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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 연재│신기율이 쓰는 ‘현대인의 풍수’] 사람에게 이로운 집이란! 

‘스페이스로지’(공간의 기술)로 내 삶을 가꾸라 

신기율 기율다원(己律茶院) 운영
마음먹기에 따라 ‘죽은 터’도 성공 잉태한 명당 될 수 있어…최악 입지에서 살아남기 위해선 내 상황에 맞는 정서적인 공간 조성해 재충전 기회 만들어야

공간의 힘과 영향력에 관심이 있는 사람들은 ‘왕후장상의 터’는 이미 정해져 있다고 생각하는 경우가 많다. 배산임수, 금계포란 등 전통 풍수에 의해 널리 알려진 명당만을 좋은 땅으로 믿고, 반대로 사업이 망해나간 자리는 흉당으로 취급하고는 한다. 그러나 반지하 원룸도, 터가 안 좋다고 알려진 집도 몸과 마음을 치유하고 꿈을 이루는 명당으로 만들어갈 수 있다.


▎한 가정의 인테리어 모습. 공간은 그곳에 사는 사람이 어떤 의미를 부여하고 어떤 일을 하는지에 따라 그 기운이 변화된다. 때로는 소품 하나로도 명당을 만들 수 있다.
“이 집에 오고부터 되는 일이 없어요. 아무래도 집에 문제가 있는 것 같은데 선생님이 잠시 들러주시면 안 되겠습니까?”

초로에 접어든 남자의 얼굴에는 피곤함과 불안이 짙게 배어 있었다. 몇 년 사이 혈색 좋던 얼굴은 반쪽이 됐고, 흰머리도 확연히 늘었다.

대기업에서 임원으로 승승장구하며 55세까지 꽉 채워 일하던 시절의 그는 나이에 비해 훨씬 젊었고 늘 생기가 넘쳐 있었다. 그런 그에게 지난 3년간 도대체 무슨 일이 있었던 걸까?

며칠 뒤 한남동에 위치한 그의 아파트를 찾아가 보았다. 들어서자마자 베란다를 가득 채운 한강의 풍광이 한눈에 내려다보였다. 조금 오래됐지만 이 정도 입지라면 상당한 금액을 주고 얻었을 집일 터이다. 집안 내부는 안주인의 깔끔한 성격을 보여주듯 단정하고 흐트러짐이 없었다. 남향에 볕도 잘 들고 한강이 한눈에 보였다. 누구나 부러워할 법한 이 집에 도대체 무슨 문제가 있는 것일까?

“제가 3년 전에 은퇴하면서 조금 무리해서 이 집으로 이사를 왔습니다. 그동안 고생한 아내에게 경치 좋은 집에 살게 해주려고요. 그런데 그 뒤부터 안 좋은 일이 한꺼번에 생기기 시작했어요. 노후자금을 마련하려고 나름 신중하게 투자했던 주식이 급락하면서 큰 손해를 봤어요. 그 때문에 스트레스를 받았는지 심근경색이 와서 죽다 살았죠. 그 뒤로는 몸도 안 좋고 매사 의욕이 없어 방에 틀어박혀 있는 시간이 많습니다. 집사람과 다툼도 많아졌고요.”

처음엔 그저 운이 없다고만 생각했다. 그런데 언젠가부터 이 집이 점점 불편해지기 시작했다고 한다. 외출했다가 집에만 오면 마음도 몸도 축축 처지고 아내에게 짜증을 내는 자신을 발견하곤 했다.

절대적으로 나쁜 터는 없다


▎서울 용산구 한남동의 주택가 전경. 뒤로 남산이 있고 앞에 한강이 흐르는 배산임수 지형이다. 터의 힘을 발현시키기 위해서 사람이 그 공간에 맞는 행동을 할 수 있어야 한다.
혹시 집 문제가 아닌가 싶어 관련 책을 찾아본 그는 뜻밖의 곳에서 원인을 찾아냈다. 바로 눈앞에 펼쳐져 있는 한강이었다.

“저길 보세요. 바로 이 아파트 앞쪽이 한강 물줄기가 흘러나가는 모습이 보이는 자리란 말입니다. 이런 곳은 돈도, 건강도 물이 흐르듯 나가버려서 풍수에서는 흉지라고 한다면서요. 그걸 알고 나서부터 점점 신경 쓰이고 꺼림칙해 정말 이사라도 가야 되나 싶습니다.”

눈앞에서 완만한 곡선을 그리며 흘러나가는 한강의 푸른 물결. 말없이 창 밖을 바라보는 그의 얼굴에 두려움과 불안이 드리워져 있었다. 혹자는 그런 그에게 요즘 세상에 무슨 미신 같은 걸 믿느냐고, 마음 약해져서 잡생각이 드는 거라고 할지도 모른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지금 저 물살은 그의 불안, 우울과 공명해 마음속에 이미 어두운 ‘한강 효과’를 만들어버렸다는 사실이다.

“말씀하신 대로 이곳은 ‘물이 흘러 나가는 모습이 보이는 자리’가 맞습니다. 풍수에서 물살이나 바람이 빠져나가는 곳을 향하고 있으면 사람의 재물과 정신도 함께 빠져나가는 ‘흉지처(凶地處)’로 보는 경우도 있죠. 하지만 세상에 절대적인 악인이 드물 듯, 절대적으로 나쁘기만 한 터는 없습니다.”

자연은 인간의 기준대로 좋은 것 나쁜 것을 가리지 않는다. 저 강이 돈, 건강, 행운 같은 좋은 것만 굳이 골라내 앗아 간다는 것은 너무나 인간중심적인 생각이다. 좋은 것이 나간다는 것은 나쁜 것 역시 나갈 수 있다는 얘기다. 어쩌면 이 집은 보이지 않게 그런 역할도 해왔는지 모른다.

또한 세찬 바람이 빠져나가는 곳은 때로는 다시 비상할 수 있는 공간이 되기도 한다. 강한 맞바람을 맞을 때 연이 하늘로 날아오르듯 마음을 다잡고 버티면 나를 한 단계 성장시키는 수행의 집이 될 수 있다. 결국 동전의 양면 중 어느 쪽을 볼 것인가, 어느 쪽에 내 마음을 둘 것인가의 문제가 되는 것이다.

그러나 그는 내 얘기가 도무지 이해되지 않는다며 물었다.

“선생님 말대로라면 마음먹기에 따라 흉당도 명당이 된다는 얘기지 않습니까? 저 같은 평범한 사람이 터의 기운을 바꾼다는 게 말이 됩니까?”

“물론 저 한강의 물길은 바꿀 수 없지요. 하지만 선생님이 살고 있는 집, 이 작은 공간만큼은 선생님의 힘으로 바꿀 수 있습니다. 그걸 아셔야 이 집의 근본적인 문제가 해결될 수 있어요. 외부의 환경이 미치는 영향은 때론 생각만큼 크지 않을 수도 있습니다.”

그는 창문 너머의 강에 시선을 빼앗긴 나머지 더 중요한 부분을 놓치고 있었다. 바로 그가 매일 발을 딛고 먹고 숨쉬며 살고 있는 집이 ‘사람의 생기’를 잃어가고 있다는 사실이었다. 깔끔하지만 왠지 온기가 느껴지지 않는 그곳에는 부부가 대화할 만한 공간은 식탁을 빼고는 전혀 보이지 않았다. 각방을 쓴지 조금 된 듯, 서재 한 구석에는 급하게 개어놓은 듯한 가장의 이부자리가 보였고 묘하게 어수선했다.

방안 전체에 무겁게 내려앉은 공기는 단지 창에 쳐진 암막커튼 때문만은 아닌듯했다. 이 집의 문제를 만든 것은 결국 이 집에 사는 사람들일 것이다. 우리는 공간에 대해 이중적인 태도를 갖고 있다. 풍수를 믿는 그처럼 많은 사람이 공간이 가진 힘을 절대화하고 수동적으로 받아들인다. 이는 ‘왕후장상의 터는 따로 있고 바뀌지 않는다’는 생각으로 흐르기 쉽다.

과거 세도가들이 왕릉 주변에 사람을 살지 못하게 하고 좋은 터를 찾기 위해 전국의 산천을 들쑤셔놓았던 것도 이 때문이다. 요즘에 와서도 재벌들이 사옥이나 중요한 건물을 지을 때 풍수전문가에게 컨설팅을 받는다는 것은 잘 알려진 사실이다.

최태원 SK그룹 회장의 취임 1년 후 완공된 서린동 SK사옥은 신령한 거북이 물을 마시는 형상인 ‘영구음수형(靈龜飮水形)’ 터로 유명하다. 이런 곳에 자리를 잡으면 거북이처럼 장수를 누리고 부귀 발복한다고 알려져 있다. 건물 자체에도 거북이를 형상화하는 문양을 배치해 이 건물의 풍수적 상징성을 강조해놓았다. 그 덕분인지 SK의 주가는 상장 후 8년 만에 580% 넘게 급등했고 사세도 크게 확장됐다.

그러나 아무리 대단한 명당도 다가오는 불행을 완전히 막을 수는 없는 모양이다. 회장이 두 번이나 구속되고 스캔들에 휩싸이는 등 개인적인 풍파 역시 끊이지 않았기 때문이다. 좋은 일만 일어나야 할 대표적 명당에서 왜 이런 ‘반흉반복(半凶半福)’의 사건이 번갈아 일어난 것일까?

‘유령DNA’가 공간의 분위기를 바꾼다


▎서재를 다실로 꾸민 한 가정집의 실내. 생기가 없는 집이라면 가족과 대화를 늘려갈 수 있는 별도의 공간을 만들어보길 제안한다.
고전에서 말하는 명당은 그곳을 차지하는 순간 모든 게 결정지어질 것 같지만 실상은 그렇지 않다. 터의 힘을 발현시키기 위해서는 사람 역시 그 공간에 맞는 행동과 생각을 할 수 있어야 한다. 아무리 땅이 좋아도 기온과 습도 같은 또 다른 조건이 맞지 않으면 싹을 틔울 수 없는 것과 같은 이치다.

‘집터’와 같은 조금 더 거시적인 영역에서 우리는 공간에 대해 의존적으로 되기 쉽다. 반면 내가 살고 있는 ‘집 안’을 대할 때는 정반대 모습이 드러난다. 일단 공간이 그 자체로 에너지와 생명력을 가졌다는 명제는 사라진다. 우리에게 집은 그저 정기적으로 깔끔히 관리하는 공간이자 이왕이면 트렌드에 뒤처지지 않게 가끔씩 인테리어를 바꿔줄 대상일 뿐이다. 집안의 모든 구조물을 내가 마음대로 다루고 없앨 수 있는 콘크리트 덩어리로만 보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자연이 만들어낸 터의 기운과 생명력을 인정한다면, 인간이 만든 집이라는 또 다른 형태의 ‘자연’도 살아있는 생물처럼 자신만의 기운과 힘을 가질 수 있다고 보는 게 타당하지 않을까?

결국 ‘집이라는 공간을 좌우하는 가장 큰 에너지는 과연 무엇인가’라는 문제가 남는다. 나는 그곳에 사는 ‘사람’이라고 생각한다. 살아있는 인간이 만들어내는 삶의 에너지는 우리의 상상 이상으로 공간에 큰 영향을 미친다.

1990년대 초, 러시아의 한 과학자가 독특한 실험을 한 적이 있다. 블라디미르 포포닌 박사의 이른바 ‘유령 DNA’ 실험이다. 그는 진공상태에서 빛의 패턴을 측정하는 장치를 개발했다. 먼저 아무것도 없는 진공상태의 공간에 레이저를 비췄다. 당연히 어떤 반응도 나타나지 않았다. 다음에는 DNA 샘플을 넣고 레이저를 비췄다. DNA와 만난 레이저는 일정한 패턴의 무늬를 만들어냈다.

놀라운 것은 그 다음이다. DNA 샘플을 제거한 뒤, 다시 그 빈 공간에 레이저 광선을 비췄을 때 어떤 일이 일어났을까? 과학자들은 당연히 어떤 패턴도 나타나지 않을 것이라고 확신했다. 그런데 놀랍게도 처음과는 다른 독특한 패턴이 나타났다.

심지어 그 패턴은 아무것도 없는 진공상태에서 몇 주 동안이나 계속 남아 있었다. 앞서 있었던 샘플의 자취가 마치 유령처럼 그곳에 남아 공간에 영향을 미치고 있었던 것이다. 포포닌 박사는 이런 현상에 ‘유령 DNA 효과’라는 이름을 붙였다. DNA가 사라져도 그 잔영이 한동안 유령처럼 그 공간을 맴돈다는 것이다.

언뜻 보면 믿어지지 않는 얘기지만 사실 이런 현상은 우리가 일상적으로 접하는 일이다. 돌아가신 지 얼마 안 된 부모님의 집에 들어서자 그분의 기척이 느껴지는 것만 같은 착각, 학자의 연구실에 들어서면 평소에는 보지 않던 책에 손길이 가고 심지어 잘 읽히는 것 같은 기분, 예배당이나 법당에 들어서는 순간 알 수 없는 고요함과 잔잔한 평화가 가슴 밑바닥부터 차오르는 느낌 말이다.

우리가 보통 ‘분위기’라고 통칭하는 것들이 어쩌면 유령 DNA의 작용인지도 모른다. 그곳에서 생활하고 공부하고 기도하던 수많은 사람이 남긴 흔적이 그 공간을 그렇게 만들어 간 것이다.

한 지인이 스페인의 ‘가우디 성당’이라 불리는 사그라다 파밀리아에서의 색다른 경험을 들려준 적이 있다.

“준비 없이 떠난 여행이라 배경지식도 없이 그냥 성당에 들어가 혼자 앉아 있었어요. 그런데 이유 없이 눈물이 줄줄 흘러서 깜짝 놀란 적이 있었어요. 천주교 신자도 아닌데 말이죠.”

그녀의 얘기를 들은 지 얼마 후 우연히 TV채널을 돌리다가 나는 또다시 비슷한 장면을 목격했다. 몇 명의 연예인이 스페인 여행을 하는 프로그램이었는데 한 여배우가 가우디 성당에서 똑같이 눈물을 흘리는 것이다. 그녀 역시 울고 있는 자신을 보며 ‘왜 이러는지 모르겠다’며 당황스러워했다.

누가 사는지에 따라 터의 운명이 결정된다


▎1. 명당도. 전통적인 풍수지리에서는 누운 소의 모양이나 소의 뱃속 모양을 닮은 땅의 지형을 명당으로 여겼다. / 2. 다탁(茶卓). 터가 좋지 않다면 다탁 등 마음을 차분하게 해주는 정서적인 공간을 만들어보는 것도 좋다.
머리가 채 이해하기도 전에 무엇인가 마음을 먼저 움직이고 몸을 반응하게 만든 것이다. 그것은 단지 눈에 보이는 아름다운 스테인드글라스와 웅장한 기둥 때문만은 아니었을 것이다. 눈에 보이지 않지만 100년 넘게 그 공간에 켜켜이 쌓인 사람들의 절실한 기도와 신앙심, 축복과 위로의 DNA가 마음을 정화시키고 감동을 줬던 것이다.

그렇다면 똑같은 이유로 앞서 소개한 사례도 설명할 수 있다. 그가 집에만 오면 몸과 마음이 더 힘들어지고 깊은 우울을 느꼈던 것은 단지 기분 탓이 아니다. 창 밖의 강물 때문만도 아니다. 지난 3년간 그 스스로가 집안에서 뱉어냈던 탄식과 분노, 무기력한 말과 행동이 쌓여 보이지 않는 집안의 공기를 어둡게 바꾸고 그의 몸과 마음에까지 영향을 미쳤던 것이다.

공간은 그곳에 사는 사람이 어떤 의미를 부여하고 그곳에서 어떤 일을 하고 어떤 감정을 발산하는가에 따라 그 기운을 변화시킨다. 나는 그것을 ‘공간가소성(Space plasticity)’이라 부른다. 두뇌가 반복적인 신체나 정신적인 활동에 의해서 신경회로가 바뀌는 것을 뇌과학에서는 신경 가소성이라 한다.

많은 사람이 뇌는 일정한 나이가 되면 굳어지고 고정된다고 믿지만 사실 반복되는 생각과 행동으로 변화하고 성장할 수 있다는 것이다. 공간도 마찬가지다.

‘공(空)’이라는 한자에서 위에 쓰인 ‘혈(穴)’은 광구와 광구를 받쳐놓은 지지대의 모양을 본뜬 글자다. 아래의 ‘공(工)’은 장인들이 쓰던 연장을 상형한다. 광구와 연장을 그려 놓았으니 공은 ‘비어있다’는 상태적 표현이 아닌 ‘지금은 아무것도 없지만 곧 하나씩 채굴해나갈 것임’을 암시하는 동태적 표현이 된다.

그러니 공간(空間)은 우리가 생각하는 대로 텅 빈 무(無)의 상태가 아니다. 무엇인가로 이미 가득 차 있지만 내가 알지 못하고 찾아내지 못해 비워져 있는 가능성의 영역이 된다.

실제로 우리는 이런 공간가소성을 일상에서 목격하게 된다. 줄줄이 망해 나가던 가게가 주인이 바뀐 뒤 갑자기 대박집이 되기도 하고, 볼품 없는 반지하 원룸이 유명기업의 산실이 되기도 한다. 공간도 그곳에 깃드는 사람의 에너지에 따라 얼마든지 진화하고 성장할 수 있다는 것이다.

물론 본래 그 공간이 갖고 있던 에너지 역시 무시할 수는 없다. 새로 들어간 사람과 공간이 충돌을 일으키는 경우도 물론 있다. 그러나 처음에 나와 맞지 않는 듯한 집이라도 내가 어떻게 가꾸고 어떤 파장을 일으키는가에 따라 사람을 살리는 집, ‘생지처(生地處)’로 거듭날 수 있다.

그것이 내가 궁극적으로 말하고 싶은 ‘스페이스로지(Spacelogy)’, 즉 ‘공간을 다루는 기술’이다. 이는 내가 몸담고 있는 이 집을 나와 가족을 돕고, 몸과 마음을 치유시키는 명당으로 만드는 법이다.

배산임수나 금계포란의 입지가 아니어도 괜찮다. 집의 평수나 가격은 전혀 중요하지 않다. 반 지하 원룸이든 100평짜리 주상복합이든 명당으로서의 자격과 가능성은 똑같다. 스페이스로지는 눈에 보이는 물리적 공간이 아닌 보이지 않는 제 2의 공간, ‘정서적 공간’에 대한 기술이기 때문이다.

식품전문가 최낙언 씨의 저서 <맛의 원리>에 따르면 식품의 98%가 무색·무미·무취 성분으로 이뤄졌다고 한다. 0.1%도 안 되는 향과 0.01%의 색, 단맛을 제외한 2%의 맛 성분만이 맛의 실제 성분이라는 것이다. 하지만 그렇다고 98%의 성분이 무의미하다는 건 아니다. 그 98%가 바탕이 되어주기 때문에 2%의 성분에서 수만 가지 맛이 나올 수 있기 때문이다.

우리가 사용하는 공간도 마찬가지다. 벽에 바른 벽지나 페인트, 가구와 가전제품들이 공간을 만드는 전부일 것 같다. 하지만 이런 것은 공간을 구획하는 벽과 바닥, 거기에 얹혀진 작은 소품일 뿐이다. 공간의 에너지를 결정하는 것은 2%의 보이는 인테리어가 아니라 98%의 보이지 않는 유령DNA의 영역이다.

만약 그 공간의 에너지를 그대로 투시할 수 있는 놀라운 안경이 있다고 상상해보자. 그 안경을 끼고 바라보는 내 집의 모습은 물리적 공간과는 전혀 다른 모습일 수 있다. 눈에 보이는 우리의 공간은 대부분 크든 작든 침실과 거실, 부엌, 화장실 등으로 구성돼 있다. 기능과 편의 위주의 공간배치인 것이다.

그러나 꼭 침실이라 해서 편안함을 느끼는 것도, 거실에서 가족 간의 대화가 활발히 오가는 것도 아니다. 그 공간의 기능이 사람의 행동을 어느 정도 유도는 하지만 감정과 정서까지 완전히 움직이게 하지는 못한다. 오히려 집 주인의 마음상태에 따라서 정서적 공간이 결정된다.

정서적 화장실을 만들어라


▎베란다를 휴식 공간으로 꾸몄다. 집에서도 휴식에 집중할 수 있는 장소가 필요하다.
한강변의 그 집은 정서적인 측면에서 봤을 때 공간 구분이 거의 없는 ‘원룸’과도 같았다. 그가 주로 머무는 서재방은 물론 거실, 부엌 할 것 없이 집안 곳곳이 전부 우울과 불안이라는 정서 하나로 어지럽혀져 있었기 때문이다. 이는 사실 현대를 살아가는 우리 모두가 가진 공통적인 공간의 문제이기도 하다.

일상에 지친 사람에게 집은 그저 먹고 자고 쉬는 곳일 뿐이다. 그러니 거실에서도 방에서도, 식탁에서도 우리는 비슷한 행동을 하고 비슷한 감정을 쏟아낸다. 현실 속의 골치 아픈 일을 잠시 잊기 위해 스마트폰 속으로 잠시 도피하거나 멍하니 TV를 보거나 답답한 현실에 한숨을 내쉰다.

아무리 넓고 방이 많은 집이라도 그 공간을 채우고 있는 감정의 색깔은 대부분 비슷하다. 보이지 않는 에너지의 측면에서 보면 공간이 질서 없이 뒤섞여 있는 것이다. 때문에 많은 집이 명당도 흉당도 아닌 나름의 아슬아슬한 균형을 유지하고 있는지도 모른다. 마음이 우울이나 불안 같은 방향으로 기울어버리면 정서적 공간 역시 마음을 닮아버리게 된다.

이런 악순환을 끊고 내 집을 조금 더 적극적으로 나를 살리고 도와주는 공간으로 창조하고 싶다면 어떻게 해야 할까? 먼저 ‘공간에 의미를 부여하는 기술’을 익혀야 한다. 예를 들면 ‘반성의자’와 같은 것이다. 의자 하나에 ‘아이가 자신의 잘못을 생각하고 뉘우칠 시간을 주는 의자’라는 의미를 부여했을 때 평범한 의자는 아이와 부모 모두에게 특별한 영향력을 발휘하기 시작한다. 반성과 용서를 만드는 상징적 공간이 되는 것이다.

집의 특정한 장소에 나만의 의미를 부여함으로써 완전히 다른 정서적 공간을 만들 수 있다. 특히 우울증이 있거나 마음이 힘든 사람들에게 꼭 필요한 공간이 바로 ‘정서의 화장실’이다. 통곡의 벽을 찾는 순례자처럼 켜켜이 쌓인 슬픔을 쏟아낼 공간을 만드는 것이다. 집안의 특정한 장소를 정해놓고 그곳에서만 슬퍼하기로 자신과 약속하고 화장실에서만 볼일을 보듯, 감정의 배설도 정서적 화장실에서만 쏟아내는 것이다.

평소 알고 지내던 한 엄마는 한동안 사춘기 아들과 극심한 갈등을 겪었다. 방황하던 아들이 자퇴를 선언하자 그녀의 인내심도 한계를 드러냈다. 아들 못지않게 엄마도 한동안 우울증에 시달렸지만 다행히 그녀는 끝까지 자신도 아들도 포기하지 않는 현명한 엄마였다. 그녀가 아들과의 관계회복을 위해 제일 먼저 한 일은 정서적 화장실을 만든 것이었다. 아들에게 분노와 원망을 쏟아내지 않기 위해 앞에서는 최대한 평정을 유지하고 풀리지 않는 감정은 안방 베란다에서만 풀었던 것이다.

그렇게 감정이 북받쳐 오를 때마다 베란다에서 소리 지르고 눈물을 흘리고 나면 다시 아들 앞에서 미소지을 수 있었다고 했다. 그런 노력 덕분인지 다행히 아들은 긴 방황을 끝냈고 모자는 둘도 없는 인생의 파트너가 됐다.

스페이스로지의 기본은 내 상황에 맞게 정서적 공간을 구획하는 것이다. 질서 없이 혼재돼 있던 공간을 내가 부여한 의미대로 새롭게 재배치하고 분리해야 할 것들은 따로 두는 것이다. 이를 잘 활용하면 때로 집은 단순히 몸을 쉬게 해서 얻는 수동적 의미의 재충전이 아닌 나 스스로 코드를 꽂고 원하는 만큼의 에너지를 얻는 적극적 충전의 장소가 될 수도 있다.

몇 년 전부터 알고 지내던 직장인 A씨는 소문난 워커홀릭이었다. 일이 없으면 찾아서 만들었고 주말에 쉬는 것을 오히려 불편하고 어색해 했다. 그러다 보니 몸은 늘 피곤에 젖어 있었고, 마음은 언제나 불안으로 요동치고 있었다. 그녀에게 무엇보다 절실한 것은 치유와 휴식이었다.

작은 다탁(茶卓)으로 만들어낸 치유의 명당

한번은 그녀가 처음으로 자신의 집으로 나를 초대한 적이 있었다. 방 하나, 거실 하나의 아담한 집이었는데 예상대로 그녀를 닮아 있었다. 특별한 명당도 흉당도 아니지만 A씨처럼 기운이 산만하고 피곤했다. 그녀 역시 좁은 집이 불만이라며 빨리 이사 가고 싶다는 말을 자주 하곤 했다.

그런데 1년여 뒤, 다시 찾은 그녀의 집은 놀랍게도 확연히 달라져 있었다. 들떠 있던 기운이 차분해지고 집안 전체가 생기로 가득했다. 그 변화를 일으킨 것은 바로 작은 다탁이었다. A씨가 부엌과 연결된 거실 한쪽을 책장으로 분리해 그 안에 아담한 다실(茶室)을 마련한 것이다.

“선생님 댁에서 차를 마실 때마다 몸과 마음이 치유되고 충전되는 느낌이 너무 좋았어요. 그래서 저도 따라서 흉내 내봤는데 효과가 있었어요. 다실에서만큼은 스마트폰을 내려놓고 차를 마시면서 남편과 또 저 자신과 대화하는 연습을 했더니 정말 피로도 풀리고 불안함이 서서히 사라지더라고요. 그러다 보니 신기하게 공간의 느낌이 풍성해지면서 예전처럼 좁다는 생각도 별로 안 들어요.”

환하게 웃는 그녀를 보면서 문득 그녀가 12평 집에 자신만의 가우디 성당을 세웠다는 생각이 들었다. 삶의 고단함을 위로하고 치유하는 공간. 자신에게 최적화된 명당을 그녀 스스로 창조해낸 것이다.

창 밖의 강물은 여전히 굽이쳐 흘러가고 있었다. 한강변의 집에서 오랜 시간 그와 마주앉아 공간에 대한 다양한 대화를 나눴다. 처음에는 스페이스로지를 도무지 이해하지 못하던 그도 시간이 지날수록 말없이 이런저런 생각에 잠기는 듯했다.

“실패의 기억으로 가득한 집을 떠나는 것도 나쁘지 않은 선택입니다. 그러나 제가 볼 때 선생님은 새로 이사한 집에서도 단점을 찾아낼 가능성이 높아요. 선생님 자신이 바뀌지 않는 한, 이런 일은 얼마든지 반복될 수 있다는 거죠.”

은퇴라는 큰 변화를 겪었다면 가장 익숙한 공간에서 변화의 적응기간을 갖는 것이 좋다. 편안하게 기댈 곳이 없으면 사람은 다급한 마음에 엉뚱한 선택을 하게 되고 무리수를 두게 된다. 그리고 그 선택은 고구마 줄기처럼 줄줄이 어긋난 선택을 하게 만들기도 한다. 그럴 때 사람들은 본능적으로 자신의 고통을 투사할 대상을 찾게 된다. 비록 그것이 완전한 진실이 아닐지라도 말이다.

한동안 연락이 없던 그는 결국 이사 대신에 다른 선택을 했다. 얼마 전, 한결 밝아진 목소리로 청년 스타트업에게 무료 컨설팅을 시작했다는 소식을 전해줬다. 우울함과 분노를 토해내는 것밖에 할 일이 없던 작은 방. 그곳에서 그는 어느새 거친 물살에도 떠내려가지 않는 법을 배운 것이다.

신기율 - 과학·종교·철학 등 다양한 학문을 자유롭게 횡단하며 젊은 시절을 보냈다. 대학 졸업 후 약 15년간 철학자로서의 남다른 혜안으로 세상과 사람의 깊은 본질을 마주한 결과 국내 최초로 ‘직관’의 중요성을 설파했다. 현재 직관과 마음치유 그리고 차(茶)를 결합한 기율다원(己律茶院)을 운영하고 있다. 저서로는 2015년 베스트셀러 <직관하면 보인다>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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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04호 (2017.03.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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