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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영수 교수의 ‘조선을 만든 사람들’(13)] 신돈(2) 개혁정책은 왜 실패했나 

공민왕의 정치적 방종과 타락에 침묵하다 

김영수 영남대 정외과 교수
신돈의 개혁정책은 실패가 예정된 것이었다. 대규모 기근과 전쟁이 한꺼번에 찾아온 불운 때문만은 아니다. 그의 측근들은 재능도 도덕성도 결여돼 있었고 당시 정치현실에 대한 깊이 있는 이해도도 떨어졌다. 게다가 공민왕과 신돈 둘 사이에는 정치적 위선마저 있었다는데….

▎공민왕 신당 내부의 뒷편 감실에 봉안되어 있는 공민왕과 비(妃)인 원나라 위왕의 딸 노국대장공주의 영정. / 사진·중앙포토
지난 호에 신돈의 집권 과정, 그리고 정치세력의 숙청을 살펴보았다. 신돈의 집권에 대해 기존 정치세력은 깊은 충격을 받았다. 고려 정치의 전통에서 볼 때, 그것은 너무 파격적인 것이었다. 상상할 수 없는 일이 일어난 것이다. 승려가 국정을 직접, 그리고 전면적으로 장악한 것은 고려 초유의 일이었다. 묘청 역시 큰 정치적 영향력을 발휘하긴 했으나, 정권을 직접 장악하지는 못했다. 또한 신돈의 정치적 자질은 공식적인 과정을 통해 한 번도 입증된 바 없었다. 보우처럼 종교적 재능을 공인받은 것도 아니었다. 이 때문에 전통 정치세력들에 신돈의 집권은 허용될 수 없는 일이었다. 더구나 신돈의 집권은 공민왕의 지적처럼, 구정치세력 전체에 대한 일종의 선전포고를 의미하고 있었다.

명망 있는 모든 정치가가 일제히 그를 반대했으므로, 신돈은 정치적으로 매우 곤란한 입장에 빠졌다. 동의와 협조가 아니라 극단적인 처방과 공포의 조성만이 유일한 길이었다. 신돈은 집권 초 “무릇 자기를 비방하는 자는 문득 중상하여 잔악하게 불로 다루고 지지니, 대신 이하가 모두 두려워하였다”고 한다. 특히 유학자들에 대한 반감을 노골적으로 드러냈다. 특히 독보적인 명성을 지니고 있던 이제현이 눈엣가시였다.


▎서울 종묘의 망묘루와 향대청 사이 귀퉁이에 있는 공민왕의 신당. 공민왕과 노국대장공주의 영정이 회오리 바람을 타고 와 떨어진 곳에 세웠다고 전해진다. / 사진·중앙포토
“유자는 좌주(座主)와 문생(門生)이라 칭하고 안팎으로 늘어서서 서로 청탁하여, 그 하고자 하는 바를 자행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이제현의 문생이 다시 문생을 배출하여 드디어 나라에 가득 찬 도둑이 되었으니, 유자의 해로움이 이와 같습니다.”(<이제현전>)

공민왕대의 과거시험은 이제현과 그의 문생들에 의해 독점되어, ‘좌주-문생’ 관계를 매개로 상당한 정치세력이 형성되어 있었던 게 사실이다. 지적으로나 도덕적으로 그들을 능가하는 집단이 없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권력의 물리학이라는 관점에서 보면, 이는 왕에게 위험한 일이었다.

신돈에 대한 구정치세력의 반응은 양분됐다. 저명한 정치가들과 지식인들이 신돈에 반대했지만, 일반 관리들은 대체로 신돈의 권위를 인정했다. 신돈이 집권하자 “조정에 있는 자가 모두 다 은혜를 바라고 위엄을 두려워하여, 다투어 노비와 보물을 바쳤다.” 신돈의 위세는 대단했다. 출입 시에는 “시중 이하가 앞뒤로 옹위하여 도로가 막혀, 저자에서 물건을 팔지 못하였다.” 공민왕 20년 신돈을 위해 베푼 잔치에는 시중 이하 참석자가 200여 인이나 되었다. 정부 최고위직에 있던 이춘부(李春富)는 신돈이 말을 타고 지나갈 때 앞에서 공손히 손을 모았다. 시중 유탁이 술을 바칠 때 신돈은 앉아서 받았다. 신돈은 왕과 동등한 예우를 받고 있었던 것이다.

도덕성 결여된 신돈의 측근들


▎공민왕릉(왼쪽 사진)은 고려시대의 대표적인 쌍분 능묘다. 왼쪽이 공민왕의 무덤인 현릉(玄陵), 오른쪽이 노국공주의 무덤인 정릉(正陵)이다. 노국공주가 아이를 낳다가 죽자 슬픔을 이기지 못한 공민왕이 9년에 걸쳐 조성했다고 전해진다. / 사진제공·이혜은 동국대 교수
신돈은 자신과 함께 정치를 할 사람으로 어떤 사람들을 발탁했을까? 우선 공민왕의 측근 중, 오랫동안 권력에 소외되어 있던 사람들이었다. 김보(金普), 임군보(任君輔), 전보문(全普門) 같은 이다. 앞의 두 사람은 권력경쟁에서 밀려나 10여 년 동안 불우한 세월을 보냈다. 전보문은 연저수종 1등공신이었지만 낮은 직책에 머물렀다. 둘째 부류는 세족적 기반을 가졌으나, 공민왕대에 소외된 사람들이다. 이춘부, 홍영통(洪永通), 권적(權適) 신귀(辛貴), 손용(孫湧), 김원명 등이다. 이춘부의 부친은 원의 직성사인(直省舍人)을 역임하여 원 영종(英宗)의 총애를 받았다. 조서를 기초해 올리는 직성사인은 황제의 측근이었다. 그의 형제는 모두 현달한 친원파 가문이었다. 이춘부는 문음으로 관직에 나가, 주로 무공을 통해 입신했다. 1, 2차 홍건적의 난 때 공을 세웠고, 왜구 방어전에도 종사했다. 그는 공민왕 12년 파면되어 2년간 정치적 공백상태에 있었다. 그는 신돈 정권에서 가장 핵심적 멤버였다. 신돈의 집권에 즈음하여 공민왕은 신돈, 이춘부와 더불어 맹서를 작성했다고 한다. 그는 김난과 함께 매일 아침 신돈의 사택을 들른 다음 관청에 출근했다. 정부 내에서 실질적으로 신돈을 대리하고 있었던 것이다.

이인임은 다소 예외적이다. 그는 저명한 이조년(李兆年)의 손자이며, 공민왕 초 개혁정치에서 핵심 역할을 담당한 이인복의 동생이다. 그의 정치역량은 비할 바 없이 뛰어난 것이었다. 그러나 공민왕대에 그는 자신의 정치적 지향을 분명히 드러내지는 않았다. 그는 우왕대 폭정의 주범이다. 하지만 공민왕대에는 정치적으로 비난받을 일이 없고, 순조로운 관직생활을 영위했다.


▎원 영종의 초상. 몽골제국의 제9대 칸이자 원의 제5대 황제다. / 사진제공·김영수
신돈이 발탁한 셋째 부류의 인물들은 가계도 불분명하고 경력도 거의 알려져 있지 않은 인물들이다. 김란(金蘭), 기현(奇顯), 박의(朴曦) 등이다. 김란은 무장 출신이다. 신돈은 집권 전 그의 집에 유숙하였다. 그는 두 딸을 신돈에게 주었다. 그는 이춘부와 함께 신돈 정치의 또 한 축을 이루고 있었다. 신돈 집권 후 목인길, 임군보와 함께 궁중 서무를 관장했다. 이춘부가 정부를 관장한 반면, 그는 궁중을 장악했다. 기현은 신돈의 집사 역할을 담당했다. 신돈은 기현의 집에 거처하면서 정무를 처리했기 때문에, 기현은 신돈의 일정과 생활을 전담했다. 신돈 권력의 문고리였던 것이다. 신돈은 훗날 반역 계획을 세울 때 기현과 함께 했다 한다. 신돈이 사적으로 가장 신임했던 인물이었다. 그러나 그의 출신과 경력에 대해서는 아무 기록도 없다.

신돈이 발탁한 인물들은 대체로 오랫동안 불우했다. 또 재능이나 업적보다 신돈에 대한 충성 여부에 의해 중용되었다. 무신도 많았다. 목인길, 이춘부, 김란, 이운목, 김한귀, 이득림, 김원명 등이 그들이다. 당대의 저명한 정치가들이 모두 신돈을 기피했으므로, 선택의 여지가 없었는지 모른다. 그렇다고 이들이 특별히 사악했던 것은 아니다. 오히려 극히 일반적이고 평범한 인물들이었다. 다만 신돈 집권 목적이 개혁에 있다면, 이들은 전혀 적임자가 아니었다. 그들 모두는 너무 평범하고 통속적이어서, 개혁에 필요한 도덕성과 재능이 결여된 인물들이었다.

신돈은 자신에게 편리하게 정부와 궁중 업무를 이원화시켰다. 집권 초 정부의 업무는 유탁과 이인임에게, 궁중 업무는 김난, 임군보, 목인길에게 분담시켰다. 도당 같은 공식기관은 유명무실화되고 모든 정무는 신돈 1인에 의해 처리되었다. 백관이 신돈의 사저에 나가 국사를 의논했으며, 관리들은 그의 사저에서 숙직했다. 신돈이 궁중 호위 책임자인 금위제조관을 장악하게 되자 내외의 권력이 모두 신돈에게 모였다고 한다. 신돈을 제외한 어느 누구도 왕에 대한 접근이 불허되어, 실질적인 권력이 신돈 개인에게 집중됐다.

신돈의 개혁, 백성 지지 얻었지만 귀족들은 반발


▎1932년 금강산 월출봉에서 발견된 돌상자 안에서 발견된 사리갖춤. 이성계, 둘째 부인 강씨, 뒤에 조선 개국공신이 된 사람들을 비롯한 1만 명이 미륵을 기다리며 금강산 비로봉에 사리갖춤을 모신다는 명문이 새겨져 있다. 명문가 출신으로 신돈 집권기에 발탁된 홍영통도 발원자 중 한 명이다. 그는 신돈에게 늘 음식을 보내고 문안했고, 신돈이 출입할 때마다 반드시 말을 타고 뒤를 따라다녔다고 한다. / 사진제공·김영수
하지만 신돈은 당초 다짐대로 대대적인 개혁을 추진했다. 첫 개혁조치는 공민왕 14년 5월에 설치된 형인추정도감(刑人推整都監)이다. 목적은 원통하고 억울한 일을 조사하여 씻어주는 것이었다. 임박의 제안이었다. 그는 신돈에게 “공이 국정을 총괄하니 마땅히 전민(田民) 소송에서의 원통함을 바로 잡아야 한다”고 건의했다. 신돈이 책임자(提調)를 맡고, 임박이 실무를 담당(都監使)했다. 당시 대규모 토지겸병이 초래한 문제의 심각성은 단순히 민생의 고통을 넘어서 국가 전체의 기능을 마비시킬 정도에 이르렀다. 토지와 인민의 사유화로 인해 국가는 세금과 병력을 조달할 수 없었다. 그러나 이를 시정하기 위한 고려 말의 모든 개혁은 위화도회군 후 조선 건국 세력에 의한 전면적 개혁이 실행되기 이전에는 한 번도 성공하지 못했다. 신돈의 개혁도 결과적으로 그러했다.

그러나 <고려사> 편찬자는 신돈의 재판이 편파적이었다고 평가했다. 예컨대 “판사(判事) 장해(張海)의 가노가 낭장이 되었는데, 장해를 만나 마상에서 읍하고 말에서 내리지 않으므로, 장해가 노하여 이를 매쳤다. 가노가 신돈에게 호소하여 신돈이 장해 및 그 딸을 순군옥에 가두었다. 그가 군소의 인심을 얻어서 간악한 일을 하고자 함이 이와 같았다.” 사관의 평가는 오히려 사회 하층민에 대한 신돈의 우호적인 태도를 말하고 있는 것이다.

공민왕 15년, 전민변정도감이 설치되어 본격적인 전제개혁을 시도했다. 포고문은 다음과 같다.

“근래에 기강이 크게 무너져 탐욕스러움이 풍조가 되어, 종묘·학교·창고·사사(寺社)·녹전(祿轉)·군수전(軍須田) 및 사람들의 생활터전인 토지와 노비를 세력 있는 집이 거의 빼앗았다. 이미 땅 주인에게 반환하도록 판결한 것도 그대로 가지고 있고, 양민을 노비로 삼는다. 주현·역리·관노와 백성 중 국역을 도피한 자들이 모두 (유력자의 농장에) 빠져 숨어버리고, (유력자는) 크게 농장을 두고 있다. 이것이 백성을 병들게 하고 나라를 여위게 하여, 하늘이 그 원통함에 감응하여 물난리와 가뭄이 초래되고 질병이 쉬지 않는다. 이제 도감을 두어 이를 다스리게 하되, 서울 지역은 15일, 지방은 40일을 한정하여, 그 잘못을 알고 스스로 고치는 자는 묻지 않을 것이다. 기한을 지나 일이 발각되는 자는 규찰하여 다스릴 것이며, 거짓으로 고소하는 자는 도리어 죄줄 것이다.”(<신돈전>)


▎<고려사> ‘신돈전’ / 사진·중앙포토
정부가 이처럼 단호한 태도를 표명한 것은 처음이었다. 신돈은 스스로 이 기관의 책임자가 되어 이틀마다 방문했고, 이인임과 이춘부는 재판관으로서 소송사건을 처리했다. 정부의 최고 실권자들이 이를 담당했다는 점에서 그 정책의지를 확인할 수 있으며, 공민왕 초년과 달리 매우 강력하고 실질적으로 추진되었다. 그러나 이인임과 이춘부는 개혁의 적임자가 아니었다. 그들은 경력이나 정치적 지향에서 개혁과 무관한 정치가들로, 오히려 개혁 대상에 가까웠다.

<고려사>의 사관은 신돈이 “공의를 가장하여 사람에게 은혜를 사고자 했다”고 혹평하고 있다. 그러나 다른 한편 “명령이 나오자, 많은 유력한 가문이 빼앗은 전민을 그 주인에게 돌려주었으므로, 온 나라가 기뻐하였다”고 기록하고 있다. 또 “노예가 양민 되기를 호소하는 자는 한결같이 양인으로 하여주니, 이에 노예로서 주인을 배반한 자가 봉기하여 말하기를 성인(聖人)이 나왔다고 하였다”고 기록했다. 신돈의 개혁은 단호하고 유효했으며, 민심을 얻었다. 신돈의 개혁은 공민왕대의 숱한 개혁조치 중 유일하게 효과를 확인할 수 있는 것이다. 충선왕 이래 이런 개혁이 수차 시도되었으나 충선왕조차 실패하였다. 역사에서는 이 정도의 개혁은 대단히 어려운 것이다.

다만 개혁이 얼마나 지속적으로, 그리고 체계적으로 추진되었는지는 확인할 수 없다. 또한 개혁은 전면적 전제 개혁이 아니라 토지와 노비를 둘러싼 재판에 한정되었다. 창왕 원년(1388) 6월 대사헌 조준의 개혁안을 보면, 전제는 단순한 법률적 문제 이상으로 국가의 역할분담 체계와 직결된 문제였다. 토지분배와 국역(國役)을 직접 연관시켰기 때문이다. 즉 토지문제에 대한 구상은 곧 국가 전체의 구성 방식과 국가의 성격에 대한 구상과 동일한 문제였다. 따라서 개혁을 위해서는 단순한 개혁 의지만이 아니라 정치적 비전과 식견이 필요했다. 조선의 건국자들은 이 점을 이해하고 있었기 때문에, 토지 문제를 토지 문제로 다루지 않고 국가 전체의 틀 속에서 검토했다. 그들은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세밀한 규칙을 제정하고, 시행에 앞서 토지측량과 호구조사를 병행했다.

공민왕의 정치적 약점을 활용


▎정이상소(鄭李上疏). 1431년(세종 13) 간행된 <삼강행실도> 중 ‘충신도’. 공민왕대에 이존오와 정추가 신돈을 탄핵한 것을 그린 것이다. 두 사람은 신돈이 왕과 나란히 의자에 앉아 있는 등 왕과 동등한 예를 행하는 것이 국가질서를 문란하게 한다고 비판했다. 가장 위의 그림은 두 사람이 공민왕에게 간쟁하는 모습, 아래 왼편 그림은 신돈이 두 사람을 회유하는 모습, 아래 오른쪽 그림은 두 사람이 귀양 가는 모습. / 사진·중앙포토
요컨대 당대의 전민 문제는 단순히 재판상의 부당성 문제만은 아니었다. 문제의 사안이 이러했으므로 고려 말의 귀족연합적 성격의 국가로서는 이 문제를 근본적으로 해결할 수 없었다. 그 점을 명료하게 이해한 것은 조준과 정도전 등 조선 건국세력이었다. 조선 건국세력은 기존 토지소유를 전면 재편하여 기존의 귀족연합을 해체하고, 성리학과 왕권을 중심으로 한 새로운 중앙집권적 이념과 국가를 수립하였다. 그것이 조선이었다. 신돈의 개혁에는 이런 문제의식이 결여되어 있었다.

다음으로 <고려사>는 신돈이 재판상의 권한을 이용하여 성적인 쾌락을 추구했으며, 사치스러운 생활을 했다고 기록하고 있다. 실제로 집권 전 낡은 옷만 입고 다니던 고행자의 풍모가 사라졌다. 여성들과 접촉하고 아들을 낳았으며, 개성시내에 일곱 채의 호화로운 저택을 가졌다. 이로 인해 <고려사>의 사관은 신돈의 이중성을 비판했다. 즉 전제개혁이 ‘공의’이며, 그의 시책이 상당한 성과를 거두었다는 점을 인정하면서도, 신돈의 진정한 목적이 거기에 있지 않다고 본 것이다. 그러한 평가는 물론 지나치게 가혹한 것으로 보인다. 집권 초 신돈은 진심으로 개혁의지를 가지고 있었다고 생각되기 때문이다.

시간이 지나면서 신돈은 점차 곤경에 빠졌다. 먼저 신돈은 자신의 큰 포부와는 달리, 이를 실현하기 위해 갖추어야 할 조건과 자질을 결여하고 있었다. 마침내 정치가 생각만큼 용이하지 않다는 사실을 깨달았을 때, 그는 공민왕이 자신의 포로가 된 것이 아니라, 반대로 자신이 공민왕의 포로가 되었음을 알게 되었다. 그는 당대의 저명한 정치가와 지식인들로부터 거의 인정받지 못했다. 그에게 충성을 약속한 많은 정치가는 재능도 명망도 없는 사람들이었다. 따라서 그는 왕의 신임을 제외한 어떠한 요소로부터도 자신의 진정한 안전을 기대할 수 없게 되었다.

집권 초 신돈은 왕이 자신의 포로임을 과시하는 행동을 취했다. 이미 정권을 담당할 때부터 왕의 서약을 받은 다음에야 수락할 정도였다. 영도첨의에 제배(除拜)되었을 때도 당대의 관습과 달리 반 달 이상 대궐에 나가 사례하지 않았다. 그는 왕과 동등하거나 그 이상임을 과시했다. 왕이 선왕의 능들을 배알할 때, 백관은 모두 왕을 따라 절했다. 하지만 신돈은 홀로 서서 절하지 않았다. 왕의 선조들과 동격이거나 그 이상임을 암시한 것이다. 하루는 왕이 걸어서 신돈의 집에 행차하였는데, 신돈은 왕과 더불어 나란히 걸터앉았다. “동배(同輩)와 같이하여 다시 군신의 예가 없었다. 출입 때마다 말 탄 시종이 100여 명이나 되어 의위(儀衛)가 왕의 행차에 견주었다.”


▎서울 마포에는 고려 31대 왕인 공민왕을 기리는 사당이 있다. 서울에서 사당을 지어 기리는 유일한 고려왕이다. 서울 마포구청이 주최한 공민왕사당 제례 모습. / 사진·중앙포토
하지만 시간이 지나면서 그는 점점 더 위축되어, 암살이나 잠재적인 정적에 대해 극도로 민감해졌다. 공민왕 17년 9월, 그는 유숙을 죽였다. 왕이 유숙을 잊지 못하자 신돈은 그가 다시 기용될 것을 두려워했다. 그는 유숙이 덕흥군과 제휴할지도 모른다는 점을 들어 공민왕을 설득했다. 신돈은 공민왕의 두려움을 이용했다. 이 사건은 신돈이 공민왕의 정치적인 결함을 잘 이해하고 있었음을 보여준다. 혹은 반역의 가능성조차 인정할 수 없는 권력의 속성을 잘 알고 있었다고 말할 수 있다.

정치에서 별다른 진전을 거두지 못하자, 신돈은 왕의 신임을 확보하기 위해 그의 심리적 약점을 이용하고자 했다. 이 당시 공민왕은 두 가지 일에 몰두했는데, 하나는 공주를 추모하기 위한 대대적인 토목공사였고, 다른 하나는 후계자를 얻기 위한 불공이었다. 쉬지 않고 계속되는 토목공사로 인해 국가 재정이 고갈되고 많은 백성이 죽었다. 그러나 신돈은 이에 대해 일체 언급하지 않았다. 공민왕과 신돈 사이에는 암묵적인 불문율이 있었다고 볼 수 있다. 어떤 의미에서 신돈의 집권은 사실 공민왕의 방종을 전제로 하고 있었다.

그러나 공민왕 19년 6월, 노국공주의 영전 공사 중 사고로 26명이 압사하자, 명덕태후가 직접 공사중지를 요청했다. 문제의 정도가 너무 심각해져 더 이상 좌시할 수 없게 되었던 것이다. 그리하여 신돈과 이춘부도 공사 중지를 요청했다. 이러한 건의는 단 한 차례 있었을 뿐이다. 그러나 이는 신돈을 몰락케 한 직접적인 원인이 된 듯하다.

공주에 대한 추모만큼 공민왕이 노심초사한 것은 후계자 문제였다. 모든 정치체제가 직면하는 가장 핵심적 과제 중 하나는 안정적인 권력이양 체계와 과정을 정착시키는 것이다. 후사에 대한 근심은 공민왕 초년부터 그의 죽음에 이르기까지 계속되었다. 더구나 공주가 만삭의 몸으로 죽었기 때문에 그 안타까움은 이루 말할 수 없었을 것이다. 신돈은 이런 절박한 상황을 이용했다. “왕이 후계자가 없음을 근심하여 얼굴색에 나타내며 혹은 눈물을 흘리기에 이르니, 신돈이 왕을 위로하여 말하기를 ‘문수회를 열면 군신이 화협하고 부처와 하늘이 기뻐하여, 반드시 아들이 탄생할 것입니다’라고 하였다. 왕이 이를 청종하여 무릇 7일 동안 궁중에 회를 설하고, 흔연히 아들 나을 희망을 가졌다.”

공민왕 14년부터 매년 개최된 문수회는 그 규모가 거창했다. 공민왕 16년의 문수회는 행사 관련자만 8000명으로 국력을 총동원한 사업이었다. 이런 노력이 아무런 효과를 보지 못하자, 그는 뒷날 중대한 문제를 야기할 방안을 생각해냈다. 뒷날 조선의 공식적 입장은 우왕이 된 모니노(우왕의 어릴 적이름)가 신돈의 아들이라고 주장하고 있지만, 진실을 알기는 불가능하다. 다만 신돈은 모니노를 정치적으로 이용하려 했다. 공민왕 16년 이후 그를 보기 위해 공민왕은 신돈의 집에 자주 행차했다. 신돈은 처형에 앞서 “아지(모니노)를 보아서 나를 살려달라”고 애원했는데, 이는 그가 모니노를 정치적 안전판으로 생각했다는 점을 시사한다.

고집 센 권력자가 된 공민왕


▎고려 개성의 수창궁 용머리 조각. 고려의 궁궐은 현재 만월대 축대만 남아 있다. / 사진·중앙포토
한편 이 시기에 공민왕은 정치로부터 퇴장하여 거의 사인으로 돌아갔다. 그가 이 시기에 품었던 가장 주요한 감정은 고립감과 슬픔, 무력감이었던 것으로 보인다. 그는 공주를 추모하기 위한 토목공사와 후사를 얻기 위한 불공, 그리고 고통을 잊기 위한 유희로 세월을 보냈다. 자신의 육체적 쾌락에 엄격하고 가장 나쁜 상황에서도 민생을 깊이 배려했던 그는, 그 반대로 자신에게 관대하고 타인에게 엄격해졌으며, 토목공사에 열중하여 백성의 고통에 아랑곳하지 않았고 누구의 충고도 들으려 하지 않았다. 또한 공민왕 6년 이래의 정신적 방황에서 공공연히 샤머니즘으로 전환했다. 결국 그는 정치가로서뿐만 아니라 한 인간으로서도 가장 나쁜 상태에 빠졌다. 한때 현명하고 진지했던 그는 또 하나의 어리석고 고집 센 권력자가 되었다. 어머니인 명덕태후조차 그를 설득할 수 없었다.

민생을 어지럽히고 국가를 위태롭게 한 첫 번째 사항은 거창한 토목공사였다. 이것은 너무 심각한 재정부족과 인명피해를 초래했다. 공사하는 백성들이 나무와 돌을 운반하면서 외치는 소리가 “천지를 움직여 주야로 끊어지지 않았으며, 죽은 소가 길에 서로 잇닿았다”고 한다. 공사로 인해 군정(軍政)이 경시되고 군대는 왜구의 방어에 어려움을 겪었다. 당연히 백성의 원망이 크게 일어났다. 당시 대륙의 정세는 급변하여, 원의 수도가 함락되고 명이 건국되었다. 북변의 안전을 기약할 수 없던 때였다. 공민왕 19년 영전 관음전(觀音殿)의 대들보를 올리다 26명의 인부가 압사했는데, 사지가 동강나서 차마 볼 수가 없었다고 한다. 이 시점에 이르러 토목공사의 폐해는 더 이상 참을 수 없는 정도에 이르렀다.

그러나 더욱 심각한 문제는 아무도 왕에게 진실을 말하려고 하지 않았다는 점이었다. 신돈도 이러한 상황에 일조했다. 윤소종의 상소에 따르면, 신돈의 집권기 6년 동안에 “큰 홍수와 가뭄이 발생하여, 100만의 생령이 끓는 물 속에 있는 것 같았으나, 신돈의 위세를 두려워하여 감히 이것을 입에 내지 못하고, 머리를 숙이고 손을 끼고 천지에 호소했다”고 한다. 모후 명덕태후만이 거듭 공민왕을 질책했으나, 공민왕은 오히려 자식의 허물을 들어낸다고 하여 명덕태후조차 멀리했다.


▎신돈의 집사 역할을 한 김란의 묘.(충남 금산 소재) 김란의 부인은 공민왕의 측근으로 신돈이 발탁한 임군보의 딸이다. 신돈이 처형될 때 같이 죽임을 당했다. / 사진제공·김영수
영전의 관음전 대들보를 올리다 26인이 압사당하는 사건이 발생하자 명덕태후가 영전공사의 중지를 요청했으나 왕은 이를 거부했다. 마침내 신돈과 이춘부가 영전공사의 중지를 청했다. 이는 위험천만한 일이었다. 그러나 이 무렵 사태는 너무 심각했던 듯하다. 왕은 이를 받아들여 마암공사를 중단하고, 왕륜사의 영전을 다시 수리토록 했다. 8월에는 수창궁을 복원토록 했으며, 9월에는 영전의 규모가 좁다고 하여 헐고 다시 짓도록 했다. 10월에는 마침내 왕의 친정(親政)을 선언했다. 이는 신돈으로부터 권력을 회수하겠다는 뜻이었다. 신돈의 공사중지 건의와 왕의 친정 선포 사이에는 깊은 관련이 있는 것으로 보인다. 왕은 신돈의 정치를 비난했지만, 그것을 진정한 이유로 보기는 힘들다. 그 역시 신돈의 정치보다 나을 것이 없었기 때문이다.

공민왕 18년, 신돈과 공민왕의 관계에 약간의 이상이 왔다. 신돈이 사심관(事審官) 제도를 부활코자 했으나, 공민왕이 이를 거절한 것이다. 공민왕 18년 7월 신돈은 이춘부에게 충주 천도를 건의토록 했다. 이것도 사심관 제도의 부활과 같은 의도를 가지고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그는 개성을 떠나고자 했던 것이다. 이는 물론 공민왕 18년 3월 북방정세의 변동으로 천도를 고려해야 했던 정치정세와도 부합했다. 그런데 뜻밖에도 판사천감사 진영서 등이 상서하여, “근래에 태백이 낮에 나타나고 또 흉년이 드니, 정(靜)하면 길하고 동(動)하면 흉할 것”이라고 말했다. 이 말을 듣자 공민왕은 크게 기뻐하고, “어째서 늦게 아뢰느냐”고 말했다. 또한 이튿날 신하들에게 “국사는 대신이 불가불 참여하여 들어야 할 것”이라고 말했다. 공민왕 18년 들어 신돈이 추진한 중요한 두 개의 시책은 모두 무산됐다. 더구나 국사에는 대신이 참여해야 한다는 말은 의미심장했다.

공민왕 친정… 신돈의 반역


▎혜근(惠勤)의 진영. 호는 나옹. 고려 후기 태고 보우와 더불어 최고의 고승이다. 원나라 지공대사의 법을 받아 태조의 스승 무학(無學)에게 법을 전하였다. / 사진제공·김영수
공민왕 19년 9월에는 혜근(惠勤)에게 승려의 공부선(功夫選)을 시험케 했다. 신돈의 지위 중 하나는 제조승록사사(提調僧錄司事)로서, 승려를 관장하는 총책임자였다. 이는 즉 신돈의 승정권(僧政權)을 박탈하는 것이었다. 10월 24일, 왕은 시중 이춘부에게 다음과 같이 말했다. “옛 선왕은 모두 친히 정치를 하였으니, 지금으로부터는 대간, 육부로 하여금 매일 본관에 출근하여 각기 계품할 일을 헤아리도록 하라.” 마침내 친정이 선포된 것이다. 왕은 형인추정도감의 기능이 유명 무실해졌다고 지적했다. 신돈의 개혁이 사실상 실패했다고 본 것이다. 따라서 왕이 직접 나서기로 작정했음을 밝혔다. 공민왕 19년 12월 11일, 왕은 6년 만에 처음으로 정치를 친히 주재했다. “왕이 처음으로 보평청에 거둥하여 일을 보았는데, 사관 2인이 좌우에 모시고, 사헌부와 이부(理部)가 모두 노비의 일을 상주하니, 왕이 이르기를 ‘헌사는 백관을 규탄하고 이부는 오로지 형옥의 일을 맡았거늘, 어찌 노비의 일을 아뢰느냐. 지금부터는 각기 그 직분만 닦고 타관(他官)의 일은 침범하지 말라’하고, 또 간의대부 오중륙에게 이르기를 ‘민간의 이로움과 폐단, 과인의 득실을 다 숨기지 말고 진술하라’고 하였다.”

이제 왕의 친정은 돌이킬 수 없는 현실이 되었다. 신돈은 사직하지는 않았지만, 이러한 변화를 불가피한 일로 받아들였다. 왕의 친정이 있었던 이튿날 신돈은 육아일 중 초 2일과 16일만 친정할 것을 청했고, 왕은 이를 수락했다. 일종의 타협책이었던 셈이다. 그 뒤 신돈은 칭병하고 칩거했던 듯하다. 12월 23일(戊寅), 왕은 문병을 위해 신돈의 집에 행차했다. 아직 아무것도 바뀐 것은 없었으나, 신돈의 권력은 실질적으로 유명무실해졌다. 공민왕 20년 5월 23일, 유일하게 신돈을 공개 비판했던 이존오가 31세 나이로 세상을 떠났다. 그는 죽기 전 “신돈이 죽어야 내가 이제 죽을 것이다”라고 말했다. 7월 6일 (丙辰)에 신돈의 역모가 발각되어 수원에 유배되었다. <고려사> 편찬자에 의하면, “왕의 성품이 시기가 많고 잔인하여, 비록 복심의 대신이라도 그 권세가 성하면 반드시 시기하여 이를 베었다. 신돈이 스스로 너무 권세가 강함을 알고 왕이 이를 꺼릴까 두려워하여 비밀히 반역을 모의했다”고 한다. 신돈이 출입할 때면 시중 이하가 옹위하여 도로가 막힐 정도였고, 조정에는 신돈의 심복들이 가득 찼기 때문에 왕은 이를 불안하게 여겼다고 한다. 7월 11일, 신돈은 처형됐다.

신돈의 개혁정치에서 최대의 문제점은 개혁과 무관하거나 반개혁적인 인물들이 개혁을 담당했다는 점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신돈은 개혁정책을 추진했다. 그의 강력한 의지와 권력에 의해 개혁 정책은 단기적으로 큰 효과를 얻었다. 그러나 그것은 단순한 대증요법 이상의 의미를 갖지 못했다. 그는 문제에 대해 심도 있는 인식도 가지고 있지 못했거니와, 개인의 힘에 의한 개혁 수행이란 원천적으로 불가능한 것이었다. 요컨대 이런 상황 하에서 신돈이 어떠한 개혁의지를 가지고 있었다 해도, 그것은 정치역학상 일종의 해프닝 이상의 의미를 가질 수 없었다. 신돈이 그 점을 인식하지 못했다면, 그는 정치적으로 순진한 인물이었다고 볼 수 있다. 공민왕은 그 점을 알았을 것이다. 그러나 그는 신돈에게 정치를 완전히 위임하고, 정치의 후면에 퇴장하여 자신의 사적인 쾌락이나 슬픔에 탐닉해 있었다. 그가 진심으로 개혁을 원했다면, 그는 전통적 정치세력을 설득하든지 아니면 제거한 다음 신돈에게 정치를 위임했어야 했다. 신돈이 처한 상황에서라면 개혁의 실패는 명약관화한 것이었고, 신돈의 불행도 예정된 것이었다. 이런 의미에서 공민왕의 정치적 의도는 의심스러운 것이다.

신돈의 개혁 실패는 예정돼 있었다


▎관세음보살을 모신 불전인 관음전(觀音殿). 자비로 중생의 괴로움을 구제하고 왕생의 길로 인도하는 불교의 보살이다. / 사진제공·김영수
요컨대 신돈에 대한 정사의 기록이 편향적이라는 점과, 개혁에 대한 신돈의 선의를 인정한다고 해도, 그가 선택한 정치세력의 성격상 신돈의 개혁은 거의 불가능했으며, 또한 정치에 대한 신돈의 기대는 너무 소박한 것에 머물렀다고 볼 수 있다. 이 때문에 그의 개인적 운명 역시 비극으로 끝났으며, 그의 개혁 시도도 일과성에 그치고 말았다. 따라서 신돈의 개혁정치에 대한 평가는 그의 개혁의지뿐만 아니라, 그것이 정치현실에서 실제로 어떠한 의미를 갖고 있는지에 의해 이루어져야 할 것이다. 정치는 윤리와 같은 주관적 세계를 완전히 벗어나는 것은 아니지만, 동시에 결과라는 객관적 책임으로부터 자유롭지 않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신돈의 개혁정치는 한 정치가의 개인적인 도덕성과 개혁의지가 아무리 훌륭하다 해도, 현실에 대한 심도 있는 이해가 결여되어 있고 그 개혁을 수행할 정치집단을 구비하고 있지 못할 경우, 그 정치가 어떤 운명을 맞이하게 되는가에 대한 하나의 역사적 사례라고 할 수 있다. 이와 같은 문제는 최종적으로 이성계의 군사력과 성리학자들의 정치적 비전이 결합됨에 의해 해결될 수 있었다.

신돈의 정치는 그 자체만으로는 이해하기가 어렵다. 공민왕의 정치적 행적과 연관해서 이해되어야 한다. 결국 신돈의 개혁정치의 이면에는 공민왕의 정치적 좌절과 방종, 그리고 공민왕의 정치적 타락에 대한 침묵에 놓여 있는 것이다. 신돈과 공민왕 사이에는 일종의 정치적 위선이 개재되어 있었다.

그러나 신돈의 정치는 더 넓은 의미로도 이해될 수 있다. 그것은 고려적 대안의 종말이다. 공민왕은 고려가 배출한 가장 유능하고 이상적인 왕 중의 하나였다. 그는 이상주의적이었고 개혁지향적이었으며, 정치적으로 탁월했을 뿐만 아니라 최선의 노력을 기울였다. 그러나 한번 좌절의 늪에 빠지자, 끝내 회복하지 못했다. 고려의 마지막 희망이었던 그가 끝내 고려를 개선하지 못했던 것이다. 확실한 것은 시대 상황이 좋지 않았다. 그는 매우 불운한 정치가였다. 공민왕 5년(1356) 이후 고려를 개선시킬 최선의 기회가 도래했을 때, 대규모의 전쟁과 기근이 한꺼번에 고려를 엄습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 불행을 제외한다면, 공민왕에게는 불운의 뿌리를 이해할 수 있을 정도의 깊이가 결여되어 있었다. 그는 김속명이나 이제현, 윤택, 백문보 등이 암시하고 있었던 새로운 정치적 비전을 통속적인 의미 이상으로 이해하지 못했던 것으로 보인다. 그것은 공민왕 개인만이 아니라, 근본적으로는 고려의 정치와 정신세계가 지닌 혼란과 피상성에 기인했다. 그의 이상과 개혁의 비전은 고려 초의 왕건으로 돌아가는 것에 머물렀다. 그러나 이제현이나 백문보 등이 암시했던 바는 30년 내에 새로운 문명과 정치의 비전으로 성장하여 조선 건국의 뿌리를 이루었다.

그런 의미에서 불운과 지성의 결여는 그의 정치적 실패의 뿌리를 이루고 있다. 공민왕 5년 이후 공민왕의 정신적, 정치적 방황은 그 점을 여실히 보여주고 있다. 신돈의 대리정치는 그 방황의 종결점에 위치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지성은 언제나 불가결한 정치적 자질이라고는 할 수 없지만, 역사적 전환의 시대에는 반드시 필요한 것이다.

한말 흥선대원군에 대해 박은식은 개혁의지와 재능, 권력, 용기, 나아가 시운까지 갖추었지만, 애석하게도 배움이 부족했으며, 그것을 한민족의 불운으로 지적했다. 흥선대원군 역시 새로운 문명으로 나아가야 할 시대에 조선건국의 시대로 돌아가고자 했던 것이다. 이 경우 뛰어난 정치적 역량은 오히려 시대착오적일 가능성이 있다. 그런 의미에서 왕조로서가 아니라 문명으로서의 고려는 더 이상의 대안이 아니었다. 즉 이 시대는 본질적으로 고려가 종말을 고한 시기였다.

김영수 - 1987년 성균관대 정외과를 졸업하고, 1997년 서울대 정치학과 대학원에서 정치학 박사학위를 받았다. 동경대 법학부 객원연구원을 거쳐, 2008년부터 영남대 정외과 교수로 재직하며 한국정치사상사를 가르치고 있다. 노작 <건국의 정치>는 드라마 <정도전>의 토대가 된 연구서로 제32회 월봉저작상, 2006년 한국정치학회 학술상을 수상했다.

201702호 (2017.01.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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