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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의 섬 문명사(4)] 그리스보다 더 그리스다운 시칠리아(Sicilia) 

동서 문화가 융합되는 지중해의 중심으로 문명의 교차로 역할… ‘문명이란 무엇인가’를 생각하게 하는 대서사의 여로(旅路)에 들다 

글·사진 주강현 제주대 석좌교수, 아시아퍼시픽 해양문화연구원장 asiabada@daum.net
구석기부터 청동기, 그리스와 페니키아로부터 로마·노르만과 아랍문명, 그리고 에스파냐와 프랑스에 이르기까지 온갖 문명이 용해돼 융합된 섬. 유럽이면서도 아랍이 엿보이고, 이탈리아면서도 전혀 다른 그 무엇이 엿보이는 섬. 그리스보다 더 그리스적 건축물이 남아있는 섬. 시칠리아의 문명사적 궤적을 따라간다.

▎아름다운 시칠리아 북서해안을 배경으로 서 있는 타오르미나 인근의 산 정상에 있는 원형극장. 타오르미나는 그리스인이 가장 먼저 정착한 해변이다.
오디세우스가 스킬라와 카리브디스의 공격을 받은 ‘좁은 바다’는 오늘날 이탈리아반도와 시칠리아 사이를 가로지르는 메시나해협(Strait of Messina)이다. 그리스인이 서부지중해로 나가기 위해서는 반드시 메시나해협을 관통해야 했다. 해협만 통과하면 사르데냐와 프랑스 남부, 에스파냐까지 거침없이 당도했다. 문제는 메시나해협이었다. 해협은 폭이 북쪽(푼타델파로와 스킬라바위 사이)에서는 3.2㎞, 남쪽(알리곶과 펠라로곶 사이)은 16㎞에 불과하다. 만만한 해협이 아니다. 언제나 난파 위험이 도사리고 있다. 에게해에서 중부지중해까지 당도한 그리스인들이 무사관통하기에는 절대적 공력이 필요했다.

해협의 운명은 ‘단절’이며, 동시에 ‘긴장’을 뜻한다. 끊어져 있으므로 단절은 분명한데, 너무 가깝게 있으므로 긴장을 멈출 수 없다. 국민 국가 이탈리아에 소속된 섬이지만, 시칠리아는 섬일 뿐이다. 역사적 궤적이 다르고, 앞으로의 궤적도 달라 보인다. 역사적으로는 본토에서 시작된 ‘로마제국’이라는 거대한 그늘이 늘 시칠리아를 덮었으며, 이는 해협을 사이에 둔 시칠리아에는 긴장 그 자체이기도 했다. 뱃사람들은 스킬라와 카리브디스라는 바위와 소용돌이 때문에 메시나해협을 지나기를 두려워했다. 이러한 난관은 매우 오랜 세월 동안 본토와 시칠리아를 격리하는 데 도움을 주었을 것이다.

지도를 펴보면, 시칠리아가 지중해의 정확히 중간에 위치함을 알 수 있다. 이탈리아의 육지적 사고로는 변방이지만 해양사적으로는 지중해의 중심, 문명의 교차로다. 지정학적으로 그럴 수밖에 없는 운명이다. 동서 지중해의 교차로이자, 이탈리아반도와 아프리카를 잇는 징검다리이기도 하다.


▎1. 에트나화산에서 가까운 카타니아 해변. 카타니아에서는 현무암을 건축재료로 활용한 건물을 쉽게 볼 수 있다. / 2. 아그리젠토의 콘코르디아 신전과 그 앞에 세워진 현대적 조각. 비잔틴 기독교의 교회당 역할을 함으로써 지금까지 버틸 수 있었다.
그리스 밖의 그리스

시칠리아 탐사는 문명이란 무엇인가를 생각하게 하는 여로다. 구석기로부터 청동기, 그리스와 페니키아로부터 로마·노르만과 아랍문명, 그리고 에스파냐와 프랑스에 이르기까지 온갖 문명이 용해되고 융합되어 하나가 되었다. 그래서 시칠리아에 당도하면 유럽이면서도 때로는 아랍이 엿보이고, 이탈리아면서도 전혀 다른 그 무엇이 엿보인다. 그리스보다 더 그리스적 건축물이 남아있는 섬. 아테네신전보다 더 완벽히 남아 있는 신전들이 시칠리아의 문명사적 궤적을 스스로 웅변한다.

기원전 3000년 금속 도입이라는 놀라운 문명적 전환이 일찍부터 에게해에서 건너오고 있었다. 후기청동기는 이탈리아 방향에서 사람들이 내려오면서 시작됐다. 시칠리아의 고인종은 동부의 시셀(Sicels), 서부의 시카니언(Sicanians), 서부의 페니키안, 세제스타(Segesta)와 에리스(Erice)를 점령한 엘리미안(Elymians) 등이었다.

그리스 본토에서 점증한 인구압은 새로운 땅을 찾아 나서게 만들었다. 그리스와 페니키아인이 시칠리아 땅으로 속속 넘어왔다. 식민화는 기원전 8세기~기원전 5세기에 집중됐다. 해변에 당도한 이들은 각각 자신의 폴리스를 세웠다.

이오니안이 낙소스·메시나·칸타니아 등에서 발견되며, 도리안은 시라쿠사(Siracusa)·젤라(Gela)·아그리젠토(Agrigento)·라파리 등에서 발견된다. 출신이 달랐던 만큼 이해에 따른 각축을 거듭했다. 기원전 8세기 중엽부터 그리스와 페니키아는 식민지끼리 충돌을 빚기 시작했다. 시칠리아 탐사에서 만나는 도시국가의 폐허는 이러한 충돌의 유산이다.

식민지에서는 독재자들이 출현해 폭압을 일삼았다. 그러나 그들은 도시를 성벽화해 든든한 방어기지를 만들었고 예술을 부흥시키고 신전을 조성했다. 그리스 본토로부터 아이스큘러스 같은 극작가와 플라톤 같은 철학자를 초빙해 학문과 예술을 번영시켰다. 각 도시국가는 번영하는 시기와 경제 문화적 발전이 시민적 경쟁과 그리스와 카르타고 사이의 전쟁 시기에 대조적이었다.

로마시대, 시칠리아는 로마와 카르타고 사이의 제1차 포에니전쟁(기원전 264~241)에 연루돼 로마의 첫째 지방이 되었다. 로마가 본격적으로 제국을 건설하기 시작한 것은 튀니지에서였다. 카르타고가 멸망하고 그 대신 로마가 지배하는 아프리카가 탄생했다. 북부아프리카는 고대 세계의 곡창이요 올리브유의 주산지였다. 그곳에서는 올리브유를 이탈리아보다 더 많이 생산했으며, 이런 추세는 오늘날까지 계속된다. 로마인은 교량·댐·수로·관개시설은 물론, 수천 ㎞의 도로를 건설했다.

융합적 풍경을 자랑하는 팔레르모


시칠리아는 예부터 유럽의 많은 식자가 한 번쯤은 여행했던 곳이다. 괴테가 대표적이다. 1786년, 괴테는 이탈리아 여행을 떠난다. 온갖 의무와 사랑의 고통으로부터 벗어나 안식을 찾고자 떠난 것이었다. 독일 문예운동인 ‘슈투름 운트 드랑(Sturm und Drang)’을 이끄는 중심인물로 활동하던 시기였으니 질풍노도를 잠시 벗어나고자 한 것일까? 그는 베네치아·로마·나폴리·시칠리아를 여행하면서 수많은 편지를 썼고, 이후 이 편지를 토대로 <이탈리아 기행>을 쓰게 된다. 1787년 4월 5일 팔레르모(Palermo)에서의 기록.

“건축양식은 대체로 나폴리와 유사하지만, 예를 들어 분수와 같은 공공기념물은 미적 감각이 그리 뛰어나지 않다. 이곳의 예술정신은 로마와 다르다. (…) 화려한 것을 좋아하는 예수회의 취향이 잘 드러난 성당마다 유사한 점이 있지만, 이는 원칙에서 그렇거나 의도적인 것이 아니라 우연에 의한 것이다. 당대의 수공업자·형상조각가·잎무늬장식조각가·도금사·칠장이·대리석연마공은 미적 감각이나 감독 없이 자기가 할 줄 아는 것을 어떤 장소에서 설치하려 했다.”

이탈리아지만 로마와 전혀 다른 섬, 지방 장인의 독자적 세계가 구현되던 섬임을 암시한다. 오늘날 시칠리아 수도인 팔레르모는 기원전 8세기에 페니키아 무역상이 건설했고, 그 이후 카르타고인의 거주지였다가 기원전 254년 로마에 점령당했다. 로마의 지배하에 기운이 쇠퇴했으나 535년 비잔틴제국의 장군 벨리사리우스가 동고트족에게서 되찾은 다음 다시 번영을 누렸다. 831년 아랍인이 점령한 뒤 북아프리카와 활발한 무역 중심지로 번창했다. 그러나 팔레르모의 황금기는 시칠리아왕국의 수도로 있던 노르만족 시대(1072~1194)다.

아랍-노르만 양식의 건축물인 1185년에 지은 대성당부터 찾았다. 외관상으로 이런 야릇한 건축이 없다. 아랍풍이 분명하다. 이를 뜯어고쳐 고딕양식까지 도입했고, 실내는 어쩔 수 없이 아랍풍과 노르만풍이 섞여버렸다. 팔라초레알레(왕궁), 산토조반니델리에레미티교회(1132), 마르토라나교회(1143), 그리고 쿠바궁과 치사궁 같은 팔레르모 주변의 궁전이 모두 같은 시대에 건축된 것이다. 아랍의 지배를 끝낸 노르만의 출현으로 도시는 융합적 풍경을 연출하기에 이른다.

노르만 지배자들은 노르만·라틴·그리스인·아랍인이 함께 번영을 누리며 잘사는 강력한 시칠리아 국가를 건립했다. 그리스인을 팔레르모의 토후로 삼았고 아랍인에게는 재정 관리와 군의 특수부대 지휘를 맡겼다. 도시 전역에 기독교 교회와 수도원이 세워지고 있었는데도 모스크에는 여전히 무슬림들로 붐볐다.

시칠리아의 노르만왕국은 관용을 토대로 세워진 나라이며, 고위 자문관 중에는 무슬림도 있었다. 이슬람 양식으로 된 튤립 모양의 돔과 로마네스크 양식의 탑을 가진 팔레르모의 노르만 교회들은 절제와 관능의 놀라운 결합체이며, 그 도시의 과장된 바로크 양식 건물 사이에 우뚝 서있다. 이곳에서 시칠리아와 튀니지 사이의 거리는 사라지고 없다.

시칠리아에 대한 노르만족 통치권은 1194년 독일의 호엔슈타우펜 왕가로 넘어갔다. 도시는 호엔슈타우펜 계승자의 손을 거치면서 점점 쇠퇴해 1266년 프랑스 앙주의 샤를에게 정복당했다. 그러나 앙주인의 압제는 1281년 ‘시칠리아의 만종’으로 불리는 민중반란으로 끝맺고, 팔레르모는 아라곤왕국의 지배를 받게 되었다. 이 사건으로 나폴리-시칠리아왕국을 차지하기 위한 프랑스와 아라곤 간의 전쟁이 일어났다. 그 명칭은 3월 30일 부활절 월요일의 저녁기도(vespers) 시간에 팔레르모 외곽의 한 교회에서 일어난 폭동에서 유래되었다. 이 민중반란을 거침으로써 스페인의 오랜 시칠리아 지배가 시작됐다. 16~17세기 스페인 총독들이 도시 재건을 위해 애썼으나 도시빈민의 반란이 그치지 않았다.

시칠리아가 오늘날 이탈리아이면서도 이탈리아적이지 않은 이유는 이런 역사적 궤적에서 유래한다. 시칠리아인은 ‘우리는 시칠리아 사람!’이라고 말하지 ‘우리는 이탈리아 사람!’이라고는 말하지 않는다. 이탈리아의 다른 지역에 비해 사회적으로 극히 낙후한 섬. 대토지 소유자들이 농민을 무한 착취해 민란이 그치지 않던 반란의 섬. 시칠리아 농민들은 비참할 정도로 극심한 가난에 시달렸고 무지했으며 수탈당했다. 당대의 기준으로 보더라도 그들의 비참한 상황은 다른 지역에 비해 상대적으로 혹심했다.

그래서 역사가 에릭 홉스봄은 마피아가 시칠리아에서 탄생한 배경도 이 같은 원초적 반란에서 찾았다. 나중에 로마로 들어가 자본에 의해 변질된 마피아와 구분해 시칠리아에서의 마피아 탄생과 번성에 새로운 시대를 염원하는 메시아적 원초적인 열망이 반영돼 있다고 본 것이다. 시칠리아는 잠재적인 농민혁명주의자와 가까스로 억제되고 있는 계급투쟁, 그리고 공법이나 공공질서의 전적인 결여가 뒤엉킨 상황에 처해 있었기 때문이다.

팔레르모 남동쪽, 비교적 가까운 곳에 그리스인의 도시 세제스타가 남아있다. 에리스와 더불어 세제스타는 시칠리아 서부에 정착한 그리스인인 엘리미안의 중요한 도시다. 부상이 빨랐으나 가까운 셀리누스(지금의 셀리눈테)와 갈등을 빚어 기원전 409년 카르타고의 지원으로 파괴되었다. 연이어 기원전 307년에는 시라쿠사의 독재자 아가토클레스에 의해 파괴되었다가 로마시대에 와서 재건됐다. 엘리미안은 토로이민의 후예로 믿어졌다. 그래서 자신들을 토로이민의 후예라고 ‘만들어진 역사’를 창조해낸 로마인에 의해 ‘공통 조상’이라는 이유로 세금이 면제되고, 도시계획이 다시 세워졌다. 세제스타의 도시공간은 이처럼 한 번도 완전히 포기된 적 없이 이어졌으며, 13세기에 이르러 다시금 쓰였다.

아프리카로 가는 문, 트라파니와 세제스타


▎아랍풍과 노르만풍이 결합된 팔레르모 대성당. 1185년에 지은 대성당으로 이탈리아면서도 이탈리아적이지 않은 융합의 도시 팔라르모의 상징이다.
세제스타로 가는 길은 간단하지가 않다. 황량한 산이 이어지는데 구릉마다 양을 키우는 목장으로 운영된다. 출입구에서 들어서서 조금 올라가면 구릉 건너편으로 신전이 우뚝 서 있다. 아그리젠토의 신전만큼이나 원형에 가깝다. 신전은 도시성벽 밖의 언덕에 있다. 기원전 430~420년으로 소급되며, 가장 완벽히 살아남은 도리안 스타일 건축이다. 그런데 신이 없는 ‘익명의 신전’이다. 성스러운 원주민의 공간을 고려한 신성한 공간이 아니었을까 비정된다. 도리안 신전은 세계 건축사에서도 매우 가치가 있어 유네스코 세계유산으로 지정됐다. 그리스 밖에 있는, 그리스 본토보다 더 완벽한 신전이 있는 세제스타.

아크로폴리스는 바르바로(barbaro)산 정상이 있다. 극장은 4000석으로 아크로폴리스 북쪽 능선에 기원전 2세기 중엽에 세워졌다. 원형극장은 시칠리아 서쪽바다를 향해 그림처럼 열려 있다. 석양이 질 무렵이면 그리스인은 석양이 바다에 비기는 풍경을 배경삼아 연극을 관람했을 것이다. 극장 뒤로는 폴리스가 형성돼 있고 신전이 세워졌다. 신전은 후대에 로마시대에 들어와 교회로 변신한다. 무슬림이 시칠리아를 점거한 다음에는 모스크로 변신한다. 그리스신전, 로만가톨릭, 오스만회교의 역사적 굴곡이 풍경과 유적에 각인돼 있다. 산정에는 바람이 드세다. 드센 바람을 맞으며 정상에 건축된 것은 외적으로부터 방어가 가장 큰 이유일 것이다.

세제스타에서 가장 가까운 해안에 트라파니(Trapani)가 있다. 팔레르모에서 불과 107㎞, 하루 11차례의 기차가 연결된다. 소요시간은 약 2시간 15분. 트라파니 모지아(Mozia) 섬은 가장 중요하고 신비로운 페니키안 문명을 간직하고 있다. 기원전 8세기 후반, 카르타고 사람들이 서부해안 스타그논 석호의 안전을 위해 모티아(Motya) 타운을 조성했다. 곧 지중해에서 가장 번성하는 도시로 성장했으며, 아프리카·사르데냐·스페인의 무역 루트로 각광받았다. 기원전 397년 시라쿠스의 디오니소스왕에게 파괴되었고, 반대편인 오늘날의 마살라에 재건됐다. 리리베오(Lilibeo)박물관에는 모티아의 선박이 소장돼 있는데 옛 페니키아의 선박 건조 기술을 보여준다. 이 걸출한 배 흔적은 포에니전쟁 시기로 소급된다.

트라파니의 마살 라 석호에서는 19 3 3년 스타뇨네(Stagnone) 토르소(torso)가 발견되었다. 이집트 스타일의 옷을 입은 페니키아-이집트 예술(기원전 6세기) 풍이 발견됨으로써 어떤 이집트 스타일의 신전이 존재했을 거라는 가설을 부여한다. 일명 ‘팔레모르 스톤’에서는 제5왕조의 부조가 등장하는데, 이집트 700년 삶의 기록을 담았다. 1대 파라오부터 5대 왕조까지, 그들의 업무에서 부인들, 나일강의 범람과 제방과 땅의 기여 등을 기록했다. 시칠리아와 북부아프리카의 문명 교섭이 이루어졌다는 좋은 증거들이다.

트라파니는 북아프리카로 가는 이탈리아의 문이다. 현재 트라파니는 이탈리아의 소금을 생산하는 주요 기지이자 쿠스쿠스(CusCus)라는 아프리카식 음식으로 유명하다. 트라파니는 약 2500년 전의 역사를 안고 있는 곳이기도 하다. 물론 지금은 그 흔적이 없다. 트라파니의 좁은 시내를 벗어나면 바람이 거세고 곧장 바다가 보인다. 옛사람들은 이 바닷길을 이용해 그리스로, 이집트로, 카르타고로 항행했을 것이다.

시칠리아 남부에는 아그리젠토(그리스어 아크라가스)라는 아주 각별한 유적지가 전해온다. 팔레모르에서 기차를 탔다. 기차는 산길을 관통했다. 그 옛날 모파상을 비롯해 수많은 시칠리아 여행객이 이용하던 기찻길. 기차여행의 낭만이 그대로 남아있는 오래된 노선이다. 우리는 왜 이런 느림의 미학을 포기하고 KTX 같은 속도전에 몰입하는가 하는 문제를 다시금 생각하게 하는 여로다.

아그리젠토는 남부 바닷가 언덕 위에 오랜 역사를 품고 고스란히 남아 있다. 아그리젠토는 기원전 581년 처음 세워졌으며, 첫 정착자들은 섬 남해안을 따라 동쪽으로 64㎞ 떨어진 고을 젤라에서 왔다. 첫 참주 팔라리스는 기원전 6세기 중엽에 카르타고인과 원주민 시쿨리족을 전쟁에서 이겨 아그리젠토의 영토를 확장했다.

아그리젠토와 셀리눈테의 갈등과 번영


▎1. 1933년 트라파니의 마살라 석호에서 발굴된 스타뇨네 토르소. 기원전 6세기께 작품으로 이집트 풍의 작품이다. / 2. 세제스타의 완형에 가까운 신전. 시칠리아에는 그리스보다 더 완전한 신전이 여럿 있다.
핀다로스는 아크라가스를 인간이 세운 도시 중 가장 아름다운 곳이라고 칭송했다. 벼락부자 같은 사치를 부렸다. 아테네와 시라쿠스 사이에 큰 전쟁이 벌어졌을 때 아크라가스는 중립을 지켰다. 그러나 일단 아테네가 패하자 카르타고인은 세력 공백을 감지하고 서부 시칠리아로 침공했다. 갑자기 부유해진 탓에 아크라가스는 너그러운 동시에 어수룩했다. 카르타고인이 기원전 406년 셀리눈테(Selinunte)를 쓸어버린 후 아크라가스를 공격했다. 많은 시민이 약탈하는 적에게 잡히는 대신 아테나신전에 모여 불을 지르고 집단으로 자살했다고 전한다. 벼락부자가 된 아크라가스인은 철저한 이교도였다. 그들은 신을 믿지 않고 인간을 찬미했다. 그들은 세속적 쾌락을 최대한 즐겼다. 그들 시칠리아의 그리스인은 그리스 본토보다 더 웅대한 신전을 지었다.

방대한 유적이다. 파르테논보다 오히려 더 잘 보존된 아그리젠토. 성 출입문은 부서진 채 돌만 무성하다. 20여 분 걸어 올라가면 파르테논 신전보다 더 잘 보존된 콘코르디아 신전이 나온다. 같은 그리스 세력이었지만 카르타고에 붙은 세제스타와 오랜 각축을 벌이다 끝내 카르타고 세력에 의해 멸망했다. 도시국가가 흥기하고 멸망하는 역사의 시간은 준엄하고 통절한 것이다.

아그리젠토의 ‘신들의 계곡’에는 무너지지 않고 보존된 콘코르디아 신전이 잘 버티고 있고, 조금 올라가면 주노(Hera) 신전이 바닷가 벼랑 위에 서 있다. 콘코르디아는 현재 남아 있는 신전 가운데 가장 보존이 잘 돼 있다. 기원전 5세기 중엽에 세워진 이 신전은 정면과 6개 측면에 13개의 기둥이 있으며, 각 기둥에는 20개의 홈이 패였다. 이 신전은 기독교인에 의해 파괴되었어야 하나 비잔틴 기독교의 교회당 역할을 함으로써 지금까지 버틸 수 있었다. 역사는 강한 자가 살아남는 것이 아니라 살아남은 자가 강하다는 것을 증명한다는 사실을 다시금 되새긴다.

유적지에서 조금 벗어나 있는 고고학박물관은 아그리젠토의 방대한 유물을 품고 있다. 시칠리아 고고학의 정수를 보여주는 듯한 박물관이다. 버스정류장에서 내려 신전의 계곡으로 올라오는 완만한 비탈길 오른쪽에 있는 이 박물관은 그리스 시대의 여러 유물과 신전 발굴 당시 얻은 유물을 보관하고 있다. 특히 지오베 올림피코(Giove Olimpico) 신전의 텔라모네(Telamone, 사람 모양의 기둥) 원본이 보관돼 있다.

가까우면서도 사이가 좋지 않았던 셀리눈테. 이곳 역시 바닷가에 열주가 즐비하게 서있다. 서부 그리스 도시의 힘은 세제스타와 격돌했다. 도리안 양식의 건물군이 바다와 두 강 사이의 언덕 위 전략적 요충지에 위치한다. 셀리눈테의 역사는 환상적이면서도 공포스럽다. 이 도시의 이름은 셀리논(selinon)강에서 왔다. 강은 유적의 서쪽으로 흐르는데, 이 도시는 메가라히블리아(Megara Hyblaea)에서 온 그리스인에 의해 기원전 650년에 세워졌다. 카르타고의 동맹이었다. 후에는 시라쿠스의 동맹이 됐고, 매우 강력하게 성장해 카르타고의 동맹인 세제스타와 갈등을 빚었다. 기원전 409년의 결정적 충돌은 치명적이어서 도시 전체가 파괴되었고, 나중에 제1차 포에니전쟁과 로마에 의해 다시 파괴되고 중세에는 잊힌 도시가 되었다. 16세기에 재발견되었고, 19세기에 영국인 고고학자에 의해 발굴되기에 이른다.

방문객은 동쪽의 거대 사원으로부터 마주한다. 템플G는 도시의 가장 큰 사원으로 디오니소스 신에게 받쳐진 서부 그리스 건물의 대표 격이다. 46개의 신전 열주가 있었는데 한 개만 남았다. 템플F는 기원전 6세기 중엽으로 소급되는 36개의 기둥들로 이루어지는데 폐허더미로 남았다. 1950년 복원된 템플E는 헤라에게 바친 신전이다. 아크로폴리스의 궤멸은 놀라운 정경을 보여준다. 엄청나게 희귀한 유물이 쓰러진 기둥 밑과 지하에서 발견됐다. 많은 조각이 셀리눈테에서 발굴돼 팔레르모의 고고학박물관으로 옮겨져 있다. 누구나 무료 입장이 가능한 팔레르모 고고학박물관에서 하루 종일 마음껏 구경하고 사진도 찍을 수 있다.

시라쿠사는 시칠리아의 맹주다. 그리스인이 만든 이 도시는 독특한 지형에 기반한다. 오르티카 섬은 불과 30여 m의 다리로 연육해 차들이 드나든다. 그러나 고대사회에서 30여 m의 해협은 전략적으로 중요한 방어책이 되었다. 오르티카 섬은 비좁다. 그 비좁은 섬 전체를 전략적 거점 폴리스로 만들어냈다.

로마문명이 그리스-로마문명으로 불리는 이유


▎셀리눈테 유적의 열주. 도리안 양식의 건물군이 바다와 두 강 사이의 언덕 위 전략적 요충지에 위치한다.
시칠리아 섬의 동쪽 아래 부분에 위치한 시라쿠사의 기록은 기원전 734년부터 시작된다. 기원전 5세기경에는 그리스 본토를 능가하는 도시가 건설돼 지중해의 패권을 장악했고, 기원전 212년까지 에트루리아와 로마에 계속 대항했다. 기원전 5세기 후반 절정기를 이뤄 수십만 명의 주민을 거느린 도시국가가 형성됐는데, 아마도 고대 최대 도시였을 것이다. 비옥한 계곡과 바람을 막아주는 항구와 담수 샘이 있는 섬에 매혹된 그리스의 식민지 개척자들은 기원전 733년 시라쿠사를 세웠다. 이후 제2차 포에니전쟁이 일어난 기원전 212년 로마에 함락되기까지 500년 이상 독립국가였다.

이후 시라쿠사는 다양한 왕조의 지배하에 문화를 발전시켰다. 아랍·노르만·아라곤 등이 그것이다. 이들이 오랜 세월 애착을 가지고 건설한 시라쿠사는 지금도 많은 관광객의 사랑을 받을 정도로 볼 것도 많고 역사적 사연도 많다.

오르티카의 중핵은 성당이다. 이 성당에 들어서면 재미있는 것을 발견하게 된다. 거대한 돌기둥은 아폴론 신전의 기둥을 그대로 써서 로마시대에 성당을 신축한 것이다. 이 성당은 고대 아테네의 신전(Tempio di Atheama, 기원전 5세기) 터에 건축됐는데. 1693년 대지진 이후 1728년에 지금의 모습이 갖추어졌다. 비잔틴·노르만·바로크 양식이 혼재한다.

오르티카섬을 넘어 산 쪽으로 옮겨가면 폴리스가 나온다. 오르티카섬이 전략적 방어적 거점이었다면 북쪽의 폴리스는 시라쿠사 사람들이 살던 곳이었다. 일명 고고학공원에 모든 유적이 모여 있다. 현존하는 그리스식 최대 극장인 그리스 극장(Teatro Greco, 기원전 5세기)이 있으며, 디오니사우스의 귀(Orecchio di Dionigi)라는 동굴이 있다. 그 외에 카타콤베·로마극장 등이 있다.

시라쿠사의 역사의 풍요함은 아테네 역사에 필적하며, 마치 비잔틴제국과 오스만제국의 모든 기록을 시칠리아 한 도시 속에 압축해놓은 듯하다. 슬프게도 500년 역사의 시라쿠사는 약탈당해, 그리스 보물들은 로마로 옮겨졌다. 로마문명이 그리스-로마문명이 된 것도 이러한 약탈품에 기반했을 것이다.

카타니아(Catania)는 화산의 도시다. 에트나화산은 지금도 활동하는 활화산으로 해발 3350m를 자랑한다. 에트나화산과 불과 28㎞ 떨어진, 이오니아 바다와 접한 시칠리아의 도시. 이곳에 처음 정착한 거주민은 기원전 729년경의 그리스 인이었다. 이후 시라쿠사와 전쟁, 로마의 정복, 아랍·노르만·아라곤족 등 수많은 왕조의 정복지였던 카타니아는 덕분에 융성한 문화를 발전시킬 수 있었다.

시칠리아 사람에게 화산은 숙명과도 같았다. 화산이 흘러내려 번번이 카타니아를 덮쳤다. 덕분에 남아 있는 건축물은 대부분 18세기 이후의 것이다. 1169년의 대지진, 1669년의 화산 폭발, 1693년의 지진은 도시를 완전히 파괴했으며, 주민의 3분의 2 이상을 희생시켰다. 그래서 카타니아 시내의 건축군은 다른 시칠리아의 건축과 다르다. 검정 현무암을 건축 재료로 활용했기 때문이다. 제주도 건축에 쓰이는 화산암을 카타니아에서도 쉽게 발견할 수 있다.


▎로마와의 전쟁에서 시라쿠사를 마지막까지 지키려던 수학자 아르키메데스 동상.
카타니아 시내에는 두 개의 극장이 남아 있다. 그러나 이들 극장은 그리스인의 것이 아닌, 로만그레코 양식이다. 하나는 너무 심하게 망가져 도로변 철책에서 지나가면서 굽어보게 보존돼 있다. 다른 하나는 비교적 완형인데, 그리스극장에서 로만극장으로 넘어오면서 극장 규모가 커지고 객석 아래로 몇 개 층의 통로가 회랑처럼 길게 이어지게 돼있다. 그리스와 로마의 흔적이 이 정도만 남아있을 뿐, 워낙 이후에 도시 발전과 변화가 잦으면서 후대의 바로크 양식 등에 도시의 권한을 넘겨주었다. 그래서 혹자는 카타니아를 바로크의 도시라고 부르기도 한다.

카타니아는 실제로 바로크 시대에 많은 발전을 거듭했다. 성당 건축 등이 화려한 양식을 겸하고 있다. 카타니아를 찾는 이들은 꼭 두오모 광장을 방문한다. 이곳에는 정복의 상징, 곧 오벨리스크를 운반하는 코끼리를 조형한 분수와 1693년 대지진 이후 소실된 성당을 멋진 바로크 양식으로 다시금 태어나게 한 두오모가 있다. 우르시모성은 1239~50년 건축된 성이다. 이후 화산재에 파묻힌 모습을 다시금 찾아낸 것으로, 건물 외벽과 주위에 짙은 회색의 화산재가 아직도 남아 있다.

카타니아에서 기차를 타고 한 시간여를 달리면 타오르미나(Taormina)가 나온다. 기차는 해변을 따라 달리는데 풍광이 아름답다. 많은 부호가 이 해변에 빌라를 짓고 산다. 타오르미나 역전에서 무려 1시간 이상 걸어 올라간다. 산비탈마다 고급 호텔과 빌라가 즐비하다. 고즈넉하고 인적이 끊긴 듯한 이 동네는 한눈에 부호들의 거처임을 알 수 있다. 산 정상에 이르면 어쩌면 세계에서 가장 아름답다고 볼 수도 있는 극장이 시칠리아 북서해안을 배경으로 서 있다. 세제스타의 극장이 일몰을 지켜보면서 연극을 올렸다면, 타오르미나 극장은 남쪽으로 일몰이 비껴가는 모습을 지켜보면서 연극을 올렸을 것이다.

타오르미나나 인근 낙소스(Naxos)는 그리스인이 가장 먼저 정착한 해변이기도 하다. 그리스 본토에서 가장 가깝다는 이유 말고도 이 같은 아름다운 풍경, 높은 벼랑의 전략적 위치 등을 고려한 결정이었을 것이다. 과거의 권력가들이 사랑한 아름다운 풍경은 오늘날도 부와 권세를 지닌 사람들이 차지하고 있다. 이를 나무랄 수만은 없는 게, 그들에 의해 높은 수준의 건축술이 보존되고 있다는 점이다. 옛날과 다른 점은 외국에서 온 낯선 나그네도 그 어떤 호텔이나 개방된 빌라에 투숙하고 풍광을 즐기고 거리를 만끽할 수 있다는 것. 기꺼이 돈을 치를 각오는 당연지사다. 다행히 시칠리아의 물가는 생각 이상으로 싸다. 어쩌면 그것이 많은 이가 다시 찾게 되는 매력일 수 있다.

그리스인이 처음 당도했던 메시나, 그리고 북쪽에 떠있는 흑요석의 섬 에올리에(Eolie) 제도 역시 시칠리아의 역사에서는 너무도 중요하다. 에올리에 제도는 7개의 섬으로 이루어진다. 에올리에는 선사시대로부터 보고였다. 이 섬에서 흑요석이 방대하게 산출되기 때문이다. 흑요석은 당대 바다를 건너는 중요한 수출품이었다. 인근 지중해 일대의 많은 유적지에서 에올리에산 흑요석이 산출되고, 에올리에박물관에 소장된 많은 고고학적 유물이 증명하듯 중요한 해양거점이었음을 알 수 있다.

새로운 반전이 시작되는 지중해의 역사


▎1. 체팔루에 남은 아랍성. 체팔루는 바다로 돌출한 산을 중심으로 이루어진 도시다. / 2. 에트나화산을 배경으로 놓여 있는 시칠리아의 상징 문양.
그러나 바쁜 일정에 모든 곳을, 무려 제주도의 16배에 달하는 곳을 완파하기란 불가능한 법. 그래서 시칠리아를 방문한다면 보름쯤의 일정을 권하고 싶다. 시칠리아를 떠나기 전, 팔라모르에서 1시간 남짓한 거리의 한적한 어촌마을인 체팔루(Cefalu)를 찾았다. 도시는 높은 산에 의지해 형성돼 있다. 미로 같은 작은 골목에 단단한 집들이 즐비하다. 건축양식은 이슬람과 로마식이 혼재해 있다. 이슬람이 이 도시를 장악했을 때, 체팔루는 오스만의 콘스탄티노플과 연결되던 항구였다.

1시간여 산 정상을 향해 올라갔다. 길이 상당히 가파르다. 이곳 원주민이 쌓았던 성이 빙 돌아 서있다. 바다로 돌출한 산을 중심으로 이루어진 도시임을 알 수 있다. 무슬림이 해적으로 나타나기도 하고, 바다는 무한경쟁의 시대로 접어들었다. 로마가 패권을 상실한 이후 지중해 세계는 무슬림의 시대로 접어들고 있었다. 원주민은 무슬림을 피해 산 정상으로 올라갔다. 정상에 깊은 우물을 파고 식수를 준비했다. 성을 두르고 오랜 세월을 정상에서 살아갔다. 물론 이후 완벽하게 무슬림 사회로 접어들고 난 다음에는 이 모든 상황이 끝났다. 지금은 당연히 기독교 사회다. 그러나 다시금 아프리카에서 ‘검은 무슬림’이 바다를 건너 시칠리아 해안에 당도하는 중이다. 지중해의 역사도 이렇게 다시금 새로운 반전을 시작하고 있다.


주강현 - 제주대학교 석좌교수, 아시아퍼시픽 해양문화연구원장. 해양사·문화사·생활사·생태학·민속학·고고학 등 전방위로 연구해온 우리 시대의 대표적 ‘지식 노마드’이자 비교해양문명사 연구에 몰두하는 해양문명사가. 아시아 바다는 물론 대양의 섬으로 시야를 넓혀가며 비교해양문명사 연구에 몰두하고 있다. <적도의 침묵> <독도강치 멸종사> 등 다수의 저서가 있다. asiabada@daum.net

201704호 (2017.03.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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