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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독 인터뷰] 문재인 대선캠프 영입 전윤철 전 감사원장 

“공정거래법이 재벌개혁의 기본지침이다” 

글 한기홍 월간중앙 선임기자 glutton4@joongang.co.kr / 사진 주기중 기자 clickj@joongang.co.kr
인수위가 존재하지 않는 아주 위험한 정권교체…차기 대통령은 취임 1년 안에 국가 대개혁 완수해야

전윤철의 오랜 별명은 혈죽(血竹)이다. 우리말로 ‘핏대’인데 논쟁을 즐기고 꼬장꼬장한 그의 성격을 잘 나타내는 별호다. 그의 문재인 대선캠프 합류는 두 가지 의미가 있다. 호남을 향한 문재인의 구애는 드러난 포석이고, 집권 성공 시 재벌개혁의 미션을 그가 짊어지리란 전망도 있다. 여전히 성깔은 살아 있고 의욕도 충만하니 그럴 법하다. 이 ‘진격의 70대’를 직격 인터뷰했다.


▎전윤철 전 감사원장은 “완전히 무너진 국가 기강을 다시 세우는 일이 가장 시급하고도 중요한 새 정부의 과제”라고 말했다.
전윤철 전 감사원장(78)은 평생 관운(官運)이 승했던 인사다. 진부한 그의 표현을 빌면 ‘기네스북’ 감이다. 1966년 제4회 행정고시에 합격한 후 무려 43년간이나 공직 생활을 했다. 김영삼 대통령 시절 차관급인 수산청장에 임명된 후 김대중-노무현-이명박 대통령 시절까지 합쳐 무려 7번이나 장관급 이상의 고위직을 맡았다. 공정거래위원장, 기획예산처 장관, 대통령 비서실장, 부총리 겸 재정경제부 장관, 감사원장을 차례로 맡았다. 장관급 이상 고위직을 12년간 수행하는 동안 한 번도 해임된 적이 없었다. 이명박 대통령 시절 감사원장 직에서 물러났지만 이는 정권교체에 의한 어쩔 수 없는 해임이다. 그 과정에도 이명박 정권의 부당한 압력 등 숨은 비화가 많다며 그는 한껏 궁금증을 북돋았다.

그의 관운이 지금 중요해진 이유가 있다. 호남을 대표하는 관료의 상징적 존재로서 그는 문재인 전 더민주 대표의 대선 캠프에 영입됐다. 아마도 공동선대위장을 맡아 호남 지역의 민심을 문재인 후보에게 그러모으는 역할을 맡게 될 것 같다. 경제관료로서의 전문성과 화려한 커리어, 거기에 강단 있는 성격과 호남을 대표하는 어른으로서의 상징성을 갖췄다. 78세의 나이가 무색할 만큼 건강도 좋다. 골프광인 그는 작년 홀인원을 기록했고, 겨울 내내 스키를 즐기며 젊은이 못지않은 체력을 과시하는 스포츠광이다. 작년 1월 안철수 대표가 국민의당 공천심사위원장을 맡아달라는 부탁을 할 때도 그는 일본의 한 스키장에서 안 대표의 전화를 받았다.

전윤철의 오랜 별명은 혈죽(血竹)이다. 우리말로 ‘핏대’인데 논쟁을 즐기고 꼬장꼬장한 그의 성격을 잘 나타내는 별호다. 김대중 대통령 시절 국무회의 때 한치도 물러섬 없는 그의 토론태도가 김 대통령마저 질리게 했다는 일화가 지금도 회자된다.

문재인 전 대표가 섀도 캐비닛(예비 내각) 구성에 박차를 가하고 있다는 사실이 알려지면서 전윤철에 쏠리는 이목이 더 뜨거워졌다. ‘탕평총리론’을 표방하며 사실상 호남 출신 총리를 내세워 대선을 치르겠다는 구상이 공공연한 비밀이 됐기 때문이다. 정작 전 전 감사원장은 인터뷰에서 “예비내각 총리를 미리 밝히는 것이 바람직한지 잘 모르겠다”는 입장을 개진했다. 타 지역의 반발을 부르는 역효과를 경계해야 한다는 주장이다. 역시 경제관료 출신으로 당내 경제통으로 분류되는 김진표 의원과 충청에서 내리 5선을 한 박병석 의원, 대선 출마를 포기했지만 지역주의 극복의 아이콘이 된 김부겸 의원, 지지율 하락으로 3선 가도에 고비를 맞은 박원순 서울시장도 총리 후보자로 거론된다.

“예비내각 총리 발표는 신중히 해야”


▎2002년 4월 김대중 대통령(오른쪽)이 청와대에서 전윤철 비서실장과 이야기를 나누며 국무회의장으로 들어서고 있다.
문 전 대표 캠프의 공동선대위원장으로는 전윤철 전 감사원장, 김상곤 전 당 혁신위원장, 박병석 전 국회부의장, 김진표 의원, 이미경 전 의원 등이 합류할 전망이다. 이 가운데 전 전 감사원장과 김 전 위원장은 호남 민심을, 박 전 부의장은 충청 민심을 대변한다는 점에서 상징적 의미가 있다. 향후 두세 명의 공동위원장이 추가로 인선될 가능성이 크다.

전 전 원장은 “그간 총리 물망에는 여러 번 올랐다”면서 “그러나 그 자리에 대한 욕심 때문에 문재인을 도우려는 것이 아니다”라고 말했다. 차기정부의 1순위 과제로 “투명성과 공정성, 법과 원칙의 복원”을 꼽았다. 최순실 국정농단으로 완전히 무너진 국가기강을 취임 1년 안에 회복해야 한다는 점도 강조했다. 그는 “공정거래법이 경제민주화의 가장 대표적인 법체계”라며 “공정거래법의 의무조항을 준수케 하는 것이 재벌개혁의 기본지침”이라고 주장했다. 인터뷰는 2월 14일 오전 중앙일보 본사 인터뷰룸에서 두 시간에 걸쳐 이뤄졌다.

김영삼 대통령 시절인 1994년 수산청장을 맡은 이후 4대 정권에 걸쳐 요직을 두루 거쳤는데?

“김영삼 대통령 때 수산청장과 공정거래위원장을, 김대중 정부 들어서는 공정거래위원장 하다가 기획예산처 장관을 했다. 2년 장관을 하다 대통령 비서실장을 했고, 그 이후에 경제부총리를 했다. 노무현 대통령 때는 감사원장을 연임했지만 사실은 정권 출범 직후 국정원장이 될 뻔했다. 고영구 씨와 내가 국정원장 자리를 두고 막판까지 경합했다는 사실은 아는 사람이 드물다.”

어떻게 그렇게 관운이 좋은지 비결이 궁금하다. 고분고분한 스타일도 아니지 않나?

“내 별명이 혈죽(血竹), 다시 말해 ‘핏대’다. 조선일보가 붙여준 건대, 내가 회의석상에서 핏대 올리면서 논쟁하길 좋아했기 때문이다. 원래 그런 사람들은 공직에 오래 있지 못한다. 그런데 나는 간 크게 대통령의 지시도 듣지 않았던 경우가 있었다. 얼마 전 고교 동문(서울고등학교) 고시 출신들이 450명 정도 모인 적이 있다. 후배들에게 ‘원칙을 지켜라. 원칙과 정도로 가야 후환이 없다’고 말해줬다. 호남출신이라 군사정부 시절 과장·국장 올라갈 때까지 엄청난 설움을 받았다. 그만두고 남대문시장에서 장사를 해볼까 생각한 적도 있을 정도다. 결국 관운이란 게 운도 따라야 하지만 원칙과 정도를 지켜야 생기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노무현 대통령이 경제관료 출신을 왜 국정원장감으로 고려했을까?

“노 대통령은 국정원이 예전처럼 정치사찰 등의 역할보다는 세계경제의 흐름을 파악하고 정부의 대응전략을 만드는 역할을 맡겨야겠단 생각을 한 것 같다. 노무현 정부에선 386그룹이 힘이 셌으니까 막판에 그들이 인권변호사 출신의 고영구 씨를 밀었던 것으로 알고 있다.”

작년 총선 전 국민의당 공천심사위원장을 맡았다가 이번엔 문재인 캠프에 오게 되어 안철수 전 대표가 섭섭해 했을 것 같다.

“작년 1월 중순 안철수 대표의 요청으로 공심위원장을 맡았지만 사실 나는 그와 일면식도 없던 사람이다. 내가 비교적 깐깐하게 인생을 살아왔다는 소문도 아마도 들었을 터인데, 결국 그의 간곡한 부탁을 내가 수락한 것이다. 당적도 갖지 않은 채 국민의당 국회의원 후보를 뽑는 게 아니라 대한민국 국회의원 후보를 가려보겠다는 마음으로 임했다. 35명이 당선되었으니 공천심사는 잘된 것 아닌가? 내 직분은 완수했다고 생각한다. 직후에 문재인 대표로부터도 도와달라는 요청을 받았지만 안 대표의 요청이 먼저 이뤄져 갈 수 없었다.”

참여정부 출범 때 국정원장 물망에도 올라


▎2006년 10월 27일 국회 법사위 감사원 국정감사에 출석해 의원들의 질의에 답변하고 있는 전윤철 당시 감사원장.
당시 국민의당 비례대표 의원직을 요구했다는 설도 최근 나왔다.

“선거 전에는 많은 사람이 적어도 5∼6번 정도는 받아야 당선권에 들 수 있을 것으로 봤다. 내가 그런 요구를 차마 당에 할 수는 없었다. 안철수 대표에게도 그런 말을 한 적이 전혀 없다. 이런저런 말이 흘러나오는 모양인데 사실과 다르다.”

출신지가 호남이란 상징성, 오랜 공직생활의 커리어가 있다. 어떤 역할을 맡게 되나? 최근 문 전 대표가 소위 ‘탕평총리론’을 내세우며, 당선된다면 호남출신 총리 기용 방침을 강하게 암시했다.

“그간 총리 물망에는 여러 번 올랐다. 그러나 내가 그 자리에 대한 욕심 때문에 문재인을 도우려는 것이 아니다. 후보가 되면 예비내각을 발표하고 대선을 치른다는 복안인 듯한데, 그게 선거에 반드시 도움이 될지 잘 생각해 보아야 한다. 아직 선거 캠프가 세팅되지도 않아서 어떤 역할을 맡게 될지 확실하지 않다. 내가 최근 문 전 대표에게 ‘헌재 탄핵 심판이 내려지기 전 대선체제로 가는 것은 바람직하지 않다’고 에둘러 조언했다. 호남출신 총리후보를 내세워 대선을 치르게 되면 다른 지역의 반발이 있을 수도 있다. 예비내각의 총리후보를 발표하는 것에는 위험이 따른다는 점을 문 전 대표가 고려했으면 좋겠다.”

조기대선이 이뤄지면 당선 즉시 대통령 업무에 들어가게 된다. 선거 전 예비내각 구성은 어떤 후보라도 반드시 필요한 것 아닌가?

“맞는 말이다. 그러나 예비내각을 구성한다 해도 구태여 이를 미리 발표하고 선거를 치를 필요가 있겠느냐는 것이다. 이 대목은 조율이 필요하다. 다만 이번 대선의 유례없는 성격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인수위 기간이 존재하지 않는 정권교체다. 선거가 끝나면 당선자는 그 다음날 바로 청와대에 들어가 업무를 시작해야 한다. 유력 후보들은 모든 액션 플랜을 사전에 짜 놓아야 한다는 것이다. 사드 문제 포함한 안보 이슈에 ‘아메리카 퍼스트’를 외치는 트럼프, 위협받고 있는 WTO 체제, 해결을 기다리는 온갖 경제·사회 문제가 즐비하다. 국정의 주요 포스트를 맡게 될 인물을 내정하고 현안과제를 미리 챙겨 당선 후 바로 집행에 들어가야 한다.”

노무현 정권 출범했던 2003년 10월 감사원장에 임명돼 임기 말엔 연임까지 하게 됐다. 당시 문재인은 민정수석, 대통령 비서실장을 지낼 때다. 당시 그에게 어떤 자질을 보았나?

“내가 행정부에 오래 있었고 경제부총리를 하다 왔기 때문에 노무현 정부 때의 정책결정 과정에 상당히 깊숙이 관여하고 있었다. 2004년 3월 노 대통령 탄핵안이 통과된 후에는 문재인 당시 민정수석과 대통령 관저에 가서 술도 가끔 마셨다. 노 대통령과 제가 토론을 자주 했는데, 문재인은 항상 조용하게 경청했던 기억이 난다. 경청의 문재인이다. 그때나 지금이나 사람이 순수하고 착한 것은 변함이 없고….”

문재인을 왜 좌클릭 정치인으로 보나?


▎더불어민주당 문재인 전 대표가 2월 11일 대구 엑스코에서 열린 ‘포럼 대구ㆍ경북 출범식’에 참석해 ‘정권교체’ 의미의 만세를 부르고 있다.
“대통령이 되면 미국보다 북한을 먼저 가겠다”는 발언으로 안보관을 의심받고 있는데, 문 대표 입장에선 억울한 측면이 있을 것이다. 월간중앙 도올 인터뷰 때 나온 말인데, 녹취록을 들어보면 굉장히 신중하게 발언했던 것을 알 수 있다.

“특전사 출신에다, 부친은 공산주의가 싫어서 월남한 분이다. 청와대 민정수석에 비서실장까지 지낸 사람의 사상을 의심한다는 것은 좀 심하지 않나? 노무현 정부 때 분배론을 강하게 주장했던 한 흐름, 예컨대 변형윤 교수를 중심으로 한 분배론자들이 있었지만 문재인은 그 흐름과도 관련이 없다. 그가 좌클릭 되었다는 것은 오해다.”

이번 대선도 대북관의 문제, 보수와 중도와 진보의 문제가 큰 이슈로 떠오를 것 같다. 문 전 대표는 강경 보수 세력에겐 급진좌파로, 철저한 개혁을 원하는 일부 국민에게는 애매한 중도주의자로 몰리고 있다. 문 전 대표의 이념적 성향에 대해선 어떤 판단을 갖고 있나?

“나는 우리 사회의 보혁갈등을 실체가 있는 논쟁으로 보지 않는다. 그런 갈등은 좀 넓게 보면 바다 위에 떠 있다가 흩어지는 포말과 같은 것이다. 같은 시대를 살면서 이념적인 문제로 늘 부대낀다는 것 자체가 서글픈 일이다. 보혁 갈등보다 더 중요한 테제는 21세기 우리나라를 한 단계 더 업그레이드하는 국제 경쟁력 강화다. 기업은 기업대로, 개인은 개인대로 경쟁력을 키워야 한다는 것이다. 시장경제를 지키는 일이 중요한데, 기업에 강압적인 요구로 정부가 개입해서도 안 된다. 기업 또한 진짜 파이를 만드는데 혼신의 힘을 기울여야지 부정한 방식으로 자신의 몸집을 키우려 해서는 안 된다. 정부도 대기업도 자신이 해야 할 일을 방기한 것이 이번 사태를 부른 원인 중 하나가 되었다.”

김대중 정부에서 시작된 햇볕정책과 이에 따른 대북지원이 북핵문제와 맞물려 지금까지 보혁 갈등의 뿌리가 되었는데.

“1970년대 서독의 수상 아데나워, 재무장관 에르하르트가 힘을 합쳐 ‘라인강의 기적’을 이루어냈다. 그때부터 독일은 통일된 국가를 꿈꾸기 시작했다. 독일을 통일하기 위한 서독의 끊임없는 노력의 일환으로 동독을 지원했던 것은 잘 알려진 사실이다. 무려 20년이 걸린 대역사(役事)였다. 노태우 대통령은 북방정책의 일환으로 당시 구소련에 30억 달러를 지원했다. 북한이 불장난하지 못하게 소련에게 돈을 꿔주면서 억지력을 발휘해줄 것을 요청한 것이다. 그 돈을 제대로 받지도 못했다. 내가 그 돈을 받기 위해 러시아에 가서 악을 썼던 바로 그 당사자다. 문재인은 핵문제가 해결될 수 있다면 지옥에라도 가겠다는 심정으로, 필요하다면 북한을 먼저 방문할 수도 있다고 말한 것뿐이다. 이런 발언을 거두절미하고 북에 먼저 가겠다고 했으니 사상이 의심스럽다? 너무 수준이 낮은 담론이 횡행하고 있는 것 아닌지 정치권 전체가 반성해볼 문제다.”

청와대 참모진은 토론의 달인이었다


▎2003년 11월 10일 노무현 대통령으로부터 임명장을 받고 환담하고 있는 전윤철 당시 신임 감사원장.
문 전 대표가 안정적인 정권교체를 위해 김종인 전 대표와 협력의 관계를 만들지 못한 것은 아쉬운 대목으로 지적하는 사람이 많다.

“협력을 할 때는 쌍방이 어느 정도 마음을 비워야 하는데 그게 어려운 일인 것 같다.”

김종인의 경제민주화, 전윤철의 경제민주화 무엇이 같고 또 다른가?

“경제부처에서 사무관부터 장관에 이르기까지 43년간 공직생활을 했다. 그런 경험에서 보건대 매크로 정책도 중요하지만 사실 마이크로하게 우리 내부에서 해결해야 할 과제들이 너무도 많다. 조윤제 교수를 중심으로 한 싱크탱크에서 연구하고 있겠지만 나는 경제민주화를 거창하게 보지 않는다. 공정거래위원장 출신으로 우리나라의 공정거래법이 경제민주화의 가장 대표적인 법체계라고 생각한다. 재벌 해체 등의 구호는 말이 안 되는 소리다. 경제민주화를 어떻게 설명하느냐, 기업의 의사결정 구조를 민주화시키는 게 첫째다. 이사회가 제대로 된 의사결정을 할 수 있도록 유도하면 의사결정의 민주화는 이뤄진다는 말이다. 그 다음은 주주총회다. 대주주가 자신이 보유한 주식 수에 해당하는 의사결정을 확실하게 하라는 것이다. 의사결정 민주화, 외부 감시체계 확립, 회계 시스템의 공정화 이 세 가지는 법으로 다 완비돼 있는데 이것이 왜곡되고 잘 지켜지지 않는다. 이걸 지키도록 유도하는 것이 나는 경제민주화라고 보고, 그 감시의 책무를 정부가 수행해야 하는 것이다.”

박근혜-최순실 게이트 수사가 정점으로 치닫고 있다. 국가 시스템의 전반적인 붕괴를 목도하면서 어떤 느낌을 받았나?

“내가 경험했던 청와대와 너무 다른 것에 우선 충격을 받았다. 사실 청와대에 포진한 스탭진은 초일류라고 볼 수 있다. 대한민국 전체 중에서도 일류다. 대통령이 충분히 의존해도 되는 능력과 시스템을 갖추고 있다. 내가 경험한 청와대 수석 비서관들끼리의 토론 수준은 대단했다. 부시 대통령이 2002년 4월 도라산역을 방문할 때 북을 ‘악의 축’으로 규정하는 스피치를 한다는 정보를 사전입수했다. 김대중 대통령이 부시의 그 연설을 막으려고 나를 포함한 몇몇 참모를 불러 중지를 모았다. 그날 오후 한·미 정상이 도라산역 홀에서 합동연설을 하게 돼 있었는데, 부시가 먼저 ‘나는 김대중 대통령의 권고에 따라 북한을 공격하지 않겠다. 북한과 대화하겠다. 대북 인도적 지원도 하겠다’고 연설했다. 김 대통령이 참모들과 토론해 얻은 결론을 토대로 이날 오전 무려 100분에 걸쳐 부시를 설득한 결과였다. 2000년 9·11 뉴욕 테러 당시에는 대통령과 참모들이 이슬람교를 포함하여 종교 간 공존의 가능성을 놓고 아주 깊고 수준 높은 토론을 벌인 적도 있다. 박근혜 대통령의 청와대 역시 일류의 인재가 모인 곳이 틀림없다. 그런데 어떻게 비선실세가 득세할 수 있는 공간이 생겼나. 대통령의 책임을 묻지 않을 수 없다.”

이번 국정농단 사태를 계기로 새삼 대통령과 참모의 소통, 대통령 주재의 국무회의나 수석비서관회의의 스타일과 성격도 그 민낯을 드러냈다. 과거 정부와 어떻게 다르다고 봤나?

“내가 참석했던 대통령 주재의 각종 회의와 비교하면 엄청난 차이가 느껴졌다. ‘핏대’라는 별명답게 대통령 주재 하의 회의에서도 상식에 어긋나거나 견해가 다르다고 느껴지면 꼬장꼬장하게 내 의견을 밝혔다. 김대중 대통령의 퇴임 1주년 기념식을 서울의 한 호텔에서 열었는데 장·차관급 인사가 300명 이상 모였다. 그때 대통령이 나를 소개하면서 ‘이 사람 때문에 국무회의 하기 힘들었다’고 해서 폭소가 터진 적이 있다. 감사원장 할 때 사사건건 반대하고 따지고 부결시켜버리고 그랬다고…. 기획예산처 장관 할 때는 돈 달라는 부처 책임자들과도 많이 싸웠다. 어쨌거나 무슨 일에 대해서건 토론이 굉장히 활발하게 이뤄졌고, 되면 되는대로 안 되면 안 되는대로 의사소통이 이뤄졌다. 김대중 대통령이 참석하고 김종필 또는 이한동 총리가 사회를 볼 때다. 토론 시간이 길어져 국무회의가 채 안건을 확정하지 못하고 끝날 때가 많았다. 적어도 이런 소통의 다이내미즘이 있어야 정부가 제대로 돌아가는 것인데, 이 정부는 소위 비선실세의 존재가 다른 모든 공적 논의와 토론의 장을 무의미한 것으로 만들었다.”

진솔한 마음으로 호남의 피해의식을 줄여줘야


▎2012년 11월 5일 문재인 당시 민주통합당 대통령 후보가 국가비전위원회 1차 회의에 참석했다. 오른쪽이 국가비전위원회 위원장을 맡았던 전윤철 전 감사원장.
박근혜-최순실 게이트로 차기 정부의 과제도 달라져야 할 것같다.

“투명성과 공정성, 법과 원칙을 세우는 과제, 다시 말해 완전히 무너진 국가 기강을 다시 세우는 일이 가장 시급하고도 중요한 과제가 됐다.”

호남에서의 문재인 전 대표 지지율이 높아지긴 했다. 그럼에도 여전히 호남민심의 향방이 문재인 집권의 제1변수로 보는 시각이 우세하다. 지금과 같은 상승 분위기를 유지하기 위한 관건은 무엇인가?

“노무현 정부가 대북송금 특검을 받아들인 것, 이후 호남 푸대접론이 광범위하게 전파되면서 소위 반문 정서라는 것이 형성됐다. 친 노무현 인사들이 대북송금 특검과 참여정부의 호남인사 등용문제 등을 다루는 과정에서 호남의 정서를 깊이 헤아리지 못했다는 것이 반문 정서의 뿌리다. 특검 도입으로 당시 한나라당과 정치적 타협을 한 것이 불가피했다고 보는 관점도 있고, 호남인사 등용의 수치를 세밀히 따져보면 호남인사가 차별을 받았다는 근거 역시 희박한 것일 수도 있다. 그러나 호남은 지역 차별의 응어리가 오랜 기간 축적돼 있고, 그 상처가 완전히 아문 것이 아니라는 점을 문 전 대표가 직시할 필요가 있다. 만일 호남을 이해해주는 어떤 사람이 대통령에 당선될 가능성이 크다고 하면 아마 그에게 거의 몰표가 쏟아질 것이다. 수도권의 호남인구는 30%가 넘는다는 것이 정설이다. 대선에 출마하는 호남출신 주요후보가 없기 때문에 어떤 식으로든 진솔한 마음으로 호남의 피해의식을 줄여주는 것이 가장 따뜻한 해법이 될 것이다.”

문재인 전 대표의 호남에 대한 마음은 진심으로 여겨지나?

“이미 언급했지만 나는 기본적으로 문재인을 선량한 사람으로 본다. 그 사람의 눈만 봐도 알 수 있지 않나? 그가 진심으로 호남을 대하고 있다는 점을 의심하지 않는다. 호남에서의 지지율이 계속 높아지고 있는 게 그의 진심을 증거하는 것이라 생각한다.”

안희정 충남지사가 세게 치고 올라오는 것 같다. 안 지사를 페이스메이커 정도로 좀 쉽게 본 것 아닌가? 대통령감으로서의 안희정을 어떻게 보고 있나?

“안 지사는 노무현 정부 시절 공직을 맡지 않았기 때문에 접촉할 기회가 거의 없었다. 훌륭한 정치인이란 평가가 많다고 들었다. 호감을 가진 사람들이 꽤 있다는 건 확실한 것 같다. 다만 다양한 경륜 측면에서 문재인을 앞설 수 있는 정치인으로 보긴 힘들다. 안 지사는 지금까지 자치단체장, 지방장관의 역할을 해온 건대 그것은 국가 전체를 운영하는 차원과는 확연히 다른 것이다. 안 지사 역시 대선 출마를 준비하면서 국가적 이슈에 대해 생각을 거듭했겠지만, 문재인이 갖는 비교 우위를 과연 뛰어넘을 수 있겠는가? 그 점에 있어서는 좀 회의적이다, 이렇게 말할 수 있겠다.”

후보경선 때 결선투표가 도입될 텐데, 문재인에 대항하는 안희정-이재명의 연합이 이뤄질 가능성이 있을까?

“권력에 대한 욕심으로만 연대가 이뤄진다면 성공하기 힘들 것이다. 세계관, 정치이념, 철학, 이런 것들을 실현하기 위한 지속적인 노력이 정치의 본령이라고 한다면, 공학적 차원의 연대는 큰 의미가 없다. 안희정-이재명 연대는 가능성이 희박하지만 설령 이뤄진다 해도 결국 실패할 것으로 본다. 시간이 걸리더라도 자신의 정치철학을 국민에게 솔직히 개진하는 것이 두 사람에게 바람직하지 않겠나?”

서비스 산업 발전이 일자리 창출의 기본대책


▎전윤철 전 감사원장은 호남 공략 전략에 대해 “진솔한 마음으로 호남의 피해의식을 줄여주는 것이 가장 따뜻한 해법이 될 것”이라 말했다.
공공부문 81만 개 일자리 창출 공약을 내세웠는데, 국민 세금으로 일자리 만드는 게 과연 바람직한가 하는 비판이 제기됐다. 기획예산처 장관을 지낸 경험에 비춰볼 때 과연 예산 염출이 가능한 아이디어일까?

“1970∼80년대만 해도 경제가 연간 10% 성장하면 30만 개의 고용유발 효과가 생겼다. 산업구조가 고도화되고 인터넷 혁명과 자동화가 일반화된 상황에서 설령 경제가 3%, 5%까지 성장한다 해도 고용유발 계수는 마이너스를 기록할 수 있다. 그런 시대에 우리가 살고 있다. 그러니까 민간부문에서의 일자리 창출은 과거와 같은 산업 프레임을 갖고는 힘들다는 얘기다. 이제는 새로운 일자리 창출을 위해 산업구조를 재편하든지, 아니면 공공부문에서 뭔가를 만들어줘야 한다. 그러나 문재인 전 대표의 구상을 비판하는 쪽의 논리도 나는 충분히 이해한다. 생산적인 일자리를 만들어야 경제가 나아가지, 소비하는 일자리 많이 만들어 뭐하느냐는 생각일 것이다. 그런데 OECD 국가 평균을 보면 전체 노동력 가운데 공공부문의 일자리가 차지하는 비율이 20.3%다. 우리나라는 7%대로 3분의 1밖에 안 되는 것이다. 문재인 전 대표는 민간부문에서 일자리 창출이 현실적으로 잘 안 되니까 공공부문에서 3% 올려 10%만 되면 81만개 일자리가 나온다고 보는 것이다.”

필요한 예산은 과연 확보할 수 있을까?

“예산확보 자체가 그렇게 어려운 일이라고 생각지 않는다. 결국 선택의 문제라고 보는 것이다. 기획예산처 장관을 했던 경험에 비춰보면 나는 충분히 가능하다고 본다. 솔직히 각 부처별로 불필요한 예산, 정치적인 예산도 많다는 것을 잘 알고 있다. 장관 했던 내게는 아마 거짓말을 못할 것이다. 지금도 어느 부처의 특정 예산 중 전혀 도움 안 되는 예산을 귀신처럼 잡아낼 수 있다. 그런 예산을 줄이면 가능하다는 것이다. 그런데 더 좋은 방법은 우리의 산업구조를 좀 바꿔서 고용유발 계수가 높은 서비스 산업 쪽을 발전시켜 나가는 것이다. 양질의 일자리를 지속적으로 늘리는 방안을 생각해야 하는데, 나의 이런 구상을 문 전 대표에게 앞으로 건의할 생각이다.”

전 세계 경제가 저성장 국면이 지속되는 소위 ‘뉴 노멀’의 시대가 이미 시작된 듯하다. 이 같은 음울한 시대에 걸맞은 경제의 다이내믹한 처방이 필요할 텐데.

“고성장이 불가능한 시대에 진입한 것은 맞다. 그래서 위기의 깊이와 폭이 큰 것이다. 저출산에 잠재성장률이 떨어지고 있는 것이 큰 문제다. 저출산 문제를 해결하는 방법 중엔 학제 개편을 통해 직업에 대한 인식을 바꾸는 것이 있다. 중소기업 업종, 3D 업종의 일을 아무도 하지 않으려는 문제를 해결해야 한다. 그러니까 동남아에서 인력을 수입하는데, 우리가 이민제도를 개선해서 카자흐스탄과 우즈베키스탄 등에 사는 우리 동포의 이민을 장려하는 정책을 만들어야 한다. 다산(多産)에 대한 거부감을 거의 갖고 있지 않은 동포들이 우리 사회에 새로운 활력을 가져올 수 있을 것이다. 앞서 이야기한 투명성, 공정성, 법과 질서를 다시 세우는 개혁, 경제 사회적 구조 개혁은 취임 후 1년 안에 강력히 추진해야 한다. 그것이 관건이다. 대선을 준비하는 후보는 미리 취임 1년의 개혁 프로그램을 치밀하게 준비해야 한다.”

엄청난 국정농단 사태가 벌어지고 있는데 감사원이 아무런 역할을 하지 못한 것이 불가사의한 일 아닌가?

“감사원은 피감기관이 5만 개인데, 직원은 1000명에 불과한 조직이다. 5만 개의 피감기관을 일일이 감사할 수가 없다. 주요기관 이외에는 3년 만에 한 번 하는 정도다. 검찰처럼 기획 수사를 한다? 기획 감사를 하려면 정보가 있어야 하는데 감사원 정보 역량에는 한계가 있다. 그럼에도 최순실 국정농단을 완전히 몰랐을 리는 없다. 결국 의지가 중요한 것인데, 나의 경우는 감사원장 재직 시 성역을 두지 않았다. 2005년 행담도 개발의혹 사건 때는 청와대 수석급 두 사람에게 직접 책임을 물은 적도 있다. 그들이 관여했다는 것을 당시 노무현 대통령에게도 직보했다.”

역대 정권이 역점을 기울였던 사업에 대해서는 감사원의 감찰 노력이 각별하게 요구되는 것 아닌가? 박근혜 정부의 역점 사업인 문화융성사업에 더 주목했다면 국정농단의 현장은 더 일찍 포착됐을 수도 있었을 텐데.

“이명박 정부의 4대강사업에 대해서 처음에는 문제없다고 하다가 나중에는 문제 있다고 했던 감사원의 태도는 분명 잘못된 것이다. 어떻게 동일한 사안에 대한 감사가 다르게 나올 수 있나? 그런데 감사원의 직무는 공무원들의 비리 조사하는 그런 데 본령이 있는 게 아니다. 시스템 감사를 해야 하는데 그게 뭐냐 하면 정부의 시스템이 제대로 돌아가는지를 감사하는 것이다. 정부 부처의 조직이 방만하다든가, 정부의 불용 재산이 수익성을 높일 수 있음에도 불구하고 방치된다든가 이런 것을 시정토록 하는 것이다. 최순실 문제도 마찬가지다. 최순실이 무너뜨린 시스템이 있다면 그것을 복원하고, 최순실 농단을 제대로 감시 못한 시스템 상의 문제가 무엇인가를 파악해 이를 시정하는 것이다. 이게 시스템 감사다. 그런 감사가 제대로 되려면 감사원 독립을 이유로 국회가 그 기능을 가져가면 안 된다는 점을 강조하고 싶다. 시스템 감사하려면 대통령과의 협의가 필요하다. 그래야 제대로 된 집행력을 발휘할 수 있다.”

국가 시스템의 복원이 필요하다

감사원장 시절 수행했던 그런 시스템 감사의 대표적인 사례를 든다면?

“중앙극장 옆 남대문세무서가 있는데 거기 가면 26층짜리 건물이 들어서 있다. 원래는 지은 지 50년 된 2층짜리 허술한 건물이었는데 내가 감사원 직원들을 불러서 국유재산 수익 모델을 만들라고 지시했다. 국유재산을 어떻게 활용할 것이냐를 감사해서 수익모델을 만들어보라는 것이었다. 그래서 착안한 것이 거기에 자산관리공사를 들어오게 해서 26층짜리 건물을 짓게 했다. 지금 1층은 남대문세무서가 쓰고 2층은 종로세무서가 들어왔다. 나머지 층은 임대를 줬는데 임대 수익이 연간 100억원 가까이 들어온다. 이런 건물 하나 지으려면 환경영향평가, 재해평가, 인구영향평가, 교통영향평가 네 가지 평가를 받아야 하는데 공무원들이 부지하세월이다. 밥 사주고 술 사주지 않으면 일을 하지 않기 때문이다. 건물 하나 지으려면 3∼4년이 걸린다. 이 사회적 비용이 한때는 보니까 10조원이 넘었다. 이런 것을 싹 다 통합해버렸다. 소위 시스템 감사란 이런 것이다. 지금 정부 각 부처의 구조는 50년도 넘는 아주 낡은 체제인데 감사원이 이런 체제를 감사해서 없앨 것은 없애고 통폐합할 것은 통폐합해야 한다. 나라면 이런 구조조정부터 시작하겠다. 이게 바로 감사원의 진정한 역할이다.”

문재인 전 대표가 집권에 성공한다면 어떤 대통령이 되기를 희망하나? 그런 소망을 결론삼아 말한다면?

“탄핵이 인용돼 조기 대선을 통해 집권한 대통령은 누가 되든 굉장한 어려움에 봉착할 것이다. 깨진 국가질서 회복이 가장 중차대한, 그리고 시급한 과제 아닐까? 공정해야 하고, 투명해야 하고, 법과 원칙에 따라서 국가를 통치해야 한다. 그게 바로 국가 시스템의 복원이다. 개인적인 또는 정파의 이해관계를 좇아서 일하다 보면 국민의 분노가 다시 분출할 것이다. 문 전 대표도 그 점을 두려워해야 한다.”

- 글 한기홍 월간중앙 선임기자 glutton4@joongang.co.kr / 사진 주기중 기자 clickj@joongang.co.kr

201703호 (2017.02.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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