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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명호의 근대 동북아 삼국지(2)] 43세 흥선대원군, 조선의 섭정이 되다 

신정왕후 등에 업고 임금의 아버지로 

신명호 부경대 사학과 교수
북경 함락 이후 양무운동에 힘쓴 청(淸)나라, 조선에만은 조공 지속을 요구… 내적으로는 안동 김씨의 위세와 민란, 외적으로는 서구열강의 위협에 직면

▎철종의 유언에 따라 신정왕후 조씨가 흥선군의 셋째 아들 이재황을 후계자로 지명함에 따라 이하응(1820∼98)은 흥선대원군이 됐다. KBS 사극 <명성황후>에서 흥선대원군 역을 맡은 배우 유동근(왼쪽 사진)과 서울 종로구 운니동에 있는 흥선대원군의 사저인 운현궁. / 사진·중앙포토
북경을 함락한 영국과 프랑스는 양이(洋夷)라는 중국 용어에 큰 불만을 드러냈다. ‘서양 오랑캐’란 의미의 양이에는 서양인에 대한 중국인의 멸시가 가득 차 있었다. 양이라는 말을 들을 때마다 영국인과 프랑스인은 자존심이 상했고, 북경 함락을 계기로 그 자존심이 폭발했다.

그런데 중국인들이 주변 민족을 모두 오랑캐로 여기는 버릇은 오래된 오만이자 편견이었다. 중국인들은 먼 옛날부터 자신들만이 문명인이라 생각하고 주변 모든 민족을 오랑캐로 멸시했다. 그 결과 중국인들은 스스로를 중화(中華) 또는 화하(華夏)라 부른 반면 주변 민족들을 동이·서융·남만·북적이라고 낮춰 불렀는데 이런 우월감을 화이(華夷)사상이라고 했다.

화이사상에 따라 중국인들은 주변 오랑캐들을 교화시키는 일 역시 황제의 책무 중 하나라고 생각했다. 이런 관념에서 이른바 조공책봉체제라고 하는 중국 중심의 외교질서가 수립됐다. 세계 유일의 문명국 통치자인 중국 황제가 주변국 오랑캐의 통치자를 교화하기 위한 외교장치가 책봉이었다. 반면 그 책봉에 감사해 주변국 오랑캐의 통치자가 중국 황제에게 예물을 바치는 외교제도가 조공이었다.

책봉과 조공은 부정기적인 사신을 통해 이뤄졌기에 상대국 수도에 상주(常住)하는 외교관이 필요없었다. 무역도 자유무역이 아니라 사신이 오고 갈 때 이뤄지는 공무역만 인정됐다. 요컨대 화이사상의 외교적 표현이 조공·책봉체제였고, 대외 무역적 표현이 공무역이었으며, 언어적 표현은 오랑캐라고 하는 말이었다. 조공·책봉체제를 가능케 한 배경은 중국의 압도적인 유교문명과 군사력에 더해 동아시아의 자급자족적 농업문명이었다.

이런 조공·책봉체제가 서양인들에게도 그대로 적용된 결과 양이라는 용어가 나타났다. 중국인들은 양이를 보다 세분해 영국은 영이(英夷), 프랑스는 법이(法夷), 러시아는 아이(俄夷) 등으로 불렀다. 이런 용어는 민간인들 사이에서는 물론 정부의 공식 문서에서도 쓰였다. 양이라는 용어가 쓰이는 동안 영국·프랑스 등 서양 각국 역시 조공·책봉체제 속에 편입돼 있었다.

하지만 아편전쟁 이래로 영국과 프랑스는 양이라는 용어는 물론 조공·책봉체제 자체를 부정했다. 그들은 사신이 오갈 때만 허용되는 공무역이 아니라 상시적인 자유무역을 요구했으며, 수직적인 조공·책봉관계가 아니라 대등한 외교관계를 요구했다. 이는 궁극적으로 화이사상으로 대표되는 중국인들의 자존심과 우월감이 파괴돼야 가능했다.

비록 아편전쟁에서 패했지만 중국인들의 자존심과 우월감은 파괴되지 않았다. 그들 나름대로 변명의 여지가 있었다. 아편전쟁은 북경에서 보면 변경 중의 변경인 광동성에서 벌어진 전쟁에 지나지 않았다. 중국인들은 아편전쟁의 패배를 중국의 패배로 인정하지 않고 광동 지방의 패배로 평가절하했다. 자존심과 우월감을 지키기 위해서였다.

그러나 북경 함락 이후에는 이런 변명이 더 이상 통하지 않았다. 중국이 세계 유일의 문명국이자 세계 최강국이란 주장은 더 이상 설득력이 없었다. 냉정히 볼 때 중국은 영국이나 프랑스 등 서구열강에 비해 후진국이었다. 그 사실을 인정하기 위해서는 화이사상과 함께 양이라는 용어를 버려야 했다.

타파 대상으로 전락해버린 화이사상


▎흥선대원군이 1882년 임오군란 당시 청나라 천진(天津)으로 유배됐을 때 찍은 것으로 추정되는 사진. / 사진·중앙포토
북경 함락 이후 청나라의 후진성을 그 누구보다 절절하게 깨달은 사람은 공친왕이었다. 그는 영국군과 프랑스군의 북경 철수를 협상하면서 청나라의 현실을 뼈저리게 깨달았다. 청은 오만과 편견으로 가득 찬 후진 제국에 지나지 않았다. 이런 현실을 타파하기 위해서는 하루속히 화이사상이라고 하는 허위관념을 타파하는 동시에 서구열강의 선진문명을 수용할 수 있는 제도적 대안을 마련해야 했다.

공친왕은 영국군과 프랑스군의 북경 철수를 이끌어내기 위해 막대한 대가를 치러야 했다. 설상가상으로 청나라의 약세를 틈타 러시아와 미국 등 다른 서구열강도 영국·프랑스와 동일한 이권을 요구했고, 공친왕은 거절할 수 없었다. 특히 러시아는 청나라와 영국·프랑스 사이의 회담을 주선한다는 명분으로 연해주를 요구했다.

곤경에서 벗어나기 위해 공친왕은 러시아의 요구를 수용할 수밖에 없었다. 그 결과 1860년 9월 11일 청나라와 영국 사이에 ‘중·영 북경조약’, 9월 12일 청나라와 프랑스 사이에 ‘중·프 북경조약’이 체결됐다. 그 결과 9월 26일 영국과 프랑스군이 북경에서 철수했다. 이어서 10월 2일에는 청나라와 러시아 사이에 전문 15조의 ‘중·러 북경조약’이 체결됐다.

북경조약은 서구열강이 청나라에서 무엇을 빼앗아가려 하는지 적나라하게 드러냈다. 영국과 프랑스가 요구하는 자유무역은 궁극적으로 청나라의 돈이 목적이었다. 반면 연해주를 요구한 러시아는 청나라의 돈뿐만 아니라 영토 자체도 목적으로 했다. 청나라와 러시아는 세계에서 가장 긴 국경선을 마주했기에 러시아가 또 어느 곳의 영토를 내놓으라 요구할지 알 수 없었다. 북경조약 이후 청나라의 돈과 영토는 서구 열강에 거의 무방비 상태로 노출된 셈이었고, 그래서 그 돈과 영토를 지켜내기 위해서는 경제력과 국방력을 키우는 정책 즉 부국강병책이 절실했다.

1860년 12월 1일 공친왕은 함풍제에게 ‘통주양무전국 작의장정육조(通籌洋務全局酌擬章程六條)’라는 건의서를 올렸다. 이 건의서는 ‘서양에 관련된 업무를 총괄하기 위해 건의하는 6개항의 안건’이라는 뜻인데 이 중에서 ‘양무(洋務)’라고 하는 용어가 중요했다. ‘양무’는 서양에 관련된 업무라는 뜻도 있지만 서양을 힘써 배워야 한다는 뜻도 함축돼 있었다.

그동안 청나라 사람들은 서양을 ‘양이’라고 멸시하며 배울 것이 없다고 생각했었다. 하지만 공친왕은 양이라는 용어 대신 양무라는 용어를 써서 서양을 멸시의 대상이 아니라 배움의 대상으로 바꿔다.

공친왕은 북경조약을 맺어 나가면서 청나라의 후진성에 대한 반성과 더불어 서구열강에 관련된 문제를 총괄할 기구가 절실하다고 판단해 이런 건의서를 올렸다. 이 건의서는 공친왕과 계량·문상 등의 연명(聯名)으로 올려졌다. 계량은 공친왕의 장인이었고, 문상은 만주족 출신의 지략가로 통했는데 모두 공친왕의 측근이었다. 그러므로 이 건의서는 누란의 위기에 처한 청나라가 어떻게 서구열강의 위협에 대처하며 부국강병을 추진할 것인지에 대한 공친왕과 측근들의 종합 의견이라고 할 수 있다.

“그 옛날 제갈량처럼 하소서”


▎흥선대원군의 셋째 아들로 조선의 국왕에 오른 고종.
공친왕은 건의서에서 당시 청나라의 형세가 옛날 삼국시대와 비슷하다고 하면서 제갈량의 계책을 따라야 한다고 제안했다. 중국이 조조·유비·손권으로 삼분됐던 시대에 절대적인 강자는 조조였고, 유비와 손권은 적대적인 관계였다. 이런 상황에서 유비와 손권이 계속 적대적으로 싸우다가는 조조가 어부지리를 취할 것이 분명했다. 이에 제갈량은 손권과의 적대감을 접고 오히려 화친함으로써 조조와 대결하고자 했다. 물론 속셈은 우선 손권과 함을 합쳐 조조를 제압한 후 나중에 손권을 제압한다는 것이었다.

공친왕이 당시 상황을 삼국시대와 비슷하다고 한 것은 그때 청나라가 태평천국군과 서구열강 양쪽으로부터 위협을 받았기에 나온 말이었다. 여기에서 공친왕은 태평천국군을 조조에 비유하고, 서구열강을 손권에 비유했다. 즉 당시 상황에서 청나라에 최대 위협이 되는 적은 바로 태평천국군이므로 우선 이들을 제압하기 위해 서구열강과 화친하고, 만약 태평천국군이 제압되면 상황을 봐 서구열강을 제압하자는 뜻이었다. 그러기 위해서는 서구열강에 대한 당장의 적대감을 접고 화친해야 했고, 그것을 실현하기 위해서는 최소한 6가지 안건이 필요하다고 판단했던 것이다.

공친왕이 제시한 첫째 안건은 ‘총리각국사무아문(總理各國事務衙門)’ 설립이었다. 이는 ‘서양 각국에 관련된 사무를 총괄하는 아문’이란 뜻인데 줄여서 총리아문 또는 총서(總署)라고도 했다. 청나라는 북경함락 이전까지 조공책봉체제에 입각해 예부에서 서구열강과의 외교문제를 관장했다. 하지만 오만과 편견으로 가득 찬 예부의 관리들은 서구열강의 전문 외교관들에게 상대가 되지 않았다. 공친왕은 서구열강의 사정에 정통한 전문가들로 서구열강을 상대해야 하겠다는 생각에서 총서 설립을 건의했던 것이다.

둘째부터 넷째 안건은 개항장에 관련된 것이며, 다섯째 안건은 외국어 전문가 양성에 관한 것이고, 여섯째 안건은 개항장에서 유통되는 외국신문 수집에 관한 것이었다. 요컨대 공친왕은 서구열강과 화친하기 위해서는 서구열강의 언어와 사정을 잘 알아야 하고, 또 이들과 상대할 수 있는 전문가와 전문조직이 필요하다고 판단했던 것이다.

즉 공친왕은 위기에 처한 청나라가 살기 위해서는 자존심과 우월감을 버리고 서구열강을 배워야 한다고 주장했던 것인데 이런 주장이 압축된 용어가 바로 양무였다. 이런 양무 사상에 입각해 중국에서는 ‘서양 배우기 운동’ 즉 ‘양무운동’이 전개됐다.

총리각국사무아문은 1860년 연말쯤 북경에 설립됐다. 이곳은 공친왕의 권력기반이기도 했고 양무운동의 근거지이기도 했다. 1861년 10월에 공친왕이 의정왕에 취임하고 뒤이어 동치제가 황제에 즉위하면서 양무운동은 본격화됐다. 공친왕은 총리아문에 외교를 담당하는 4개의 부서와 해양방어를 담당하는 1개의 부서를 설치했다. 처음의 외교 담당부서는 북경조약과 직간접으로 관계있는 4개국을 담당하는 부서들 즉 영국부·프랑스부·러시아부·미국부였다.

이후 서구열강과의 조약이 늘어나면서 영국부에는 오스트리아가, 프랑스부에는 네덜란드·스페인·브라질이 추가됐다. 또한 러시아부에는 일본이, 미국부에는 독일·페루·이탈리아·스웨덴·노르웨이·벨기에·덴마크·포르투갈이 추가됐다.

해양방어를 담당한 부서는 해방부(海防部)였다. 해방부는 제1차 아편전쟁과 제2차 아편전쟁 이후 서양열강에 개항한 항구 관련 업무를 맡았다. 제1차 아편전쟁 이후 체결된 남경 조약으로 청나라는 광주·하문·복주·영파·상해의 5개항을, 제2차 아편전쟁 이후 체결된 천진조약으로 천진·등주·우장 등 11개항을 개항했다.

자존심 채워줄 ‘희생양’으로 조선을 선택


▎흥선대원군의 유배지인 보정시(保定市) 흥화로(興華路)에 있는 청하도서 (淸河道署). / 사진·중앙포토
이처럼 개항장이 많기도 하고 또 넓기도 해 공친왕은 전국의 개항장을 북양과 남양의 두 개 구역으로 나누고 각각 북양대신과 남양대신으로 하여금 관할하게 했다. 북양대신은 산동성·직예성·요녕성에 걸쳐 있는 북양을 관장했고 남양대신은 강소성·절강성·복건성·광동성에 걸쳐 있는 남양을 관장했다. 특히 북양대신은 천진·등주·우장 3개항의 통상과 외교를 주로 관장했기에 3구 통상대신(三口通商大臣)이라고도 했으며, 남양대신은 광주·하문·복주·영파·상해 5개항의 통상과 외교를 관장해 5구 통상대신(五口通商大臣)이라고도 했다. 북양대신은 천진에, 남양대신은 상해에 주재했다. 북양대신과 남양대신은 지방의 개항장에 상주하는 외국 영사와 외국 상인, 선교사 등을 상대하는 일이 주요 업무였다.

공친왕은 총리아문을 통해 서구열강과의 외교·통상을 주도하면서 선진기술을 배우기 위해서도 노력했다. 공친왕은 북경에 경사동문관(京師同文館)이라는 외국어 학교를 설립해 서학 인재를 양성했으며, 중앙관료와 동문관 학생들을 유럽에 파견해 선진문물을 견학하게 하기도 했다.

그 당시 지방에서 태평천국군을 진압하던 증국번과 이홍장 역시 양무운동에 뛰어들었다. 증국번과 이홍장은 상해에 강남제조총국이라는 군수공장을 세웠다. 이곳에서는 서양식 총·포·선박 등을 생산했다. 이외에도 남경에 금릉제조국과 복주에 복주선정국 등이 세워져 서양식 무기가 생산됐다.

이렇게 동치제 즉위 후 양무운동은 공친왕과 증국번·이홍장 등의 주도로 중앙과 지방에서 활발하게 추진됐다. 양무운동이 추진되면서 상황은 공친왕의 구상대로 흘러갔다. 청나라는 서구열강과 화친함으로써 서구열강의 힘을 빌려 태평 천국군을 제압할 수 있었다. 내란이 종식되면서 청나라에는 평화와 안정이 찾아왔고 이런 평화와 안정은 ‘동치 중흥’이라고 칭송됐다. 당연히 ‘동치 중흥’의 주역은 공친왕이었다.

그런데 양무운동을 주도한 총리아문은 오직 서구열강만 상대했고, 기왕의 조공·책봉체제에 속한 나라들은 여전히 예부에서 관장했다. 양무운동을 주도하는 총리아문이 청나라의 미래 체제를 상징한다면 조공책봉체제를 관장하는 예부는 청나라의 과거 체제를 상징했다.

공친왕은 비록 양무운동을 주도했지만 과거의 체제를 모두 버리고자 하지는 않았다. 과거의 체제에는 중국인들의 자존심과 우월감이 담겨 있었기 때문이다. 그 자존심과 우월감을 모조리 짓밟는다면 양무운동이 제대로 추진될 수 없었다. 양무운동을 추진하던 중국인들의 마지막 남은 자존심을 채워주던 것이 바로 조공책봉체제였고, 그 중심에 조선이 있었다.

공친왕은 양무운동을 추진하면서 철저하게 조선을 외면했다. 예컨대 청나라와 러시아 사이에 체결된 북경조약은 조선과도 직결되는 문제였다. 연해주는 조선에서 연고권을 주장하는 지역이었기 때문이다. 뿐만 아니라 북경조약으로 조선은 두만강을 사이에 두고 러시아가 국경을 마주하게 됐으므로, ‘중·러 북경조약’의 경과와 내용을 알려주는 것이 당연했다.

하지만 공친왕은 그렇게 하지 않았다. 그 이유는 물론 양무운동의 성공적인 추진을 위해 중국인들의 자존심을 채워줄 희생양이 필요했고, 그 희생양으로 조선이 제격이었기 때문이다.

이런 상황에서 철종 치하의 조선은 관행대로 청나라 예부와만 외교연락을 주고받으면서 청나라가 여전히 건재하다고 믿었다. 그 믿음으로 청나라의 변화는 물론 동북아의 변화에도 둔감했다. 공친왕이 본격적으로 양무운동을 밀어붙이던 1862년(철종 13, 동치 1)에 조선에서는 후계 왕을 둘러싼 권력암투가 치열했다.

철종은 1862년에 겨우 32세였다. 하지만 건강이 좋지 않아 병석에 눕는 일이 잦았다. 게다가 더 큰 문제는 아들이 없다는 사실이었다. 만약 철종이 갑자기 세상을 뜬다면 후계 왕을 놓고 크나큰 분란이 일어날 것이 분명했다.

병약했던 32세의 철종과 후계 암투


▎충남 예산군 가야산 자락에 위치한 흥선 대원군의 부친인 남연군의 묘소. 1868년(고종 5) 독일의 상인 오페르트가 이곳을 도굴하려다가 발각됐고, 이 사건은 흥선대원군의 쇄국정책에 큰 영향을 미쳤다. / 사진·중앙포토
1862년 2월 6일 오전 철종은 심한 기침으로 괴로워했다. 이전에도 기침이 있기는 했지만 그렇게 심하지는 않았다. 그런데 이날 한낮이 되면서 참기 힘들 정도로 기침이 심해졌다. 철종은 병석에 누웠고 2일 후에는 시약청(施藥廳)이 설치됐다. 조선시대에 시약청이 설치됐다는 것은 국왕이 중병에 들었다는 공포였고, 조만간 국상이 날 수 있다는 암시이기도 했다. 설상가상 철종의 와병 중에 진주를 비롯한 전국에서 농민 항쟁이 일어났다. 전정·군역·환곡 등 이른바 3정의 문란이 극에 달해 이를 견디다 못한 농민들이 들고 일어난 것이었다.

열흘 가까이 병석에 누웠던 철종은 다시 원기를 회복했고 시약청도 철수했다. 하지만 철종의 건강은 여전히 좋지 않았다. 철종은 겨우 32세에 불과했기에 신하들은 양자를 들이자고 요구하기가 어려웠다. 만약 신하들이 철종에게 양자를 들여야 한다고 요구하면 그것은 철종의 죽음을 기정사실화하는 것과 같아 대역부도(大逆不道)로 몰릴 수 있었다. 그래서 신하들은 겉으로 철종의 만수무강을 외치면서도 속으로 후계 암투를 벌였다.

당시 상황에서 후계 왕 경쟁에 뛰어들 세력은 크게 보아 안동 김씨, 대비 그리고 종친의 세 갈래였다. 안동 김씨는 순조·헌종·철종 3대에 걸쳐 왕비를 배출한 외척가문으로서 중앙 권력을 장악했다. 안동 김씨의 영향력은 미성년 헌종의 즉위로 순조 왕비인 순원왕후 김씨가 수렴청정을 하면서 폭증했다. 이런 영향력은 철종 즉위 초에도 순원 대비의 수렴청정이 반복되면서 지속됐다. 철종 당시 안동 김씨의 핵심 인물은 순원 대비의 동생인 김좌근과 그의 아들 김병기 그리고 철종 왕비의 동생인 김병학이었다.

한편 철종 당시에는 두 명의 대비가 생존해 있었다. 첫째는 익종 왕비인 신정왕후 조씨, 둘째는 헌종의 두 번째 왕비인 효정왕후 홍씨였다. 여기에 만약 철종이 세상을 뜬다면 철인왕후 김씨 역시 대비가 되기에 졸지에 3명의 대비가 존재하게 됐다. 이 세 명의 대비 중에서 서열로 치면 신정왕후 조씨가 최고였다.


▎중국 4대 서원의 하나로 꼽히는 악록 서원(嶽麓書院)은 송(宋)나라 시대인 976년에 창건됐다. 이곳은 주자학과 양명학의 근거지일 뿐만 아니라 중화 사상을 키워온 요람으로 평가된다.
하지만 철종비인 철인왕후 김씨는 안동김씨라는 배경에 더해 현 왕의 왕비라는 강점이 있었다. 따라서 철종이 특별한 유언 없이 승하할 경우, 후계 왕에 대한 지명권은 최고 어른인 신정왕후 조씨가 행사할 수도 있고, 아니면 철종의 왕비인 철인왕후 김씨가 행사할 수도 있었다.

마지막으로 종친 중에서 후계 경쟁에 직접적으로 관련된 사람은 왕의 가능성이 있는 사람이었다. 조선시대에는 국왕이 아들 없이 세상을 떠나면 가까운 조카 항렬에서 후계자를 들이는 것이 관행이었다. 철종은 사도세자의 3대 후손이었으므로 일차적인 후계 대상자는 사도세자의 4대 후손이었다. 그 대상자에는 흥원군의 아들 이재원과 이재완, 흥인군의 아들 이재긍 그리고 흥선군의 아들 이재선, 이재면 그리고 이재황 이렇게 6명이 있었다. 1862년 당시 이재원은 32세, 이재완은 8세, 이재긍은 6세였고, 이재선은 21세, 이재면은 18세 마지막으로 이재황은 11세였다.

만약 철종 사후에 완전한 성년을 후계자로 정한다면 32세의 이재원과 21세의 이재선 그리고 18세의 이재면이 대상자가 될 수 있었다. 반대로 어린 미성년을 후계자로 정한다면 8세의 이재완, 6세의 이재긍 그리고 11세의 이재황이 대상자가 될 수 있었다.

그런데 당시 안동 김씨나 대비 중에서 성년 후계자를 원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안동 김씨는 계속 중앙권력을 장악하기 위해, 대비는 수렴청정을 위해 미성년 국왕을 원했다. 따라서 우선 대상자는 8세의 이재완, 6세의 이재긍 그리고 11세의 이재황으로 압축됐다.

이 중에서 이재완과 이재긍은 아직 10세도 되지 않아 너무 어린 것이 흠이었다. 이에 따라 당시 철종의 후계자로 가장 유력하게 떠오른 인물은 바로 11세의 이재황이었고, 그의 생부는 흥선군이었다.

“대보(大寶)를 대왕대비전에 바쳐라”


▎1896년 영국 방문 중 솔즈베리(왼쪽) 총리와 함께한 73세의 이홍장(1823~1901). 그는 청일전쟁 패배 이후 막강한 군사력을 가진 권력자가 아닌 외교 사절 자격으로 서구 열강을 순방했다. / 사진·중앙포토
문제는 비록 이재황이 유력후보이기는 하지만 결정권은 안동 김씨와 대비에게 있었기에 얼마든지 바꿀 수 있다는 사실이었다. 따라서 이재황의 생부인 흥선군은 안동 김씨는 물론 대비와도 결탁할 필요가 있었다.

이와 관련해 <매천야록>에는 이런 이야기가 전한다. 철종은 세상을 떠나기 전에 이재황에게 뜻을 뒀고, 이 사실을 안동 김씨 역시 알았다. 이에 철종 왕비의 동생인 김병학은 자신의 딸을 왕비로 들일 것을 흥선군과 언약했다고 한다. 즉 흥선군과 안동 김씨가 혼인동맹을 통해 결탁했다는 뜻이었다. 이런 결탁은 철종 사후에 왕비인 철인왕후 김씨가 후계 지명권을 행사하고 아울러 수렴청정도 시행한다는 묵계에서 나온 것인데 결국 흥선군과 안동 김씨가 최고 권력을 나눠 갖자는 결탁이었다.

그런데 철종 사후에 후계 지명권을 반드시 철인왕후 김씨가 행사한다는 보장이 없었다. 웃어른인 신정왕후 조씨가 있었기 때문이다. 만약 철종이 유언으로 신정왕후 조씨에게 후계 지명권을 맡긴다면 흥선군과 김병학의 혼인동맹은 무의미했다. 이에 흥선군은 신정왕후 조씨와도 결탁했다. 야사에 의하면 흥선군은 궁녀나 환관 등을 통해 신정왕후와 결탁했다고 한다. 요컨대 철종의 죽음을 앞두고 흥선군은 안동 김씨는 물론 대비 신정왕후와도 결탁함으로써 어떤 상황이든 자신의 아들 이재황을 왕으로 즉위시키려 했다는 것이다. 이런 이야기들은 흥선군의 집요한 권력욕과 더불어 노회한 정치술수를 알려주는 것이라 할 수 있다.

1863년(철종 14) 12월에 접어들면서 철종의 건강이 급속히 악화되었고 8일 새벽에는 인사불성이 됐다. 이날 묘시(오전 5~7시)에 철종은 인사불성 상태로 창덕궁 대조전으로 옮겨졌다. 신하들 앞에서 마지막 유언을 하기 위해서였다. 하지만 이미 유언을 할 기력도 없었기에 미리 남긴 유언장을 공개하게 됐다. 그 유언장에는 ‘대보(大寶)를 대왕대비전에 바치라’는 글이 있었다. 철종은 죽기 직전에 후계 지명권을 대왕대비인 신정왕후 조씨에게 맡겼던 것이다.

철종이 자신의 후계 지명권을 철인왕후 김씨에게 맡기지 않고 신정왕후 조씨에게 맡긴 이유는 외척에 대한 불만 때문일 듯하다. 비록 철종은 안동 김씨에 의해 왕위에 올랐지만 그들에 의해 이름만 왕인 존재로 전락했다. 철종 자신은 이런 왕으로 끝났지만 다음 왕은 안동 김씨의 손아귀에서 벗어난 명실상부한 왕이 되기를 기원하는 마음으로 신정왕후 조씨에게 후계 지명권을 맡겼을 것으로 여겨진다.

철종의 유언에 따라 신정왕후 조씨는 흥선군의 셋째 아들 이재황을 후계자로 지명했고 그가 훗날의 고종이었다. 이런 지명은 분명 사전에 흥선군과 신정왕후의 결탁 결과라 할 수 있다. 이 결탁에 따라 이재황은 왕이, 그의 생부인 흥선군은 대원군이 됐으며, 신정왕후는 수렴청정을 하게 됐다.

고종이 왕위에 올랐을 때 12세의 미성년이었던 반면 대왕대비 조씨는 56세였고 흥선대원군은 43세였다. 왕은 아직 어렸고 대비는 너무 노쇠했을 뿐만 아니라 정치 경험도 없었다. 자연스럽게 고종 즉위 후 중앙 권력은 흥선대원군에게 돌아갔다.

이렇게 섭정(攝政)이 된 흥선대원군 앞에는 우선 외척 안동 김씨가 있었지만 대내적으로 전국적인 민란 그리고 대외적으로 서구열강의 도전이 있었다. 이와 같은 안팎의 도전을 극복해야 하는 시대적 과제가 섭정 흥선대원군에게 맡겨졌다. 그 과제를 풀어갈 시간은 그리 길지 않았다. 12세의 고종이 성년이 될 때까지가 섭정 흥선대원군에게 허락된 시간이었다. (계속)

신명호 - 강원대학교 사학과를 졸업하고 한국학중앙연구원 한국학대학원에서 박사학위를 받았다. 현재 부경대 사학과 교수와 박물관장직을 맡고 있다. 조선시대사 전반에 걸쳐 다양한 주제의 대중적 역사서를 다수 집필했다. 저서로 <한국사를 읽는 12가지 코드> <고종과 메이지의 시대> 등이 있다.

201702호 (2017.01.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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