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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인문주의자의 초상] 이덕희, 아날로그 시대 마지막 글쟁이의 삶과 죽음 

거침없이 쓰고, 고독하게 스러지다 

한경심 자유기고가 icecreamhan@empal.com
실존주의의 우울과 세상에 대한 경멸, 예술과 이상을 향한 끝없는 추구… 언제든 자살하거나 요절할 것 같은 극도로 예민한 정신의 소유자

고(故) 이덕희(李德姬, 1937~2016) 선생은 우리나라에서 보기 드문 자유로운 ‘글쟁이’였다. 젊은 시절 잠깐 신문사에 몸담기도 했지만, 평생 자유기고가로 살다간 사람이었다. 소설부터 평론, 번역까지 문학과 예술 전반에 관한 그의 치열한 글쓰기는 후배 작가와 독자들에게 깊은 영향을 남겼다. 평생 독신으로 살며 커피와 술, 담배와 음악을 벗삼아 오로지 글 쓰는 것으로 생계를 지탱했다. 그 불꽃같았던 삶의 궤적을 살펴본다. <편집자>


▎1960년대 중반 서울대 법대 대학원 재학 무렵으로 추정되는 이덕희의 모습. 법학 공부와 함께 문학과 예술에 심취해 치열하게 독서했던 시절이다.
<구토>의 주인공 로깡땡의 구절을 한때 입에 달고 다녔다는 이덕희 선생은 끝내 자신의 집을 갖지 못했다. 물론 자유와 고독을 만끽했지만. 그리고 종잇장처럼 얇은 육체만을 남기고 떠났다. 자신이 좋아하는 시몬느 베이유와 2월 3일 같은 생일이라고 좋아했던 이 선생님은 역시 베이유처럼 더운 8월에 세상을 등졌다. 지독한 폭염이 계속되던 지난 여름이었다. 젊은 시절 폐병을 앓아 죽을 고비를 넘겼던 선생님은 평생 갖가지 병에 시달렸다. 그리고 그런 ‘아픈 몸’은 ‘청구서’라고 했다. 평생 낮과 밤을 바꿔 살고 술과 커피, 담배를 달고 살면서 건강을 돌보지 않았던 젊은 날이 뒤늦게 보내온 청구서라고.

이 선생님을 알고 지낸 30여 년 동안 선생님은 늘 몸이 신통찮았지만, 원고 마감은 어긴 적이 없었다. 평생 마감에 늦은 적은 아마 한 번 정도일 것이다. 그것도 갑작스레 눈이 잘 보이지 않게 된 경우였던 걸로 기억한다. 그의 말마따나 “아야, 아야, 하면서도 깡다구로 글을 쓰는 것”이었지만, 그의 글은 완벽한 것으로 정평이 나 있다. 그래서 담당기자든 출판사 편집자든 그의 글은 손대지 않는 것이 불문율이었다. 글에 대한 완벽함과 칼같이 지키는 마감으로 그는 작가라는 입지를 신성하게 만든 사람이었다. 물론 그렇게 되기까지 그가 얼마나 담당기자와 편집자들과 싸워왔는지 나는 잘 안다. 나라면 차라리 마르탱 뒤 갸르가 그랬던 것처럼 “고친다고 별로 좋아지지 않으니 손대지 마십시오”라고 했겠지만, 이 선생님은 화산처럼 폭발하는 성격이었다. 책을 낼 때면 제목부터 표지 디자인, 사진 배열까지 자신의 의도대로 해야 직성이 풀리는 사람이었다. 때로 강박적이라고 할 만큼 자신의 의지를 관철시키려 하다 보니 함께 일하는 사람은 늘 선생님을 무서워하고, 피곤하게 여기기도 했다. 그러나 그 덕택에 수많은 기자와 편집자, 북 디자이너들이 실력을 쌓게 된 것도 사실이다.

이 선생님이 이렇게까지 철저했던 이유는 뭘까. 타고난 성정이 본디 그랬을 테지만, 1982년 전혜린 평전을 잡지에 연재하는 동안 유족 측의 고소도 있었고, 다른 작가에게 글 내용은 물론 제목까지 도용당한 경험도 한몫했을 터이다. 사실 나는 그 시절의 이 선생님을 모른다. 1965년 요절한 전혜린이 세간의 관심을 끌던 1960년대와 1970년대, 이 선생님은 전혜린과 교유한 후배로, 그리고 서양 고전음악이 흐르는 동숭동 옛 서울대 앞 학림다방의 ‘붙박이’로 유명했다고 한다. 전혜린은 “덕희에게는 무서운 불편한 힘이 있다”고 말하곤 했다. 학림다방이 우여곡절을 거쳐 오늘날 다시 클래식음악이 흘러나오게 됐을 때 이 선생님은 다시 학림다방을 찾았지만 이미 붙박이로 지내기에는 건강이 허락하지 않았다.

사람을 불편하게 하는 무서운 힘


▎1960년대 서양 고전음악이 흐르는 동숭동 옛 서울대 앞 학림다방. 이덕희가 선배 철학도 전혜린과 자주 찾았던 곳이다.
그렇게 허약한 몸이었지만, 음악이나 무용 이야기를 할 때면 거침이 없었다. 특히나 당신이 숭배하는 지휘자 토스카니니나 무용가 니진스키 이야기를 할 때는 파란 불꽃이 타오르는 것처럼 보였다. 선생님 산문집 가운데 <내 눈의 빛을 꺼다오>가 있는데, 진짜로 눈빛이 형형했다. 그러다 자신이 좋아하는 음악이 들리면 금세 소년 같은 순진한 미소를 머금고 고개를 갸웃하며 손까지 부드럽게 내저으면서 흥얼대곤 했다. 그럴 때면 머리를 허리까지 기른, 얼굴이 하얗고 날씬해서 프랑스 인형 같았다는 선생님의 젊은 시절(선생님을 아는 어느 작가의 말)이 눈에 보이는 듯했다. 물론 많은 사람이 젊은 이덕희에게서 본 것은, 실존주의의 우울과 세상에 대한 경멸, 예술과 이상을 향한 끝없는 추구, 언제든 자살하거나 요절할 것 같은 극도로 예민한 정신이었다. 내가 본 것은 그런 면과 함께 늙고 서서히 쇠약해져가는 모습이었다.

먼 곳을 향했던 이덕희의 눈동자


▎학림다방의 소박하고 누추한 출입구. 간판의 글씨도 깨져 있는 모습이다. 학림다방은 당시 서울대 문리대생들에겐 마음의 고향 같은 곳이었다. / 사진제공·이덕희 씨 유족
전혜린이 죽었다는 소식을 들었을 때 선수를 빼앗긴 기분이었다고 고백한 선생님이니 자신이 여든까지 살 줄은 몰랐을 것이다. 돌아가시기 직전까지 새 글을 쓰고 책을 만들 구상으로 가득했지만, 컴퓨터는커녕 늘 자신의 이름이 박힌 전용 원고지에 굵은 색연필로 세로로 꾹꾹 눌러쓰던 힘을 잃은 지는 한참 되어 선생님의 장수는 진정한 축복이 되지는 못했다. 다행히 동생이 가까이 살고, 지인들은 선생님을 걱정했으나 선생님 주변은 점점 쓸쓸해져 갔다. 한창 활동하던 때는 인터뷰 요청도 많았지만 한 번도 응한 적이 없었고, 열성 팬들의 연락도 우편으로만 받을 정도였다. 스스로 고독과 자유를 택한 것이었다. 끝까지 소식을 주고받았던 이는 소설가 정찬(이 선생님을 모델로 <베니스에서 죽다>를 썼다)과 강석경, 그리고 몇몇 사람뿐이었는데 그나마 직접 만나는 경우는 극히 드물었다. 몸이 극도로 쇠약해지면서는 스스로 만나기를 원치 않았다. 다만 내게는 돌아가시기 직전까지 만나서 책 이야기를 하자고 약속할 만큼 막역하게 대해주셨고, 언제나 내 편지와 방문을 기다리셨다. 그러나 게으름뱅이인 나는 무엇이든 늘 대답만 “네, 네.” 건성으로 하고 미루기만 했다. 그래서 선생님은 나를 ‘만만디’, ‘덜렁이’라고 불렀다. 매사 빈틈없는 선생님이 이런 나를 예뻐했으니, 극과 극은 통하는가 보다.

선생님을 처음 만난 순간은 잘 기억나지 않는다. 내가 20대 초반 음악전문지 기자로 있을 때 선생님은 필자로 사무실을 자주 찾았지만, 당시 국장과 부국장 모두 서울대 동문이어서 그런 높은 분들하고 주로 얘기했고, 부장한테도 큰소리친 분이었으니 막내기자였던 내게 눈길조차 주지 않았을 것이다. 선생님이 원고를 넘기러 사무실에 들르면 주변이 떠들썩해졌다. 창백한 낯빛과 도수 높은 안경, 카랑카랑한 목소리에 그 목소리보다 더 날카롭고 신랄한 비판을 쏟아냈지만, 원체 무심한 나는 선생님보다 그 앞에서 쩔쩔매는 차장과 부장의 모습만 재미나게 보았을 뿐이다. 그렇게 한바탕 회오리바람처럼 나타났다 사라지면, 선배 기자들은 모두 툴툴대곤 했다. 반은 겸연쩍어서, 또 반은 감당이 안 되어서 그랬을 것이다.


▎1963년 서울대 교수회관 칵테일 파티에서 만난 전혜린(가운데)과 이덕희(오른쪽). / 사진제공·이덕희 씨 유족
대개 선생님 글은 선배들이 담당했는데, 내 바로 옆에 앉은 선배가 담당기자가 됐던 적이 있다. 선배는 선생님을 만난 다음날이면 전날 선생님과 저녁을 함께한 이야기를 들려주곤 했다. 한번은 술집에서 술을 마시다 정전이 됐는데(그때는 서울 시내도 정전이 됐었나 보다) 마침 비도 내리고 있었다고 한다. 선생님은 비가 오던, 정전이 됐던 아랑곳하지 않고 열변을 토하고 계셨으리라. 갑자기 번개가 쳐서 어두운 실내에 번쩍 빛이 들어왔는데, 그때 번개 빛에 드러난 선생님 얼굴이 너무나 인상적이었다고 했다. 나는 이 이야기를 들으며 선생님의 희끗희끗한 단발머리와 먼 데를 보는 듯 초점을 잡기 힘든 눈동자와 열변을 토하는 모습을 상상하며 조금 무섭다고도 생각했다. 이 이야기는 선배의 과장이 섞인 묘사일 수도 있고, 나의 과도한 상상력 때문일 수도 있다. 어쨌든 이후 선생님이 늙어가는 모습을 지켜보며 선생님의 눈동자는 연세가 들어갈수록 더욱 먼 곳을 향한다고 느꼈다.


▎이덕희가 1980년대 잡지 연재 후 책으로 묶은 전혜린 평전 표지. ‘삶과 죽음의 불새’라는 부제를 붙였다.
음악잡지에서 3년째, 드디어 내가 담당이 됐다. 그때 아마 발레에 관한 연재를 기획했던 것 같은데(나의 기억력이란!) 담당자로서 처음으로 선생님과 독대하게 됐다. 같이 저녁을 먹고 자리를 옮겨 포도주를 마셨다. 술을 마신 곳은 광화문이었던 걸로 기억한다. 광화문 지하도를 건너며 “사람은 한 것을 후회하는 게 아니라 하지 않은 것을 후회한다”는 말씀을 하셨으니까. 유독 그 말만 내 기억에 또렷이 남아 있다. 사랑이나 뭔가 낭만적인 주제로 이야기하던 중에 나온 말인 것 같다. 그날 포도주를 마시며 음악과 무용 등 예술에 대해 많은 이야기를 나누었다. 내가 눈과 귀를 즐겁게 하는 것에 꽤 관심이 있었기에 우리는 신나게 이야기했다. 그 시간이 즐거웠기 때문에 선생님이 나를 잘 봐주신 것 같다. 왜냐하면, 연재를 시작하기도 전에 내가 여성지로 발령이 나서 선생님과 일할 기회를 놓치자 선생님은 무척 안타까워했기 때문이다. 그런 섭섭함 때문이었을까, 여성지에 무용가 누레예프, 그리고 영화배우 그레타 가르보에 관해 연재하자고 연락을 해오셨다. 비로소 선생님과 나는 파트너가 된 것이다.

책 출간 구상할 때 가장 행복했던 사람


▎1996년 학림다방에서 촬영된 이덕희(당시 59세)의 모습. 그의 원고는 토씨 하나 쉼표 하나 고치지 못하는 것으로 유명했다. / 사진제공·이덕희 씨 유족
선생님의 원고는 토씨 하나, 쉼표 하나 고치지 못하는 걸로 유명하다. 모차르트가 음표 하나를 고치면 곡 전체가 망가진다고 했던 것처럼 선생님도 당신의 글에서 무엇 하나라도 바뀌면 글 전체가 흩뜨려진다고 했다. 사실 선생님의 글은 완벽해서 고칠 데라곤 없었다. 그럼에도 나는 선생님 글을 고친 적이 있다. 아마 다른 기자였으면 선생님의 호통이 무서워서라도 감히 손댈 엄두를 내지 못했을 텐데, 매사 ‘되는 대로’인 나도 일에 관해서는 선생님 못지않게 좀 깐깐한 면이 있었던 것 같다. 선생님은 왜 고쳤는지 설명하는 나의 이유를 듣고 수긍해주셨고, 나중에는 나의 편집에 기뻐하셨다. 잡지 편집이라고 해봐야, 오자가 안 나게 하고 알맞은 사진을 배치하여 사진 설명을 성의껏 붙이는 정도였지만, 나의 실수에도(틀림없이 나도 실수를 했을 것이다) 선생님은 기특하게 봐주시고 믿음을 보여주셨다.

그러고 보면 선생님은 사람들이 생각하듯 그런 고집쟁이가 아니었는지도 모르겠다. 물론 자기주장이 강했지만 이유 없는 주장이나 고집은 아니었다. 납득할 만한 이유가 있으면 언제든 수용하는 부드러운 면이 있었던 게 틀림없다. 나는 선생님의 부드러운 면을 그때 발견했던 것 같다. 그래서 이후로도 선생님을 설득하는 일을 꽤 쉽게 해냈던 것 같다. 아니면 선생님이 나한테만 부드러웠던 걸까.

선생님이 고집쟁이가 된 것은 아마 당시 문화계와 출판계의 후진성 탓이었을 것이다. 여자라는 이유로 쉽게 무시하는 풍토가 만연했던 그 시절, 똑똑한 선생님은 그 똑똑함을 과시하지 않으면 안 되었을 것이다. 무시당하기 전에 무시하는 편이 더 나았던 시절이었다. 자신의 글에 함부로 손대지 못하도록 하고, 책을 만들 때 표지도, 편집 디자인도, 사진 선택도 모두 선생님 뜻대로 밀고 나가고자 고집을 부린 것도 당시 출판계에 전문 인력도 부족하고 소양도 없는 기자와 편집자들이 수두룩했기 때문이 아니었을까. 문장을 고친답시고 더 엉터리로 고쳐놓는 편집자에게 분통을 터뜨릴 수밖에 없고, 서투른 디자이너에게 책 내용까지 자세히 설명하며 제대로 된 디자인을 요구하다 보니 선생님은 그런 괴팍한 고집쟁이가 될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한 가지 분명한 건, 그런 선생님의 고집 덕분에 후배 필자들은 그만큼 존중을 받았다는 사실이다. 선생님의 고집을 탓하기 전에 선생님의 완벽함은 존중받아야 마땅하다.

생전에 선생님은 당신의 전집을 한 출판사에서 온전히 출판하고자 하는 꿈을 꾸셨다. 마침 다른 신문사의 기자 친구가 선생님께 감동해 출판을 추진했지만, 회사의 이해타산에 막혀 실현되지 못했다. 그 친구는 선생님 같은 분이 합당한 대접을 받지 못하는 현실에 무척 가슴 아파했다. 만약 문화를 존중하는 선진국이라면 선생님은 문화계의 원로로 존경받고, 그 괴팍함조차 멋진 전설이 되었을 것이다. 선생님의 한창시절은 낭만은 있었지만 문화계와 출판계의 수준이 너무 낮았고, 이 시대는 물질을 좇는 시대가 되어 문화계조차 유명세와 선전, 돈을 떠받든다.

담당자가 된 나는 원고를 받으러 선생님 댁에 드나들게 되었고, 대전에 사실 무렵엔 대전까지도 갔다. 그때는 작은 아파트에 사셨는데, 선생님 성격대로 깔끔하고 환한 집이어서 들어서면 기분이 좋았다. 내가 본 선생님의 살림살이 중 가장 나았던 때였다. 원고료가 나오면 꼭 담당기자에게 술과 밥을 사주곤 했는데, 지금 생각하면 원고료에 의지해 사는 자유기고가에게 밥과 술을 얻어먹는 것은 못할 짓이었다. 세상물정에 어두운 나는 별 생각 없이 받아먹었으니, 생각 없이 어린 것이 죄였다.

내가 회사를 그만두고 프랑스로 떠났다 돌아오자 선생님은 나를 어떻게든 필자로 키워보려고 갖은 애를 다 쓰셨다. 그저 빈둥거리기만 좋아하는 내게 프랑스에서 그림과 음악에 빠져 살던 이야기를 써보라며 닦달을 하셨다. 억지로 몇 편 써서 보여드리자 마음에 드셨는지 구성을 어떻게 하면 좋겠다는 등 선생님 특유의 열정을 다하여 출판 구상을 펼치셨다. 내 이야기를 쓰는 것을 내켜 하지 않는 나는 끝내 그 책을 내지 않을 것을 알았지만, 책을 구상할 때가 선생님이 가장 행복한 순간이라는 것을 알기에 그저 “예, 예” 건성으로 대답하고 말았다.

누구라도 이끌어주고자 했던 스승


▎잡지에 연재됐던 ‘위대한 만남’ 괴테와 쉴러 편 1회 편집본. 이덕희는 편집 디자이너에게 책 내용까지 자세히 설명하며 제대로 된 디자인을 요구했다.
말 안 듣는 자식을 대하듯, 선생님은 한없이 게으름을 피우는 내게 칭찬과 격려, 그리고 채찍질을 해가며 어떻게든 내 소질을 살려주려 애를 쓰셨다. 부모님을 빼고는 그렇게 순수한 마음으로 내 앞길을 걱정해준 이는 또 없었던 것 같다. 선생님은 심지어 나를 을유출판사로 끌고 가 번역을 시켰는데, 출판사에서는 선생님과 토스카니니 전기를 계약하고 싶은 욕심에 할 수 없이 나를 번역자로 받아준 것이었다. 그때까지 나는 기자라는 경력 말고 아무것도 없었고, 을유출판사에서는 최고의 필진과 역자를 동원하여 ‘예술가 시리즈’를 기획하고 있었으니 나는 적격자가 아니었다. 그렇게 해서 맡게 된 번역서가 피아니스트 글렌 굴드의 전기였다. 솔직히 내게 번역은 지루하기 짝이 없는 작업이라 적성에 맞지 않았지만, 선생님께 누가 될까 봐 안간힘을 다했다. 그것이 계기가 되어 번역과 글쓰기를 계속하게 되었으니 내 경력을 터준 분이 선생님이었다.

선생님은 어느 누구라도 못 키워줘서 안달을 내는 분이었다. 보통사람은 재능 있는 이를 만나더라도 감탄하고 아까워만 하지, 그렇게 나서서 이끌어주기란 쉽지 않다. 그런 점에서 선생님은 가장 사심 없이 누군가를 돕고 다른 이의 성공을 기뻐하는 고귀한 성품을 지닌 분이었다. 척박했던 무용계에서 춤 전문지 <춤>을 창간한 조동화 씨의 열정에 감동한 선생님은 오랫동안 <춤> 잡지에 원고료 없이 번역과 평을 실었고, 많은 후배와 제자를 필자와 역자로 소개하곤 했다. 작고한 번역가 이윤기 씨도 선생님이 이끌어준 이였다.


▎이덕희의 육필 원고. 늘 자신의 이름이 박힌 전용 원고지에 굵은 색연필로 세로로 꾹꾹 눌러썼다. / 사진제공 ·이덕희 씨 유족
선생님이 돌아가셨을 때 그동안 선생님의 격려를 받았던 많은 이들이 느낀 것은 죄책감과 회한이었을 것이다. 은혜를 다 갚지 못한 사람은 언제나 때늦은 후회를 한다. 특히 선생님이 내게 거는 기대가 남달랐던 것을 나도 잘 안다. 선생님처럼 음악과 무용 관련 글을 써주기를 얼마나 바라셨던가! 그런데 나는 사서삼경이나 불교, 한시, 노장(老壯) 공부를 더 좋아했다. 결국 선생님은 내 취향을 인정했지만 못내 미련을 버리지 못하고 마지막으로 뵀던 날 당신이 그토록 번역하고 싶어 한 <시베리아 공주(The Princess of Siberia)>(데카브리스트 반란에 동참했다가 시베리아 유형을 당한 남편을 따라 간 마리아 볼콘스카야의 평전)를 내게 주셨다. 마지막을 예감이라도 한 것이었을까? 하기야 젊은 시절부터 출판되지 않은 원고와 일기를 수시로 불태우며 주변을 정리해온 분이 아니었던가.

선생님이 사랑했던 모차르트와 키에르케고르가 그랬던 것처럼 선생님도 곤궁한 말년을 보냈다. 쌍문동 낡은 연립에서 추위와 더위에 시달리던 선생님은 그 집을 떠나 통영으로 내려가기를 꿈꾸며 일찌감치 짐을 싸놓았지만, 약을 달고 사는 분이 그 먼 지방으로 이사 가는 것은 현실적으로 불가능했다. 선생님은 키에르케고르가 마지막 돈 한 푼을 다 써버린 날 쓰러진 것을 상기하며 스스로 위로하곤 했다. 그런데도 내가 돈 안 되는 공부를 해도 말리기는커녕 가끔 돈 때문에 편집일이나 대필을 하면 걱정스러운 목소리로 “그런 일을 왜 해? 자기 글을 써야지” 하며 안타까워하셨다. 나는 그런 선생님이 좋았다. 세상사람은 인기 있는 책, 돈 되는 일을 우선으로 치지만 선생님은 뜻있는 일, 좋아서 하는 일, 훌륭한 글을 높이 쳐주셨다. 누구보다 돈 때문에 궁핍했을 당신이 끝까지 그런 마음을 유지할 수 있었던 것은 얼마나 고마운 일인가! 요즘은 어른 행세하는 사람도 현실적인 조언이랍시고 아주 세속적인 처신을 강조하는 세상 아닌가.

쓸쓸한 말년… 알려지지 않은 부음


▎이덕희는 생전에 돈 되는 일보다 뜻 있는 일, 좋아서 하는 일, 훌륭한 글에 높은 가치를 부여했다. / 사진제공·이덕희 씨 유족
책 계약금을 받거나 인세를 받으면 곧 병원비와 약값으로 다 써버리는 선생님은 나중에 약도 소용없고 병원에도 못 다니게 됐지만 나는 계속 무심했다. 입버릇처럼 “정신적인 고통은 타인이 이해할 수 있어도, 육체의 고통은 당사자밖에 모르는 법”이라며 “몸이 괴로우니 얼른 죽고 싶다”고 했지만, 나는 믿지 않았다. 담배와 술은 포기한 지 오래지만 아직 선생님이 커피 맛을 잃지 않는 한 삶의 의지를 갖고 계신 거라고 믿었다.


▎잡지 연재 후 단행본으로 출간된 <위대한 만남>의 표지. 이덕희가 평생에 걸쳐 쓴 많은 글은 안타깝게도 전집으로 묶여 출간되지 못했다.
어느 해던가. 선생님 댁에 갔는데 충격을 받았다. 선생님 집은 작고 초라하지만 늘 깔끔하고 아늑했었다. 그런데 그날 침침한 형광등 탓이었을까, 아니면 싱크대의 수도가 고장 났기 때문이었을까, 집이 쓰러져간다는 인상을 받았다. 눈이 어둡고 밥도 거의 안 드시니 주방은 생기를 잃고 있었다. 차라리 설거지거리가 수북이 쌓인 개수대를 보았더라면 좋았을 걸! 선생님 말씀처럼 살아서 이 집을 탈출할 수 있을지, 나는 불길한 기운을 느꼈다. 한번은 잠시 들렀더니 선생님과 늘 함께하던 새도 사라지고 텅 빈 새장만 걸려 있었다. 선생님 댁의 새 이름은 늘 ‘잭’이었는데, 마지막 잭이 죽고 선생님은 더 이상 새 잭을 들여놓지 못했노라고, 섭섭한 마음에 빈 새장을 걸어놓았다고 했다. 그 말씀이 또 쓸쓸하게 울렸고, 집안이 더욱 우울하게 느껴졌다.

3년 전 내가 갑자기 아프게 되면서 선생님 댁을 잘 찾아갈 수 없게 되자 선생님과 나는 주로 전화로 소식을 주고받았다. 몸은 쓰러질 듯 허약하지만 열정만은 잃지 않으셨기에 한 번 통화하면 한 시간을 넘기기 일쑤였다. 그러니 나는 선생님은 여전하시다고, 언제까지나 내 곁에 계실 거라고 생각했었나 보다. 선생님은 “한경심 씨는 이제 내 친구야”라고 말씀하시곤 했는데, 친구라면 이토록 무심한 친구가 없을 것이다. 차라리 딸이라고 해야 맞을 것 같다. 자식은 무심하기 마련이니까.

사람들에게 알리지 않은 선생님의 부음을 우연히 듣고 달려간 장례식장에서 내가 이름을 말하자 유족(형제와 조카들)이 나를 알아보았다. 얼굴도 모르는 나를 알아보니 그만큼 내 얘기를 많이 하셨다는 뜻이리라. 그때 나는 쥐구멍에라도 들어가고 싶은 심정이었다. 그리고 입관 때 유족들이 맨 먼저 내게 마지막 인사를 하도록 양보해주었을 때, 나는 진짜 선생님의 딸이었음을 뒤늦게 깨달았다. 나는 선생님의 창백하고 아름다운 뺨에 내 뺨을 대고 고백하듯 속삭였다.

“늦어서 죄송해요. 다시는 늦지 않을게요.”

[박스기사] 이덕희, 어떤 글을 남겼나?

이덕희는 서울대 법대와 대학원을 졸업하고 <경향신문>과 <조선일보> 문화부 기자, <서울대학신문> 조사부장을 거쳐 중앙대, 숙명여대 대학원 강사를 지냈다. 1963년 장편소설 <회생>을 발표한 뒤로 산문집 <내 눈의 빛을 꺼다오> <마지막 불꽃이 더 아름답다> <내 영혼을 존재케 하는 것은> <그대는 충분히 고뇌하고 방황했는가> 등을 출판했다. 발레 입문서 <발레에의 초대> <매혹의 초대>, 평전 <전혜린> <불멸의 무용가들> <음악가와 연인들> <음악가와 친구들> <음악가의 만년과 죽음> <불멸의 명연주가들> <토스카니니> <위대한 만남> <신화 속의 여배우 그레타 가르보>, 그리고 음악 산문 <세기의 걸작 오페라를 찾아서> <음악혼의 광맥을 찾아서> <천재들의 불화사건> <역사를 창조한 이 한통의 편지> <왜 베토벤인가> 등이 있다. 편역서 <나의 오빠 니진스키>, 역서 <니체 최후의 고백> <음악 에세이> <무대의 마술사 두제> <쇼팽-하늘로 가는 피아노 소리> <갈매기의 꿈> <제니의 초상> <부러진 날개> 등이 있다.

한경심 - 이화여대에서 영문학을 전공하고 <동아일보> 출판국에서 기자로 15년간 일했다. 이후 자유기고가로 <월간중앙> <이코노미스트> <신동아> <여성동아> 등에 문화와 관련한 글을 썼다. 저서로 전통공예 장인들을 소개한 <우리는 어떻게 옷을 짓고 밥을 짓고 집을 짓는가>, 한식의 철학을 담은 <우리는 왜 쌈 싸먹고 비벼먹고 말아 먹는가>등이 있고 번역서로 <글렌 굴드, 피아니즘의 황홀경>, 김병연의 한시를 소개한 'Selected Poems of KIMSAAKAT'(공역)이 있다.

201702호 (2017.01.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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