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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승중 교수의 ‘그리스 문명의 결정적 순간’(10)] 2016 한국에 꽃피운 그리스 직접민주주의 

인류 소망의 정치이념, 역사에 윤회하다 

김승중 캐나다 토론토대 희랍미술고고학과 교수 seungjungkim@gmail.com
너무도 질서정연한 합법적 테두리 안에서 이루어진 직접민주주의 혁명… 분열과 혼란으로 퇴행하는 대신 통합과 질서 속으로 이행

▎아크로폴리스에서 내려다보는 아레오파고스(Areopagos). 이 자리가 전통 깊은 사법 재판소였고, 귀족중심의 정치제도를 상징하는 곳이다. / 사진·김승중
헥토르가 언젠가 나에게 선사한 이 불운의 검.
적군의 땅, 트로이의 흙에 거꾸로 꽂혀 있는
바로 이 자리.
갓 갈아 새파란 칼날이 내 심장을 꿰뚫고
재빠른 죽음을 가져올 수 있도록,
저승의 사자, 헤르메스 신이여
내 몸이 칼을 덮치는 순간에
죽음을 불러주시오, 고통 없이.
그리고 복수의 요정, 에리니에스(Erinyes)들이여
나의 죽음을 목격하시오,
아트레우스(Atreus)의 자손들이 초래한 이 죽음을 말이오.
그들 모두에게 가차 없는 처벌을 내리시오.
태양의 신이여 하늘로 치솟는 당신의 황금마차를 타고
나를 키운 늙은 아비와 비탄의 어미에게 종말의 소식을 전하시오.
아, 불쌍한 여인이여. 그대의 통곡이 온 도시를 채우겠소.
죽음이여, 죽음이여, 어서 와서 나를 보시오.
아니, 어차피 저승에서 봅시다. 그전에
헬리오스, 단 한번 마지막으로
당신의 찬란한 햇빛을 바라보게 하소서.
(소포클레스, <아이아스>의 814∼859행을 저자가 축약해 번역함)



▎아이아스가 자살을 준비하는 장면을 도기화가 엑지키아스가 그려 암포라 모양의 도기를 만들었다. BC 540년경 작품. / 사진·김승중
이 단락은 고대 그리스 3대 비극 작가 중 하나인 소포클레스의 명작 <아이아스>(Sophocles’Ajax: BC 440년경에 쓴 작품)의 클라이맥스를 이루는 독백이다. 트로이 전쟁의 영웅들 중 아킬레우스(Achilleus)에 버금가는 그리스 최고 전사인 아이아스가 그 운명적인 순간, 자살을 하기 직전에 토로하는 절실한 모놀로그다. 이 대사를 읽으면서 엑지키아스(Exekias: BC 6세기 중반에 활동한, 표현이 섬세하기로 유명한 도기화가)가 만든 도기화의 한 장면을 바라보고 있노라면 형언할 수 없는 슬픔의 여운이 맴돈다.

적지인 트로이에서 자신의 라이벌인 트로이의 왕자 헥토르(Hektor)의 장검을 조용히 준비시키고 있는, 아이아스의 자살을 앞둔 마음은 어떠했을까. 자신이 곧 몸으로 덮쳐서 거기에 꽂힐 그 검 말이다. 9척 장신의 거대한 몸집으로 그 유명하고 찬란한 전쟁의 영웅이 어느새 처량하게 쭈그리고 앉아 섬세한 동작으로 거꾸로 꽂은 검 주위 흙을 다지고 있다. 그의 몸이 칼에 떨어지는 순간 빗나가거나 뽑히는 실수가 없도록 흙을 단단하게 준비하는 동작을 통해, 마치 아이아스는자신의 마음을 더욱 더 굳건하게 다지고 있는 듯이 보인다. 자살의 시행을 직접 보여주기보다는 행위를 준비하는 심리적인 긴장감을 표현한 이 작품을 통해, 우리는 자기 자신의 목숨을 끊어야 했던 아이아스라는 비극 영웅(tragic hero)의 필연적 생의 행로를 상기할 수밖에 없는 것이다. 그의 뒤에 서있는 야자수는 도기화에서 흔히 이국적인 땅 트로이를 상징하지만, 축 늘어진 나뭇가지들이 그의 슬픈 내밀의 감정을 표현하고 있는 듯하다. 그에 대비되는, 벽에 꼿꼿이 기대어 서있는 군장비는 곧 거대한 아이아스의 전사로서의 정체성을 나타내는, 굳건하고 남성적인 외피에 불과했던 것일까? 전쟁터에서는 아무에게도 꺾이지 않은 아이아스가 자신의 몸을 보호했던 방패와 헬멧을 벗어던짐과 함께, 가련한 몸과 마음을 노출시킨 셈이다. 그렇지 않아도 벗어놓은 장비들이 마치 살아 숨쉬듯이 그가 하는 행동을 조용히 지켜보고 있지 않는가?

제우스신의 증손자로, 불멸의 영웅 아킬레우스의 가장 친한 친구임과 동시에 그에 못지않은 전사이며, 그리스 측에서 가장 힘이 센 장사로 알려진 아이아스! 그는 또한 우정과 의리를 중요시하는 믿음직한 캐릭터로 <삼국지연의>의 관우(關羽)와도 같은 인물이다. 그러한 그는 도대체 왜 자신의 목숨을 스스로 끊는 처참한 신세를 맞이하게 된 것일까? 그 이유는 아이러니하게도 바로 민주주의의 핵심 관행인 투표를 통해 다수의 의견을 존중할 수밖에 없는 절대적 원칙에 그 원인을 두고 있는 것이다. 소포클레스가 이 작품을 쓴 BC 5세기 중반의 아테네는 고대 그리스의 민주주의의 전형을 상징하는 그러한 문화가 꽃을 피웠던 때와 장소였다.


▎아이아스(왼쪽)와 헥토르(오른쪽)의 결투. BC 490년 두우리스가 그린 킬릭스 컵 모양의 도기다. 파리 루브르 박물관 소장. / 사진·김승중
아이아스와 아킬레우스의 전설적인 우정


▎아킬레우스(왼쪽)와 아이아스(오른쪽)가 체스를 두는 장면. 이 두 인물들의 이름이 각각의 머리 위에 새겨져 있고, 입에서부터 흘러나오는 소리도 ‘넷’ ‘셋’ 등의 숫자가 적혀 있다.
파르테논 신전이 바로 이때 지어지고, BC 460년대에 이루어진 에피알테스(Ephialtes: BC 461년에 사망한 아테네의 정치가. 고대 그리스의 전형적인 민주주의의 근본적인 특성을 에클레시아, 부울레, 법정 등의 제도개혁을 통해 이룩한 장본인으로 알려져 있다. 그는 암살되었지만 그가 정초한 제도는 아테네 민주주의의 기간이 되었다)의 개혁이 더더욱 급진적인 직접 민주주의의 전성기를 초래하였다. 이러한 역사적인 배경을 감안하면 전형적인 비극 영웅인 아이아스의 이야기를 더 깊게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텔라몬(Telamon: 살라미스의 왕)의 아들 아이아스는 아킬레우스의 사촌이자 그의 절친한 친구였다. 두 차례에 걸쳐서 트로이 왕자 헥토르와 아이아스와의 결투 장면이 <일리아드>에 자세히 묘사되어 있다. 첫 번째의 결투에서 비긴 결과로 그 둘은 친선의 선물을 교환하였고, 헥토르가 바로 이때 그의 장검을 아이아스에게 선사했던 것이다. 무예가 뛰어난 아이아스는 거대한 ‘장벽 같은 방패(shield like a wall)’를 든 전투사라는 그의 별칭에 어울리는 방어의 기술이 특기로 알려져 있다. 그리고 흥미롭게도 헥토르의 손에 죽은 파트로클로스(Patroklos)의 시신을 끝까지 지켰던 이가 바로 아이아스였다.

이때 파트로클로스가 입고 있던 아킬레우스의 갑옷과 장비는 헥토르에게 빼앗겼지만, 그의 시신은 성공적으로 회수를 하였던 것이다. 알다시피 사랑하는 파트로클로스의 죽음은 물론 아킬레우스의 초인적인 분노를 활활 불타오르게 하였고, 싸움을 거부하던 그가 다시금 전투에 참여하게 되는 결정적인 계기가 되었다. 그런데 아킬레우스의 원래 갑옷을 빼앗겨버렸기에 어머니 테티스(Thetis)가 대장장이의 신 헤파이스토스(Hephaistos)에게 특별한 요청을 한다. 그래서 신이 만들어 내려준, 찬란한 새 갑옷과 방패를 얻게 된다. 바로 이 갑옷이 끝내 문제가 되었던 것이다.


▎로마시대 폼페이의 벽화. 아킬레우스의 어머니 테티스가 대장장이 신 헤파이스토스에게 아들의 갑옷을 청탁하는 장면이다.
아킬레우스가 결국 트로이의 겁쟁이 왕자 파리스(Paris)의 운명적인 화살을 맞고 전사하게 되었을 때에도, 다른 사람이 아닌 아이아스가 그의 시신을 수거하였다. 듬직한 장수인 아이아스가 이번에는 신이 내려준 갑옷도 빼앗기지 않고, 그가 사랑하는 절친한 동료의 시신을 혼자서 짊어지고 돌아오는 장면이 그리스 도기화에 한동안 유행하였다. 아이아스와 아킬레우스의 전설적인 우정은 잘 알려져 있는 사실이었고, 시신을 짊어지고 돌아오는 그림 외에도, 그들이 방패를 제쳐놓고 바둑 같은 게임을 여유롭게 즐기는 장면 또한 엑지키아스가 전한다.

아킬레우스의 시신과 함께 신이 내려준 그의 갑옷을 성공적으로 회수한 아이아스는, 어느 누가 보아도 당연히 그 유물을 물려받을 자격을 갖춘 인물이었다. 고대 그리스 군대편성 구조를 감안할 때 값비싼 군장비를 군인 각자 스스로 제공해야 하는 호플라이트(hoplite)군에는 갑옷과 무기는 목숨을 걸고 지켜야 할 소중한 물품이었다. 그러기에 반신반인의 아킬레우스가 사용했던 신이 내려주신 갑옷과 무기는 상징성이 부가된, 헤아릴 수 없을 정도로 중요한 물품이었다. 그리고 아이아스는 아킬레우스의 사촌이고 가장 절친한 친구였으며, 그리스 측 전사들 중에서는 아킬레우스 다음으로 무예가 뛰어난 인물이었다. 더구나 아이아스가 몸소 아킬레우스의 시신과 그의 갑옷과 무기를 회수하지 않았던가? 그런데 이렇듯 중요한 물건을 순순히 아이아스가 차지하도록 놓아둘 오디세우스(Odysseus)가 아니었다.


▎트로이에서 아킬레우스의 시신을 짊어지고 돌아오고 있는 아이아스. 아킬레우스의 갑옷과 방패 등이 문제시될 것을 예언하듯 방패가 두드러지게 그려져 있다. BC 540년경의 엑지키아스 작품. / 사진·김승중
아이아스의 비극은 그리스 민주주의의 한계?


▎아이아스와 오디세우스가 아킬레우스의 갑옷을 놓고 결판을 벌인다. 이를 모든 그리스군이 말리고 있는데, 중간의 아가멤논 왕이 제지를 하고 있다. / 사진·김승중
트로이전이 끝나고 기나긴 10년간의 여정에서 수많은 장애를 뛰어넘어 결국 고향으로 돌아가는 꾀쟁이 오디세우스는 트로이의 목마를 구상해낸 장본인이기도 하다. 이 오디세우스라는 인물의 영웅으로서의 주 특성은 메티스(Metis: 꾀, 총명함, 그리고 그러한 기질을 상징하는 여신의 이름)라는 개념으로 지칭된다. 오디세우스가 말발이 세고 정치가적 기질이 풍부한 <삼국지연의>의 조조와 같은 인물임을 생각할 때, 누가 결국에는 이 갑옷 쟁취의 경쟁에서 이겼는지 독자들은 짐작할 것이다.

비엔나 박물관 소장의 두우리스(Douris)가 만든 킬릭스(kylix) 도기화를 살펴보면 아킬레우스의 갑옷과 무기에 관한 내력이 재미나게 표현되어 있다. 킬릭스 컵의 한 면에 아킬레우스의 갑옷을 놓고 패싸움이 벌어지고 있다. 아니, 자세히 보면 칼을 뽑아 드는 두 사람이 서로서로 무지막지하게 덤벼들고 있는 것을 모두가 최선을 다해 말리고 있지 않은가. 왼쪽에 갑옷을 입고 칼을 벌써 빼어 든 아이아스가 덤벼들고 있다. 그의 팔을 두 동료들이 애를 쓰고 잡고 있어도 힘이 겨워 모자라는 듯, 아이아스는 막무가내다. 반면 이를 보고 욱한 오디세우스도 칼을 뽑으려다 잽싸게 한 동료에 의해 제지당하고 있다. 그리고 중간에 끼어 이를 저지하려는 이는 그리스 측의 우두머리 아가멤논 왕이 분명하다.


▎아테나 여신의 보호 아래 누가 아킬레우스의 갑옷을 선사받을지를 결정하기 위해 그리스군들이 투표를 하는 장면. 벌써 오디세우스(왼편)가 이기고 있고 아이아스(오른편)는 절망하는 모습이 보인다.
이 그림으로 보아서는 오디세우스의 잔꾀가 얄미워 억울해서 어쩔 줄 모르는 아이아스가 먼저 덤벼든 것으로 추측이 된다. 벌써 언급했듯이 꾀쟁이 오디세우스는 전략가이고 정치적인 재능이 그 어느 누구도 따라가기 힘든 연설가였던 것이다. 그래서 의리를 중시하고 무예만이 뛰어난 아이아스는, 전방위적으로 민중에게 어필하는 오디세우스 같은 인물에 대항해서는 안타깝게도 이길 방법이 없었던 것이다. 그것이 특히 민주주의적 투표에 의해 결정되는 것이라면 더더욱 두말할 나위가 없다! 두우리스의 킬릭스 뒷면을 보게 되면 아테네 여신이 몸소 바라보는 가운데 시민들이 자그마한 투표용 토큰(혹은 자갈돌)을 제단 위에 내려놓고 있다. 왼편에 토큰이 더 많이 싸여져 있는 것이 뻔히 보인다. 오디세우스가 제일 왼편에 서서 두 손을 흔들며 조마조마한 눈초리로 투표 제단을 바라보고 있다. 반면 아이아스는 오른편 끝에 서서 자신이 지고 있는 것을 이미 깨닫고 비애가 가득한 포즈로 머리를 쥐어뜯고 있지 아니한가!

그리하여 결국 아킬레우스의 전설적인 갑옷은 오디세우스에게 선사되었다. 그러나 이야기는 여기서 끝나지 않는다. 이러한 경위로 아이아스는 전형적인 비극영웅의 결말을 맞이하게 된다. 너무도 부당한 이유로 인해, 스스로 목숨을 끊게 되었던 것이다. 소포클레스의 비극에 의하면 아이아스는 아테나 여신의 술수로 인해 자기도 모르게 미쳐버려서, 오디세우스를 살해한다는 착각 아래 그리스 측 가축들을 모조리 도살해버렸다는 것이다.

정신을 차려보니 자신의 행위가 수치스럽다는 것을 깨닫고는 자살을 결심했고, 부인과 아들을 마지막으로 보고 나서 스스로 세워놓은 헥토르의 칼에 몸을 던진다. 아이아스의 이야기는 민주주의 관행인 다수 의결의 법의 한계에 관한 신랄한 비평일까? 아니면 때때로의 희생이 없이는 민주주의의 사상을 받들지 못한다는 경고일까? 그렇지 않다면 단순히 전쟁의 비극에 초점을 두고, 트라우마 후 스트레스 장애(PTSD: post-traumatic stress disorder)를 앓고 있는 군사들의 상황을 아이아스를 통해 비유적으로 고발한 것일까?

그리스 민주주의 핵심은 시민의 투표권


▎네업톨레모스에게 오디세우스가 아킬레우스의 갑옷과 무기를 선사한다. 아버지의 갑옷을 받은 네업톨레모스는 빈 갑옷을 심오한 눈초리로 감상한다. / 사진·김승중
마지막으로 이번에는 두우리스 킬릭스의 내면을 보자. 술잔에 담겨 있던 탁한 와인을 죽 들이마시면 바닥에 나타나는 장면이 보인다. 알고 보니 오디세우스는 아킬레우스의 갑옷을 자신이 가지지 않고, 결국에는 아킬레우스의 아들인 네업톨레모스(Neoptolemos)에게 선사했던 것이다. 이 장면을 표현하는 킬릭스 내부에는 아킬레우스가 마치 투명인간이 되어 아들의 눈앞에 서 있는 듯하다. 네업톨레모스는 심오한 눈초리로 아버지의 몸이 없는 갑옷, 빈 껍질을 바라보는 듯한 기이한 장면을 우리는 목격한다. 굳이 아킬레우스의 아들에게 갑옷을 주는 장면을 여기다가 왜 그렸을까? 아이아스 입장에서는 억울할지라도, 공식적인 민주주의 방식의 투표를 통해 정해진, 오디세우스가 이긴 결과를 혹시 이러한 식으로 정당화한 것이 아닐까? 이 킬릭스가 만들어진 BC 480년경 페르시아 전쟁으로 인한 혼란의 배경 속에서는 더더욱 민주주의적 질서를 지켜야 했을 이유가 있던 것이다.

고대 그리스에서 탄생했다는 민주주의는 물론 지난 회에도 논했듯이, 하루아침에 이루어진 것은 결코 아니었다. 솔론이 BC 6세기 초에 실시한 개혁이 짧은 기간으로 볼 때는 실패했다고 볼 수 있지만, 바로 그의 개혁이 민주주의의 기본적인 밑바탕이 되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고대 그리스의 특징적인 직접 민주주의의 핵심적인 기관인 에클레시아(Ekklesia: 민중의회)에 사회적 지위에 관계없이 모든 그리스인이 참여할 수 있도록 한 사람이 바로 솔론이었다.

그 후 BC 6세기 말에 마지막 독재자를 끌어내리고 정권을 잡은 클레이스테네스(Cleisthenes, BC 566∼BC 493)가 BC 508년에 실시한 이소노미아(isonomia: 법 아래 모든 이가 평등함을 뜻한다)라는 개념을 중점으로 한 개혁이 진정한 민주주의의 본격적인 시초라고 본다. 클레이스테네스의 개혁은 근본적으로 귀족적인 가족관계에 의존하는 정부 구조를 훨씬 평등한, 지역적인 형태로 바꾸어 관직을 해마다 돌아가면서 뽑는 제도를 체택하였던 것이다(클레이스테네스가 정권을 잡게 된 경위는 지난 회에 티라니사이드Tyrannicide의 이야기를 통해 전달했던 기억이 날 것이다).

그 뒤 BC 462년에 다시 한번 에피알테스(Ephialtes: BC 461년에 사망한 아테네의 정치가이며 민주주의 개혁의 지도자)로 인한 한 단계 더 진보적인 개혁이 씨가 되어 우리가 현재 알고 있는 급진적인 고대 그리스 민주주의 형태가 드디어 완성되었던 것이다. 에피알테스의 개혁은 이른바 사법부의 개혁이었다.

아레오파고스(Areopagos: ‘아레스의 돌’이라는 뜻. 아테네 아크로폴리스의 북서쪽에 위치한 암석으로 된 작은 언덕을 가리키는데 이곳은 재판소로 사용되었다. 그 용어 자체가 사법기관을 일컫는다)라는 전통이 깊은 재판위원회는 그때까지도 주로 아르콘(archon: 집정관)을 했던 귀족 출신의 높은 지위의 연장자들로 이루어졌다. 그들의 결정권을 감안했을 때, 어떻게 보면 아레오파고스는 그 어떤 기관보다도 중요한, 엘리트 중심의 올리가르키(oligarchy)의 마지막 산물이었다.

에피알테스는 곧 아레오파고스의 역할을 최대한 축소시키고, 대신 엘리아이아(Eliaia: 6000명의 30세 이상 시민으로 구성된 재판소. 헬리아이아라고도 불리는데 엘리아이아가 더 정확한 발음이다)로 불리는 공공 사법기관에 그 임무들을 양도했다. 그리하여 아리스토텔레스가 전하는 바에 의하면, 에피알테스의 개혁 뒤로는 살인사건 재판 이외의 모든 사법부 역할이 배심원 제도로 이루어진 엘리아이아에서 행해졌다고 한다. 그뿐만 아니라 입법부의 역할을 하는 에클레시아에서 행정부의 장관들을 뽑았으니, 아레오파고스 같은 귀족 중심의 기관도 결국에는 시민들의 뜻에 의해 좌지우지되었던 것이다.

민주주의와 함께 웅변의 기술도 개화


▎에클레시아(Ekklesia: 민중의회)가 모이는 프닉스(Pnyx)의 반원형의 터. / 사진·김승중
고대 그리스의 ‘직접 민주주의(Direct Democracy)’라 함은 바로 그 핵심이 모든 민중이 참여할 수 있는 투표권에 있는 것이다. 이러한 권리가 정치제도의 개혁을 통해 2500년 전에 모든 이에게 주어졌다는 것은, 전 세계의 역사적 체험을 살펴보더라도, 참으로 기가 막히게 놀라운 사실이다. 30세 이상의 아테네 남성 시민이라면, 그 나날의 일들이 정치적인 활동으로 가득 찼을 정도로 민주주의라는 제도가 그들의 삶 자체를 규정했다고 볼 수 있다. 해마다 돌아가며 500명씩 선발하여 이루어지는 부울레(Boule: 입법의회, 현재의 용어로 말하자면 국회 같은 기관이다. 10부족에서 각각 50명씩 국회의원을 선출했다)는 말 그대로 매일 집회였다.

부울레에 한번 뽑힌 자는 1년의 임기를 마치면 10년 동안 다시 뽑힐 수 없었고, 인생에서 두 번 이상 부울레에 선출될 수 없었다. 여기서 제기된 일들이 에클레시아(Ekklesia: 민중의회, 이러한 기관은 현재의 대의민주주의 제도에는 존재하지 않는다)에서 결정되었다. 적어도 6000명의 정족수를 이루어 열흘 만에 한 번씩 모이는 에클레시아에서 해가 뜨고 질 때까지 모든 일을 표결에 부쳤다. 그 당시 아테네 전체의 시민이 2만 명 정도로 추정되고, 많은 이가 시 중심에서 떨어진 외각에 살았던 것을 감안하면 6000명의 정족수를 이루기 위해서는 시내에 사는 시민이라면 거의 모두가 에클레시아에 참여해야 했다고 볼 수 있다. 나날이 일을 하며 임금을 받고 사는 시민들을 위해 에클레시아에 참석한 대가로 하루의 삯을 지불하기까지 했다.

클레이스테네스의 개혁과 함께 처음으로 에클레시아는 프닉스(Pnyx: 아테네의 남서 지역)라는 야외 집합장소에서 만나기 시작했다. 이는 다른 기관들이 위치한 공관 지구인 아고라(agora)에서 좀 떨어진 곳에서 독립적으로 시행되는 모임의 장소였다. 많은 사람이 편하게 모일 수 있도록, 그리고 이 시끌벅적한 집회가 다른 행정의 일에 방해되지 않도록 하기 위해 정해진 장소였다. 그 언덕의 경사가 아테네 주변의 영토를 바라보고 있어 시민들의 자부심을 돋우는 역할을 했다고도 전한다. 그리고 바로 이 프닉스에서 그 많은 고대 그리스의 유명한 웅변가들이 베마(bema)라는 연설자의 연단(speaker’s platform)에 올라서서 1만 명이 넘는 아테네 시민을 향해 웅변을 토하였던 것이다. 이소크라테스(Isocrates, BC 436∼338), 또는 데모스테네스(Demosthenes, BC 384∼322)와도 같은 웅변술이 뛰어난 오디세우스의 후예들을 배출한 무대가 바로 이 프닉스였다. 그리고 레토릭(Rhetoric)이라 하여 웅변의 기술이 이때부터, 특히 소피스트(Sophist)라는 BC 5세기의 사상가들에 의해 체계적인 학문으로 발달되어갔던 것이다.

BC 4세기 초에 쓰여진 그리스 희극 중 아리스토파네스(Aristophanes, BC 446∼BC 386 그리스의 대표적인 풍자적인 희극작가)의 작품 <에클레시아의 여인들>(Ekklesiazousai: BC 391년 작품)은 여기서 특히 주목할 만하다. 이 작품의 해학적인 전제는 아테네의 정부의 통치가 모두 여자들 손에 들어갔다는 것이다. 그리고 프락사고라(Praxagora)라는 여주인공을 앞세워서 에클레시아에 참석한 여인들만의 모임을 풍자적으로 그린 작품이다. 여기서 코믹한 요건은 물론 성적인 전환에서 비롯된다. 이 여인들은 수염을 붙이고 남장을 하고, 어떤 이들은 햇볕에 살을 태우고 겨드랑이 털도 길러내며 남자처럼 행동하려고 노력한다. 그리고 에클레시아에 모여 앉아서 남장이 불편하다며 투덜투덜거리고, 뜨개질거리를 들고 나왔다가 프락사고라에게 야단맞는 장면도 보인다.

그러나 곧 프닉스 가까이 살았던 프락사고라가 어깨너머 배운 웅변술로 전 에클레시아를 장악한다. 그리고 그녀는 능숙한 솜씨로 현 정부의 타락한 정치가들을 하나하나 비판하고 남편들의 무능함을 빌미로, 왜 여성들이 정부를 운영해야만 하는지 기막힌 논리로 설득력 있는 이유들을 제시한다. 그리고 결국에 그녀는 두 가지의 법률을 창시하는데, 이는 우선 경제적인 동등함을 이루기 위해 개인적인 부를 완전히 금하는 공산주의 체제이고, 둘째로는 섹스의 동등함을 위해 모든 남자들은 예쁜 여자와 잠자리를 하기 전에 항상 못생기고 나이든 여자와 잠자리를 해야 한다는 법률이었다. 민주주의의 핵심인 이소노미아(isonomia)의 정신을 극단적으로 적용한 예다. 이러한 터무니없는 법률에서부터 일어나는 우스꽝스러운 장면들은 설명하지 않아도 짐작하리라 믿는다.

물론 아리스토파네스 희극의 터무니없는 전제의 결과로서, 여성의 투표권이라든지 공산주의 체제와 같은 제도를 실제로 심각하게 구상했던 것은 절대로 아니다. 현실과 상반되는 무대에서 일어날 수 있는 해학적인 상황을 이용하여, 이 극작가는 현 정부에 대한 신랄한 비판을 하고 있는 것이다. BC 390년대에 들어서면, 벌써 스파르타와 펠로포네소스 전쟁(BC 431∼BC 404)을 치른 후다. 아테네가 이 전쟁에서 패배한 결과 아테네의 직접 민주주의의가 스파르타식의 올리가르키로 전환하였다.

아테네 민주주의의 대표적 특징은 오스트라시즘


▎아레오파고스(Areopagos)에서 바라보는 아테네의 아크로폴리스 (Acropolis). / 사진·김승중
특히 BC 404년에 30명의 타이런트(The Thirty Tyrants)에 의한 독재정치의 테러정부가 고작 1년이라는 시기 동안만 지속되었지만, 그로 인한 피해는 회복하기 어려울 정도로 치명적이었다. 그 1년 동안 5% 이상의 아테네 시민들이 반 민주주의적 탄압으로 사형당했다고 한다. BC 403년에 트라시불로스(Thrasyboulos, BC 440∼BC 388, 아테네의 장군이며 민중의 지도자)가 이끈 쿠데타가 성공하여 30인의 독재 정부를 물리쳤다. 이때에 형식적으로는 민주주의 정부의 기관들이 대부분 재생되었지만 고대 아테네의 전성기였던 BC 5세기 동안에 볼 수 있었던 찬란한 문명과 독특한 정치적인 자부심은 이미 찾아보기 힘들었다.

고대 아테네의 민주주의는 역사적으로 볼 때 비록 한 세기라는 비교적 짧은 기간 동안 최상의 형태로 번성한 정치적인 이념이었지만, 그 토대가 전 세계의 역사를 뒤흔들었고, 오늘날에 이르기까지 우리는 그 이념과 실험의 직접적인 영향을 느낀다. 오랜 역사를 거쳐 깊이 잠재되어 있는 엘리트주의를 뚫고 나와서 평등함을 전제로 극도로 새로운 정부 형태를 유지할 수 있었던 이유 중에 하나가, 다름아닌 바로 아테네 민주주의의 또 하나의 특징적인 제도인 오스트라시즘(Ostracism)이다.


▎루돌프 뮐러(1802∼85)가 1863년 그린 유화. 프닉스의 베마에 서서 아크로폴리스를 바라보는 거침없는 경관이다. / 사진·김승중
1년에 한 번씩 독재자가 될 만한 인물이 있다고 판정되면, 모든 시민으로 하여금 도편 투표에 의해 그중 한 사람을 뽑아 10년 동안 아테네에서 가차 없이 추방시켰다. 오스트라시즘이라는 이 비상한 제도에 의해서 새 민주주의의 형태가 어느 정도 자리를 잡을 수 있게 되었던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오스트라시즘이 처음으로 실행된 때는 바로 BC 490년에 일어난 마라톤전투 이후다. 이때 아테네의 마지막 독재자 히피아스(Hippias, BC 490년 사망: 티라니사이드들에게 살해당한 히파르코스Hipparchos의 형이며 스파르타의 도움으로 BC 510년에 끌어내려진 마지막 타이런트)가 페르시아에 20년간 피신해 있다가 다시 정권을 잡을 생각으로 그들과 같이 마라톤에 쳐들어왔던 것이다. 이를 계기로 아테네의 시민들은 그 사건 이후로는 그 어느 누구라도 타이런트가 될 만한 정치적인 영향력을 기르지 못하게 단단히 경계했던 것이다.

그렇지 않아도 아테네의 시 중심인 아고라(agora)에서 오스트라콘(ostrakon)이라 불리는 수많은 ‘투표용지’가 발굴되었다. 오스트라콘은 주로 깨진 도기의 조각을 이용하여 추방하고자 하는 이의 이름을 새겨놓은 투표용지인 것이다. 6000명 이상이 투표해서 정족수에 달하면 가장 많은 오스트라콘을 받은 사람이 즉각 추방을 당했다(10일 이내로 아티카를 떠나야 했고 10년을 밖에 머물러야 했다. 그러나 아테네의 재산 보유는 인정되었다). 여기에서 보이는 이름 중 히포크라토스(Hippokratos)의 아들 메가클레스(Megakles)는 BC 486년에 오스트라시즘을 당했던 것을 우리는 잘 알고 있다. 아고라에서 발굴된 4000여 개의 오스트라콘에 메가클레스의 이름이 보이는 것으로 비춰볼 때, 아마도 그는 무척이나 인기가 없었던 모양이다!

물론 어느 시절이나 정치적 비리는 있기 마련이다. 이 제도를 이용하여 정치적인 반대파를 제거하는 데에 쓰인 단서들도 보인다. 예를 들어 아크로폴리스 북쪽 기슭에서 함께 발굴된 190개의 오스트라콘을 보자. 이 190개 모두에 네오클레스(Neokles)의 아들, 테미스토클레스(Themistokles)의 이름이 새겨져 있다. 이 인물이 다름아닌, 아테네 시민들을 피신시켜서 많은 목숨들을 구하고, 해상 전투력을 길러서 살라미스 해전(BC 479)에서 그리스-페르시아 전쟁을 승리로 이끈, 바로 그 아테네의 히어로 테미스토클레스다! 그런데 이 190개의 오스트라콘이 단지 4사람의 필기체로 쓰여졌다는 사실이 무척이나 흥미롭다. 페르시아 전쟁의 영웅도 결국에는 정치적인 이유로 미움을 사게 되어 BC 472년에 추방을 당했던 것이다. 그리고 그의 이름을 단체로 미리 새겨 놓은 이 오스트라콘이 전달하는 이야기는, 마치 안타깝게도 우리에게 너무나도 잘 알려져 있는 부정투표 조작 등, 정치적인 비리 현상을 다시금 목격하는 것 같아 답답하기 그지없다.


▎프닉스(pnyx)의 포커스인 연단(speaker’s platform). 이를 그리스어로는 베마(bema)라고 불렀다. / 사진·김승중
직접민주주의 부정했던 플라톤


▎테미스토 클레스의 이름이 새겨진 오스트라콘. 아크로폴리스 근처에서 모두 그의 이름이 새겨져 있는 190개의 오스트라콘이 한꺼번에 발견되었다. / 사진·김승중
지금 우리는 이른바 민주주의라는 정치적 질서의 실상을 정확히 파악해야만 할 카이로스에 도달했다. 우리에게 ‘민주주의’는 예수가 말하는 ‘하느님의 나라’와도 같이 거의 신격화된 좋은 의미로만 사용되며, 그 제도의 이상성에 관해 아무도 회의를 품지 않는다. 그러나 그 민주주의를 생산한 고대 그리스인들에게 ‘데모크라티아’라는 것은 항상 검토되어야만 하는 불안한 개념이었으며, 많은 사람에게 좋은 함의를 지니지 못했다. 그들의 민주주의는 ‘다수의 독재’를 의미했으며 또 민주주의를 활용한 정치적 비리가 끊임없이 발생했다.


▎아테네의 아고라에서 발굴된 오스트라콘. 오른편에 3개 모두 히포크라토스의 아들 메가클레스를 지칭하고 있다.
그리스의 민주주의는 기본적으로 ‘직접민주주의’였기 때문에 그 직접성이 항상 합리적 구조를 갖기는 매우 어려운 일이었다. 플라톤도 존경하는 스승, 소크라테스가 재판받는 자리에 있었으며, 자기의 스승이 민주주의의 불합리성에 의하여 사약을 마시는 장면을 목격했다. 그는 민주주의를 저주했으며, 매우 강압적인 철인통치의 이상국가를 구상했다. 오늘날 우리가 체험하는 공산국가 체제의 대부분이 플라톤의 반 민주주의적 사유에서 그 정당성을 발견하고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희랍의 민주주의 정신은 2200∼300년이 지난 뒤 미국의 독립과 헌법에 의해 희랍과는 다른 근대적 형태로 부활했지만, 그 총제적 결론은 ‘트럼프의 당선’이라는 매우 참담한 결과로 드러나고 있다. 아무리 제도가 좋다고 할지라도 제도를 운영하는 인간의 도덕성이나 비전이 결여되었을 때는 아무런 소용이 없다는 것이 입증된 셈이다. 그리고 미국의 양당정치의 밸런스보다 더 근원적인, 자본주의적 침탈에 대한 반성과 제국주의적 찬탈에 대한 회개가 없이 패권의 부도덕성만을 축적하여온 역사는 민주의 가치를 구현할 자격을 잃고 만다는 것이다.

그에 반하여 한국의 ‘박근혜 탄핵’은 21세기에 유일하게 체험하는, 아니 근대적 민주주의가 미국독립선언과 프랑스혁명을 계기로 정착된 이래 처음으로 국제사회에 등장한 ‘직접 민주주의’의 한 장면이다. 그 과정이 너무도 질서정연한 합법적 테두리 안에서 이루어졌다는 의미에서 기존의 어떠한 혁명의 가치를 뛰어넘는 것이다. 미국사회는 분열과 혼란 속으로 퇴행하는데 한국사회는 통합과 질서 속으로 회복하고 있는 것이다. 미국사회는 비리가 심화되는데 한국사회는 전국민이 각성하여 비리를 걷어내려고 발버둥치고 있는 것이다.

‘박근혜 탄핵’은 인류 민주주의 정신의 승리의 한 찬란한 측면이다. 희랍의 직접민주주의와 비교해볼 때 한국의 직접민주주의는 고양된 시민의식이 두드러진다. 단지 그 시민의식을 담아내는, 대의민주주의를 구성하는 소수 정치인의 의식이 국민의 직접적 소망, 그 치국의 대의(大義)를 구현하지 못하고 있다는 아쉬움만 남는다. 한국의 정치인들이 조작적인 소체(小體)의 이(利)를 탐하지 않고 아테네 민주주의 이상 이래 인류가 누리지 못했던 새로운 꿈을 실현해줄 것을 당부한다.

김승중 - 서울대학교 천문학과를 졸업하고 미국에 유학했다. 프린스턴대 천체물리 학과에서는 우주론을, 콜롬비아대학 예술사고고학과에서는 희랍미술을 전공해 각각 박사학위를 받았다. 콜롬비아 박사과정에 들어가기 전에는 버지니아대학에서 미술사학 석사코스를 밟았다. 이 시기 다양한 현지발굴 프로젝트에 참여하여 고고학의 생생한 지식을 얻었다. 현재 캐나다 토론토대학교에서 희랍미술고고학을 가르치고 있다.

201701호 (2016.12.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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