히스토리

Home>월간중앙>히스토리

[새 연재 | 대한독립운동 중국 현지 답사기(1)] 옌안의 휑한 야오동(窯洞)엔 메마른 옥수수만 뒹굴고… 

산시성 황토고원의 어느 마을 뒷산에서 만난 ‘연안파’ 

윤태옥 작가, 다큐멘터리 제작자
어쩌다 중국기행에서 마주친 독립운동가들의 흔적. 그 여운은 작은 호수에 돌멩이 하나가 떨어진 것처럼 가슴속에서 끝없는 파동으로 퍼져나갔다. 독립운동의 최대 세력이었으면서도 남과 북 모두에서 지워진 ‘연안파’, 조선의용군의 흔적 찾기에서 시작한 중국 내의 대한독립운동 답사기를 연재한다.

▎해방 후 해외 독립운동가들의 이동 경로.
2012년 10월 22일 오후 중국 산시(陕西)성 옌안(延安)의 허름한 뤄자핑(罗家平) 마을 입구. 개천에는 낡은 콘크리트 다리가 걸쳐 있고, 머리 위로는 철교가 볼품없이 지나고 있었다. 좌판이 다닥다닥 이어진 조그만 시골 장터였다. 마을 입구치고는 옹색해 보였다. 입구에는 중장년 남정네 네댓이 잡담을 나누며 한가로운 시간을 보내고 있었다. 이들 중장년 남정네들 바로 옆에 높이 1m 남짓한 표지가 서 있다. 마을만큼이나 허름한 표지였다. 표지를 찬찬히 들여다보았다. 글씨는 검은색으로 칠한 누런 석판에 음각으로 새겨져 있다.

“조선혁명군정학교 구지(旧址) 간개(简介)
(1944~45년)
조선혁명군정학교는 1942년 11월 화베이(华北)의 타이항산(太行山)에서 세워졌다. 1944년 1월 학교는 타이항산을 떠나 3개월간 행군하여 4월 7일 (옌안에) 도착했고 촨커우촌(川口村)에 주둔했다, 같은 해 9월 이곳에 교사를 신축하여 12월 10일 완공했다.
1945년 2월 5일 융중한 개교식을 열었다. 주더(朱德)·린보취(林伯渠)·우위장(吴玉章)·쉬터리(徐特立)가 참석하여 축하했다. 교장은 백연 김두봉(한글학자이고 독립운동가이자 공산주의자), 부교장은 박일우(朴一禹)였다. 학교의 목적은 간부를 양성하여 조선민족의 해방을 완성하는 것이었다. 마르크스주의철학·정치경제학·군사학·일본문제·조선문제 등의 과목을 가르쳤다. 박일우는 중국공산당 칠대 회의에 참석했고 5월 21일 전체대회에서 연설했다.
1945년 8월 하순 학교는 옌안을 떠나 조선 북부로 이동했다. 이곳에는 4개의 야오동(窑洞)이 남아 있다.
옌안지구문물관리위원회
1996년 7월 1일”


중국 각지의 토속 민가(民家)를 찾아 다니던 중이었다. 옌안은 황토고원 특유의 동굴집인 야오동(窯洞)이 많은 곳이다. 그런데 옌안에 도착하기 며칠 전에 한 지인이 옌안에 가면 뤄자핑이라는 마을에 들러 조선의용군의 흔적을 찾아 보라는 메시지를 보내왔다. 여행 중에도 매일 블로그에 쓰는 나의 일기에 한 줄 댓글로 붙여준 것이었다. 이상하게도 울림이 있는 댓글이었다. 그런 연유로 옌안에 도착해 중국 공산혁명 사적지와 여러 종류의 야오동을 답사한 뒤 물어 물어 뤄자핑까지 찾아온 것이었다.

표지의 내용을 다시 한 줄 한 줄 새겨 읽어보았다. 알 수 없는 육중함에 심호흡을 한 번 했다. 주민 몇몇이 힐끔거리며 쳐다보았다. 그들에게 물었다. 이 표지에서 말하는 네 개의 동굴집이 있는 곳이 어디냐고. 한 사람이 옆에 있던 흰 머리 노인을 가리켰다. 얼굴은 가무잡잡하고 키는 작아 보였다. 노인의 소매를 잡아 끌었다. 노인이 앞장서서 마을 안쪽으로 들어가더니 이내 비탈길을 따라 뒷산으로 올랐다. 마을은 가난이 덕지덕지 눌어붙은 산동네였다. 노인은 산동네를 벗어나 조금 더 올라가서는 사람이 살지 않는 동굴 네 개를 가리켰다.

찬찬히 동굴집을 살폈다. 깊이 8~9m, 높이 3m, 가로 5m 정도의 동굴 네 개가 휑하니 뚫려 있었다. 동굴 안팎으로는 쓰레기가 널려 있었다. 볼품없이 말라버린 옥수수 몇 대가 메마른 느낌을 더했다.

조선의용군의 옌안 시절 독립군 간부 양성학교


▎조선혁명군정 학교가 옌안 시절 사용했던 동굴집인 야오동(窯洞). 동굴 안팎에는 쓰레기가 널려 있다.
옌안의 전통 민가는 동굴을 파 방을 내는 혈거식의 동굴집이다. 메마른 황토고원지대여서 동굴을 파기가 쉬워서다. 동굴집은 여름엔 시원하고 겨울엔 따뜻하다고 한다. 온돌을 설치하되, 아궁이는 동굴 안과 밖에 하나씩 설치한다. 여름에는 바깥 아궁이에 불을 피워 취사하고, 겨울에는 안쪽 아궁이에 불을 피워 취사와 난방을 겸한다.

옌안은 중국 공산당이 1934년 10월 장시(江西)성 루이진(瑞金) 위두(于都)를 출발해 368일에 걸친 죽음의 대장정 끝에 겨우 도착한 곳이다. 마오쩌둥(毛澤東)을 위시한 중국 공산당 수뇌부의 거처 역시 이런 동굴집이었다. 옌안 일대의 가난한 농민이나 도시 서민들은 지금도 이런 동굴집에서 거주한다.

조선의용군이 1944~45년 이 동굴집을 사용했다고 하지만, 해방 이후 조선 북부로 모두 이동한 다음에는 현지인들이 살았을 터이니 그때의 유품이 하나라도 남아있을 리 없다. 그럼에도 길을 안내해준 노인에게 약간의 사례를 하고 먼저 내려가게 한 다음 한참이나 더 동굴집의 이곳저곳을 살펴보았다. 어떤 알 수 없는 기운이 뒷덜미를 잡아당겨 돌아갈 버스를 쉬이 탈 수 없었다. 마을 입구 작은 시장에서 매운 국수로 끼니를 때웠다. 질깃한 면발에 산초와 고추가 섞인 양념으로 인해 텁텁한 기운이 입안을 가득 채웠다.

그날 저녁 옌안 시내의 숙소로 돌아와 하루 일정을 블로그에 메모하면서 곰곰이 생각해 보았다. 언젠가 바람소리처럼 들은 이야기가 조금씩 망각의 습자지를 적시며 배어 나왔다. 뒷북 치듯, 그 말이 떠올랐다.

“이게 바로 연안파였구나!”

옌안에 모여 있다 귀국했다고 해서 연안파로 불렸다. 한국전쟁 당시 북한군의 주력 간부들이 연안파 출신이었다는 이야기도 생각났다. 한국전쟁이 끝나고는 김일성에게 전부 숙청당했다던. ‘무정’이라는 이름도 떠올랐다. 산시성 황토고원 어느 마을 뒷산에서 바로 그 연안파의 흔적을 만나다니! 그날 나는 블로그에 다음과 같은 메모를 남겼다.

“1940년대 초반 중국 땅에서 중국 공산당과 연계하면서 독립운동을 하던, 약 1000명의 우리 선배님들이 살던 야오동입니다. 이들은 해방 이후 그렇게 그리던 조국으로 돌아갔습니다. 이들은 북한에선 연안파라고 불렸지요. (…) 김일성과의 권력쟁투에서 밀려 권력의 명부에서 사라진 이들의 흔적이 낡은 야오동에 묻혀 있습니다. 이제는 북한에서도 남한에서도 돌보지 않고, 현지에서도 육십 넘어 칠십대가 된 사람들이나 겨우 이들의 존재를 기억할 뿐, 표지석 하나 없는 독립운동의 흔적으로 방치돼 있습니다. 어떤 경우엔 이념이나 전쟁보다 혹독한 권력쟁투의 일그러진 자화상을 보면서 사람이란 존재에 대한 우울한 상념에 빠집니다.”

희미한 기억 속에 묻혀 있던 연안파라는 존재를 실물 표지로 맞닥뜨리자, 작은 호수에 돌멩이 하나가 떨어진 것처럼 내 가슴속에서는 파동이 퍼져나갔다. 2013년 2월 한 주간지에 연재하던 ‘중국민가기행’의 ‘동굴집’ 편에 중국 공산당과 조선의 독립운동 관련 이야기를 더해 연재를 마무리했다.

애초 독립운동사에 대한 독서량은 부족했고, 지식도 형편없었다. 관심이 별로 없었고, 가끔 흘깃흘깃 쳐다볼 정도였다. 마음 한 구석에 언젠가 한 번은 정면으로 마주해야 한다는 생각이 없지는 않았다. 옌안의 뤄자핑을 다녀온 뒤로도 여전히 주저하고 머뭇거림은 계속됐다.

그런데 그로부터 2년 뒤 조선혁명군정학교의 흔적을 귀띔해주었던 지인과 차 한잔을 하는 가운데 질문 하나가 내 귀에 꽂혔다.

“육사가 노래한 ‘백마를 타고 오는 초인’의 모델이 누구인지 아세요?”

“….”

암호와 같은 몇 마디를 더 주고받았다. 그제야 만주가 머릿속에 들어오는 느낌이었다. 소설 <아리랑>의 주인공인 김산이 유랑하던 중국 남부의 어딘가도 손에 잡히는 듯했다. 이렇게 해서 ‘인문기행 중국’이라는 답사여행 목록에 ‘독립운동 흔적찾기’라는 새 항목이 추가됐다. 2015년 봄의 일이었다. 독립운동 관련 서적을 찾아 읽기 시작했다.

돌아온 이름들, 돌아오지 못한 이름들


▎뤄자핑 마을 입구. 조선의용군 계열 조선혁명군정 학교가 있었던 자리임을 알리는 표지가 멀리 보이는 철교 아래 세워져 있다.
중국에서 독립운동의 흔적을 따라가는 답사여행은 그해 여름부터 시작했다. 기존의 여행 일정 사이 사이에 일단 베이징·상하이·하얼빈 등 세 곳을 끼워 넣었다. 어차피 오가는 길목이었다. 2016년의 답사 일정에는 우선적으로 독립운동 관련 답사를 채워넣었다. 1월에는 화남과 화중, 2월에는 타이항산, 8월에는 만주를 목표를 잡았다. 40여 권의 단행본과 수십 편의 논문을 찾아 읽었다. 사적지의 위치는 독립기념관의 ‘국외 독립운동 사적지’(http://oversea.i815.or.kr)를 주로 참고했다.

여행길에서는 매일 블로그에 답사기를 기록했다. 이들 기록이 135개나 쌓여 기초자료가 되었다. 망설임과 두려움이 없지 않았지만, 이들 답사여행을 글과 사진으로 정리해 많은 사람과 공유하고 싶었다. 내 스스로 독립운동사에 눈을 떠가는 과정도 이야기하고 싶었다. 굳이 목적으로 삼지 않더라도 중국 어느 곳에서나 독립운동 사적지 한두 곳씩은 찾아볼 수 있다는 것도 알려주고 싶었다. 영화 <암살>이 개봉되고 <밀정>이 뒤를 이으면서 독립운동에 대한 관심이 대중화한 것도 일종의 응원이 됐다. 마침 <밀정>의 기획자인 이진숙(영화사 하얼빈 대표) 씨가 광저우(廣州)에서 우한(武漢)까지의 답사에 동반하기도 했으니, 이것도 글을 쓰게 하는 인연이라 하겠다. 자, 이제 함께 떠나보자. 길을 떠날 때는 주저할 필요 없다. 마냥 주저하다 보면 묘비에 부럽다는 말밖에 남길 게 없지 않겠는가.

2015년 8월, 중국 답사를 시작하기 전 어느 무더운 날, 서울의 서대문형무소박물관을 먼저 찾아보았다. 대한제국 말기인 1908년 일본에 의해 경성감옥이란 이름으로 처음 세워졌고, 해방 이후까지 서울구치소라는 이름으로 존속했다. 1987년 서울구치소가 의왕으로 이전하면서 역사 박물관으로 탈바꿈했다.

서대문형무소는 개소 이후 증축을 거듭해 1930년대에는 신축 당시의 30배가 넘었다고 한다. 그동안 일본 제국주의에 항거하는 독립운동이란 범죄 아닌 범죄, 소위 사상범이 급증했기 때문이다. 나라를 구하겠다는 사람들이 나라의 감옥에 갇혔고, 잔혹한 수감생활 끝에 죽어나가거나 아예 사형장으로 끌려가기도 했다. 해방 이후에도 크게 달라지지 않았다. 이승만 독재에 반대하는 정치범, 정치 이념이 달랐던 진보적 인사들이 이곳에서 고통을 겪었다. 이들 가운데는 해방 이전의 독립운동가들이 적지 않았다. 박정희 독재시대에도 형무소의 정치학과 역사학은 바뀌지 않았다. 민주주의를 외치는 이들이 이곳으로 줄지어 들어왔다.

‘역사는 무덤과의 대화’라고 했던 한 역사학자의 말이 생각났다. 고대사 연구에서 무덤과 부장품은 매우 귀중한 사료라서 답사 때도 무덤을 찾아가는 일이 많다는 말이었다. 이에 비견하자면, 한국 현대사는 ‘감옥’에 있는 것 아닐까? 적어도 지난 100년은 그랬다. 정의란 거리에서 시작해 경찰서 유치장을 오가다 다시 거리로 나오고, 다시 들어가면 감옥과 사형장으로 통하곤 했다. 그 전의 100년도 그랬다. 19세기 100년은 수탈에 항거하는 민란이 진압과 감옥과 사형장으로 끝나곤 했다. 20세기 전반은 잃어버린 국권을 되찾겠다고 국내에서 또는 이국 땅에서 떠돌다 감옥으로 잡혀갔다. 20세기 후반에는 민주주의를 외치던 이들이 거리에서 시작해 감옥으로 이어졌다.

겹치는 독립운동사와 친일 변절사


▎서울 서대문형무소박물관 외벽에 걸린 걸개그림. 잘 알려진 독립운동가들의 초상이 보인다.
서대문형무소박물관 안으로 들어서니 야외에는 <광복 70주년 기념전-돌아온 이름들>이란 전시회가 열리고 있었다. 열두 폭의 흰 천을 옥상에서 잔디밭으로 길게 늘어뜨리고, 그 위에 266명의 낯선 이름을 써넣었다. 여성 독립운동가들의 이름이었다. 한참이나 들여다보았다. 과연 나는 이들 가운데 몇 명이나 알고 있을까? 그로부터 1년이 훨씬 더 지난 지금, 그때의 사진을 꺼내 그 이름들을 하나하나 다시 들여다봤다. 아는 이름은 이화림·주세죽·박차정·유관순·윤희순 다섯 뿐이었다. 처음 서대문형무소 현장에서 이들의 이름을 보았을 때는, 솔직히 단 한 명도 아는 이름이 없었다. 당시에는 심지어 유관순이라는 이름조차 웬일인지 찾아내지 못했다. 나머지 네 사람은 그나마 지난 1년 동안 독립운동 관련 답사를 하면서 알게 됐다. 이게 오늘날 대한민국 중년 사내들의 민망한 평균인지도 모른다. ‘입으로는 만어(萬語)를 농하지만 흉중에는 일계(一計)도 없다’는 말이 떠올랐다.

실내의 상설전시관을 돌아보았다. 해방 전의 독립운동과 해방 후의 민주화운동이 한눈에 보기 좋게 정리돼 있다. 눈에 거슬리는 구석도 있었다. 3.1운동에 대한 이런 언급이었다.

“독립선언을 발표한 민족대표 33인은 일경에 체포되어 서대문형무소에 수감되었다. 이들은 일제의 가혹한 심문에도 의연하게 수감생활을 하여 민족적 자존심을 굽히지 않았고, 그 가운데 양한묵·박준승·손병희 열사 등이 모진 고문으로 옥사, 순국하였다.”

그러나 민족대표 33인 가운데 끝까지 그 명예를 지킨 사람이 몇이었던가! 그중 3인은 훗날 노골적인 친일로 돌아섰다. 기독교 대표 가운데 박희도와 정춘수, 천도교 대표 최린, 그리고 독립선언문을 직접 썼다는 최남선 역시 그랬다. 독립운동에 나섰던 인사 가운데 친일로 돌아선 변절자가 적지 않은 게 우리의 엄연한 역사다. 독립운동사에서 ‘훗날의 변절’은 중요하다. 변절이란 단순한 생각의 변화가 아니다. 그것은 뒤돌아 서서 동포와 동지의 등에 칼을 꽂는 일이다. 일제강점기는 독립운동사와 친일 변절사가 동전의 양면을 이루는 역사다.

서대문형무소 바깥 벽면에는 걸개그림이 걸려 있었다. 잘 알려진 독립운동가들의 초상이었다. 안중근·한용운·윤봉길·이봉창 외에 갓을 쓴 인물도 한 명 있었다. 의병장 허위(1854~1908)다. 허위는 1896년 경상북도 김천에서 의병을 일으켰고, 1907년 13도창의군 진동창의대장에 추대됐다. 다음 해 한성부 탈환작전을 전개해 서울 동대문 부근 12㎞까지 진격했으나 결국 실패했다. 얼마 지나지 않아 임진강 유역에서 체포돼 경성감옥, 바로 이곳 새 감옥으로 끌려와 순국했다.

허위의 가문은 독립운동가를 많이 배출한 집안으로 유명하다. 사촌인 허형도 의병장이었다. 허형에게는 두 아들 허규·허발, 그리고 딸 허길이 있었다. 허규도 독립운동을 했다. 허형의 조카 허극(허형식)도 만주에서 무장투쟁을 이끌다 1942년 만주군과 교전 끝에 전사했다. 그는 만주 최후의 빨치산 독립투사였다. 허형식의 사촌누이 허길이 바로 육사의 어머니다.

독립운동의 주요 근거지가 된 베이징


▎2015년 서울 서대문형무소 박물관이 마련한 <광복 70주년 기념전-돌아온 이름들> 전시회. 열두 폭의 흰 천을 길게 늘어뜨리고, 그 위에 266명의 여성 독립운동가 이름을 써넣었다.
한 가문이 온전히 독립운동에 투신한 바로는 이회영(1867~1932) 일가가 잘 알려져 있다. 이회영은 1910년 경술국치를 당하자 그 해 10월 여섯 형제와 함께 가산을 정리해 식솔을 이끌고 만주로 망명했다. “나라가 망했는데 가문이 무슨 소용이냐”는 그의 한마디는 선명한 투쟁 의지와 단호한 실행력을 보여준다. 당시 처분한 재산은 지금의 가치로 600억 이상 1000억원에 이른다는 계산도 있다. 이회영 형제들은 만주로 건너가 경학사를 설립해 조선인 부락을 안정화하고, 독립군 양성학교로 신흥강습소를 세웠다. 신흥강습소는 훗날 신흥무관학교로 확대돼 수천 명에 달하는 조선의 젊은이를 독립운동가로 키워냈다. 밥 먹이고 공부 시키고 군사훈련에 필요한 모든 비용을 이회영이 감당했다.

이회영은 1920년대에는 주로 베이징에 거주하면서 아나키즘을 자신의 신념으로 굳히고, 이에 기반해 독립운동을 지속했다. 그러나 1932년 만주에 거점을 확보하기 위해 상하이(上海)에서 다롄(大連)으로 가다 일본 경찰에 체포돼 다롄 감옥에서 고문 끝에 사망했다.

베이징을 먼저 답사하기로 했다. 베이징은 청(淸)대에는 신사상과 신문화가 조선으로 전해지는 통로였다. 일제강점기, 곧 중화민국의 베이핑(北平) 시대에도 그랬다. 조선에서 보면 몽골과 상하이, 멀리 옌안과 충칭(重慶)으로 연결되는 길목이기도 했다. 1920년대 초반에는 상하이 임시정부에 비판적인 인사들이 많이 모여든 곳이다. 조선의 독립을 위해서는 민족 유일당을 세워야 한다는 유일당 운동의 한 축도 베이징이었다. 조선 유학생들이 비싸지 않은 학비로 유학하던 곳도 베이징이었다. 이육사도 베이징에서 유학했고, <아리랑>의 김산도 20대 초반 베이징에서 의학을 공부했다. 이육사가 일본 경찰에 끌려가 고문치사를 당한 곳 역시 이곳이다. 김원봉은 1920년대 전반 5년여 베이징에 의열단 본부를 두고 수백 차례에 달하는 의열투쟁을 이끌었다. 독립운동 1세대인 이회영도 베이징에서 6년 반을 살았다.

베이징에서 이육사가 고문으로 사망한 곳과 이회영이 살던 곳을 찾아보기로 했다. 서울의 우당기념관(우당은 이회영의 호, 서울 종로구 신교동 6-22)을 찾아가니 관계자가 기꺼이 자료를 찾아주었다.

이회영은 1919년 5월부터 1925년 11월까지 베이징에서 6곳을 옮겨 다니며 살았다. 엄청났던 가산은 바닥났고, 국내에서 조달되는 독립자금도 끊어져가던 시절이다. 이회영은 3·1운동 이후 새로 펼쳐진 국내외 정세 속에 독립운동을 어떻게 전개해야 하는가에 대해 고심했다. 그 결과는 아나키즘이었다. 신채호를 비롯해 류자명· 정화암과 이을규·정규 형제 등을 아나키즘의 동지로 만났다. 중국인 아나키스트 동지들도 만났다.

이회영은 과연 어디에서 살았을까? 우당기념관의 자료를 보니 현재의 지명으로는 다음과 같다. 첫 번째 거주지는 충원문(崇文門) 밖의 셋집. 이것만으로는 위치를 특정할 수 없어 답사에서는 제외했다. 두 번째 거주지는 허우구러우위안후퉁(后鼓楼園胡同)이다. 그러나 베이징에 이런 지명은 없다. ‘원(園)’이 아니라 ‘원(苑)’인 허우구러우위안(后鼓楼苑) 후퉁은 있다. 우당기념관의 자료는 이회영 가족과 후손들의 회고를 주요한 근거로 했는데, 그것을 옮기는 과정에서 생긴 오기로 보인다. 이곳은 베이징의 유명 관광지인 난뤄구샹(南锣鼓巷)과 가까운 곳이다. 지금은 좁고 낡은 사합원과 잡원들이 빽빽한 곳이다. 베이징 서민들의 고단한 삶을 담고 있는 후퉁이다. 이회영이 살던 시대도 비슷했을 것이다.

세 번째 거주지는 얼안징(二眼井)이다. 얼안징은 푸싱먼베이다지에(复兴门北大街)에 걸쳐 있던 후퉁이다. 얼안징은 1965년 베이징의 지명을 대대적으로 조정할 때 쑹보(松柏) 후퉁으로 개칭되었다. 그마저 1990년대 재개발로 인해 골목이 통째로 철거되고 새로 지은 고층 빌딩이 뒤덮은 금융가가 됐다. 옛날의 흔적은 티끌만큼도 찾아볼 수 없다. 주소 역시 쑹보후퉁이 아닌 진룽지에(金融街)로 쓴다.

네 번째는 융딩문(永定门) 안의 관인쓰(观音寺)후퉁이다. 그러나 관인쓰후퉁은 내가 조사한 바에 의하면 융딩문이 아니라 시즈문(西直门) 안에 있고, 현재의 지명은 둥관잉(东冠英)후퉁이다. 다섯째 거주지는 샤오징창(小经厂) 후퉁으로, 이 역시 난뤄구샹 북쪽 입구 건너편에서 아주 가깝다. 여섯번째 거주지는 마오얼(帽儿)후퉁인데, 난뤄구샹에 서쪽으로 이어진 골목의 하나다. 난뤄구샹에 가보았다면 누구든 마오얼후퉁을 걸었거나 최소한 들여다보기는 했을 것이다.

일반 여행객이라면 지도만 있으면 허우구러우위안·샤오징창·마오얼후퉁을 쉽게 찾아갈 수 있다. 세 후퉁 모두 난뤄구샹에서 이어지거나 아주 가깝기 때문이다. 후퉁을 좋아해 이미 수십 번은 거닐었던 곳이지만, 새삼 다시 한 번 걸어보기로 했다. 2015년 11월 가을비가 축축하게 내리는 오후였다. 이회영의 거주지는 가로명만 확인됐을 뿐, 호수까지 확인된 것이 아니다. 물론 표지가 설치돼 있지도 않다. 그저 그 골목을 걸으면서 당시의 이회영을 떠올려볼 뿐이다.

‘차로불통(此路不通)’, 그 막다른 길로 뛰어든 이회영


▎베이징의 유명 관광지인 난뤄구샹(南锣鼓巷) 근처 차로불통(此路不通)의 허우구러우위안 후퉁(后鼓楼園胡同). 독립운동가 이회영이 베이징 시절에 머물렀던 골목으로 추정된다.
베이징의 후퉁은 바둑판처럼 정정방방(正正方方)한 구조라서 막힌 골목이 적다. 그런데 허우구러우위안후퉁은 막다른 골목이다. 골목 안쪽으로는 한 여자아이가 눈이 쌓인 자동차 차창에 맨손으로 눈을 헤집어 글씨를 쓰며 놀고 있었다. 골목 입구에는 회색 벽돌 담장에 ‘차로불통(此路不通, 이 길은 막혀 있음)’이라고 붉은 페인트로 쓰여 있었다. 카메라를 꺼냈다.

이회영이 걸었던 인생은 막힌 골목 아니었을까? 그는 조선의 삼한갑족(三韓甲族) 가문의 일원으로 출생했으니 대충 살았어도 편하게 잘살았을 몸이다. 당시 대부분의 양반 관료들은 그랬다. 그러나 이회영은 막다른 길을 주저하지 않고 그 길로 들어섰다. 전 재산을 처분해 만주에서 신흥강습소를 세운 것 역시 막다른 길로 돌진하는 모양새다.

1920년대 그가 독립 이후의 비전으로 아나키즘을 택한 것도 막힌 골목으로 뛰어든 모습으로 보였다. 아나키즘은 자본주의나 사회주의 양쪽 모두와 상당한 거리가 있었다. 사회주의나 공산주의처럼 쑨원의 중국 국민당이나 공산당은 물론 소련 볼셰비키의 지원을 받는 것도 거의 불가능했다. 투쟁방법으로도 외교나 실력 양성이 아니라 의열투쟁을 채택하는 급진 그룹이었다. 이회영은 출신이나 나이로 보면 복벽주의자였을 법도 한데 그는 이미 아나키즘까지 나갔다. 조선이 대한제국으로 개명했어도 그에게는 더 이상 되살릴 가치가 없는 폐기물이었던 것이다.

차로불통의 길을 걸어갔으나 역사는 그를 넓은 광장에 우뚝 선 당당한 존재로 기억한다. 민족의 위대한 귀감이다. 그럼에도 소심한 나는 이회영을 생각하면서 갑갑함을 거두지 못했다. 수많은 친일파 가문과 선명하게 대조되기 때문이다. 일본 제국주의가 국권을 강탈해버렸다는 현실에 쉽게 타협하고, 오히려 적극적인 친일매국으로 돌아서서 자신은 물론 후손들에게까지 탄탄하고 번질번질한 인생을 베풀어준 친일 가문. 그런 친일파 가문이 잘 먹고 잘사는 것에 대해 질시와 분노를 금할 수 없다. 그렇다고 이회영과 같은 길을 갈 용기가 있는 것도 아니다. 소심함 때문이다. 그래서 더더욱 분노와 질시와 자괴감이 일고, 그 대척점에 있는 이회영과 그의 가문이 좁은 골목의 막힌 길에서 자신을 희생한 것이 갑갑하고 아픈 역사로 떠오르는 것이다.

이회영의 거주지, 그 가운데서도 막힌 골목을 되돌아 나오는데 걸음이 쉬이 떨어지지 않았다. 또 다른 강력한 자석이 나를 끌어당겼다. 육사 이원록(陸史 李源祿)이었다. 그가 베이징에서 고문치사를 당한 곳이 이곳에서 그리 멀지 않다.

윤태옥 - 중국 인문 다큐멘터리 전문 제작자. 2006년 <다큐멘터리 인문기행 중국(7부작)>(MBC플러스)을 기획, 제작하면서부터 지금까지 매년 6개월 정도 중국을 여행하면서 다큐멘터리를 기획하거나 중국 문화와 역사에 관한 글을 쓴다. 저서 <개혁군주 조조 난세의 능신 제갈량> <중국식객> <중국민가기행> 등이 있다.

201701호 (2016.12.17)
목차보기
  • 금주의 베스트 기사
이전 1 / 2 다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