으로 생각해야 합니다.”

자신의 이익만 좇는 현대 사회에 일침을 가하는 내용이다. 물론 맹자의 이야기를 요즘 시대에 그대로 적용하긴 어렵다. 하지만 적어도 한 나라의 지도자라면, 그것이 사익이건 공익이건 이익만 좇는 모습을 보여선 안 된다는 교훈을 준다. 물질적으로는 큰 성장을 이뤘지만 정신적으론 덜 성숙한 우리 사회에서 대한민국의 최고 지도자인 대통령은 이익과 손실의 계산서를 뛰어 넘어 정의와 도덕에 편에서 이야기할 수 있는 사람이어야 한다는 의미다.

그러나 지난 몇 달간 우리 사회를 흔들어 놓았던 국정농단 사태를 보면 대통령을 둘러싼 주변의 권력들이 얼마나 천박하게 자신의 사리사욕을 채워왔는지 쉽게 알 수 있다. 비선 실세로 불리는 최순실과 그들을 둘러싼 문고리 권력들, 나아가 대통령을 보좌했던 정치인들의 그릇된 행동은 따지고 보면 대통령의 리더십에서 기인한 것이다.

그 과정에서 온 국민들은 도저히 상상할 수 없던 일들이 사실로 드러나는 광경을 지켜보며 큰 충격을 겪었다. 급기야 국회에서 탄핵 의결된 대한민국 최고 지도자의 민낯을 마주하며 가슴에 큰 응어리를 하나씩 갖게 됐다. 이런 상황에서 대통령의 이름을 팔아 득세했던 정치인들은 사죄는커녕 ‘십원 한푼 받지 않았다’며 대통령의 잘못을 덮고 옹호하는 모습마저 보이고 있다. 국민의 고름 난 상처를 더욱 들쑤시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2017년 새해에는 새로운 시대를 맞이해야 한다. 오직 자신의 이익과 안위만을 위해 존재하는 정치인들을 끌어내려야 한다. 새로운 세상에 걸맞은 지도자는 어떤 모습이며, 그를 보좌하고 함께 대한민국의 미래를 이끌어 갈 관료와 정치인은 어때야 하는지 진지한 고민이 필요하다. 이를 통해 지금의 위기 상황을 국가발전의 초석으로 전환할 수 있도록 모든 에너지를 모아야 한다.

여기서 우리는 다시 역사를 펼쳐볼 수밖에 없다. 난세를 헤쳐 갔던 영웅들의 지혜를 빌려 지금의 어려운 시기를 이겨내기 위함이다. 21세기 영웅소환 프로젝트 4회에서는 조선 시대 최고의 군신 콤비로 평가받는 정조 이산(1752~1800)과 다산 정약용(1762~1836)을 현재로 불러냈다. 정조와 다산은 왕과 신하의 관계이기 앞서 이념과 철학을 함께 공유한 동지였다. 두 콤비는 오직 백성만을 위한 사상으로 똘똘 뭉쳐 세종 이래 최고의 치세로 조선을 이끌었다.

이번 대담에는 수십 년간 다산을 연구하며 그 정신을 실천해온 박석무(75) 다산연구소 이사장과 <정조와 철인정치시대> 등 베스트셀러로 역사 연구의 대중화를 이끈 이덕일(56) 한가람역사문화연구소장이 참여했다. 대담은 12월 8일 중앙일보 7층 회의실에서 진행됐다.

군신의 자격


1797년 6월. 황해도 곡산부사로 임명된 다산이 마을 어귀에 도착했다. 신관 사또의 부임을 축하하기 위해 관아의 모든 아전(衙前)과 백성들이 마중을 나왔다. 다산이 도착하자 인파 뒤에 숨어 있던 한 사내가 소리를 지르며 나타났다. 그러곤 다산 앞에 무릎을 꿇고 엎드렸다. 이 사내의 이름은 이계심(李啓心). 전임 사또 시절 1000여 명의 주민과 함께 관아를 쳐들어가 수령에게 항의하다 관군을 피해 산으로 숨어들었던 사람이었다. 당시 조정에는 이계심이 역심을 품고 모반을 일으킨 것으로 보고됐다. 이를 본 형방이 ‘역모자’를 외치며 포졸들에게 명했다. 그러자 신임 사또로 부임한 다산이 아전들을 막아서며 말했다. “자신이 죽을 것을 알면서도 신임 부사를 찾아온 것을 보니 필시 할 말이 있는 게로구나. 그 연유라도 들어봐야겠다.” 다산은 이계심을 포승줄로 묶거나 목에 칼을 채우지 않고 관아로 데려가 이유를 물었다. 이계심은 그동안 백성들이 겪어온 고통을 조목조목 적은 12개 조항을 가슴팍에서 꺼내며 말했다.

“전임 사또가 계실 때 아전들이 농간을 부려 본래 200냥인 포보포(砲保布: 포군에게 내는 군포)를 900냥이나 거뒀습니다.” 이계심이 소상히 벼슬아치들의 횡포를 이야기하자 이방을 비롯한 육방들은 고개를 들지 못했다. 다산은 그 자리에서 관아의 모든 책임자를 불러 사실을 확인했다. 뒷돈을 챙긴 자에겐 벌을 내리고 이계심에겐 다음과 같은 판결을 내렸다. “너처럼 용기 있는 자가 있어 죽음도 두려워하지 않고 백성을 위해 원통함을 알렸다. 천금은 얻기 쉬우나 너 같은 사람은 얻기가 어려우니 네 죄를 방면해야 옳다.” 그의 무죄 석방 소식이 알려지자 백성들은 모두 다산을 칭송했다. 그러나 조정에선 양반과 수령의 권위를 무너뜨렸다며 다산을 파직해야 한다는 주장이 제기됐다. 다산이 속한 남인은 당시 소수파였기에 주류였던 노론으로부터 거센 공격을 받았다. 이처럼 다산의 판결이 정쟁으로 치닫자 급기야 정조가 나섰다. 다산을 아껴왔던 정조는 오히려 백성의 원통함을 해결해준 다산을 칭찬했다. 더 이상 신하들은 이 일을 언급하지 않았다.

다산(다)_ “전하의 성은이 없었다면 신은 벌써 정쟁의 소용돌이에 휘말려 아무런 뜻도 펼쳐보지 못했을 것이옵니다.”


정조(정)_ “이 보게 다산. 처음 이계심이 난을 일으켰다는 보고를 받고 누구를 내려 보내야 할지 고심이 컸네. 관군들이 몇 달을 뒤져도 못 잡는 건 백성들이 돕지 않으면 불가능한 일일세. 또 함께 했던 백성이 1000명이 넘었다는 건 그 만한 이유가 있지 않겠는가. 자네는 내 뜻을 잘 헤아려줬네.”

다_ “성은이 망극하옵니다. 신 또한 백성들의 마음이 가장 궁금했사옵니다. 민심은 천심인데 고을의 수령과 조정의 신료들이 백성의 마음을 읽지 못하니 그저 답답할 따름이옵니다. 전하를 모셨던 200년 전이나 지금이나 지도자가 국민의 마음을 못 읽는 것은 죄악이옵니다.”

정_ “맹자가 이런 말을 했다네. 임금이 정치를 못해 백성을 죽게 만드는 것은 몽둥이로 사람을 쳐 죽이는 것과 별반 다를 바 없다고 말일세. 왕이 치세를 펴지 못해 백성이 힘들면 그 자체만으로 큰 잘못이네. 대통령도 마찬가지지. 나라의 어버이인 최고 지도자가 자식과 같은 국민의 마음을 보듬지 못한다면 그땐 이미 대통령의 자격을 잃은 걸세.”

다_ “대통령이 국회에서 탄핵 의결까지 되는 사태를 맞았습니다. 매주 100만 명이 넘는 시민이 추운 날씨 속에서도 대통령의 하야를 외치고 있습니다. 그런데도 소위 친박이란 정치인들은 대통령이 ‘십 원 하나 떼먹은 것도 없다’, ‘혐의일 뿐 법적으로 입증된 게 뭐냐’며 탄핵이 과하다는 주장을 하고 있습니다.”

정_ “참으로 아둔한 소리로 들리네. 군주가 백성의 돈을 빼앗지 말아야 한다는 것은 너무도 당연한 이치가 아니겠는가. 마땅한 일을 해놓고 마치 잘했다는 듯 주장하는 것은 옳지 않다고 보네. 본디 임금은 백성의 존경과 사랑으로 권위가 지켜지는 자리일세. 국민의 신임을 못 받는 대통령이 어찌 그 나라의 지도자라고 할 수 있겠는가. 범죄의 유무와 별개로 국민의 마음에서 멀어지면 그는 더 이상 지도자일 수 없네.”

대담을 이어가던 박석무 이사장이 잠시 생각에 잠겼다. 그러곤 하얀 종이에 다산의 <목민심서(牧民心書)>에 나오는 글귀를 써내려갔다. ‘違於公法(위어공법)’ 공적인 법률에 어긋나고, ‘害於民生(해어민생)’ 민생을 해치는 일이라면, ‘當毅然不屈(당의연불굴)’ 마땅히 꿋꿋하게 굴하지 말아야 하며, ‘確然自守(확연자수)’ 확실히 스스로 지켜야 한다. 박 이사장이 말을 이었다. “조선시대에도 신하들은 임금에게 옳지 못한 것을 그르다고 이야기했습니다. 목숨을 내놓아야 할 때는 더욱 의연했습니다. 그러나 지금을 보세요. 대통령의 말 한마디가 무서워 아무도 제동을 걸지 못했습니다.” 박 이사장은 “바른 소리를 못 하고 권력에 기생해 국정을 농락한 문고리 권력과 주변 정치인들이 현 사태의 가장 큰 원인”이라며 “다산이 현 시국을 봤더라면 그런 정치인들 모두 잡아다 옥에 가뒀을 것”이라고 말했다.

최고의 소울메이트


▎권성동 국회 법사위원장(왼쪽 셋째)이 12월 9일 헌법재판소에 탄핵소추 의결서를 제출하고 있다. 왼쪽부터 오신환 새누리당 의원, 김관영 국민의당 의원, 권 위원장, 이춘석 민주당 의원. / 사진·중앙포토
1783년 2월. 본격적인 벼슬에 나서기 전에 초시(初試)의 자격을 얻는 증광감시(增廣監試)의 합격자들이 어전에 모였다. 세자 책봉을 기념해 정조가 앞으로 대과(大科)에 나설 미래의 신료들을 궁으로 불러들인 것이다. 여기엔 21세의 정약용도 끼어 있었다. 초시에 1등으로 합격한 정약용에게 정조가 물었다. 당시로선 기껏 초시에 합격한 젊은 청년에게 용안을 보이는 것 자체가 이례적인 일이었다. 나이를 묻는 정조의 질문에 정약용은 예의를 갖춰 ‘임오생’이라고 답변했다. 순간 정조의 표정이 굳어졌다. 1762년 임오년은 정조의 아버지 사도세자가 뒤주에 갇혀 죽은 해다. 당시 열 살이었던 어린 세손 정조는 ‘임오’란 말을 잊을 수 없었다. 이후 정조에게는 유독 정약용이 눈에 띄기 시작했다. 이듬해 정조는 성균관 유생들에게 ‘중용’에 대한 80여 개의 질문을 정리하라고 과제를 내렸다. 그리고 유생들의 답변을 받아 1등을 뽑았는데 이번에도 정약용이었다. 당시 남인들은 퇴계 이황의 학설을 따르는 게 당연지사였다. 그러나 정약용은 자신이 속한 남인의 입장을 따르지 않고 반대파인 노론의 학설인 율곡 이이의 입장을 취했다. 당시로선 매우 파격적인 일이었다. 정조는 정파에 휘둘리지 않고 본인의 생각을 차분히 펴나가는 정약용을 총애하기 시작했다. 붕당에 휩싸였던 조정을 조화롭게 풀어나갈 수 있는 인재라고 믿은 것이다. 정조는 수시로 보는 성균관 시험에서 정약용이 1등을 할 때마다 책을 선물로 하사했다. 외가를 닮아 살이 찌고 운동을 잘 못했던 정약용에게 활쏘기의 중요성을 강조하고 훈련도감에 넣어 무예를 익히도록 했다. 병법서와 천문, 농업 등 다양한 서적을 내려주며 다양한 교육과 체험을 통해 미래의 재상을 키웠다. 한 번은 정조가 더 이상 하사할 책이 없자 ‘술이나 한잔 하자꾸나’ 하며 창덕궁에 불러 약주를 했다. 이때 정조는 자신의 어탁을 내주며 시를 짓도록 했다. 위당 정인보(1893~1950) 선생은 둘을 일컬어 “정조는 정약용이 있기에 정조일 수 있었고, 정약용은 정조가 있기에 정약용일 수 있었다”고 말했다.

다_ “전하의 성은으로 말미암아 성균관에 있던 6년간 많은 깨우침을 얻을 수 있었습니다. 서역에서 건너온 마테오 리치의 책부터 과학과 기술을 다룬 최신의 이론까지 모두 섭력할 수 있는 귀중한 시간이었습니다.”


▎다산의 <목민심서>에는 “공적인 법률에 어긋나고, 민생을 해치는 일이라면, 마땅히 꿋꿋하게 굴하지 말아야 함, 확실히 스스로 지켜야 한다”고 적혀 있다 . / 사진·중앙포토
정 _ “자네는 내 신하 이기도 하지만 내 소울 메이트(soulmate: 서로 마음이 잘 통하는 사이)이기도 하네. 왕이든 신하든 무릇 군자란 지식인이어야 하지. 배움이 깊지 않으면 사물을 제대로 볼 수 없고, 올바른 판단을 내리기 어렵기 때문이네. 그런데 요즘 정치인들은 지식이 깊기는커녕 평범한 사람들이 갖춰야 할 기본 교양조차 못 가진 이들이 많은 것 같아 안타까울 따름일세.”

다_ “전하께서 보위 시절 쓰신 글들을 모아 편찬한 <홍재전서(弘齋全書)>는 오늘날에도 중요한 역사적 사료로 읽히고 있습니다. 100권이 넘는 책을 저술하셨던 전하의 영민함에 감히 누구를 빗대옵니까. 다만 군주가 자신의 말과 글로 이야기하고 책을 쓸 수 있다는 것은 철학과 사상이 있다는 것입니다. 대통령이 최순실이라는 사람이 연설문을 고치도록 했다는데 이건 있을 수 없는 일이옵니다.”

정_ “지금의 정치 리더들이 지적으로 도덕적으로 너무 하향평준화돼 있는 것 같네. 과인은 성균관 유생들에게 직접 주역 강의도 하지 않았는가. 임금이 신하들보다 지식이 부족하면서 어찌 정치를 할 수 있겠나. 자신의 언어로 말과 글을 표현할 수 없는 군주가 어찌 제대로 된 리더이겠는가.”

다_ “요즘 개헌이라고 해서 대통령에게 집중된 권력을 의회가 나눠 갖도록 하는 방안이 논의되고 있습니다. 헌데 지금의 국회 수준을 봐선 걱정이 앞설 뿐입니다. 검증도 안 받은 정치인들이 공천만 받고 갑자기 나와선 나라의 권력을 좌지우지 하는 행태가 심히 걱정스럽습니다.”

정_ “인재를 키우는 방식이 틀렸기 때문이네. 과인만 해도 신료들과 매일 아침저녁 경연을 하고 잠자리에 들기 전엔 상소문을 읽네. 모든 국사는 3정승과 의논해 처리하는데 비선이란 게 말이 되는가. 임금도 엄격한 제도와 정해진 규율에 따라 움직이지 않는가. 애초부터 시스템에 따라 투명하게 했다면 ‘세월호 7시간’이니 하는 문제들이 왜 나왔겠는가.”

다_ “전하의 말씀이 지당하십니다. 대통령제든 의원내각제든 중요한 건 권력의 형식이 아니라 그 내용입니다. 좋은 인재가 있다면 제도야 어떻든 무슨 상관이 있겠습니까. 정치권은 당리당략에 따라 개헌 이야기만 할 게 아니라 어떻게 하면 제대로 된 정치 리더들을 키워낼지 인재양상 방안부터 고민해야 옳습니다.”

정_ “중국이 지금도 일당 독재라지만 엘리트를 만들어내는 방식은 우리보다 훨씬 발전해 있더구나. 청년 시절엔 열심히 공부토록 하고 또 하방해서 민심을 듣고 차근차근 밑에서부터 경험을 쌓고 있지. 그렇게 리더십을 길러 지도자의 자리에 오르니 어떤 면에선 우리보다 훨씬 좋은 인재 양성 시스템을 갖고 있다는 생각이 드는 것일세.”

정조의 입장에 빙의돼 있던 이덕일 소장이 잠시 본인으로 돌아와 한국 정치의 현실과 관련해 권력의 독점 문제를 비판하기 시작했다. “조선은 왕권과 신권이 엄격히 분리된 나라였죠. 사정 권한도 의금부, 사헌부, 포도청, 한성부 등 여러 기관이 수사·기소 권한을 갖고 있었습니다. 검찰에만 이런 권한이 독점돼 있기 때문에 오늘날 대통령이 조선의 왕보다 더 센 권력을 갖게 되는 겁니다.” 이 소장은 “지금처럼 검찰에 권력을 몰아주는 것은 1912년 일본 총독부가 시작한 ‘조선형사령’이 모태”라며 “일제의 잔재이면서 제왕적 대통령을 가능케 하는 수사·기소권 독점을 해소해야 한다”고 말했다.

18세기말 조선에선 양반과 농민으로 이분화 된 전통적인 계급 구조가 상공업의 발달로 다양한 계층으로 분화되기 시작했다. 이 시기 급증한 계층은 상공인이었다. 그러나 도성 안팎 10리까지 일반 백성의 상거래를 금지한 금난전권 때문에 백성들의 피해가 심각했다. 상권을 쥔 일부 거상이 양반과 결탁해 막대한 부를 형성하고 카르텔을 유지하며 상품 가격을 올렸다. 조정은 이들에게 관청에서 필요한 물품을 조달하는 부역을 맡기는 대신 난전을 단속할 권한을 줬다. 여기엔 난전 상인들을 벌하거나 물품을 압수할 권한까지 포함돼 있어 폐해가 날로 심각해졌다.

백성을 위한 개혁


▎박근혜 대통령이 1979년 한양대에서 새마음봉사단 총재 자격으로 축사를 했던 ‘제1회 새마음제전’. 최순실 당시 새마음대학생총연합회장(단국대 대학원 1년)은 23세, 박 대통령은 27세였다. / 사진·JTBC 방송화면 캡처
정조는 백성들의 이 같은 피해를 개선하기 위해 1791년 신해통공(辛亥通共)을 반포했다. 금난전권을 폐지하고 백성들이 자유롭게 상거래를 할 수 있도록 거상들의 독점과 횡포를 금지한 것이다. 신해통공으로 소상인들의 상거래가 매우 활발해졌다. 금난전권 폐지 후 몇 달 만에 도성인 한양의 물가가 절반으로 떨어졌다. 정조는 이와 함께 궁녀의 절반을 내보내는 등 낭비를 억제하고 왕실재정을 튼튼히 했다.

아울러 정조는 공고했던 신분 사회의 질서를 깨뜨리려 했다. 공노비를 해방시키고자 한 것이다. 그러나 갑작스런 정조의 승하로 공노비 해방은 1801년 아들인 순조에 의해 이뤄졌다. 순조실록에는 “선왕께서 내노비(內奴婢)와 시노비(寺奴婢)를 일찍이 해방하고자 하였으니 과인이 마땅히 이 뜻을 계승하겠다”고 기록돼 있다.

다_ “전하의 금난전권 혁파는 당시 조선의 상공업이 발달할 수 있는 기틀이 됐습니다. 서구의 나라들이 산업혁명으로 국부를 증진시키고 국력을 키워가고 있을 때 우리 조선은 폐쇄적인 정책으로 성장을 억제하고 가진 자들의 배만 불리고 있었습니다. 서민들이 자유롭게 물건을 사고 팔게 한 것은 궁극적으로 중산층을 두터이 만들어 국부를 키우려는 조치였습니다.”

정_ “지금 이 시대도 마찬가지라고 보네. 사회의 온갖 부를 독점하고 있는 재벌 구조를 해체하지 않으면 18세기 조선과 같은 일이 반복되는 것일세. 강자들이 카르텔을 만들어 약자를 억압하고 불공정한 룰을 만들어 시장의 진입을 막는 것은 국가 전체의 경제를 살리는 데 도움이 되지 않네.”

다_ “서자들이 관직에 오르는 것을 제한해온 조치들을 풀어주고 이들을 유능한 인재로 기르도록 한 ‘서얼소통(庶孼疏通)’도 같은 맥락 아니겠습니까. 조선은 신분제 사회였지만 그 안에서 자신의 능력과 열정에 따라 계층 이동이 가능하도록 최선의 조치를 했습니다.”

정_ “그런데 오늘날 시대를 바라보면 오히려 조선의 계급사회보다 못한 것 같네. 얼마전 통계청이 발표한 ‘한국의 사회동향 2016’ 조사 결과를 보니 다음 세대의 계층 상승 가능성을 긍정적으로 생각한 국민이 30% 밖에 안 됐네. 특히 30대의 경우 2006년엔 비관적 입장을 보인 비율이 10명중 3명이었는데 2015년엔 6명으로 두 배가 늘었네. 민주사회인 대한민국이 신분사회로 변해가는 느낌일세.”

다_ “소인이 목민심서에도 썼지만 정치의 첫째는 애민(愛民)입니다. 여기서 각별히 신경 써야 할 ‘민’은 노인과 유아, 장애인, 궁인(홀아비·과부·고아), 상을 당한 사람, 재난을 당한 사람 등 여섯 부류의 사람입니다. 이들을 돌봐주고 자립하도록 돕는 것이 애민의 첫째이지요. 지금 대한민국이 추구할 사회는 경제민주화를 이룬 복지국가입니다.”

정_ “애민을 하지 못하는 이유는 지금의 사회지도층이 철학이 없기 때문이네. 오직 자신의 출세와 안위만 생각하기 때문에 사회 전체에 이기주와 배금주의가 만연해 있는 것일세. 정치 지도자라면, 특히 대통령이라면 정말 국민을 생각하는 확고한 철학이 가진 사람이어야 하네.”

1794년 1월 정조는 전국의 모든 수령에게 자신이 속한 지역의 성곽에 대한 설계도를 그려 조정에 보고하도록 했다. 수원 화성(華城)을 축조하기 위해서였다. 처음엔 아버지 사도세자의 뜻을 기리고자 시작했지만 여기엔 병자호란에서 얻은 치욕을 극복하고 견고한 방어 시스템을 만들기 위한 자립 의지가 담겨 있었다. 또 상업을 장려하고 국영농장을 통해 농업을 발전시키기 위한 애민의 뜻도 포함됐다. 오늘로 치면 최첨단 과학단지 등이 밀집한 신도시를 개발하는 일이었다.

화성 축조와 과학·기술의 개발


▎정조는 이상적인 왕도정치와 치도(治道)를 통해 참다운 지도자의 모델이 된 군주다. 2007년 MBC <이산>에서 정조 역할을 맡은 배우 이서진. / 사진·중앙포토
화성 축조 책임을 맡은 다산은 서양과 청나라에서 들여온 최신 기술과 자신이 직접 발명한 거중기와 유형거 등을 공사에 사용했다. 화성 축조 과정에서 가장 주목할 만한 부분은 당초 10년을 예상했던 공기가 2년 9개월로 압축된 것이다. 다산이 적용한 새로운 과학기술의 효과도 있었지만 그 보다 더욱 큰 영향을 미친 것은 새로 도입한 ‘임노동’ 시스템이었다. 그동안 성을 축조하는 일은 대표적인 국가 부역으로 분류돼 무임 노동이 원칙이었다. 그러나 정조는 일꾼들에게 품삯을 주도록 했다. 이에 따라 다산은 1보마다 팻말을 세우고 제 일을 마친 사람은 먼저 임금을 주어 집으로 보냈다. 정조는 또 추운 겨울에 일하는 노동자들을 위해 털모자를 하사했다. 당시 털모자와 귀마개는 정3품 당상관 이상만 누릴 수 있는 특권이었다.

정_ “과인과 자네가 좋은 팀워크를 이룰 수 있던 것은 애민이라는 정치 이념과 실용이라는 국정 운영의 원칙이 맞아 떨어졌기 때문이지. 다만 자네가 제안했던 여전제(閭田制)를 실시해보지 못한 것은 두고두고 한으로 남았네.”


다_ “옳고 그름을 따진 뒤에는 꼭 쓸모 있는 것이 뒷받침돼야 합니다. 백성들의 삶에 도움되는 일을 할 수 없다면 정치가 왜 필요하겠습니까. 여전제는 황무지를 개간해 국영농장을 만드는 일이었습니다. 마을을 단위로 해 공동으로 생산하고 노동의 양에 따라 공정하게 수확량을 나누는 일이었지요. 그렇게 하면 일한 만큼 공정하게 부의 분배가 이뤄질 수 있을 거라 믿었습니다.”

정_ “맞는 말일세. 현재 1인당 GDP가 3만 달러에 육박하지만 연간 소득은 그 정도에 훨씬 못 미치는 사람이 대다수일세. 결국은 소득의 분배가 제대로 이뤄지지 않고 있다는 이야기지. 분배를 고르게 해 공정한 시장의 룰을 만드는 것이 지금 한국에서 가장 필요하다고 보이네.”

다_ “또 하나는 국민에게 더 많은 자유가 주어져야 합니다. 과학기술의 발전에 필요한 창의성은 공정한 시스템과 개인의 자유가 보장될 때 발현되기 때문입니다. 소인 또한 당시 조선에선 금기됐던 서양의 문물을 다룬 책들을 보며 많은 아이디어를 얻었습니다.”

정_ “21세기에 무슨 소리인가 하는 사람도 있겠지만 과인이 보기엔 지금 한국엔 ‘표현의 자유’가 부족한 것 같네. 조선에 목숨을 걸고 임금에게 충언하는 선비가 많았던 것은 그만큼 표현의 자유가 보장됐기 때문일세. 사초를 쓰는 사관들은 심지어 임금에 대한 욕도 썼네. 그리고 임금은 절대 사초를 들여다보지 않았지.”

다_ “국정교과서 역시 표현의 자유와 관련된 문제라고 생각합니다. 그 어떤 학문보다 역사는 해석의 다양성이 존중받아야 합니다. 교과서의 내용이 옳고 그름을 떠나 민주 사회에서 하나의 역사관을 강요하는 것이 옳은 일인지 의문입니다.”

정_ “과인은 국가의 철학이었던 성리학 외에도 양명학을 받아들였네. 지금 한국은 다양한 사상과 관점을 받아들여도 국시가 흔들리지 않을 만큼 이미 건강한 시민사회를 가졌네. 18세기 조선보다도 못한 권위주의 시대의 질서가 재현되지 않길 바랄 뿐이네.”

정조와 다산은 끝으로 마지막 한 가지를 당부했다. 1801년 있던 신유박해(辛酉迫害)에 대한 내용이다. 이 사건은 어린 순조를 수렴청정하게 된 정순왕후가 정권 실세였던 벽파(僻派)를 등에 업고 반대파를 제거한 일이다. 형식은 천주교 탄압이었지만 이면엔 반대 정파인 남인에 대한 제거의 의미였다. 이는 “유학의 진흥을 통해 사학을 막을 수 있다”며 사실상 천주교를 묵인해온 정조와 반대되는 일이었다. 이때부터 조선은 굳게 문을 걸어 잠궜고 서양과 교류를 끊었다.

“사상의 자유, 새로운 문물의 도입을 막고자 한 것이었지. 시대의 변화라는 큰 물결을 거슬러 올라가는 잘못된 일이었네. 이유가 뭐였겠는가. 권력을 쥔 세력들이 자신의 기득권을 지키기 위해 구체제의 억압된 질서를 계속 고수했던 것일세. 하지만 결과가 어땠는가. 조선은 100년 만에 나라를 잃었네. 지금 대한민국도 그런 위기일세. 권위주의 시대의 망령이 자꾸 살아나게 해선 안 되네. 2017년엔 새로운 역사를 만들어 가야 하지. 앙시앵 레짐이 다시는 발을 못 붙이도록 새로운 시대를 열어주길 바라네.”

- 대담 = 박석무(다산연구소 이사장)·이덕일(한가람역사문화연구소장) / 사회·글 = 윤석만 기자 sam@joongang.co.kr / 사진 전민규 기자 jeon.minkyu@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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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01호 (2016.12.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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