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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 연재 |신명호의 근대 동북아 삼국지(1)] 서른 살 공친왕, 淸 실권을 장악하다 

‘바람 앞의 등불’ 지킨 황제의 이복동생 

신명호 부경대 사학과 교수
영·불(英佛) 연합군, 무역·선교자유 요구하며 북경 유린할 때 ‘구원투수’로 등장… 함풍제 사후 청나라 살리고, 서태후와 권력 관계에서 자신의 살길도 도모

근대 동북아 지역의 3국은 서세동점(西勢東漸)의 충격에 격렬하게 몸부림쳤다. 아편전쟁의 포연(砲煙)에 휩싸인 중국, 쇄국과 개화 사이에서 갈등한 한국, 탈아입구(脫亞入歐)를 외치며 호기롭게 뛰쳐나갔지만 전범으로 전락하고 만 일본. 세 나라 간 갈등의 역사적 뿌리를 재조명함으로써 최근 민족주의적 색채가 또렷해지면서 새로운 갈등을 잉태하고 있는 동북아 3국 간 외교에서 지혜로운 대응책과 진취적인 미래관계를 위한 방안을 모색하고자 한다. <삼국지연의>의 집필방식을 따르되, 매회 조선의 역사적 인물·사건을 중심으로 중국·일본의 관련 인물·사건을 함께 재조명한다.


▎애로호 사건(영국과 청나라의 분쟁)과 관련해 1858년 6월 청나라는 영국· 프랑스·러시아· 미국 4개국과 톈진 조약을 맺게 됐다. 조약의 주요 내용은 전비(戰費) 배상, 외교관의 베이징 주재와 중국 여행 및 무역의 자유 보장, 기독교 포교의 자유와 선교사 보호, 10개 항구 개방 등이다. / 사진·중앙포토
1860년(철종 11년) 12월 9일(음력, 이하 같음) 비변사에 한 통의 급보가 접수됐다. 지난 9월 청나라에 파견된 역관 김경수가 북경의 급변 사태를 정탐하고 보낸 보고서였다. 그 급보에는 청나라 수도 북경이 영국과 프랑스 침략군에 함락당했으며 함풍제는 열하로 몽진(蒙塵)했다는 등의 첩보가 들어 있었다.


▎1860년 10월 북경조약 체결을 주도한 공친왕(1832~98). 이듬해 동치제를 즉위시키면서 권력을 손에 쥔 공친왕은 태평천국의 난을 진압하고 양무운동에 힘써 ‘동치중흥’을 이끌었다. / 사진·중앙포토
당시 조선 당국자들은 청나라를 세계 제일의 강대국으로 인식했다. 그런 청나라가 서양 침략군에 수도를 함락당하고 심지어 황제는 수도를 버리고 피란했다는 첩보에 당국자들은 크게 놀랐다. 당장 청나라가 망할지 아닐지 정확한 사태 파악이 필요했다. 더불어 북경의 급변사태에 대응할 대책도 필요했다. 비변사는 철종에게 위문사신을 파견하자는 대책을 건의했다.

철종에게도 북경 급변사태는 큰 충격이었다. 다음날 오전 8시쯤, 철종은 조정 중신들을 창덕궁 희정당으로 불러 이 사태를 논의했다. 보통의 경우 회의에서 철종은 별로 말이 없었지만 이날 철종은 많은 말을 쏟아냈다. 철종은 이렇게 운을 떼었다.

“어제 급보를 읽어봤다. 중국의 급변사태가 너무너무 걱정된다.” 뒤이어 철종은 좌의정 조두순에게 이렇게 말했다. “중국처럼 큰 나라도 적을 막지 못했다니 그 적이 얼마나 강한지 알 수 있다. 북경은 우리와 순치(脣齒) 같은 관계다. 서양인들이 중국과 강화(講和)한 것은 교역만 하자는 것이 아니라 삼강오륜을 없앨 만한 술법으로써 천하를 오염시키고자 하려는 것이라 한다. 그렇다면 우리도 그 피해를 벗어나기 어렵다. 게다가 그들은 배로 일순간에 천리를 달리는 자들이 아닌가? 반드시 대책을 강구해야 하겠는데, 경의 뜻은 어떤가?”

좌의정 조두순은 이렇게 응답했다. “대책은 내수(內修) 후에 외어(外禦)일 뿐입니다. 내수는 첫째 재력이고, 둘째 병력인데 이는 하루아침에 되지 않으므로 1~2년 시간을 갖고 서서히 추진해야 합니다. 봄가을의 군사훈련은 원래 정상인데 우리나라 인심은 깜짝깜짝 잘 놀라므로 매년 임시로 정지했습니다. 지금은 소소한 문제로 정지할 수 없습니다. 옛 책에 이르기를 ‘연병적속(練兵積粟)’이라 했으니 지금이 바로 그럴 때입니다.”

이 대화에 나타나듯 북경 급변사태에 철종이나 조정 중신들 모두가 위기의식을 느낀 것은 확실하다. 하지만 대응이 문제였다. 좌의정 조두순이 제시한 대응은 ‘내수외어’라는 말에 함축돼 있는데, 이는 안으로 정치를 잘하고 밖으로 외적을 막는다는 뜻이다. 원론적으로 합당한 대응이라 할 수 있지만 그 내용이 문제였다. 조두순이 제시한 ‘내수외어’는 근대적 대응이 아니라 오래전부터 내려오던 전통적 대응이었다. 예컨대 조두순은 ‘봄가을의 군사훈련’을 언급했는데 이는 전통적인 군사훈련이었다.

게다가 ‘내수외어’가 새삼스레 강조된 것도 아니었다. 조선의 당국자들은 청과 영국 사이에 전쟁이 벌어졌고 그 전쟁에서 청나라가 패했다는 사실을 이미 20년 전의 아편전쟁 때부터 알고 있었다. 전쟁 소식이 있을 때마다 조선 당국자들은 사태 파악을 위해 사신을 급파했다. 그 결과 비록 청나라는 전쟁에서 패했지만 영토를 잃지 않았다는 사실 즉 청나라가 멸망하지 않았다는 사실을 알았고, 그 사실에 안도하며 전통적인 내수외어를 주장했다. 청나라가 멸망하지 않는 한 조선은 문제없다는 안도감이 당국자들 사이에 팽배했던 것이다.

이번에도 마찬가지였다. 북경의 함락과 황제 몽진이라는 첩보에 대해 비변사에서 내놓은 대책 역시 열하 문안사를 급파하자는 것이었다. 다만 이번 사태는 이전과 달리 좀 더 심각하게 여겨졌으므로 인선에 신경을 썼다. 그 결과 연암 박지원의 손자이자 실학파의 거두로 이름 높은 박규수가 열하문안사의 부사에 선발됐다.

보고 싶은 것만 봤던 조선의 문안사들


▎전족(纏足)을 한 여성과 누워서 아편을 하는 남성. 이 장면은 청나라 때 서양인들이 만든 엽서에 단골메뉴로 등장했다. / 사진·중앙포토
80여 년 전 연암 박지원은 건륭제의 칠순 축하 사절단의 일원으로 북경과 열하에 다녀왔다. 그때 박지원은 예리한 안목으로 청나라의 현실을 직시하며 조선 양반들의 허위의식과 고집불통을 통감했다. 박지원의 안목에 포착된 조선양반의 허위의식과 고집불통이 <양반전> <허생전> 등에서 풍자적으로 묘사됐는데, 연암은 이런 작품들을 모아 불후의 명작 <열하일기>를 출간했다.

박지원의 손자 박규수 역시 그의 조부처럼 예리한 안목을 가진 인물로 소문났다. 만약 박규수가 열하 문안사로 다녀오면 제2의 <열하일기>가 탄생할 것으로 기대됐다. 그렇다면 청나라의 실태는 물론 조선 내부의 허위의식과 고집불통이 보다 선명하게 드러남으로써 새로운 대안이 가능할 수 있었다.

1861년(철종 12년) 1월 18일 박규수는 사행(使行) 길에 올라 2월 24일 북경에 도착했다. 관행대로 예부에 도착 보고를 하고, 선물을 바친 후 열하로 문안을 가겠다고 요청했다. 하지만 함풍제는 굳이 올 필요 없다고 거절하면서 수많은 비단과 보물을 선물로 줬다. 당시 청나라에 위문사신을 보낸 국가는 오직 조선뿐이었다. 그런 조선의 정성에 함풍제는 깊이 감동했지만 열하의 참혹한 모습을 보이고 싶지는 않았다. 그래서 오지 못하게 하면서 대신 많은 선물을 줬던 것이다.

북경에서 두 달 정도 정세를 살핀 박규수 등은 5월 초 출발해 6월 19일 철종에게 귀국보고를 했다. 그때 철종은 북경의 급변사태가 어떻게 귀결되었는지 궁금해 했다. 열하 문안사를 대표해 정사 조휘림이 이렇게 대답했다.

“반란군이 창궐한 지 10년이 넘었고 간혹 정부군에 패했어도 여전히 건재합니다. 하지만 정부군의 총독이 굳게 방어해 반란군이 감히 약탈하지는 못합니다. 양이(洋夷)는 제멋대로 돌아다니는데 관문에서 검문하지도 않고 세금을 물리 지도 않지만 침략하거나 소란을 일으키는 일은 없습니다. 그래서 북경 시민들이 처음에는 의심하고 두려워했지만 곧 익숙해져 마을과 시장 모두 예전처럼 평화롭습니다.”

위에서 조휘림이 말한 반란군은 태평천국의 난민들을 지칭하는데 그들이 더 이상 창궐하지 않고 양이들도 소란을 일으키지 않아 북경의 마을과 시장 모두 예전처럼 평온하다는 보고는 결국 급변사태가 잘 수습됐다는 뜻이었고, 청나라는 망하지 않는다는 뜻이었다. 요컨대 청나라가 안전하므로 조선도 안전하다는 말이었고 그래서 별다른 대책을 세우지 않아도 된다는 말이었다.

이런 조휘림의 보고에 박규수는 별다른 이론을 달지 않았다. 박규수의 상황인식 역시 비슷했기 때문이다. 이런 안이한 상황인식은 그대로 철종과 조정 중신들에게 전달됐고, 조선 정부는 별다른 대책을 세우지 않았다. 조선 양반들의 허위의식과 고집불통은 그대로 지속됐다.

그러나 이 같은 상황 인식은 보이는 것만 보고 또 보고 싶은 것만 본 결과라 할 수 있다. 당시 북경은 겉으로 과거의 평온을 되찾고 있었다. 하지만 그 같은 북경의 평온은 북경만의 평온일 뿐 그것이 조선이나 일본 등 동북아의 평온을 보장할 수는 없었다. 이제 중국은 과거의 중국처럼 동북아의 안전을 담보할 수 있는 강대국이 아니라 자기 내부의 문제도 해결하기 벅차하는 노쇠한 제국이었다.

당대 최고 명장마저 ‘속수무책’


▎중국이 2008년 베이징올림픽 개막 직전 청나라 때의 황실 정원 원명원(圓明園)을 301년 만에 처음으로 개방했다. 영국과 프랑스군의 침략 당시 무너진 서양루를 중국 정부는 아픈 역사를 거울로 삼기 위해 폐허 그대로 보존하고 있다. / 사진·중앙포토
만약 박규수를 비롯한 열하 문안사가 보다 더 예리한 안목과 문제의식을 가졌다면 그들은 현실 너머의 보이지 않는 것들을 보고 물었을 것이다. 예컨대 세계 최강이라 불리는 청나라의 중앙군이 왜 영국과 프랑스 군대에 패했는가? 북경 함락이라는 급변사태를 수습한 공친왕이란 어떤 인물인가? 열하로 몽진한 함풍제의 향후 거취는 어떻게 될 것인가? 북경을 점령한 영국과 프랑스 등 서구열강은 장차 동북아에서 어떤 정책을 추진할 것이며 이에 대응해 조선은 어떻게 해야 하는가 등을 묻고 그에 대한 해답을 찾았을 것이다.

특히 세계 최강이라 불리는 청나라 중앙군이 왜 영국과 프랑스 군에 패했는지에 대한 질문과 해답은 ‘지피지기 백전불태(知彼知己 百戰不殆)’라는 병법의 기초상식이기도 했다. 하지만 박규수 등의 열하 문안사는 이런 기본적인 질문도 하지 않았다. 아직 현실인식과 상황인식이 절박하지 않은 결과였다. 당시 박규수로 대표되는 실학자들의 현실인식과 상황인식이 이 정도였으니 다른 양반들의 수준은 미뤄 짐작할 수 있다.

동북아 역사를 통틀어 1860년의 북경 함락은 전대미문(前代未聞)의 대사건이었다. 과거 중국의 수도를 점령했던 군대는 외국 침략군이든 국내 반란군이든 보병이나 기마병 같은 육군이었고 황인종이었다. 하지만 1860년의 침략군은 저 멀리 유럽에서 배를 타고 온 백인종이라는 점에서 전대미문이었다. 게다가 근대 무기와 근대 장비로 무장했다는 점에서도 전대미문이었다.

반면 청나라의 방어군은 기마병을 위주로 하는 전통 군대였다. 1860년의 북경 함락 때 청나라군은 몽고 출신의 49세 장군 승격림심(僧格林沈)이 지휘했다. 그는 몽고와 만주에서 차출된 7000기마대를 거느리고 태평천국 반란군을 진압하면서 당대 최고의 명장으로 떠올랐다. 당시 승격림심의 기마대는 청나라 최강이자 동북아 최강이었다. 함풍제는 이런 승격림심이라면 영국과 프랑스 침략군을 충분히 격퇴할 것으로 믿고 북경 방어를 맡겼다.

그러자 승격림심은 두 가지 전략을 세웠다. 첫째는 영국과 프랑스군이 아예 상륙하지 못하게 하는 작전이었다. 배를 타고 오는 영국과 프랑스군이 북경을 함락시키려면 우선 천진(텐진·天津)항에 상륙해야 했다. 승격림심은 천진항 입구에 500문이나 되는 대포를 설치했다. 영국과 프랑스 함대가 천진항 앞바다에 나타나면 대포로 격침시킬 작전이었다. 천진항의 포대에는 약 1만 명의 병력을 분산·배치했다.

둘째는 영국과 프랑스군이 상륙한다면 그 직후 격멸한다는 작전이었다. 이를 위해 승격림심은 자신이 거느린 7000기마대를 천진항 포대의 뒤편에 배치했다. 이렇게 천진항에 배치된 1만 보병과 7000기마대가 당시 청나라 중앙군의 핵심전력이었다.

북경 점령을 위해 영국은 1만의 병력을 동원했고 프랑스는 7000의 병력을 동원했다. 영국과 프랑스군은 보병·포병·해병대 등으로 구성됐다. 영국과 프랑스 군은 100여 척의 군함을 타고 광동·상해를 거쳐 천진으로 들어왔다. 당시 청나라의 전통 수군은 영국과 프랑스의 근대 해군 앞에 무용지물이었다. 제해권을 장악한 영국과 프랑스 해군은 중국 바다를 제집 안방처럼 휩쓸고 다녔지만, 중국 수군은 속수무책이었다. 해군력에서 절대적으로 열세였기에 청나라의 승격림심은 상륙 저지작전을 쓸 수밖에 없었다.

난세 영웅에겐 용맹한 유목민의 피가 흘렀다


▎청나라 말기에 벌어진 태평천국의 반란 진압 과정을 그린 그림. 청 군대는 남경(南京)에서 거주민의 절반가량을 학살하는 참극을 벌였다. / 사진·중앙포토
1860년 6월 15일, 영국과 프랑스군은 기습적으로 천진항 포대를 점령했다. 허릴 찔린 승격림심은 천진에서 결전을 벌일 작정이었지만 함풍제의 만류로 퇴각하여 북경과 30리 정도 떨어진 통주에 주둔했다. 이곳에 지원군이 도착함으로써 총 2만7000여 병력이 집결됐는데 이 중에 기마병이 1만2000 이었고, 보병이 1만5000이었다. 이 2만7000여 병력이 청라의 최후 보루였다.

천진항을 점령한 영국과 프랑스군은 서서히 북경으로 접근했다. 마침내 8월 7일 오전, 팔리교(八里橋)에서 최후 결전이 벌어졌다. 팔리교에서 북경까지는 겨우 30리밖에 떨어져 있지 않으므로 이곳이 최후의 방어선이었다. 팔리교 방어에 나선 2만7000의 청나라 군대 중에서 1만2000의 기마대는 몽골 기마대를 중심으로 했다. 몽골 기마대는 예로부터 세계에 용맹을 떨치던 기마대였다.

반면 영국과 프랑스 병력은 각각 4000명으로 합 8000명이었다. 수로 치면 청나라의 3분의 1도 되지 않는 병력이었지만, 이들은 신식 무기로 무장한 근대 보병이었다. 이런 면에서 팔리교에서 청나라 군대와 영국·프랑스 군대가 결전을 벌인 것은 전통시대 최강의 군대와 근대 최강의 군대가 마주친 전투라 할 수 있다.

승격림심은 기마대의 장점을 살려 집단 돌격으로 승패를 결정지으려 했다. 과거라면 이런 작전이 통했을 것이다. 하지만 근대 무기로 무장한 군대에는 통하지 않았다. 대포와 라이플 소총으로 무장한 영국과 프랑스군의 집단 사격에 기마대는 추풍낙엽처럼 죽어나갔다. 몇 시간의 전투 끝에 1만 2000명의 기마대 중 1만여 명이 전사하고 겨우 2000여 명만 살아남았다. 1만 보병 중에서도 2000여 명이 전사함으로써 청나라의 병력 손실은 1만2000명에 달했다. 이로써 청나라의 중앙 군사력은 거의 소멸되고 말았다.

반면 영국군 2명, 프랑스군 3명 등 연합군은 총 5명만 전사했다. 팔리교 전투는 말이 전쟁이지 일방적인 살육이었던 것이다. 이 충격으로 함풍제는 8월 8일 북경을 버리고 열하로 몽진했고, 그 뒤를 이어 8월 20일 영국과 프랑스군이 북경을 무혈점령하기에 이르렀다. 북경은 영국과 프랑스군에 유린됐다. 황제의 권위를 상징하던 황실 별장 원명원(圓明園)은 약탈당했고, 청나라의 운명은 바람 앞의 촛불 같았다.

이 같은 급변사태를 수습한 인물은 공친왕(恭親王)이었다. 당시 29세의 공친왕은 이복형 함풍제보다 두 살 아래로 황족 중 가장 용맹하고 지혜로운 인물로 손꼽혔다. <청사고>에 의하면 공친왕과 함풍제는 어려서 함께 무술을 연마했다고 한다. 그때 공친왕은 창법(槍法) 28세와 도법(刀法) 18세를 창안하기까지 한 무술고수였다. 공친왕의 창법과 도법을 본 도광제는 ‘체화협력(棣華協力), 보악선위(寶鍔宣威)’라는 이름을 붙여주기까지 했다. 체화협력이란 아름답게 핀 산 앵두나무 꽃처럼 형제 간에 우애하며 협력하라는 뜻인데 공친왕의 뛰어난 무술로 형 함풍제를 잘 도우라는 의미였다. 보악선위는 공친왕의 뛰어난 칼 솜씨로 천하에 무위를 떨치라는 뜻이었다.

또 어느 날인가 도광제가 아들들을 데리고 사냥할 때 공친왕은 가장 많은 짐승을 사냥했지만, 함풍제는 아예 화살 하나도 쏘지 않았다. 그 이유를 묻자 함풍제는 “차마 짐승들을 죽일 수 없었습니다”라고 대답했다. 이런 사실로 보면 공친왕은 용맹무쌍한 유목민의 피가 흐르는 전사였다고 하겠는데 거기에 더해 총명한 두뇌까지 소유한 것으로 알려졌다. 반면 함풍제는 어질고 여린 마음의 소유자였다. 함풍제는 황제가 된 후 용맹하고 총명한 공친왕을 견제했다. 그러다가 북경 함락과 열하 몽진이라는 비상사태에 어쩔 수 없이 공친왕에게 도움을 요청했다.

환궁 미루고 미루다 결국 눈감는 황제


▎동치제 시절 수렴청정을 했던 서태후의 노년 모습. / 사진·중앙포토
공친왕은 청나라의 멸망을 막기 위해 영국과 프랑스의 요구 사항을 모두 수용했다. 당시 영국과 프랑스가 북경을 무력 점령한 이유는 자유무역과 기독교 선교 그리고 외교관의 북경 상주였다. 이런 요구를 함풍제는 전례가 없다며 거절했는데 그 갈등이 마침내 무력충돌로 비화했던 것이다. 북경 점령 이후 영국과 프랑스는 기왕의 요구 이외에 또 전쟁 배상금 1600만 냥을 추가로 요구했다. 이런 요구를 공친왕이 이견 없이 수용한 결과 9월 26일에 영국과 프랑스 군은 북경에서 철수했다.

1860년 당시 청나라의 인구는 약 4억 명에 이르렀던 반면 영국과 프랑스는 각각 4000만 명, 합 8000만 명에 불과했다. 인구로만 보면 반의 반도 안 되는 영국과 프랑스에 무참하게 패배하고 수도까지 함락당한 중국인들의 자존심은 여지없이 깨졌다. 영국과 프랑스군이 북경에서 철수하자 중국인들은 왜 이런 사태가 벌어졌는지 또 어떻게 하면 이런 사태의 재발을 막을 수 있는지 격렬하게 고민하고 토론했다.

결론은 명확했다. 함풍제와 그 측근들이 무능하고 군사력이 열악해서 이런 사태가 벌어졌고, 이런 사태를 해결한 공친왕은 유능한 사람이었다. 당연하게도 무능한 측근들을 숙청하고 군사력을 근대화해야 나라가 살 수 있다는 여론이 비등했다. 이때 무능한 측근들을 숙청한다는 것은 곧 유능한 공친왕이 그 자리를 대신해야 한다는 의미이기도 했다. 그런 면에서 측근 숙청과 군사력 근대화라는 여론은 곧 권력투쟁과 노선투쟁을 의미하기도 했다.

함풍제는 즉위 후 숙순(肅順)이라는 황족을 신임해 중임을 맡겼다. 1860년의 열하 몽진도 이 숙순의 주도로 이뤄졌다. 북경 함락과 열하 몽진에 따른 모든 비난은 자연스럽게 숙순에게 돌아갔다.

북경 사태가 일단락된 후 중국인들은 함풍제의 즉각적인 환궁을 요구했다. 환궁하면 북경 함락과 열하 몽진의 책임을 물어 숙순 등 측근들을 숙청하라는 여론이 들끓을 것이 분명했다. 이것이 문제였다. 북경 함락과 열하 몽진의 궁극적인 책임은 함풍제에게 있었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환궁 후에 함풍제 자신이 쫓겨날 가능성도 없지 않았다. 용맹하고 총명한 공친왕이 여론의 지지를 업고 있기에 충분히 가능한 일이었다.

이런 두려움 속에서 함풍제와 숙순 등은 환궁하지 않으려 했다. 공친왕이 열하로 오겠다고 하는 것도 막았다. 함풍제는 처음에 환궁 시기를 다음해 봄으로 미뤘지만 정작 새해 봄이 오고 또 여름이 지나도 환궁하지 못했다. 병이 들었던 것이다. 함풍제는 병으로 신음하다가 1861년 7월 16일 열하 산장에서 세상을 떠났다.

세상을 떠나기 하루 전 함풍제는 겨우 6세에 불과한 동치제를 황태자로 결정하면서 숙순 등 측근 8명을 ‘찬양정무대신(贊襄政務大臣)’으로 삼았다. 함풍제는 황후에게 ‘어상(御賞)’이라는 도장을, 황태자에게 ‘동도당(同道堂)’이라는 도장을 남겼다. 8명의 찬양정무왕대신이 결재한 공문은 어상과 동도당이 날인 된 후에 효력이 발휘되도록 했다. 어상은 공문서의 위쪽에 찍게 했고 동도당은 아래쪽에 찍게 했다. 8명의 찬양정무대신에게 공동 섭정을 맡기면서 동시에 황후와 황태자에게 최종 결정권을 맡긴 것이었다. 6세밖에 되지 않은 황태자를 대신하는 섭정들의 권력을 분산하고 견제하기 위한 조치였다.

서태후와 함께 반대파 제거하고 권력 장악

당시 함풍제의 황후는 훗날의 동태후로 25세에 불과했고, 동치제의 생모인 서태후는 27세였다. 반면 찬양정무대신으로 임명된 숙순은 46세였다. 함풍제 사후 열하에서 실제로 궁중정치를 좌지우지한 인물은 숙순이었다.

여론의 지탄을 받던 숙순은 동치제를 방패막이로 권력을 유지하려 했다. 그러면서 북경의 공친왕을 비롯한 비판자들을 숙청하려 했다. 공친왕과 숙순 사이에 격렬한 권력투쟁이 전개되던 중 어사 동원순이 태후의 수렴청정을 요구하는 상소문을 올렸다. 이 상소문은 숙순에게 결정적으로 불리하게 작용했다. 수렴청정을 요구했다는 것은 결국 숙순 등의 찬양정무대신을 믿지 못하겠다는 뜻이었고, 또 동태후와 서태후가 숙순 등을 버리게 만들었기 때문이다.

양 태후는 수렴청정을 하는 것이 훨씬 유리했기에 기꺼이 숙순을 버리고자 했다. 당연히 양 태후는 수렴청정을 찬성한 반면 숙순 등의 찬양정무대신은 반대했다. 이런 상황에서 서태후는 북경에 머무르던 공친왕을 열하로 불러들여 밀약을 했다. 공친왕은 함풍 황제가 열하에서 승하하자 그곳으로 가서 문상하겠다고 했다. 그러자 숙순 등의 찬양정무대신은 어차피 함풍제의 장례는 북경에서 치러야 하므로 올 필요 없다고 했다. 혹시라도 공친왕이 서태후와 연결될까 두려웠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신하의 도리상 열하로 가서 문상하겠다는 공친왕의 주장이 더 설득력이 있었다. 7월 22일, 공친왕의 열하 문상이 허락됐는데 배후에 서태후의 공작이 있었다. 서태후가 심복 환관 안덕해를 보내 공친왕을 불렀던 것이다.

서태후는 공친왕과의 회견에서 숙순 등 찬양정무대신이 정치를 제멋대로 한다고 성토했다. 그들은 역적이니 숙청해야 한다는 뜻이었다. 공친왕은 동의했다. 이런 사실에서 공친왕은 무술만 뛰어난 것이 아니라 정치적 야심도 대단한 인물임을 알 수 있다. 결국 숙순 등 찬양정무대신은 서태후와 공친왕의 협공을 받고 역적으로 체포돼 처형됐다. 그때가 1861년 9월이었다. 10월 1일에 공친왕은 의정왕(議政王)이 됐고 10월 9일에는 황태자가 자금성의 태화전에서 공식적으로 황제, 즉 동치제로 즉위했다. 이어서 11월 1일부터 서태후와 동태후의 수렴청정이 시작됐다.

공친왕이 의정왕에 임명된 것은 함풍제 주변의 무능한 측근들이 숙청됐음을 의미했다. 반면 양 태후의 수렴청정이 시작된 것은 군주세습제의 유풍(遺風)이 아직도 건재하다는 사실을 의미하기도 했다. 그런 면에서 30세의 의정왕 공친왕에게는 기회와 위험이 함께 있었다.

1861년 11월 당시, 동치제는 6세에 불과했고, 양(兩) 태후는 아직 20대 후반의 풋내기였다. 게다가 정치경험도 없는 여성이었다. 자연히 궁중 실권은 공친왕에게 돌아갔다. 멸망 직전의 청나라를 살릴 인물은 오직 그뿐이라는 여론에 더해 어린 황제와 미숙한 양 태후도 그에게 의지했다. 이런 요소들은 공친왕에게 기회였다.

반면 영국과 프랑스 이외의 서구 열강도 이권을 요구하며 협박을 일삼을 것이 분명한 당시 상황은 공친왕에게 큰 위기였다. 또한 세월이 흐를수록 동치제가 나이 들고 양 태후의 정치경험 역시 늘어나면서 그들의 간섭이 폭증할 것이라는 점에서 공친왕의 기회는 그리 길지 않았다.

그 길지 않은 기회를 활용해 어떻게 서구 열강에 대항해 청나라를 살리고 또 서태후와의 권력 관계에서 자신의 살길을 찾을지는 온전히 의정왕으로서 궁중 실권을 장악한 공친왕 자신의 식견과 능력에 달려 있었다. (계속)

신명호 - 강원대학교 사학과를 졸업하고 한국학중앙연구원 한국학대학원에서 박사학위를 받았다. 현재 부경대 사학과 교수와 박물관장직을 맡고 있다. 조선시대사 전반에 걸쳐 다양한 주제의 대중적 역사서를 다수 집필했다. 저서로 <한국사를 읽는 12가지 코드> <고종과 메이지의 시대> 등이 있다.

201701호 (2016.12.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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