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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석학 지상특강] 존 아이켄베리 미 프린스턴대 석좌교수의 글로벌 문제 진단 

“자유민주주의, 거시적 기획에 실패했다” 

이택광 경희대 교수·문화평론가
트럼프 당선은 세계체제, 국제질서 전반에 대한 도전 암시… 자유주의적 국제질서의 혁신에 희망 걸어야

자유민주주의의 엘리트주의는 포퓰리즘을 근본적으로 해결하지 못한다는 점에서 분명한 한계를 가진다. 브렉시트 등 유럽의 정치상황이야말로 포퓰리즘이 어떻게 자유민주주의를 뒤흔들고 있는지 보여주는 분명한 사례다. 트럼프의 출현으로 혼돈은 더 깊어졌다. 탈출구는 없는가.


▎존 아이켄베리 미 프린스턴대 석좌교수는 “자유민주주의가 안고 있는 문제는 심각하지만 아직 미래는 있다”는 희망을 피력했다. / 존 아이켄베리 : 1954년 출생. 맨체스터 대학 졸업 (BA), 시카고 대학에서 박사학위 (PHD)를 취득했다. 국무성정책기획국 근무, 브루킹스 연구소 주임연구원, 우드로 윌슨 국제센터 펠로우, 조지타운 대학교수를 거쳤다. 현재 프린스턴 대학 석좌교수를 지내며 정치학과 국제관계론을 연구하고 있다.
프린스턴 대학 석좌교수 존 아이켄베리(John Iken berry) 교수는 줄기차게 제 2차 세계대전 이후 구축된 미국 주도의 ‘세계질서’를 안정과 번영을 위한 필요악이라고 주장해왔다. 아이켄베리 교수를 유명하게 만들어준 책은 <승리 이후>인데, 이 책은 제 2차 세계대전 이후에 세계질서가 어떤 방향으로 설정돼 진행되었는지 고찰하는 정치학적인 저술이다. 최근 <자유주의적 리바이어던>이라는 책에서 아이켄베리 교수는 이런 전후 질서가 위기에 빠진 것은 사실이지만, 이 질서가 붕괴하면 더 큰 혼란이 야기될 수 있다는 점에서 급격한 세계질서의 변화를 경계한다. 이런 관점에서 그는 미국 민주당의 외교안보문제를 자문해왔다. 고고한 아카데미즘에 자족하지 않고 자신의 이론이 구체적인 외교정책으로 구현될 수 있도록 노력해온 것이다.

아이켄베리 교수가 경희대 초청으로 최근 한국을 방문했다. 방한 기간 동안 아이켄베리 교수에게 필자가 묻고 싶었던 궁금증은 트럼프 이후의 미국 민주주의보다도 그가 줄곧 주장해온 이념의 위기에 관한 문제였다. 그의 주장대로라면 이번 트럼프 당선은 단지 미국 민주주의의 위기를 의미하는 문제만은 아니었다. 그는 이번에 ‘자유주의적 국제주의(liberal internationalism)’라는 용어를 들고 왔다. 이 용어는 아이켄베리 교수가 어떤 관점에서 자유민주주의 체제를 바라보고 있는지 극명하게 보여준다. 그에게 자유민주주의는 일국적인 차원이 아니라 국제적인 차원에서 실현되고 있는 보편가치를 의미하는 것이다.

아래로부터 진행되는 포퓰리즘적 현상


▎존 아이켄베리 교수가 2017년 1월 11일 경희대에서 ‘자유주의적 국제주의’를 주제로 강의하고 있다
‘역사의 종언’을 선언하면서 자유민주주의의 보편가치를 주장했던 프랜시스 후쿠야마를 떠올리는 대목이기도 하다. 그러나 자유민주주의를 위기적 상황에 대한 해결책으로 본다는 점에서 아이켄베리 교수는 후쿠야마와 일정하게 다른 관점을 취한다. 물론 최근 들어 후쿠야마 역시 자유민주주의를 비롯한 일반적인 정치체제의 부패를 언급하고 있다는 점에서 아이켄베리 교수의 관점과 일정하게 궤를 같이하게 된 것도 사실이지만, 국제적인 차원에서 이루어지는 진보적 가치로서 자유민주주의를 바라본다는 점에서 아이켄베리 교수는 조금 다른 시각을 보여주고 있다.

1월 11일 경희대에서 이뤄진 아이켄베리 교수의 특강 제목은 “트럼프 이후 민주주의는 어디로 갈 것인가”였다. 트럼프 당선이 단순한 미국 내부 문제라기보다 자유민주주의라는 보편이념에 대한 도전이라는 점에서 주제를 정했다는 전언이었다. 특강 당일 뚝 떨어진 수은주에도 아랑곳없이 많은 청중이 운집했다. 주제가 주제이니만큼 많은 청중의 관심을 끌었던 것이다. 상기된 분위기에서 아이켄베리 교수는 지금 세계에서 벌어지고 있는 상황을 일별하면서 강의를 시작했다.

일단 그는 현재 전 세계적으로 벌어지고 있는 자유민주주의의 위기상황을 언급했다. 폴란드, 헝가리, 터키, 그리고 필리핀에서 벌어지고 있는 민주주의 후퇴 현상과 한국에서 벌어지고 있는 리더십의 위기상황을 거론하면서 이런 사례가 세계적 차원에서 위기에 빠진 자유민주주의의 현실을 보여 준다고 말했다. 이런 세계적인 상황과 더불어 아래로부터 진행되는 포퓰리즘적인 현상이 발생했는데 그 사례들이 바로 트럼프 당선과 브렉시트라는 말이었다. 여기에서 중요한 것은 바로 후자다.

미국과 영국이 아닌 지역에서 벌어지는 민주주의 후퇴 현상은 자유민주주의 체제를 더 잘 정비하면 될 일이지만, 정작 그 본국에서 발생한 ‘아래로부터 올라온 반발’은 의미심장한 변화를 예고하는 것이다. 이것이야말로 지난 10년간 민주주의의 약속과 인기가 쇠퇴해왔음을 의미하기 때문이다. 아이켄베리 교수에 따르면 이런 쇠퇴는 전후 자유민주주의의 ‘거시적 기획’이 실패했음을 뜻한다.

1945년 이후 세계 시민들은 자유민주주의를 통해 개방적이고 다자적이고 진보적인 세계질서를 건설하고자 했다. 아이켄베리 교수는 전후 자유주의의 가치가 위기에 처했다는 점에서 현재 벌어지는 상황들이 심각한 징후라고 말했다. 자유민주주의의 국제화는 25년 동안 이루어진 과정이었다. 아이켄베리 교수가 규정하는 자유주의적 국제주의의 형성은 현실 사회주의권의 몰락을 기점으로 이루어진다. 공산당이 통치했던 동유럽과 권위주의적 정권이 지배했던 남유럽, 남미, 그리고 동아시아에서 벽이 무너졌다. 자유주의적 국제주의 질서가 승리한 것처럼 보였다. 세계 정상회담의 범위도 G7에서 G20으로 확대되었다. 협소한 ‘자유진영’이 지구적 차원으로 확장된 것이다.

NATO와 EU가 동진하면서 영역을 넓혔고, 중국이 세계무역기구에 가입했다. 자유민주주의는 완전한 승리에 도달한 것처럼 보였다. 이에 대적할 만한 라이벌은 없는 것 같았다. 이데올로기의 종언이라는 의미는 더 이상 논쟁할 필요 없는 자유민주주의 전일화를 의미했다. 세계는 자유민주주의로 하나가 됐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많은 이론가와 사상가들이 민주주의가 이제 새로운 글로벌 규범으로 거듭났다고 선언했다. 후쿠야마는 유명한 ‘역사의 종언’이라는 주장을 내놓았다. 논쟁은 끝났고 자유민주주의가 승리했다는 의미였다.

노벨경제학상 수상자인 아마타야 센 역시 민주주의는 “일반적으로 공평한 것이라고 여겨지는 상태를 성취하기 위한 보편적 가치”라고 선언했다. 말하자면, 모든 정의의 토대에 자유민주주의의 가치가 놓여 있다는 말이다. 규범적 이상으로 민주주의는 확고하게 안착한 것처럼 보였다. 여기까지 보면 세계는 드디어 오랜 체제경쟁을 끝내고 분쟁과 폭력 없는 완전무결한 차원에 도달했다. 모두가 조화롭게 완전하지는 못할지언정 합리적으로 문제들을 해결하면서 차근차근 문명을 발전시키면 될 것처럼 보였다.

2008년 금융위기와 경기침체가 변곡점


▎지난해 6월 24일 브렉시트 투표 결과에 환호하는 영국 시민들. 브렉시트는 기득권 세력이 감지하지 못한 국민의 분노가 표출된 결과란 분석이다.
그러나 상황은 이상하게 전개됐다. 위기의 신호가 곳곳에서 나타나기 시작한 것이다. 2008년 금융위기와 경기침체가 변곡점이었다는 것이 아이켄베리 교수의 진단이다. 러시아와 중국이 미국 주도의 자유주의 질서에 도전하기 시작했다. 자유민주주의 내에서도 반동적인 흐름이 시작되었다. ‘신권위주의’라는 흐름이 포퓰리즘적인 반발과 정치운동을 촉발시켰다. 포퓰리즘은 자유민주주의의 근간을 뒤흔드는 정치적 역능이다. 자유민주주의는 기본적으로 합리적인 정부 운용을 모토로 내세운다. 그러나 포퓰리즘은 정치에 아마추어적인 이들에게 정부 운용을 내맡기는 결과를 초래한다.

아이켄베리 교수는 비행기를 예로 들면서, 승객 중 한 명이 비행기에 있는 ‘평범한 고객들’과 의사소통을 하지 않으니 비행기를 접수해서 기장을 바꾸자고 선동하는 카툰을 보여줬다. 포퓰리즘은 이런 민주주의의 왜곡을 낳을 수 있다는 것이 그의 주장인데, 물론 이런 그의 생각에 대한 반론도 많다. 아래로부터 올라오는 직접 민주주의의 열정이 없다면 실질적으로 민주주의 자체가 작동하지 않을 수도 있다는 사실은 역사적인 경험을 통해 확인할 수 있다. 그럼에도 아이켄베리 교수의 주장은 자유민주주의 위기의 본질이 무엇인지 절묘하게 보여준다는 점에서 되새겨봄 직하다.

특히 자유민주주의의 엘리트주의는 포퓰리즘을 근본적으로 해결하지 못한다는 점에서 분명한 한계를 가진다. 유럽에서 발생하고 있는 정치적 상황이 바로 이 문제를 말해준다. 유로화는 위기에 처했고, 난민들이 유럽으로 몰려들고 있다. 영국은 유럽연합을 탈퇴함으로써 국제적인 부담에서 탈피하려고 했다. 브렉시트는 바로 이런 시도의 결과였다. 유럽의 정치상황이야말로 포퓰리즘이 어떻게 자유민주주의를 뒤흔들고 있는지 보여주는 분명한 사례일 것이다.

국제적으로 본다면 러시아의 부상 또한 미국 중심의 질서를 위협하고 있다는 것이 아이켄베리 교수의 진단이다. 러시아는 미국 대선이 진행되는 동안 공공연하게 정치상황에 개입하려 들었다. 이런 상황은 미국 주도의 세계질서에서 러시아가 일정한 지분을 주장하기 위한 것이라고 볼 수 있다. 이런 국제적인 상황과 더불어, 미국 내적인 조건 역시 악화일로를 걷는다. 미국은 글로벌 자유질서의 핵심 축임에도 내치의 불안으로 흔들리고 있는 것이다. 정치는 양극화되었고, 제도는 신뢰를 얻고 있지 못하고 있다. 수입은 줄고 경제는 더욱더 불평등해지고 있다. 지난해 미국 대선은 지난 70년 동안 미국이 주도적으로 참여해온 자유주의적 국제질서의 구축과 유지를 재고하게 만들고 후퇴시키는 것이었다. 무역과 국제적 연대, 그리고 고문 사건과 이민 문제들이 서로 뒤얽혀서 정부에 대한 불신을 가중시켰다. 헌법에 보장된 권리들도 제대로 이행되지 못하는 일들이 잦았다. 이 모든 혼란이 트럼프 당선에 일조한 것이라고 아이켄베리 교수는 판단했다.

트럼프의 선언은 한마디로 이런 미국 주도 시스템을 끌어내리겠다는 것이다. 미국이 더 이상 국제적인 문제에 개입하지 않는 보호주의를 실행하겠다는 것이 트럼프의 약속이다. 그러나 트럼프는 말 그대로 전문적인 정치 훈련을 받지 못한 아마추어일 뿐이다. 이 아마추어 정치인이 포퓰리즘을 등에 업고 실천할 일들은 자유민주주의에 결정적인 독약으로 작용할 것이다. 자유민주주의는 트럼프에게 적절한 규범일 수 없다.

확실히 놀라운 전환점이 시작된 것이다. 냉전 이후, 모든 ‘좋은 것들’은 지구화, 민주주의, 인권, 경제성장, 열강의 통제와 순화, 유엔과 NATO, 미국의 리더십이었다는 것이 아이켄베리 교수의 생각이다. 그러나 이런 가치가 트럼프에게는 통하지 않는다. 트럼프에게 이런 가치는 오히려 미국의 발전을 막는 장애물이다. 이미 2015년에 <뉴욕타임스>는 2015년을 “죽음을 기억하라”는 정언명령을 실현해야 하는 연도로 선언하고 있다. 시스템은 붕괴하고 방화벽은 흔들리고, 모든 질서가 사라졌다는 것이다. 미국의 시스템은 이미 경고음을 울리고 있었던 셈이다. 심지어 낙관적이었던 후쿠야마조차 ‘정치적 쇠퇴’를 주장하고 있다. 이 모든 상황이 아이켄베리 교수에게 자유민주주의가 더 이상 보편적 규범으로 작동할 수 없게 된 비관적인 징후인 셈이었다.

‘글로벌 프레임’은 무너지고 있나?


▎2007년 화려했던 미국 뉴욕 리먼브러더스 본사의 외벽 전광판. 2008년 리먼브러더스 사태와 이에 따른 국제 금융위기로 자유민주주의가 쇠퇴의 변곡점을 맞게 됐다.
원인을 진단할 필요가 있다. 아이켄베리 교수는 얼마나 이 위기가 나쁜 기원을 가진 것인지에 대해 언급했다. 얼마나 깊은 곳에 이 위기의 원인이 있는가. 일시적인 것인가, 아니면 항구적인 것인가? 자유민주주의의 문제가 리더십이라면 성장과 변화는 어떻게 가능한가? 미국 주도 질서의 문제인가? 자유민주주의를 구성하는 ‘글로벌 프레임’이 무너지고 있는 것인가? 안정적 국제관계는 위기에 봉착할 것인가? 이런 질문들은 궁극적으로 하나의 문제로 귀결된다. 앞으로 미국이 주도하는 질서 붕괴가 명확하다면 미래는 다른 질서를 적절하게 구성하는 여부에 따라 달라질 것이다.

여기에서 아이켄베리 교수는 자유주의와 민주주의를 분리해냈다. 200여 년간 자유주의적 근대성은 민주주의를 전진시켰다. 이런 전진이 멈췄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하는 것인지 물어야 한다는 것이 그의 주장이다. 이런 문제의식은 새로운 관점을 제공하면서 현재 벌어지고 있는 상황을 재해석하게 만든다. 자유민주주의의 문제는 깊지만 아직 미래가 있다는 의미이다. 민주주의는 시대에 따라 침잠을 거듭했다. 1930년대를 상기해보면 알 수 있을 것이다. 파시즘이 창궐하던 시대에 민주주의는 바닥으로 가라앉았다. 다시 말해서 민주주의가 요동치더라도 자유주의적 이상은 다시 민주주의를 수면으로 끌어올렸다는 뜻이다.

역사의 고비를 넘기고 다시 민주주의는 돌아왔다. 민주주의의 비밀은 ‘스스로 배우고 교정하는 능력’에 있다. 아이켄베리 교수는 자유민주주의 이외에 다른 대안은 없다는 입장을 확고하게 주장했다. 마찬가지로 지금은 위기에 빠진 것처럼 보이지만 자유주의적 국제주의야말로 21세기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유일한 유형의 질서라고 거듭 천명했다. 민주주의가 일시적으로 쇠퇴하더라도 자유주의적 국제주의가 지속되는 한 다시 회복될 수 있을 것이라는 낙관주의를 읽을 수 있었다.

민주주의의 발흥은 장구하고 느린 과정이었다. 프랑스혁명이나 미국혁명이 일어났을 때도 민주주의는 미래를 장담할 수 없었다. 그러나 점점 힘을 얻고 시대를 넘어 퍼져나갔다. 총 3차의 파동기를 거치면서 민주주의가 확장되었는데, 1차 파동은 19세기로서 29개국이 민주제를 채택했고, 2차 파동은 1945년 이후로서 36개국이 민주제를 채택했다. 3차 파동은 1970년데 일어났는데, 남미와 동아시아, 동유럽에 걸쳐 100여 개국이 전 세계적으로 민주제를 채택해서 오늘날에 이르렀다.

민주주의 중에서도 가장 번영한 체제는 바로 자유민주주의 체제라는 것이 아이켄베리 교수의 지적이다. 직접 민주주의나 포퓰리즘적인 민주주의가 아니라 공화주의적 법 위에 세워진 자유민주주의 체제만이 살아남아서 번성할 수 있었다는 것이다. 포퓰리즘과 권력을 제한하기 위해 민주주의에 더해져야 하는 것이 바로 헌법주의와 상호견제의 균형이다. 이런 요소들은 공화주의 이론에서 출현했다. 다수결로부터 보호되어야 하는 소수의 권리를 법으로 지켜야 한다는 것, 이것이 바로 자유민주주의의 원칙이다. 그 소수의 권리에 발언과 종교, 언론이 포함된다. 비자유주의적 민주주의의 발흥이 오늘날 목격되고 있는데, 이런 본질을 제거한 민주주의는 마멸될 수밖에 없다.

우리는 민주주의가 왜 도래하는지 알지 못한다. 예견할 수 없다는 뜻이다. 그러나 일단 민주주의가 도래하면 부유한 국가일수록 민주적으로 존립하게 된다. 국가적 부가 축적되지 못한 국가에서 민주주의가 꽃필 수 없다. 1975년까지 아르헨티나에 존재했던 군부독재를 상기해보면 된다. 국민소득이 6055달러를 넘어서기 전까지 민주주의는 도래하지 않았다. 아르헨티나의 국민소득이 이 상한선을 넘자 군부독재가 무너졌다는 이론이 있다. 경제개발이 곧 민주주의의 기초라는 이런 생각은 자유민주주의의 기본 신념이기도 하다. 그러나 오늘날 이런 법칙은 통하지 않는 것 같다. 터키는 당시 아르헨티나보다 더 국민소득이 높았지만 여전히 권위주의 정부의 통치 아래 놓여 있다.

자유민주주의 국제 공조는 재건 가능하다


▎지난해 11월 9일 도널드 트럼프의 미국 대통령 당선에 기뻐하는 미국 시민들. 트럼프의 대통령 당선은 자유민주주의의 미래에 어두운 그림자를 드리웠다.
아이켄베리 교수는 이런 상황이 새로운 걱정거리라고 말했다. 민주주의는 급작스런 혁명이나 쿠데타가 아니라 서서히 침식되어야만 가능한 것인데, 터키의 경우처럼 그 법칙이 작동하지 않는 경우도 있는 것이다. 그동안 민주주의의 확산은 국제적 공조에 기초했다. 동아시아와 유럽에서 이루어진 민주주의의 확산은 미국과 유럽연합의 지원을 받았기에 가능했다. 동아시아의 동맹시스템과 미국의 영향은 한국의 민주화를 촉진시켰다. 유럽연합과 NATO는 동유럽 이행의 ‘프레임워크’를 제공했다는 것이 아이켄베리 교수의 주장이다. 그러나 오늘날 상황은 사뭇 달라졌다. 이런 국제 공조는 현저하게 약화되었다. 민주주의를 다시 진작시키려면 국제 공조를 다시 강화해야 한다는 것이다.


▎도널드 트럼프가 지난 해 12월 7일 발간된 미 시사주간지 <타임>이 꼽은 ‘2016년 올해의 인물’로 선정됐다.
아이켄베리 교수는 국제 공조의 회복에 낙관적이었다. 자유민주주의는 국제적인 질서를 형성하는 역량을 가지고 있음을 확신한다고 했다. 이미 역사적 전례가 있다는 것이다. 미국 중심의 동맹국들이 1945년 이후 수립한 자유주의적 질서는 개방적이고, 느슨하게 연결되어 있으면서 진보적인 지향을 가지고 있었다. 이런 선례에 따라서 지금 현재 국제 공조가 위기에 빠지더라도 언제든지 재건할 수 있을 것이라는 믿음이었다. 물론 경제적인 문제와 정치적인 문제가 이 국제 공조의 회복에 나란히 걸려 있다.

먼저 경제적인 문제는 저성장과 수입 감소라는 새로운 현실이 기다리고 있다. 이로 인해서 불평등이 심화되었고 이 문제를 구 자유민주주의 체제는 해결하지 못했다. 이런 현실로 인해 전후 자유주의 국제주의가 퇴조하게 된 것이다. 미국 역시 불평등은 가속화되었고 세계적으로 불평등 문제는 확산되었다. 분배정의가 제대로 실현되지 않았기 때문에 이런 불평등이 가속화된 것이라고 볼 수 있다. 이 상황은 심각한 함의를 가진다. 중산층과 노동계급이 부하를 이기지 못하고 침몰하면서 이민자와 무역개방, 그리고 다문화주의를 참지 못하게 된 것이다. ‘전통적인 엘리트들’도 의심을 받기 시작했다. 이들이 국제적 자본주의의 이득을 독점하고 있다는 의혹이 불거지고 있는 것이다. 이런 까닭에 국제주의를 지지하지 않는 분위기가 점증하면서 유엔의 인도주의적 지원이나 민주주의 증진 정책에 타격이 가해지고 있다.

경제적 문제와 더불어 정치적 문제도 무시할 수 없다. 미국을 비롯한 민주국가에서 민주적이고 시민적인 규범과 문화가 약화되고 있는 중이다. 언론은 신뢰를 상실하고, 전문가들과 엘리트들은 자기 이익에 집착하는 집단으로 비치고 있다. 공공적인 신뢰가 땅에 떨어지고 있다. 정당의 퇴조도 이에 해당한다. 민주주의라는 이상에 대한 회의가 전 세계적으로 퍼져나가고 있다. 결국 이런 상황은 국제적인 질서의 약화로 이어진다. 지구적 차원에서 벌어질 권력 이행을 확인할 필요가 있다. 자유주의적 질서를 지지하던 오래된 패트론들은 점점 약화되고 있다. 이와 대조적으로 중국을 비롯한 비서구 국가들이 부상하면서 민주주의 가치 자체가 큰 지지를 얻지 못하고 있다.

미국은 국제 문제에서 발을 빼려 한다. 트럼프 당선으로 이런 소극성은 더욱 강화될 것이다. 부상하는 국가들은 더 큰 목소리를 내거나 영향력을 발휘하고자 한다. 중국의 패권은 앞으로 더 두드러지게 나타날 것이다. 상호의존성의 문제가 새롭게 부상할 수밖에 없다. 핵개발과 확산을 방지하거나 전염병을 예방하고, 금융안정성과 지구온난화 문제에 공동으로 대처할 수 있는 국제주의는 점점 더 길을 잃을 것이다. 이런 과정은 필연적인 것이기도 하다.

G7에서 G20로 늘어난 국제정상회담은 더 다양한 가치와 전망, 역사적이고 지정학적인 의제들을 다룰 수밖에 없다. 이 과정에서 갈등은 피할 수 없고, 이 문제를 해결할 거버넌스가 필수적이다. 복잡한 사안의 합의를 이끌어낼 합리적인 리더십이 필요한 것이다. 이런 과정에서 민주주의는 다소 거추장스럽게 보일 수밖에 없다. 국제주의가 선진적 민주주의에 뿌리박지 못한다면 문제일 수밖에 없다. 민족주의와 포퓰리즘이 부상하는 한편으로 국제주의가 약화되는 것은 그래서 우려스럽다는 것이다.

아이켄베리 교수가 걱정하는 것은 이 와중에 자유민주주의를 통해 이루어진 연대감의 상실이었다. 이 연대감은 국제주의의 도덕적 토대이기도 했다. 이 도덕적 토대가 자유민주주의를 매개로 진보적인 체제들을 만들어갔다는 것이 아이켄베리 교수의 진단이다. 이런 연대가 무너진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할까. 세계가 각자의 질서에 따라 지역의 이익을 추구한다면 충돌은 불가피하다. 이 충돌을 제어하고 해결할 리더십이나 공조 체제가 부재하거나 약화된다면 세계는 다시 전후 질서 이전의 혼란으로 돌아갈 수밖에 없다는 것이 그의 고민이었다.

국제주의 퇴조는 극복해야 할 위기


▎푸틴 러시아 대통령이 그리는 러시아의 미래는 강대국 소련과 옛 러시아를 합친 ‘대(大) 러시아’다. 러시아의 부상 또한 미국 중심의 질서를 위협하고 있다는 것이 아이켄베리 교수의 진단이다.
정녕 미래의 혼돈은 피할 수 없는 것일까? 아이켄베리 교수는 뜻밖에도 낙관적인 전망을 제시했다. 자유주의적 국제질서의 혁신에 미래가 있다는 것이다. 이 미래가 민족적인 발전과 국제적인 질서를 상호 연결시켜줄 수 있다면 국제질서의 강화는 가능하다는 말이다. 이 과정은 지금 현재의 모순을 만들어낸 신자유주의적 무역질서를 넘어서서 새로운 포스트-신자유주의의 전망을 요구한다. 또한 이 미래는 신흥국 정부의 상호협력 체계를 혁신하고 재정비할 수 있을 때 밝을 수 있다. 자유주의적 국제주의가 냉전 이후 다른 사상들만큼 보편적으로 관철되기 어렵다면, 작은 단위로 자유민주주의에 기반을 둔 국제 공동체를 만들어낼 수 있을 것이다. 이 공동체를 중심으로 작은 연대들을 이루어나간다면 자유주의적 국제주의가 불가능하지만은 않다는 것이 아이켄베리 교수의 주장이었다.

이 자유주의적 국제주의는 가치와 이익을 넘어선 제 3의 연대를 형성할 매개를 통해 질서와 공조를 만들어낼 수 있다. 아마도 이 매개는 상호적인 불안요소일 것이다. 모두가 충돌할 수밖에 없다면 만인에 대한 만인의 투쟁이라는 홉스적인 혼란의 상황에 놓이게 된다. 이 혼란을 막기 위한 대책으로 질서와 공조에 동참할 수밖에 없을 것이라고 아이켄베리 교수는 전망했다. 여기에서 상호적인 불안요소라는 것은 기후변화, 핵개발, 전염병의 확산 같은 것들이다. 진보 없는 자유주의라고 할 수 있는 이 자유주의는 공포에 기초한 자유주의라고 부를 수 있겠다. 무엇보다도 지금 시점에서 필요한 것은 자유민주주의의 가치를 지지하는 이들이 다시 한 번 자유주의적 국제주의를 고민하고 확신을 버리지 않는 것이다. 다시 한 번 힘을 내자면서 아이켄베리 교수는 특강을 끝맺었다.

생각을 하게 만든 강연이었다. 아이켄베리 교수의 주장에 대한 반론은 얼마든지 가능할 것이다. 필자 역시 그의 말에 완전히 동의하는 것은 아니다. 어떻게 보면 포퓰리즘의 형태를 띠고 있는 아래로부터 올라오고 있는 직접 민주주의에 대한 요구는 자유민주주의 실패를 증명하는 투명한 사례이자 동시에 그것을 교정할 수 있는 에너지이기도 하다. 그러나 아이켄베리 교수가 주문하는 ‘포스트-신자유주의’적인 자유주의의 혁신은 반대 입장을 가진 이들도 새겨들을 만한 메시지를 던져준다. 어쨌든 전후 자유주의는 위기에 봉착했고 그 국제주의적 성격은 약화되고 있다. 글로벌한 문제들이 속속 발생하고 있는 이 시점에 벌어지고 있는 국제주의의 퇴조는 분명 문제적인 것이다. 어떤 입장을 가지고 있든 이대로 있으면 안 된다는 아이켄베리 교수의 호소는 흘려 들을 수 없는 진정성을 담고 있었다.

이택광 - 1968년 출생. 부산대 영문학과를 졸업하고 영국 워릭대와 셰필드대에서 각각 철학과 문화이론으로 석사와 박사학위를 받았다. 현재 경희대 영미문화전공 교수로 재직하면서 대중문화 비평가로 활동한다. 주요 관심영역은 현대철학과 정신분석이론이다. 지은 책으로 <박근혜는 무엇의 이름인가> <이것이 문화비평이다> <한국 문화의 음란한 판타지> 등이 있다.

201702호 (2017.01.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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