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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버럴 아츠의 심연을 찾아서] 바로크 양식은 17세기 시칠리아에서 태동했다 

신에게 바치는 선물이자 신에게서 물려받은 사명 

글·사진 유민호 월간중앙 객원기자, ‘퍼시픽21’ 디렉터
좌우 균형을 깬 바로크는 모두의 눈에 이상하게 받아들여지던 이단(異端) 양식
17세기 패권국가 스페인, 막강 국력을 크고 호화로운 시칠리아 교회 건립에 투자


▎시칠리아 수도 팔레르모 중심에 있는 두오모(Duomo) 야경. 시칠리아에서 가장 큰 바로크 건축물이다.
영화 이야기부터 시작한다. 1964년 칸 영화제에서 남우주연상을 수상한 <유혹한 뒤 버리기(Sedotta e abbandonata)>라는 흑백필름 작품이다. 영화 황금기이던 1960년대 이탈리아를 대표하는 작품으로, 감독은 사실주의의 거장 피에트로 제르미(Pietro Germi)다. 영화에 관심이 없는 사람이라도 <이탈리아 스타일 이혼(Divorzio all’italiana)>에 관한 얘기는 들어봤을 것이다. 21세기 조니 클루니에 비견될 수 있는 이탈리아를 대표하는 배우 마르첼로 마스트로야니가 주인공으로 나온 영화로, 역시 제르미 감독의 작품이다. 이탈리아 스타일 이혼은 블랙코미디 영화의 최고봉에 선, 고전 중의 고전이다. 제르미 감독은 원래 선원에서 시작해 영화 엑스트라를 전전하다가 직접 영화를 만든 특이한 경력의 소유자다. 직접 각본을 만들거나 깊이 관여하면서 작품을 풀어나가는 스타일로, 가끔씩 자신의 영화 속에 단역으로 나오기도 한다.

<유혹한 뒤 버리기>가 칸에 입상할 당시의 최고 영화상은 카트린 드뉘브가 주연한, 그 유명한 <쉘부르의 우산>이다. 프랑스의 칸, 이탈리아의 베니스, 독일의 베를린은 세계를 대표하는 3대 영화제의 무대다. 이들은 추구하는 방향과 원칙·가치는 서로 다르다. 칸은 작품의 완성도를 중시하는 영화제다. 베니스는 전통에 근거한 고전적인 미적 감각에 주목하고, 베를린은 새로운 양식이나 가치 발견에 후한 점수를 준다. 프랑스라는 홈그라운드 이점을 이용해 <셀부르의 우산>이 정상에 올랐지만, 제르미의 <유혹한 뒤 버리기>도 결코 최고상 못지않은 수작이다.

<유혹한 뒤 버리기>는 시칠리아의 구습(舊習)에 신음하는 여성에 포커스를 맞춘 작품이다. 결혼 전에 이성과 관계를 갖거나 임신할 경우 반드시 결혼해야만 한다는 시칠리아의 전통을 코미디 기법으로 다뤘다. 관계 후 도망가는 남자와 부모의 성화로 결혼을 해야만 하는 임신한 여성 간의 갈등과 주변 인물, 나아가 시칠리아 전체 분위기에 관한 묘사가 흥미롭다.

1960년대 본토의 이탈리아인들조차 신기하게 봤을, 시칠리아만의 독특한 문화와 정서가 묻어나는 영화다. 이탈리아 블랙 코미디의 특징이지만, 웃기기는 하지만 가슴속 깊은 곳에서는 애수(哀愁)가 밀려온다. 흑백으로 간단히 양분할 수 없는 입체적 느낌의 영화라고나 할까? 수차례 봐왔지만, 매번 새롭게 느껴진다.

1964년 개봉된 <유혹한 뒤 버리기>와 <맨발의 청춘>


▎아래쪽에서 올려다본 두오모.
영화는 여러 가지 차원에서 분석·해석될 수 있다. 보통 기승전결 스토리를 통한 새로운 가치나 캐릭터 발견, 나아가 배우의 연기력이나 감독의 작품성 같은 것들이 주된 소재 또는 주제에 해당된다. 최근에는 음악 특수 장치나 디지털 효과 같은 것들도 중요한 요소로 떠오른다.

필자의 경우, 많은 요소 가운데 특히 영화 속에 등장하는 거리나 뒷배경을 주의 깊게 본다. 공간적, 환경적 부분이다. 스토리를 따라가거나, 주인공의 연기에 가려져 놓치기 쉽지만, 영화 속 배경을 보면서 당시의 상황을 이해하는 식이다. 따라서 흑백필름 영화가 주된 대상이 된다. 영화 <맨발의 청춘>에서 건달 신성일과 착한 부잣집 딸 엄앵란의 데이트를 보면서 그들 뒤에 드리워진 거리·간판·건물들을 보는 식이다. 물론 당시의 모습을 보면서 자연히 현재와 비교하게 된다.

2017년 서울의 모습과 흑백필름 <맨발의 청춘> 당시와의 공통분모는 얼마나 될까? 서울역, 남대문을 제외할 경우 통째로 변했을 듯하다. 이탈리아 영화는 다르다. 1960년대 흑백필름, 아니 20세기 초 무성영화를 본다 해도 2017년 현재의 모습을 발견할 수 있다. 공교롭게도 맨발의 청춘은 <유혹한 뒤 버리기>와 같은 1964년도 출시작이다. 53년 전 영화를 통해본 시칠리아의 과거지만, 서울과 달리 지금도 거의 비슷한 모습으로 남아 있다.

건축물은 필자가 제르미 감독의 <유혹한 뒤 버리기>에 빠진 이유 중 하나다. 남자의 유혹으로 엉겁결에 임신한 10대 여성 안젤라(Angela) 역의 스테파니아 산드렐리의 꽉 찬 연기도 좋지만, 거리로 뛰쳐나간 안젤라의 뒷배경으로 서 있는 기품 있는 건축물들도 눈에 들어온다. 영화를 반복해서 볼수록 다른 이탈리아 도시에는 물론, 그 어떤 나라에서도 보기 어려운 시칠리아만의 건축물에 빠져든다.

지난해 말 시칠리아에 들른 이유는 바로 그 같은 영화 속의 공간적 무대에 관한 ‘특별한 기억’ 때문이다. 반세기 전 영화 속에 등장한 건축물들이 과연 어떤 것인지 직접 눈으로 지켜보고 싶었다. 시칠리아의 공간적 의미를 이해하는 영화로 1970년대 <대부(代父)>를 내세우는 사람도 있을 듯하다. 컬러가 아니라, 흑백필름이 가져다주는 묘한 노스탤지어는 결코 무시할 수 없다. 음악, 스토리, 배우들의 연기력이란 관점에서의 <대부>는 좋지만, 영화 속에 등장하는 뒷배경에 관한 부분은 <유혹한 뒤 버리기>가 한 수 위다.

모든 것이 그러하듯 결론은 종이 한 장 차이다. 단순히 말해 최종 결론은 그냥 죽음이다. 인생의 재산은 기억과 추억에 있지 않을까? 기억을 풍부하게, 추억을 아름답게 만드는 것은 결론이 아니라 과정에 있다. 여행도 마찬가지다. 여행의 진수는 여행을 떠나기 전의 과정에 있지 않을까? 현지 사정, 역사, 문화에 대해 공부하고 계획하는, 여행에 앞선 시간들이다. 현지에 가서는 머릿속에 든 것을 확인하고 실천할 뿐이다. 열심히 찾아 헤맬 경우 새로운 것을 조금 더 보태는 추억 만들기도 가능하다.

이탈리아 건축성지(聖地) ‘발 디 노토(Val di Noto)’


▎팔레르모 바로크 건축을 대표하는 콰트로 칸티. 곡면으로 굽은 벽면에 시칠리아 역사의 주인공들이 들어서 있다.
<유혹한 뒤 버리기> 영화 속의 배경 건축물이 17세기 시칠리아에서 탄생된 바로크 양식이란 사실은 이탈리아 역사의 기본에 해당된다. 관련된 논문과 글이 엄청나게 많다. 유네스코는 이미 2002년 시칠리아 바로크 양식의 건물들이 모여 있는 ‘발 디 노토(Val di Noto)’ 지역을 세계문화유산으로 지정했다. 시칠리아 섬에서 셋째로 큰 도시인 시라쿠사(Syracuse)에서 바로 남쪽으로 30여㎞ 떨어져 있다. 18세기 말에 최고 절정에 달한 후기 바로크 양식 건축물의 보고(寶庫)로서 세계문화유산에 등재됐다. 이탈리아인들이 노토라 부르는 지역은 건축전문가라면 반드시 들르는 건축성지(聖地)와 같은 곳이다. 건축물 하나하나가 세계적 의미를 갖는, 명동 대성당 크기를 넘어서는 초대형 규모다.

12월 말의 이탈리아 아니, 유럽 전역은 유령도시로 변한다. 연말이 되면 거의 모든 상점이 문을 닫고 가족과 시간을 보낸다. 교회에 가서 종교의식에 참가하는 일도 중요하다. 덕분에 유럽의 연말은 조용히 차분하게 지낼 수밖에 없다. 필자의 연말여행 이동시간은 보통 성탄절 전후나 1월 1일 전후다. 많은 호텔이 문을 닫는 과정에서 호텔을 잡기도 어렵고 비용도 올라간다. 시간과 숙박비도 아낄 겸, 성탄절 심야버스와 열차가 필자의 연말 여행기간 중의 주된 무대다. 시칠리아로 들어가는 여정도 마찬가지다. 시칠리아는 보통 배로 들어간다. 남쪽 끝까지 내려가 기차를 타고 갈 수도 있지만, 오래 걸린다. 나폴리와 팔레르모 사이의 항로가 가장 빠르고 일반적이다. 저녁 6시에 나폴리에서 출발해, 아침 6시 시칠리아 수도 팔레르모에 도착한다. 시즌에 따라 다르지만, 특등석 침대의 경우 운임을 포함해 대략 80달러 정도다.

12월 24일 저녁 6시. 정원의 30% 손님만 탄 배가 천천히 떠난다. 원래 나폴리와 시칠리아 사이의 바다는 그리스 신화 속에 나오는 요괴(妖怪) 사이렌(Siren)이 살던 곳으로 통한다. 사이렌 소리의 어원이 된 사이렌은 아름다운 노래나 특이한 소리를 통해 선원들의 정신을 빼앗는 존재다. 바위나 얕은 바다로 배를 유인해 난파시키고 선원 모두를 수장시키는 신화 속 캐릭터다. 선원에게 여객선 가운데 사고를 만난 적이 있는지 물어보자, 어둠 속에 숨어 있는 불빛을 가리킨다. 다른 여객선이 눈에 들어온다. 만약을 대비해, 일정한 거리를 유지하면서 다른 여객선도 함께 항해에 나선다.


▎1. 시칠리아는 어디를 가봐도 석공들을 쉽게 만날 수 있다. / 2. 시칠리아 레몬의 맛은 이탈리아의 어느 지역보다도 강하고 진하다.
이미 2012년 1월 때 사건이지만, 토스카나 해변에 좌초한 이탈리아 여객선 코스타 콩코르디아에 관한 기억이 새롭다. 4200명을 태운 초대형 크루즈선으로, 사고가 나자 술을 마시던 선장이 가장 먼저 도망친 황당한 사건이다. 세월호 사건과 달리 희생자는 20명 선에 그쳤지만, 무책임한 선장에 관한 얘기는 이탈리아인 모두의 수치로 받아들여졌다. 당시 이탈리아인 모두가 비난하면서 던진 편견에 가까운 말이 하나 있다. ‘앙코라 나폴리타노(Ancora Napolitano)!’ ‘나폴리인이 또다시’라는 의미다. 이탈리아인 99%는 도망친 선장의 횡설수설하는 변명을 듣는 순간 나폴리 발음이란 것을 알았다. 긍정적인 부분도 많겠지만, 무책임·태만·변명·음주·도박·폭식은 나폴리에서 연상되는 부정적 이미지에 해당된다.

새벽 6시 멀리 팔레르모 항구가 눈에 들어왔다. 배가 도착하기 10여 분 전인데도 모두가 나와서 통로에 서 있다. 비행기 도착 시 나타나는 사람들의 행동유형은 선후진국을 가늠하는 기준 중 하나다. 비행기가 완전히 도착하기 전인데도 뭐가 그렇게 바쁜지, 안전벨트를 풀고 짐을 챙긴 채 통로에 서서 기다린다. 밖으로는 빨리 나갈 수 있겠지만, 선진국으로 갈 길은 먼 나라의 사람들이다. 같은 이탈리아지만, 중북부와 전혀 다른 이색지대가 시칠리아다.

일그러진 진주, 바로크


▎1. 바로크 건축물은 교회나 관공서와 같은 공공건물만이 아닌 개인의 집에서도 찾아볼 수 있다. / 2. 입구에 설치된 그로테스크한 석상은 시칠리아 바로크 건축물의 가장 큰 특징 중 하나다.
바로크에 관한 이해는 시칠리아 바로크 건축물을 접하기 전에 알아야 할 기본 지식이다. 바로크는 15세기 르네상스에 이어 16세기 말부터 18세기 말까지 200여 년 가까이 풍미한 유럽의 문화유형이다. 건축·그림·장식·음악·의상에 이르는 거의 모든 영역을 대상으로 한다. 건축물로 한정할 경우, 1584년 로마에 세워진 예수교회(Chiesa del Santissimo Nome di Gesù all’Argentina)가 바로크 건축물의 효시로 알려져 있다. 바로크란 말은 포르투갈어 ‘Barroco’란 단어를 어원으로 한다. 일그러진, 뒤틀린 진주라는 의미다. 유럽 건축사의 기본은 조화와 균형이다. 지형이나 공간적 제약으로 인해 예외도 있지만, 기본은 좌우 균형에다 조화다. 15세기 르네상스는 물론, 13세기부터 시작된 고딕, 그 이전의 로마네스크, 비잔틴 나아가 고대 로마와 그리스 건축물 모두에 해당되는 원칙이다.

동양인이 보면 전부 비슷하게 보이지만, 서양 건축물의 경우 창문 하나 기둥 하나에도 시대적 배경을 확인해볼 수 있다. 화재나 붕괴로 인해 수선하고 개축하는 과정에서 앞뒤 시대가 뒤섞인 건축물도 많지만, 자세히 보면 대략 어떤 시대 어떤 풍의 건축물인지 이해할 수 있다. 건축에 관한 공부는 인류의 역사 그 자체에 대한 연구라 볼 수 있다. 인간이 거주하는 집이 아닌, 대규모 건축물은 신을 모시거나 공적인 일을 행하던 성스러운 곳이다. 최고급 재료에다 첨단기술을 동원해 완성한, 돈·권력·권위·지혜·지식·전통·역사가 하나로 결집된 완성체다. 건축물 내의 작은 부분 하나에도 반드시 의미가 있다.

일그러진 진주, 바로크는 출발 당시 모든 이의 눈에 이상하게 받아들여지던 이단(異端)에 해당된다. 중세 고딕 때라면 신을 모독하는 문화로 화형에 처해질 운명이다. 시칠리아 바로크는 로마나 이탈리아 나아가 프랑스나 다른 유럽에서 나타난 그 어떤 바로크 양식보다도 앞서 있고, 대담하다. 건축학에서 로마 바로크, 파리 바로크란 말을 듣기는 어렵지만, 시칠리아 바로크에 관한 얘기는 특별하게 다뤄진다. 그렇다면, 정석(定石)이 아닌 이형(異型), 정면이 아닌 측면으로 나타난 바로크 건축물은 과연 어떤 특징을 갖고 있을까? 특히 바로크의 최고 절정기에 해당되는 시칠리아 바로크는 기존의 양식과 얼마나 다를까? 구체적으로 들어가면 끝도 없겠지만, 크게 보면 8가지로 나눠서 설명해 볼 수 있다.

① 평면이 아닌 입체적으로 굽은 건축물의 정면(Facades): 바로크 이전의 건물은 어느 것 하나 예외 없이 평면으로 만들어져 있다. 바로크는 다르다. 정면에서 볼 때 활처럼 굽은 곡선형 면을 선보인다. 균형 잡힌 투명한 진주가 아니라, 인상을 쓴 듯한 일그러진 벽면이 바로크, 특히 시칠리아 지역 18세기 대형 건축물의 공통점이다.

② 빛의 명암을 중시하는 장식과 건축양식: 이탈리아어로 키아로스큐로(Chiaroscuro)라고 불리는 양식으로, 건축물 내부는 물론 외부의 장식이나 설계에 응용된다. 태양이 움직이면서 서로 다른 느낌을 주는 명암 구도다. 평면이 굽은 것도 키아로스큐로를 의식한 것이다. 빛의 예술사로 불리는 렘브란트나, 21세기 가장 주목받는 카라바지오 같은 화가도 키아로스큐로의 추종자들이다. 미술의 경우, 빛을 통한 자연적인 기법만이 아닌, 촛불이나 거울을 활용해 의도적으로 연출된 키아로스큐로를 선보인다.

③ 괴이한 두상(頭像), 큐피드를 닮은 어린이천사 조각이 일상화됐다: 건축물의 입구는 물론, 내부에 설치된 각종 장식물을 뭔가 뒤틀리고 어두운 모습으로 표현하는 식이다. 고대 그리스나 로마 당시의 미적 감각과 전혀 다른, 나쁘게 얘기하자면 세기말적 느낌조차 드는 장식물들이 건축물 내외에 늘어서 있다.

비로소 자연을 즐기는 시대에 접어들다


▎팔레르모 구시가지에 있는 산 주세페 광장 분수대.
④ 철망으로 이어진 발코니 공간: 르네상스 이전 건축물의 경우 발코니가 거의 없다. 있다 해도 높은 담 속에서 부분적으로 존재해왔다. 시칠리아 바로크는 다르다. 건물 대부분이 층수에 맞춰 발코니를 갖게 된다. 길게 이어진 철망이 보호망으로 활용돼 건물을 장식하는 외형으로 자리 잡는다. 발코니가 있다는 것은 치안이 좋다는 의미로 해석될 수 있다. 르네상스 이전까지 건물의 대부분은 숨통이 트일 듯한 작은 창문만 갖고 있다. 10세기 이전의 교회를 보면 아예 창문이 없는 경우도 있다. 창문을 크게 만들거나 발코니를 설치할 경우 외부인의 출입이 쉬워진다. 단지 물건을 훔치고 말고가 아니라 살인쯤은 보통으로 여겨지던 시대다. 시칠리아 바로크의 발코니는 바로 마음 놓고 살 수 있는 안전한 환경이 됐으며, 자연을 즐기는 시대에 접어들었다는 의미다.

⑤ 교회 건축물의 경우 종탑이 건축물 한가운데 최고 윗부분에 들어선다: 원래 교회의 종은 본당 건물과 분리된 채 따로 설치된다. 종탑은 종을 치기 위한 것만이 아닌, 외부의 침략자를 막기 위한 감시망의 역할도 했다. 따라서 르네상스 이전까지만 해도 별도로 ‘높게’ 만들어 활용해왔다. 바로크는 별도의 종탑을 없애고, 종을 건축물 한가운데로 옮겨 세운다. 탑을 별도로 세우지 않는다는 것은 앞서 설명한 안전문제와 연결시켜볼 수 있다. 치안이 좋기에 높은 종탑을 별도로 만들 필요가 없다.

⑥ 건축물 정면에 설치된, 상하로 나눠진 두 개의 초대형 계단: 스페인 광장(Piazza di Spagna)은 로마에 가서 빼놓지 않고 찾는 곳일 듯하다. 전 세계에서 가장 많은 소매치기가 모여 있는 곳으로 악명 높지만, 영화 <로마의 휴일>에서의 오드리 햅번 기분을 내고 싶은 사람이라면 반드시 들를 듯하다. 아이스크림 젤라토는 필수요소다. 오드리 햅번이 신문 기자 그레고리 펙과 함께 젤라토를 먹던 곳은 스페인 계단(Spagna Scalinata)이라 불린다. 전부 135개의 계단을 통해 최정상의 교회, 트리니타 디 몬티(Trinità dei Monti)에 이를 수 있다. 트리니타 교회는 르네상스 말기 교회로 바로크와 무관하다. 스페인 계단은 시칠리아 바로크 건축물에서 볼 수 있는 일상적 풍경이다. 로마의 스페인 계단이 그러하듯, 크게 두 개의 영역으로 나눠진다. 중간 부분에 작은 정원이 하나 들어서 있고, 양쪽 바깥에 계단이 이어져 위로 올라가는 식이다. 시칠리아 스페인 계단은 길이·높이·폭 전부 초대형이다.

⑦ 울퉁불퉁한 돌로 구성된, 입체적으로 만들어진 건축물 장식: 대리석이나 콘크리트를 통한 평면 장식이 아니라, 의도적으로 입체적인 돌을 연결해서 꾸미는 기법이다. 아예 정면 자체를 굽게 만들기도 하지만, 정면의 장식 면을 울퉁불퉁하게 만든다. 키아로스큐로를 의식한 것이다.

⑧ 대리석이 아닌 화산석을 이용한 장식: 시칠리아는 화산섬이다. 대리석이 드물고 화산재로 만들어진 돌이 대부분이다. 대리석보다는 약하지만, 조각이나 장식이 쉽고 빠르다는 장점이 있다. 교회제단 같은 중요한 곳의 장식은 각각 다른 색상의 대리석을 조합한 작품들로 채워졌다. 다양한 대리석을 조합해 만든, 3차원의 입체감을 느끼는 작품도 많다. 그러나 시칠리아 바로크 건축물 벽면의 중심은 화산석이다. 지금도 불길이 치솟는 에트나(Mount Etna)산 주변에서 채석된 돌들이 주종이다.

팔레르모에 내려 호텔을 잡은 뒤 곧바로 시내 산책에 나섰다. <유혹한 뒤 버리기>가 팔레르모에서 촬영을 했는지 여부는 모른다. 바로크 양식 건축물은 노토 지역만이 아니라 시칠리아 곳곳에서 만날 수 있다. 팔레르모도 그중 하나다. 양적인 면에서 노토 지역이 특출하지만, 질적으로 따진다면 팔레르모도 지지 않는다.

두오모, 건축학 백화점


▎시칠리아의 강인함을 상징하는 열대림이 팔레르모 가리발디 공원 한가운데 들어서 있다.
이른 아침이지만, 팔레르모를 대표하는 건축물인 두오모 대성당으로 향했다. 1185년 세워진 두오모는 개축과 확장을 거듭해온 교회다. 그 과정에서 거의 모든 건축양식을 발견할 수 있는, 건축학 백화점 같은 곳으로 통하게 된다. 팔레르모 두오모 하나만 보면 유럽 전체 건축사를 이해할 수 있다. 나쁘게 말하자면 국적불명 퓨전 건축물의 극치라 볼 수도 있다. 그러나 유네스코는 세계문화유산으로 결정한다. 퓨전이 가진 좋은 점에 주목했기 때문이다.

시칠리아는 유럽 열강 이해관계의 축소판에 해당된다. 멀리는 고대의 그리스·카르타고·로마에서부터, 이후 게르만·비잔틴·아랍·노르만·스페인·프랑스·오스트리아 모두의 지배를 한 번씩 경험하게 된다. 1860년 주세페 가리발디에 의해 통일 이탈리아의 구성원이 되지만, 사실 본토의 이탈리아인들과 무관한 문화와 생활양식을 유지해온 곳이다.

심지어 언어도 크게 다르다. 다른 지역 이탈리아인들이 이해하기 어려울 정도다. 팔레르모 두오모는 시칠리아 역사의 흔적인 동시에 결과다. 두오모는 마리아를 모시는 교회이자 공적인 행사를 주관하는 곳이다. 팔레르모를 지배한 역사상 최고권력자들의 무덤도 두오모 안에 설치돼 있다.

13세기 중세 당시 기독교도와 이슬람과의 평화를 유지한, 시칠리아 최고의 군주로 통하는 프리드리히 2세(Frederick II)와 그 가족의 무덤도 두오모 안에 세워져 있다. 지배자들이 바뀔 때마다 자신들의 문화를 새기는 과정에서 두오모도 얼굴도 칠면조로 변한다.

두오모로 가는 도중 구시가지 입구에서 눈이 번쩍 뜨이는 건축물 아니, 조각물을 만났다. 콰트로 칸티(Quattro Canti)라 불리는 4각형 입체 조각 건축물로, 비그리에나 광장(Piazza Vigliena)의 사방에 설치돼 있다. 1620년 당대의 조각가 줄리오 라소(Giulio Lasso)가 완성한 작품으로, 당시 시칠리아를 지배한 스페인 국왕 4명의 입상이 세워져 있다. 전체적으로 4층 건축물로 1층 바닥에는 작은 분수가, 2층에는 사계절을 상징하는 석상, 3층에 스페인 국왕, 4층에는 팔레르모를 지키는 4명의 여신상이 들어서 있다. 시칠리아 바로크가 막 꽃피기 시작하던 초기 작품이다.


▎시칠리아 라구사의 산 조르지아 교회 앞에 선 필자.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등록된 교회다.
콰트로 칸티가 바로크 양식으로 해석되는 이유는 크게 두 가지다. 첫째, 벽면 자체가 안으로 굽은 곡선형이다. 광장 바깥쪽에 3층 원통을 설치해 그 내부에 조각과 장식물을 설치했다고 보면 된다. 둘째 철망으로 연결된 베란다다. 보수를 기다리는 곳도 있지만, 각 층에는 전부 베란다가 마련돼 있다.

스페인 계단과 국왕 석상에서 보듯, 시칠리아 바로크는 스페인 지배 아래 이뤄진 스페인의 영향력이 강하게 배인 건축양식이다. 전 세계 어디를 가도 스페인 입김이 배인 건축물을 찾기는 지극히 간단하다. 엄청 크고 뭔가 호화스럽다. 실용성은 물론 운영적인 면을 무시한 채 크고 넓은 초호화판 건축물이 바로 스페인풍이다. 스페인의 지배를 받은 남미 대부분의 수도는 스페인풍 건축물의 진가를 엿볼 수 있는 현장이다. 시칠리아는 스페인이 남긴, 이베리아 반도 밖의 건축현장 가운데 가장 크고 화려하다.

1693년 시칠리아 대지진과 건축 열기


▎시칠리아 라구사에서 만난 무명의 바로크 교회. 바로크 건축물이 너무 많아 처치 곤란인 곳이 시칠리아다.
시칠리아에 바로크 양식 건축물이 처음 등장한 것은 17세기 초다. 앞서 로마의 예수교회 이후 나타난 새로운 건축 양식이 시칠리아에도 부분적으로 나타난다. 그러나 본격적으로 시칠리아 전체가 바로크 건축물로 넘쳐나기 시작한 것은 1693년 이후다. 시칠리아에서 대규모 지진이 발생해 큰 건물들이 파손되거나 불에 타면서 건축열기가 불어닥친 것이다. 당시 지배자 스페인은 엄청난 돈과 자금을 들여 새 도시 건설에 나선다. 지금 보면 이탈리아 땅에서 벌어지는 스페인 부자들의 건축열기가 이상하지만 당시로 돌아가면 상황은 다르다.

17세기 스페인은 21세기 미국을 능가하는 패권국가다. 남미 식민지 사업이 본격적으로 시작되면서 세계의 부가 스페인으로 몰려든다. 바로크 전성시대는 바로 식민지 획득에 따른 부의 축적기와 동일하다. 둥근 지구를 상대로 하면서 기존의 상식과 다른 세계관도 갖게 된다. 뒤틀어진 바로크 건축물 발전의 동인(動因)에 해당된다. 그 같은 상황에서 스페인이 시칠리아를 잃을 것이라 생각한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시칠리아를 지배한 스페인 권력자들은 직접 로마의 건축가를 불러와 초대형 바로크 건축물 건립에 들어간다. 당시 지진의 피해가 가장 심했던 노토 지역이 중심지다.

거지가 복권 1등에 당첨이 되면 당장 어디에 돈을 쓸지 모른다. 나폴레옹은 피레네산맥 아래 남쪽 땅, 즉 스페인은 유럽이 아니라 아프리카라고 말했다. 2류로 받아들여지던 스페인의 열등감을 없애고 로마 바티칸의 환심을 사기 위해, 크고 호화로운 교회 건립에 올인한다. 원래부터 이단으로 받아들여지던 바로크 건축물이지만, 스페인이 확대 과장하는 과정에서 한층 더 이상하게 발전된다.

18세기 말의 첨단(?)교회 산 조르지아


▎노토 지역의 교회 내부. 전체적으로 뭔가 입체적으로 만들려는 의지가 엿보인다.
라구사(Ragusa)는 스페인의 광적인 바로크 열풍의 현장에 해당된다. 크게 보면 노토 지역에 포함되는 도시로 세계문화유산에 들어가 있다. 7만5000여 명 인구의 소도시로, 300m 높이 언덕 위 도시와 평지에 들어선 도시로 이분된다. 그리스·카르타고·로마·노르만·아랍·비잔틴의 지배를 받았던 고도(古都)로 관광객의 발길이 극히 드문 곳이기도 하다. 라구사를 대표하는 바로크 건축물은 평지에 모여 있다. 1693년 지진으로 언덕 위 건물 대부분이 무너지면서 평지에 새로운 건축물들이 들어선다.

대표적인 바로크 건물은 1775년 세워진 산 조르지아(St. Giorgia) 교회다. 시기적으로 시칠리아 바로크의 절정기에 해당된다. 라구사의 두오모로 권내에서 가장 크고 화려하다. 두 개로 나눠진 스페인 계단을 통해 위로 올라갈 수 있다. 교회 입구가 워낙 높은 곳에 있기에 계단을 통할 경우 강인한 체력이 필요하다.

산 조르지아는 종탑을 건축물 한가운데 정상에 둔 전형적인 바로크 건축물이다. 시칠리아는 한겨울이라도 낮에는 최하 섭씨 10도 정도를 유지한다. 교회 주변에는 열대식물인 야자수와 팜나무도 들어서 있다.

산 조르지아는 말을 탄 채 악령인 용을 죽이는 신의 칼에 해당된다. 산 조르지아는 라구사의 수호신이다. 시칠리아가 과거 비잔틴의 영향을 많이 받았다고 볼 수 있다. 원래 작은 규모였던 산 니콜라스 교회의 터를 허물고 새로 들어섰다고 한다. 산 조르지아는 이탈리아인 대부분이 알고 있는 유명한 촬영현장이기도 하다. 텔레비전 드라마를 비롯해 수많은 영화의 현장으로, 과거는 물론 지금까지 활용된다고 한다. 교회 안은 다른 곳과 달리 붉은 벽면장식이 특이하다. 18세기 말에 지어진 첨단(?)교회답게 중간 공간이 넓다. 건축기술이 발달되지 않았던 중세와 르네상스 교회의 경우 중간에 기둥을 많이 넣어 협소하게 느껴진다. 중간 기둥을 바깥으로 몰아 공간을 넓힌다는 것은 건축기술의 진보를 의미한다.

시칠리아 바로크는 1805년 스페인의 무적함대가 영국 넬슨에게 패하면서 막을 내린다. 시칠리아의 주인도 스페인을 대신해 오스트리아와 프랑스로 옮겨간다. 급조된 초대형 건축물은 갑자기 주인을 잃으면서 폐허로 전락해 간다. 사실 라구사 전체를 통틀어 산 조르지아 교회 하나만 있어도 충분하다고 판단된다. 현재 라구사의 바로크 교회는 무려 20여 개에 달한다. 20세기 말부터 문화유적으로서 재건하고 있지만, 아직 과거의 영광을 찾기까지는 많은 시간이 필요할 듯하다. 한국인이 본다면 너무도 부러운 문화유산들이지만, 시칠리아인 입장에서는 평생 짊어지고 나아가야 할 무거운 짐으로 느껴질지 모르겠다.

역사와 문화로, 식민통치자가 남긴 찬란한 유산이자 영화 속 배경으로, 신에 바치는 선물이자 신에게서 물려받은 사명으로서의 시칠리아 바로크. 인류가 멸망하지 않는 한, 인류의 사랑이자 자랑으로 영원히 존재할 문화유산이다.

유민호 - 미국 워싱턴에 있는 에너지·IT 컨설팅 회사 ‘퍼시픽21’의 디렉터. ‘딕 모리스 선거컨설턴트’ 아시아 담당. 연세대 정치외교학과를 졸업하고 서울방송(SBS) 기자로 일하다가 1994년 일본 마쓰시타정경숙 15기로 입숙해 5년 과정을 마치는 동안 125개 나라를 순회했다. 조지워싱턴 대학 E-Politics 프로젝트 디렉터, 일본경제산업성 연구소(RIETI) 연구원을 지냈다. <백악관에서 일하는 사람들> <중국 소프트파워> <미슐랭을 탐하다> 등 다수의 저서가 있다.

201703호 (2017.02.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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