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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르포 | 루쉰 전 생애 추적-길 없는 대지의 외침 (마지막 회)] 아무도 용서하지 않는 자의 죽음 

나는 이 죽음을 크게 기뻐하노라! 

글·사진 고미숙 고전평론가
에로스가 창조의 원동력이라면 복수는 카오스의 절정…죽음에 임박해서도 감상에 빠지지 않았던 정신의 승리

쓰나미가 대한민국을 삼켜버렸다. ‘최순실’이라는 이름이 모든 이슈를 덮어버렸다. 미국에선 ‘듣보잡’이라 여겼던 도널드 트럼프가 대통령이 됐다. 오 마이 갓! 그렇구나. 세상은 늘 우리의 예측을 배반한다. 그러니 어쩌겠는가. 그저 매순간 새로운 한걸음을 내디딜 수밖에. 고로, ‘희망은 허망하다. 절망이 그러하듯’. 그래서 다시 루쉰이다.


▎1936년 10월 8일 상하이 청년회관에서 열린 한 전시회에서 청년들과 대화하는 루쉰. 루쉰 옆 한 청년의 티 없이 맑은 미소가 인상적이다.
2016년 8월 초, 우리 일행이 상하이에 도착한 날, 하늘은 티 없이 맑았다. 맑고 또 높았다. 우리는 환호성을 질렀다. 야호~ 세계에서 미세먼지가 가장 심하다는 도시가 웬일이야! 그 순간 베이징에서 샤먼, 광저우를 거쳐오는 동안 쌓였던 피로가 한방에 날아갔다. 그날 우리들이 찍은 사진의 중심은 단연 하늘이었다. 루쉰이 살았던 1930년대는 이보다 더 맑았으리라. 하지만 루쉰은 우리처럼 상하이의 하늘을 만끽하지는 못했으리라. 그는 하늘이 아니라 땅 위를 응시하는 ‘대지의 인간’이었으므로. 그리고 그때 대지는 지옥과 축생계를 오가는 ‘아수라장’이었으므로.

상하이는 루쉰 로드의 마지막 코스다. 루쉰이 생애 마지막 10년을 이곳에서 보냈기 때문이다. 그의 글쓰기와 전투와 일상이 가장 무르익은 곳이자 대단원의 막을 내린 곳이기도 하다. 그 덕분에 박물관과 무덤, 생가 등을 비롯하여 도시 곳곳에 루쉰의 흔적이 배어 있다. 나는 원래 루쉰이 사망한 가을쯤 이곳에 올 예정이었는데, 일정이 꼬이면서 8월 여행단에 합류하게 되었다. 첫 번째 여정은 다 함께 하기로 했지만 혼자서 와야 했고, 마지막 여정은 혼자 올 예정이었는데 떼거리로 오고…. 정말 하나에서 열까지 되는 일이 없다.^^ 하지만 그 덕에 베이징에서 샤먼, 광저우에서 상하이로 이어지는 루쉰의 ‘도주로’를 두루 음미하는 행운을 누린 셈이다.

이 글은 전체 여정의 에필로그에 해당한다. 여기서 다룰 내용은 루쉰의 마지막 1년이다. 전후좌우의 적들을 향해 투창과 비수를 날리던 그에게 가장 두려운 상대가 기다리고 있었다. 폐병, 그리고 죽음. 루쉰 같은 전사가 ‘암살도, 수감도, 고문도 아닌 고작 폐병’ 따위로 자기 집 침대 위에서 죽다니, 뜻밖이다. 하지만 나는 이 사실이 아주 마음에 든다. 그는 줄곧 도망자 신세였지만 한 번도 체포된 적이 없고, 상하이에선 백색테러와 공권력의 폭력이 난무했지만 부상을 입은 적이 없다. 죽음 역시 그랬다. 적들에 의해서가 아니라 자신의 내부에서 스스로 죽음을 결정했다. 자신을 쓰러뜨릴 수 있는 것은 오직 자신뿐이라는 듯이.

죽기 1년 전(1935년)? Back to the future!


▎루쉰이 죽기 전 살았던 상하이 생가 앞에 선 필자.
루쉰이 죽은 건 1936년 10월 19일. 그 1년 전(1935년)으로 돌아가 보자. 일생을 루쉰 연구에 바친 다케우치 요시미(竹內好)에 따르면, 이 해는 “국민당에 의한 전국통일이 완료된 지수년이 지났고”, 공산당은 대장정 도상에서 “마오쩌둥의 지도권을 확립하고”, “민족통일전선을 제창”하는 시기였다.(노신문집 6권, <노신의 논쟁 태도>). 물론 이 와중에 일본제국주의는 동북 4성을 먹어치우고 전선을 중국 전역으로 확산해나갔다.

시대의 격랑에 부응하여 문단 내부도 ‘난장판’이었다. 뜬금없이 임어당의 주도하에 초탈하고 유머러스한 소품문이 부상했는가 하면, 혁명문학 진영에선 주도권 쟁탈을 둘러싼 별별 논쟁이 시도 때도 없이 벌어졌다. 루쉰은 이 모든 흐름의 한가운데서 ‘진흙투성이의 격투’를 즐겼다. 그의 무기고는 잡문이었다. 소품문도 아니고 비평문도 아닌, 투창과 비수로서의 잡문! 잡문은 짧고 경쾌하고 유연하다. 그리고 악착스럽다. 루쉰 같은 게릴라 전사에겐 딱이다.


▎상하이의 맑은 하늘. 루쉰이 살았던 1930년대는 더 맑았겠지만 ‘대지의 인간’이었던 그는 그 하늘을 만끽하지 못했을 것이다.
하지만 이 해에 그는 아주 특별한 소설집에 몰두한다. “1935년 12월, 좌련이 해산의 위기에 직면했을 때, 루쉰은 상고사로부터 제재를 취한 소설 네 편을 연속해서 썼다.”(<인간루쉰> 2권, 635쪽) 그리고 이듬해 1936년 1월에 책으로 출판했다. <고사신편(古事新編)>이 그것이다. 거기에는 모두 8편의 소설이 들어있는데, 이 작품들의 연대기를 합치면 장장 13년이다. <하늘을 땜질한 이야기>는 1922년에, <달나라로 도망친 이야기>와 <검을 벼린 이야기>는 1926년에, <전쟁을 막은 이야기>는 1934년에 썼다. 그리고 <홍수를 막은 이야기> <관문을 떠난 이야기> <고사리를 캔 이야기> <죽음에서 살아난 이야기>는 1935년 말 ‘마치 몰아치듯’ 써버렸다. <외침>과 <방황>를 낸 이후 줄곧 잡문에 몰두해왔던 그로서는 뜻밖의 열정이다. 대체 왜?

제목이 말해주듯, 이 책은 신화와 전설, 민담 등 널리 알려진 고사들에 현재의 사건과 인물, 언어들을 중첩시키는 형식을 취한다. “옛일을 새로 쓴 것이면서 동시에 ‘새로운 일’을 낡은 것에 담아 쓴 것”(유세종, <새로 쓴 옛날이야기> 해제)이다. 그렇다. 이 또한 루쉰의 전투와 도주의 전략이다. 지상에선 국민당 정부의 검열과 협박에 시달리고, 공중에선 일본군의 총탄이 빗발치는데, 뭘 해야 하지? 그저 살아있어야 한다. 살아있음을 증명하기 위해선 써야 한다. 개죽음을 당하지도 않고 전선에서 도피하지도 않는. 그래서 그가 택한 전략은 전선을 넓고 깊게 확대하는 것이다. 동시에 인물들의 심리와 행동은 아주 ‘깨알같이’ 클로즈업한다. 독자들은 당혹스럽다. 웅대한 서사시인줄 알았는데, 알고 보니 시트콤이라는. 적들도 헷갈리긴 마찬가지다. 대체 어디를, 어떻게 공략해야 하는 거지?

이 소설집의 주인공은 여와, 미간척, 백이와 숙제, 노자와 장자, 우임금과 묵자 등 고대사의 주역들이다. 신화적 아우라에 빛나는 인물들이다. 허나, 루쉰은 그런 후광을 완전히 제거해버렸다. 활의 명인 ‘예’는 ‘까마귀짜장면’ 때문에 마누라한테 배신당하는 인물이고, 백이·숙제는 절개를 지키려 수양산에 들어갔지만 고사리 맛에 취해 주변 생태계를 파괴해버린다. 장자는 백골을 부활시키는 이적을 행했지만 다시 살아난 시체한테 온갖 곤욕을 다 치른다. 신화적 우상에 대한 계보학적 탐사, 아니 그 이상이다. 아울러 당대 정인군자들과 허세에 쩐 문학인들, 관료들을 곳곳에 등장시켜 잘근잘근 씹어댄다. “어떤 논쟁에도 다 그렇지만, 사자가 토끼를 쫓는데 전력질주를 하는 느낌이 그의 논쟁 태도에는 있다. 결코 방심하지 않는다. 그 대신 쟁점을 단순화하는 특기가 그에게는 있다…. 정말 명인의 솜씨라 하겠다.”(다케우치 요시미, 앞의 글)

에로스, 또는 창조의 유희


▎루쉰의 상하이 옛집의 존재를 알리는 동판. 루쉰은 폐병이 자신을 잠식해가던 때에 이곳에서 살았다.
그렇다. 그는 고대사로 후퇴한 것이 아니라, 논적들을 데리고 머나먼 시간여행을 시도한 셈이다. 왜? 지금, 여기의 사건이 아주 연원이 깊다는 것을 환기하기 위해서다. 근원을 거슬러 올라감으로써 길 찾기를 시도하는, 이른바 ‘백투더퓨처’의 전략이다. “나는 사회의 여러 암흑을 공격하려 하는 것이지. 오로지 국민당을 목표로 하는 게 아니라네. 이런 암흑의 근원은 멀게는 1000~2000년 전까지 거슬러 올라가지. 물론 수백, 수십 년 전에도 있고. 다만 국민당이 집권한 다음 그것을 근절하지 못한 것일 뿐이라네. 지금 그들이 내 입을 막는 것은, 마치 위아래로 수천 년 동안 이어진 암흑을 숨기려는 것과도 같지.”(<인간 루쉰> 2권, 511쪽)

아, 그렇구나! 그래서 장장 13년에 걸쳐 이런 식의 작업을 지속해왔고, 생애 마지막 연도에 ‘마치 묵은 숙제를 하듯’(유세종) 완성에 박차를 가한 것이다. 그런 점에서 <고사신편>은 루쉰적 글쓰기와 사상의 압축파일에 해당한다.

<하늘을 땜질한 이야기>의 주인공은 여와다. 서양의 창조주가 남성이라면, 동양은 여성이다. 여와는 어느 날 문득 깨어나 흙을 빚어 사람을 창조한다. 그 원동력은 에로스다. “그녀는 이 연분홍빛 천지 사이를 걸어 해변으로 갔다. 그녀 온몸의 곡선이 연한 장밋빛 같은 바닷속으로 녹아들었다. 몸 가운데가 짙은 순백의 빛이 될 때까지 녹아들었다. 파도는 모두 깜짝 놀랐지만 질서 있게 일어났다 가라앉았다 했다. 물보라가 그녀 몸 위로 올라와 흩어졌다…. 그녀는 무심하게 안쪽 무릎을 꿇고 손을 뻗어 물기를 머금고 있는 부드러운 흙을 쥐어 올렸다. 동시에 그것을 몇 번 비벼댔다. 그러자 곧바로 자기와 거의 비슷하게 생긴 작은 것들이 양손에 생겨났다.”(<새로 쓴 옛날 이야기>, 15쪽) 인간이 탄생한 것이다. 희열과 피로가 동시에 그녀를 감쌌다. 하지만 그녀는 더 많이, 더 빨리 만들고 또 만든다. 왜? 아무 이유 없다! 굳이 이유가 있다면 창조 그 자체가 주는 즐거움 때문이다. 에로스란 창조의 유희에 다름 아니다. 하지만 인간들은 탄생과 더불어 그 원동력을 망각해버린다. 창조의 기쁨은 잊은 채 영생과 소유에 골몰한다. 신선술을 닦으며 여와를 떠받들거나 아니면 문명과 제도를 구축하여 권력을 증식하느라 바쁘다. 온갖 반동적 비루함이 거기에서 비롯된다. 루쉰은 그런 허접한 남성들을 여와의 가랑이 사이로 지나가게 만든다. 자신의 논적들을 한방 멕이기에 딱 좋은 장치다. 왜 5·4운동 퇴조기에 이런 작품을 썼는지도 이해할 만하다. 운동이건 혁명이건 원천은 에로스다. 특히 청년의 에로스는 전복과 창조의 원동력이다. 그에 비하면, 문예사조나 문단권력 따위는 다 신기루에 불과하다. 창조신화를 통해 혁명의 원천을 탐색하기! 루쉰다운 전략이다.

<검을 벼린 이야기>는 복수에 대한 서사다. 주인공 미간척의 아버지는 검을 만드는 명인이다. 미간척이 태어나기 전, 왕은 아버지에게 최고의 검을 만들라는 명을 내린다. 아버지는 3년간 심혈을 기울인 끝에 검 두 자루를 벼렸다. 그 중 하나를 왕에게 바쳤지만 왕은 그 검으로 아버지를 죽인다. 미리 죽음을 예견한 아버지는 또 다른 검을 숨겨두고 길을 떠났다. 아들이 태어나면 이 검으로 복수를 해달라는 부탁과 함께. 미간척이 열여섯 살이 되자 어머니는 아버지의 이야기를 들려준다. 미간척은 아버지가 남긴 푸른 검을 메고 복수의 길에 나선다. 하지만 검을 휘두르기도 전에 왕에게 쫓기는 신세가 된다. 그런 그에게 검은 옷의 사내가 나타나 자신이 대신 복수를 해주겠다고 한다. 어떻게? “네가 나한테 두 가지만 주면 돼.” 하나는 ‘네 검’이고 다른 하나는 ‘머리’다. 대체 그는 누구인가? “너의 원수가 바로 내 원수이고, 그 원수가 곧 나이기도 하단다. 내 영혼에는, 다른 사람과 내가 만든 숱한 상처가 있단다. 나는 벌써부터 내 자신을 증오하고 있단다!”(같은 책, 140쪽) 그의 말소리가 끝나자마자, 미간척은 등에 진 푸른 검으로 자신의 목 뒷덜미를 내리쳤다. 두개골이 땅바닥에 떨어지는 순간 그는 검을 사내에게 넘겼다.

혁명-모두에게 모든 것을, 우리에겐 아무것도!


▎상하이 루쉰박물관에 보관된 루쉰과 민족혼 이미지. 루쉰은 지상을 떠나자마자 중국 민족의 상징이 되었다.
복수의 정념이란 이런 것이다. 나와 너의 구별도, 원한과 원수의 구별도 사라진 경지. 거기에 도달하면 복수가 곧 운명이 되어버린다. 이 작품은 루쉰이 단기서 정권이 저지른 3·18참사로 수배자가 되어 베이징에서 샤먼으로 도주한 뒤에 쓴 것이다. 그야말로 원한이 뼈에 사무치는 시절이었다. 사무치고 사무치면 더 이상 격정과 증오에 시달리지 않는다. 오히려 평온해진다. 왜? 복수와 존재가 혼연히 일체가 되기 때문이다.

에로스가 창조의 원동력이라면 복수는 카오스의 절정이다. 검은 옷의 사내는 검과 미간척의 머리를 들고 왕에게 간다. 금룡이라는 솥에 물을 가득 부은 다음 목탄을 쌓고 불을 지폈다. 사내는 그 솥에 미간척의 머리를 던져 넣었다. 그리고 노래를 부른다. 노랫소리에 맞춰 미간척의 머리가 요동을 치기 시작한다. 그 모습을 보기 위해 왕이 솥으로 다가가자 사내는 검을 뽑아 왕의 뒷덜미를 내리친다. 첨벙! 왕의 머리가 떨어졌다. ‘원수끼리 만나면 본래 눈이 유난히 밝아지는 법’, 솥 안에서는 미간척의 머리와 왕의 머리가 ‘죽기살기’로 서로 물어뜯는다. 싸움이 절정에 이를 즈음, 사내는 자신의 검으로 자신의 뒷덜미를 내리쳤다. 풍덩! 또 하나의 머리가 솥 안으로 들어갔다. 다시 물고 뜯고 쪼는 전투 끝에 마침내 솥 안에는 평화가 찾아왔다. 그제서야 궁전의 신하들은 국자로 세 개의 머리를 건져 올렸다. 맙소사! 대체 어느 것이 왕의 머리인가? 판별불능! 결국 사람들은 세 개의 머리 모두에 제사를 지내는 수밖에 없었다. 모든 것이 뒤죽박죽이 되어버렸다. 이것이 복수의 완성이다. 지독하다. 맞다. 루쉰에게 대충이란 없다. 뭘 하든 ‘독사처럼 칭칭’ 감는다. 루쉰은 말한다. 그게 삶의 기본기이자 최고의 예의라고.

노신의 논쟁은 크게 세 부류로 나뉜다. “1920년대의 전반, 북경에 신문단이 형성되고 있을 무렵 호적, 진원 등 <현대평론>파와 논쟁한 것이 첫째, 20년대 후반 무대를 상해로 옮겨 이른바 혁명문학파들로부터의 집중공격에 정면으로 맞선 것이 두 번째, 그리고 1936년 죽기 직전에 문단 전체를 휩쓴 항일민족통일전선의 조직을 에워싼 대논쟁에서 소수파로서 한 걸음도 물러서지 않은”(다케우치 요시미, 같은 글) 것이 세 번째. 결국 후반부는 좌파와의 논쟁이 대부분이다. 루쉰이 독보적인 것도 이 지점이다. 이념과 노선이 다른 적들과의 싸움은 싱겁다. 그건 루쉰이 아니어도 가능하다. 하지만 같은 진영의 적들과 싸우는 것은 아무나 할 수 없다.

루쉰이야말로 진정 혁명을 갈망했다. 하지만 신해혁명 이래 혁명은 한 번도 혁명인 적이 없었다. 가장 근대적이라는 국민당 정부가 실상은 중국 역사상 가장 ‘강대한 암흑세력’이 되었다. 그가 보기에 ‘민국 이전엔 노예였고, 민국 이후엔 노예의 노예가 되었다.’ 이제 혁명진영은 다시 계급투쟁이라는 깃발을 내걸었다. 루쉰 또한 프롤레타리아 혁명 말고는 길이 없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혁명문학파들의 행동에는 결코 동의할 수 없었다. 입으로는 계급투쟁을 외치지만 실제로는 우두머리 자리를 차지하는데 혈안이 되었고, 무엇보다 너무 유치했다. ‘외부로부터 직수입된 이념을 생경하게 뇌까리고 또 전적으로 위로부터의 명령에 의존하고’ 있었으니 그럴 수밖에. ‘새 부대에 담긴 시어버린 술이자, 붉은 종이로 싼 상한 고기덩어리’에 불과했다. “이른바 혁명이란 다름 아니라 인간을 해방시키는 운동이었다. 그리고 다른 사람을 해방시키는 것은 곧 자기 자신을 해방시키는 것이기도 했다. 만약 혁명의 대오 가운데 새로운 ‘횡포’가 자라나고 있다면 새로운 혁명의 수단으로 그것을 제거해야만 하지 않는가! 인간은 자기 자신에 대해서만 주인일 수 있고 마땅히 그래야만 했다.”(<인간루쉰> 2권, 691쪽)

<홍수를 막은 이야기>와 <전쟁을 막은 이야기>에는 루쉰이 생각하는 혁명, 혁명가에 대한 사상이 투사되어 있다. <홍수>의 주인공은 치수의 레전드로 꼽히는 우임금이다. 때는 ‘바야흐로 도도한 물결이 넘실넘실 산을 에워싸고 구릉을 삼키는’ 순임금 시절, 우의 아버지 곤은 꼬박 9년 동안이나 물을 다스렸지만 아무런 성과도 남기지 못했다. 물길을 ‘막는’ 방법을 썼기 때문이다. 곤은 유배를 가고, 대신 그의 아들 우가 치수의 대업을 이었다. 그가 지형을 파악하느라 천하를 돌아다니는 동안 도회지에선 같잖은 학자들이 모여 우가 벌레이니 뭐니 하며 ‘시간을 죽이고’ 있었다. 드디어 천하를 돌아본 우 일행이 도성에 도착했다. 관청 밖에선 그의 아내가 제 집 앞을 지나면서도 집에 들르지도 않는다며 욕설을 해대고 있고, 그의 발바닥에는 밤톨같이 생긴 굳은살이 촘촘히 박여 있었다.

권위가 덧씌워지면 혁명은 언제나 ‘반혁명’으로 전락


▎루쉰이 1936년 1월 책으로 펴낸 <고사신편>의 삽화. 고대사 주역이 주인공으로 모두 8편의 소설이 실렸다.
“어떤 사람은 내가 명예를 추구하고 이익을 도모한다고 하오. 어떻게 말해도 괜찮소. 내가 말하고 싶은 것은, 내가 산과 호수의 상태를 조사하고 백성들의 의견을 수집하여 이미 그 실상을 다 꿰뚫어보고 난 후에 결심을 했다는 것이오. 어찌 되었든 ‘물을 소통’ 시키지 않고는 아니 되오, 여기 이 동료들도 모두 나와 같은 의견이라오.” 우가 가리키는 곳에는 “시커멓고 여윈, 거지같은 놈들이, 움직이지 않고 말도 없이, 웃지도 않으며 마치 무쇠로 만든 사람들처럼 한 줄로 늘어서 있는 것이 보였다.” 우가 다시 일행과 함께 다시 현장으로 떠나고 오랜 세월이 흐른 뒤, 마침내 천하의 물길이 잡혔다. “논밭의 물은 강으로 유도하고 강물은 바다로 들어가게 유도하”는 방법을 쓴 덕분이다. 치수를 마치고 경성으로 돌아오자 수많은 환영 인파가 몰려들었다. 그 사이로 우 일행이 등장했다. “대열 앞에는 의장대가 없었다. 단지 거지 같은 수행원들의 거대한 무리뿐이었다. 맨 뒤에는 투박하고 거친 손발을 가진, 시커먼 얼굴에 누런 수염, 휘어져 약간 굽은 다리의, 기골이 장대한 사나이가 있었다.”

한편 <전쟁>의 주인공은 겸애를 표방한 묵자다. 강대국 초나라가 약소국 송나라를 치려 한다는 소식을 듣자 묵자는 전쟁을 막기 위해 길을 떠난다. 송나라 국경에 들어섰을 때는 짚신 끈이 이미 서너 번 끊어졌고 신발 바닥은 닳아 큰 구멍이 뚫렸고 발에는 굳은살과 물집이 잡혔다. 초나라 왕을 알현한 자리에서 묵자는 한편으론 의리로 설득하고, 다른 한편으론 공격과 수비의 가상게임을 통해 초나라가 결코 이길 수 없음을 논파한다. 초나라 왕은 결국 전쟁을 포기한다. 평화의 대업을 이룬 것이다. 그럼 그 다음엔? 묵자는 다시 부지런히 돌아왔다. 배고픔과 피곤에 절은 채로. 그리고 “올 때보다 더 재수가 없었다. 송나라 국경에 들어서자마자 두 차례 몸수색을 당했고 도성 가까이 와서는 또 의연금을 모집하는 구국대를 만나 헌 보따리조차 기부해야만 했다. 남쪽 관문밖에 이르러서는 또 큰 비를 만났다. 비를 좀 피할 생각으로 성문 밑에 잠시 서 있다가 창을 든 두 명의 순찰병에게 쫓겨났다. 묵자는 온몸이 흠뻑 젖게 되었고 그 바람에 코가 열흘 이상 막혀버렸다.”

우임금과 묵자, 루쉰은 혁명가란 모름지기 이들과 같아야 한다고 여겼다. 홍수를 잡고 천하를 평정했지만 우임금에겐 어떤 영광도 권위도 없다. 굳은살과 시커먼 얼굴이 전부다. 전쟁을 막고 평화를 수호하는데 성공했지만 묵자에겐 지친 몸과 몸수색, 감기가 기다리고 있을 뿐이다. 당연하지 않은가. 치수건 평화건 모두 생명을 살리는 일이다. 거기에 참여하는 것은 본성이고 자연이다. 다만 그뿐이다. 혁명 또한 그러하다. 그것이 인간을 노예 상태에서 해방시키는 것인 한 어떤 대가도 필요치 않다. 거기에 권위와 상징이 덧씌워지는 한, 혁명은 언제나 ‘반혁명’으로 전락할 수밖에 없다.

이 작품들을 읽을 때마다 떠오르는 말이 있다. “모두에게 모든 것을, 우리에겐 아무것도!” 1994년 나프타협정에 반대해서 일어난 멕시코의 사파티스타 혁명군이 내건 구호다. 루쉰도 혁명이란 그래야 한다고 믿었다. 그러니 분파주의에 권력투쟁을 일삼는 좌파진영의 꼬라지를 어찌 눈감아줄 수 있었으랴.

“나는 죽음을 열망한다”


▎폐병이 가슴을 침범했음을 보여주는 루쉰의 X선 사진. 폐질환은 루쉰의 생애와 가장 어울릴 법한 병이었는지도 모른다.
드디어 폐병이 그의 생을 잠식해 들어왔다. 친구들은 상하이의 유일한 폐병전문의(미국인)에게 진찰을 받게 했다. 루쉰의 표현에 따르면, 그는 “나의 멸망은 이제 얼마 남지 않았다고”, “만일 서양인 같으면 5년 전에 죽었을 것이라고” 선고했다. “나는 그의 처방을 구하지 않았다. 왜냐하면 그의 의학은 서양에서 배운 것이므로 틀림없이 5년 전에 죽은 병자에게 행하는 처방은 배우지 않았을 것이 틀림없으리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유년시절 아버지의 투병과 죽음을 목격하면서 한의학의 부조리를 목격했던 그가 이제 자신의 죽음 앞에선 다시 서양의학의 한계를 날카롭게 풍자한다. 루쉰도 더 오래 살고 싶었다. 하지만 병을 고치는 것이 삶 그 자체보다 더 중요할 순 없다. 치료의 원칙은 단 하나, 지금 하는 일-글쓰기로 전투를 벌이는 것-을 계속 할 수 있느냐 없느냐 오직 그것뿐이다. 그러니 일을 그만두고 치료에 전념하거나 외국에 나가 요양을 한다거나 하는 건 애시당초 고려사항이 될 수 없었다.

하지만 사망 몇 달 전 크게 앓고 나선 죽음에 대한 예감이 뚜렷하게 일었다. 그래서 다소 회복이 되자 그는 유언장을 작성해본다. “1. 장례식을 위해 누구한테서도 한 푼도 받아서는 안 된다-단, 친구들만은 이 규정과 상관없음. 2. 즉시 입관하여 묻고 뒤처리를 해버릴 것. 3. 여하한 형식으로든 기념 비슷한 행사를 하지 말 것. 4. 나를 잊고 자기 생활에 충실할 것-그렇지 않다면 진짜 바보다.”(<죽음>) 등등. 특유의 까칠함, 그리고 약간의 장난기가 느껴진다. 뒤에 붙인 사족이 압권이다. “서양인은 임종 때에는 곧잘 의식(儀式) 같은 것을 행하여 타인의 용서를 빌고 자기도 타인을 용서한다는 이야기를 생각”해냈다. “나의 적은 상당히 많다. 만일 신식을 자처하는 사람이 묻는다면 뭐라 답할까. 나도 생각해보았다. 그리고 결정하였다. 멋대로 원망하도록 하라. 나 역시 한 사람도 용서하지 않겠다.” 오, 아무도 용서하지 않는 자의 죽음! 독하다. 헌데 이 ‘사이다’ 같은 통쾌함은 뭐지? 보통 죽음 앞에선 순해지고 관대해진다. 그것은 대체로 두려움과 연민의 발로일 확률이 높다. 죽음이 목전에 다가와도 그 따위 감상에 빠지지 않는 것, 그렇기는커녕 오히려 투지를 더더욱 불태우는 것, 이것이 루쉰이 죽음을 대하는 ‘쿨한’ 태도다.

1936년 10월 8일 오후. 루쉰은 상하이 청년회관에서 열린 ‘제 2회 중화전국 목판화 이동전시회’를 참관했다. 알다시피, 그는 현대 목판화운동의 선구자다. 전람회와 강습소를 열고, 케테 콜비츠를 비롯하여 세계적인 작가들의 목판화 전집을 내는데 심혈을 기울였다. 목판화야말로 혁명사상을 표현하는 가장 중요한 장르라 여겼기 때문이다. 전시회장에는 사람들로 들끓었다. 루쉰이 등장하자 순식간에 사람들이 그를 둘러쌌다. 전시장 한 귀퉁이에서 몇 명의 청년들과 차담이 시작되었다. 이 장면 역시 사진으로 남아있다. 그가 생전에 찍은 마지막 사진이다. 연재 서두에서도 밝혔듯이, 내가 가장 좋아하는 사진이다. 이 사진의 포인트는 루쉰의 피골이 상접한 얼굴이 아니라 옆에 있는 청년의 미소다. 티없이 맑고 환하다. 루쉰과 함께 있는 것만으로도 행복해죽겠다는 표정이다. 루쉰에게 드리운 죽음의 그림자 따위는 아랑곳하지 않는, 이 환한 생명의 미소. 생애 마지막 순간에 청년들에게 이런 웃음을 선사할 수 있는 이가 얼마나 될까.


▎1936년 10월 19일 새벽 숨을 거둔 직후 루쉰의 모습. 자신의 죽음에 대해 어떠한 종류의 기념식도 하지 말라는 유언을 남겼다.
상하이 루쉰박물관에서도 어김없이 이 사진 앞에 한참을 멈춰섰다. 수없이 본 사진이지만 이번에는 감회가 좀 남달랐다. 그가 죽은 나이보다 한 살을 더 살았기 때문이다. 루쉰을 기준으로 한다면 나는 이제 언제라도 ‘죽을 수 있는’ 나이가 되었다. 죽음을 실감할 때 느끼는 해방감 때문인지, 루쉰의 삶이나 시대가 주는 역사적 무게에서 조금은 벗어날 수 있었다. 무상한 시공의 흐름 속에서 누구든 자기 앞에 주어진 길을 갈 수밖에 없음을 알았다고나 할까. 해서 여행 내내 우리는 루쉰과 더불어 웃고 떠들었다. 박물관 앞에 있는 루쉰 동상은 그가 평생 손에서 놓치 못했던 담배를 물고 있다. 갑자기 장난기가 도져 그 앞에 또 다른 필자인 신근영과 나란히 섰다. 담배 대신 ‘손가락 하트’를 한 채로.

루쉰이라는 우상을 전복하라!


▎상하이 루쉰 무덤에서 루쉰로드에 참가한 필자들과 함께 찍은 사진. 좌로부터 문성환, 신근영, 고미숙, 이희경.
목판화 전시회를 다녀온 지 열흘 뒤, 1936년 10월 19일 새벽 5시 25분 그의 심장이 멎었다. “자신의 피로 범벅이 된 벙커에서, 여명 직전의 가장 어두운 순간에.”(<인간 루쉰> 2권, 764쪽) ‘여하한 형식의 기념식도 하지 말라’던 그의 유언은 지켜지지 않았다. 수많은 군중이 그를 추모했고, ‘민족혼’이라고 씌어진 커다란 깃발이 루쉰의 관 위에 덮였다. 지상을 떠나자마자 민족의 상징이 되어버린 것이다. 이후 다른 영웅들이 대세에 따라 부침을 거듭했지만 그의 명성은 결코 추락을 알지 못했다.

연재글의 필자 ‘문탁’ 이희경 씨의 말대로 사망시점의 절묘한 타이밍 탓일까. 1935년 10월 홍군은 마침내 산뻬이 지역에 도착했다. 대장정의 위업을 완수한 것이다. 그리고 루쉰이 죽은 다음해(1937), 드디어 중일전쟁이 시작된다. 이 격동의 소용돌이 속에서 마오의 카리스마는 눈부신 위용을 발휘한다. 만약 마오의 공산당이 중국을 평정하고 독재권력을 구축하는 시점까지 루쉰이 살아남았다면? 단언컨대 루쉰은 마오를 향해 투창과 비수를 날렸으리라. 또 그랬다면 문화혁명 때는 숙청대상 1호가 되었을지도.

그의 무덤 앞에 다시 섰다. 작년 가을 ‘홍루몽 탐사’의 일환으로 이곳을 지나다 문득 루쉰 로드가 번개처럼 떠올랐던 기억이 난다. 덕분에 우리 공동체 네트워크-감이당, 남산강학원, 문탁, 규문-가 처음으로 함께 길 위에 나설 수 있었다. 가슴 벅찬 경험이었다. 문득 궁금해진다. 대체 그는 왜 우리를 이 길 위로 호명했을까. 혹시 자신의 죽음을 완성하고 싶어서가 아닐까. “지난날의 생명은 벌써 죽었다. 나는 이 죽음을 크게 기뻐한다. 이로써 일찍이 살아있었음을 알기 때문이다. 죽은 생명은 벌써 썩었다. 나는 이 썩음을 크게 기뻐한다. 이로써 공허하지 않았음을 알기 때문이다.”(<들풀>) 그렇다. 그는 자신의 죽음을 열망한다! 그는 우리에게 이런 말을 건네고 싶었던 게 아닐까. 루쉰이라는 우상을 전복하라고, 그 전략과 전술은 나로부터 배우라고. 그 전투를 수행하는 데는 너희 같은 ‘게릴라적 집단지성’이 딱이라고.^^

우리가 여행을 하던 8월 초, 최고의 이슈는 사드배치였다. “한국이 불인(不仁)을 저질렀으니 중국의 불의(不義)함을 탓하지 마라”, “군자의 복수는 십 년도 늦지 않다” 등의 비장한 구호들이 중국 인터넷을 달궜다. 하지만 지금 이 원고를 마감하는 11월 말 사드 정국과는 비교도 안 되는 쓰나미가 대한민국을 삼켜버렸다. ‘최순실’이라는 이름이 모든 이슈를 덮어버렸고, 87년 6월항쟁 이후 가장 많은 군중이 광화문으로 쏟아져 나왔다. 설상가상(?)으로 미국에선 ‘듣보잡’이라 여겼던 도널드 트럼프가 대통령이 되었다. 오 마이 갓! 그렇구나. 세상은 늘 우리의 예측을 배반한다. 아니, 우리의 사상이 시대를 따라잡기에는 턱없이 빈곤한 것인지도. 2017년은커녕 당장 하루 앞도 예측하기 어려운 시절이다. 그러니 어쩌겠는가. 그저 매순간 새로운 한걸음을 내디딜 수밖에. 고로, ‘희망은 허망하다. 절망이 그러하듯’. 그래서 다시 루쉰이다.

고미숙 - 고전평론가. 강원도 정선군에 속한 작은 광산촌에서 자랐다. 고려대학교에서 고전시가로 박사학위를 받았다. 40대 이후 지식인 공동체 활동을 해왔고, 현재는 감이당&남산강학원에서 ‘공부와 밥과 우정’을 동시에 해결하고 있다. 지금까지 낸 책으로는 <열하일기> <웃음과 역설의 유쾌한 시공간> <두 개의 별 두 개의 지도> <공부의 달인 호모 쿵푸스> 등이 있다.

201701호 (2016.12.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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