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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재소설] 복거일 소설 ‘이승만’ | 물로 씌여진 이름(제1부 광복) 

제3장 - [10] 선전포고  

복거일(卜鉅一) / 조이스 진
임시정부가 항주로 옮겨간 뒤, 임시정부 요인들의 다수가 자신에게 적대적이 되자, 김구는 임시정부와 거리를 두기 시작했다. 그는 공식적으로는 여러 국무위원 가운데 하나였고 주석은 조완구였으므로, 임시정부의 운영에 대한 그의 실질적 및 도덕적 책임은 그리 크지 않았다. 김구가 국무위원직을 사양하고 임시정부의 운영에서 발을 빼자, 임시정부는 휴면 상태가 되었다.
윤봉길의 거사가 성공한 뒤, 임시정부 요인들은 주로 상해 동남쪽 항주(杭州)와 가흥(佳興)으로 피신했다. 임시정부는 항주에 판공처를 마련했고, 조완구·김철·조소앙 등이 거기 머물렀다. 김구와, 이동녕·엄항섭 등 김구와 가까운 인사들은 가흥에 몸을 숨겼다.



1932년 5월 15일 항주의 여관에 마련된 임시정부 판공처(辦公處)에서 국무회의가 열렸다. 윤봉길의 성공적 거사로 당연히 밝고 가벼웠어야 할 국무회의 분위기는 그러나 어둡고 무거웠다. 윤봉길의 거사로 김구 혼자 영웅이 되었고 다른 국무위원들은 개인적으로 얻은 것 없이 생활 근거인 상해를 황급히 떠나야 했으니, 분위기가 좋을 리 없었다. 게다가 다른 국무위원들은 중국 정부가 임시정부에 지급한 자금을 김구가 혼자 갖고 내놓지 않는다고 생각했고, 김구는 김구대로 상해의 중국인 상인단체가 낸 윤봉길과 안창호의 가족을 위한 위로금을 김철과 조소앙이 움켜쥐고 있다고 여겼다. 결국 자금 문제를 놓고 김구와 김철 사이에 논쟁까지 벌어졌다. 며칠 뒤 국무회의에서 군무장 김철과 재무장 김구가 자리를 맞바꾸어 김철이 재무장이 되고 김구가 군무장이 되는 것으로 상황이 간신히 수습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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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01호 (2016.12.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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