히스토리

Home>월간중앙>히스토리

[손관승의 파.스.텔. 인생 (10)] 피렌체에서 인생 르네상스 찾는 김형률 교수 

피에졸라 언덕에서 다빈치를 그리다 

손관승 세한대학교 교수, 언론중재위원
“피렌체가 르네상스를 꽃피운 것은 지식정보망을 지배했기 때문… 이 시대의 핵심 능력은 연결망과 지식정보 큐레이팅 능력”

온라인 개방형 교육운동인 ‘무크’를 국내에 최초로 소개한 혁신가인 김형률 숙명여대 역사문화학과 교수가 안식년을 맞아 이탈리아 피렌체로 떠났다. 그가 굳이 르네상스를 꽃피운 피렌체를 찾은 이유는 무엇일까? 그는 어떤 생각을 다지고 있을까? 10년 앞을 고민하는 그의 ‘빈티지’를 들어보았다.


▎14년 만에 안식년을 맞은 김형률 교수는 공부가방 하나 달랑 들고 피렌체로 날아갔다. 두오모가 내려다보이는 미켈란젤로 언덕에 오른 김 교수.
‘피렌체’라는 이름을 듣고도 가슴이 뛰지 않는다면 그는 이미 늙은 자이다. 아무리 나이가 젊다고 해도 그렇다. 거장 부르넬레스키가 설계한 두오모는 ‘토스카나의 모든 시민을 덮어씌울 만한 크기’라고 훗날 알베르티가 자랑스레 말했듯, 이 도시는 마치 모든 것을 품을 것 같은 자태다. 영화 <열정과 냉정 사이>에서 이 도시를 기적 같은 사랑이 다시 찾아오는 곳으로 설정한 것도 이와 무관치 않으리라. 단순히 예술의 르네상스가 아니라 나의 르네상스도 이 도시에서 함께 찾고 싶은 거다.

원래 르네상스(Renaissance)라는 단어는 종교적 용어였다. 14세기 <노트르담의 기적>이라는 책에서 처음 사용됐을 때는 ‘생명을 잃었던 사람이 새로 태어난다’는 의미로, ‘재생(再生)’으로 번역됐다. 신의 피조물이라는 중세적 사고방식에서 벗어난 자아의 발견, 새로운 시대가 열리는 걸 의미했다. 이탈리아 피렌체를 중심으로 화려하게 꽃피웠던 인문정신과 예술정신처럼 인생의 기백과 영혼을 되찾는 시기, 그 기운을 바탕으로 인생의 나머지 오르막 구간을 힘차게 전진해야 할 때가 바로 지금 이 시기다.


▎르네상스를 꽃피운 피렌체에서의 나날을 김 교수는 “밀도가 진하다”고 표현했다. 피렌체 전경.
르네상스가 꽃피운 피렌체 시내가 내려다보이는 피에졸레(Fiesole) 언덕에서 다가올 10년을 준비하는 사람이 있다. 지난해 11월 공부가방 하나만 들고 온 숙명여대 역사문화학과 김형률 교수는 피렌체에서의 느낌을 이렇게 말했다.

“공기의 밀도, 삶의 밀도, 모든 게 여기서는 아주 진하네요. 문명이라는 관점에서 이 언덕에서 내려다보면 이탈리아는 정말 터를 잘 잡았다는 생각입니다. 토스카나 지방은 알프스 산맥에서 약 300㎞ 떨어졌지만, 그 지리적 영향을 마지막으로 받는 곳이다 보니 구릉이 많습니다. 땅도 비옥하고요. 덕분에 포도와 올리브 과수원도 많고요. 햇볕을 많이 받아서인지 맛있는 와인이 풍성하고 값도 싸서 하루에 한 병씩 마십니다.”

김 교수는 몇 번이고 ‘밀도(密度)’라는 단어를 반복했다. 서울에 비해 투명한 피렌체의 대기를 말하는 것이겠으나, 본질적 연구와 사색에 집중할 수 있는 여건으로 들렸다. 피렌체에서 남쪽 시에나까지 80㎞가 저 유명한 ‘키안티 와인’을 재배하는 포도원이 가득한 ‘키안티 가도(Strada di Chianti)’다. 와인을 좋아하는 사람이라면 절대 놓칠 수 없는 길이다. 구릉의 모퉁이마다 놓인 작은 마을에는 맛있는 로컬 음식과 와인을 즐기고 주변의 문화재도 탐방하도록 휴양용 주택으로 개조한 농가들이 많이 눈에 띈다. 바로 그곳에 그가 있다.

유럽 지식인들이 선호하는 여름 휴양 방식이다. 반드시 무엇을 한다기보다 뜨거운 태양과 자연의 바람에 몸을 맡기고 지친 영혼을 쉬면서 책을 읽고 사색하다 지루할 때쯤 자전거를 타거나 걸어서 근처 소도시의 박물관 투어에 나선다. 쉬어야 새로운 아이디어가 태어날 수 있으니 그것이 진정한 안식년 정신이리라. 대학교수들의 안식년 장소는 보통 자녀교육 때문에 영어권을 택하는 경우가 많은데, 그는 왜 다른 곳을 제쳐두고 피렌체를 택했을까?

문명과 예술이 잘 익은 피렌체에 머물다


▎김 교수는 온라인 개방형 교육운동인 ‘무크(MOOC, Massive Open Online Course)’를 최초로 국내에 소개한 혁신가다. 미국문화원에서 MOOC 강연을 하는 김 교수.
“저는 서양사를 공부하잖아요? 여기 피에졸레 언덕은 최고의 장소입니다. 이 계절에는 하늘이 맑았다 구름 꼈다 하루 종일 변화가 심한데, 사람에게 자극을 주면서 동시에 낯설게 느껴지지도 않아요. 아주 편안하게 느껴져요. 제대로 온 듯해요. 메디치 가문을 비롯해 부르넬레스키·미켈란젤로·다빈치·라파엘로·단테…. 너무도 많은 사람이 이곳에서 활동했고, 그들이 남긴 동상과 그림도 주변에 널려 있으니 공부하기에 자연스런 장소입니다. 게다가 조용하거든요. 연구에 몸을 던져야죠.”

그가 말하는 피에졸레는 역사적으로 두 가지 큰 의미가 있는 곳이다. 첫째, 이곳 구릉지대에는 야생화가 많이 핀다. 이들 야생화는 염색의 원료가 되어 피렌체라는 도시의 주력산업이자 효자산업이었던 옷감과 피혁제품의 염색기술 기반이 되었다. 무심히 보이는 이들 꽃이 피렌체 르네상스의 맹아를 탄생시켰다. 둘째는 바로 이곳에서 레오나르도 다빈치가 날아다니는 새들의 비행을 관찰했다. 비록 양력의 원리를 이용한 인간의 비행은 400년 뒤인 19세기 후반에야 실현되지만, 날고 싶다는 인류의 오랜 염원이 과학이라는 방법으로 실험된 곳이 바로 이곳이다. 로마의 공항 이름에 그의 이름이 붙은 까닭이기도 하다. 토스카나 지방이 으레 그렇듯 피에졸레 역시 구릉과 풍부한 태양으로 유명하다. 포도와 올리브가 익듯 문명과 예술이 잘 익은 곳이다.

김 교수가 방문교수로 적을 둔 EUI는 한국에서는 낯선 이름이다. 어떤 대학인가?

“EUI는 유럽대학연구소(European University Institute)라는 이름 그대로 1970년 유럽연합에서 세운 대학입니다. 학부과정은 없고 4년제 박사과정만 있습니다. 법학·경제·역사·정치 등 4개 분야에 150명씩 600명의 박사과정 학생을 두고 있지요. 교수진은 200~300명, 스태프까지 합쳐 900명 정도가 연구활동을 지원합니다. 교수진은 유럽 각국과 미국에서 파견됐는데, 하나같이 실력 있는 분들입니다. 유럽 연구에 가장 권위 있는 중심이고, 사실상 유럽연합의 싱크탱크 같은 곳이라고 생각하면 됩니다.”

이런 배경 때문인지 EUI는 흡사 유럽연합을 축소해 놓은 분위기라고 한다.

김 교수는 독일 마르부르크 대학에서 학사와 석사, 오스트리아 빈 대학에서 박사를 취득한 명실공히 유럽 전문가다. 이곳에서 연구하려면 대학 내부 인사의 추천이 있지 않으면 불가능한데, 그가 이사장으로 있는 ‘아시아 인스티튜트’에 EUI 총장이 방문한 것을 계기로 인연이 맺어졌다. 이곳에서 그는 무슨 연구를 할까?

“우선 두 가지를 하려고 합니다. 이곳에도 ‘무크(MOOC, Massive Open Online Course)’가 있습니다. 대학수업뿐 아니라 온라인으로도 지적 교류와 학문 교류가 활발하게 이뤄지는데, 여기서 한국어로 된 유럽연합 무크를 만들어보고자 하는 게 첫째입니다. 둘째는 난민문제인데, 제가 속한 곳이 EUI 중에서도 ‘로버트슈만연구소’라는 곳입니다. 로버트 슈만은 유럽연합이라는 아이디어를 창시한 프랑스 외무 장관입니다. 유럽 난민 프로젝트의 중심 역할을 하는데, 유럽에서는 난민이 꼭 난민문제가 아니고 궁극적으로 맨파워, 즉 인적자원으로 이어집니다. 독일을 비롯한 서유럽 국가들은 인구가 줄어들어 노동력 확보가 국가적으로 매우 중요한 문제가 되었습니다. 역시 인구부족에 시달리는 한국에서 다문화가족이 늘고, 통일 이후 상황도 고려해 장차 어떤 시사점을 얻을 수 있는지 비교연구해보려 합니다.”

명문고의 유일한 예비고사 탈락자


▎김 교수가 피렌체에 머무르는 동안 적을 둔 유럽대학연구소(EUI) 캠퍼스.
김형률 교수는 2002년 1년을 미국 하버드 대학 유럽학연구센터에서 보낸 이후 14년 만에 안식년을 갖는 셈이다. 보통 7년마다 안식년을 갖는 대학교수들의 관습을 감안하면 이례적이다. 그동안 인터넷에 푹 빠져 새로운 혁신을 탄생시키느라 바빴던 탓이다. 인터넷의 혁명적 기능을 교육과 연결해 집중 연구했다. 그 결과 온라인 개방형 교육운동인 무크를 국내에 최초로 소개한 혁신가다.

“무크는 교육혁명이라 불립니다. 미국에서는 하버드·스탠퍼드·컬럼비아 등 엘리트 대학들이 적극적으로 강의와 플랫폼 개발에 참여하고 있어요. 누구나, 세계 어디서나 양질의 강의를 수용할 수 있다는 것은 교육 패러다임에 혁신적 변화를 가져다 줄 수 있습니다. 물론 미국에서도 초기에는 대학들이 소극적이거나 불편한 기색을 내비쳤지만 지금은 자신들의 명성을 인터넷상에서도 선점할 수 있다는 점에서 적극적으로 변했습니다. 한국의 대학들은 두 가지 면에서 아직 소극적입니다. 첫째는 세계적 대학들의 강의 수준과 비교되는 게 부담스럽고, 둘째는 영어라는 언어적 장벽입니다. 그렇지만 한국형 무크도 이제는 나름 선전하는 단계로 올라섰습니다.”

김 교수는 대학사회에서도 매우 특이한 존재다. 인터넷을 매개로 한 교육평등운동에 적극적이다. 숙명여대에서는 ‘디지털휴마니티즈센터’ 소장도 겸임한다. 인문주의가 빛을 발하는 곳에 있는 그에게 디지털 휴마니티즈의 의미를 물었다.

“디지털 휴마니티즈의 핵심은 연결성입니다. 영어로는 connectivity라는 것인데, 인터넷을 통해 어디서나 누구와도 연결해 지식을 보급한다는 뜻입니다. 그 ‘연결’이라는 개념이 인터넷 기술 발전으로 이어져 현재는 콘텐트가 무척 다양해졌습니다. 지식정보 생산에 관해 크게 두 가지가 중요합니다. 공동으로 지식을 생산해 관련 분야에 종사하는 사람들이 집단지성으로 일한다는 것을 지적할 수 있고, 누구와도 연결될 수 있다는 점을 둘째로 중요한 점으로 말하고 싶습니다. 이제는 통계도 머리 아픈 숫자가 아니라 빅데이터를 활용해 인포그래픽으로 설명하기 때문에 다양한 지식을 이해하는 데 훨씬 효과적이고 친절합니다. 지식정보 큐레이팅 능력도 그렇고요. 미국에서는 프린스턴 대학에 처음으로 디지털 휴마니티즈라는 새로운 학문이 생겼는데, 몇 년 지나지 않아 우리에게도 변화가 올 겁니다.”

교육에 대한 남다른 혁신적 시도는 매우 특이한 그의 과거 이력과도 관련이 있다. 그는 고등학교 입시의 마지막 세대이자 예비고사 세대로 명문 중앙고 출신이다. 그런데 그는 동급생 가운데 유일한 예비고사 탈락자였다. 지금은 가장 혁신적 학자로 주목받는 그가 예비고사 탈락이라는 사실은 의외다. 학교라는 교육체제에 회의를 갖고 학교 가는 날보다 가지 않은 날이 더 많았던 탓이다. 그가 알고 싶었던 것과 학교에서 배우는 것의 괴리가 너무 컸던 탓이다. 그런 그의 마음을 ‘문제아’라 생각하지 않고 다독거리고 헤아려준 사람이 고등학교 3학년 담임이었던 고 정남수 선생님, 그리고 반장이었던 이인용 삼성전자 커뮤니케이션담당 사장이다. 그들 덕분에 결국 동급생들과 함께 간신히 졸업장을 받을 수 있었다.

전공이 의심스러운 다양한 사고


▎김 교수는 국내에서 이만열 교수와 함께 ‘아시아 인스티튜트’를 이끌고 있다. 교보문고에서 이만열 교수와 한때를 보내는 김 교수.
인도인들에게 ‘구루’란 ‘무지를 몰아내고 빛을 주는 이’라는 뜻이다. 인도인들이 정신적으로나 육체적으로 괴로워할 때 각자의 독특한 수행법으로 치유에 이르는 길을 안내하기 때문이다. 인도 사람들은 어릴 적부터 저마다의 구루를 찾아 가르침을 받는데, 그는 이미 고등학교 때 진정한 구루를 만난 것이다. 그때부터 그의 교육관과 주관은 분명했다. 그는 궁극적으로 ‘디지털 리터러시(Literacy)’를 주장한다. 리터러시란 문자를 읽고 쓸 줄 아는 능력을 가리키는데, 그렇다면 디지털 리터러시란 무엇인가?

“디지털 리터러시란 디지털 테크놀로지와 다양한 정보를 이용해 효과적이면서도 비판적으로 정보를 탐색, 평가, 공유, 창조하는 능력을 말합니다. 그것을 제일 잘 구현하는 것이 구글인데, 인터넷상에서 신경망처럼 모두 연결돼 있습니다. ID 하나만 있으면 문서·채팅·화상통화는 물론 유튜브 녹화도 자동으로 되죠. 동시에 많은 사람이 문서 하나를 수정하는 것도 가능합니다. 무크를 위한다면 우리가 필요한 도구들이 모두 무료로 제공됩니다. 이런 능력을 통칭하여 디지털 리터러시라 합니다.”

그는 대학에서 강의할 때도 해외의 유명한 무크 강의뿐 아니라 페이스북이나 구글을 활용해 과제물도 내주고 참여시키고 평가도 한다. 철저히 디지털 리터러시 능력을 배양시킨다. 많은 교육자가 자녀교육에서는 자신의 교육철학과 이율 배반적인 모습을 보이곤 하는데, 그는 초지일관이다. 큰아들은 그처럼 고등학교 1학년을 중퇴하고 인도로 갔다가 그곳에서 몇 년 고생한 뒤 스스로 캐나다의 명문 UBC 대학에 재학 중이다. 작은 아들은 서울의 괜찮은 대학에 입학했으나 적성에 맞지 않는다고 하자 과감히 자퇴시키고 유럽으로 데려왔다. 자기주도형 학습을 주장하고 스스로 실천하는 교육자다.

그의 활동이 국제적으로 알려진 것은 ‘이만열’이라는 한국이름으로 활동하는 미국인 이매뉴얼 패스트라이치(Emanuel Pastreich) 교수와 함께 ‘아시아 인스티튜트’를 이끌면서부터다. 이만열 교수는 예일 대학과 도쿄 대학 대학원을 거쳐 하버드 대학에서 박사학위를 받은 엘리트 중의 엘리트다. 게다가 미국인이면서 일본어·중국어에 한국어까지 동북아시아 3개국 언어에 통달했다.

“서구에서 아시아를 연구하기 시작한 것이 16세기 네덜란드, 그 이후 프랑스를 거쳐 영국, 미국의 순인데, 한·중·일 3개 국어에 통달한 아시아 연구자는 이만열 교수가 처음일 겁니다. 한국에는 보배 같은 존재죠. 한국의 전통사회에서 지식인의 참여, 특히 연암 박지원과 정약용에 대해서도 연구를 많이 했더군요. 페이스북을 통해 알게 된 지 5년 정도 됐는데, 그분을 보면 서구 지식사회의 표본 같습니다. 지식인이 사회에 어떤 역할을 해야 하는지 스스로 계속 수련해나가는 모습이죠. 함께 아시아 인스티튜트를 이끌면서 정말 많이 느낍니다. 서울에 외국인 학자·전문가·외교관들이 많이 와있는데, 허브 역할로서 우리 연구소가 자리 잡는 데 이만열 교수라는 존재는 너무나 비중이 큽니다. 지식이나 인품 등 모든 면에서 그렇죠.”

김 교수와 대화하다 보면 그의 전공이 무엇인지 잠시 혼란스러워진다. 그는 일찍부터 자신의 전공인 역사학의 범위를 뛰어넘어 테크놀로지와 인간의 사고, 디지털과 인간의 행동 등에 관심을 갖고 적극적으로 사고하고 연구했다. 요즘 ‘융합’이라는 말이 자주 사용되는데, 그야말로 융합적 인간임에 틀림없다. 한편으로는 하이데거나 노엄촘스키 같은 철학자처럼 느껴진다.

결국 화두는 연결망, Connectivity, 그리고 지식정보 큐레이팅 능력이다. 이 시대의 핵심 능력이기도 하다. 온라인과 오프라인의 연결인 O2O, 차량에 인터넷을 활용한 부가서비스 등 영역을 가리지 않고 연결망이 중요한 시대다. 스티브 잡스가 스탠퍼드 대학 졸업식에서 그토록 강조한 ‘점과 점을 연결하는(Connecting the dots)’ 능력이다. 실리콘밸리의 하이테크 산업뿐 아니라 이제는 사회 전 분야로 확산되고 있다.

“피렌체의 힘은 연결망과 개방에서 나온 것”


▎피렌체 북동쪽 교외 피에졸레 언덕에 자리 잡은 프란체스코 성당에서 한가로운 한때를 보내는 김 교수.
“저는 피렌체가 르네상스를 꽃피운 것은 지식정보망을 지배했기 때문이라고 봅니다. 피렌체는 그리스와 로마 문명의 고전을 모두 수집하고 무역과 외교에서도 가장 선구적 모델이었습니다. 메디치 가문은 당시 지식정보망을 쥐었던 파워 집단이었지요. 르네상스가 연결망의 힘에서 시작되었다는 것은 이 시대에 의미하는 바가 큽니다. 같은 반도국가인 이곳에서 한국 지식사회의 미래를 고민해보는 점이죠.”

그의 말처럼 1453년 콘스탄티노플이 투르크 군단에 함락된 뒤 그곳에서 활동하던 학자와 문화인들을 가장 앞장서서 받아들이고 소화한 곳이 바로 피렌체공화국이었다. 덕분에 그리스의 고전들이 이곳에서 번역되고 인문주의가 만개하기에 이르렀다. 연결망과 개방의 힘, 진짜 실력을 겨루는 곳이다. <나의 친구 마키아벨리>에서 시오노 나나미는 피렌체의 힘을 이렇게 말했다.

“그곳에서는 끊임없이 욕을 얻어먹는다. 욕은 공부에 자극이 되며, 결과적으로 더 큰 명성으로 이어진다.”

동료와 라이벌이라는 존재의 중요성이다. 김형률 교수는 자신의 전공인 역사 공부가 나이 들수록 더욱 흥미롭지만 혼자 하기에는 벅차다고 말했다. 다행히 이곳에서는 함께 연구할 수 있으니 좋다고 말한다. 2000년 새로운 밀레니엄을 맞으면서 미국의 <뉴욕타임스>는 지난 1000년의 최대 발명품으로 ‘나의 발견’을 꼽았다. 그 발견이 이뤄진 것이 이곳 피렌체였으며, 그 시작은 미술과 건축이었다. 중요한 것은 시점이었고, 시각의 주체성이었다. 나의 눈으로 어떻게 보느냐에 따라 세상은 달라 보인다는 것, 그것이 곧 근대적 자아의 탄생이었다. 이곳에 열광하는 진짜 이유다.

르네상스의 위대한 창조자들은 나의 눈으로 세상을 보았으며 나만의 색채가 있었다. 그렇듯 오늘날 인생의 르네상스를 꿈꾸는 세대는 나만의 방식으로 살며 고유한 색채가 있다. 본격적으로 자아를 탐구하고 세상을 발견하기를 원한다. 2017년 환갑을 맞는 그에게 환갑의 소회, 그리고 ‘나’라는 자아에 대한 느낌을 물었다.

“여태까지 살아온 게 나 혼자만의 힘으로 살아온 것 같지 않다는 생각이 듭니다. 여러 사람이 도와주고 작용해서 온 것이죠. 내 생애를 사는 것 같지만 내가 산 것 같지 않고 우주의 어떤 조화에 나도 참여했을 뿐이라는 느낌, 뭐 그런 겁니다. 어떤 흐름이 있는데, 그것이 다 연결돼 있다는 생각이죠.”

다시 ‘연결’이라는 단어가 툭 튀어나온다. 그가 그토록 좋아하는 커피를 마시며 이탈리아 말을 배우는 재미는 어떤지 물었다.

“10년 단위로 사고의 틀을 바꾼다”


▎피렌체에서 남쪽 시에나까지 80㎞는 유명한 ‘키안티 와인’을 재배하는 포도원이 가득한 ‘키안티 가도(Strada di Chianti)’다. 와인을 좋아하는 사람이라면 절대 놓칠 수 없는 길이다. 시에나 전경.
“독일 출신의 노벨문학상 수상 작가인 토마스 만이 말했던가요? 이탈리아어는 천사의 언어라고. 리드미컬하고 문법도 재밌어요. 언어마다 문법에 그 민족의 생각하는 사고가 들어있다고 하는데, 언어를 통해 이탈리아 사람들의 생각을 들여다보는데, 멋져요. 제가 좋아하는 이탈리아 커피를 실컷 마실 수 있어 더 좋고요. 서서 마시면 보통 1유로50센트(약 2000원), 앉아서 마시면 3유로로 2배가 되는데, 서울보다 훨씬 싸죠. 제가 머무르는 EUI는 훨씬 더 싸서 60센트입니다. 구내식당에서는 식사도 아주 싸고 맛있습니다. 여기 오기를 잘했어요. 하하!”

현대인들은 미켈란젤로의 나체상 조각처럼 야성적이면서도 어딘가 불안한 영혼을 감추지 못한다. 열정이라는 이름의 심장과, 야성이라는 이름의 허리에 어느덧 기름기가 끼어가고 있다. 열정이 식어간다는 말은 곧 늙어간다는 말과 동의어이고, 기름기가 끼어간다는 것은 건강에 적신호다. 지난 시절보다 중요한 것은 미래다. 특히 이 질문에 달렸다. 앞으로 어떻게 살 것인가? 그의 목소리는 흥분에 떨렸다.

“저는 10년 단위로 사고의 틀이 바뀌었던 듯싶습니다. 유학생활 기간에는 핵문제, 그리고 1990년대 귀국했을 때는 ‘경쟁’과 ‘돈’, 그리고 그 이후에는 ‘인터넷’만 생각했습니다. 이제 10년의 화두를 또 얻어 가야지요.”

나이는 자본인가, 혹은 부채(負債)인가? 잉여인간처럼 살아야 하나? 새해가 되면 한 번쯤 그런 고민과 자문을 한다. 아쉽게도 주변에서 목격하는 풍경은 여전히 암울하다. 한 살 더 나이를 먹는다고 해서 현명해지기는커녕 아집만 강해지고 목소리만 커지는 사람들이 더 많다. 경청은 사라지고 주장만 지배하는 세상이다. 심지어 스스로 지식인이라고 주장하는 사람들조차 듣고 싶고, 보고 싶고, 믿고 싶어하는 것만 받아들이려 한다. 학술적으로 ‘선택적 지각오류(selective perception)’라고 표현하는 현상이다. 토론이 아니라 응원가이며, 과학이 아니라 미신이 판친다. 올해 대선을 앞두고 더욱 심하다. 자신은 로망이라 주장하지만 노망(老妄)에 가까운 행위도 심심치 않게 목격한다. 이쯤 되면 나이는 힘 있는 자본이 아니라 부채에 가깝다. 나이 먹기 싫은 이유다.

반면 나이 들어서도 기억과 집중력이 청년 못지않은 ‘슈퍼에이저(Superager)’들은 뭐가 다를까? 뇌 기능중추인 변연계가 발달해 있는데, 그 비결은 육체적이든 정신적이든 힘든 일을 열심히 하는 데 있다고 한다 ‘파스텔 인생’이란 눈앞의 이익에 급급한 사람이 아니라 최소한 10년의 호흡으로 준비하는 사람일 테니까. 내 인생의 진정한 르네상스를 원한다면 조금 긴 눈으로 세상을 내다보아야 한다. 좋은 와인과 좋은 사람은 성숙할수록 좋은 향기가 난다. 토스카나 지방의 풍요로운 태양과 부드러운 바람의 축복을 받고 태어난 부르넬로 디 몬탈치노 와인처럼 그가 한 병의 고귀한 빈티지 와인이 되어 향기를 품고 나타날 시간을 기다린다.

손관승 - 세한대 교수로 의사소통 능력과 스토리텔링, 리더십 등을 가르치고 있다. MBC 기자로 베를린 특파원, 국제부장, 100분 토론 부장 등을 거쳐 방송 콘텐트 플랫폼 기업인 iMBC 대표이사를 역임했다. 제2의 인생을 찾는 과정을 그린 <괴테와 함께한 이탈리아 여행> <그림형제의 길> <디지털 시대의 엘리트 노마드> 등 여러 권의 책을 썼다. 언론중재위원으로도 재직 중이다.

201702호 (2017.01.17)
목차보기
  • 금주의 베스트 기사
이전 1 / 2 다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