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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술가의 초상] 인터뷰 | 장욱진 화백 장녀 장경수 경운박물관 관장 

“아버지의 고독한 뒷모습 언제나 애잔했다” 

함혜리 서울신문 문화부 선임기자 lotuscomcom@naver.com
필생의 작품은 부친의 분신이고 정신… 한 번도 재물이라고 생각한 적 없어

▎장욱진 화백의 장녀 장경수 경운박물관 관장은 “욕심 없이 예술가의 길만을 걸은 아버지의 작품은 재물이 아니라 정신적 분신”이라고 말했다. / 사진제공·함혜리
화가 장욱진은 이순경(97) 여사와 사이에 1남 4녀를 두었다. 가족과 자연을 평생의 주제로 삼았을 만큼 가족에게 지극한 사랑을 줬지만 특히 맏딸 장경수(72·경운박물관 관장) 씨는 믿는 구석이 컸다. 아버지는 딸을 ‘서로 간이 잘 맞는다’며 아꼈고, 딸은 예술에 매진한 아버지에 대한 존경과 사랑으로 보답했다. 장 관장과 함께 경기도 용인군 구성면 마북리의 ‘장욱진 고택’을 찾았다. 장욱진이 1986년부터 1990년 겨울 작고할 때까지 기거하며 작품활동을 했던 뜻 깊은 장소다.

“아버지는 평생 그림만 그리신 분이시죠. 여기저기 옮겨 다닌 것은 결국 당신의 작업실을 옮겨 다닌 것입니다. 덕소에서 12년, 수안보에서 6년을 보냈고 이곳으로 오신 게 우리 형제가 이제 더 멀리는 못 간다고 했어요. 수안보에 있을 때 천식 때문에 응급상황이 생겼는데 병원까지 가는데 4시간이나 걸린 적이 있었거든요. 병원도 가깝고 우리가 쉽게 찾아 뵐 수 있도록 서울 근교를 찾다가 우연한 기회에 이 집을 발견했어요.”

장욱진은 아름다움을 보는 눈이 뛰어났다. 당시 한옥은 이리저리 덧대어져서 본 모습을 잃고 있었지만 그의 눈썰미로 첫눈에 집을 알아봤고, 원래의 아름다운 모습을 되찾았다. ‘장욱진 고택’은 조선 후기에 지어진 입 구(口)자형 한옥과 정자, 그리고 나중에 장욱진이 설계해 지은 양옥 1동으로 구성돼 있다.

“아버지께서 서양식 그림 교육을 받으셨지만 작품에는 향토색이 기본적으로 깔려있지요. 그렇듯이 집도 한옥과 양옥이 언제나 같이 있었어요. 아버지가 집 짓는 것을 좋아하셨거든요. 명륜동에도 양옥과 한옥이 있었고 덕소는 슬래브 건물만 있었는데 나중에 그 옆에 어머니를 위해 한 칸짜리 한옥을 지으셨어요. 명륜동 집을 정리하고 이곳으로 와서 한옥을 수리하고 정자를 짓고 사랑방에서 작업을 하셨죠. 집이 너무 춥고 불편해서 아버지가 설계해서 양옥을 지었어요. 지금 생각해도 우리 어머니가 참 대단하신 것은 아버지가 하시겠다는 걸 다 하게 해드린 거예요.”

장 관장은 부모님이 용인으로 거처를 옮긴 뒤로는 서점을 운영하며 평생 예술가 남편 뒷바라지하느라 고생한 어머니도 좀 해방시켜드릴 셈치고 일주일에 두 번 정도 아버지를 찾았다.

“아버지가 말씀은 많이 안 하셨지만 우리는 서로 잘 통해서 대화를 나누지 않아도 즐거웠어요. 특히 아버지는 제가 먼저 그림을 봐주는 것을 좋아하셨어요. ‘경수야 그림 완성했다’라고 전화를 하시면 곧바로 달려가곤 했어요. 그러면 자랑스럽게 그림 설명을 해주시곤 했죠.”

“경수야 그림 완성했다”


▎장욱진 화백의 장남 장정순 씨가 올해 양주시청에 기증한 대표작 <가족도>. 1972년 작품으로 장 화백 특유의 평면적이고 단순한 구조가 돋보인다. 가족에 대한 따뜻한 마음이 담겼다. / 사진제공·장욱진 미술문화재단
장 관장은 개발 바람으로 사라질 위기에 처했던 용인 집을 등록문화재로 지정받아 보존한 것이나, 양주의 시립장욱진미술관 설립, 장욱진미술문화재단을 꾸려나가는 것까지 아버지를 위해 많은 일을 하고 있다. 올해 100주년을 맞아서도 기념사업과 전시를 기획하느라 지난해부터 눈코 뜰 새 없이 바쁘다.

“제 방에 아버지 사진 한 장 걸어 놓고 일이 있을 때마다 대화하듯이 여쭤보죠. 작품과 고택 관리하는데 골치 아픈 일이 너무 많거든요. 생전에 복잡한 것을 싫어하시고 ‘심플’을 강조하셨던 아버지이시니 지금 저를 보면 ‘너 공연한 일 하고 다닌다’고 하시는 것 같기도 해요. 하지만 그건 아버지 생각이고요, 저는 아버지의 큰 사랑을 받았고 그에 보답해야 한다는 생각으로 최선을 다하고 있습니다.”

생전에 아무리 명성을 얻은 화가도 유족 간에 다툼이 있거나 작품관리가 제대로 안 되는 경우가 많지만 장욱진미술문화재단은 다른 화가들이 모범으로 삼을 정도로 운영이 탄탄하다. 작가 평생의 작품 전부를 수록한 전작 도록은 일제강점기와 6·25 전후로 소실된 것을 빼고는 거의 모든 작품을 망라하고 있어 지금껏 위작 시비 한번 일어나지 않았다.

“아버지는 큰 욕심 없이 예술가의 길을 걸었어요, 어머니와 우리 5남매는 아버지의 명예와 뜻을 존중하고 있습니다. 우리 가족 중 누구도 아버지의 작품을 한 번도 재물이라고 생각한 적은 없어요. 아버지의 분신이고, 정신이죠.”

장 관장은 40대 후반에 온 식구를 내팽개치고 덕소로 간 아버지가 원망스럽다 못해 슬프기까지 했지만 모두 용서할 수 있었던 것은 예술을 향한 아버지의 순수한 열정을 알기 때문이었다고 했다.

“초등학생부터 대학생까지 줄줄이 자식들을 두고 있는 가장이 할 일은 아니었죠. 먹고 사는 게 막막했는데 외할아버지를 비롯해 외가에는 박사들이 많아 학자 집안의 딸이 아무 일이나 하면 안 되는 것이라며 어머니에게 서점을 내라고 했어요. 어머니는 서점을 하면서 주말마다 우리들 손을 잡고 시외버스를 타고 덕소에 아버지를 뵈러 갔어요. 이렇게까지 살아야 하나 싶어서 참 슬펐어요. 가족을 사랑하지만 그림을 그리기 위해선 어쩔 수 없는 선택이었으니까 우리 가족은 아무 말 없이 아버지의 뜻을 따랐어요.”

장욱진은 안주도 없이 마시는 술을 시작하면 끝장을 보는 식이었다. 가족들이 보기에도 견디기 힘들 때가 한두 번이 아니었지만 이해했다고 했다.

“아버지가 그렇게 술을 많이 드시는 까닭을 생각해보면 고독감 때문이 아니었나 싶어요. 술이 깨서는 미안하다고 사과하고 돌아서는 아버지의 뒷모습을 보면 너무 고독하고 슬퍼 보여서 아무 말도 못했어요. 아버지의 울타리는 너무 좁았어요. 사회성 없고, 친구도 없고 제자 몇 명 빼놓고는 우리 식구뿐이에요. 약주 드신다고 뭐라고 할 수 없는 거죠.”

“너희 엄마가 어쩌면 기차를 타고 올지 모른다”

아무리 술을 마셔도 가족들 앞에서는 절대로 주정을 하지 않았고, 술 마신 상태에선 절대 붓을 잡지 않았다고 한다. 간혹 술에 취해 그림을 그렸다가도 그대로 파기해 버린다. 한 번은 술자리에서 그려준 것이라며 누군가 들고 와서 서명을 해달라고 하자 면전에서 찢어 휴지통에 버리는 것을 본 적도 있었다. 그만큼 작품에 대해 철저했다.

“저는 아버지 그림을 1초씩 딱딱 보고 가는 사람을 보면 너무 화가 나요. 아버지는 새벽에 그림을 그리셨는데 어떤 때는 아침까지도 작업이 이어지곤 했어요. 구부정한 등으로 쪼그리고 앉아서 침이 흐르는 것도 모르고 그림을 이리저리 돌려가며 집중해서 그림을 그리셨거든요. 그렇게 힘들게 그린 그림이죠. 저는 그래서 다른 사람 그림도 정성 들여 봐요. 그걸 발표하기까지 얼마나 정성을 들였을까 생각하면 그래야 하는 거거든요.”

내친 김에 장 관장의 안내를 받아 세종시의 장욱진 생가(충남 연기군 송용리 내판마을)도 둘러봤다. 장욱진이 태어나 유년기를 보냈고, 6·25전쟁 당시 6개월간 지내며 창작의욕을 되찾았던 곳이다. 그때 추억이 아련하다.

“6·25동란 때 어머니는 오빠와 나를 할머니가 계시던 고향마을에 맡기고 부산에 피란을 갔어요. 얼마나 힘드셨는지 부산에서 아버지가 술로 매 끼니를 때우시니 그 모습을 보다 못한 어머니가 아버지를 고향집으로 보내셨어요. 학교에서 돌아오면 아버지는 오빠와 내 손을 잡고 경부선 철길을 따라 산책하다가 복숭아 나무 아래 앉아서 어두워질 때까지 기차가 오가는 것을 보시는 거예요. 왜 그러느냐고 물으니 너희 엄마가 어쩌면 기차를 타고 올지도 모른다고 하시더라고요.”

어린 딸의 눈에도 아버지가 그때 아주 외로워 보였다. 아버지 장욱진이 떠난 지도 벌써 25년이 지났건만 바로 어제의 일처럼 모든 것을 기억하고 있다. 장 관장은 “아버지를 생각하면 언제나 애잔하다”면서 “아버지의 고독을 함께 나눌 수 없었기에 늘 죄송하다”고 말했다.

- 함혜리 서울신문 문화부 선임기자 lotuscomcom@naver.com

201704호 (2017.03.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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