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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버럴 아츠의 심연을 찾아서] 2000년 된 콜로세움이 한국 정치에 주는 교훈 

폐쇄형 콜로세움이 개방형 그리스 광장보다 낫다 

그리스 섬 사모스(Samos)=글·사진 유민호 월간중앙 객원기자, ‘퍼시픽21’ 디렉터
피의 이미지, 서커스정치의 이미지로 전락했지만 출발점은 경제·사회적 통합… 닫힌 공간이 주는 일체감이 중구난방 논란의 해결점을 찾아줄 수 있어

▎밤에 만나는 콜로세움. 로마 통합이라는 당초의 설립 목적이 확연히 느껴진다.
“인구 5000만, 기병대 국경수비대를 비롯한 총 병력 60만.” 학자들에 따라 다소 이견(異見)이 있지만, 1800년 전 2세기 당시 로마의 모습이다. 이른바 5현제(賢帝) 시대로 불리던, 1세기 말에서 2세기에 걸쳐 다섯 황제가 통치하던 로마의 황금기다. 당시 전 세계 인구는 2억5000만 명 정도다. 대략 5명 중 1명이 로마 대제국에 거주한 셈이다. 세계 최대 규모를 자랑하는 도시 로마의 거주민은 약 100만에 달한다. 노예가 절반 정도다. 대제국 내 로마 시민권자는 700만이다. 공직 선출권과 임용권, 노예를 기반으로 한 대규모 토지 소유는 시민권자의 특권이다. 전체 인구의 7명 중 1명이 로마의 진짜 주인에 해당되는 시민권자다. 이들 시민권자의 정치적 대표에 해당되는 원로원(Senator)의 수는 600명. 시민 1만 명 당 1명을 통한 대의정치다. 60만 군인의 경우 고위 지휘관을 빼면 시민권과 무관하다. 적어도 10년 이상 복무할 경우 비로소 시민이 될 수 있다.


▎5현제 팍스로마나를 연 황제 네르바.
대제국 로마의 상황을 언급한 것은 한국과 비교하기 위해서다. 인구와 군인 규모만 본다면 2017년 한국과 너무도 비슷하다. 국회의원 300명으로 로마 원로원보다는 절반 정도지만, 국력의 근간이 되는 총인구와 병력이란 관점에서 보면 ‘최전성기 로마 대제국=21세기 한국’에 해당된다. 물론 이스라엘에서 보듯, 인구와 병력은 주변 환경과의 관계에서 본 상대적인 개념이기는 하다. 숫자에 근거한 양(量)보다 개개인이 가진 질의 문제가 중요할 것이다. 그러나 아무리 뛰어난 질도 기본적으로 필요한 절대량을 전제로 한다. 아무리 이스라엘이 뛰어나다 해도 800만 인구로 전 세계를 장악하기는 어렵다. 아날로그 세계관이겠지만, 외형상 지금의 한국은 대제국 로마와 동일선상에 올라서 있다. 마음먹기에 따라서는 로마와 같은 대제국도 가능한 조건을 갖추고 있다.

‘최전성기 로마 대제국=21세기 한국’


▎콜로세움은 20m 지하에 수많은 시설을 갖추고 있다. 수동 승강기를 이용해 지하의 사자를 지상으로 끌어올렸다.
대제국 로마를 오늘의 한국과 비교할 때 아주 비슷한 공통점이 하나 더 있다. 고금(古今)의 역사를 통해 모든 나라에 적용될 수 있는, 국가의 영고성쇠(榮枯盛衰)에 관한 부분이다. 좋은 시대와 지도자를 만나 갑자기 번영하다가 한순간에 말라비틀어지는 고난을 겪은 뒤, 다시 실패를 경험삼아 재도약하다가 언젠가 내리막길로 내려가 사라지는 것이 영고성쇠의 역사다. 드라마나 소설로 치자면 기승전결(起承轉結) 과정에 해당된다. 패기만만한 국가설립 초기단계는 영고성쇠의 ‘영(榮)’에 해당된다. 뭔가 열심히 하려고 노력하고 서로 힘을 합치면서 서로 나누는 시기다. 로마와 한국의 초기 ‘영(榮)’의 시간은 공교롭게도 ‘60여 년’이란 공통점을 갖고 있다.

한국이 국제적 차원에서 자리를 잡은 것은 1945년 해방 이후다. 고려·조선시대 나아가 이전의 삼국시대까지 언급하면서 한반도의 중요성을 언급하지만, 세계 속의 로마처럼 한국이 국제사회에 뛰어든 것은 제2차 세계대전 종결 이후다. 1961년은 해방 후 지금까지 누린 성장구도의 출발점이다. 5·16 지지 여부를 떠나 모두가 힘을 모아 본격적인 경제개발이 시작된 해이기 때문이다. 박정희를 통한 한강의 기적은 ‘영(榮)’으로서의 성장세의 기반에 해당된다. 크고 작은 문제도 있었지만, 1961년 이후, 다시 말해 지난 66년간의 행적은 세계가 부러워하는 모범국가다. 경제만이 아니라, 민주주의도 스스로 확보했다. 평균수명 82세를 넘긴 장수대국 한국도 ‘영(榮)’의 상징이다. 행복하고 부자로 사는 것도 중요하지만, 기초는 얼마나 장수하느냐에 달렸다. 헬조선이라고 하지만 지난 66년간의 한국은 경제·제도적 나아가 육체적으로 대성공한 나라에 포함된다. 그 기간은 한국 현대사의 ‘영(榮)’에 해당된다.


▎카이사르는 대제국에서의 공화정이 가진 한계를 이해한 정치인으로 해석된다.
대제국 로마의 ‘영(榮)’으로서의 시간은 어떨까? 로마가 대제국으로 웅비하게 된 것은 공화정을 폐지하고 초대 황제로 나선 아우구스투스 때부터다. 로마 대제국의 평화로 불리는, 팍스로마나(Pax-Romana)시대의 출발점이기도 하다. 로마의 역사는 기원전 8세기 로물루스(Romulus) 형제에게서부터 시작된다. 늑대 젖을 먹고 자린 로물루스 형제가 왕정 로마의 모태로, 이후 기원전 509년 고대 그리스의 영향으로 공화정 체제로 업그레이드된다.

공화정은 시민이 뽑는 대표로서의 원로원을 통한 정치구도다. 최고책임자는 원로원이 직접 선출한다. 사실상 직접 민주주의 체제다. 그 같은 500년 로마의 전통을 무시한 최초의 인물이 바로 군인 출신 율리우스 카이사르(Julius Caesar)다. 원로원을 무시하고 무력을 기반으로 종신 독재자로 나선다. 로마의 공화정이 한계를 보이자 스스로 나라를 구하기 위해 나선 것이다.

그러나 공화정은 필요에 의해 처분되는 것이 아니다. 좋을 때도 있지만 나쁠 때도 있다. 공화정을 지키려는 브루투스는 원로원 의원들과 함께 카이사르를 암살한다. 카이사르의 양자 가이우스 옥타비아누스(Gaius Octavianus)는 그 같은 혼란 속에서 탄생된 새 시대의 주인공이다. 양아버지의 살해범 브루투스를 제거한다. 이후 한때 동료로, 이집트에서 동로마 지역을 지배하던 마르쿠스 안토니우스(Marcus Antonius)를 격파한 뒤 하나의 대제국으로 재통합한다.

아우구스투스(Augustus)는 옥타비아누스가 황제에 오르면서 원로원에게서 얻은 호칭이다. ‘존엄자(尊嚴者)’란 의미로 원래는 공화정 때 선출된 최고 책임자에게 주어지던 호칭이다. 종신황제제도와 후임임명권과 같은 제정(帝政)을 연 옥타비아누스지만, 마치 공화정의 대표인 것처럼 자신의 호칭을 위장 세탁한 것이다. 형식적인 과정이지만 제정은 원로원의 만장일치 하에 결정된 것이다. 원로원이 종신황제로 남아 줄 것을 원하기에 옥타비아누스가 ‘마지못해’ 황제로 등극했다는 것이다. 눈 가리고 아웅 하는 식이지만, 옥타비아누스에 대한 시민들의 절대적 지지가 있었기에 가능한 무혈쿠데타다. 이후 1800년 뒤 프랑스의 나폴레옹이 황제로 오를 때의 절차도 아우구스투스와 비슷한 식으로 이뤄진다.

장기집권이 낳은 안정과 번영의 부산물, 팍스로마나


▎아우구스투스는 제정 로마의 창설자인 동시에 공화정의 정신을 로마 정치에 구현한 대제국의 아버지로 평가된다.
로마 대제국의 실질적인 역사는 바로 기원전 27년 초대 황제에 오른 아우구스투스에서부터 시작됐다. 흥미롭게도 출발은 분명하지만 끝이 애매한 곳이 대제국 로마다. 어디를 기준으로 로마 멸망으로 봐야 할지는 아직도 논란 중이다. 동·서로마 분열, 비잔틴의 로마 대제국 계승을 염두에 둘 경우 멸망시기가 전혀 달라진다. 종전 대부분의 주장은 훈족의 침략에 이어 게르만 장군 오도아케르(Odoacer)가 등장한 시기를 로마 멸망기로 본다. 로마 최후의 황제 로물루스 아우구스툴루스(Romulus Augustulus)를 쫓아내고 오도아케르 스스로가 이탈리아 왕으로 추대된 것이 서기 476년 9월이다. 따라서 아우구스투스 이래 제정 로마 역사는 503년에 이른다.

제정 로마는 아우구스투스의 팍스로마나가 본격화되는 순간부터 삐걱거린다. 아우구스투스에 이어 제2대 황제인 티베리우스(Tiberius)까지는 초기의 국가적 이념을 충실히 유지, 실천해나간다. 놀랍게도, 아우구스투스의 집권 시기는 무려 41년에 달한다. 황제에 오른 것이 36세로, 이후 77세까지 장수하는 과정에서 41년이란 경이적인 치세를 기록한 것이다. 아우구스투스의 41년에 걸친 집권은 제정 로마 역사를 통틀어 가장 오랜 것이다. 집권기간 2위로, 5현제 중 한명인 안토니누스 피우스(Antoninus Pius)의 경우 아우구스투스의 절반가량인 23년에 불과하다.

팍스로마나는 초대 황제의 41년간 장기집권이 낳은 안정과 번영의 부산물이라 볼 수 있다. 아우구스투스는 재임 중 원로원은 물론 로마 시민들의 절대적 지지와 신임 하에 로마의 영광을 재현해낸다. 스스로 검소하면서 도덕적인 삶을 구현하는 과정에서 공화정 로마의 정신을 복원한 인물로 풀이된다. 현재 남아 있는 아우구스투스 조각상의 대부분은 10대나 20대다. 늙은 조각상은 극히 드물다. 순수하고 헌신적인 국가관을 표현하는 과정에서 청년 아우구스투스 조각상이 일반화된 것이다.

2대 황제 티베리우스는 아우구스투스의 양자다. 아우구스투스의 친아들 두 명은 전부 게르만 동부전선에서 전사한다. 모든 것이 그러하듯 태양이 너무 강하면 주변의 모든 것이 빛을 잃게 된다. 군인 출신 티베리우스에 대한 국민적 지지나 신임도는 아우구스투스와 너무도 달랐다. 개인적 카리스마가 없다. 본인도 아예 국정을 자신의 경비대장에게 맡기고 ‘속(俗)의 향연’에 몰두한다. 유명무실한 황제지만, 그래도 아우구스투스가가 닦은 튼튼한 기반 덕분에 팍스로마나 체제가 유지된다. 아우구스투스가 황제에 오른 기원전 27년부터, 티베리우스가 황제로 재임했던 서기 37년까지의 64년간이 바로 제정 로마의 ‘영(榮)’의 시기에 해당된다. 박정희에서부터 2017년에 이르는 약 66년간의 한국의 번영기와 맞물리는 시기다.

오르막이 있으면 내리막이 있다. 그렇다면 제정 로마는 어떤 식으로 몰락의 길로 들어섰을까? ‘영(榮)’이 끝나고 ‘고(枯)’의 시간이 나타난 것은 3대 황제 칼리큘라(Caligula)가 들어서면서부터다. 24세 때 황제가 된다. 그는 ‘작은 구두’라는 의미를 갖고 있다. 초기에 좋은 이미지로 등장하지만, 병을 앓고 난 뒤 공격성 정신병자 수준으로 돌변한다. 주변 모두를 자신의 암살자로 의심하면서 반역죄로 몰아간다. 친척, 원로원, 경비대원 가리지 않고 전부 처단한다. 공포정치를 17년간 지속하다가 41세 나이로 암살된다.

이후 클라디우스(Claudius)가 등장하지만 악정으로 치닫다가 역시 재혼한 부인에 의해 독살된다. 폭군의 대명사로 불리는 황제 네로(Nero)는 이후 로마가 맞이한 최악의 선택이다. 악정은 물론 기묘한 행위로 악명 높은 네로는 로마의 3분의 1을 불태운 방화 주범으로도 알려져 있다. 군의 지지를 상실한 네로는 군인에 의해 황제 자리를 상실한다. 네로는 원로원으로부터 공공의 적으로 규정된다. 체포당하기 직전 자신의 노예들로부터도 버림을 받은 상태에서 자살한다. 31세 때로 서기 68년 6월 9일이다. 네로 이후 로마는 한층 더 추락한다. 내전상태로 들어서면서 17개월간 3명의 황제가 난립한다. 2명은 살해되고 1명은 자살한다.

제국 말기 자연사한 황제는 10% 이하


▎콜로세움 반대편에서 바라본 로마의 유적. 포퓰리즘은 로마정치의 기본이다.
64년간의 ‘영(榮)’과 32년간의 ‘고(枯)’의 시간을 보낸 제정 로마는 이어 ‘성(盛)’의 시간으로 재도약한다. 서기 69년 12월 21일이 출발점이다. 야전장군 출신의 베스파시아누스(Vespasi nus) 황제가 주인공이다. 이스라엘을 공략해 명성을 세운 인물이다. 이른바 플라비안 왕조(Flavian dynasty)를 세운 황제로 내전과 암살로 치닫던 로마에 평화를 되찾아준 영웅이다. 플라비안 왕조는 1대 베스파시아누스와 2대, 3대 황제로 이어진 두 명의 직계 아들로만 이뤄져 있다. 따라서 2대 황제 티투스(Titus), 3대 황제 도미티안(Domitian)은 형제지간이다. 총 27년간으로, 베스파시아누스가 집권한 서기 69년부터 도미티안의 암살로 끝난 96년 9월까지의 기간이다. 베스파시아누스가 내전을 종식하고 황제에 오르면서 로마의 정리정돈에 나서지만, 절반 격인 15년 동안 도미티안의 폭정에 로마가 신음한다. 그러나 도미티안 이후 곧바로 82년간에 걸친 5현제 시대로 들어서면서 진정한 팍스로마나 시대가 펼쳐진다. 도미티안의 폭정에도 불구하고 베스파시아누스부터 마지막 5현제인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Marcus Aurelius)까지 111년간의 로마가 바로 ‘성(盛)’으로서의 대제국의 절정기에 해당된다.

‘쇠(衰)’의 로마는 로마 최고의 지성 황제로 알려진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의 아들 코모두스(Commodus) 황제부터 시작된다. 서기 180년부터 로마가 망하는 476년 9월까지다. 무려 296년에 걸친 장시간이다. 죽지 않고, 영고성쇠를 겪지 않는 것은 ‘결코’ 존재하지 않는다.

‘대마불사(大馬不死)’는 신화일 뿐이다. 죽음에 이르는 시기가 오랜 시간에 걸쳐 느리게 이뤄진다는 점만이 다를 뿐, 아무리 엄청난 존재라도 언젠가 사(死)의 길에 들어선다. 대제국 로마도 마찬가지다. 인류 초유의 대제국이기에 죽음에 이르는 시기도 길고 느리다. 제정 503년 역사 가운데 무려 60% 정도의 시간이 재생불능의 추락기에 해당된다. 아름답고 화려한 꽃과 향기는 잠시일 뿐, 썩은 냄새가 내내 주변을 어지럽힌다.

로마의 멸망 시점처럼 대제국 로마 황제의 수는 지금도 정확히 규정하기 어렵다. 멸망기에 대한 애매함과 더불어, 스스로 황제로 나선 인물, 원로원이 추대했지만 군의 반대로 황제에 오르지 못한 인물, 군만이 지지한 황제, 로마가 동서로 나눠지면서 두 명, 세 명 동시에 활동한 황제를 염두에 둘 경우, 정확히 어디까지 황제로 규정할지가 불분명해진다. ‘쇠(衰)’의 시기에 나타난 엄청난 수의 황제 대부분은 집권 1년을 넘기지 못한다. 암살되거나 자살하는 것이 일반적이다. 전쟁 포로로 잡혀 페르시아 왕의 노예로 지낸 황제도 있다. 황제가 자연사하고 장수하는 것이 제국 평화의 기본이다. 황제의 수를 정확히 얼마나 할지에 따라 달라지겠지만, 대략 마지막까지 자연사한 황제가 10% 이하라 보면 될 듯하다. 암살이나 자살은 보통이다. 설령 자연사라 해도, 실상은 황제자리를 노리는 주변 인물들에 의해 살해됐을 가능성이 한층 더 높다.

전 세계 최초로 오줌세를 도입한 황제


▎기원전 2세기 초에 기록된 로마 중심지 모습.
2017년 한국이 당면한 위기는 ‘영(榮)’이 가고 ‘고(枯)’, 나아가 곧바로 ‘쇠(衰)’로 흘러가는 듯한 형세다. 영고성쇠가 아니라, ‘영(榮)’을 떠나 ‘고(枯)’와 ‘쇠(衰)’가 한순간에 밀려오는 듯하다. 어디 하나 제대로 된 면이 안 보인다. 필자 스스로가 그러하듯 비난에는 열을 올리지만 대안을 찾는 사람은 극히 드물다. 찬반으로 나눠진 100만 광장정치 연속드라마가 매주 주말마다 치러지는 희한한 상황이 진행됐다. 핵무기, 미사일, VX 살인가스와 같은 무서운 존재도 이미 한국인의 일상생활에 정착된 듯하다. 서울 주재 자국 대사를 불러들인 일본, 남의 나라 안보문제에 개입하면서 경제에 제동을 거는 중국, 한국과 아무런 상의도 없이 대북제재에 나서는 미국….

서울만이 아니라 한반도 주변 강대국 사이에서 벌어지는 가공할 현실을 목격하면서 모두가 불안한 눈으로 미래를 기다리고 있는 듯하다. 혁명과 피바다의 대립도 초읽기라고 한다. 로마의 ‘영(榮)’의 시간이 64년에 그쳤듯이, 해방 후 이룩한 한국의 ‘영(榮)’의 운세도 2017년 66년 만에 끝나는 것일까? 칼리큘라 이후 겪는 32년간의 ‘고(枯)’의 로마처럼 지금껏 경험하지 못한 길고 긴 고통의 시간 속으로 한국이 이미 빨려 들어가 있는 것일까? 그 같은 척박한 상황을 원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비난만이 아니라 어떤 대안이 설 수 있을까?

로마사를 통틀어 필자가 주목하는 부분은 베스파시아누스 황제다. ‘고(枯)’의 로마를 다시 ‘성(盛)’으로 끌어올린 황제다. 베스파시아누스에 대한 역사가들의 전체적인 평가는 긍정적이면서도 부정적이다. 대략 장점 4, 단점 6 정도일 듯하다. 내란을 종식하고 황제로서의 권위를 회복해 재정과 군정을 튼튼히 한 인물이기는 하지만, 세금을 많이 끌어들여 시민들의 생활을 어렵게 만들었다는 점에서 박수를 받지 못한다. 폭군 도미티안에 관한 부분도 단점을 부각시킨다.

사실 외형적으로 볼 때 베스파시아누스만큼 비호감적인 황제도 드물듯하다. 베스파시아누스 조각상은 유럽 박물관의 어디를 가도 쉽게 볼 수 있다. 그만큼 많이 제작됐다는 얘기다. 어느 정도 로마 역사에 관심이 있다면 첫눈에 베스파시아누스를 알아볼 수 있을 듯하다. 일단 뚱뚱하고 지성미와 거리가 먼 이미지다. 큰 머리에다 고집불통 독재자형이다. 아우구스투스와 같은 카리스마는커녕 자상한 면도 안 보인다. 로마 황제 조각상 가운데 추남·비만·고집쟁이 형상의 대표 격일 듯하다. 베스파시아누스 혈통은 황제 원로원 고급군인과 무관하다. 중간계층의 군인가족 출신으로 전쟁을 잘해서 최전선에서 싸우던 중 내란상태에서 로마 원로원의 찬성으로 황제가 됐다. 해결사인 셈이다. 군인들 사이에서는 권위가 있겠지만 대도시 로마의 지성세계와는 거리가 있다. 따라서 기본적으로 부정적 이미지와 함께 로마 정치에 데뷔한다. 그 같은 껄끄러운 이미지는 베스파시아누스 캐릭터를 규정짓는 두 가지 사례를 통해 확인해 볼 수 있다.

먼저 오줌세다. 베스파시아누스는 로마에서, 아니 전 세계 초유로 오줌세를 도입한 황제다. 오줌을 눈 데 대한 세금이 아니라, 오줌을 유료로 팔아서 세금을 끌어들인 정책이다. 로마시내에 설치된 공중화장실의 오줌을 유료로 팔아 세금을 확보한 황제가 바로 베스파시아누스다. 당시 오줌은 카펫이나 옷감 염색과 관련해 필요한 화학재료이기도 했다. 몰래 거래할 경우 극형에 처하는 식으로 오줌을 귀하게 만들어 염색업자에게 판 것이다.

부동산 개발과 고용 창출의 수단, 콜로세움


▎비만형 얼굴에다 고집불통의 캐릭터로 표현되는 베스파시아누스 황제 조각상.
오줌세는 베스파시아누스 아들로 나중에 황제에 오르는 티투스조차 반대했다고 한다. 아들의 불만에 대해 베스파시아누스는 동전 하나를 꺼내 티투스의 코 밑에 밀어 넣었다고 한다. “돈에서 오줌 냄새가 나냐?” 베스파시아누스가 남긴 유명한 말이다. 오줌세든 죽음에 따른 세금이든, 국세(國稅)를 안정적으로 유지하는 것이 국가 발전의 기본이란 발상이다. 베스파시아누스는 내란 당시 엉망이 된 세금체제와 구조를 견실하게 바꾼 국가재정 개혁자다. 60만 직업군인이 월급을 제대로 받을 수 있도록 한 인물이다.

둘째는 콜로세움이다. 베스파시아누스의 상징물이자, 그의 세계관을 드러낸 증거가 콜로세움이다. 콜로세움 건축을 기획한 것은 집권 1년 뒤인 서기 70년이다. 착공에 들어간 지 10년 만인 서기 80년 완공된다. 베스파시아누스는 완공하기 1년 전에 세상을 뜬다. 오줌세에 반대한 아들 티투스가 수혜자다. 흔히들 콜로세움은 글레디에이터, 기독교도 처단, 동물과 인간의 대결과 같은 피의 이미지로 그려진다. 콜로세움을 통한 로마 스타일 서커스정치의 어두운 부분이 먼저 떠오를 듯하다. 황제의 독재와 악정을 피하기 위한 최면제나 필요악으로서의 공간 이미지다. 틀리지 않지만, 맞지도 않다. 마키아벨리 스타일의 정치적 의미 이전에, 경제·사회적 통합 의미로서 출발한 것이 콜로세움의 원형이기 때문이다.

베스파시아누스는 로마의 번영을 위해 황제 즉위와 더불어 부동산 개발을 독려한다. 건물이 없다면 빈 땅에 시민 누구라도 건물을 지을 수 있도록 허가한다. 부동산 개발은 고용을 창출하고 세금도 많이 거둬들이자는 발상에서 시작된 것이다. 콜로세움은 당시 초대형 호수 부지에 건설된 국가적 프로젝트다. 원래 호수의 일부는 폭군 네로의 소유지다. 이미 물이 말라있던 상태이기에 기반이 튼튼한 땅이기도 했다. 최고 7만 명까지 수용 가능한 엄청난 건축물이 초고속으로 진행된다.

콜로세움의 원래 명칭은 ‘플라비안가(家)의 다목적 극장(Amphitheatrum Flavium)’이다. 이미 일반화된 글레디에이터 경기 목적도 있었지만, 원래는 스포츠·음악·연극과 같은 문화공간으로서 시작됐다. 기독교도들의 로마에 대한 반발이 심해지면서 3세기 들어 기독교도 살육장으로 변해가지만, 콜로세움이 만들어진 1세기말 당시는 순수한 문화공간으로 출발했다.

기부금을 받기는 했지만 기본적으로 입장료는 거의 무료다. 정치적으로 해석할 때 7만 명 수용의 무료 문화공간은 대통합의 광장에 해당된다. 로마는 다민족국가다. 다목적 문화공간을 통해 로마라는 공동체의식을 재확인하고, 콜로세움 정도의 엄청난 건축물을 가진 로마만이 진정한 세계의 정복자가 될 수 있다는 자신감도 가졌을 법하다.

원래 극장은 고대 그리스문화의 산물이다. 보통 언덕을 깎아 반달형 무대로 만드는 식이다. 주로 연극이 이뤄진 곳으로 와인과 부활의 신인 디오니소스를 찬미하는 신전이란 측면이 강하다. 로마의 극장은 다르다. 반달형이 아니라. 아예 대규모 관람객을 끌어 모으는 원형으로 확장된다. 더불어 언덕이 아니라 평지에다 극장을 건설한다. 건축기술이 한층 더 발달되고, 이른바 로마 콘크리트가 상용화되면서 평지에서의 고층 원형극장이 가능해진 것이다. 고대 그리스 극장과 달리 콜로세움의 외벽은 대리석이 아니다. 전부 콘크리트로 엮어 올라간 건축물로 대리석은 내부 장식물로 사용될 뿐이다. 평지에 크게 세워진 극장은 신에 대한 제사보다, 인간을 위한 오락공간으로서의 기능에 집중한다. 고대 그리스와 제정 로마 극장의 가장 큰 차이는 바로 거기에 있다. 성(聖)으로서의 그리스, 속(俗)으로서의 로마인 셈이다.

대제국은 안에서부터 무너진다


▎광장정치의 대명사 무솔리니는 허물어진 콜로세움을 통해 로마의 영광을 역설했다.
콜로세움은 오락만이 아니라, 문화사업과 관련된 각종 비즈니스가 창출되는 기반이기도 하다. 기원전 2세기 로마인 모두가 즐길 만한 문화는 극히 제한돼 있다. 콜로세움이 중심이 될 수밖에 없다. 당시 콜로세움은 디즈니랜드와 같은 초대형 테마파크였다고 보면 된다. 콜로세움 바로 앞에는 네로가 만든 높이 30m 높이의 정도의 청동 입상도 들어서 있다. 원래 네로 그 자신의 형상을 한 청동입상이지만 네로가 죽은 뒤 태양신 청동상으로 바뀐다. 30m 높이 청동상은 건물 5층 높이에 속한다. 초대형 테마파크의 분위기에 잘 어울리는 환경이다.

초대형 건물 콜로세움 덕분에 지방에서도 다목적극장 건설 붐이 일반화된다. 사람이 모이는 곳에는 비즈니스가 이뤄질 수 있다. 베스파시아누스에 대한 반감 때문에 콜로세움에 대한 부정적 견해가 지배적이지만 원래 목적과 가치를 본다면 엄청난 의미를 가진 곳이 콜로세움이다. 인류 그 누구도 생각하지 못했던 전대미문(前代未聞)의 테마파크가 1세기 말 경 로마 한복판에 들어선 것이다.

2000년 전 로마를 21세기 한국과 비교하는 것 자체가 무리일 것이다. 그러나 국가의 영고성쇠라는 기준에서 보면 배우고 교훈으로 삼아야 할 부분이 많을 듯하다. 대제국 로마는 ‘흥(興)’으로서보다 ‘망(亡)’으로서의 반면교사라는 측면이 훨씬 더 강하다. 수많은 황제의 반복적인 폭정·암살·자살을 통해 사라져간다. 빵과 글레디에이터를 통한 포퓰리즘은 기본이다. 왜 그런 상황이 연출됐는가를 연구하면서 미래를 준비하는 것이 로마사 공부의 진정한 의미다. 로마의 성공담이 아니라, 실패담이 교훈의 핵심이다. 국가체제를 정립한 뒤 국력을 모으던 중 한순간에 밀어닥친 로마의 실패기가 바로 2017년 한국이 주목해야 할 부분이 아닐까?

되도록이면 실패 기간을 줄이고 2차 부흥기로 빨리 들어서 자는 것이 모든 한국인의 소망일 것이다. 필자는 베스파시아누스의 통치 행적이 그 같은 기대의 대안이 될 수 있지 않을까 생각한다. 두 가지다. 첫째 건전한 재정 확보를 통한 일자리 창출이다. 건전한 재정이 확보된다면 당장의 정치적 시련은 아무것도 아니다. 5현제의 90여 년 가까운 팍스로마나는 바로 베스파시아누스가 닦은 건전 재정의 결과라고 볼 수 있다. 로마 후반기, 돈이 없고 가치가 떨어지면서 군인들의 월급도 못 주면서 대제국은 안에서부터 무너진다. 변방의 적들이 강한 게 아니라, 내부의 힘이 추락한 것이다. 요구에 응해 무조건 밖으로 돈을 푸는 포퓰리즘이 아니라, 튼튼한 가계부를 기반으로 장기적 차원의 안정적인 일자리를 만드는 식의 자세가 필요하다. 사실, 세금은 일자리가 많아질수록 더 많이 걷힌다. 모든 로마 황제가 그랬듯이 베스파시아누스도 포퓰리즘에 근거한 황제다. 그러나 한국에서 볼 수 있는 일회성, 소모성의 즉흥적인 포퓰리즘은 결코 아니다.

둘째, 국민통합 장으로서의 공간 확보다. 광장정치는 화려하고 쿨하기는 하다. 직접민주주의라는 대의명분에도 어울린다. 그러나 무질서하고 군중심리에 의해 폭력적으로 나아갈 가능성이 상존한다. 베스파시아누스가 엄청난 돈을 들여 콜로세움을 만든 이유는 ‘장외 무질서’의 위험성을 고려한 것이라 볼 수도 있다.

고대 그리스 광장은 달변이거나 선동형 정치가를 위한 최적의 무대였다. 개방식 반달형 극장이나 시민공간(Agora)은 민주주의를 낳은 요람이다. 그러나 기원전 4세기 말부터 중우정치의 본거지로 바뀐다. 소크라테스가 혹세무민(惑世誣民)을 이유로 독살된 것도 광장정치를 배경으로 한 중우정치의 결과라 볼 수 있다. 아스팔트 정치에서 보듯 아무나 나가서 명분을 앞세우며 큰소리로 떠들면 된다.

광화문 주변에 초대형 콜로세움을 건설한다면


▎콜로세움 내부에 들어선 기념품 판매점.
그 같은 배경 하에 필자는 한국의 콜로세움 같은 초대형 공간 건설을 제안해본다. 성(聖)으로서의 그리스, 속(俗)으로서의 로마의 극장을 화(和)로서 한국에 도입하는 식이다. 장소는 현재의 광화문 주변이 좋을 듯하다. 미관상 좋지 않겠지만, 뿔뿔이 갈라진 나라가 되는 것보다는 낫다. 국민통합을 이룰 수 있는 초대형 공간을 건설해 역사물에 기초한 문화의식을 거의 매일 행하는 것은 어떨까?

주말 한강변의 오락성 이벤트와 근본적으로 다르다. 대한민국의 심장에서 이뤄지는 우국(憂國)의 초대형 의식이다. 공간 내에서의 이뤄질 구체적인 의식의 내용은 좌우, 촛불 태극기, 금수저 흙수저 모두 함께하면 된다. 중구난방에다 주도권 싸움으로 난리가 나겠지만 언젠가 합의점을 찾을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그 모든 것을 초대형 공간 안에서 해결하면 된다.

콜로세움을 지키던 로마 병사는 1000명이었다. 이들은 치안만이 아니라, 비가 올 때 천정을 초대형 커튼으로 막는 일도 행했다. 한국의 경우 경찰 5000명 정도가 들어가 비슷한 일을 맡으면 된다. 국민 대통합 공간이 아닌 대분란 공간이 된다 해도 아스팔트 광장이 아닌, 실내에서 이뤄질 경우 해결 점이 생길 수 있다. 닫힌 공간이 주는 묘한 일체감이 있기 때문이다.

현재의 한국 아스팔트 광장정치는 포퓰리스트가 지배하는 고대 그리스 광장에 비견된다. 태극기와 촛불로 나눠진 광장정치를 통해 독배를 마셔야 할 소크라테스가 거의 매일 탄생된다. 탁 트인 광장의 생리에 맞게 충혈된 단어와 격한 감정이 박수의 대상이다. 민주주의를 낳은 고대 그리스 광장의 순기능보다 파시즘이 지배하는 광장의 역기능이 주류인 듯하다. 정치적 의미의 광장은 엄청난 대중적 에너지로 뒤덮인 중독성이 강한 아날로그 공간이다. 나와 똑같은 생각의 동지가 100만 명이나 몰려 있다는 착각에 빠진다. 휘발유처럼 한순간에 폭발할 수 있다. 문명·문화적으로 볼 때, 폐쇄형 원형 콜로세움이 고대 그리스 광장의 우위에 서 있다. 100% 만족은 못하겠지만 100% 한순간에 극단으로 치닫게 될 위험성도 없기 때문이다. 안정과 평화는 상위 문명과 문화의 기본 요소다.

5000만 인구에 병력 60만 명의 로마는 한국을 위한 최적의 반면교사인 동시에 팍스로마나의 비결을 가르쳐주는 최상의 모델이다. 4차산업혁명에 관한 실용 차원의 공부만이 전부는 아니다. 수많은 황제의 피로 점철된 로마의 흥망성쇠를 음미·해석·응용하는 것도 2017년의 한국인, 나아가 차기 대통령의 몫이 아닐까 싶다.

유민호 - 미국 워싱턴에 있는 에너지·IT 컨설팅 회사 ‘퍼시픽21’의 디렉터. ‘딕 모리스 선거컨설턴트’ 아시아 담당. 연세대 정치외교학과를 졸업하고 서울방송(SBS) 기자로 일하다가 1994년 일본 마쓰시타정경숙 15기로 입숙해 5년 과정을 마치는 동안 125개 나라를 순회했다. 조지워싱턴 대학 E-Politics 프로젝트 디렉터, 일본경제산업성 연구소(RIETI) 연구원을 지냈다. <백악관에서 일하는 사람들> <중국 소프트파워> <미슐랭을 탐하다> 등 다수의 저서가 있다.

201704호 (2017.03.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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