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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의 섬 문명사(2)] 전설처럼 떠 있는 태평양 해양거석문화의 절정 난마돌(Nanmadol) 

산호초 위 93개의 인공섬에 건설한 ‘태평양의 베니스’… 어떻게 대항해를 하고 바다를 장악했는지 기록 남아있지 않아 

주강현 제주대 석좌교수, 아시아퍼시픽 해양문화연구원장 asiabada@daum.net
남태평양 혹은 미크로네시아 하면 끝없는 대양에 점점이 박힌 작은 섬들을 떠올리기 마련이다. 이런 작은 섬에 거석문화의 흔적은 없으리라는 게 일반의 선입견이다. 그러나 남태평양 이스터섬의 모아이 석상은 그 선입견을 여지없이 무너뜨린다. 여기 모아이 석상보다 더욱 거대한 남태평양 거석문명, ‘난마돌 유적’을 소개한다.

▎다양한 형태의 돌기둥이 차곡차곡 지그재그로 쌓아 올린 난마돌 유적 위를 푸른 이끼가 융단처럼 뒤덮었다.
남태평양 이스터섬의 모아이 석상은 태평양 거석문명의 대표 격으로 인구에 회자한다. 그런데 정작 그 규모나 내용에서 압도적 위치를 점하는 폰페이(Pohnpei) 거석문명은 우리에게 거의 알려지지 않았다. 한국인의 문화적 쏠림이 그 이유 중 하나다. 괌처럼 우리에게 익숙한 섬에도 돌기둥으로 이루어진 거석문명이 존재하고, 한국인이 자주 가는 필리핀 팔라우 섬에도 거석문명이 분포한다. 폰페이는 태평양 ‘해양 거석문명의 꽃’이라고 부를 만하다. 세계의 오지를 찾는 여행자들은 오로지 지도 한 장을 들고 폰페이 유적으로 찾아든다. 한국인들도 심심찮게 찾아드는데, 이들은 대체로 스킨스쿠버들이다. 제2차 세계대전의 흔적이 바다에 잠겨 있을뿐더러 산호의 바다이기 때문이다.


현존하는 태평양 최고의 해양문명 유적인 난마돌은 전설처럼 태평양 한복판 폰페이섬 남동부에 자리 잡고 있다. 사람들은 폰페이를 이탈리아의 폼페이와 혼돈하곤 한다. 폰페이는 미크로네시아의 대표적인 화산섬으로, 높은 격조의 풍경과 화려한 적도의 꽃, 누구나 한 번쯤은 꼭 방문하고 싶어 하는 해양문명의 숨겨진 비경으로 알려진 섬. 폰페이는 추크·코스라에 등과 함께 미크로네시아연방공화국을 형성한다. 연방정부는 폰페이의 팔라키르(Palikir)에 있다. 폰페이의 수도는 콜로니아(kolonia)다.폰페이 총인구는 3만3000여 명. 90%가 원주민이며, 나머지는 미크로네시아연방이나 마셜군도·미국·오스트레일리아·일본 등에서 왔다.


▎수도인 콜로니아 중심가의 스페인 성벽. 스페인인들이 쌓은 성에 독일인들이 이어 쌓은 것이다. 그럼에도 사람들은 지금도 여전히 스페인성이라고 부른다.
수도인 콜로니아 중심가에는 스페인벽이라고 부르는 장벽과 문이 남아 있다. 이 성은 원래 스페인인들이 쌓았던 것인데, 1887년 독일 점령 당시 폰페이인들이 일으킨 ‘소커(Sohker)의 난’ 직후 독일인들이 이어 쌓은 것이다. 그럼에도 사람들은 지금도 여전히 스페인성이라고 부른다. 하기는 이곳의 모든 건물은 스페인 사람들이 지은 것이다. 벽은 2개의 볼록집을 둘러쌌으며, 바다로부터 오는 적을 방어했다. 총독의 집과 주거지, 병원, 정부기관 등이 들어서 있다. 그 자체로 스페인 건축 전시장이었다.

스페인이 최초로 점령했지만 직접 통치하기보다 느슨한 방식의 지배를 했다. 필리핀 식민경영에 몰두해 있던 스페인에 미크로네시아 등에 흩어진 여러 식민 섬을 체계 있게 경영하기란 벅찬 일이었고, 수익이 나는 일도 아니었다. 그 틈새를 비집고 후발 해양제국 독일이 들어왔다. 1885년까지 캐롤라인제도 무역의 80%는 독일의 수중에 있었고, 독일정부의 지원을 받는 회사가 야프·코스라에·폰페이에 있었다. 1885년 10월 13일 전함 알바트로스가 독일 국기를 섬에 꽂는다. 폰페이 다섯 왕국과 독일 사이의 협정에서 폰페이 왕들은 카이제르 황제에게 주권을 넘겨주는 것으로 결론을 맺는다. 무너진 독일 성당 건축물은 비스마르크 시대에 태평양에 눈독들이던 독일의 야망을 잘 압축해 보여준다. 독일에 저항하던 원주민 레지스탕스의 무덤도 존재한다. 그 곁에는 독일 식민당국자의 무덤이 위치한다. 교회 뒤의 잘 다듬어진 잔디밭에는 돌로 빚은 비각과 호사스런 문장이 눈길을 끈다.

폰페이에서는 일본도 논외로 할 수 없다. 1914년 10월 7일, 일본 군함 4척이 콜로니아에 입성해 일장기를 올렸다. 일본은 독일 지배의 미크로네시아에 대하여 1920년 국제연맹의 이름으로 합법적 통치를 시작한다. 국제연맹의 결의에 의한 제1차 세계대전의 전리품이었다. 그리하여 콜로니아는 1930년대 중반 1000여 명에 달하는 일본인의 행정·문화·상업 센터가 되며 황금시대를 구가한다. 상수도·전화·전기도 가설된다. 아이스케이크를 파는 가게 7곳, 빵집 7곳, 어탕과 쌀밥을 파는 20곳이 넘는 레스토랑, 그리고 도살장·푸줏간·약방·세탁소·선물가게·도매상, 허가받은 주점 등이 있었다. 모든 시설은 일본인 전용으로, 원주민은 그곳에 살지 못했다.

식탁에서 참치를 통해 마주하는 나라


▎무너진 독일 성당 건축물은 비스마르크시대에 태평양에 눈독들이던 독일의 야망을 잘 압축해 보여준다. 원주민 레지스탕스의 무덤과 독일 식민당국자의 무덤이 한자리에 모여 있다.
오늘날에도 제2차 세계대전 당시의 탱크나 대포가 곳곳에 즐비하다. 탱크는 예전에 일본군 사령부가 있던 ACE상업센터 건너편의 메인로드에도 현존한다. 전쟁은 끝났지만 역사전쟁은 끝나지 않았다. 지금도 관광객은 일본인 중심이며, 중국인도 서서히 진출하는 중이다. 독일·미국·일본·중국 대사관 등이 길목에 자리 잡아 태평양의 패권을 누리는데, 한국은 간혹 들르는 원양어선이 고작이다. 폰페이는 머나먼 나라 같지만, 우리의 식탁에서 일상적으로 참치를 통해 마주한다.

제대로 된 간판조차 없다. 대부분의 역사와 규모를 자랑하는 세계적 문화유산이라면 호화스러운 입간판과 안내소 정도는 있을 법한데, 입구조차 찾기 어려울 정도다. 젖가슴을 절반쯤 드러낸 노파가 ‘Nanmadol trail center’라는 입간판이 서있는 허름한 집 앞에 앉아 있다. 영문 간판 아래 ‘난마돌 가는 길’이라고 일본어로 쓰여 있어 일본이 폰페이와 연관돼 있음을 알려준다.

난마돌은 폰페이 원주민의 입을 통해 성지(聖地)로 이어져오다 뒤늦게 주목받았다. 유적 보호라고 할 것도 없이 그저 방치돼왔다.1896년 크리스티안이라는 미국인이 쓴 ‘우리가 이 유적을 탐사하는 허가를 득하였다’는 기록이 있기는 하나, 실제로는 방치 상태였다. 독일·미국에 의한 고고학적 발굴과 조사가 이루어졌을 뿐이다. 그러다 1985년, 미크로네시아연방 내에서 유일하게 미국 자연역사상징물(Natural Historical Landmark)로 ‘미국역사유적’에 등록되면서 수많은 보호장치가 마련됐다. 자금도 지원된다. ‘미국역사’라니? 신탁통치 시절 미국이 ‘자국’의 상징물로 결정했기 때문이다. 지금도 폰페이에 관한 한 미국 고고학자의 연구가 주를 이룰 정도로 미국의 관심이 드높다. 1985년에는 미크로네시아의 폰페이 기념우표가 발행되고, 1992년에는 유적 보호 프로젝트를 지원하기 위해 폰페이언이 과거를 이해하도록 난마돌재단이 만들어진다.


▎난마돌 가는 길에는 제대로 된 간판조차 없다. 영문 입간판 아래 ‘난마돌 가는 길’이라고 일본어로 쓰여 있어 일본이 폰페이와 연관돼 있음을 알려준다.
난마돌 유적지는 지난 2세기 동안 세계의 어떤 유적지보다 무관심과 방치의 대상이었다. 관광객이 쉽게 접근할 수 없는 섬이어서 자연 그대로 버려둔 상태였다. 어쩌면 그러한 방치가 그나마 난마돌의 역사성을 훼손하지 않고 이른바 개발의 발톱에서 구해주었는지도 모른다. 언제나 밀어닥치는 태풍은 역사의 무게를 바다로 휩쓸어 넣었으며, 끊임없이 자라는 뿌리들이 벽을 허물었다.

난마돌은 본디 ‘Nan Matal’ ‘City of Matalanim’ ‘Nammatoru To’ 등으로도 불린다. 폰페이 동쪽 마도레니브(Madolenihmw)만 입구의 템원(Temwen)섬 산호초가에 자리 잡은 난마돌은 비밀을 간직한 고고학의 명소다. 사람 손으로 빚은 93개의 크고 작은 섬은 대부분 사각형이다. 작은 것은 350㎡에서 큰 것은 8400㎡에 이른다. 전체 면적은 60만7000㎡에 달하며, 대체로 무릎이 잠길 정도의 얕은 조간대를 점령하고 있다.

난마돌 가는 길은 느낌부터 고졸하다. 숲이 깊다. 초입에 들어서니 온난다습 정도가 아니라 지구상에서 가장 많은 비가 오는 폰페이의 숲답다. 폰페이의 강우량은 세계적이라 ‘비의 섬’으로 알려졌다. 오죽하면 신문 제호조차 다. 태평양의 뜨거운 바다가 만들어낸 거대한 구름이 비를 선사해, 작은 섬이지만 숲이 뛰어나고 계곡에는 폭포도 사시사철 쏟아진다.

길가의 고색창연한 돌마다 이끼가 무성하고 도저히 이름을 알 수 없는 적도의 풀이 자란다. 그렇게 난마돌 유적은 숲과 더불어 시작된다. 돌들은 펼쳐진 돌밭으로 남아 있기도 하고, 때로는 얕은 성벽을 이루기도 하고, 정방형의 돌덩이리로 외롭게 굴러다니기도 한다. 6각으로 다듬은 돌기둥(혹자는 인공이 아니라는 주장도 한다)이 곳곳에서 눈에 띈다.

돌을 6층으로 쌓아 올린 성벽이 나타난다. 이곳은 바닷물이 들어오지 않는 내륙 쪽이다. 고고학 보고서를 읽어보니, 이곳 육지에서부터 난마돌 왕국의 건물이 시작되었다고 했다. 애초에는 바닷가에 이 같은 식으로 축성하고 왕궁을 차렸던 듯하다. 정교하다. 육각·오각·사각·삼각의 다양한 형태의 돌기둥이 차곡차곡 지그재그로 쌓아 올려져 있고, 그 위를 푸른 이끼가 융단처럼 뒤덮었다. 집단노동의 흔적, 혹은 강제노동의 흔적, 아니면 어떤 집단적 사회 분위기 속에서 몰아쳤던 강인한 노동의 잔흔이 연출돼 있다. 숲길을 걸어 나간다. 불과 5분여 만에 의문이 쉽게 풀린다.

맹그로브 숲이 나타난다. 죽순같이 생긴 맹그로브의 강인한 뿌리가 산호 흙 갯땅을 뚫고 올라와 있다. 방금 전에 보았던 조금 안쪽의 왕궁터도 역시 바닷가에 접하고 있었던 셈이다. 난마돌을 관통하는 작은 도로의 축대며 주변의 흩어진 돌도 모두 성곽돌이다. 축대가 무너지면서 흩어진 돌들을 가지런히 모아 놓았다. 길바닥은 백산호로 꾸며져 난마돌 일대가 산호섬 지대임을 말해준다. 카메라를 들이대고 사진을 찍어보아도 맹그로브와 돌의 연속일 뿐 색다른 풍경은 없다. 어쩌다 코코넛 열매더미가 눈에 띌 뿐이다. 그만큼 맹그로브 숲 전체의 하나하나가 모두 난마돌 유적이다.

맹그로브 뿌리와 줄기가 돌을 품은 장면이 눈에 들어 온다. 긴 세월을 훠적거리면서 강인한 생명력으로 버텨온 맹그로브 뿌리가 끝내 돌을 품에 안았다. 태국 야유타야(Ayutthaya)에서 보았던 불상을 품에 안은 강인한 나뭇가지를 떠올렸다. 앙코르와트가 또한 그러하였다. 이렇듯 하나의 문명이 사라지면 끝내 다시금 자연으로 되돌아가는 것, 난마돌도 예외가 아니다. 인간의 운명이 제한적이듯 문명 또한 제한적이다. 태평양 한복판에 또 하나의 앙코르와트가 버티고 있는 셈이다.  

원주민 안내자가 저 앞에 가고 있다. 안내자는 이 숲에 들어온 뒤로는 말이 사라졌다. 묵묵히 그저 걷기만 했다. 신성스러운 숲과 성터에서 말을 자제하는 듯했다. 다리도 건너고 돌둑도 넘어 드디어 너른 호수 같은 곳에 당도했다. 먼발치에 돌들이 쌓여 있다. 산호섬의 성곽이 있던 곳이다. 성곽의 잔해가 물에 비친다. 자세히 살펴보니 모두 무너진 것만은 아니다. 가지런히 축성된 돌들이 그대로 남아 있는 부분도 눈에 띈다. 드디어 아주 익숙한 풍경이 다가왔다. 난마돌의 그 이름난 무덤섬이다.

공항의 카탈로그에서, 호텔의 벽화에서, 그리고 고고학자들의 사진에서 익히 보았던 그 무덤섬이 그림처럼 떠있다. 이 작은 섬나라의 홈페이지에 들어가도 언제나 자랑스럽게 내세우는 사진은 이 무덤섬 풍경이다. 차곡차곡 쌓아 올린 육각의 돌기둥들, 빈틈없이 채워나간 돌기둥의 숨가쁜 밀도, 사람의 힘으로 옮기려면 엄청나게 힘들었을 기단의 장중한 거석들, 날렵하게 올라간 성곽의 꼭대기, 빈틈없으면서도 미학적으로 교차시켜 쌓아 올린 모퉁이, 그리고 무엇보다 물가에 비친 옛 왕조의 그림자가 복잡다단한 정서적 교감을 불러일으킨다. 아, 난마돌은 역시 태평양 최고의 유적이구나, 하는 생각을 벗어날 수 없다. 적도의 더위조차 사라지게 하는 시원한 풍경이다.


▎무덤섬 복판에는 적석고분층이 있고, 고분 입구에는 사자의 문이 있다. 원주민 안내자는 근처에도 다가서려 하지 않는다.
태평양의 베니스


▎폰페이 섬의 수도인 콜로니아 해변.
20세기의 뛰어난 고고학자 윌리엄 모간(W. Morgan)은 “태평양 그 어떤 장소도 고대 난마돌의 극적 아름다움을 능가하는 곳이 없다”면서 “그 인공섬과 상호 연결되는 운하들은 태평양의 베니스”라고 지칭했다. 바닷가에 의지해 난공불락의 성을 만들고, 물이 들어오면 카누를 타고 운하처럼 돌아다녔다. 전략적 방어와 신속한 교통수단을 모두 고려한 태평양의 베니스인 셈이다.

호수 같은 바다를 건넌다. 깊어보았자 허벅지를 넘지 않는 천해(淺海)다. 야자수 그림자가 인상적이다. 바닥에는 모래에서 자라는 잘피 군락이 무성하다. 안내인과 수인사를 하는 원주민 하나를 만난다. 사내는 물때를 기다리고 있었다.

“물이 차면 카누가 다닐 수 있지요. 관광객이 많은 것은 아니지만, 어쩌다 폰페이에서 물때 시간을 맞추어 몰려오는 경우가 있지요. 이곳에서는 몰려온다고 해보았자 서너 명이 오는 경우죠. 카누에 태우고 5달러씩 받지요.”

카누에 몸을 싣고 운하를 누비면서 나들이를 하는 셈이다. 천해를 건너자마자 부두에 해당하는 돌계단에 닿는다. 계단을 오른다. 장중하고도 무겁고도 역사적이기도 하고, 어떤 의례를 집행하는 기분이다. 역사의 문, 의례의 문은 그렇게 눈앞에 전개되고 있다. 난마돌 전사들이 다녔음직한 길바닥에는 백색 산호가루의 화사한 반짝임이 광채를 더해준다. 석성은 길고도 장중하게 이어지고, 그 옆으로 빙빙 돌아가면서 물이 흐른다. 영락없는 운하다. 적도 태평양에서 운하를 보게 될 줄이야! 

난마돌은 두 개의 영역으로 나뉘어 있다. 서쪽의 마돌 파(Madol pah)와 동쪽의 마돌 포웨(Madol powe)다. 전통적인 2중 구조로 되어 있는 마돌 포웨는 많은 무덤과 사제의 거주처인 제의공간이다. 남동쪽 코너와 마돌 포웨의 돌출부는 난다와우스(Nandauwas)로 불리는, 거대한 왕족의 무덤군이다.

일명 무덤섬 복판에는 만주의 장군총과는 또 다른 느낌의 적석고분층이 있다. 고분 입구에는 사자의 문이 있다. 원주민 안내자는 끝내 근처에 다가서려 하지 않는다. 아예 일찍이 빠져나가 저 멀리 서 있다.

“이곳은 함부로 오는 곳이 아니에요. 두려워요.”

그는 정말 두려워하는 듯했다. 어떤 신령의 힘, 악령의 힘 같은 것이 주변을 꽉 덮쳐 누르고 있다. 외부인이 바라보는 공간과 토박이들이 믿는 영력의 힘은 다른 것이다. 오늘날에도 폰페이 사람들은 난마돌의 강력한 영력을 굳게 믿는다. 이는 오랜 역사적 전통을 지니는 것으로 구전되어왔고, 지금도 여전히 힘을 지닌다.

1907년 4월 29일,독일 총독 베르그(Viktor Berg)의 죽음이 그 대표적 사례다. 독일인이 난마돌을 방문해 무덤에서 뼈를 추리는 일을 시작했다. 사람들의 만류가 있었지만 그는 아랑곳하지 않고 금기를 어긴다. 그런데 그 다음날 총독은 즉사했다. 사람들은 난마돌의 영력이 해를 가했다고 지금껏 믿는다.1910년 원주민이 일으킨 ‘소커의 난’을 예측한 예언도 있다. 폰페이 사람들은 난마돌의 중심인 판 카디라(Pahn Kadira)가 어떤 예조를 행한다고 믿는다. 카디라 성곽의 어느 귀퉁이가 무너진 날,그 무너진 부분은 ‘소커(Sohker)’를 뜻했다. 따라서 소커에서 반란이 일어나고, 식민주의자 독일인이 영영 자신들의 땅에서 추방당하는 것으로 귀결되리라 믿었다. 그만큼 난마돌의 영력을 강력한 것으로 여긴다.

이국인인 것을 다행으로 생각하면서, 그러면서도 신에게 용서받을 수 있다면 기꺼이 용서를 청하리라 마음먹고 동굴처럼 생긴 무덤 안쪽을 들여다보았다. 사자의 정원은 늘 그러한가? 어둡다. 돌 틈에서 한 자락 빛이 스며든다. 바닥에는 그 빛을 받고 살아가는 풀도 있다. 사방의 돌은 짜임새 있게 각을 둘렀는데 빈틈이 없다. 중후한 인격을 지닌 왕이었을까? 아니면 폭력적으로 노예를 착취하던 왕이었을까? 알 수는 없으되 왕의 힘이 대단했음을 감지한다. 무언가 바스락거리는 소리에 깜짝 놀란다. 놀랄 것 없이 도마뱀인데, 무덤 안이라 그런지 놀라움이 컸다. 무덤을 지키는 도마뱀인가?

“우리는 이곳을 잊은 적이 없다”


▎사람 하나가 겨우 서 있을 정도의 공간인 지하감옥.
무덤에서 바깥으로 나가는 출구는 높이 1m를 넘지 못한다. 개구멍 같은 문으로 기어 나가자 드넓은 성벽이 길게 이어진다. 이 엄청난 성벽을 쌓으려면 노동력은 물론 채석, 운반 시간과 운반 방식, 돌을 높은 곳으로 끌어올리는 기술 등을 계산해야 할 것이다. 그렇다면 난마돌을 만들고 경영한 사람들은 기술·노동·자본 등에서, 나아가 그러한 것을 가능케 한 정치권력과 종교의례 등에서 어떤 우월적·압도적 지위를 확보했거나 그러한 사회적 분위기를 연출하고 지속시킬 수 있는 힘을 확보하고 있었을 것이다.

안내자가 문득 발걸음을 멈춘다.

“여기가 감옥이에요.”

70x50㎝의 직사각형 출입구를 들여다보니 사람 하나가 겨우 서 있을 정도의 공간이다. 죄인을 이곳에 집어넣고 꼬빡 서 있게 벌을 주었음이 분명하다. 감옥은 철통 같은 돌로 둘러 쌓여 난공불락이다. 틀림없이 돌 뚜껑을 씌워 감시했을 법하다. 감옥치고는 대단히 잔인하다.

“어떻게 감옥인 줄 금방 알지요?”

“오랫동안 사람들의 입에서 입으로 전해져왔어요. 왕국이 사라졌어도 우리 폰페이 사람들은 언제나 이곳을 찾아왔답니다. 폰페이 사람들의 기억에서 난마돌이 사라진 적은 한 번도 없었고, 지금도 그래요.”

갈수록 장중한 성은 계속 이어진다. 점점 물이 많아졌다. 외해에 다가간 것이다. 물색이 짙어지고 성들은 물가에 집을 짓고 있다. 93개의 산호섬에 성을 쌓았다는 고고학 보고서가 비로소 선명하게 인식되기 시작한다. 촘촘히 흩어져 있는 산호섬마다 성곽이 즐비하다. 카누를 타고 그 사이사이를 누비면서 왕국을 경영했을 것이다. 한때는 적어도 수천 명이 살아갔으며, 수백 척 이상의 카누가 이곳을 누비면서 장관을 연출했음직하다. 군사전략적 방어 목적과 해양 진출이라는 여러 목적이 분명히 있었을 것으로 여겨진다.

흰 산호모래와 검은 돌이 대비를 이루고, 태평양의 일상적인 흰구름이 저 멀리 떠있다. 이곳 바깥은 대양이다. 해도를 펴보니 수심 4000여m 심해가 근처에서 시작된다. 심해저 가운데 우뚝 솟은 화산섬 주변에 이 같은 자잘한 산호섬이 발달했다. 난마돌 왕국은 그 섬을 이용해 운하의 도시, 바다의 도시를 세운 것이다. 언제나 외해의 파도가 들이치는 중이다. 산호모래섬이 발달한 가운데 코코넛이 뿌리를 내려 남국의 익숙한 풍경을 연출하고 있다. 난마돌의 본디 이름은 ‘소운난-렝(Soun Nan-leng)’이며, ‘하늘의 지붕’이란 뜻이다. 폰페이 토박이말로 마돌(madol)은 구조 사이의 공간을 뜻하며, 이는 곧 운하를 뜻한다. 그래서 난마돌은 로맨틱한 ‘태평양의 베니스’가 되는 것이다.


▎조간대에 위치한 난마돌 유적. 드넓은 남태평양과 면한 난마돌 동쪽의 유적들은 대양으로 나가는 전진기지로 보인다.
의문이 풀린다. 난마돌의 93개 인공섬과 모든 구성체는 서쪽과 남쪽, 그리고 거대한 바다로 향한 벽들로 이루어진 동쪽에 있다. 이곳 외곽 산호섬의 성곽들은 바로 대양으로 나가는 전진기지인 셈이다. 그네들이 선단을 이끌고 멀리 추크나코스라에까지 이동했던 전진기지라고 생각해도 무방할 것 같다. 바깥 대양의 성벽을 들이치는 포말을 보면서 그런 생각을 하지 않을 수 없다.

난마돌에서 건축학적으로 감동시키는 것은 거대한 스케일만이 아니다. 원주형의 현무암을 벽구조에 빼곡히 채웠다는 데 있다. 난다우와스 같은 섬은 79~63m의 기반을 지니며 외부는 벽으로 둘러쌓이고 운하의 수면에서 7.6m 높이다. 둘러싸인 벽은 지하실이며 다듬은 돌로 둘러싸인 중요한 중앙 지하실을 포함한다.

그렇다면 어디서 돌을 떼어내 어떻게 옮겼을까? 난 도아스(Nan Dowas)의 구석돌은 50여 t에 달한다. 2t의 사카오(원주민이 일상적으로 먹는 마약의 일종)를 찧던 돌이 자리 잡고 있으며 1t 무게의 돌판은 기본이다. 폰페이의 반대편 방향에서 뗏목으로 옮겼을 것으로 추측된다. 야자수 나무토막을 깔고 그 위로 돌을 굴려 운반했을 것이다. 다듬지 않은 원주들을 차곡차곡 쌓아 올리고, 성벽 안쪽은 산호초 파편으로 채웠다. 폰위(Pohnwi) 섬에서는 높이가 무려 15m까지 도달했다. 이러한 공력이 많이 들어가는 성은 수천 명이 수세기에 걸쳐 축조했음을 증명한다.

불행하게도 유럽인 탐험가와 후대의 일본 고고학자들의 마구잡이 발굴로 인해 이들 본래 형태의 내부가 파헤쳐졌으며 정보의 신뢰도를 잃게 하였다. 일제강점기 일본 고고학자들이 한반도의 유적을 발굴이라는 미명 하에 마구잡이로 파헤쳐 보물 캐기에 전념했던 과거가 이곳 적도 아래 태평양에서도 반복되었다.

‘태평양의 시내버스’를 타고…


▎마약의 일종인 ‘사카오’를 만드는 여인들. 폰페이 섬에서는 일상으로 즐기는 기호식품이다.
난마돌을 제대로 이해하고 지도로 만드는 데는 오랜 시간이 걸렸다. 난마돌에 관한 최초의 고고학적 지도는 1910년도에 만들어진다. 독일 민족지학자 파울 함부르크(Paul Hambruch)가 최초의 지도를 만들었으며 여전히 오늘날의 연구에도 근거가 되고 있다. 스티브 아센스(Steve Athens)와 빌 아이레스(Bill Ayres)에 의해 최근에 본격적인 현지조사가 이루어졌으며, 이외에도 몇몇이 조사에 참가해 지도를 만들어냈다. 독일 점령기 독일인의 발굴, 일본 점령기 일본인의 발굴, 그리고 미국인 학자들에 의한 발굴이 제한적으로 이루어졌다.

이들 연구자료에 의하여 난마돌 복합체의 건축 연대기가 밝혀졌다. 난마돌 지역을 최초로 점령한 사람들은 폰페이 자체의 인간의 역사와 동일한 시대인 AD 1세기 무렵이다. 난마돌이 그렇듯 중요한 제의적 중심이 될 수 있었던 이유다. 그네들은 섬의 초기 정착민이었다. 즉, 최초의 정착민이 난마돌 지역에 당도하자마자 자신들의 안식처로 삼고 제의적 공간을 창출하고 이후 왕국을 건설한 것이다. 왕국이 건설된 이후에도 난마돌은 끊임없이 제의적 상징으로 남았으며, 비록 왕국이 사라진 지 오래 되었으나 지금도 폰페이의 원주민은 난마돌을 신성한 공간으로 간주한다. 제의의 역사적 장기지속이 완강함을 느낄 수 있다.

폰페이 자체의 역사는 어떻게 흘러 왔을까? 아왁(Awak) 계곡이나 키티(kiti) 구역에서의 고고학 조사는 원주형 돌을 쓰는 난마돌 스타일의 거대건축에 대해 추가적인 데이터를 제공했다. 고고학자 조이스 배스(Joyce Bath)는 키티 구역의 샵타카티(Sapwtakati)를 조사했다. 샵타카티는 그 구조물 내에 원주형 돌을 지니고 있었으며, 난마돌과 유사한 중요한 중앙무덤 구조를 지니고 있다. 탄소 측정으로 삽타카티 유적이 난마돌의 발전 시대와 동일함이 밝혀졌다.

전체 유적지도를 보면 매우 치밀할 정도로 산호섬을 만들어나가고 그 위에 축성했음을 알 수 있다. 물론 그들 산호섬은 본디 산재하던 자연적 산호섬의 지형적 조건을 십분 이용했을 것이다. 당연히 카누를 이용해 물자를 운반했으며, 비상시에는 물속을 걸어 다니기도 했음직하다. 아무리 깊어도 허리를 넘지 않을뿐더러 아늑한 호수 같은 산호지대에서 이렇게 태평양의 난마돌 해양문명이 번성했던 것이다. 이들 해양 왕국이 어떤 규모로 대항해를 하고 바다를 장악했는지에 관해서는 그 어떤 기록도 남아 있지 않다. 그러나 같은 태평양권의 마셜군도 사람들이 대항해를 즐겨 하던 바다사람들이었다는 다양한 증거, 가령 선박이라거나 항해지도 등이 전해 온다. 그렇다면 이만한 규모의 거석문명을 작은 섬에 이룩한 폰페이 사람들의 해양문명도 결코 만만하지 않았으리라는 것을 어렵지 않게 짐작할 수 있다.

태평양의 작은 섬에서 이만한 축조물을 세우려면 어떤 강력한 왕권 없이는 불가능했을 것이다. 보통의 산호섬에서는 이 같은 문명이 불가능했다. 정교한 서열과 수직구조로 상징되는 복잡한 사회구성체는 주로 고산지대가 있는 섬에서 발전했다. 극도로 자원이 제한된 산호섬에서는 이럴 만한 인구 규모를 만들 수 없기에 불가한 일이었다. 인구압과 사회정치적 성장관계를 결정하는 다양한 의견이 존재하지만 최소한의 필수적인 인구규모가 필요했음은 두말할 나위가 없다. 기껏해야 수백 명 미만의 산호섬에서는 어떤 복합적인 수직적 질서를 창출할 수 없었다. 그러나 폰페이 같은 고산섬에서는 대략 AD 1000년경 인구가 수천 명에 달했다. 이러한 크기의 병합과 조직의 역사는 다양한 형식의 위계질서와 중앙집중적 면모를 보여준다. 왜 말리노프스키 같은 서구의 민족지학자들이 태평양의 섬을 샘플 삼아 인류 역사의 시발점과 원초성을 연구하려 했는지 알 수 있을 것 같다.

인간사회에 어떻게 권력이 생겨나고, 어떻게 권력집중과 이를 이용한 이른바 문명이라는 이름의 거대한 역사적 축조물이 만들어지는지는 인류문명사의 오랜 숙제이기도 하다. 그동안 태평양의 거석문명 하면 익숙하게 이스터 섬의 모아이 석상 정도에 머무르는 시각에서 벗어나면 폰페이의 거석문명이 눈에 들어올 것이다. 태평양을 단순한 관광이나 스쿠버 탐사 등으로만 접근하는 시각에서 벗어나 그들 원주민의 오랜 역사와 전통을 이해하는 시각이 필요하다. 폰페이의 난마돌 유적은 태평양 해양문명의 어떤 절정기와도 같다. 식민지배 이래 이곳을 지배한 서양인의 시각에서 벗어나 원주민의 시각으로 이들 문명사를 재평가해야 할 이유가 있는 것이다.

폰페이는 거리상 한국에서 그렇게 먼 나라가 아니다. 그러나 비행기를 두 번 갈아타고 그때마다 오래 대기해야 하는 등 체류시간의 증폭으로 비용과 시간이 많이 든다. 이런저런 이유로 쉽게는 못 가는 섬. 그러나 괌에서 출발한 비행기는 추크-폰페이-코스라에-마셜군도를 거쳐 하와이로 연결된다. 다시 하와이에서 반대 방향으로 되돌아 괌까지 운행된다.‘태평양의 시내버스’라고 명명해도 틀린 말은 아닐 듯. 이 ‘태평양의 시내버스’가 매일은 아니지만 정기적으로 오가므로, 이 버스를 타고 훌쩍 거석문명 탐사를 떠나볼 일이다.


주강현 - 제주대학교 석좌교수, 아시아퍼시픽 해양문화연구원장.해양사·문화사·생활사·생태학·민속학·고고학 등 전방위로 연구해온 우리 시대의 대표적 ‘지식 노마드’이자 비교해양문명사 연구에 몰두하는 해양문명사가. 아시아 바다는 물론 대양의 섬으로 시야를 넓혀가며 비교해양문명사 연구에 몰두하고 있다. <적도의 침묵> <독도강치 멸종사> 등 다수의 저서가 있다.

201702호 (2017.01.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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