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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영수 교수의 ‘조선을 만든 사람들’(12)] 신돈(1) 문수보살인가, 사승(邪僧)인가 

개혁세력 제거하고 개혁 추진한 ‘왕의 남자’ 

김영수 영남대 정외과 교수
공식적으로 공민왕 14년에 등장, 실제로는 8년 전후 영향력 행사한 듯… 백성의 삶 편하게 해주겠다던 ‘초심(初心)’ 잊은 뒤 우군마저 잃어버려

▎신돈은 무더운 여름이나 추운 겨울이나 늘 해진 장삼 한 벌로 버텼다고 한다. MBC 사극 <신돈>에서 신돈 역을 맡은 배우 손창민이 먼발치를 바라보고 있다.
위대한 인물일수록 적과 친구가 분명하게 갈린다고 한다. 고려사에서 신돈(辛旽, ?~1371)만큼 적과 친구가 분명하게 갈리는 인물도 드물다. 당대부터 그랬다. 백성들은 “성인이 나왔다”고 기뻐했고, 문수보살의 화신으로 추앙했다. 하지만 당대의 고승 태고(太古) 보우(普愚) 국사는 ‘삿된 승려’(邪僧)로 비판했고 이제현은 ‘흉인’이라고 평했다.

<고려사>의 사신(史臣)도 희대의 요승으로 평가하고 있다. 그러나 현대의 역사가들은 대체로 신돈을 좌절한 개혁자로 평가한다. 그리고 신돈을 악평한 역사 기록이 왜곡됐다고 주장한다. 그 이유는 조선건국을 합리화하기 위한 것이라고 본다.

위화도회군에서 돌아온 이성계는 우왕과 창왕을 처형하면서 신돈의 후예라고 주장했다. 왕을 처형했다는 혐의를 면하고자 한 것이다. 그 이유는 명나라와의 관계 때문이다. 명나라는 이인임에게 공민왕을 암살했다는 죄를 뒤집어 씌워 14년간 집요하게 괴롭혔다. 그 결과 양국관계가 파탄이 나 요동정벌까지 나선 것이다. 조선의 사관들이 신돈을 긍정적으로 서술할 수 없었던 것은 확실하다. 그래서 역으로 신돈을 완전히 긍정적으로 볼 수 있는 것일까?

정치·군사·법률·종교 총괄, 사실상의 왕(王)


▎공민왕과 노국대장공주의 영정.
1365년(공민왕14) 5월 공민왕은 승려 편조(遍照)를 국사(國師)로 삼고 모든 국정을 자문했다. 편조는 신돈으로, 집권 뒤 공민왕이 직접 지어준 이름이다. 공민왕은 정치의 전면에서 퇴장했고, 편조에게 왕과 동일한 권력을 부여했다. 이후 6년간에 걸친 신돈의 섭정시대가 펼쳐졌다. 장년의 왕이 스스로 왕권을 포기하고 타인을 대리인으로 세운 것은 고려는 물론 한국 역사에서도 유일한 사례이다. 불교는 1000년간 국교의 지위에 있었지만, 승려가 최고 권력에 오른 것도 유일무이하다. 묘청은 큰 정치적 영향력을 발휘했으나, 그도 정권을 직접 장악하지는 못했다.

고려는 승과제를 통해 불교를 국가 안에 포섭했으나, 승려의 정치 개입은 엄격히 금했다. 왕은 왕사(王師)와 국사에게 아홉 번 절하고 제자의 예를 취했으며, 때때로 자문도 받았다. 그러나 그걸로 끝이었다. 불교와 국가의 관계는 최승로 <시무28조>에서 잘 제시되고 있다. 불교는 수신(修身)의 근본이며 유교는 이국(理國)의 근원이라는 원칙이 그것이다. 불교의 영향력은 정신의 영역에 그친다는 의미이다. 정치는 전통적으로 문벌과 유교적 교양을 지닌 세습귀족들의 영역으로 간주됐다. 신돈의 집권은 500여 년 지속된 이 원칙을 깬 것이다. 그만큼 상상을 뛰어넘는 사건으로 고려의 정치가들에게 큰 충격을 줬다.

동년 12월에는 ‘수정이순논도섭리보세공신(守正履順論道燮理保世功臣)·벽상삼한삼중대광(壁上三韓三重大匡)·영도첨의사사사(領都僉議使司事)·판중방감찰사사(判重房監察司事)·취성부원군(鷲城府院君)·제조승록사사(提調僧錄司事) 겸 판서운관사(判書雲觀事)’라는 어마어마한 직함을 내렸다.

‘수정이순논도섭리보세공신’의 뜻은 “올바른 것을 지키고 순리에 따르며, 도를 논하고 음양을 고르게 다스리며 세상을 보호하는 공신”이다. 음양을 고르게 다스린다는 것은 백성의 원통하고 억울한 사정을 풀어주는 것이다. 당시의 세계관에 따르면 하늘은 인간과 연결돼 있어서 백성이 억울하고 원통한 마음을 품으면 음양이 조화를 잃어 기후가 불순하다고 생각했다. 이런 역할을 하는 공신이란 왕과 동등한 수준의 유덕자라 할 만하다.

‘벽상삼한삼중대광’이란 정1품직 문관의 품계다. ‘벽상삼한’이란 벽에 초상을 그리거나 벽에 초상화를 걸어 영원히 기리는 중신을 뜻한다. 도첨의사사는 고려 초기의 3성(중서성·문하성·상서성)을 합한 기관이다. 처음에는 첨의부(僉議府)라고 하다가 도첨의사사(都僉議使司)로 고쳤다.

이렇게 개명한 이유는 원나라 지배기에 원과 동급의 관서명을 쓸 수 없어 낮췄기 때문이다. ‘영도첨의사사사’는 도첨의사사의 영사, 즉 최고 책임자이다. 조선의 영의정에 해당한다. ‘판중방감찰사사’에서 중방은 중앙군인 2군(軍) 6위(衛)의 정·부지휘관 정3품 상장군(上將軍)과 종3품 대장군(大將軍)이 모인 총 16명의 합좌기구다. ‘판중방사’는 이 합좌기구의 장으로, 중앙군 최고 지휘관에 해당한다.

감찰사는 시정(時政)을 논집하고 풍속을 교정하고 백관을 규찰·탄핵하는 기관이다. 판감찰사사는 이 기관의 장이다. 부원군은 정1품 공신에게 준 작호다. 받는 사람의 본관(本貫)인 지명(地名)을 앞에 붙였다. 즉 취성부원군은 취성이 본관인 정1품 공신을 뜻한다. 취성(鷲城)은 신돈의 고향인 영산(靈山)의 별칭이다. 영산은 신씨(辛氏)의 본관이다.

제조승록사사(提調僧錄司事)는 불교를 총섭하는 종교 수장이다. 판서운관사(判書雲觀事)는 천문(天文)·역수(曆數)·측후(測候)·각루(刻漏)의 일을 담당하는 서운관의 장이다. 하늘을 관측하고 달력을 만들고 절기를 나누며 기후를 관측하고 시간을 측정하는 일을 하는 것이다. 하늘과 땅의 일을 살피는 것은 천자와 왕자의 대업이다. 요컨대 신돈이 부여받은 직위는 정치·군사·법률·종교를 총괄하는 것이었다. 품계는 정1품이지만 사실상 왕권을 부여받은 것이다.

신돈은 화엄종 계통의 승려로, 어려서 출가했다. 아버지는 알 수 없고 어머니는 영산 계성현(桂城縣)의 옥천사(玉泉寺) 종이었다. 그녀는 다시 강씨(姜氏)와의 사이에서 신돈의 이복동생 강을성(姜乙成)을 낳았다. 영산은 현재의 창녕군이다. <고려사>에 신돈의 아버지 묘가 이곳에 있었다는 기록이 있으니 무명의 인물은 아니었을 것이다. 하지만 모계의 혈통에 따라 그 역시 종의 신분으로서 절에서 자란 것이다.

그는 어려서 출가해 승려가 됐다. 하지만 신분 때문에 다른 승려들로부터 따돌림을 당해 산방에 홀로 떨어져 살았다고 한다. 옥천사는 신돈이 처형된 뒤 폐사(廢寺)됐지만, 그 유허(遺墟)는 지금도 남아 있다.

공민왕이 신돈을 처음 만난 것은 명덕태후의 거소에서였다. 어느 날 공민왕은 이상한 꿈을 꿨다. 누군가 자기를 칼로 찌를 때 어떤 승려가 구해주는 꿈이었다. 이튿날 모후인 명덕태후의 거소에 갔을 때 김원명(金元命)이 한 승려를 소개했다. 그런데 그 승려가 꿈속의 인물과 흡사했다고 한다. 김원명은 무장으로 명덕태후의 인척이자 공민왕대의 명신 김속명의 친형이다.

사시사철 장삼 한 벌, “나는 문수보살이로소이다”


▎개성에 있는 공민왕릉. 쌍릉 형식으로 병립돼 있으며 서쪽에는 공민왕의 현릉, 동쪽에는 노국공주의 정릉이다.
신돈은 무더운 여름이나 추운 겨울이나 늘 해진 장삼 한 벌로 버텼다고 한다. <고려사>의 사신은 신돈이 청빈한 수행자를 가장했다고 한다. 하지만 사치에 젖어 있던 당시 불교계의 풍토에서 그의 풍모는 남달랐던 게 분명하다. 공민왕은 인품이 고결한 사람에게 존경심을 가진 사람이었다. 이색과 이인복에 대한 예우가 극진했던 것을 보면 알 수 있다. 공민왕은 신돈 역시 존중해 모든 의복과 음식을 보낼 때 반드시 정결히 하며 버선까지도 반드시 이마에 받들어 공경히 보냈다.

신돈은 자신을 화엄신앙인 문수보살의 화신으로 여겼다고 한다. ‘문수’는 산스크리트어 만주스리(Manjusri)에서 온 말이다. <화엄경>에서는 비로자나불의 협시보살(脇侍菩薩)로서 보현보살과 함께 삼존불의 일원이다. 이 보살은 ‘지혜’의 화신이다. 신돈의 법명 편조도 ‘광명편조’의 약어로 “광명을 널리 비춘다”는 뜻이다. 이는 비로자나불을 일컫는 산스크리트어 비로카나(vairocana)를 의역한 것이다.

법명에서도 그의 자부심을 읽을 수 있다. 미천한 신분과 승려들의 따돌림 속에서도 신돈은 자기 향상에 매진한 것이다. 실제로 그는 매우 총명하고 달변이었다. 글은 몰랐지만 “늘 도성을 오가면서 불법을 전파하는 척하며 과부들을 허황한 말로 꾀어 정을 통했다”고 한다. 공민왕을 만나기 전에 그는 이미 개성의 부녀자들 사이에서 나름 유명세를 치르고 있었던 것이다. 불교를 존신(尊信)한 명덕태후의 거소에 올 수 있었던 것도 아마 그 덕분이었을 것이다.

신돈은 공민왕 14년에 공식적으로 등장했다. 하지만 실제로는 공민왕 8년을 전후해 이미 중요한 영향력을 행사하기 시작했던 것으로 보인다. 무장 이승경(李承慶)과 측근 정세운이 “국가를 어지럽힐 자는 반드시 이 중”이라고 해 신돈을 죽이려 했으므로 왕은 그를 피신하게 했다고 한다. 이승경의 몰년(沒年)이 1360년(공민왕9)이므로 일찍부터 국가를 어지럽힌다는 우려를 불러일으킬 정도의 정치적 영향력을 가지고 있었던 것이다.

공민왕 1359년 4월 중방이 “예로부터 승려들은 궁궐 문에 들어 올 수 없는데 이제 왕께서 불법을 숭신(崇信)해 출입을 막지 않으니 청컨대 이를 금하소서”라고 했다. 이는 신돈을 가리키고 있는 것으로 생각된다. 또한 공민왕 11년 10월 김속명의 상소에 따르면 “왕이 환관·승려·잡류의 말만 때때로 들을 뿐, 대신들도 오직 왕의 명령대로만 행동하기를 원했기 때문에 직언하는 길이 끊겨 정치적 곤경을 자초하고 있다”고 주장했다. 12년 5월, 백문보의 유명한 ‘척불소(斥佛疏)’도 당시 불교가 군주를 홀리고 백성을 해쳐, 직언하는 길이 막히고 국가가 붕괴될 위기에 직면했다고 극언했다.(<담암집 :淡庵集>)

당시 불교계의 주류에서도 역시 신돈의 정치적 부상에 대해 우려를 표명했다. 공민왕 12년 무렵 왕사 보우는 왕에게 신돈 문제를 경고했다. “스님은 나라의 위태로움을 생각하고 개탄하며 글을 올려 신돈에 대해 이렇게 논하셨다. ‘나라가 다스려지면 진승(眞僧)이 제 때를 펴고, 나라가 위태로워지면 사승이 때를 만납니다. 왕께서 살피셔서 그를 멀리하시면 국가에 큰 다행이겠습니다.”(<태고록 : 太古錄>)

“수행 굽히고 세상 구하라” 공민왕의 강청(强請)


▎최영 장군의 영정. 그는 신돈 집권 후 심한 견제를 받았다. / 사진·중앙포토
보우는 신돈 집권기에 생명까지 위협 당했다. 신돈은 집권 이전에 이미 무신(중방·최영), 측근(정세운·유숙), 문신(김속명·백문보), 그리고 불교계로부터 심한 견제를 받았다. 이 때문에 공민왕은 신돈을 피신시켰다. 공민왕 11년 강경한 반대자인 정세운이 죽은 뒤 신돈은 정계에 복귀한 듯하다. 왕은 그에게 청한거사(淸閑居士)라는 호를 내리고 사부로 칭하며 국사를 자문하니 말을 좇지 않음이 없었다고 한다.

그런데 신돈은 본래부터 집권까지 원했던 것은 아니다. 그는 왕의 요청을 거절했다. 그러나 공민왕이 “수행을 굽혀 세상을 구할 것”을 청했다. 신돈에 따르면 그는 “산수 간에 한 중인데 왕께서 억지로 이에 이르게 하시므로 감히 명을 어기지 못했다”고 한다. 왕이 거듭 강청(强請)하자 신돈은 전제조건을 달았다. “일찍이 듣건대 참소와 이간을 왕과 대신이 매우 믿는다 하니 원컨대 이같이 하지 않으면 세상을 복되고 이롭게 할 것입니다.” 왕의 절대적 신임을 요구했던 것이다. 그러자 왕은 “스승은 나를 구하고 나는 스승을 구하여 사생(死生)간에 사람의 말에 미혹함이 없을 것을 부처와 하늘은 증명하리라”고 확약했다. 그러나 신돈 역시 끝내 그러한 운명에서 벗어나지는 못했다.

이처럼 공민왕이 강청한 이유가 있었다. 가장 결정적 이유는 왕비 노국공주의 죽음이었다. 그녀가 죽자 공민왕은 삶에 대한 의욕 자체를 상실했다. 그러니 국가와 정치는 말할 것도 없었다. 상황이 더욱 좋지 않았던 것은 그 이전에 이미 신하들과의 불화가 심각했다는 사실이다. 홍건적의 난에서 국가를 구한 정세운·안우·김득배·이방실을 처형하면서 공민왕은 신민의 믿음을 크게 잃었다. 정몽주가 쓴 김득배 제문을 보면 그 사실을 알 수 있다.

그런 와중에 가장 신뢰했던 측근 김용이 반란을 일으켜 공민왕을 죽이려고 했다. 1364년(공민왕13) 덕흥군이 원의 군대 1만을 이끌고 압록강에 도착했을 때 백성들이 덕흥군을 지지했다는 사실은 이인임과 경천흥의 대화에서 알 수 있다. 공민왕은 최영의 활약 덕분에 가까스로 덕흥군의 군대를 막을 수 있었다. 하지만 그 무렵 공민왕을 사로잡았던 핵심적 인식은 주위에 대한 불신이었다. 공민왕은 이런 모든 사건이 초래한 정치적 긴장에 지쳐 있었다.

외형상으로만 보면 사실 덕흥군의 난이 끝났을 때 공민왕은 가장 이상적인 환경에 있었다. 원나라와 친원파 권문세족, 왕위 경쟁자 등 그를 둘러싼 모든 장애가 제거된 것이다. 만약 그가 개혁을 원했다면 그때가 최상의 적기였다. 하지만 그 무렵 공민왕의 내면적 상황은 최악에 가까웠다. 그는 무력감에 빠져 가까스로 현상을 유지하고 있었다.

공민왕 14년 2월, 노국공주가 아기를 낳다 세상을 떠났다. 공민왕이 그토록 바라던 왕자였고 세상의 유일한 친구였던 왕비였다. 그 두 사람이 함께 세상을 떠났다. 공주가 난산으로 생명이 위태로워지자 왕은 향을 피우며 그 곁에 앉아 잠시도 떠나지 않았다.

하지만 공주가 곧 서거하니 왕은 비통해 어찌 할 바를 알지 못했다. 찬성사 최영이 다른 궁에 옮길 것을 청했으나 왕이 말하기를 “내가 공주와 더불어 그렇게 하지 않기로 약속했으니 멀리 타처에 피해 자신의 편리만 도모할 수 없다”고 했다. 왕은 손수 공주의 초상을 그려놓고, 밤낮으로 식사를 대할 때면 슬피 울며 3년 동안 고기반찬을 들지 않았고, 벼슬에 임명받거나 사신으로 나가는 신하는 모두 능에 가서 궁중에서 예를 행하는 것과 같이 하게 했다.

“바리때 하나 들고 산속으로 돌아가리라”


▎중국 원나라 혜종의 황후인 기황후. 고려 출신으로 공녀로 원나라로 보내졌지만 황후에 올랐으며 원 소종의 생모다. 사극 <신돈>에서 기황후로 분한 배우 김혜리. / 사진·뉴시스
원의 수도 연경에 인질로 있을 때 공민왕은 두 차례의 왕위계승 경쟁에서 패배했다. 그에게는 유력한 후원자가 없었다. 그 무렵 공민왕은 원 종실 위왕(魏王)의 딸인 노국공주와 결혼했다. 공민왕 19년 신하들과 맺은 맹세문을 보면 왕은 노국공주와 연경에 있을 때 이미 고락을 같이했다고 한다.

공민왕에게 그녀는 단순한 왕비 이상의 존재였다. 그는 고독한 공민왕의 인생에서 유일한 친구였다. 김용의 난에서는 밀실의 문을 몸으로 지켜 왕의 생명을 구했다. 그녀의 성격은 또한 따뜻하고 공손하며 세심해 부도(婦道)를 따랐으며 자상하고 사랑을 베풀어 능히 모성애(母儀)를 드러냈다. 총명하고 동정심이 많았지만 동시에 소심하고 격정적인 성격의 공민왕에게 그녀는 안식처가 됐다. 그러나 그녀는 공민왕이 자신의 모국 원을 배척하는 모습을 지켜봐야 했으며 제 2차 홍건적의 난에는 안동으로 피난하면서 온갖 고초를 겪었다.

그녀의 죽음은 왕에게 깊은 회한을 느끼게 했다. 공주의 사후에 모후인 명덕태후가 “어찌해서 비빈을 가까이하지 않으십니까”라고 묻자 왕은 “공주 같은 사람이 없습니다”고 대답하고 눈물을 흘렸다. 그는 술에 취해 공주를 생각하며 울곤 했다. 왕비가 죽은 지 8년이 지난 뒤에도 왕은 밤낮으로 슬피 공주를 생각해 드디어 마음의 병을 이뤘다. 또한 공주의 무덤 정릉에 제사하고 제사가 끝나자 능 주위를 순시해 배회하며 슬퍼했다. 정자각에 가서 공주의 초상을 대하자 잔치를 베풀고 원나라 음악을 연주하며 생시와 같이 술잔을 올렸다고 한다.

왕의 슬픔은 너무나 간절해 어떤 의미에서는 자학이나 자기연민처럼 보인다. 정치의 세계에서 이와 같은 사적 감정의 노출은 매우 위험하고 유해한 것이다. 공민왕은 누구보다도 정치의 세계를 잘 이해하고 있었다. 그러므로 그는 정치의 세계로부터 벗어나 사인(私人)으로 돌아가고 싶었던 것이다. 공민왕 개인에게 있어 신돈의 등용은 바로 그와 같은 의미를 지니고 있었다.

공주의 죽음은 사적인 슬픔을 떠나 고려 정치에 파괴적인 영향을 미쳤다. 가까스로 현상을 유지하고 있던 왕은 마지막 끈조차 상실한 듯이 보였다. 공주가 죽은 지 한 달 뒤인 공민왕 14년 3월에 대규모의 인사조치가 있었다. 무장들이 지나치게 많았지만 당시 상황에서는 최선의 선택이었다. 유탁·경천흥·이인복·송경·최영·김속명·원송수·이색·이자송·홍사범·유숙 등 유능하고 공정한 당대의 정치가들이 상당수 포열(布列)돼 있었다.

슬픔과 무력감에서 벗어나 공민왕은 새로운 마음으로 정치에 임하는 것처럼 보였다. 원과의 외교관계도 소홀히 하지 않았다. 3월에 원의 사신이 왔을 때 왕은 정동행성에 나아가 영접했다. 그러나 이것은 폭풍전야의 평화 같은 것이었다. 공민왕 14년 5월 신돈을 전격 등용하면서 공민왕대 최대의 정치변동이 야기됐다.

신돈의 출사 동기는 매우 훌륭했다. 그는 간악을 제거하고 현량을 등용해 삼한의 백성으로 하여금 조금 편안함을 얻게 한 연후에 옷 한 벌과 바리때 하나 들고 산림에 돌아가고자 생각했다.

신돈의 원찰(願刹)은 관세음보살을 주존으로 모신 낙산사(洛山寺)이다. 낙산사는 강원 양양군 오봉산에 있는 통일신라시대의 명찰로 671년(신라 문무왕 11) 의상대사가 창건했다. 관세음보살은 세상에서 고통받는 자들의 온갖 호소를 듣고 구제한다고 알려져 있다.

공민왕 역시 신돈의 등용이 발본적인 개혁을 위한 것임을 밝혔다. “왕이 재위한 지 오래됐으나 재상들과 매우 뜻에 맞지 않았다. 일찍이 말하기를 ‘세신대족은 친당이 뿌리를 연해 있는 것 같아서 서로를 숨겨주고, 초야의 신진은 본 모습을 속이고 행실을 꾸며서 명예를 탐하다가 지위가 높아지면 문벌이 한미한 것을 부끄럽게 여겨 대족과 혼인했다. 그 처음의 뜻을 버리며 유생은 유약해 강직함이 적고, 또 문생이다 좌주다 동년(同年: 과거 동기생)이라 칭하고 무리를 지어 사정(私情)에 따르니 삼자는 모두 쓰기에 부족하므로 세상을 떠나 독립한 사람(離世獨立之人)을 크게 등용해 고질적인 폐단을 고치려고 생각했다. 신돈을 보니 도를 얻어 욕심이 적고 또 미천해 친당이 없으니 대사를 맡기면 반드시 마음대로 해 뒤돌아보거나 의탁함이 없을 것’이라 했다.”(<신돈전>)

구세력 대대적 숙청, 정치세력 재편에 착수


▎옥천사는 신돈이 처형된 뒤 폐사(廢寺)됐지만, 그 유허(遺墟)는 지금도 남아 있다. / 사진·중앙포토
집권 뒤 신돈이 착수한 첫 작업은 구세력을 대대적으로 숙청하고 정치세력을 재편하는 것이었다. 공민왕의 기대했던 대로였다. <고려사>에 따르면 신돈은 집권하자 “권력을 자행하며 은혜와 원수는 반드시 보복해 세가대족을 거의 다 죽이니, 사람이 호랑이같이 봤다”고 한다.

신돈이 가장 먼저 주목한 인물은 최영이었다. 당시 최영은 ‘동서강도지휘사’로서 강화도에서 왜구를 막고 있었다. 공민왕은 신돈이 집권할 경우 최영이 반발할 것을 우려해 사전에 그를 파면하고 김속명을 임명한 듯하다.

최영은 일찍이 밀직사(密直使) 김란이 두 딸을 신돈에게 바친 일을 비난한 바 있었다. 밀직사는 왕명의 출납과 궁궐 호위, 군사관계 업무를 맡아보던 밀직사(密直司)의 최고 책임자로 오늘날의 대통령 비서실장에 해당한다. 최영은 그를 파면한 왕명을 무시하고 병력을 동원해 사냥에 나섰다. 일종의 무력시위였다. 하지만 그는 “요즈음 죄를 받은 사람들은 목숨을 보전하기 힘든데 나는 계림윤이 됐으니 임금의 은혜가 두텁구나”라고 말하고 임지로 떠났다.

하지만 신돈은 최영을 죽이려고 했다. 장군 이득림이 경주에 내려와 국문하자 최영은 즉시 처형해달라고 말했다. 하지만 당시 경상도 순문사로서 합포(合浦, 현 마산)에 있던 정사도(鄭思道)가 죽기를 각오하고 반대해 최영은 가까스로 죽음을 면했다.

최영의 군사력과 업적, 정치적 명망, 그리고 자신에 대한 비판을 고려할 때 신돈은 최영을 가장 유력한 정적으로 여겼음직하다. 그러나 공민왕의 측근으로서 처형당한 정세운과 김용의 사례에서 알 수 있듯이 그것은 결국 공민왕의 결정으로 보아야 할 것이다.

공민왕은 측근이라 해도 왕권에 위협이 되는 자는 모두 제거했다. 국가에 대한 최영의 헌신은 명백한 것이었지만 공민왕은 그의 명망과 군사력이 점차 강화되는 것을 허용할 수 없었을 것이다. 권력에 대한 공민왕의 이해는 일종의 물리학과 같은 것이다. 권력은 그 크기에 합당한 지위를 요구한다. 최영이 아무리 애국자이고 인품이 고매하다 해도 권력은 권력일 뿐인 것이다. 권력은 권력의 길을 간다. 여기에는 인간적 요소가 전혀 없다. 이것이 공민왕의 생각이었다.

최영 다음으로 이구수·양백익·박춘·석문성 등 신흥 무장세력이 유배됐다. 이구수는 최영과 더불어 신흥무장세력의 핵심이었다. 최영은 가까스로 면했지만 이구수·김귀·박춘은 모두 처형됐다. 이구수는 정세운의 막장으로 제2차 홍건적의 난 때 개경 수복에 큰 공을 세웠다. 덕흥군의 난 때도 최영·이성계와 함께 최유의 군대를 격파했다.

김귀와 박춘도 같은 전공을 세운 뛰어난 장군들이다. 하지만 그들의 권력이 너무 커진 게 탈이었다. 공민왕 13년(1364) 간관 김제안이 무장들의 인사에 서명하지 않자 이구수는 왕에게 “신 등의 임명장에만 서명하지 않는 것이 아니라 달천전투(덕흥군 군대와의 전투)에 참전한 장사의 고신에도 다 서명치 않으니 이는 반역하려는 마음이 있어 장사들을 이반토록 하는 것”이라고 비난했다.

공민왕은 대로해 “한휘·이구수가 위험을 무릅쓰고 힘을 발휘하여 공로가 있었으므로 작위를 줘 보답하려 하는데 김제안이 고신에 서명치 않으니 국문하고자 한다”고 말하고 김제안을 파면했다. 그런데 이구수의 발언은 어떤 의미에서 왕에 대한 협박이었다. 덕흥군과의 경쟁에서 궁지에 몰린 공민왕의 처지를 이용한 것이기 때문이다. 공민왕처럼 민감한 정치가가 이를 놓칠 리 없다. 그들이 죽은 것은 이 때문이었다.

토사구팽 면치 못한 지존의 측근들


▎신돈의 원찰은 관세음보살을 주존으로 모신 낙산사다. 낙산사는 강원 양양군 오봉산에 있는 통일신라시대의 명찰로 671년(신라 문무왕 11) 의상대사가 창건했다. / 사진·중앙포토
다음으로 신돈은 세신대족과 왕의 측근, 그리고 개혁적 문신들을 모두 축출했다. 이인복과 김속명을 제외한 경천흥·이공수·송경·이수산·원송수·왕중귀 등이 모두 제거됐다. 공민왕 14년 7월에는 전녹생이 계림윤, 이자송이 평양윤에 임명돼 중앙을 떠났다. 8월에는 왕의 최측근이자 공민왕 초반의 정치에서 가장 훌륭한 조언자였던 유숙마저 정계를 은퇴했다.

유숙은 떠나면서 “이것은 충성이 쇠하고 성의가 엷어진 것이 아니라 큰 이름 아래에 오래 있기가 어려움”이라는 송별시를 남겼다. 이는 중국 월나라 구천의 책사 범려(范蠡)의 말로 위대한 인물과 어려움은 같이 할 수 있으나 즐거움은 함께할 수 없다는 뜻이다. 쉽게 말해 사냥이 끝나면 개를 잡는다는 토사구팽(兎死狗烹)이다. 공민왕의 공신들도 모두 그런 운명을 겪었다.

유숙이 개성을 떠나는 날 장상대신과 그의 문생, 아전들이 교외에 모여 송별했다. 수레와 말이 길에 가득 찼다고 한다. 이것은 신돈과 공민왕에 대한 일종의 시위였다.

공민왕의 인척이자 명재상인 경천흥은 파직됐다. 그는 공민왕 16년 신돈 제거 계획을 주도했다. 원송수도 파면됐다. 그는 충정왕 3년(1351) 서해도 안렴사로 재직 중 왕위에 임명돼 귀국하는 공민왕을 길에서 영접했다. 준수한 풍채와 법도에 알맞은 그의 언행을 보고, 공민왕은 즉시 원송수가 보통사람이 아닌 것을 알았다. 공민왕은 내서사인(內書舍人) 겸 좌부대언(左副代言)으로 그를 발탁해 국가의 기밀을 맡겼다. 원송수는 공민왕 초년 8년간이나 인사를 담당했다.

일찍이 공민왕은 자신의 즉위에 큰 공을 세운 윤택의 손자 두 명을 능지기에 보임하고자 했는데, 원송수는 한 명만 적었다. 왕이 이유를 묻자, 자리가 없다고 답했다. 윤택은 원송수의 좌주였다. 좌주는 과거를 칠 때의 시험관으로, 좌주-문생 관계는 부자관계처럼 일생에 걸쳐 유지됐다.

공민왕은 이런 원송수를 존경해 그가 오면 자리에서 일어나 맞았다. 하지만 조정에 이제현의 사람들이 점점 많아지자 공민왕은 이를 우려했다. “이제현의 문생이 다시 문생을 배출해 드디어 나라에 가득 찬 도둑이 됐다”는 신돈의 말은 사실 공민왕의 속마음을 대변하는 말이었다.

그 핵심에 원송수가 있었다. 전기(前記)한 간관 김제안의 사건이 있었을 때 공민왕은 원송수에게 “그대가 인사를 맡아 그대의 족속만 끌어들여 간관을 삼으니 무엇을 하고자 함인가”라고 힐난했다. 공민왕의 속성을 잘 아는 사람이라면 이것은 대단히 위험한 신호였다. 원송수는 땅에 엎드려 땀을 흘리며 능히 대답하지 못했다고 한다. 따라서 원송수의 파직도 공민왕의 뜻이라고 봐야 한다. 그는 근심과 울분으로 병이 나 1년 뒤 43세로 죽었다. 재상으로서의 기량을 갖춘 그였기에 나라 사람들이 다들 애석하게 여겼다고 한다.

최고위직 영도첨의사사를 역임한 이공수도 파면된 뒤 공민왕 15년에 죽었다. 그는 과거에 장원급제한 인물로 강직한 간관이자 뛰어난 행정가였다. 홍건적의 난 때 파괴된 개성을 복구하는 책임을 맡아 성공적으로 완수했다. 그는 기황후의 외사촌 오빠였다. 공민왕 5년 반원정책 때 기철 일문을 모두 죽이자 원나라는 덕흥군을 고려왕에 임명해 공민왕을 제거하고자 했다.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이공수는 원나라에 사신으로 파견됐다. 기황후는 사람을 교외까지 보내 그를 영접하고 황궁에 불러 음식을 대접했다. 그러면서 “경이 정성을 다해 내 어머니에게 효도하니 바로 나의 친오라버니와 같소. 어찌 내가 친오라버니로 대우하지 않겠소?”라고 회유했다.

그러나 이공수는 덕흥군을 지지하라는 황제와 황후의 명령을 끝까지 거부했다. 그는 뒤에 신돈의 핵심 브레인이 된 서장관 임박에게 “나는 이미 부모나 자손도 없는데다 가장 높은 벼슬까지 지냈으니 터럭만큼도 남에게 기대어 덕을 볼 생각이 없다. 머리를 깎고 산에 들어갈지언정 결코 덕흥군을 따르지 않겠다”고 말했다고 한다. 신돈은 그런 이공수의 명망을 꺼렸다. 위험을 느낀 이공수는 스스로 경계해 두문불출하며 하루도 조정에 출근해 집무하지 않았다.

협력 대상을 적으로 만든 정치적 오판


▎고려 말기의 재상인 염제신의 초상화. 공민왕이 그려준 것이라는 기록이 전한다. / 사진·중앙포토
이상의 정황을 보면, 신돈 정권이 당대의 명사·명신·명장들을 포용하지 못했음을 알 수 있다. 신돈이 처음부터 이들과 불화했던 것은 아니었다. 그 역시 이들의 협조를 구했다. 신돈은 여러 차례 “유숙을 부르는데도 유숙이 가지 않았다”고 한다.

신돈의 공식적 집권 직전인 공민왕 14년 3월의 인사에는 당대의 저명한 정치가와 지식인들이 모두 망라돼 있었는데 이는 어떤 의미에서 이들의 협조를 구하기 위한 신돈의 시험적 인사 조치였던 것으로 생각된다. 하지만 그들은 신돈에 대한 입장을 바꾸지 않았다. 그러자 신돈 역시 이들을 설득하기 위해 적극적으로 찾아가지는 않았다.

그러나 이제현의 반대는 신돈에게 가장 뼈아픈 것이었을 것으로 보인다. 당시 고려 사회에서 이제현이 누리던 명망은 왕조차 넘볼 수 없을 정도였기 때문이다. 이제현은 처음부터 신돈의 반대자였다. 왕이 신돈을 총애하자 그는 왕에게 “제가 전에 신돈을 한 번 본 적이 있는데 그 골격이 옛날 흉악한 자들처럼 생겨 반드시 후환을 끼칠 것이니 가까이하지 마십시오”라고 했다.

이제현에 대한 신돈의 원한은 깊었다. 이제현 추종자들을 심지어 도둑의 무리라고 비난할 정도였다. 신돈은 왕에게 이제현을 “갖가지 방법으로 헐뜯었지만 이미 연로했기에 해를 끼칠 수 없었다”고 했다.

누대(累代)의 세신 염제신 역시 신돈에 반대했다. 공민왕은 그의 아들 염흥방과 사위에게 그를 설득하라고 명령했지만 염제신은 입장을 고수했다. 공민왕대의 또 다른 명신인 이인복도 파면됐지만 곧 판삼사사로 발탁됐다. 그의 동생 이인임이 신돈 정권에서 핵심 요직을 맡고 있었기 때문일 것이다. 이인임은 첨의찬성사로 최고의결기관인 도당을 주관하고 있었다.

그러나 이인복 역시 왕에게 “신돈은 단정한 사람이 아니니, 다른 날에 반드시 변이 있을 것”이라고 말했다. 비중 있는 인물로는 김속명만이 유일하게 침묵을 지켰다. 그는 신돈을 공민왕에게 소개한 김원명의 친동생이었다.

이상 신돈의 집권 후 첫 작업을 보면 공민왕이 신돈에게 전권을 위임한 명분과 신돈의 출사 동기가 의심스럽다. 첫째는 최영, 둘째는 개혁적 문신관리들이 완전히 제거됐기 때문이다. 공민왕과 신돈이 진정으로 개혁을 원했다면 이들이야말로 정치적 협력자로 삼아야 될 사람들이었다.

그러나 신돈은 이들의 협력을 얻지 못했을 뿐만 아니라 오히려 그들을 적극적으로 제거하려 했다. 그렇다면 공민왕은 왜 개혁을 명분으로 신돈에게 전권을 위임했던 것일까? 또한 신돈이 진심으로 개혁을 원했다면 개혁세력 없이 어떻게 자신의 이상을 실현하려고 했던 것일까?(계속)

김영수 - 1987년 성균관대 정외과를 졸업하고, 1997년 서울대 정치학과 대학원에서 정치학 박사학위를 받았다. 동경대 법학부 객원연구원을 거쳐, 2008년부터 영남대 정외과 교수로 재직하며 한국정치사상사를 가르치고 있다. 노작 <건국의 정치>는 드라마 <정도전>의 토대가 된 연구서로 제32회 월봉저작상, 2006년 한국정치학회 학술상을 수상했다.

201701호 (2016.12.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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