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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동 선비정신의 미학(12)] 최초의 ‘역사사전’ 저술한 초간 권문해 

자주성을 회복하고 실학의 씨앗 뿌리다 

글 송의호 기자 yeeho@joongang.co.kr / 사진 공정식 프리랜서
한민족 최초의 백과사전 대<동운부군옥>을 20권20책으로 엮어… 중국에 치우친 조선 지식인의 자국 문화·역사 경시 행태를 질타

▎<대동운부군옥>의 산실인 초간정. 목판도 처음에는 이곳에 보관해오다 지금은 종택으로 옮겨졌다.
정유년 벽두 ‘역사’가 다시 쟁점으로 떠올랐다. 교과서를 두고서다.

교육부는 설 연휴 직후인 1월 31일 중·고교 국정 역사 교과서의 최종본을 확정해 발표했다. 2015년 10월 교육부가 역사 교과서 국정화를 발표한 지 1년 3개월 만이다. 박근혜 정부 들어 추진된 국정 역사 교과서는 그동안 찬반 논쟁이 뜨거웠다. 우여곡절 끝에 국정 역사 교과서가 모습을 드러내자 몇 가지 사건의 기술에 이목이 집중됐다. 그 중 하나가 ‘대한민국 수립’이다. 국정 교과서는 ‘1948년 8월 15일 대한민국 수립’으로 표현했다. 기존의 검정 교과서 상당수가 북한은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수립’으로 표현하면서 대한민국은 ‘정부 수립’으로 적는 등 좌편향적 사관(史觀)이란 지적을 받았다. 이른바 대한민국 정통성 논란이다. 그러면서 교육부는 내년부터 국정 교과서 강행 대신 국정과 검정 교과서 혼용 방침을 발표했다. 검정 교과서는‘대한민국 수립’과 ‘대한민국 정부 수립’을 모두 쓸 수 있게 했다. 역사 해석을 둘러싼 진보·보수의 갈등을 타협안으로 절충한 것이다. 그러나 논란은 계속되고 있다.

조선 중기에도 ‘역사’를 화두로 던진 선비가 있었다. 초간(草澗) 권문해(權文海·1534∼1591) 선생이다. 물론 오늘날과 방향이 다르지만 관점의 충돌은 있었다.

권문해는 <대동운부군옥(大東韻府群玉)>을 편찬한 사람으로 더 잘 알려져 있다. <대동운부군옥>은 교과서 등에 ‘우리나라 최초의 백과사전’으로 소개된다. 그러나 오히려 역사 사전에 가깝다. <대동운부군옥> 20권20책은 당시의 각종 문헌을 바탕으로 역사를 중심에 놓고 지리·문학·예술 등을 운자(韻字)에 따라 백과사전 방식으로 분류했다. 범위는 고조선 시기부터 조선까지다. 초간은 우리 역사가 들어 있는 우리나라 책은 물론 중국 책까지 모조리 수집해 읽은 뒤 집대성했다. 선각자적 집념이다. 그가 우리 역사에 눈을 돌려 그토록 깊게 파고든 까닭은 무엇일까.

1월 25일 초간의 흔적을 찾아 경북 예천군 용문면 죽림리 초간종택을 찾아갔다. 조선 십승지(十勝地)의 하나인 예천 금당실을 지나 금곡천을 건넜다. 저만치 죽림리 산 아래로 고택이 보였다. 초간종택 안내판을 따라 집 앞에 이르자 두루마기를 입은 노인이 지팡이를 짚고 서 있었다. 사진으로 미리 본 종손임을 한눈에 알아 볼 수 있었다. 취재를 약속했는데 무슨 사정이 생겨 갑자기 출타하려는 걸까. 혹시나 해서 급히 차에서 내려 인사를 드렸다. 추위가 몰아닥쳐 밖은 손이 시렸다.

우리나라와 중국 책 모조리 수집해 역사 섭렵


▎초간의 13대 종손인 권영기(오른쪽) 씨가 백승각에서 <대동운부군옥>의 목판을 보여주고 있다. 왼쪽은 권중섭 도유사.
“집 주인 권영기입니다. 추운 날 먼 길 오느라 수고 많았습니다. 들어갑시다.”

초간의 13대 종손인 권영기(79) 옹이었다. 팔십 노인이 추위에도 아랑곳 없이 의복을 갖추고 손님을 맞으러 집 앞에서 기다린 것이다. 옆에는 종택의 내력 등을 설명할 문중의 권중섭(64) 도유사(都有司: 향교나 서원의 우두머리)가 나와 있었다. 이 종가의 접빈객 문화는 이렇게 지켜지고 있었다.

초간은 480여 년 전 이곳에서 태어나 19세에 향시 장원을 차지했다. 23세인 1556년에는 퇴계 이황을 찾아갔다. 학봉 김성일, 서애 류성룡 등과 배우며 교유한다. 그로부터 3년 뒤인 1559년. 그해 겨울 그는 집 근처 용문사에서 아우 권문연과 글을 읽다가 무릎을 치며 개탄한다. 역사를 두고서다. ‘초간선생연보’에는 이렇게 적혀 있다.


“동국(東國)의 풍속이 질박해 문헌이 갖춰지지 못하니 선비라는 자들이 입으로 중국의 일을 이야기한다. 그들은 중국의 치란(治亂)과 흥망(興亡)은 마치 어제 일처럼 밝은데 동국의 일은 상하 수천 년 일을 아득히 문자가 없던 시대의 일처럼 여긴다. 이는 눈앞의 물건을 보지 못하면서 천리 밖을 응시하려는 것과 같은 것이다.”

당시 지식층의 자국 문화 경시 태도를 한탄한 것이다. 초간은 그런 인식에서 우리 역사 자료를 섭렵해 나간다.

1560년(명종15) 초간은 별시 문과에 급제한다. 1562년(29세)에는 퇴계를 찾아가 한 달간 머무르며 가르침을 받는다. 제자가 된 것이다.

이후 형조 좌랑, 예조 정랑 등 관직을 거친 뒤 1570년 영천(榮川, 오늘의 영주) 군수로 나갔다. 2년 뒤엔 성균관 전적, 사간원 정언 등을 지내고 안동 부사, 청주 목사를 맡는다. 1581년 초간은 뜻하지 않게 파직된다. 공주 목사로 재임 중 죄수가 탈옥한 것이다. 그의 나이 48세 때다. 초간은 고향으로 돌아왔다. 2년 뒤 다시 발탁된다. 사간원·사헌부를 거쳐 1584년(51세) 대구 부사를 지낸다. 이런 이력에서 보듯 초간은 내·외직을 두루 거치며 틈틈이 우리 것, 우리 역사를 읽으며 책 편찬을 준비했을 것이다.

초간종택은 특이하게도 대문이 없었다. 대문 위치에는 대신 향나무가 비스듬히 서 있다. 50m쯤을 들어가면 정면에 ‘대소재(大疎齋)’란 편액이 걸린 높다란 사랑채(보물 제457호)가 나타난다. 여기서 왼쪽으로 안채가 있고 오른쪽 뒤로 사당이 있다. 종택 건물은 초간의 아버지 권지가 지었다고 한다. 권중섭 도유사를 따라 대소재 마루에 올랐다. 눈앞에 송림과 금당실이 내려다보였다. 멀리로 진산인 학가산의 능선이 가물가물하다. 가슴이 탁 트인다. 종택 뒤는 죽림이란 마을 이름 그대로 대나무가 많았다.

목판 660여 개 관련기관 기탁 대신 직접 관리


▎1. 초간종택 사당의 내부. 맨 왼쪽에 불천위인 초간 선생의 위패가 모셔져 있다. 오른쪽은 현 종손의 4대 조상 신주. / 2. 종택 유물전시관에 보관돼 있는 초간의 유서. ‘평생 서책을 모으는데 힘을 썼다’고 직접 썼다.
대소재 왼쪽에 ‘백승각(百承閣)’이란 3칸짜리 별도 건물이 있다. <대동운부군옥> 목판이 보관된 곳이다. 종손이 이중으로 굳게 잠긴 백승각의 문을 열었다. 불을 켜자 장판각을 가득 메운 목판이 모습을 드러냈다. 20권20책의 목판은 모두 667개. 종손은 그중 하나를 꺼냈다. “여러 번 도난을 당했어요. 막무가내로 벽이 뚫린 적도 있습니다.” 이름 그대로 100대가 넘도록 오래 계승시키는 게 종손의 임무다. 그 의무를 다하느라 여태 관련 기관에 기탁도 않고 있다. 목판(보물 제 878호)은 1776년(정조1)에 새겨졌다. 현재는 문화재청이 안전장치를 했다.

<대동운부군옥>은 ‘우리나라 운부군옥’이란 뜻이다. 중국의 <운부군옥>은 원나라 음시부(陰時夫)가 엮었다. <운부군옥>은 서편(書篇)·시편(詩篇)·연호·인명·초목 등 항목을 설정하고 내용을 운자별로 분류했다. <대동운부군옥>은 <운부군옥>의 분류 체계를 참고하면서도 항목과 내용은 우리나라 것으로 대체했다. 즉 지리와 나라·성씨·인명·효자·열녀·수령(守令)·신선·나무·화초·동물 등 11가지 항목을 설정했다.

내용을 들여다보자. 1권은 표제어 ‘東(동)’으로 시작된다. ‘東(동)/動也 春方也(동야 춘방야, 움직인다는 뜻이다. 봄을 가리키는 방위이다) 征東(정동)/晉帝封高句麗王璉爲征東將軍樂浪公[南史](진제봉고구려왕련위정동장군낙랑공, 진나라 황제가 고구려 왕인 연을 정동장군 낙랑공에 봉했다[남사])’ 등으로 이어진다. 마지막 ‘남사’는 출전이다. 뒷부분은 바로 우리 역사의 조각이다.

초간은 1589년(56세) 대구 부사로 있을 때 방대한 <대동운부군옥>의 정리를 마쳤다고 연보에 나온다. 쓰기 시작한 건 1587년 10월이다. 그가 남긴 <초간일기>에 적혀 있다.

“10월 30일. 맑음. 출근하지 않았다. 지난달 북방에 변란이 생겨 반란을 일으킨 오랑캐들이 녹둔도(현재의 두만강 하구)를 포위하고 지키고 있던 농군 등 150여 명을 죽이거나 잡아갔다. <대동운부군옥> 정서(正書) 작업을 27일부터 시작했다.”

이 시기를 편찬을 앞둔 정서로 보면 항목별로 분류하고 초고를 쓴 건 훨씬 이전일 것이다. 이와 관련 한국고전번역원에서 일하는 종손의 둘째 아들 권경열(49) 씨는 “공주 목사에서 물러난 뒤 고향으로 돌아와 편찬을 본격 시작했을 것”으로 추정했다. 편찬실은 초간정(草澗亭)이다. 초간정사(草澗精舍)라고도 한다. 초간이 파직 당한 이듬해에 지은 건물이다. 종택을 나와 북쪽으로 3㎞쯤 떨어진 한적한 곳이다. 냇물이 휘돌아 흐르는 절벽 위에 세워져 있다. 초간정 아래 얼음장 밑으로 물소리가 세차게 들렸다. 고요 속에서 불후의 저작은 태어나는 것일까.

<대동운부군옥>은 완성 뒤 만일을 대비해 3질이 만들어졌다. 선견지명이었다.

초간은 집필을 마친 뒤 성주의 한강 정구(鄭逑)를 방문한다. 이야기를 들은 한강이 “식견을 넓히고 싶다”며 빌려달라고 간청했다. 마지 못해 빌려준다. 그리고 얼마 뒤 한강의 집에 불이 나 한줌의 재가 됐다. 2년 뒤 이번에는 동문 수학한 학봉 김성일이 이야기를 듣고 찾아왔다. 책을 본 학봉은 “그냥 두기 아까우니 나라에서 인쇄해 보급하자”고 제안했다. 학봉은 이후 홍문관의 책임자가 된 뒤 한 질을 받아 간행을 준비한다. 그런데 또 변고가 닥친다. 이번엔 임진왜란 난리 통에 간 곳이 없어졌다.

아들이 대(代) 이어 다시 <해동잡록> 인물사전 펴내


▎1. 종택의 사랑채인 대소재에서 바라본 풍광. 앞으로 십승지인 금당실과 멀리 진산인 학가산이 보인다. / 2. 대소재(大疎齋) 의 정면. ‘크게 엉성한 집’이라는 뜻을 담아 초간의 8대 종손 권현상이 편액을 걸었다.
<대동운부군옥>에는 다양한 고대 설화가 실려 있다. ‘수이전(殊異傳)’ 설화가 대표적이다. 서정주 시인은 ‘머리에 석남 꽃을 꽂고’라는 시를 지으면서 여기 나오는 설화를 모티브로 삼았다고 술회했다. 또 임진왜란 이후 소실된 ‘대동시림(大東詩林)’ 등 우리 문헌의 편린이 남아 있다. 자칫 사라질 뻔한 인물이나 고대 지명, 고유의 동·식물 이름, 방언 등도 담겨 있다.

역사 관련은 전체 20권 중 14권에 걸쳐져 있다. 7할이다. 역사책으로 보는 이유다. 권1부터 권3은 단군부터 삼한·삼국·고려의 역대 왕을 수록하고 있다. 말갈·거란·몽고·왜의 역사도 나온다. 권4부터 권14까지는 인물 열전으로 삼국이 95명, 고려가 484명, 조선이 364명 등 총 1101명이 등장한다.

초간은 이런 방대한 편찬의 바탕이 된 장서를 어떻게 확보했을까.

연구자들은 그동안 몇 차례 종택의 문적을 조사했다. 물론 수백 권을 도난당한 뒤다. 거기서 인용한 자료가 거의 나오지 않자 초간이 이들 자료를 직접 소장하기보다 조정에 있을 때 접한 자료를 발췌한 것으로 보았다. 종손은 “유언장을 보면 그렇지 않다”고 했다. 초간이 남긴 유언장은 종택 오른쪽 유물전시관에 있었다. 한지 전지에 큰 글씨로 거칠게 쓰여 있다. 내용은 이렇다. “내가 평생토록 힘을 쏟은 것은 오직 서책을 모으는 일 한 가지였다. 책이 적지 않다 보니 아직 태반은 목록에도 올리지 못했다. 부디 책 다락에 보관해 때때로 점검, 포쇄하고 잃어버리지 않도록 하라.” 초간의 장서량을 짐작케하는 대목이다. 종손은 유언을 지키려 무진 애를 썼지만 잃은 책도 적지 않다.

아들 권별은 장서의 힘으로 대를 이어 <해동잡록(海東雜錄)>이란 14책 규모의 방대한 인물사전을 다시 펴낸다.

그래서 종손은 “우리 가학(家學)은 성리학이 아닌 사학”이라고 강조했다. 초간이 조선의 통치이념인 성리학 대신 변방 학문인 우리 역사에 매달린 까닭이 무엇인지 다시 물었다. “한마디로 자주성이겠지요.” 종손은 “성리학 일변도에서 벗어나 역사 정리로 실학의 씨앗을 뿌리는 역할도 했다”고 자부했다.

역사는 초간의 일기에도 남아 있다. 1580년 11월부터 1591년 10월까지 10년간 2187일의 기록이다. 김형수 국학진흥원 연구위원은 “<초간일기>는 임진왜란 이전에 관료가 쓴 몇 안되는 일기”라며 “일기에는 동일한 사안을 두고 관점이 충돌하는 사례도 보인다”고 말했다. 정인홍 사건이 그중 하나다. 사헌부 장령 정인홍이 우성전·이경중 등을 탄핵한 사건을 두고 초간은 “모두 인홍의 소행으로 말미암은 것”(1581년 3월 12일)이라고 비판했다. 반면 동시대 율곡 이이의 <석담일기>에는 “정인홍은 충성을 다하고 공도(公道)를 받들고 있다. 그가 논한 바에는 지나친 것이 있는 듯하나 실로 공론인데 어찌 옳지 않다 하겠는가”(1581년 3월)라고 적었다. 서인 율곡과 동인 초간은 같은 사건을 두고 이렇게 정반대로 해석했다.

초간은 성품이 강직했다. 퇴계학을 집대성한 18세기 권두경은 <계문제자록(퇴계 제자 기록)>에 “호원(초간의 자)이 병조판서 율곡이 나랏일을 전단하는 것을 동료들과 논핵(論劾)했는데 후에 이이가 낯빛을 달리하자 공은 사사로운 뜻이 아니었다고 웃음으로 대답했다. 또 신묘년(1591년)에는 송강 정철의 죄를 논핵해 마침내 죄를 얻었다”고 기록했다. 당시 초간은 사간원을 맡아 상소가 올라오면 누구라도 죄를 묻는 일을 하고 있었다. 이처럼 초간은 율곡과 송강 같은 당대 실세에 맞서 죄를 묻고 불의를 참지 못하는 관료였다.

강직한 성품으로 당대 실세들의 죄 묻기도


▎초간 내외의 위패가 모셔져 있던 감실(龕室). 종손은 감실이 도난당할 뻔한 사건을 겪은 뒤 이 감실을 아예 사당이 아닌 별도의 장소에 보관하고 있다.
종손은 그래서 “우리 집은 충과 효에 강직함을 중히 여긴다”고 강조했다. 초간은 사후 나라가 내린 불천위(不遷位)가 됐다. 종택 뒤편 사당에는 불천위의 신주가 모셔져 있었다. 안내한 권중섭 도유사는 “불천위 신주는 본래 감실 안에 있었으나 한 차례 도난을 당한 뒤 감실은 별도 관리한다”고 설명했다. 불천위 감실은 정교한 작은 한옥 모양이다. 30년 전쯤 종손이 설을 앞두고 사당을 청소하기 위해 들어갔다가 없어진 걸 발견했다. 종손이 백방으로 노력한 끝에 부산에서 일본으로 넘어가기 직전 간신히 회수했다.

종손이 그 일을 회상하며 한마디 덧붙였다. “서울에서 내려온 한 미술 기자가 취재하고 간 뒤 도난당했어요. 그 기자를 의심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기자에게 따져 다행히 찾았지만… 세상이 그렇더라고.” 종손의 일침에 취재하던 기자가 공연히 송구스러웠다.

우리 역사를 보존하고 전하는데 일생을 바친 초간이 지금의 국정 역사 교과서 논란을 지켜보면 뭐라고 일갈할까. 그라면 어떤 관점에 서게 될까. 우리 사학의 선각자 초간을 지금 돌아보는 이유다.

- 글 송의호 기자 yeeho@joongang.co.kr / 사진 공정식 프리랜서

[박스기사] 예천 권씨 내력도 드라마틱한 역사 - 5형제 모두 급제… 사화(士禍) 연루돼 풍비박산


▎초간종택의 대문 역할을 하는 향나무. 수종은 울릉도 향나무다.
초간 권문해는 본관이 예천이다. 후손들은 “통성명을 하면 ‘아, 안동 권씨요. 양반이시네요’라는 말을 흔히 듣는다”고 말한다. 권씨는 안동이 단일 본관이니 더욱 그렇다는 것이다. 예천 권씨는 2000년 현재 전국적으로 1500가구에 인구는 5000여 명이 전부라고 한다. 예천 권씨를 잘 모를 만도 하다. 신라 때부터 예천에서 세거한 호족치고는 후손의 수가 너무 적다.

예천 권씨는 본래 성이 권이 아닌 ‘흔(昕)’이었다. 고려 때 성이 바뀌었다. 고려 충목왕의 이름 자가 같은 흔이라는 이유로 국명에 따라 성을 바꾸었다고 문중은 설명한다. <고려사> 충목왕 즉위년(1344년) 10월 4일 기사에 관련 내용이 나온다. “왕의 이름 자와 음이 같은 글자를 금지하고, 성씨의 경우에는 외가의 성씨를 따르게 했다.”

이에 따라 흔씨도 외가의 성을 따라 바꾸게 된다. 당시 진사시에 합격해 검교예빈경을 지낸 흔섬(昕暹)은 어머니가 안동 권씨여서 권씨로 성을 바꾸고 본관은 예천을 그대로 두었다. 시조가 된다.

유배지 강진에서 가져와 심었다는 향나무

예천 권씨는 조선 왕조에 관료를 잇따라 배출하며 전성기를 맞는다. 특히 초간의 조부 5형제(권오행·권오기·권오복·권오륜·권오상)는 모두 과거에 급제했다. 아주 드문 경우다. 그러나 이 기쁨은 오래 가지 못하고 가문은 풍비박산이 난다. 무오사화(戊午士禍)가 덮친 것이다. 김종직의 문인인 셋째 권오복이 ‘조의제문(弔義帝文)’에 연루돼 극형인 능지처참을 당한다. 나머지 네 형제도 모두 유배를 가야 했다.

그런 중에 일부는 대가 끊겼다. 5형제 중 막내인 초간의 조부 권오상은 전남 강진에서 유배 생활을 했다. 권오상은 이후 중종반정(中宗反正)으로 풀려나 고향으로 돌아와 은거한다. 현재 초간종택이 있는 죽림리다. 그때 강진에서 가져와 심었다는 향나무가 지금도 초간종택의 영고성쇠를 지켜보며 비스듬히 서서 대문 역할을 한다. 이런 집안의 내력이 일찍부터 초간이 우리 역사에 관심을 두게 된 한 원인이 되었을지도 모른다.

201703호 (2017.02.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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