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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 기획연재 | ‘리셋 코리아-마을이 답이다’(1)] ‘주민’에서 ‘시민’으로 

일본 미야자키(宮崎) 아야(綾) 마을에서 가능성을 발견하다 

임현진 서울대 명예교수 / 공석기 서울대 아시아연구소 연구교수
농민을 견인하기보다 제도적·기술적으로 지원하고 기업과 연계해 농업혁신 꾀해…한국 기업은 지역 분열을 야기하고 개발이익 독차지, 지렛대는커녕 걸림돌

2017년 대한민국의 봄. ‘리셋 코리아(Reset Korea)’가 화두다. 직면한 현실에 분노하거나 절망하는 대신 미래지향적으로 승화하자는 혁명적 발상이다. 그러나 ‘리셋’은 제도 개혁만으로는 가능하지 않다. ‘사람이 문제’다. 진보와 보수의 개념도 차후다. 대안으로 다시 지역공동체의 사회적경제를 살펴본다. 월간중앙이 이번 호부터 ‘리셋 코리아-마을이 답이다’를 새로 연재하는 이유다. 오랫동안 지역공동체에 주목했던 임현진 서울대 명예교수와 공석기 서울대 아시아연구소 연구교수가 탐욕을 넘어 공동체정신의 회복에서 ‘리셋 코리아’의 가능성을 찾아본다. _ 편집자

공동사회에서 이익사회로 바뀌는 과정에서 생존을 위해 치열하게 경쟁하는 와중에 소중한 가치와 삶의 토대를 잃고 만 한국사회. 그 회복 가능성은 지속가능한 사회적경제를 꾸릴 수 있는 지역공동체에 있다. 한국사회는 과연 ‘주민’을 넘어 ‘시민’으로 변화할 수 있는 가능성이 있는가? 그 실마리를 풀어보고자, 가난한 시골 농촌에서 지속가능한 도농복합형 지역공동체를 이뤄 윤택한 지역으로 변모한 일본 규슈(九州) 미야자키(宮崎)현 아야(綾)정을 찾았다.


▎아야 마을 하야카와(早川)농장은 건강하고 안전한 먹거리를 제공한다는 농업철학을 관철하기 위해 고집스럽게 유기농법을 유지한다.
세계를 돌아보면 한국만큼이나 역동적인 나라도 드물다. 길거리를 오가는 사람들은 활기에 넘친다. 가정·학교·직장에서도 사람들은 거의 뛰다시피 잰걸음을 걷는다. 넘어지더라도 멈출 줄 모른다. 그러나 최근 들어 한국은 마치 ‘러닝머신’에 서 있는 듯하다. 걸음은 바쁜데 앞으로 나아가지 못하고 제자리걸음이다. 1인당 국민소득 2만 달러를 넘어선 지 벌써 10년이 지났다. ‘30-50 클럽’ 가입을 눈앞에 두고 제자리를 맴돌고 있다. 30-50 클럽이란 인구 5000만 명 이상에 1인당 국민소득 3만 달러가 넘는 나라를 이른다.

지금의 저출산·고령화 추세가 이어진다면 한국의 인구는 2031년 5296만 명을 정점으로 해서 그 후로는 감소할 것으로 보인다. 2096년에는 반 토막이 되고, 2100년에는 2200만 명으로 줄어들 것이다. 2040년엔 한국 인구의 중위연령이 52세로 올라가고, 25% 정도의 일하는 사람이 65세 이상 노령자와 14세 이하 유년층을 먹여 살려야 한다. 결국 경제활동인구 급감으로 생산과 소비가 멈추는 ‘인구절벽→성장절벽→재정절벽→국가절벽’ 시나리오를 가상할 수 있다.

정신보다 물질, 특히 돈을 통해 만족을 이루려는 쾌락주의 사회에서는 더불어 사는 공동체를 찾기가 어렵다. 사회적 약자에 대한 관심과 배려보다 그들과 함께하는 삶을 혐오하는 프티 부르주아적 시민의 모습이다. 그 결과 정의와 형평이라는 사회적 가치를 추구하기보다 자신의 안위와 영달만을 생각하고, 자폐적 세계 속에 안주하는 도피적 삶을 추구하는 사람들이 증가하고 있다. 소위 혼밥·혼술·혼놀·혼영·혼행(혼여)족이 증가하는 것은 공동체의 약화에 따른 당연한 결과지만, 자기만의 세계로 도피 혹은 고독한 개인의 출현이라고 말할 수밖에 없다.

이러한 우리 사회 안팎의 위협과 도전을 맞아 우리 삶을 성찰하지 않을 수 없다. 그 정면충돌의 시간이 더욱 가까워졌다. 어찌 보면 이러한 충돌의 시간이 빨리 온 것에 감사해야 할지도 모른다. 최근 화두로 떠오른 ‘리셋 코리아(Reset Korea)’는 이러한 정면충돌에 대한 미래지향적 대응으로 이해할 수 있다. 작금에 우리가 직면한 현실에 분노하고 절망하는 대신 미래지향적으로 승화시키기 위한 매우 혁명적 발상인 것이다. 그러나 외부 환경의 변화 혹은 내부 제도의 개혁만으로는 리셋이 가능하지 않다. 진보와 보수 중 어느 쪽이 항상 옳다고 말하기는 어렵다. 더 근본적으로 ‘사람이 문제’라는 생각에서 출발해야 한다. 우리 각자가 서로 다른 가치관과 세계관을 갖고 있더라도, 이것들을 사회적 합의 과정을 통해 공통의 과제로 구현할 수 있는가가 더욱 중요하다.

이러한 사회적 합의를 통한 협력의 과정이 미시적 차원에서 어떻게 이루어지는지 주목할 필요가 있다. 물론 미시적 차원에 초점을 맞춘다고 해서 거시적 차원을 무시한다는 것은 결코 아니다. 지역의 사회적 경제활동 과정에서, 주민 개개인 삶의 변화 과정에서 리셋 가능성을 구체적으로 살펴보는 것이 이번 시리즈의 궁극적 목표다.

이를 위해 한국사회가 저성장 혹은 무성장 시대의 도전에 대한 대응과정으로 사회적경제 영역의 급격한 변화를 주목하고자 한다. 특히 풀뿌리 차원의 다양한 사회적경제 활동을 중심으로 개인들이 협력·결속·공생·연대를 위해 노력하는 과정에서 ‘주민과 시민 사이’를 오가는 우리 사회의 현주소를 성찰적으로 조명하고자 한다.

풀뿌리 사회적경제 활동을 주도하는 새로운 경제조직 단위로는 마을기업·사회적기업·협동조합과 중간 지원조직을 들 수 있다. 지역에서 이러한 새로운 경제조직을 적극적으로 활용해 교육·주거·복지 등의 소소한 사회적 서비스를 해결하기 위해 노력한다면, 이를 통해 풀뿌리 지역주민들은 상생·연대·나눔·소통의 경험을 이어가면서 서로 신뢰를 쌓음으로써 다시금 공동체를 구축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이것이 오로지 마을 경계 안에서만 머무른다면 어떨까? 자신의 생각과 활동범위를 제한된 삶의 경계 안으로만 제한한다면 그것으로 인해 사회 변화를 가로막는 부작용이 나올 수 있다. 주민으로서 건강한 마을공동체 구성원이 되는 것이 무엇보다 중요하다. 그런데 단순히 주민으로서의 삶에 안주한다면 이 또한 지역(마을)이기주의로 전락할 수 있다. 주민에서 시민으로 나아가는 것이 ‘리셋 코리아’의 핵심 과제라고 한다면, 사회적경제 영역은 중요한 실천의 장이 될 수 있다.

한국사회는 과연 주민을 넘어 시민으로 변화할 가능성이 있는가? 물론 서구사회의 오랜 경험에 비추어 아직 실천 경험이 충분하지 않은 현실을 고려할 때 진단과 전망은 시기상조일 수 있다. 이런 이유에서 우리보다 조금 앞서 시작한 이웃 일본 한 마을의 주민의 자립 경험은 많은 시사점을 준다. 그 실마리를 풀어보고자 일본 현지를 방문했다.

로컬푸드 연구자라면 이미 잘 알려진 이탈리아 트렌토(Trento)의 슬로푸드 운동과 일본 규슈(九州) 미야자키(宮崎)현 아야(綾)정의 마을 만들기 운동 사례를 직접 살펴보고자 할 것이다. 지난 2월 1~4일 4일 동안 규슈 남단에 위치한 아야 마을을 방문했다.

아야 마을은 우리의 읍/면 규모로 1970년대까지만 해도 가난한 시골 농촌이었다. 그러나 고다 미노루(鄕田實) 정장의 리더십과 지역 주민들의 공동 노력으로 40여 년의 변신 노력 끝에 농민·농촌·농업의 6차 산업화 전형을 이루면서 지속가능한 경제생활이 이루어지는 지역으로 거듭났다. 또한 도농복합형 지역공동체를 이뤄 규슈에서 가장 윤택한 지역으로 변모했다.

우리는 그동안 한국 로컬푸드의 혁신 과정을 연구하면서 아야 마을의 경험에 주목했다. 고다 정장의 리더십, 운카이슈조(雲海酒造)사와 지역 주민의 협력, 지역 농산품 가공 혁신 및 브랜드 전략, 삼림생태계 보존을 통한 친환경적 문화관광사업 전략, 그리고 무엇보다 주민 스스로 협력과 연대를 통한 상호 신뢰 구축 등이 몹시 인상 깊었다. 그러다 이번에 월간중앙을 통해 미시적 차원에서 진행되는 한국의 사회적경제 활동 사례를 소개하기로 하면서 먼저 아야 마을을 방문해 우리 지역사회에 시사하는 바가 무엇인지 다시금 확인하고 싶었다.

3대(代)에 걸친 친환경 노력


▎고다 미노루 전 아야 정장의 딸인 고다 미히코 여사가 운영하는 식당이자 약국이며 숙소. 이 3가지 기능이 연결돼 있다.
미야자키국제대학 홍정표 교수와 카사이 아야(笠井綾) 교수의 도움으로 짧은 일정임에도 아야 마을을 구체적으로 보고, 듣고, 맛보고, 만나는 시간을 가졌다. 상담치료 전공인 카사이 교수는 조엽수림의 생태계를 보전한 아야 마을을 몹시 사랑했다. 우리의 방문조사 계획을 듣고 아야 마을 지역공동체의 다양한 면모를 경험할 수 있도록 모든 방문 장소와 인터뷰 섭외를 완벽하게 진행해주었다.

아야 마을에 들어서자 연구를 통해 이미 정보를 갖고 있던 익숙한 장소들-아야성·슈센노모리(酒泉の杜)·혼모노센터(농산물 및 가공품 직매장)·스포츠센터 등-이 눈에 들어왔다.

아야 마을 방문 첫날, 숙소를 찾기 위해 먼저 들른 곳은 약국이었다. 중년의 여성(나중에 알고 보니 노년이었다)이 반갑게 맞아주었다. 약국 옆으로 작은 식당이 연결돼 있고, 그 뒤로 오래된 살림집과 숙박 시설인 약선숙사(藥膳宿舍, Organic Goda)가 이어져 있었다. 이름부터 여느 숙박 시설과 차이가 있었다. 친환경적으로 말끔하게 지은 숙소였다. 조그만 지역이라 어느 식당에서 저녁식사를 해야 할지 고민했는데, 주인이 자신의 식당에서 카사이 교수와 저녁식사를 할 것이라고 전했다. 왜 하필 이 식당일까 더욱 궁금해졌다. 그때까지만 해도 우리가 묵을 약선숙사와 약국, 식당의 연결고리를 찾지 못했던 것이다. 환상적인 저녁식사 자리에서 이 모든 것이 고다 미노루 전 시장과 연결돼 있음을 확인하게 됐다.

저녁식사는 오후 6시 정각에 시작됐다. 유기농 저녁식사라는 말에 별 기대를 하지 않았는데 연이어 나오는 요리를 보고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카사이 교수는 왜 이곳을 숙소로 정했는지 설명해주었다. 우리가 궁금해 하던 약국의 주인 여성은 식당의 주방장이자 숙소 주인으로, 요리연구가였다. 그러나 더 중요한 사실은 아야 마을을 윤택한 자립마을로 변모시키는 데 가장 큰 역할을 한 고다 미노루 전 정장의 딸인 고다 미히코(鄕田美紀子) 여사였다는 점이다.

미히코 여사에게 1999년 한국어로 번역된 고다 미노루 전 정장의 자전적 저서 <숲을 지켜낸 사람들>을 감동 깊게 읽었노라고 인사했다. 고다 여사는 크게 기뻐하면서 최근 증보해 재출판한 책을 선물로 건네면서 자신의 삶을 조금씩 풀어놓았다.

고다 여사는 지금 사는 집에서 태어났다고 한다. 약사이자 농장을 경영하면서 직접 농사지은 농산물로 각종 음식과 반찬을 개발하는 요리연구가이기도 하다. 현재는 약사로서 각종 유기농산물이 건강에 얼마나 기여할 수 있는지 한방과 연결해 연구하고 있다고 소개했다. 한방에 기초한 다섯 가지 맛을 조화롭게 결합해 섭취할 수 있는 유기농 요리를 개발 중이라고 했다. 그 결과를 지역은 물론 전국적으로 알리는 시민사회 활동가이기도 하다.

고다 여사는 현재 아버지 고다 전 정장의 ‘친환경 지산지소(地産地消)’ 정신을 세대를 걸쳐 이어가고자 노력하고 있었다. 7년 전에는 친환경 숙박업을 통해 친환경 정신 계승 노력을 구체화하기도 했다. 약선숙사 옥상에는 태양광 발전 패널을 설치했다.

지금은 아버지가 정장 재임시절 가장 소중하게 여겼던 조엽수림(照葉樹林)의 아름다운 풍광을 해치는 송전탑 건설 반대운동을 펼치고 있었다. 이미 10여 개의 송전탑이 건설됐지만, 장기적으로 아야 마을이 에너지 자립마을로 성장해 송전탑을 철거할 수 있도록 지역주민의 목소리를 모으고 있다고 했다. 무엇보다 아야 지역을 병풍처럼 둘러싼 아소-구주 국립공원의 아름다운 산하를 송전탑이 망쳐놓고 있다며, 그것을 철거해야 한다고 했다.

농민 견인하기보다 지속가능에 초점


▎고다 미히코 여사가 운영하는 식당에서 차려낸 유기농 저녁식사가 정갈하다.
약선숙사는 일본 전역의 친환경농업을 추구하는 사람들이 모이는 곳이기도 하다. 아야 마을을 연구하는 연구자로부터 지역정책연구자와 농촌활동가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사람이 약선숙사에 머무르면서 지속가능한 지역을 만들기 위한 영감을 얻고 있다.

고다 여사는 4남매를 두었는데, 첫째 아들은 아야 지역에서 친환경 농업으로 농장을 운영한다. 둘째 아들은 약사로서 고다 여사의 한방 연계 건강 프로젝트인 ‘한방약선(漢方藥膳) 오미조화(五味調和)’ 연구에 참여하고 있으며, 셋째 아들은 약선숙사 매니저로 일한다. 그리고 막내딸은 어머니의 유기농 음식 및 요리 개발을 돕고 있다. 92세의 고다 미노루 전 정장의 부인인 어머니를 모시면서 3대가 친환경농업에 종사하며 아야 지역공동체를 지키고 있다.

이들 가족은 고다 전 정장의 친환경 생태계 보존 정신을 계승하기 위해 3대에 걸쳐 가족 전체가 자연·지역·대안 사회를 구체적으로 실천하고 있다. 고다 여사의 삶에 대한 겸손한 나눔 속에서 작지만 강한 여성 리더십을 확인할 수 있었다.


▎고다 미히코 여사는 연배보다 한참이나 젊어 보였다. 가운데 중년으로 보이는 이가 고다 여사. 왼쪽은 필자인 임현진, 오른쪽은 공석기 교수다. 작은 사진은 미히코 여사의 아버지가 쓴 <숲을 지키는 사람들> 증보판.
풍성한 유기농 저녁식사와 함께한 3대에 걸친 고다 가족의 아야 마을에 대한 사랑과 헌신, 그리고 공동체적 삶의 이야기는 늦은 밤까지 이어졌다. 우리는 고다 미노루 정장이 아야 마을을 얼마나 사랑했는지, 그 사랑을 바탕으로 어떻게 40여 년 동안 헌신적으로 아야 마을을 친환경적으로 지속가능하게 변화시켰는지에 대해 많은 이야기를 나눴다. 한국에는 과연 세대를 이어가며 농촌·농업·농민을 사랑하는 가족이 얼마나 존재할까 생각해 보니 고다 여사의 삶이 너무 소중해 보였다. 이번 아야 마을 방문 중 가장 큰 성과는 고다 여사와의 감동적 만남이었다.

방문 이틀째, 우리는 본격적으로 아야 마을의 다양한 현장을 방문했다. 마에다 미노루(前田穰) 아야 정장에게 현재 아야 마을에서 집중하는 사업이 무엇인지 물었다. 마에다 정장은 아야 마을이 2012년 7월 일본에서 다섯 번째로 유네스코의 생물권보존지역(Biosphere Reserve)으로 지정된 것을 매우 자랑스러워 했다. 7300명 규모의 기초자치단체가 유엔에 스스로 에코파크 등록을 추진해 인정받은 것은 처음 있는 일이기 때문이다.

아야 마을은 현재 자연과 함께하는 도농복합형 지역공동체를 유지하는 것을 목표로 다양한 자연문화관광사업을 추진하고 있었다. 특히 데루하(照葉) 출렁다리(길이 250m, 최고높이 142m)는 1984년 준공 이후 2011년 보강공사를 걸쳐 연중 150만 명의 아야 마을 방문객이 꼭 들르는 명소가 됐다. 초기 건설 과정에서 정부 보조금 없이 추진하는 것에 주민들의 반대가 있었지만, 고다 전 정장의 설득으로 결국 자연과 인간의 조화로운 삶을 이해할 수 있는 명소가 됐다. 지금은 투자대비 몇 배의 수익을 올리고 있다.

마에다 정장은 조엽수림을 비롯해 현재 아야 지역에서 진행되는 다양한 수익사업은 지속가능하게 유지돼 특별히 보조금 지원이 필요하지 않다고 강조했다. 한국의 경우 로컬푸드 직매장에서 판매하는 제품의 대부분은 직접생산의 결과물이다. 그런데 아야 마을의 경우는 직접생산물 외에 다양한 지역 특산 가공식품을 판매한다. 이들 지역 특산물을 가공한 식품이 매우 다양해 놀라지 않을 수 없다. 농업혁신의 한 측면이 바로 농산물의 다양한 상품화에 있기 때문이다.

마에다 정장에게 농산물 가공식품 개발을 위한 전략이 무엇인지 물었다. 그는 아야에서 생산하는 농·축산물을 가공식품으로 개발하기 위한 전략을 소개했다. 아야 마을의 농산물은 신선하고 신뢰할 만한 농산물로 정평이 나 있기 때문에 소주·소면·기름·주스·잼 등 수십 가지 가공식품을 개발해 일본 전역에 판매하는 한편 선물 세트로 만들어 방문객들에게도 판매한다고 한다.

중요한 점은 가공식품을 개발할 때 농민이 스스로 부담하거나 지자체가 전적으로 부담하는 것이 아니라 중소기업들이 아야 마을 농산물을 다양한 가공식품으로 개발하는 데 적극적으로 참여한다는 것이다. 사실 이러한 기업의 참여 없이는 농산물 판매를 증가시키기 위한 혁신을 이루기가 쉽지 않다.

우리의 경우, 완주 로컬푸드협동조합에서 추진하는 한국 고유 종자인 진양콩을 두유로 가공하는 기술투자를 정부의 지원금으로 진행하고 있다. 왜 우리는 중소기업들이 스스로 이 과정에 참여하지 못할까? 최근 한국에서 활성화하는 몇몇 로컬푸드 직매장은 일본의 직매장보다 연평균 매출규모가 훨씬 높다는 것에 일본인들도 놀란다. 그러나 직매장의 판매 품목이 직접생산 농산물로 제한돼 외부시장의 도전을 받을 때 경쟁력에서 자신할 수 없다는 것에 주목해야 한다.

아야 정장이 자신 있게 지역 특산품을 보여주면서 그 가공식품을 열거할 때 이것이 바로 농업혁신이고, 농업과 기업이 만나야 할 부분임을 확신할 수 있었다. 한국의 로컬푸드 직매장은 분명 일본을 추격하고 있지만, 농업 혁신의 중심이 되는 가공식품 개발 면에서는 일본에 크게 뒤처져 있음을 확인할 수도 있었다. 특히 아야 마을 특산 과일인 ‘휴가너츠(日向夏)’를 다양한 가공식품으로 개발하는 것에 강한 인상을 받았다. 이제 제주도의 경우도 지자체가 감귤초콜릿을 넘어 지역 특산품을 더욱 다양한 가공식품으로 개발하는 데 기업의 적극적 참여를 유인하는 정책을 강구할 필요가 있는 것이다.

사회적 책임의 모범을 보인 운카이슈조사


▎아야 마을 특산물로 만든 가공식품들. 아야 마을은 직접생산물을 가공해 지역 특산품으로 판매한다. 농업혁신의 중요한 측면은 바로 농산물의 다양한 상품화에 있다.
지자체의 농업과 농민에 대한 지원제도로 유기농업개발지원센터의 역할도 주목할 만하다. 아야 마을은 1988년 자연생태농업 추진에 관한 조례를 제정했고, 1989년에는 지역 농산물 직거래장인 혼모노센터를 개설했다. 특히 자연생태농법을 농민들이 지속적으로 선택하도록 기술 지원과 좋은 토양을 유지하기 위한 사업을 추진했다. 우선 아야 지역 토양을 전수조사해 각 토양 상태에 따라 퇴비를 적절하게 제공할 뿐 아니라 음식물쓰레기 퇴비화 시스템을 구축해 유기농업에 필요한 지역 생태계 순환 시스템을 구축했다.

아울러 과학적 평가 원칙을 따르는 농업생산물 인증 시스템을 도입해 혼모노센터 및 산지 직송 농산물에 대한 신뢰할만한 인증 절차를 만들었다. 이러한 오랜 경험을 통해 농민들은 인증 절차를 성실히 수행해 아야 마을 농산물이 가장 안전한 먹거리라는 명성을 얻게 됐다.

이러한 인증 절차를 일본 전역으로 확대해 ‘아야 브랜드를 일본 전역에 판다’는 말이 나올 정도로 아야 농산물은 일본 전역에서 안전한 먹거리의 상징이 됐다. 이처럼 아야 마을은 농민을 견인하기보다 농민들이 안심하고 농업에 전념할 수 있도록 제도적·기술적으로 지원하고 동시에 기업과 연계를 통한 농업혁신을 지원한다.

우리의 경우는 지자체가 농민의 자발적 참여를 유인하기보다 보조금에 기초한 농업육성정책에 지나치게 초점을 맞추는 경우가 많다. 농민이 자립기반을 갖추기 위해서는 지자체 주도의 예산 지원보다 신뢰할 만한 제도적 지원과 기업과 수평적 연계를 통한 협력을 진행할 수 있는 환경을 마련하는 것이 절실하다 하겠다.


▎1989년에 개설한 지역 농산물 직거래장인 혼모노센터. 아야 마을은 산지 직송 농산물에 대해 신뢰할 만한 인증 절차를 만들고 이를 성실히 수행해 아야 마을 농산물이 가장 안전한 먹거리라는 명성을 얻게 만들었다.
아야 지역에서 대규모 기업 유치와 관련해 주목할 만한 사례가 있다. 고다 미노루 전 정장이 견지한 기업의 사회적 책임(CSR) 원칙과 관련된 내용이기에 소개한다. 아야 마을 방문자가 꼭 들러야 하는 명소인 슈센노모리(酒泉の杜)가 바로 그곳이다. 슈센노모리는 3만7000㎡의 광활한 대지에 자리한 술문화 테마파크다. 이곳에서는 소주·청주·포도주·맥주 등 각종 주조공장을 견학하며 무료로 시음할 수 있다. 그 옆에는 와인공장, 온천과 여관, 유리공예·수공예 등의 체험형 테마파크가 마련돼 있다.

이렇게 아야 마을에서 대규모 기업이 성공하게 된 배경에는 바로 고다 전 정장과 수평적 협력관계와 기업의 사회적 책임성을 강조한 주민들, 그리고 운카이슈조사의 합의가 있었다. 아야 지역은 풍부한 조림과 깨끗한 물로 유명하다. 처음 운카이슈조가 아야 마을에 공장을 짓고자 했을 때 고다 전 정장과 주민은 다음과 같은 요구를 했다.

“주조회사는 분명 물을 많이 사용하기에 배수에 신경써 홍수 피해가 없어야 한다./ 공장건물은 아야의 경관을 해치지 않도록 지역환경과 조화를 이루어야 한다./ 술의 주요 원료인 고구마는 가급적 아야에서 생산한 고구마를 써야 한다./ 직원을 채용할 경우 전문 기술자를 제외하고는 아야 지역 사람을 채용한다./ 청주나 소주 주조 공정을 견학할 수 있는 프로그램을 설치해 아야 관광의 주요 거점이 될 수 있도록 한다.”

회사는 이러한 요구를 성실히 지키기로 약속하고 공장 건설 후 필요한 시설을 갖추었다. 이러한 아야 마을과 운카이 슈조 사이의 지역발전을 위한 협력 사례는 기업의 사회적 책임에 대한 대표적 보기라고 할 수 있다.

한국의 지역개발 과정에서 기업의 사회적 책임은 어떻게 진행될까? 기업이 지역 특색에 맞춘 개발이나 지역 주민과 수평적 협력관계를 유지하기는커녕 지역의 분열을 야기하고 개발이익을 독차지하는 부작용을 낳는 경우가 빈번하다. 지역 발전에 기업의 참여가 중요함에도 우리의 경우 지속가능한 농촌을 구축하는 데 기업이 지렛대로 역할하기는커녕 오히려 걸림돌이 되고 있다.

지역 농업에서 발견한 여성 리더십


▎하야카와 농장의 주인은 여성이다. 여성 리더십 아래 유기농법으로 농작물을 재배하며 지속적으로 안전한 먹거리에 대한 교육을 진행한다.
마지막으로 하야카와(早川)농장을 방문했다. 이곳은 유기농법으로 농산물을 재배하는 곳으로 유명하다. 최근에는 일본 주재 각국 대사가 방문해 더 유명해졌다. 농장 주인인 하야카와 여사는 20여 년 전 아야 마을에 들어와 농장을 시작했는데, 초기에는 이중의 차별로 큰 시련을 겪어야 했다. 농민이면서 여성이라는 편견에서 지역 주민들은 그녀에게 땅을 임대하는 것을 꺼려했다.

그래서 처음으로 임대한 농지는 산 속 깊은 곳에 위치했다. 유기농법으로 땅을 일구고 농산물을 재배하는 데 혼신의 노력을 다했지만 산짐승들이 농작물을 무차별적으로 훼손해 크게 실패했다. 이런 어려움을 극복하고 점차 농장 규모를 키우며 도시 쪽으로 확대해 지금의 모습을 갖췄다.

농장이 유기농법을 고집스럽게 유지하는 것은 건강하고도 안전한 먹거리를 제공하고자 하는 농업철학을 관철하기 위한 것이기도 하다. 그러나 무엇보다 하야카와 농장에서 주목해야 할 것은 농장에서 일하는 사람들의 연령 구성이다. 20대에서 70대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세대가 농장에서 협력을 하는 모습이 매우 인상 깊었다. 우리의 농촌은 고령의 노인들이 주로 농사를 담당한다. 최근에야 귀농으로 젊은 층이 조금씩 유입되는 형국이다.

그런데 하야카와 농장은 유기농업 관련 정책을 담당하던 공무원이 은퇴 후 참여해 유기농법으로 토양 강화를 책임지고 있다. 20대의 한 젊은이는 가업을 잇기 위해 이곳에서 유기농법을 배우고 있다고 말했다. 40대 후반의 한 남성은 마트에서 고된 일로 심신이 지친 상황에서 유기농산물에 관심을 갖게 돼 실험적으로 몇 년 참여하다 벌써 7년이 되었다고 한다. 또 다른 50대 중반의 남성은 미야자키현의 귀농 프로그램의 지원으로 농사일을 배우고 있다고 소개했다. 이처럼 10명 미만의 참여자가 서로 다른 목적과 상황으로 결합돼 있지만 모두 수평적 관계를 유지하면서 세대와 관계없이 농사일에 만족하며 열심히 일한다.

농촌의 고령화를 극복하는 대안으로 하야카와 농장의 운영방식은 많은 시사점을 준다. 우리 농촌에서도 하야카와 농장에서 진행하는 여러 가지 파생사업, 즉 체험학습 프로그램, 꾸러미 배송, 가공 농산물 개발 등을 하고 있다. 그러나 농장에 참여하는 사람이 누구인지, 그들 사이의 관계는 어떠한지가 중요하다.

하야카와 농장의 주인은 여성이다. 여성 리더십 아래 유기농법으로 농작물을 재배하며 지속적으로 안전한 먹거리에 대한 교육을 진행하는 모습이 신선하고 부러울 정도였다. 우리 농촌에서 여성 리더십은 어느 정도나 자리 잡고 있는가? 여성의 섬세하고 수평적인 리더십이 농촌·농업·농민의 미래를 이끄는 데 더욱 효과적일 수 있다는 것은 결코 가설이 아니다. 우리 농촌의 모습이 하야카와 농장처럼 바뀌려면 분명 많은 시간이 걸릴 것이다.


▎아야 마을 주민들과 운카이슈조사의 지역발전을 위한 협력 사례는 기업의 사회적 책임에 대한 대표적 본보기다. 운카이슈조 전경과 운카이슈조가 생산한 주류 제품들.
짧은 아야 마을 방문을 통해 우리는 몇 가지 키워드를 발견할 수 있었다. 리더십·신뢰·혁신·학습·지원이 그것이다. 이탈리아 트렌토, 일본 아야, 한국의 진안·홍성·원주에서 우리는 동일한 키워드를 마주하게 된다.

이 기획에서는 앞으로 한국사회의 사회적경제 영역에서 리더십·신뢰·혁신·학습·지원이라는 5가지 핵심 요건이 제대로 자리 잡아가는지 살펴보고자 한다. 주민들이 제대로 된 리더십과 조화를 이루며 신뢰를 형성해 단순한 지역의 경계를 넘어 대안을 모색하는 성숙한 시민으로 성장하는지 주목하고자 한다.

이 과정에서 민주주의 방식을 통해 일을 도모하면서 민주주의를 배우고 세워갈 수 있을 것이다. 주민 스스로의 혁신 노력이 끊임없이 이어져야 할 것이며, 공동화(空洞化) 현상을 겪는 농촌지역으로 귀농·귀촌·귀향이 지속가능하게 이루어지는지가 중요한 과제가 될 것이다. 또한 궁극적으로 풀뿌리 주민들이 사회적경제 활동을 통해 살맛에 돈맛을 더하는지 혹은 돈맛만 추구하는지 살펴볼 것이다.

결국 이러한 비판적 성찰은 주민 스스로 협동적 가치를 최우선으로 여기는 시민으로 성장하는 과정에 대한 분석이 될 것이다. 마을에서 답을 찾기 위한 또 하나의 행보다.

고다 미노루(鄕田 實)는 1919년 미야자키현 아야정에서 출생했다. 제2차 세계대전 후 아야정 농업협동조합 서무과장을 시작으로 3기에 걸쳐 부정장을 역임한 뒤 1966년 정장에 당선돼 연속 6기를 역임했다. 고다 정장은 아야정의 조엽수림을 보존해 생태계에 기초한 문화관광산업을 육성했다. 특히 산과 물이 좋은 아야 지역 특색에 맞춘 마을 가꾸기에 혼신을 다해 아야정을 일본 전역에 유기농업과 로컬푸드의 1번지로 알리는데 큰 역할을 했다. 1999년 타계했지만 그의 정신은 지금도 계속 이어지고 있다.

임현진(林玄鎭, Hyun-Chin Lim) hclim@snu.ac.kr - 서울대 명예교수. 학술원 회원. 서울대를 졸업하고 미국 하버드대에서 사회학으로 박사학위를 받았다. 경실련 공동대표, 사회과학협의회장, 서울대 사회과학대장, 아시아연구소 창립소장을 지냈다. 주요 저서로 <글로벌 NGOs> <세계화와 반세계화> <지구시민사회의 구조와 역학> <뒤틀린 세계화> <글로벌 패러독스> <아시아의 부상> 등 50여 권이 있다.

공석기(孔錫己, Suk-Ki Kong) skong@snu.ac.kr - 서울대 아시아연구소 연구교수. 경희대 공동대학원 겸임교수. 환경경운동연합 국제협력위원회와 서울시 공정무역위원회 위원. 서울대 사회학과를 졸업하고 동 대학원에서 사회학 석사학위를, 미국 하버드대에서 사회학 박사학위를 받았다. 주요 저서로 <글로벌 NGOs> <인권으로 읽는 동아시아> <인권사회학> <뒤틀린 세계화> 등이 있다.

201703호 (2017.02.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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