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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명호의 근대 동북아 삼국지(3)] 프랑스와 흥선대원군의 충돌 ‘병인양요(丙寅洋擾)’ 

“우리 신부를 죽였으니 조선을 정벌함이 마땅하다” 

신명호 부경대 사학과 교수
英 아편전쟁 승리 후 초조해진 佛, 조선 ‘선점’ 야욕…
강화도 침공 후 기선 제압했으나 기습에 말려 패퇴


▎리델 신부가 그린 병인양요 기록화. 프랑스 함대가 강화도 갑관진 앞에 나타나 조선군과 포격전을 벌이고 있다.
아편전쟁에서 영국의 승리가 확실시되자 프랑스는 초조해졌다. 프랑스는 아편전쟁 이전에 인도를 놓고 영국과 식민지 쟁탈전을 벌이다 패배했다. 이런 상황에서 영국이 아편전쟁에서까지 승리해 중국을 식민지화할 경우 동아시아 전체가 영국의 영향권 안에 들어갈 가능성이 높아졌다.

프랑스는 영국의 동아시아 독점을 저지하고자 군함 두 척을 파견했다. 프랑스 원정군은 임무 수행을 위해 두 가지 대책을 세웠다. 첫째는 일본 남쪽의 섬 중에서 전략적 요충지에 해당되는 곳을 점령해 전술적·상업적 근거지로 이용하는 것이고, 둘째는 조선과 통상조약을 맺음으로써 영국을 견제하는 것이었다.

프랑스의 원정함대는 1841년(헌종 7) 9월(양력) 7일 마카오에 입항했다. 그곳에서 원정군 사령관은 조선어 가능자를 물색했다. 장차 조선과 통상조약을 맺으려면 조선어 가능자가 필요했다.

당시 마카오의 천주교 신학교에는 조선인 신학생 2명이 있었다. 한 명은 김대건이었고 또 한 명은 최양업이었다. 이들은 조선의 천주교 탄압을 피해 마카오까지 갔는데 고국으로 돌아가고 싶어했다. 그들 외에도 조선으로 가고 싶어하는 사람들이 또 있었다. 천주교를 조선에 포교(布敎)하고자 하는 프랑스 신부들이었다.

김대건과 최양업 그리고 프랑스 신부 2명은 원정함대와 더불어 마카오를 출발해 상해로 갔다. 그때가 1842년(헌종 8) 8월이었는데 그들이 도착하고 며칠 후 남경조약이 체결됐다. 이 조약으로 중국은 광동·복주·하문·영파·상해 5개항을 영국에 개항했다.

그러자 함대 사령관은 굳이 상해 북쪽으로 항해하려고 하지 않았다. 아편전쟁의 결과가 이미 명확해진 상황에서 겨우 군함 2척만으로는 뭘 하기가 어렵다고 판단해서였을 것이다. 이에 김대건과 최양업 그리고 프랑스 신부 2명은 조선으로 잠입하기 위해 독자적으로 행동했다.

상해를 떠난 그들은 북경을 거쳐 요동까지 갔다. 하지만 상황이 여의치 않아 먼저 김대건만 잠입했는데 그때가 1843년(헌종 9) 1월이었다. 뒤이어 페레올 신부와 다블뤼 신부가 김대건의 도움을 받아 1845년(헌종 11) 10월에 조선으로의 밀입국에 성공했다. 이들이 조선에 최초로 잠입한 프랑스 출신 신부였다.

프랑스 선교사들이 꿈꾼 ‘일석이조’


▎우리나라 최초의 천주교 신부인 김대건. 박해를 무릅쓰고 포교활동을 벌이다 1846년 순교했다.
이후 20년에 걸쳐 프랑스 신부들이 계속해서 조선으로 밀입국했고 천주교 신자들 역시 계속해서 늘어났다. 그 결과 1865년(고종 2)에는 조선에 프랑스 신부 12명이 밀입국해 있었으며 천주교 신자는 1만여 명에 이르렀다. 자신감이 생긴 프랑스 신부들은 조선에서 천주교 선교의 자유를 실현하고자 했다. 그를 위해 그들은 두 가지 대안을 구상했다. 첫째는 청나라를 활용하는 것이고, 둘째는 흥선대원군을 활용하는 것이었다.

프랑스는 1860년(철종 11) 영국과 함께 북경을 점령했으므로 1860년대의 청나라에 큰 영향력을 행사했다. 조선에 밀입국한 프랑스 신부들은 바로 이런 프랑스의 영향력을 이용해 청나라에서 프랑스 신부들에게 통행증을 발급해주도록 공작했던 것이다. 그들은 청나라에서 통행증을 발급해주기만 하면 조선에서 천주교 선교가 사실상 실현될 것으로 믿었다.

북경 주재 프랑스 공사는 이 같은 프랑스 신부들의 요청을 총리아문의 공친왕에게 수 차례 전달했다. 그런데 프랑스 공사의 이런 행태는 국제법상으로 볼 때 문제가 없지 않았다. 왜냐하면 조선을 독립국으로 인정한다면 이렇게 해서는 안 되기 때문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렇게 한 이유는 조선에 대한 청나라의 종주권을 프랑스가 인정해서였다. 물론 종주권이란 주장은 청나라에서 제기했지만, 프랑스는 그 종주권을 확대해석해 청나라가 조선의 주권을 좌지우지할 수 있다고 판단했던 것이다.

그러나 공친왕은 비록 청나라가 조선의 종주국이기는 하지만 내정간섭은 하지 않을 뿐만 아니라 조선은 천주교 전도를 원하지 않는다는 명분을 들어 거부했다. 아마도 공친왕은 괜히 통행증을 발급해줬다가 조선에서 강력하게 항의할 경우 청나라의 처지가 곤란해질 것을 우려했을 듯하다.

결국 청나라를 이용한 통행증 발급은 무산됐다. 그러자 프랑스 신부들은 둘째 대안, 즉 흥선대원군 활용을 들고 나왔다. 때마침 조선의 대외관계가 프랑스 신부들에게 유리하게 작용했다.

1860년(철종 11)의 북경조약으로 연해주를 차지하게 된 러시아는 두만강을 경계로 조선과 국경을 마주하게 됐다. 이후 러시아인들이 두만강을 넘어와 통상을 요구하곤 했다. 처음에는 몇몇 사람의 평화적인 요구였기에 조선정부에서는 무시하고 신경 쓰지 않았다.

그러나 1865년(고종 2) 가을부터 러시아인 수십 명이 무장한 채 두만강을 건너와 통상을 요구했다. 그런 일이 여러 차례 반복됐다. 그런 일이 반복되면서 러시아의 침략이 임박했다는 소문이 조선 전역에 휘몰아쳤고 인심은 흉흉해졌다.

무력을 동반한 러시아의 통상 요구는 조선 사람들만 불안하게 한 것이 아니라 프랑스 선교사들도 불안하게 했다. 그들은 러시아가 어느 정도의 강대국인지 잘 알았고 또 영토 욕심이 어느 정도인지도 잘 알았다. 그들은 러시아가 마음만 먹으면 조선을 점령하는 것은 문제도 아니라고 생각했다.

이런 상황에서 프랑스 선교사들은 조선을 보호하기 위해서는 유럽 열강 예컨대 영국이나 프랑스와의 동맹이 필요하다고 생각했다. 만약 조선이 원하기만 하면 프랑스와의 동맹은 자신들이 주선해 해결할 수 있다고 자신했다.

그렇게만 되면 조선에서 천주교 선교의 자유가 실현될 것이고 나아가 러시아의 팽창도 막을 가능성이 있었다. 그것은 프랑스에도 유리했고 조선에도 유리했다. 이런 조건이라면 러시아의 침략을 우려하는 흥선대원군이 수락할 가능성이 높았다. 게다가 당시 흥선대원군의 부인은 물론 고종의 유모도 천주교를 믿고 있었다. 프랑스 신부들은 흥선대원군을 안팎에서 설득한다면 충분히 가능할 것으로 판단했다.

1865년 겨울에 베르뇌 신부는 한양의 홍봉주의 집에 머물고 있었다. 그는 홍봉주에게 조선이 살아남기 위해서는 프랑스와 동맹해야 한다고 여러 차례 역설했다. 이 말을 철석같이 믿게 된 홍봉주는 흥선대원군에게 편지를 보내 프랑스와의 동맹을 제안했고, 조선에 있는 프랑스 선교사들이 도와줄 것이므로 동맹에 대해서는 전혀 걱정할 일이 아니라고 강조했다. 그때가 1865년 연말이었다.

“당신들은 왜 제사를 지내지 않는가?”


▎이한철이 그린 흥선대원군의 초상.
샤를르 달레의 <한국천주교회사>에 의하면 대원군은 이 편지를 읽고 또 읽더니 아무 말 없이 깔고 앉았다고 한다. 아마도 당시 대원군은 이런 사실에 놀랐을 듯하다. 첫째는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프랑스 신부들이 조선에서 선교활동을 벌인다는 사실이었고, 둘째는 프랑스 신부들에게 포섭된 조선인 신자들이 적지 않다는 사실이었다. 그래서 대원군은 가타부타 말을 하지 않고 편지를 깔고 앉았는데 그것은 상황을 좀 더 확인해봐야겠다는 의사표시였다.

어쨌든 대원군이 거부한 것은 아니므로 홍봉주는 희망을 갖게 됐다. 그는 고종의 유모를 움직여 대원군의 부인을 설득하려 했다. 그때 대원군 부인은 고종의 유모에게 “왜 이렇게 가만히들 있는가요? 러시아인들이 조선에 들어와 나라를 빼앗으려 하는데 이 불행을 막을 수 있는 사람은 프랑스 신부입니다. 그런데 그분은 지금 지방순회를 떠났다고 하는군요. 내 남편에게 편지를 한 번 더 올리라고 하시오. 내가 장담하겠소. 그 편지는 성공할 게요. 그 후에 프랑스 신부를 즉시 돌아오게 하시오”라고 말했다 한다.

이런 발언으로 미뤄보면 대원군은 부인을 이용한 듯하다. 즉 대원군 부인이 고종의 유모로부터 이야기를 듣고 난 후 남편에게 전달했고, 그 말을 들은 대원군은 자신의 부인까지 신자라는 사실에 놀라는 한편 천주교 교세가 어느 정도인지 궁금했기에 프랑스와 동맹할 생각이 있다고 대답했을 것이다. 그 대답에 자신감을 갖고 대원군 부인은 “내가 장담하겠소. 그 편지는 성공할 게요”라고 호기롭게 말했을 것이다.

대원군 부인의 전갈을 받은 홍봉주는 희망에 들떠 남종삼에게 달려갔다. 당시 남종삼은 승정원 승지로 있었는데 독실한 천주교 신자였다. 홍봉주로부터 희망적인 이야기를 듣자 남종삼은 스스로 편지를 썼을 뿐만 아니라 직접 대원군을 찾아갔다.

편지를 주의 깊게 읽어본 대원군은 “좋소. 김병학 대신에게 가서 이야기하시오”라고만 하고 더는 말하지 않았다. 남종삼으로부터 편지를 받아 읽은 김병학 역시 “좋소”라고만 대답했다.

그런데 대원군의 ‘좋소’와 김병학의 ‘좋소’는 긍정일 수도 있었고 부정일 수도 있었다. 겉으로 보면 ‘좋소’는 긍정이었다. 하지만 ‘좋소’ 다음에 더 이상 말이 없다는 것은 부정일 가능성을 보여줬다. 조선 양반들의 어법으로 볼 때 만약 적극적으로 긍정한다면 ‘좋소’ 다음에 이런저런 질문이 뒤따라야 하는데 그렇지 않았다는 것은 더 이상 흥미가 없다는 뜻이었고, 그것은 곧 부정이나 마찬가지였다.

다음날 대원군은 남종삼을 불러 천주교에 관해 많은 이야기를 나눴다. 이야기 끝에 대원군은 “다만 내가 비난하는 것이 한 가지 있소. 당신네들은 왜 조상들에게 제사를 지내지 않소?” 하고는 갑자기 화제를 바꿔 “프랑스 신부가 러시아의 조선 점령을 막을 수 있다고 확신하오?”라고 물었다.

남종삼이 “물론입니다”라고 대답하자 대원군은 “프랑스 신부가 지금 어디 있소? 서울에 있소?” 하고 물었다. “아닙니다. 며칠 전에 서울을 떠났습니다”라는 대답에 대원군은 “그렇지! 황해도에 천주교인들을 둘러보러 갔겠구먼”이라고 대꾸했다. “과연 거기로 갔습니다”라는 대답에 대원군은 “그러면 내가 좀 봤으면 좋겠다고 그에게 알리시오”라고 제안했다.

현실 대신 이념을 택한 섭정(攝政)


▎1. 초지진은 성곽의 둘레가 500m도 안 되는 작은 규모의 방어시설이다. 병인양요와 신미양요, 운양호 사건을 거치며 역사의 아픔이 서리게 됐다. / 2. 김포군 대명리와 초지대교를 사이에 두고 마주하는 초지진은 병인양요와 신미양요 때 군사적 요충지였다. 지금도 포탄 자국이 선명한 초지진의 성벽.
남종삼을 통해 대원군과의 대화를 전해들은 프랑스 신부들과 천주교인들은 크게 기뻐했다. 자신들의 제안을 대원군이 적극적으로 수용했다고 믿었던 것이다. 그들은 한양 어디에다 성당을 지으면 좋을지 의논하며 마치 천주교 선교자유가 실현된 듯이 행동했다.

그러나 남종삼과 대원군의 대화를 잘 음미해보면 그 당시 대원군의 속셈이 천주교인들과의 희망과는 전혀 달랐음을 짐작할 수 있다. 예컨대 대원군은 “당신네들은 왜 조상들에게 제사를 지내지 않소?”라고 했다가 갑자기 화제를 바꿨는데 이는 그 문제에 대해 토론하고 싶은 마음 자체가 없었음을 암시한다.

당시 조선 양반들이 천주교를 비난하는 가장 큰 이유가 바로 조상제사 거부였다. 이 문제가 해결되지 않는 한 조선 양반과 천주교의 양립은 불가능했다. 대원군 역시 마찬가지였다.

만약 대원군에게 천주교에 대한 긍정적인 마음이 있고 또 정말로 프랑스와 동맹할 생각이 있었다면 이 문제에 대해 적극적으로 토론을 벌였을 것이다. 하지만 대원군은 그렇게 하지 않았다. 이는 대원군이 프랑스와의 동맹이 아니라 다른 문제에 관심이 있어서 남종삼을 불렀음을 의미한다.

예컨대 대원군은 조선에 잠입한 프랑스 신부가 몇 명이나 되며 조선의 천주교 신자가 얼마나 되는지 등등이 궁금했을 것이다. 그것을 알기 위해 대원군은 은밀하게 천주교인들을 조사하는 한편 그들을 방심하게 만들고자 남종삼을 불렀다.

예컨대 프랑스 신부가 며칠 전에 서울을 떠났다는 남종삼의 대답에 대원군은 “그렇지! 황해도에 천주교인들을 둘러보러 갔겠구먼”이라고 대답했는데 이는 대원군이 이미 프랑스 신부들은 물론 조선 천주교인들의 동태를 대략이나마 파악했음을 의미한다.

대원군의 입장에서 보면 당시 조선을 위협하는 세력은 러시아보다는 차라리 프랑스 신부들이었다. 러시아는 두만강 너머에 있었고 이미 알려진 위협이었다.

반면 프랑스 신부들은 국내에 있었고 아직 알려지지 않은 위협이었다. 당시 두만강 너머의 러시아는 통상을 요구했지만 프랑스 신부들은 선교 자유를 요구했다. 통상은 단순하게 보면 돈의 문제이지만 선교 자유는 정신과 영혼의 문제였다. 어느 것을 지켜야 하는가? 대원군에게 그것은 분명했다. 돈보다는 정신과 영혼을 먼저 지켜야 했다. 그런 면에서 대원군은 현실보다는 유교이념에 투철한 사람이었다고 평가할 수 있다.

1866년(고종 3) 음력 1월(이하 같음)부터 대원군은 프랑스 신부들과 천주교인들을 대대적으로 체포해 사형에 처했다. 체포된 사람들은 너나없이 하나의 질문을 받았다. 천주(天主: 하나님)를 부정하느냐 아니면 긍정하느냐는 질문이었다.

만약 천주를 부정한다고 말하면 살 수 있었지만 긍정한다고 말하면 바로 사형이었다. 그때 8000여 명의 조선 사람이 천주를 긍정하고 목숨을 잃었다. 프랑스 신부들도 12명 중에서 9명이 체포돼 사형을 당했다.

구사일생으로 살아남은 3명의 신부 중 리델 신부가 조선인 신자 11명과 함께 배를 타고 탈출해 산동반도에 도착했는데 그때가 1866년 5월 25일이었다. 이 리델 신부를 통해 프랑스 신부 9명이 처형됐다는 소식이 북경 주재 프랑스 공사에게 전달됐고, 공사는 강력한 보복을 결정했다. 1866년 6월 3일, 프랑스 공사는 공친왕에게 이런 내용의 외교문서를 보냈다.

“얼마 전 조선으로부터 소식을 들었는데 금년 3월 사이에 조선 국왕이 갑자기 하나의 명령을 내려 프랑스 주교 2명과 전교사 9명 그리고 조선의 전교사 7명과 신자 남녀노소를 모조리 살해했다고 합니다. 이렇게 포악한 짓을 저질렀으니 조선은 스스로 패망할 것입니다. 그런데 조선이 중국에 조공을 바치는 나라이므로 프랑스가 장차 군사를 일으킨다는 사실을 공친왕에게 알립니다. (…) 프랑스는 즉시 조선을 쳐서 잠시 그 나라를 점령했다가 그 후에 다시 가서 누군가를 왕으로 세우고 그 땅을 지킬 것입니다. (…) 지난번 공친왕은 말씀하시기를, 조선은 비록 중국에 조공을 바치는 나라이지만 모든 내정을 스스로 알아서 한다고 했으니, 조선은 천진조약에 해당되지 않습니다. 이에 프랑스가 조선과 교전하더라도 중국은 간여할 수 없습니다.” (<근대한국외교문서> ‘제너럴셔먼호 사건, 병인양요’, 동북아역사재단, 2009, 194쪽)

프랑스 공사는 공친왕의 ‘모든 내정을 스스로 알아서 한다’던 언급을 들어 청나라의 종주권을 형식적으로만 인정하고 실제적으로는 부인했던 것이다. 이에 따라 프랑스 공사는 조선에 대한 침공을 청나라에 알리기만 했는데 이는 형식적인 종주권을 인정했기 때문이다. 반면 프랑스의 조선 침공에 대해 청나라는 제3자로서 개입하지 말라고 경고했는데, 이는 실제적인 종주권을 부인한 결과라 할 수 있다.

청나라 충고 거부하고 전쟁 불사한 조선


▎1. 2011년 8월 서울 용산구 국립중앙박물관에서는 ‘145년 만의 귀환, 외규장각 의궤’ 특별전이 열렸다. 조선시대 왕실과 국가의 의식·행사의 전 과정을 기록한 보고서인 외규장각 의궤는 역사·문화적 가치를 인정받아 2007년 유네스코 세계기록유산으로 지정됐다. / 2. 장렬왕후 빈전도감(殯殿都監) 의궤.
당시 청나라가 강국이었다면 공친왕은 조선에 대한 종주권을 강력하게 주장했을 것이다. 하지만 청나라는 프랑스보다 약한 나라였다. 공친왕은 종주권을 주장할 수도 없었고 포기할 수도 없었다. 공친왕은 두 가지 대책을 세웠다.

첫째는 프랑스에 전쟁도발보다는 진상파악을 요구함으로써 프랑스의 침공을 막으려 했다. 둘째는 프랑스의 침공 사실을 알림으로써 조선이 프랑스에 점령되는 사태를 막으려 했다.

하지만 공친왕의 첫 번째 시도는 프랑스 공사의 거부로 무산됐다. 그렇지만 두 번째 시도는 청나라 예부에서 조선에 프랑스의 침공을 알림으로써 어느 정도 성사됐다. 7월 7일 조선에 도착한 예부(禮部)의 문서에는 전쟁도발보다는 진상파악을 요구함으로써 프랑스의 조선침공을 저지하려 한다는 청나라의 입장을 알리면서 조선 역시 ‘심사숙고’해 잘 처리하기를 바란다는 내용이 들어 있었다.

예부의 외교문서에 실린 ‘심사숙고’라는 표현은 사실상 전쟁을 하지 말라는 충고였다. 즉 당시 청나라는 조선을 도울 형편이 되지 못함을 완곡하게 표현한 것이었으며, 아울러 조선이 프랑스와 전쟁을 해봐야 승산이 없음을 완곡하게 표현한 것이었다.

따라서 공친왕의 본심은 조선이 청나라와 마찬가지로 자존심을 접고 프랑스와 강화하고 천주교를 받아들였으면 하는데 있었다고 봐야 한다. 청나라의 부국강병을 위해 양무운동을 적극적으로 추진하던 공친왕은 청나라가 어느 정도 힘을 축적하기까지는 동북아의 현상유지가 꼭 필요하다고 판단해 그렇게 했을 것이다.

그러나 대원군은 완전히 반대 입장이었다. 공친왕의 충고대로 프랑스와의 전쟁을 피하려면 최소한 프랑스 신부처형에 대한 공개적인 사과와 더불어 책임자 처벌 그리고 천주교 선교의 자유를 공언해야 했다.

그렇지만 조선의 입장에서는 밀입국한 프랑스 신부들을 법에 따라 처형한 것이었고 그것은 국가주권의 문제였다. 국가주권을 어찌 싸워보지도 않고 그냥 포기한단 말인가? 이런 생각에서 대원군은 예부에 해명서를 보냈는데 그중에 “통행증 없이 밀입국한 경우에는 모두 사형에 처하는 것이 조선의 법이고, 이 법을 적용해 프랑스 신부들을 처형했다”라는 언급은 대원군의 마음을 명확하게 드러낸 것이라 할 수 있다.

대원군은 프랑스 신부처형에 대해 공개적으로 사과할 뜻도 없었고, 책임자를 처벌한 마음도 없었으며, 천주교 선교자유를 공언할 뜻은 더더욱 없었다. 이는 유교이념에 대한 대원군의 확신이 강력했기에 나타난 결과이기도 하지만 동시에 국제현실에 대한 대원군의 인식이 불충분했기에 나타난 결과이기도 했다.

한편 천진(天津)에 머물러 있던 프랑스의 로즈 제독은 먼저 조선에 정찰대를 파견해 지형을 살핀 다음 결전을 벌이기로 했다. 이에 따라 로즈 제독은 1866년 8월 3척의 군함을 조선으로 보냈다. 그 군함에는 리델 신부와 조선인 신자 3명이 함께 승선했는데 그들의 인도에 따라 프랑스 군함은 남양만과 강화해협을 거쳐 마포까지 가서 수로와 지형을 측량했다.

한강 주변에는 수많은 조선인이 몰려들었지만 프랑스 군함을 막지는 못했다. 서강의 프랑스 군함은 약 10일간 머물렀는데 그 10일간의 봉쇄만으로도 한양은 생필품 부족으로 큰 혼란을 겪었다. 그 결과 로즈 제독은 한강을 봉쇄하면 조선은 곧바로 항복할 것으로 판단했다. 조선의 수도 한양에 필요한 생필품이 대부분 한강을 통해 공급되므로 그 공급선을 막으면 한양주민들이 생활고에 몰려 항복할 것으로 믿었던 것이다.

1866년 9월 3일, 로즈 제독은 7척의 군함에 1600명의 병력을 태우고 조선을 침공했다. 이틀 뒤에 침공군은 영종도 앞바다에 도착했다. 다음날인 9월 6일에 침공군은 강화해협을 거슬러 올라가 강화읍 부근에 상륙했고 9월 8에는 강화읍을 점령하고 약탈을 자행했으며 10일 후인 9월 18일에는 문수산성을 점령했다. 이로써 강화해협과 한강입구가 완전하게 봉쇄되었다. 그동안 조선군의 저항은 유명무실해 침공군의 대포에 놀라 달아나기 일쑤였다.

기습작전으로 승리, 양헌수의 지략


▎병인양요 때 프랑스군을 격퇴한 양헌수 장군의 초상(肖像)과 강화도 정족산성 동문 위쪽에 있는 양헌수 장군 승전비. 병인양요 7년 뒤인 1873년에 세워졌다.
침공군이 강화읍을 점령하자 조선정부는 9월 11일 항의서한을 로즈 제독에게 보냈다. 이 서한에서 조선정부는 “너희들이 우리나라에서 전교(傳敎)를 행하려고 한다는데 이는 더욱 안 될 일”이라며 속히 물러날 것을 요구했다. 이에 대해 로즈 제독은 “너희들이 우리나라의 신부들을 어질지 못하게 불의로 죽였으므로 정벌하는 것이 마땅하다”고 하며 책임자 처벌을 요구했다.

이미 양국 사이의 전쟁은 말로 해결될 수준이 아니었다. 이때 대원군은 의정부에 글을 보내 “고통을 참지 못하고 화친하자고 하는 것은 나라를 팔아먹는 행위”라고 하며 전의를 불태웠다. 고종 역시 척사윤음(斥邪綸音)을 반포해 결사항전을 부르짖었다. 기정진과 이항로 등 보수유림을 대표하는 유학자들도 결사항전을 주장하는 상소문을 올렸다. 조선 전역에는 죽음으로 유교문화를 지켜내자는 결기가 넘쳐났다.

그런데 이미 강화읍과 문수산성을 빼앗겨 한강이 봉쇄된 상화에서 조선군이 펼 수 있는 작전은 기습뿐이었다. 정면대결로는 침공군의 신식 무기에 승산이 없기 때문이었다. 이에 양헌수 장군은 포수(砲手) 500여 명을 거느리고 10월 1일 강화해협을 건너 정족산성으로 잠입했다.

이 정족산성은 강화해협의 초입새에 위치해 있어서 침공군의 퇴로를 끊거나 배후를 공격할 수 있는 요충지 중의 요충지였다. 당시 조선군의 무기는 구식이었고 그중에서 그나마 포수들의 전투력이 뛰어났다.

정족산정에 들어간 포수 500명은 당시 조선의 최정예였고, 정족산성은 강화도의 최고 요충지였다. 따라서 정족산성이 함락되고 500명의 포수마저 전멸한다면 조선 입장에서는 더 이상의 항전이 어려운 상황이었다.

하지만 양헌수 장군의 잠입은 천주교 신자들을 통해 곧바로 로즈 제독에게 밀고됐다. 10월 3일, 로즈 제독은 160명의 해병대를 파견해 정족산성을 공격하게 했다. 그동안의 승전으로 사기가 한껏 오른 프랑스 해병대는 소풍 가는 마음이었고 그래서 대포도 가져가지 않았다.

양헌수 장군은 침공군이 성벽 가까이 올 때까지 기다리고 있다가 기습 사격을 가해 6명을 죽였다. 놀란 프랑스군이 응전했지만 30여 명의 부상자만 생겼을 뿐 성을 함락시킬 수는 없었다.

전의를 상실한 침공군은 물러났고, 다음날 로즈 제독은 강화읍에 불을 지르고 퇴각했다. 퇴각 이유는 간단했다. 한강 봉쇄를 유지하려면 정족산성을 점령해야 하는데 현재의 프랑스군만 가지고는 어려운 상황이었다. 그렇다고 그대로 주둔하면 퇴로를 끊기거나 배후를 기습당할 염려가 있었다. 게다가 이미 음력 10월이라 겨울 추위가 몰아 닥쳐 장기전이 불가능했다. 이에 로즈 제독은 다음을 기약하고 후퇴를 결정했던 것이다.

반면 침공군의 퇴각으로 대원군의 자신감은 한껏 올라갔다. 기정진과 이항로 등 보수유림의 기세도 한껏 올라갔다. 그들은 이번의 승리를 유교문명의 승리로 확신했다. 이에 따라 조선에 패배한 서양문명은 오랑캐의 열등문명으로 간주됐다. 그래서 배움의 대상이 아니라 타도의 대상으로 여겨졌다. (계속)

신명호 - 강원대학교 사학과를 졸업하고 한국학중앙연구원 한국학대학원에서 박사학위를 받았다. 현재 부경대 사학과 교수와 박물관장직을 맡고 있다. 조선시대사 전반에 걸쳐 다양한 주제의 대중적 역사서를 다수 집필했다. 저서로 <한국사를 읽는 12가지 코드> <고종과 메이지의 시대> 등이 있다.

201703호 (2017.02.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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