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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명호의 근대 동북아 삼국지(4)] 메이지 천황의 측근실세 이와쿠라 도모미의 도전 

전통문화 지키면서 선진문물 수용에도 적극적 

신명호 부경대 사학과 교수
존왕양이 운동가로서 위정척사 외친 흥선대원군과 흡사… 미국·유럽 등에 천황 사절 파견하는 등 현실적 측면 중시

▎1871년 11월 일본 요코하마의 부둣가에서 구미제국을 순방하기 위해 출항하는 이와쿠라 도모미 사절단을 배웅하는 행사가 열렸다. 사절단을 이끈 전권대사 이와쿠라(그림 가운데 작은 증기선의 일본옷을 입은 사람)가 떠나기 전 인사를 하고 있다. / 사진·중앙포토
공친왕은 프랑스의 조선 침공을 저지하려다 실패했다. 당시 프랑스는 영국과 더불어 세계 최강을 다투던 강국이었다. 청나라도 프랑스의 무력에 굴복해 북경조약을 맺어야 했다.

그런 프랑스의 침공을 조선이 감당하기는 어렵다고 판단했다. 그래서 조선에 글을 보내 전쟁을 피하도록 조언했다. 하지만 조선사람들은 자존심 세고 완고했다. “잘못은 프랑스가 저질렀는데 왜 조선더러 머리를 숙이라고 하느냐”며 불쾌해 했다.

조선사람들의 반응은 물론 충분히 이해할 수 있었다. 아편전쟁 때 청나라 사람들도 그랬다. 아편을 밀수한 주제에 적반하장으로 나오는 영국의 파렴치에 청나라 사람들은 참을 수 없을 정도로 분개했었다. 그런 분노로 영국과 전쟁을 벌였다. 결과는 참혹한 패배였다. 수도를 함락당하고 막대한 배상금을 물어줘야 했다. 냉혹한 약육강식의 시대에 무력이 받쳐주지 않는 분노는 그저 분노일 뿐 정의가 될 수 없음을 공친왕은 절절하게 깨달았다.

자존심 강한 조선사람들이 프랑스 침공군에 쉬이 굴복할리는 없었다. 그렇다고 침공군을 격퇴할 만한 무력이 있는 것도 아니었다. 그래서 공친왕은 조선이 어느 정도 저항하다가 결국에는 굴복할 것으로 예상했다.

프랑스는 조선을 점령하기 위해 침공한다고 겉으로는 큰소리쳤지만 내심 바라는 것은 자존심 회복에 더해 통상자유와 선교자유였다. 이유여하를 막론하고 자국의 선교사가 조선에서 피살됐다는데 가만히 있을 수는 없었다. 복수하는 김에 통상자유와 선교자유를 실현함으로써 프랑스의 자존심도 회복하고 이익도 취하자는 것이 조선 침공의 근본적인 동기였다. 그래서 조선사람들이 자존심을 접고 프랑스 선교사 처형에 대해 사과하며 자유통상과 자유선교를 보장하면 철수할 가능성이 컸다.

하지만 조선사람들이 결사적으로 항쟁해 프랑스의 피해가 커질 경우에는 상황이 달라질 수 있었다. 자존심을 세우기 위해, 또 피해를 만회하기 위해 프랑스는 정말로 조선을 무력점령하고 식민지로 편입시킬 가능성이 있었다. 한반도가 프랑스의 식민지로 편입되면 그 다음은 만주가 위험했다. 만주는 청나라의 발상지이자 고향이었다. 그곳이 위험해지는 것은 청나라의 뿌리가 썩어 들어가는 것과 같았다.

공친왕은 그런 상황을 막고자 했다. 적당한 선에서 조선이 자존심을 접고 굴복하기를 바랐던 것이다. 적당한 선에서 굴복한다는 것은 끝까지 싸우다 항복하는 것이 아니라 어느 정도 항쟁하다 강화 형태로 마무리하는 것이었다. 조선이 그렇게 원한다면 공친왕은 자신이 나서서 양국 간의 강화를 중재하고자 했다.

하지만 그렇게 되려면 무엇보다도 조선이 자유통상과 자유선교를 보장하고 약간의 배상금도 지불해야만 가능했는데, 조선사람들의 자존심이 문제였다. 전쟁의 결판이 나지도 않은 상황에서 배상금을 지불하고 강화하라고 하면 그렇지 않아도 자존심 강한 조선사람들이 수용할 리가 없었다. 공친왕은 어떻게 하면 조선으로 하여금 강화하도록 설득할까 고민했다.

“뇌물 받지 않았다면 그들을 옹호할 리 없다”


▎1866년 대동강을 침범했다 평양에서 한국 군민(軍民)에 의해 불타버린 미국 상선 제네럴셔먼호. / 사진·중앙포토
그러던 중 1866년(고종 3, 동치 5) 10월 초에 조선의 외교문서가 청나라 예부에 도착했다. 지난 7월 초에 영국 배를 포격해 격퇴했고, 또 7월 말에 미국 상선을 불태웠다는 내용이었다. 이른바 제너럴 셔먼호 사건을 알린 것이었다.

조선의 외교문서는 자부심과 자신감으로 가득 차 있었다. 세계 최강으로 불리는 영국 배를 포격해 물리쳤고, 나아가 미국 배도 불태워 침몰시켰다는 이 외교문서로 보건대 조선사람들이 프랑스 침공군에 맞서 끝까지 항쟁할 것이 확실했다. 조선사람들은 프랑스 침공군을 충분히 물리칠 수 있다고 믿는 것이 분명했다.

공친왕은 당장 1860년의 북경 함락을 떠올렸다. 그때 영국과 프랑스의 연합공격에 청나라는 속수무책으로 당했다. 지금 조선은 프랑스 침공군도 벅찬 상황인데 또 영국 배를 포격하고 미국 배도 불태워버렸다. 분개한 영국과 미국이 합세해 프랑스를 돕는다면 어떻게 되겠는가? 그러나 정작 조선사람들은 그럴 가능성 자체에 대해 신경도 쓰지 않았다. 단지 서양 오랑캐를 물리쳤다는 자부심과 자신감만 가득할 뿐이었다.

1866년 10월 8일, 공친왕은 동치제에게 상소문을 올렸다. 거기에서 공친왕은 영국과 미국의 상선이 조선으로부터 공격을 받았으므로 프랑스와 합세할 가능성이 크다고 예상하면서 사태가 더 악화되기 전에 조선에 강화하도록 권유할 것을 요청했다.

그런데 강화하려면 무엇보다도 전쟁 배상이 문제였다. 당시 조선사람들은 침공군과 강화할 생각도 없었고 배상할 생각은 더더욱 없었다. 따라서 조선으로 하여금 강화하게 하려면 무엇보다도 자존심을 접게 만들어야 했는데 무력으로 될 일이 아니었다. 그래서 공친왕은 청나라 황제의 권위를 빌려 조선에 강화할 것을 권고하게 했던 것이다.

이 요청에 따라 동치제는 조선에 외교문서를 보내 “미리 잘 헤아려 만전의 계책을 세우고 조금이라도 교만해서는 안 됩니다”라고 권고했다. 아울러 공친왕의 상소문 사본도 함께 조선에 보내도록 했다.

하지만 공친왕의 상소문 사본이 조선으로 오는 도중에 프랑스 침공군이 강화도에서 철수했다. 조선사람들의 자신감과 자부심은 하늘같이 높아져갔다. 이런 상황에서 11월 5일 공친왕의 상소문 사본이 조선에 도착했다. 프랑스 침공군이 철수한 지 20일 지난 시점이었다.

흥선대원군을 비롯한 조선의 집정자들은 공친왕의 상소문 사본을 보며 크게 분개했다. 무엇보다도 “조선은 통상과 선교를 절대로 허락하지 않으려 하는데 이것이 또한 예전의 염려였습니다. 전쟁 배상도 반드시 타결되도록 노력해야 하고, 조금이라도 교만하게 해서는 안 됩니다”는 내용이 그들의 자존심을 긁었다.

흥선대원군의 입장에서 생각해보면 공친왕의 상소문은 망발(妄發)이자 적반하장이었다. 누가 봐도 침공군 프랑스는 가해자였고 조선은 피해자였다. 그렇다면 청나라는 당연히 피해자인 조선을 보호하고 도와줘야 했다.

그런데 공친왕은 거꾸로 조선을 향해 배상금을 준비해야 한다고 했다. 그 이유는 조선이 패전하리라는 예상 때문임이 분명했다. 하지만 공친왕의 예상과 달리 조선은 침공군을 물리쳤다. 이런 일로 본다면 공친왕은 식견도 부족하고 양식도 부족한 사람임에 틀림이 없었고 생각할 수밖에 없었다. 심지어는 프랑스로부터 뇌물을 받았는지도 모른다는 의심까지도 가능했다. 그렇지 않고서야 어떻게 이런 망발을 한단 말인가?

미국과 수호조약 후 둘로 나뉜 열도(列島)


▎1860년 10월 베이징조약 체결을 주도한 공친왕(왼쪽 사진). 아들 고종을 대신해 조선의 섭정이 된 흥선대원군. /사진·중앙포토
공친왕의 상소문 사본을 확인한 그날 당일로 흥선대원군은 청나라에 회답 문서를 보냈다. 흥선대원군은 공친왕의 강화 권유에 대해 “정의에 따라 대비하며 성의와 믿음을 다하겠다”면서도 “전쟁 배상문제를 명심하기는 하겠지만 프랑스가 강화도에서 재물과 무기를 수없이 약탈했으니 우리나라가 프랑스에 배상을 요구하는 것이 당연하다. 그런데도 프랑스가 우리나라에 배상을 요구하다니 어떻게 이런 일이 있을 수 있는가? 무릇 프랑스가 요구하는 통상·선교·배상은 비록 우리나라의 백성과 형편으로 몇 년 동안 양이(洋夷)들로부터 곤욕을 당한다고 해도 결단코 받아들일 수 없다”고 딱 잘라 거절했다.

흥선대원군과 조선의 집정자들은 전쟁을 도덕의 잣대로만 판단할 뿐 현실의 잣대는 거의 고려하지 않았던 것이다. 그런 그들에게 공친왕의 권고가 귀에 들어올 리 없었다.

그러나 공친왕은 조선을 설득하기 위해 부단히 노력했다. 1867년(고종 4) 4월에 공친왕은 조선에 또다시 외교문서를 보냈다. 이번에는 신문에서 수집한 일본 관련 정보였다. 당시 공친왕의 총리아문에서 수집한 신문에는 조만간 일본이 프랑스와 합세해 조선을 침공할 것이라는 기사가 심심치 않게 실렸다.

그 내용도 매우 구체적이었다. 일본은 이미 증기군함 80여 척을 마련했으며, 프랑스와 합세하기로 약속이 다 돼 있다는 등등의 기사였다. 이런 기사들을 보면서 공친왕은 가능성이 높다고 판단했다. 지난해 조선을 침공했다가 최면을 구긴 프랑스가 일본을 끌어들여 재침공할 가능성이 충분했기 때문이다. 공친왕은 신문의 기사를 요약해 조선에 보내면서 사실 여부를 확인하고 후환을 예비하라고 권고했다.

당시 일본사람들은 양이파(攘夷派)와 개화파(開化派)로 나뉘어 극한대결을 벌이고 있었다. 1853년 미국의 페리 제독이 4척의 함선을 이끌고 도쿄 앞바다에 입항했다. 페리 제독의 출현은 에도(江戶) 막부를 발칵 뒤집어놓았다.

막부는 전쟁을 해서라도 페리 제독의 요구를 거절해야 한다는 쇄국파와 전쟁을 해봐야 이길 수 없으니 요구를 들어줘야 한다는 개항파로 갈렸다. 스스로 결론을 내리지 못한 막부는 전국의 번주(藩主)들에게 의견을 구했다. 번주들 역시 개항파와 쇄국파로 갈렸다. 결국 막부는 고메이(孝明) 천황에게까지 의견을 구했다. 천황의 권위를 빌리려는 생각이었다.

하지만 고메이 천황은 개항에 절대 반대였다. 개항으로 서양의 문화가 들어오면 신국(神國) 일본이 더럽혀질 것이라고 생각에서였다. 그러나 미국의 페리 함대에 뒤이어 러시아 함대 4척이 나가사키(長崎)에 입항했다. 막부의 입장에서는 쇄국을 고집하기가 더욱더 어려워졌다. 쇄국을 유지하기 위해서는 미국·러시아 등과의 전쟁을 각오해야 하는데 자신이 없었다.

1854년 3월, 막부는 고메이 천황과 논의도 없이 미국과 가나가와(神奈川)에서 수호조약을 체결했다. 시모다(下田)와 하코다테(箱館)의 2개항을 개항하며 미국 영사를 시모다에 주재시키고 필요에 따라 미국 선박에 연료와 물을 공급한다는 내용이었다. 이로써 일본은 서구열강에 문호를 개방하게 됐다. 아편전쟁에서 패배한 청나라가 남경조약을 맺고 다섯 개 항을 개항한 1842년으로부터 12년 뒤였다.

일본의 개항은 격심한 내부 반발을 불러왔다. 당장 고메이 천황이 강한 거부감을 표명했다. 하급 무사들은 막부가 신국 일본을 서양 오랑캐에 팔아버렸다며 막부 타도 운동을 전개했다. 그들은 서양 오랑캐를 몰아내기 위해서는 천황을 중심으로 똘똘 뭉쳐 막부를 타도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사쓰마번(薩摩藩), 조슈번(長州藩) 등 거대 번들이 동조하면서 이른바 ‘존왕양이(尊王攘夷)’ 운동은 전국적으로 퍼져나갔다.

천황을 중심으로 전 일본이 하나돼 서양 오랑캐를 몰아내자고 주장하는 존왕양이파는 막부를 적으로 규정하고 타도하려 했다. 반면 막부의 개화파는 현실적으로 개항을 막을 수는 없다고 응수했다. 이 과정에서 존왕양이파와 개화파 사이에 유혈충돌이 끊이지 않았다.

연이은 최고권력 교체, 요동(搖動)은 시작되고


▎메이지 유신 초기 일본에 등장한 기차. / 사진·중앙포토
이런 와중에 1866년 7월 20일 쇼군(將軍) 도쿠가와 이에모치(德川家茂)가 세상을 떠나고 새로 도쿠가와 요시노부(德川慶喜)가 쇼군이 됐다. 이어서 12월 25일에는 천황 고메이가 세상을 떠나고 16세의 메이지(明治)가 천왕에 즉위했다.

연이어 최고권력이 교체되면서 존왕양이파와 개화파의 대결은 극단적으로 치달았다. 당시로서는 개화파의 수장이자 막부의 쇼군인 도쿠가와 요시노부가 승리할지 아니면 존왕양이파의 수장이자 천황인 메이지가 승리할지 누구도 예측하지 못했다.

이런 일본의 내부사정을 아는 공친왕이기에 1867년 4월 조선에 외교문서를 보내 일본의 상황을 확인하고 미리 대비하라 권고했던 것이다. 하지만 이 같은 공친왕의 권고도 흥선대원군과 조선의 집정자들에게는 또 하나의 망발에 지나지 않았다.

그들은 “미리 알려줘서 고맙다”는 회답 문서를 보내기는 했지만 정작 일본의 상황을 확인하기 위한 노력은 거의 기울이지 않았다. 겨우 예조참의 명의로 대마도 도주에게 외교문서를 보내 에도막부가 조선을 침공한다는 소문이 있는데 그 소문이 사실인지 따졌을 뿐이었다. 당연히 대마도 도주는 그런 일이 전혀 없다고 답변했다. 흥선대원군과 조선의 집정자들은 이 답변을 그대로 믿고 별도로 확인해볼 생각을 하지 않았다.

그래서 일본이 이미 개항했다는 사실도 몰랐고, 양이파와 개화파로 나뉘어 격렬하게 투쟁하고 있다는 사실도 몰랐다. 그저 예전의 일본으로만 알고 그렇게 믿을 뿐이었지만 일본은 급변하고 있었다. 수백 년 지속되던 막부체제가 종말을 고하면서 새로운 대안으로 천황체제가 부상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 중심에 메이지 천황이 있었다.

메이지 천황은 1852년에 태어났다. 공교롭게도 고종황제와 태어난 해가 같았다. 나이로만 보면 메이지 천황과 고종황제는 동갑 친구였다. 하지만 둘 사이의 일생은 기나긴 악연으로 점철된 한일 간의 근대사 그대로 악연의 연속이었다.

1866년 12월 25일, 고메이 천황이 35세의 젊은 나이로 갑자기 세상을 떠난 후, 1867년 1월 9일에 메이지 천황이 천조(踐阼) 의식을 치르고 제122대 천황에 즉위했다. 천조 의식 이후 몇 달 동안 메이지 천황은 치상(治喪)에 전념했다. 그 사이 일본의 존왕양이 운동에서 결정적인 역할을 하게 되는 두 사람이 만나 협력하는 일이 있었다. 43세의 이와쿠라 도모미(巖倉具視)와 32세의 사카모토 료마(坂本龍馬)였다.

당시 이와쿠라는 천황 측근 중 대표적인 책사(策士)로 손꼽히고 있었다. 고메이 생전에 이와쿠라는 천황 측근이었지만 과격하게 존왕양이 운동을 추진하다가 징계받고 근신 중이었다. 하지만 근신 중에도 이와쿠라는 은밀하게 천황 쪽 사람들을 만나 존왕양이 운동을 추진했다.

사카모토 료마는 토사번(土佐藩)의 하급무사 출신으로 번을 탈출한 후 양이파 무사들과 더불어 존왕양이 운동에 전념하고 있었다. 이와쿠라와 사카모토의 만남은 1867년 6월에야 이루어지고 그 전에는 따로따로 활동하였다.

이와쿠라는 교토에서 주로 천황 측근들을 상대로 운동했다. 1876년 4월 26일, 이와쿠라는 메이지 천황의 외조인 나카야마 다다야스(中山忠能)에게 몰래 건의서 한 장을 올렸다. 메이지 천황은 외가에서 나고 자랐기에 나카야마의 영향력은 막강했다. 그 나카야마를 설득해 메이지 천황을 움직이고자 건의서를 올린 것인데, 건의서에는 존왕양이 운동을 성공시키기 위한 세 가지 방책이 들어 있었다.

“번(藩)의 협조만 얻으면 왕정복고 실현되리라”


▎시모노세키항 입구의 아카마 신궁. 조선통신사의 숙소였던 아미다지는 메이지 유신 이후 아카마 신궁으로 이름을 바꿨다. / 사진·중앙포토
첫째는 상책으로 존왕양이를 성공시키기 위해 사쓰마번·죠슈번·토사번의 협조를 얻도록 노력하자는 것이었다. 만약 세 번에서 협조하면 성공하리라고 예상했지만 협조하지 않는다면 실패로 예상했다. 둘째는 중책으로 천황의 권위로써 쇼군 도쿠가와 요시노부를 파면시켜 일개 번주로 강등시키고 국가대권을 천황이 직접 장악하자는 것이었다. 하지만 쇼군이 불복하고 저항한다면 실패할 것으로 예상했다. 셋째는 하책으로 천황 측근들을 해외로 파견해 견문을 넓히자는 것이었다. 이렇게 함으로써 장기간에 걸쳐 천황 쪽의 실력을 향상시키자는 의미였다.

세 가지 방책 중에서 이와쿠라가 추천하는 방책은 물론 첫째였다. 사쓰마번·죠슈번·토사번의 협조를 얻어 막부를 타도하고 왕정복고를 실현하는 것이 가장 확실하고 빠른 길이라 생각했기 때문이다.

이와쿠라는 건의서에서 막부를 타도한 후에 해야 할 일 세 가지 목표도 언급했다. 첫째는 왕정복고 실현, 둘째는 유럽과 미국에 천황 사절 파견, 셋째는 중앙집권 실현이었다. 이 세 가지 목표는 근본적으로 고대 천황제를 모범으로 하여 제시됐다.

일본에서는 7세기 전후로 고대 천황제과 확립됐는데 당시 일본은 수나라와 당나라에 천황 사절을 파견해 선진문화를 수용하면서 중앙집권을 추진했다. 하지만 19세기에 중국은 더 이상 선진국이 아니므로 유럽과 미국에 천황 사절을 파견해 선진문화를 수용하면서 중앙집권을 추진하자는 것이 이와쿠라의 구상이었던 것이다.

그런데 사카모토 료마 역시 이와쿠라와 비슷한 생각을 하고 있었다. 사카모토는 존왕양이 운동이 성공하려면 막부를 타도해야 하고, 막부를 타도하려면 사쓰마번·죠수번·토사번의 연합이 필수라고 생각했다. 그래서 사카모토는 세 번의 연합을 성사시키기 위해 백방으로 노력했고 마침내 6월 초에 성사시켰다.

세 번의 연합 후 사카모토는 이와쿠라를 만나기 위해 나가사키에서 배를 타고 교토로 갔다. 그때 배 안에서 막부 타도 후의 정국구상을 8개 조항으로 정리했는데, 이것이 유명한 선중팔책(船中八策)이었다.

첫째가 천하의 정권을 조정에 반환하고 모든 명령을 조정에서 하달한다는 것인데, 이와쿠라의 왕정복고와 같은 생각이었다. 그 외는 상원과 하원 설치, 능력 본위의 인재 등용, 해군 확장, 대외교류 확대 등으로 근대적 사상이 돋보이는 내용들이었다.

교토에 간 사카모노는 은밀하게 이와쿠라를 찾았다. 둘 사이에 구체적으로 어떤 이야기가 오갔는지는 모르지만 왕정복고에 대한 생각이 같기에 쉽게 의기투합했다. 이후 둘은 은밀하게 연락을 주고받으면서 이와쿠라는 교토에서, 사카모토는 교토 밖에서 왕정복고 운동을 추진했다. 이 두 명이 당시 왕정복고 운동의 실제적인 설계자이자 지도자였다.

사카모토의 주선에 따라 사쓰마의 실력자들이 1867년 9월 17일에 죠슈번의 수도 야마구치(山口)로 갔다. 맹약을 맺기 위해서였다. 다음날 두 번의 실력자들이 만났다. 사쓰마를 대표한 오쿠보 도시미치(大久保利通)는 국내외 정세가 급변하는데도 막부가 대책도 세우지 않고 반성도 하지 않으므로 타도할 수밖에 없다고 설명한 후 “지금 병력으로 막부를 토벌한다면 황국의 우환을 없앨 수 있습니다. 이미 토사번과 히로시마(廣島) 번에서도 함께 하기로 했습니다. 사쓰마는 즉시 병력을 교토에 올려 보내 막부의 소굴을 쓸어버리고 궁궐을 호위하고자 합니다. 그러나 미력으로 과연 대업을 완수할 수 있을지 모르겠습니다. 제가 들은 대로 죠슈번이 병력을 동원해 저희와 함께하신다면 황국의 무한한 축복입니다”라고 했다.

사쓰마가 막부 토벌에 앞장서겠다는 뜻이었다. 사실 그때까지도 죠슈번에서는 사카모토에게 설득돼 사쓰마와의 연합에 동의하기는 했지만 반신반의하고 있었다.

그런데 사쓰마가 이렇게 앞장서겠다고 말하자 죠슈번에서도 가만히 있을 수 없었다. 몇 가지 질문을 던진 후 죠슈의 번 주는 “이미 사쓰마의 대책을 들었으니 무엇을 더 주저하겠습니까? 죠슈는 막부를 타도하기로 맹세하고 병력을 오사카(大阪)에 보내 사쓰마를 돕겠습니다”라고 확답했다.

천황, 800년 만에 최고권력자로 복귀하다


▎메이지 유신의 일등 공신인 이와쿠라 도모미(왼쪽 사진)과 메이지 유신의 또 다른 주역 오쿠보 도시미치. / 사진·중앙포토
그런데 당시 왕정복고의 방법으로는 두 가지가 거론됐다. 하나는 군사적인 방법이고 둘째는 평화적인 방법이었다. 평화적인 방법은 무력을 쓰기 전에 쇼군에게 왕정복고를 권유해보자는 것이었다. 만약 쇼군이 수용한다면 왕정복고가 평화적으로 이뤄져서 좋고, 혹 수용하지 않는다면 그때 군대로 토벌해도 늦지 않다는 것이 그들의 입장이었다.

이런 주장은 토사의 번주가 제기했다. 이 방법을 사쓰마에서도 반대하지 않자, 토사의 번주는 10월 3일, 자신이 직접 쇼군에게 편지를 썼다. 그는 편지에서 국가대권을 천황에게 돌리는 것이 일본도 살고 쇼군도 사는 길이라고 설득했다.

만약 쇼군이 거절하면 남는 것은 전쟁뿐이었다. 전쟁을 해서라도 국가대권을 지키느냐, 아니면 자발적으로 국가대권을 넘기느냐를 놓고 상당히 고민했을 것이 분명하다. 그런데 당시 메이지가 16세라 오히려 기회일 수도 있었다. 형식적으로 국가대권을 메이지에게 넘긴 뒤 쇼군이 섭정이 된다면 여전히 국가대권을 장악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이런 계산에서 쇼군은 국가대권을 천황에게 올리기로 결심했다.

1867년 10월 14일, 쇼군은 상소문을 올려 국가대권을 반환하겠다고 요청했다. 이른바 대정봉환(大政奉還)이 이것이었다. 다음날 쇼군은 입궁해 메이지 천황의 허락을 받았다. 그리고 12월 9일에 왕정복고가 정식으로 공포됐다. 이것이 이른바 메이지 유신의 시작이었다.

쇼군의 대정봉환은 일본 역사상 획기적인 사건이었다. 가마쿠라(鎌倉) 막부부터 시작해 무로마치(室町) 막부를 거쳐에도(江戶) 막부에 이르기까지 800년 동안 일본의 최고권력자는 쇼군이었다. 천황은 종교적 상징성만 가졌을 뿐 사실상 허수아비였다. 그런데 대정봉환으로 이제 천황은 명실상부한 최고권력자가 됐다.

자연스럽게 이와쿠라는 메이지 천황의 측근실세가 됐다. 왕정복고를 설계하고 성공시킨 주역이 사실상 이와쿠라였기 때문이다. 이와쿠라는 지난 4월의 건의서에서 막부 타도 후에 해야 할 일 세 가지로 왕정복고 실현, 유럽과 미국에 천황 사절 파견, 중앙집권 실현을 거론한 적이 있었다. 대정봉환으로 왕정복구는 실현됐다. 이에 따라 이와쿠라는 나머지 두 개 즉 유럽과 미국에 천황 사절 파견 그리고 중앙집권 실현을 의욕적으로 추진했다.

존왕양이 운동가로서의 이와쿠라는 위정척사(爲政斥邪)를 주장한 흥선대원군과 비슷한 면이 많았다. 자국의 전통문화를 최고가치로 여기고, 그 전통문화를 지키기 위해 분투한 것도 비슷했다. 하지만 둘 사이에 결정적으로 다른 것이 하나 있었다. 바로 유럽과 미국에 천황 사절을 파견하겠다는 생각이었다.

흥선대원군은 위정척사를 주장하면서 외국으로부터 배울 것이 하나도 없다고 생각했다. 자국의 전통문화에 대한 자부심과 자신감이 지나치게 많았던 탓이었다. 그래서 외국문물을 배우기 위해 사절을 보낸다거나 유학생을 보낸다는 생각 자체를 하지 않았다.

반면 이와쿠라는 존왕양이를 주장하면서도 유럽과 미국에 천황 사절단을 보내야 한다고 생각했다. 이 생각은 일본 역사에 등장하는 견수사(遣隋使)나 견당사(遣唐使)에서 암시를 받기는 했지만 이와쿠라의 사고방식이 보다 현실적이기에 가능했다.

대정봉환이 있던 1867년 당시, 이와쿠라는 43세, 흥선대원군은 48세 그리고 공친왕은 34세였다. 공친왕이 가장 젊으면서 현실적이었고 흥선대원군은 가장 나이가 많으면서 명분론적이었다. 이와쿠라는 중간이었다. 이 세 명이 주도한 1860년대 후반의 한·중·일 역시 그와 같았으며 그것이 당시 한·중·일의 현실을 갈랐다. (계속)

신명호 - 강원대학교 사학과를 졸업하고 한국학중앙연구원 한국학대학원에서 박사학위를 받았다. 현재 부경대 사학과 교수와 박물관장직을 맡고 있다. 조선시대사 전반에 걸쳐 다양한 주제의 대중적 역사서를 다수 집필했다. 저서로 <한국사를 읽는 12가지 코드> <고종과 메이지의 시대> 등이 있다.

201704호 (2017.03.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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