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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제전시] 메리와 은서의 따뜻한 만남 ‘비밀의 화원(花園)’ 

“꽃이 피어나는 동안 그녀도 성장했다” 

김포그니 기자 pognee@joongang.co.kr
영국의 고아소녀와 ‘깔창생리대’를 써야 했던 불우한 한국소녀가 만들어낸 기적의 공간… 해외 유망작가 25명 참여해 소녀의, 소녀에 의한, 소녀를 위한 위로 전시회 열어

▎반주영 '미정·Untitled'(2010)



▎이명호 'Tree#2'(2012)



▎앤 미첼 'The Choice'(2013) / 사진제공·서울미술관
“소녀는 지리한 성장통 끝에 숙녀가 됐습니다.” 서울시 종로구 부암동에 위치한 서울미술관에서 동화 '비밀의 화원·The Secret Garden'을 모티브로 한 특별한 전시회가 열렸다.

세계적인 동화 '소공녀'와 '소공자'를 집필한 영국의 유명 작가 프랜시스 호지슨 버넷의 소설 '비밀의 화원'이 국내외 젊은 작가들에 의해 미술전으로 재탄생했다. 폐쇄적인 성격을 가진 소녀 메리가 부모의 죽음 이후 버려진 화원을 가꾸면서 아름다운 숙녀로 거듭난다는 내용이 회화, 사진, 설치 등 다양한 분야의 현대미술 작품으로 구성됐다.

전시 제목인 ‘비밀의 화원’은 이중적인 의미를 갖는다. 조선시대에 그림을 관장했던 관청 ‘도화서(圖畫署)’의 잡직이었던 ‘화원(畫員)’에서 그 뜻을 차용했다. 아직 대중에게 잘 알려져 있지 않은 작가를 의미하기도 하는 ‘화원’, 이곳에서 관람객은 차세대 작가들이 만들어낸 신선한 작품을 통해 감각적인 경험을 기대해볼 수 있게 됐다. 실제로 이번 전시에는 그레이스 은아킴, 앤 미첼, 히로시 센주, 마크 퀸, 한승구 등 해외 유망 작가 24명이 참여해 총 75점의 작품을 선보인다.

전시의 취지도 눈에 띈다. 서울미술관은 이번 전시의 수익 일부를 국내 저소득층 가정 소녀들에게 지원할 예정이라고 밝혔다. 전시테마인 ‘비밀의 화원’ 속 주인공 메리처럼 도움을 필요로 하는 소녀들에게 초점을 맞춘 것이다.

최근 생리대 살 돈이 없어 신발 깔창으로 대신했다는 소녀 ‘은서’(가명)의 사연이 세간의 관심을 모았다. 서유진 서울미술관 이사장은 “가장 아름다운 시기의 십대 소녀에게 부담 되는 것은 생리대 값뿐만이 아니다. 소녀에서 여자가 되어가는 소중한 과정을 홀로 고민하고 있는 가슴 아픈 이야기에 귀를 기울이고 싶었다”며 이번 전시회를 기획하게 된 배경을 설명했다.

소녀 메리와 21세기 미술작가들은 어떤 교감을 했을까? 그 비밀스러운 화원 속으로 들어가봤다.

미지의 세계로 들어가는 열쇠를 찾다


▎전시회 '비밀의 화원' 전경. 한승구의 작품 'Skin of skin_dia2'(2016)가 설치돼 있다. / 사진제공·서울미술관
인도에서 부모님의 무관심 속에 자란 열 살 소녀 메리 레녹스는 이기적이고 심술궂은 소녀였다. 그러던 어느 날, 전염병으로 부모님이 세상을 떠나자 영국의 귀족인 고모부 집으로 가게 된다. 그러나 이곳에서도 메리를 사랑으로 돌봐주는 어른은 없었다.

어린 하인 말타가 메리를 돌보게 됐다. 외로움 때문에 힘들어하는 메리를 안타깝게 생각했던 그는 말했다.

“메리 아가씨, 제 동생 딕콘은 저 넓은 정원에서 새와 토끼, 염소랑 함께 뛰놀아요.”


마치 실제 풍경을 재현한 듯 눈발에 가려진 창 밖의 이미지로 아련한 정감을 자아낸 윤병운 작가의 작품 'Windows'(2014)가 전시관 초입에 등장한다. 아직 발견되지 못한 미지의 세계인 비밀의 화원을 떠올리게 한다.

동화 '비밀의 화원'에 등장하는 외로운 소녀 메리처럼 상처가 치유되길 갈망하는 인간의 바람을 불모지에서 버텨내고 있는 식물의 모습으로 표현한 작품이 그 뒤를 잇는다. 캔버스에 도포한 석회를 긁어내는 프레스코 기법으로 제작된 김유정 작가의 '온기'(2016) 시리즈다. 소녀의 손이 닿기 전에 황량하게 버려진 정원의 쓸쓸함을 느낄 수 있다.

비밀 속 화원을 가꾸며 성장해나가는 소녀의 이야기처럼, 관람객으로 하여금 미술작품으로 꾸며진 ‘화원’의 아름다움을 통해 지친 마음을 위로받고 새로운 영감을 얻을 수 있도록 구성됐다. 매번 홀로 지내던 메리가 동물과 함께 뛰노는 딕콘 형제를 만나게 된 그 순간처럼 말이다.


▎염지희 'Complex fantasy 2'(2010)
화면 속 아슬아슬한 연극무대 위에 보이는 등장인물 간의 단절을 통해 생과 사의 다양한 모습을 담아낸 염지희 작가의 콜라주 작품에서는 외로운 소녀 메리의 마음을 느껴봄과 동시에 쓸쓸한 우리 현대인의 모습을 마주할 수 있다.

이후 반복적인 패턴을 확장시키는 방법으로 그려진 반주영 작가의 작품 '미정'을 통해 무력한 삶이 깨어지는 순간을 목도하게 된다. 지루했던 패턴이 새로운 전환의 계기를 맞아 붉은 꽃처럼 폭발하듯 피어나는 장면은 마치 첫사랑에 눈 뜬 소녀의 순정처럼 드러난다.

말타의 동생 딕콘은 메리에게 정원 속 동식물에 대해 설명해줬다. 메리는 그중에 붉은 울새를 가장 좋아했다. 이 새가 자신을 좋은 곳으로 데려가 줄 거라 믿었기 때문이다.

난생 처음 새로운 세계를 접하게 된 메리는 어린 아이 특유의 호기심이 발동했다. 붉은 울새를 쫓던 그녀는 들판에서 낡은 열쇠를 하나 발견했다. 그리고 그 근방에 근 10년 동안 아무도 들어가지 않은 ‘비밀의 화원’이 있었다. 바로 메리가 발견한 그 열쇠로만 열 수 있는 화원이었다.


버려진 화원은 사실상 폐허다. 본래의 기능을 상실한 것이다. 그러나 정성이 담긴 손길이 닿은 후 생생한 자연으로 거듭나 종국에는 인간에게 생동하는 삶의 의미를 깨닫게 하기도 한다.


▎박종필 'between the fresh no.68'(2016)
박종필 작가는 작품 'Between the fresh'(2016) 시리즈에서 실존과 허구의 간극을 그려냈다. 생화와 조화를 한 화면에 담은 모습은 마치 주인공 메리가 비밀의 열쇠를 손에 넣기 전후 정원의 존재적 변화를 말하는 듯하다.


▎마크 퀸 'Silk Road· 실크로드'(2010)
꽃과 과일의 아름다움을 극사실주의 기법으로 화면 가득 채웠다. 자연을 마치 사진 찍듯이 그려낸 마크 퀸의 작품 '실크로드·Silk Road'(2010)다. 볼 것과 먹을 것으로 대변되는 삶의 가치를 담은 이 작품을 통해 메리가 친구 딕콘과 함께 당도한 비밀 속 화원의 모습을 상상할 수 있다.

상처받은 아이 ‘콜린’과의 만남

메리의 고모부에게는 콜린이라는 이름의 어린 아들이 있었다. 콜린이 태어나는 과정에서 고모부의 병약한 아내는 세상을 떠났다. 콜린 역시 태생적으로 병약한 나머지 태어나서 단 한 번도 집 밖에 나가본 적이 없었다.

가엾게도 고모부는 아내가 죽은 이유가 아들 때문이라 생각해 콜린을 멀리했다. 하나뿐인 아버지의 무관심에 풀이 죽은 콜린에게 어느 날 메리가 나타났다. 메리는 그에게 자신이 발견한 비밀의 화원으로 가자고 했다. 그러나 콜린은 자신은 지병으로 곧 죽을 거라며 외출하기를 거부했다.

큰 저택에서 홀로 있는 시간이 이어질수록 콜린은 몸도 마음도 점점 더 쇠약해져갔다. 메리의 정성들인 간호에 콜린도 점차 마음의 문을 열기 시작했다. 결국 그는 메리의 손에 이끌려 세상 밖으로 나가기로 마음먹었다. 비밀의 화원에 가기 위해서다.

도심 속에 버려진 회전목마는 잃어버린 동심을 나타낸다. 그리고 아무도 타지 않던 회전목마에 주홍색 불빛이 들어온다.


▎정원 '도로시의 꿈·Over the rainbow'(2006)
정원 작가의 '도로시의 꿈'은 버려진 회전목마가 다시금 움직이는 순간을 사실적으로 표현한 작품이다. 그는 “미국 작가 L. 프랭크 바움의 동화 '오즈의 마법사'의 주인공 도로시를 모티브로 하여 유년시절의 꿈을 나타냈다”고 말했다.

도심 속에 버려진 회전목마와 비밀의 화원을 통해 도로시와 메리가 결국에는 동심의 주체였음을 표현하고 싶었다고 그는 설명한다.

그렇다면 메리가 발견한 비밀의 정원에는 어떤 풍경이 숨어 있을까? 자연물의 순수한 아름다움을 이명호 작가는 'Tree' 시리즈로 재구성했다. 예술이 그동안 꿈꿔왔던 이상적인 자연이 어떤 것이었는지를 고심해 표현했다.


▎이슬기 'Another Nature'(2010)
동화 속에서나 등장할 법한 브로콜리로 만들어진 나무도 등장한다. 이슬기 작가의 작품 'Another Nature'을 마주하노라면 이곳이 현실이 아니라 동화 속이라는 착각에 빠져든다. “세상과 단절돼 환상이 깃든 비밀스러운 숲을 걷고 있는 것 같은 기분을 전달하고 싶었다”고 작가는 설명했다.

메리와 콜린, 그리고 딕콘은 오랜 시간 사람의 손길이 닿지 않아 풀숲이 무성해진 비밀의 화원을 가꾸기 시작했다. 이들은 자신들만이 아는 이 화원을 깊이 사랑했다.

본래 휠체어에 의지해왔던 콜린은 정원을 가꾸면서 점차 건강을 회복했다. 그는 난생처음 스스로 땅에 발을 딛게 됐다. 한편 콜린의 아버지는 아들이 자주 집에서 없어진다는 것을 알았다. 그는 하인을 대동해 아들의 행적을 뒤좇다 비밀의 화원을 발견했다. 그 안에는 자신이 한 번도 보지 못했던 아들의 모습이 있었다.

웃는 얼굴로 씩씩하게 걷고 있는 아들 콜린. 그 순간 비밀의 화원이 마치 천국으로 비춰졌다. 오랜 세월 소원했던 부자의 행복한 재회가 이뤄진 것이다.

자신이 가꿔온 화원이 눈부신 기적이 일어난 공간으로 변모하자 소녀 메리는 어느덧 세상에서 가장 행복한 소녀가 되어 있었다. 그녀는 이제 더 이상 외로운 소녀가 아니었다. 아름다운 숙녀로 훌쩍 자라나 있었다.



▎진현미 '겹·The Layer-0103'(2016)
이 전시회의 말미는 ‘환상의 뜰’이라는 이름으로 구성됐다. 마치 원작소설의 행복한 결말을 반영하듯이 진현미 작가는 작품 '겹·The Layer-0103'(2016)에서 슬픔을 딛고 긍정의 세계로 나아가려는 소녀의 의지를 표현했다.

샤워 커튼 같은 산 모형이 환상적인 자태로 겹겹이 천장에 걸려 있다. 입체적인 산수화의 모습에서 도전 끝에 행복을 찾아낸 소녀의 순수한 열정을 마주할 수 있다.


▎최수정 'Stare'(2012) / 사진제공·서울미술관
전통적으로 신비로운 동물로 알려진 사슴은 필연적으로 비밀의 화원을 대변한다. 최수정 작가의 '콜라주 시리즈'를 통해 사슴의 뿔로 풀숲을 그려냄으로써 비밀스러운 정원의 속성을 환상적인 이미지로 전환했다.

소녀의 성장에는 성장통이 뒤따른다. 전희경 작가의 작품 '닿을 수 없는 무아'(2015), '하얀 쓰나미'(2015)는 거칠게 구성된 추상의 붓질 속에서 무아지경의 색으로 가득한 황홀경을 경험하는 소녀의 성장통을 엿볼 수 있다. 그 안에 혼돈하게 구성된 유토피아를 과감한 색감을 사용해 동화적으로 연출했다.

외로웠지만 위축되지 않고 자신보다 더 외로운 친구를 위해 정원을 가꿨던 메리, 그녀는 자신의 친구에게 어떤 말을 건넸을까? 아마도 “너를 온 마음으로 사랑해”라고 외쳤을 거라고 작가는 얘기한다.

이정 작가의 '아포리아' 연작은 바닷가에 ‘너를 사랑한다’는 텍스트가 조명으로 세워져 있는 모습을 사진촬영한 작품이다. 사진 속 검은 바다는 혼란스러운 청춘을, 그 위에 세워진 붉은 조명은 타인을 위한 열정으로 표현됐다. 마치 소녀의 건강한 순정처럼 말이다.

소녀 메리가 탄생시킨 비밀의 화원 안에는 눈부신 꽃도 있고 그 안에서 뛰놀던 조랑말도 있을 것이다. 이재형 작가의 'Bending Matrix'(2016)는 자연 속 말의 모습을 21세기의 대표적인 문형인 디지털 이미지로 표현했다. 이어 한승구 작가는 작품 'skin of skin-dia2'(2016)를 선보였다. ‘빛으로 말을 거는 꽃’이라는 주제로 각양각색의 조명이 모여 꽃의 모형으로 빛난다.

최근 생리대 값이 부담돼 신발 깔창, 휴지로 생리대를 대신했던 소녀들의 이야기가 알려져 세간의 가슴을 먹먹하게 만들었다. ‘깔창 생리대’의 주인공 은서와 같은 저소득층 가정의 여학생은 지난해 기준으로 약 10만 명에 달한다.


▎이정 'I love you with all my heart'(2010) / 사진제공·서울미술관
“나 홀로 고통받는 은서가 더는 없었으면”


▎‘은서 캠페인’ 화보. 서울미술관은 이번 전시 ‘비밀의 화원’의 수익 일부를 국내 저소득층 가정 소녀들에게 지원할 예정이라고 밝혔다.
‘깔창 생리대’를 할 수밖에 없었던 소녀들의 눈물 뒤에는 미처 다하지 못한 이야기가 있다. 첫 생리의 막막했던 기억과 함께 소녀는 혼자 여자가 될 준비를 시작해야만 했다. 이에 대해 서울미술관 서유진 이사장은 소녀들에게 부담되는 것은 생리대 값뿐만이 아니라고 말한다.

서 이사장은 “빈곤층 소녀는 어떤 속옷을 입어야 하는지, 비싼 생리대를 대신할 것은 없는지 온전히 홀로 고민해야 한다”며 “그들이 더 이상 외롭지 않도록 돕고 싶었다”고 말했다.

이번 전시회 ‘비밀의 화원’에서 관람객의 기부금은 국내 저소득층 가정 소녀들의 위생용품 및 부인과 관련 수술 후 정기 치료비 지원 비용으로 사용된다. 이 밖에도 불우한 소녀를 대상으로 한 일대일 멘토링 서비스를 통해 추가적인 생계비도 함께 지원될 예정이다.

서 이사장은 “나 홀로 고통받는 은서가 단 한 명도 남지 않도록, 반짝이는 소녀들이 여자로 건강하게 성장할 수 있도록 따뜻한 마음을 모아주시길 희망한다”고 말했다.

예술은 인간의 삶에 직·간접적으로 보탬이 될 때 비로소 그 생명력을 갖는다. 소설에서의 메리가 화원에서 성장한 것처럼 21세기 한국의 소녀들도 예술로 소생한 ‘비밀의 화원’에서 따뜻한 위로를 받을 수 있게 됐다.

‘비밀의 화원’ 전시회는 오는 3월 5일까지 서울미술관 제 1·2전시실에서 진행된다.

- 김포그니 기자 pognee@joongang.co.kr

201702호 (2017.01.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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