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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 연재│김풍기의 선물의 文化史(1)] 달력, 새로운 시간여행을 위한 초대장 

삶의 속도 줄이고 분절과 여유를 꿈꾸며 

김풍기 강원대 사범대학 국어교육과 교수
조선시대에는 中 황제의 책력 받는 것이 ‘권력의 상징’… 새해 달력 펼치며 권력을 넘어 저마다의 ‘세상’을 구성해보는 즐거움도

▎새해가 되면 왕은 신하들에게 그해의 책력을 하사했고, 신하들은 그것을 주변 사람들과 나눴다. 11월 15일 서울 서대문구 한국도자기 연희점에서 사석원 작가의 ‘왕이 된 닭’ 그림접시와 2017년 달력접시를 선보이고 있다.
물건을 주고받는 행위 덕분에 인간은 살아갈 수 있다. 물물교환이든 화폐교환이든 인간이 삶에 필요한 모든 물건을 혼자 만들 수 없는 한, 우리는 물건의 교환을 통해서 살아갈 궁리를 한다.

합리적 경제행위를 할 수 있는 존재라는 의미를 가지고 있긴 하지만, 호모 이코노미쿠스로서의 삶이 전제되지 않았다면 인간은 이토록 오랜 세월 동안 지구를 지배하지는 못했으리라. 우리가 알아차리지 못하는 사이에도 수많은 교환이 이뤄지고 그 교환들 사이에서 인간으로서의 삶이 구성돼 지속된다.

사전적 의미에서 ‘선물(膳物)’은 ‘남에게 어떤 물건 따위를 선사함 또는 그 물건’으로 정의된다. 사전의 짧은 구절 속에 선물의 의미를 모두 담기는 불가능하다. 그렇지만 적어도 우리가 일상생활에서 사용하는 언어적 용법으로서의 선물은 다른 사람에게 주는 물건 그 자체를 의미하기도 하지만 물건을 주는 행위를 포함하는 개념으로 사용된다.

생일을 맞은 친구에게 케이크를 ‘선물’한 사람이 있다고 해보자. 케이크는 단순히 친구의 생일을 축하하는 의미를 담은 물건이다. 그러나 그 작은 물건에 감동하는 이유는 케이크를 선물한 친구가 그것을 사서 전달하기까지의 과정에 대한 고마움 때문이다. 친구의 생일을 맞아 선물을 하겠다는 마음을 먹고, 무슨 물건을 선물로 고를까 고민을 하고, 케이크를 파는 집에 가서 여러 종류의 케이크 중에서 하나를 고르고, 경제적 지출을 하면서 그 케이크를 사고, 그것을 조심스럽게 들고 자신의 시간을 내서 친구의 생일을 축하하는 자리에 오기까지. 그 과정을 생각하면 작은 케이크가 어찌 그 물건에 한정된 의미를 지니겠는가.

거기에는 친구의 정성이 깃들어 있고, 우리는 그 정성에 감동하게 된다. 선물이란 이렇게 하나의 물건으로 그치는 것이 아니라 그 물건이 전달돼 한 사람의 삶 속에 들어가기까지 스며 있는 과정을 포함하는 개념이다. 그러므로 ‘선물’은 물건에 국한되는 것이 아니라 그것을 주는 행위까지 포함하는 의미를 가지는 단어다.

이런 사정 때문에 선물의 문화사(文化史)는 한두 마디로 쉽게 설명될 성질의 것이 아니다. 선물은 문화권이나 시대, 그것을 주고받는 맥락 등에 따라 너무도 다양한 의미를 갖기 때문에 선물의 의미를 정확히 짚어내는 일은 어렵다. 똑같은 물건을 선물한다 해도 그것이 위치한 상황에 따라 전혀 다른 의미를 지니는 일도 허다하다. 꽃 선물도 그 해석에 있어서 얼마나 많은 경우의 수가 있겠는가. 꽃만이 아니다. 선물은 반드시 주는 사람의 의도를 담기 마련이고, 받는 사람은 그 의도를 파악해서 반응하게 된다. 선물은 받을 때도 조심해야 하지만 줄 때도 신중해야 한다.

국가권력으로 통제되는 시간


▎2013년도 북한 달력. 맨 위에 ‘위대한 김일성 동지와 김정일 동지는 영원히 우리와 함께하신다’는 문구가 눈에 띈다.
1780년 6월 28일자 <열하일기>를 보면 연암(燕巖) 박지원(朴趾源)이 연경(燕京)을 향해 가던 도중에 만났던 한족 출신의 강영태(康永泰)라는 젊은이가 책력을 사다 달라는 부탁을 간곡하게 하는 대목이 나온다. 청나라에 살고 있다고는 하지만 두 사람이 만난 만주 지역은 변방 중의 변방이었다.

한 해가 바뀔 무렵 적절하게 책력을 구해야 자신의 새로운 한 해를 계획하며 살아간다. 그에게 책력이란 새로운 시간을 자기화하기 위한 도구다. 18세기 동아시아 사회에서 청나라의 책력은 시간의 준칙으로 작동했지만(어쩌면 조선만이 그것을 철저히 따랐을지도 모른다), 변방의 젊은이가 책력을 구하기란 어려웠으리라.

원래 책력을 반포하는 것은 황제의 권한이다. 황제의 시간을 만방에 반포함으로써 그들이 자기의 신민(臣民)이라는 것을 명확히 알리는 행위다. 조선 역시 대한제국이 성립되기 전까지 중국에 사신을 보내서 책력을 받아오는 것은 황제를 중심으로 구성되는 중세를 잘 보여주는 사건이다.

중국의 책력이 공식적인 경로를 통해 한반도에 들어온 것은 연구자에 따라 약간의 이견이 있을 수는 있다. 하지만 고려시대만 하더라도 무작정 중국의 책력을 기준으로 삼지는 않았던 것으로 보인다. 조선시대 들어와서 중화주의적 사유가 확산되면서 중국 황제에게서 책력을 받아오는 것은 권력의 위계를 드러내는 문화 상징적 사건이 된다.

황제에게서 받아온 책력을 다시 조선의 신하들에게 하사(下賜)하는 행위를 통해서 중세의 권력을 실현했던 것이다. 책력에 표현돼 있는 시간의 획정이나 기준은 전적으로 천하의 중심으로 여겨졌던 황제가 가지고 있는 것이고, 조선에서는 그 권력을 이어받아 왕이 갖게 된다. 그러므로 개인적인 의견을 가지고 시간을 획정하거나 책력을 출판하는 행위는 당연히 처벌의 대상이다.

1777년 2월 28일자 <일성록(日省錄)>에는 형조가 이똥이(李㖯伊) 사건을 보고하면서 법에 의해 처분해야 한다고 아뢰는 기사가 나온다. 워낙 짧은 기사이기 때문에 이 사건의 전모를 정확하게 알기는 어렵다. 이 사건은 <일성록>과 <심리록(審理錄)>에서 산견(散見)되는데 두 기록을 합쳐보면 사건 개요를 짐작할 수 있다.

이똥이는 서운관(書雲觀)에 소속된 노복으로 자격장(自擊匠)이다. 책력이나 택일, 시간 관리 등을 관장하는 서운관에서 자격루를 담당하던 노복이라는 뜻이다. 그는 전치학(全致學, 기록에 따라 金致學으로도 나옴) 등과 함께 관인(官印)을 위조하고 개인적으로 책력(冊曆)을 판각해서 인쇄했다는 죄로 심문을 받은 것이다.

이 사건은 그해 11월 28일까지 꾸준히 조정에서 논의됐는데 형조의 의견은 사형에 처하는 것이었지만 정조는 그를 살려주자고 했다. 그가 책력을 사사로이 판각해서 인쇄한 것은 제대로 관리되지 않은 관청 물건의 수량을 채우기 위한 것이었으므로 정상참작을 해야 한다는 것이었다. 정조와 신하들 사이에 의견이 오랫동안 오가다가 결국은 정조의 주장대로 멀리 유배 보내는 것으로 종결된다.

이 사건에서 우리는 책력을 사사로이 인쇄하는 것이 얼마나 엄중한 일인지를 짐작할 수 있다. 물론 관청의 물건을 한 관청의 노복이 사사로이 다루는 것에 대한 강한 처벌로 볼 수도 있지만, 관련 기사에서는 책력을 마음대로 인쇄한 죄를 명확하게 묻고 있기 때문이다.

책력을 국가가 나서서 관리하는 것이 동아시아만의 사정은 아니었다. 서양의 경우도 해당 문화권의 시간 계산법에 따라 서로 다른 달력을 만들었고, 그것을 황제의 권위로 널리 반포해 사용하도록 했다. 달력은 시간과 공간에 따라 서로 다른 모습으로 나타남으로써 절대적 시간은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을 명확히 보여줬다.

길흉까지 알려준 책력의 놀라운 기능


▎1935년에 발행된 달력. 한 주가 수요일부터 시작되는 것이 이채롭다. / 사진·중앙포토
국가가 책력을 관리한다고 해서 일반 사대부가(家)에서 책력을 사용하지 않았던 것은 아니다. 당연히 책력을 사용하고 있을 뿐 아니라 모든 백성이 그 책력대로 살아가기를 권력은 원하고 있었다.

새해가 되면 왕은 상징적으로 신하들에게 그해의 책력을 하사하고, 신하들은 잘 받아서 주변 사람들과 나눈다. 근대 이전 책력은 필사에 의해 널리 퍼졌겠지만, 18세기 후반 이후로 가면서 다양한 경로를 통해 판각된 책력이 인기를 끌었다. 국가는 해마다 책력을 4000부가량 인쇄해서 배포했고, 18세기 말이 되면 1만6000~1만8000축(軸)을 발간했으니 그 양이 상당했다. 대도시 같은 경우야 제법 빨리 새해 책력을 구했겠지만 시골로 가면 갈수록 구하기가 쉽지 않았을 것이다. 새해가 지난 지 한참 됐어도 여전히 책력을 구하려는 사람들이 꽤 있었던 것은 그런 탓이었다.

송시열(宋時烈, 1607~1689)의 문집에는 그의 제자 최신(崔愼, 1642~1708)과의 대화가 수록돼 있다. 1666년 5월 15일, 송시열이 삼산(三山)의 종가에서 시제(時祭)를 지내고 자신의 거처인 침류정(枕流亭)으로 돌아갔다. 그때 최신이 ‘분지(分至: 춘분·추분·하지·동지)라든지 해정일(亥丁: 해나 정이 들어있는 날)도 아닌데 어째서 시제를 지냈는지’ 물었다. 송시열의 대답은 간단했다. 책력에 ‘제사 지내기에 마땅하다’고 돼 있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주역에 의한 점이라든지 다른 방법은 우리나라에서 사용하지 않고 책력에 표기된 것을 기준으로 시제를 지내는 날짜를 잡았음을 말해준다.(<송자대전> 부록 제17권 어록4)

책력을 보면서 제사 지내기에 적절한지 여부를 살피는 것은 바로 책력의 기능에서 비롯한다. ‘책력’을 지금은 달력으로 번역하지만, 그 단어에 ‘책(冊)’이라는 글자가 들어 있는 것을 주목해야 한다. 한 해의 날짜를 나열한 것을 책으로 만들었다는 의미다. 이 책력에는 단순히 날짜만 들어 있는 것이 아니었다. 책력에 수록된 것을 차례로 보면 옛 사람들이 책력을 날짜를 보기 위해서만 필요로 한 것은 아니었음을 알 수 있다.

조선시대에는 대통력(大統曆)·숭정력(崇禎曆)·시헌력(時憲曆) 등을 사용했는데 시헌력은 18세기 후반부터 시헌서(時憲書)라는 제목으로 유통됐던 책력이다. 이 책의 첫 페이지에 해당 연도의 연대가 표기돼 있고, 정월부터 12월까지 큰 달과 작은 달의 표시, 윤달·분지(分至) 등 절기 및 그것의 정확한 시각이 자세히 기록돼 있다. 그 끝으로는 그해의 총 날짜 수가 적혀 있고, 이어서 연신방위지도(年神方位之圖)가 수록돼 있다. ‘연신’이란 한 해 동안 지정된 방위에 자리 잡고 있으면서 길흉을 관장하는 신을 말한다. 그러니 이 그림을 보면 한 해 동안 각 방위의 길흉을 짐작할 수 있다.

그리고 페이지를 넘기면 우리가 알고 있는 달력이 나온다. 1행마다 하루씩 배정한 뒤 날짜를 나타내는 숫자 아래쪽으로 ‘역주(曆註)’라고 부르는 작은 글씨의 주석이 달려 있다. 거기에는 해도 될 일과 해서는 안 될 일이 표시돼 있다. 예컨대 1895년 2월 2일은 제사 지내기에 좋고 표장(表章) 올리기에 좋으며 친구를 만나기에도 좋고 옷을 마름질하기에도 좋다고 돼 있다.

그러나 파종(播種)하기에는 적절하지 않다고 돼 있다. 이런 식으로 날짜 하나하나에 자연현상의 변화뿐 아니라 일상생활에서 닥치는 일들에 대해 대응해야 할 기준을 제시하고 있다. 송시열이 시제를 지낸 날짜에 대해 묻는 제자의 대답에서 책력을 따랐노라는 것은 바로 이러한 책력의 기능 때문이었다.

책력의 기능은 여기에서 그치지 않는다. 사람들은 해당 날짜의 빈칸에 그날 했던 일이나 앞으로 할 일을 기록함으로써 플래너나 비망록으로서의 역할을 하도록 했다. 근대 이전의 책력을 살피노라면 그것을 사용했던 사람이 붓으로 군데군데 메모를 했던 흔적을 볼 수 있다. 다양한 내용을 써넣고 나서 책력을 그대로 보관한다면 그 자체로 훌륭한 비망록이 된다.

1970년대만 하더라도 시골 마을에서는 한 장짜리 달력을 선물로 받는 일이 흔했다. 가운데는 근엄한 표정의 지역 국회의원 사진이 자리하고 있었고, 그 주변으로 작은 글씨로 빽빽하게 열두 달이 인쇄돼 있었다. 연말에 이런 달력을 받으면 어른들은 누추한 벽에 붙여진, 이제는 곧 잊힐 올해의 달력 위로 정성스럽게 붙인다.

보다 다양해진 선물의 ‘경로’


▎베네수엘라의 수도 카라카스 시내에서 한 상인이 쿠바혁명의 영웅인 체 게바라(1928~67) 얼굴 사진이 담긴 셔츠와 달력 등을 팔고 있다. 아르헨티나 출생의 게바라는 피델 카스트로를 만나 쿠바혁명에 가담했고 라틴아메리카 민중혁명을 위해 싸우다 볼리비아에서 사망했다. / 사진·중앙포토
그리하여 우리 식구들은 저 국회의원이 보여주는 근엄한 얼굴과 함께 한 해를 지내는 것이다. 국회의원이 연말 선물로 보내주는 한 장짜리 달력이 그리 대단한 것이 아니었지만 늘 가장 잘 보이는 벽에 붙였다. 그것은 달력의 외관이 훌륭해서가 아니라 ‘국회의원’이라고 하는 권력자가 선물로 ‘하사’한 것으로 여겼기 때문이 아닐까 추정된다. 그들의 권력이 자신의 손에서 비롯하는 것인 줄 꿈에도 몰랐던 시골 노인들의 머릿속에는 그 하사품이야말로 함부로 취급해서는 안 될 물건으로 인식됐을 것이다.

권력자들은 자신의 달력을 선물함으로써 자신의 시간 속으로 사람들을 불러들인 셈이다. 중국의 황제는 조선을 자신의 시간으로 불러들이고 조선의 왕은 자신의 백성을 자신의 시간으로 불러들인다. 그 시간의 분할 속에 다른 사람의 삶을 구성하도록 함으로써 자신의 권력을 증언하고 행사한다. 적어도 근대 이전의 책력은 바로 그런 맥락에서의 상징성을 가지고 있다.

시대가 달라져서 이제는 달력을 선물하는 경로가 다양해졌다. 심지어 달력을 대체할 수 있는 무수한 기기가 있다. 그만큼 시간을 통한 권력화의 방식이 다양해졌다는 의미이기도 하겠다.

그러나 우리가 삶의 한 고비를 넘으면서 선택의 기로에 놓여있을 때 비록 진지하게 믿을 문제는 아니지만 적어도 한두마디 충고를 해줄 수 있는 달력이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중국의 달력에서 대한제국의 달력으로, 다시 일본 제국주의자들의 달력과 단기(檀紀)의 달력을 지나 이제는 전 지구적으로 강요되고 있는 서기(西紀)의 달력이 만든 시간을 우리는 살아간다. 촘촘한 시간의 그물이 우리 삶을 분과 초 단위로 옥죄고 있고 그 시간의 미세한 분할은 점점 우리 삶의 속도를 가속시킨다. 그 시간의 그물 사이를 슬며시 빠져나가 전혀 새로운 시간, 누구도 경험하지 못했던 시간의 분절과 여유를 꿈꾼다.

새해 달력을 선물로 받으면서 권력을 넘어 새로운 세상을 구성해보고 싶은 마음을 그 달력 귀퉁이에 담아본다.

김풍기 - 강원대 사범대학 국어교육과 교수. 책과 노니는 것을 인생 최대의 즐거움으로 삼는 고전문학자. 매년 전국 대학교수들의 이름으로 발표하는 ‘올해의 사자성어’ [2011년 엄이도종(掩耳盜鐘)]에 선정되는 등 현실에 대한 비판도 잊지 않는다. 저서로 <옛 시에 매혹되다> <조선 지식인의 서가를 탐하다> <삼라만상을 열치다> 등이 있다.

201701호 (2016.12.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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