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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영수 교수의 ‘조선을 만든 사람들’(15)] 우왕(2) 비극적 정치리더십의 전형 

운명에 좌절하고 광기에 지배당하다 

김영수 영남대 정외과 교수
유모 장씨의 죽음 이후 모든 권력을 권신들에게 넘긴 우왕은 어린 시절의 총명함을 잃고 쾌락에 탐닉하며 삶을 이어갔다. 그것이 그의 남은 생을 보존하는 유일한 길이었다. 하지만 요동정벌에 반발한 이성계 등 회군파와의 갈등은 그를 마지막 위기에 빠뜨리는데….

▎위화도 회군 이후 우왕은 회군파에 맞서 최영을 옹호했고, 회군파를 기습공격하기도 했지만 결국 실패했다. KBS 드라마 <정도전> 중 배우 유동근(이성계 역)과 서인석(최영 역)이 일전을 겨루는 장면. / 사진·중앙포토
1379년(우왕 5) 9월, 마지막 권력투쟁에서 패한 우왕은 끝 모를 좌절의 심연에 빠졌다. 간신히 목숨을 건진 우왕에게 남은 것은 완벽한 허수아비 역할뿐이었다. 권신들에게 일말의 불안감도 주면 안 됐다. 그것이 생존을 위한 유일한 길이었다. 그래서 그는 단순한 허수아비를 넘어 광인이 되기로 했다.

1379년 12월, 우왕은 왕비 근비(謹妃)의 양친 이림(李琳) 부부를 궁궐로 초청해 잔치를 베풀었다. 그들이 돌아간 뒤 우왕은 환관들과 더불어 풍악을 울리며 극히 즐겁게 놀았다. 그러다 돌연 정색하고 말했다. “옛사람이 말하기를, 사람은 오직 고인(古人)을 구하고, 옷은 반드시 새로운 것을 구한다고 하였다. 이제 나의 좌우에 신하들이 있어서 나의 득실을 말하고 번갈아 깨우치니, 비록 무고하는 말이 있더라도 내가 믿지 않을 것이다. 지난날 장씨가 나를 욕하고 때려서, 요물의 손에 곤욕을 당한 것이 유사 이래 나 같은 적이 없었다. 다행히 사헌부의 규탄 덕분에 요물을 멀리 유배하여 궁중이 조금 편안하고, 밖으로 원로와 훌륭한 학자들이 있어서 정치를 도모하기 때문에, 안으로 너희들과 함께 술에 취해 즐긴다 해도 무엇이 방해되겠는가?”(<고려사>) 취중한담처럼 보이지만, 이는 일종의 정치적 선언이었다. 그 뜻은 첫째, 이제부터 고인, 즉 권문세족 같은 구세력 중심으로 정치를 운영할 것이다. 둘째, 이들에 대한 어떤 중상모략도 믿지 않겠다. 셋째, 권신들 주장대로 유모 장씨는 ‘요물’이다. ‘어머니’로 생각한 자신의 생각이 틀렸다. 장씨 처벌로 궁중 내 문제는 해결됐다. 넷째, 앞으로 정치는 모두 권신들에게 맡기고, 자신은 개인적 즐거움만 추구하겠다는 것이었다.


▎신윤복의 <무무도(巫舞圖)> (무당굿). 고려의 무격희도 이처럼 춤, 노래, 피리, 장고 등 종합예술 형태를 가지고 있었을 것이다. 이런 무격희 패가 우왕의 사냥 행렬을 뒤따랐다. / 사진제공·간송미술관 <혜원 전신첩>
이는 일종의 타협안이다. 우왕은 생존 보장을 대가로 권력 양도를 제안한 것이다. 장씨 사건에서 드러났듯이, 우왕은 자신의 발언이 이인임에게 보고된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취중발언을 가장해 교서(敎書) 같은 공식발언보다 덜 치욕스러운 방식을 택한 것이다. 권신들도 공식적인 항복을 강요하지 않았다. 우왕은 1388년(우왕 14) 1월, 무진정변을 일으킬 때까지 이 취중약속을 지켰다.

왕이 정치를 포기하고 환락의 늪에 빠지는 것은 권신들이 바라던 바였다. 그러나 이인임은 우왕 6년, 왕이 사냥 나가는 것을 만류했다. 물론 충성을 가장한 제스처였다. 그러자 우왕은 “내가 본래 매와 개를 좋아하지 않았는데, 실은 여러 재상이 인도한 것”이라고 반박했다. 1380년(우왕 6)에 들어서 우왕은 완전히 다른 사람처럼 변했다. 나이에 걸맞지 않게 총명하고 사려 깊었던 그는 난폭하고 치졸하며, 음란한 인간이 되었다. 아예 미쳐버렸다. 1384년(우왕 10) 8월 기사를 보면, 그는 폭우가 쏟아지는데도 사냥을 하고 저녁에 돌아왔다. 그러나 다시 동교천에 나갔다가 심야에 돌아왔다. 그걸로 그치지 않고, 다시 교외에 나가 새벽녘에 돌아왔다. 약간의 정적과 정신적 휴식조차도 그를 불안에 몰아넣었던 듯하다.

환락의 늪에 빠진 왕


▎1386년 우왕은 옹진반도 부근의 해주에 25일간 사냥을 나갔다. 이를 위해 개경에서 해주까지 물자가 공급됐고, 괴로움을 이기지 못한 관리와 백성들이 모두 흩어져 달아났다고 한다. 개성에서 해주까지의 거리는 100㎞에 달한다. 대동여지도로 본 개성과 해주. / 사진제공·서울대 규장각
1381년(우왕 7) 11월 기사를 보면 “밤에 마을에서 놀다가 길에서 순찰관을 만나자 쫓아가 (활을) 쏘았다.” 또한 “날마다 창기(娼妓), 환관과 함께 한도 없이 놀고, 연일 잠자지 않고 낮잠 자기를 좋아하여 날이 저물어서야 일어났다.”(<고려사>) 그는 끊임없이 감각적 자극을 쫓아 달리고, 쏘고, 마시고, 사람을 죽였다. 섹스에 탐닉하여 길가에서 미녀를 만나면 바로 간음하고, 젊은 처자가 있다는 말을 들으면 갑자기 집에 돌입해 빼앗았다. 냇가에서 난교(亂交)하기도 했다. 매일 사냥을 다니며 “환관과 어린 아이들에게 몽고 노래와 피리를 불게 하고, 거문고를 타고 북을 치면서 따르게 하였다.” 때로는 장기간 지방에 나갔다. 1386년(우왕 12) 해주에서 25일간 사냥하는 동안 최영 장군이 수종했다. “서울에서 해주까지 공급 물자를 운송하여 백리에 걸쳐 연락이 끊이지 않았다. 관청의 아전과 환관이 사랑을 믿고 횡포하여 안렴사와 수령을 무시하고 욕보이자, 서해의 관리와 백성이 모두 괴로움을 견디지 못하여 흩어져 달아났다. 최영이 말 앞에서 간하기를, ‘신의 부하군사 수천여 명 중 사람과 말이 죽은 자가 많고, 더구나 공급 물자도 판출하지 못하는데, 갑자기 비습하고 좁은 고을에 행차하시면 백성의 폐해를 어찌 다 말할 수 있겠습니까’ 하므로, 우가 이에 그쳤다.”

불안과 좌절감이 그의 내면을 사로잡았던 듯하다. 어머니 같은 유모 장씨를 구하지 못한데다 장씨를 공식 비난해야 하는 처지에 빠짐으로써, 우왕의 내면세계는 심각한 상처를 입었을 것이다. 장씨를 구하기 위한 노력을 볼 때, 장씨는 우왕의 유일한 육친이었다. 그 밖의 사람들은 모두 정치적 관계에 의해 맺어진 2차적 존재였다. 그들은 왕에게 충고하고, 위협하고, 아첨하고, 그리고 복종했으나 왕을 상처 입기 쉬운 한 인간으로 이해하는 자는 없었다. 노국공주가 공민왕에게 영원히 잊지 못할 존재였던 것처럼, 장씨는 우왕이 이 세계 속에서 발견한 영혼의 유일한 안식처였다. 그것이 사라지자 영혼의 평화도 사라졌고, 그것을 부인해야 했던 것은 곧 자신을 부정하는 것이었다. 따라서 그가 미친 것은 부정된 자신의 자아와 직면하지 않기 위한 몸부림이자 안식처를 잃은 영혼의 방황이었다.


▎유모 장씨의 축출로 우왕은 정신적으로 큰 상처를 입었다. 유모 장씨는 우왕에게 공민왕의 노국공주와 같은 존재였다고 할 수 있다. 공민왕과 노국대장공주상. / 사진제공·경기도박물관
노국공주 사후의 공민왕처럼 우왕 역시 난폭해졌다. 거리를 쏘다니며 개와 닭을 쏘아 죽였고, 저자에서 말을 달리며 사람들을 몽둥이로 후려쳤다. 사람을 죽이기도 했다. 1385년(우왕 11), 밤에 환궁하던 중 전직 낭장(郎將) 전성길을 격살했다. 또 한 번은 노중에 사람이 말을 달려 지나가자, “옷을 벗겨 결박하여 말갈기에 매고 길을 따라 달리니 피가 흘러 몸을 덮었다.”

그러나 우왕 역시 이런 삶의 본질이 어떤 것인지 잘 알고 있었다. 1384년(우왕 10) 8월, 사냥 뒤 밤에 돌아오며 생황과 노래, 북, 춤으로 무격희(巫覡戱)를 했는데, 그는 “사람이 세상에 산다는 것이 초로와 같다”고 말하며 눈물을 줄줄 흘렸다. 그 역시 이런 삶의 공허함과 어리석음을 절감하고 있었던 것이다.

우왕은 또한 왕이 지켜야 할 최소한의 규범과 제약을 모두 파괴했다. 거리에서 참새를 잡아 담 밑에서 구워먹었으며, 대장간 도구를 빼앗아 궁중에 가져다 놓아 그 주인이 최영에게 호소하기도 했다. 이런 모든 행위는 왕의 존엄성을 스스로 파괴하는 행위였다. 그러나 그것은 철없는 짓이라기보다 일종의 퍼포먼스로 보인다. 그가 앉아있는 왕위는 분칠한 가짜에 불과했다. 그는 외형상 왕이었지만 사실은 배우였다. 왕이 됨으로써 그는 존엄해진 게 아니라 가짜가 된 것이다. 그 대가로 목숨이 보장되고 쾌락을 제공받았다. 그는 그런 왕위를 환멸 했던 것이다. 그러므로 이런 일탈은 왕위에 대한 조롱이자 자신의 현실을 민낯으로 드러내는 절규였다. 또한 왕의 권위를 빌어 군림했던 모든 권력자에 대한 야유이자 위선을 폭로하는 것처럼 보인다. 그들에게 왕이란 권력과 부를 정당화하는 체제의 상징이자 위장 수단이었을 뿐이다. 그러므로 왕의 일탈에 대한 그들의 수선스런 걱정은 일종의 위선이었다.

왕의 폭정에 침묵한 권신들


▎물푸레나무는 어린 가지의 껍질을 벗겨 물에 담그면 물색이 푸르게 변해서 지어진 이름이다. 우왕대 권신들의 노비들은 이 나무로 방망이를 만들어 백성들을 때리고 강제로 땅을 빼앗았다.
한편 백성들은 생사의 기로에서 헤매고 있었다. 우왕 7년은 기근이 극심하여 아사자가 즐비했다. 정부도 재정이 고갈되어 관리의 녹봉도 제때 지급하지 못했다. 그러나 수창궁 재건 공사가 시작되었고, 왕의 환락도 그치지 않았다.

왕을 바로잡으려는 진지한 노력도 존재했다. 간관과 사헌부 관리들은 서연을 재개하고 보평청에 나가 친히 정무를 보라는 상소를 거듭 올렸다. 그러나 폭정의 진정한 원인인 권신들에 대해서는 침묵했다. 그러므로 이 상소들은 형식적이고 마지못한 것이었다. 그런데 우왕은 때때로 충고를 받아들였다. 1381년 6월, 왕은 보평청에 나가 정무를 본 다음, 자신을 변명하면서 권신들을 비판했다. “이제 내가 아직 천자의 책봉을 받지 못하고, 정치를 원로에게 위임하여 그 실행하는 바를 듣고 있다. 그러나 가만히 그 정치를 살펴보면, 잡연하여 통일됨이 없어서 내가 위임한 뜻을 심히 저버리고 있다. 이제부터 매월 초2일, 16일에 각 관청의 장관이 친히 맡은 직무를 아뢰면, 내가 마땅히 그 잘잘못을 시험할 것이다.”(<고려사>)


▎19세기 초 제작된 광여도의 부평 지도. 우왕대에 부평부사 주언방이 징집영장을 가지고 군정을 선발하러 갔다가 염흥방 등 권신의 가노에게 구타당했다. 이를 들은 우왕은 신귀생을 보내 가노들을 즉결 처형했다. / 사진제공·김영수
이는 권신들을 긴장시킬 만한 발언이었다. 그러나 그의 약속은 지켜지지 않았다. 지킬 수도 없는 약속이었다. 그런데 이 말만 놓고 보면, 우왕은 미치거나 유치한 인물이 아니었다. 그는 정치 현실을 주시하고 있었다. 권신들은 종들을 시켜 남의 토지를 강제로 빼앗았는데, 우왕은 자주 이를 풍자했다. “우가 말을 화원에서 길들일 때 좌우에 일러 말하기를 ‘수정목(水精木, 물푸레나무) 공문을 가져와라. 내가 장차 이 말을 제어하리라’ 했다. 또 임치를 희롱하여 이르기를 ‘네 아버지가 수정목 공문 사용을 좋아한다’고 했다. 이때 임견미, 이인임, 염흥방이 악한 종을 풀어 양전을 둔 자는 모두 수정목으로 매를 쳐서 빼앗았다. 주인이 비록 관청의 문권이 있더라도 감히 항변하지 못하므로, 그때 사람들이 이를 조롱하여 수정목 공문이라 하였다. 우가 이를 듣고 미워하였기 때문에 언제나 이를 언급하였다.”(<임견미전>)

염흥방과 판밀직 최원(이림의 사위)의 가노는 군정(軍丁)을 점검하러 나온 아전을 죽도록 때리기도 했다. 이에 부평부사 주언방이 직접 사도도지휘사(四道都指揮使)의 징집영장인 발군첩(發軍牒)을 가지고 갔는데도, 그 또한 구타당했다. 이를 들은 우왕은 수도의 치안을 담당한 순군부의 순군제공(巡軍提控) 신귀생을 보내 가노들을 처형했다.(<염흥방전>) 그러나 우왕은 권신들의 이익을 결정적으로 손상시키는 행위는 하지 않았다. 오히려 그들과의 관계를 다지기 위해 부단히 노력했다. 우왕은 이인임과 염흥방, 임견미의 집을 자주 방문했다. 또한 외척인 의비(毅妃)의 부친 노영수, 근비의 부친 이림의 집을 방문했다. 정몽주의 집에도 한 번 방문했다. 최영의 집은 한 번도 가지 않았고, 1387년(우왕 13) 10월 무진정변을 모의하기 위해 방문한 것이 유일했다.

특히 이인임에 대한 우왕의 태도를 보면 군신 관계가 바뀐 것이나 다름없었다. 이인임은 왕을 허수아비로 만든 당사자면서도, 왕을 살갑게 대했다. 이인임이 노비 봉가이(鳳加伊)를 우왕에게 바쳤다. 우왕은 1385년 세모를 이인임 집에서 보내고 그곳에서 새해를 맞았다. 이인임의 처 박씨가 술을 올리며 만수무강을 축원하자, 왕은 “내가 한편으로는 손자가 되고, 한편으로는 사위(봉가이 남편)가 되는데, 대작하니 실례가 되지 않겠소”라고 말했다. 같은 해 이인임의 딸이 죽자 통곡하는 박씨에게 왕은 “손수 큰 잔에 술을 부어 앞에 꿇어앉아 말하기를, ‘대모(大母)가 곡을 그친 뒤에 내가 장차 이 잔을 기울이겠소’ 하고, 드디어 흰 천을 찢어 스스로 띄우고 환관에게도 모두 따르게 하였다.” 우왕이 “이인임을 아버지로 삼고 그의 처 박씨를 어머니로 삼으니, 이인임은 우를 데릴사위와 같이 대우하였다”고 한다.

왕명 사칭한 권신들과의 갈등


▎고려왕궁 터 만월대 유허. 919년 태조 왕건에 의해 창건됐고, 1362년(공민왕 11) 제2차 홍건적의 난 때 소실된 뒤 지금까지 복원되지 못했다. / 사진제공·김영수
그러나 이들의 밀월 관계는 1387년(우왕 13년) 12월, 우왕이 탈점된 토지를 조사하여 보고하라는 명령을 도당에 내렸을 때 끝났다. 권신들은 왕의 명령에 코웃음쳤다. 그러자 1388년 1월, 우왕은 최영·이성계와 연합하여 이들을 모조리 죽였다. 1388년은 진정으로 혁명적인 해였다. 이인임 일파가 제거되고 최영, 이성계가 집권했다. 요동정벌이 추진되고, 정벌군이 회군하여 우왕을 폐위시키고 최영을 처형했다. 이어 고려가 일찍이 경험한 적 없는 엄청난 개혁의 소용돌이가 몰아쳤다. 고려사의 가장 중요한 순간 중 하나였다. 이 한 해 동안 짧게는 고려가 40여 년간 직면한 문제, 길게는 고려 중기 이후 혹은 고려왕조 내내 해결하지 못한 문제들이 뒤섞여 화산처럼 분출했다.

1388년 새해의 시작과 함께 천지를 뒤흔든 정변이 발생했다. 14년간 권력을 휘두른 이인임이 유배되고 임견미, 염흥방은 처형되었다. 우왕이 1379년(우왕 5) 이래 늘 꿈꾸어왔던 일이었을 것이다. 1387년(우왕 13)부터 이상징후가 시작되었다. 이해 8월, 이인임이 노병으로 사퇴하고 외척이 대거 등용되었다. 또한 왕 주위의 “환관과 고기 잡고 사냥하는 무리들이 관직에 등용되지 않은 자가 없었다”고 한다. 우왕이 반격을 준비하는 징후였다.

이인임의 사임은 이례적이었다. ‘권력’은 그의 삶의 본질적 요소로, 권력 없는 삶은 그에게 거의 불가능했기 때문이다. 따라서 그의 사임은 중요한 정치변동을 시사하고 있었다. 사임 며칠 뒤 도당의 이인임파 재상들이 공민왕의 후비 정비(定妃)를 알현했다. 그때 정비는 “현릉(공민왕)의 성대한 업적과 우왕의 실도(失道)를 말했다”고 한다. 그것은 우왕의 교체를 정당화할 수 있는 중대발언이었다. 당시 정비는 전혀 실권자가 아니었다. 그러나 그녀는 일찍이 공민왕이 후사를 얻기 위해 자제위로 하여금 강제로 능욕시키고자 했을 때 목숨을 걸고 거부함으로써 높은 명망을 얻었다. 그런데 우왕은 그녀에게 성적 욕망을 품고 있었고, 그녀의 거처에 자주 출입하여 세간의 의심을 자아냈다. 그러나 명덕태후가 죽은 뒤 그녀는 형식상 왕실의 최고 어른이 되었다. 그 지위와 명성이 혼합되어, 그녀는 차후 정치투쟁에서 정치적 정통성의 최종 판단자로 인정받았다. 뒤에 그녀는 우왕과 창왕의 폐위에 대한 공식적인 최종 결정권자가 되었다. 나아가 공양왕을 폐위시키고 이성계에게 왕위를 선양토록 결정한 인물로 공표되었다. 그녀와 재상들과의 회동에서는 심각한 정치적 논의가 이루어졌던 것으로 보인다. 정비의 발언은 우왕의 비행이 더 이상 허용될 수 없는 상태에 이르렀고, 정치적 결단이 임박했다는 의사 표현으로 간주될 수 있었다.


▎만월대 회경전 축대 계단. 회경전은 ‘군신이 함께 만나 즐기는 곳’이라는 뜻이다. / 사진·중앙포토
그러나 우왕은 자신의 행락을 잠시도 멈추지 않았다. 그러던 중 우왕은 9월에 환관 조순을 순군진무 상호군, 김완을 천호에 임명했다. 이는 모두 실질적 병력을 신속히 동원할 수 있는 군사적 직위였다. 1356년(공민왕 5) 공민왕이 기철 등 친원파 권문세족들을 일시에 척살하고 반원정책을 선언한 궁정쿠데타 때도 순군부 병력이 동원되었다. 10월, 우왕은 순군에 명령하여 왕명의 사칭을 금지하도록 했다. 이때 권신들은 노비들을 시켜 사사로이 세금을 거두면서 왕명을 가탁하고 있었다. 이 때문에 진짜 왕명인지 무엇인지 알 수 없었다. 야합의 정치에서는 어찌됐든 좋았고, 진위의 구분은 무의미했다. 그런데 갑자기 우왕은 왕명 사칭죄로 김봉, 김중기 등 8명을 처형했다. 그것은 하나의 의지의 표명이었다. 우왕은 이제 누가 왕인지 분명히 하고 싶었던 것이다.

11월, 우왕은 처음으로 최영의 집에 행차하여 술을 하사하고 날카로운 칼을 구했다.(<고려사>) 일찍이 우왕 5년 유모 장 씨 사건에서처럼 결정적인 순간 권력의 향배를 좌우하는 것은 최영이었다. 최영이 우왕 편에 서는 것은 권신들에게 최악의 악몽이었다. 12월말 우왕은 “모든 창고와 궁사(宮司)에 속한 전민을 침탈한 자는 명부를 갖추어 아뢰라”고 도당에 유시했다. 도당은 이를 묵살했다. 그들 자신이 대상자였기 때문이었다. 그러자 우왕은 남의 전민을 빼앗은 장인 신아(申雅)와 아들 신효온을 유배시켰다. 또한 왕의 수레를 담당한 내승(內乘)을 사칭해 역마를 탄 유인길 등을 참수했다.

이처럼 지표 아래에서는 용암이 끓어오르고 있었다. 1387년이 가기 전 우왕의 결단을 재촉하고 최영의 공분을 불러일으킨 사건이 발생했다. 이 사건과 명나라의 군사적 위협이 없었다면 최영이 과연 행동에 나섰을지 의심스럽다. 최영은 시대와 그의 가치관이 어긋나고 무엇이 문제인지도 분명히 알았지만 14년간 자신의 불행만 한탄하며 참아왔기 때문이다. 문제의 사건은 전 밀직부사 조반(趙胖)의 옥사였다.

우왕 13년 조반은 백주(白州, 황해도 연백)에서 염흥방의 가노 이광을 죽이고 집을 불살랐다. 이광은 일찍이 조반의 전토를 점탈했다. 조반은 염흥방에게 애걸해 돌려받았다. 그러나 이광이 다시 빼앗았다. 조반은 이광에게 애걸했다. 그러나 이광은 조반을 멸시하며 학대했다. 당시 전국에 산재한 권신의 가노들에게 이런 일은 일상적이었다. 그런데 밀직사는 왕명 출납, 궁궐 숙위, 군기(軍機)를 담당한 왕의 비서실로서, 밀직부사는 밀직사의 제 2인자이자 정3품 고관이다. 그런 조반조차 이런 형편이었다. 조반의 일곱 살 난 아들이 우왕에게 진술한 바에 따르면, 조반은 자신이 칼을 빼지 않으면, “처자가 반드시 굶주림과 추위에 이르리라”고 말했다 한다.(<임견미전>)

그런데 이 소식을 들은 염흥방은 왕명으로 반역죄를 선포하고, 조반을 잡아다 국문했다. 이에 조반은 “6~7명의 탐욕스러운 재상이 사방에 종을 풀어놓아 남의 전민을 빼앗고 백성을 학대하니, 이것이 큰 도둑(大賊)이다. 내가 이번에 이광을 벤 것은 오직 국가를 돕고 백성의 도적을 제거하려 하였을 뿐이니 어찌 모반이라 하느냐”고 반박했다. 그러자 염흥방은 무자비한 고문을 가했다. 그러나 조반은 굴복하지 않았다.

이 사건은 고려말 권신들이 국가를 이용하여 어떻게 사욕을 충족시켰는지 적나라하게 보여주는 사례였다. 그들의 사익에 대한 저항은 반역으로 취급되었다. 요컨대 국가는 공익을 보호하는 기관이 아니라, 소수 권력자의 사익을 지키는 위원회였을 따름이다. 조반은 그 점을 폭로했다. 그러자 흥분한 염흥방은 불의를 치장하는 최소한의 주의도 기울이지 않고 폭력을 행사했다. 재판관들은 이 불편한 현실에 직면해 모두 침묵했다. 좌사의대부 김약채만 부당성을 지적하고 고문을 중지시켰다. 며칠 후 염흥방이 심문을 위해 옥관과 대간의 참석을 요청했지만, 아무도 참석하지 않았다. 무언의 저항이자, 체제 내 분열의 시작이었다. 반란은 단순한 폭정이 아니라 자신이 걸친 위장조차 무시할 때 비로소 폭발한다.

무진정변으로 정적을 제거하다


▎광여도의 개성부 수창궁터. 수창궁은 고려 초기에 조성된 별궁으로 제2차 홍건적의 난 때 불탄 뒤 1381년(우왕 7) 최영의 감독하에 재건 공사를 시작했다. / 사진제공·김영수
1388년(우왕 14) 1월 5일, 왕은 최영의 집을 방문하여 비밀리 조반의 옥사를 의논했다. 이 회동에서 우왕은 오랜 세월 동안 기다려온 최영과의 연합에 성공했다. 이틀 후 우왕은 조반과 그의 모친 및 아내를 왕명으로 석방했다. 또한 “재상들이 이미 부자가 되었으니 녹봉 지급을 정지하고, 먼저 먹을 것이 없는 군대들에 나누어주라”고 명령했다. 마침내 염흥방이 순군옥에 구속되었다. 이튿날 우왕은 최영과 이성계에게 명령하여 군사를 동원, 숙위케 했으며 영삼사 임견미와 찬성사 도길부를 구속했다. 세상이 바뀐 것을 깨닫지 못한 임견미는 저항했다. 그는 “매월 7일에 녹봉을 주는 것은 고제(古制)인데, 지금 왕이 까닭 없이 주지 않으니 어찌 임금 된 도리인가. 자고로 인주의 비행은 신하가 이를 바로 잡은 자가 있다”고 선언했다. 그러나 군대가 이미 그의 집을 포위하고 있었다.


▎1449년(세종 31)에 편찬하기 시작해 1451년(문종 1)에 완성된 고려시대 역사서인 <고려사>. 정치·경제· 사회·문화·인물 등의 내용을 기전체(紀傳體)로 정리했다.
그들이 우려하던 일이 실제 일어났다. 임견미와 염흥방은 최영이 결코 그들과 계속 공존할 수 있는 인물이 아님을 알고 있었다. 그런 최영이 무력을 장악하고 있었다. 이보다 위험한 일은 없었다. 그들은 최영을 제거하고자 했다. 위협을 느낀 최영은 1384년(우왕 10)에 판문하부사를 사직했다. 다시 문하시중에 제배되자 칭병사직했다. 도통사(都統使)도 사직하여 군권을 내놓았다.(<최영전>) 하지만 이인임은 최영의 제거에 반대했다. 최영은 위험하지만 예리한 칼이었다. 최영을 포섭함으로써 이인임은 정도전 등 신진 유신, 지윤, 양백연 같은 신흥 무장, 그리고 유모 장씨와 우왕과의 권력투쟁에서 모두 승리할 수 있었다. 임견미는 이인임의 처사를 원망했지만, 최영의 이반은 염흥방이 한계를 넘어섰기 때문이었다.

우왕은 순군에게 염흥방 등의 심문을 명령했다. 그러나 모두 회피했다. 그들의 몰락을 믿지 않은 것이다. 우왕은 심문관을 교체했다. 1월 10일, 마침내 좌시중 이성림, 우시중 반익순 등 임견미, 염흥방과 관련된 고위정치가가 모조리 처형되고 재산이 몰수되었다. 1월 18일, 임견미와 관련된 50여 명이 다시 처형되었다. 전국에 파견된 안무사는 1000명에 이르는 권신의 가신을 모두 처형하고 재산을 몰수했다. 2월에는 그 아내들이 고문으로 죽거나 임진강에 수장되었다. 남자들은 갓난애까지 모두 수장시켰고, 살아남은 여자들은 관비(官婢)로 전락했다.


▎1872년 개성 전도. 권신들에게 정치를 일임한 우왕은 주야로 개성 주위 들판을 배회하며 사냥과 환락에 빠졌다. / 사진제공·서울대 규장각
이처럼 잔혹하고 철저한 처벌은 최영다운 조치였다. 그러나 우왕의 목적은 개혁이 아니었다. 그는 최영의 공분을 이용해 정적들을 제거했을 뿐이다. 이런 의미에서 무진정변의 정치적 의미는 대단히 제약적이었다. 외형상으로 규모만 본다면, 공민왕 5년 기철 등 친원파의 제거와 반원정책의 추진과도 비견될 수 있었다. 만약 국가적 혁신을 위해 이 기회를 살리고자 했다면, 더할 나위 없는 호기였다. 유력한 권문세족이 모두 제거되고, 최영의 군사력은 어떠한 조치도 뒷받침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결과적으로 무진정변은 고려가 스스로를 일신할 수 있는 마지막 기회였다. 그러나 개혁은커녕 우왕 자신이 국가적 위기의 주요한 원인이었다.

정변 후 우왕이 첫 번째로 한 일은 최영과 혼인관계를 맺는 것이었다. 최영은 울면서 “노신은 머리를 깎고 산에 들어갈 것”이라고 완강히 반대했다. 그러나 우왕은 최영의 서녀를 영비(寧妃)로 맞아들였다. 그것은 자신의 생애를 통해 배운 가장 안전한 방책이었을 것이다.

그의 광증은 더욱 심해졌다. 그는 끊임없이 감각적 자극을 추구했다. 그것은 내면성에 대한 두려움의 산물이다. 게다가 정변 이후 암살의 공포에 사로잡혔다. 수개월 뒤 요동공벌(遼東攻伐) 때 최영이 전선에 나가려고 하자, 우왕은 “선왕(공민왕)께서 해를 당한 것은 경이 남정(南征)한 때문이다. 내가 어찌 감히 하루라도 경과 함께 있지 않을 수 있겠는가?”라고 말하며 따라 나섰다. 공민왕은 최영이 제주를 정벌하러 간 사이 시해되었다. 이 폭군은 거리에서 말을 달리며 개와 닭을 쏘고 자신의 군사적 재능과 용기를 자랑했지만, 실은 두려움에 사로잡혀 있었다.


▎위화도회군으로 그나마 명맥을 유지하던 우왕의 권력은 큰 위기를 맞았다. 중국 단둥 쪽에서 바라본 압록강과 위화도. / 사진·중앙포토
그는 더욱 잔인해졌다. 조금이라도 기분에 거슬리는 사람은 모두 죽였다. 요동공벌 차 평양에 있을 때, 우왕이 양마관(養馬官)을 죽이려 하자 최영이 만류했다. 그러자 우왕은 “옹은 사람 죽이기를 좋아하면서 어찌 나는 못하게 하느냐”라고 반박하자, 최영은 자신의 조치는 부득이한 일이었다고 말했다. 하지만 왕은 끝내 그를 죽였다. 한때 반항과 풍자의 표현이었던 그의 난행은 이제 그의 인간성이 되었다.

이 사건의 가장 중요한 의미는 일종의 무신정권이 수립되었다는 것이다. 이는 1270년 원에 의해 무신의 영향력이 제거된 이후 초유의 사태였고, 마침내 왕조교체로 이어졌다. 그러나 이런 사태로 진행되기 전에 국가안보에 심각한 경보가 울렸다. 1388년(우왕 14) 2월 15일, 설장수가 명나라에서 귀국하여, “철령(鐵嶺) 이북은 본래 원나라에 속한 땅이니 함께 요동으로 돌리게 한다”는 주원장의 명령을 전했다. 이는 1374년 공민왕의 사후 이인임이 친명정책에서 친원정책으로 대외정책을 전환한 이후 계속된 위기의 최종 결과였다.

철령 이북 영토는 1258년 원에 복속되었다가 1356년(공민왕 5) 반원정책에 의해 수복된 지역이었다. 명나라는 영토만 아니라 이 지역에 거주하는 고려인들의 복속 역시 주장했다. 최영은 명의 주장대로 할양할 것인지 재상회의에 회부했다. 모두 반대했지만, 전쟁에 찬성하지도 않았다. 남은 방법은 외교적 수단밖에 없었다. 그러나 우왕은 최영과 단독으로 요동공격을 결정했다. 3월, 명은 강계(江界)에 지역 군사 지휘부인 철령위(鐵嶺衛)를 설치하기 시작했다. 보고를 받은 우왕은 울면서 “여러 신하가 요동을 공격하려는 나의 계책을 듣지 않다가 이 지경에 이르렀다”고 말했다. 전국에 징집령이 내려졌다. 그러나 요동정벌의 결정 과정에서 완전히 소외된 이성계는 전쟁에 반대했다. 그러자 우왕은 처형하겠다고 위협했다.

회군파에 맞서 최영을 옹호하다


▎우왕은 공민왕이 아닌 신돈의 자식이라는 의심의 눈초리를 받으며 왕위에 올랐다. 출생의 논란은 비극의 단초였다. 개성시 중서면에 위치한 공민왕의 현릉. / 사진·중앙포토
요동정벌 지휘관으로 팔도도통사 최영, 좌군도통사 조민수, 우군도통사 이성계가 임명되었다. 4월 19일 총 5만의 공요군이 북진을 개시했다. 그 뒤의 사태는 역사에 잘 알려져 있다. 5월 22일, 이성계는 마침내 회군을 결정하고 위화도에서 말머리를 돌렸다. 역사적인 위화도회군이 시작된 것이다. 왕명 없는 회군은 군사반란이었다. 회군의 명분은 “왕을 보고 친히 화복을 진술하여 임금 옆의 악을 제거하여 생령을 편안하게 하겠다”는 것으로, 명이나 우왕을 전혀 언급하지 않고 정치적 책임을 최영 한 사람에게 한정시켰다. 그러나 우왕은 회군파를 반란군으로 공표하고 최영을 강력히 옹호했다. 6월 3일, 마침내 개성 시내에서 교전이 개시되었다. 최영은 고봉현에 유배되었다가 해가 가기 전 처형되었다.

6월 4일, 회군파 장군들은 도성 안에 들어가 왕궁 앞 흥국사에서 회의를 개최했다. 주원장의 홍무 연호가 복귀되었다. 대명 사대정책이 천명된 것이다. 이날 밤 우왕은 환관 80여인과 함께 이성계와 조민수의 집을 기습했다. 그것은 타이밍 상 완벽한 기습이었다. 왜냐하면 고된 회군과 1차 사후처리를 마친 회군파 장군들이 마음 놓고 오랜만에 귀가해 휴식을 취했을 만한 시간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회군파 장군들은 모두 군문 밖에 주둔한 채 귀가하지 않았다. 기습은 실패했으나, 우왕은 만만치 않은 인물임을 입증했다. 절체절명의 위기에 처해서도 끝까지 최영을 버리지 않고, 아무것도 할 수 없는 무력한 상황에서 기습을 감행했다는 점에서 우왕의 용기는 높은 평가를 받을 만하다. 그의 인생은 환락과 방탕 속에서 헛되이 낭비되었으며, 국가와 백성을 고통스럽게 했다. 또한 그의 치기와 잔인성, 암살의 공포에 떠는 나약함은 다소 혐오스럽다. 그런 의미에서 이 기습은 우왕의 삶에서 가장 빛나는 부분이다. 그는 앉아서 죽는 것을 기다리지 않고 진정한 용기를 발휘했던 것이다.

그러나 이 기습을 통해 식물적인 삶이나마 연명할 수 있는 작은 가능성도 사라졌다. 회군파 장군들은 우왕과 동거할 수 없다는 사실을 분명히 깨달았다. 6월 8일, 우왕은 강화에 유배되고 폐위되었다. 우왕은 1년 이상 생존했다. 1389년 11월, 최영의 생질인 전 대호군 김저(金佇)가 이성계를 암살하고 우왕을 복립하려다 발각되었다. 우왕은 김저에게 “답답하게 여기서 손도 못 쓰고 죽는 것을 견딜 수 없다. 역사(力士) 한 사람을 얻어 이시중을 죽일 수 있다면, 내 뜻을 펼 수 있겠다”고 말했다고 한다. 이 사건은 이성계파에 의해 조작되었을 가능성도 높다. 어쨌든 우왕은 그해가 가기 전에 처형되었다. 왕은 군림하든지 죽어야 하는 것이다.

우왕은 고려가 낳은 가장 열악하고 비극적인 정치 리더십의 전형이다. 그는 공민왕의 후계정책의 실패와 권신정치의 탐욕이 초래한 부산물이었다. 그런 운명을 극복하고자 이인임과 권력투쟁을 벌였으나 좌절하고, 생명을 보존하기 위해 광인처럼 살았다. 오랜 인내 끝에 그 운명을 극복할 기회를 잡았으나, 광기는 이미 그의 본성이 되었다. 고려는 그를 망쳤으나, 그 또한 고려를 멸망의 길로 이끌었다. 그의 치세기에 소수의 가문이 광범위하게 토지를 점탈하여 국가 재정이 무너지고 농민의 생존은 한계상황에 이르렀다. 왜구는 전국을 유린하며 백성을 죽였으나 국가는 그들을 보호하지 못했다. 그 난세 속에서 이성계가 전쟁 영웅으로 부상했다. 정도전 같은 신진 성리학자들은 좌절 속에서 신흥 무장세력과 연합해 혁명을 꿈꾸기 시작했다. 빛과 어둠이 교차된 시대였다.

김영수 - 1987년 성균관대 정외과를 졸업하고, 1997년 서울대 정치학과 대학원에서 정치학 박사학위를 받았다. 동경대 법학부 객원연구원을 거쳐, 2008년부터 영남대 정외과 교수로 재직하며 한국정치사상사를 가르치고 있다. 노작 <건국의 정치>는 드라마 <정도전>의 토대가 된 연구서로 제32회 월봉저작상, 2006년 한국정치학회 학술상을 수상했다.

201704호 (2017.03.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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