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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독립운동 중국 현지 답사기(4)] “사랑이여! 자유 위해서라면 그대마저 바치리” 

 

윤태옥 작가, 다큐멘터리 제작자
어느 애송이 독립투사의 애틋한 사랑과 이별이 깃든 상하이 아이런리(愛仁里) 42호… 인기 관광지인 난징둥루 중심가엔 고려공산당 창당의 역사 밴 건물도 남아

마오쩌둥(毛澤東)을 신랄하게 비판했던 반혁명 작가. 조선의용대원 가운데 가장 오래 살아남아 ‘최후의 분대장’이라는 별칭으로 불린 사람. 파란만장한 일생을 살다 간 재중작가 김학철. 그가 조선민족혁명당 상하이행동대의 일원으로 활약하던 당시의 자취를 따라 간다. 일부러 가리거나 짐짓 외면했던 공산주의 계열의 행적도 함께 떠오른다.


▎상하이는 20세기 전반 동아시아에서 가장 뜨거운 용광로였다. 서구 열강들에게는 군대와 자본과 탐욕을 쏟아붓는 창구였고, 중국인들에게는 신문물을 찾아가는 출구였다. 오늘날의 상하이.
상하이(上海)는 우리가 일제의 강점 하에 신음을 토해내던 20세기 전반 동아시아에서 가장 뜨거운 용광로였다. 1843년 중국이 아편전쟁에서 패배하면서 서구 열강에 의해 강제로 개항된 상하이. 서구 열강에는 제국주의를 앞세워 군대와 자본과 탐욕을 쏟아 부은 항아리이자, 중국인들에게는 전통시대를 내던지고 신문물을 찾아가는 대양으로의 출구였다. 개항 당시 20만 명이던 인구는 19세기 말 50만 명을 넘었고, 1920년대에 이미 300만 명을 돌파해 대상하이(大上海)라는 말이 나올 정도였다.

엄연히 중국 땅이었지만 치외법권이라는 깃발을 꽂은 조계지가 깨진 유리알처럼 박혀 있는 기묘한 다국적 도시. 서양과 일본의 민간회사와, 그들을 위해 일하는 중국인 매판들과, 세계 각국에서 몰려든 여행객이 넘쳤다. 아편에서 영화까지, 경극에서 발레까지, 치파오(旗袍)에서 영국 신사복까지 서양과 일본의 문물이 쏟아져 들어와 뒤섞였다.

조선의용대 ‘최후의 분대장’


▎김학철이 조선혁명당 상하이행동대로 활약하던 시절에 머문 아이런리 42호의 현재. 왼쪽 붉은 원 부분이 입구다. 이곳에서 김학철과 송일엽의 사랑도 함께 익어갔다.
정치적인 용광로이기도 했다. 아나키즘부터 자유주의·사회주의·공산주의까지, 파시즘의 민족주의에서 식민지의 저항 민족주의까지, 이념과 사상과 주의가 끓어올랐다. 그런가 하면 각국의 군대와 헌병과 경찰, 일본의 밀정과 조선의 독립운동가들이 한데 섞여 음험하고 긴박하게 돌아가는 제5전선이었다.

사람들은 더욱 다양했다. 인력거꾼에서 중국인 세관원까지, 미국 외교관에서 일본 경찰까지, 영국 무역상에서 장쑤(江蘇)성의 매판까지, 인도의 시크인 경비원에서 볼셰비키 혁명에 떠밀려온 유대인에 고려인삼을 팔러 온 조선인까지, 그리고 일제에 반항하는 조선인 망명객과 그들을 잡아 일본에 넘기려는 밀정들까지…. 조선인 망명객 가운데는 노신사와 중년의 사내는 물론 여성과 스물도 채 안 된 애송이도 있었다. 그 가운데 독립운동에 투신하겠다는 순진한 일념으로 임시정부를 찾아 상하이라는 거대한 도시로 뛰어든 한 독립운동가의 청년기를 찾아 필자는 상하이로 날아갔다.

그곳은 당시의 주소로 말하면 프랑스조계 포시가(프랑스 육군 원수의 이름에서 따온 가로명) 아이런리(愛仁里) 42호다. 지금 주소로는 베이징시루(北京西路) 218룽(弄) 4~11호다. 황허루(黃河路)와 베이징시루가 교차하는 사거리의 서북쪽 코너. ‘룽’은 ‘골목’이라는 뜻으로, 상하이 등지에서 제(街)나 루(路) 아래 주소로 쓰이는 말이다. 아이런리는 작은 주택단지다. 이곳을 찾은 한국인은 아마도 거의 없을 것이다.

기억의 주인공은 항일독립군 조선의용대에서 ‘최후의 분대장’으로 불리는 김학철(본명 홍성걸)이다. 김학철은 1935년 늦은 여름, 스무 살 나이에 독립운동에 투신하겠다며 임시정부를 찾아왔으나, 아이런리 42호에 머무르면서 김원봉의 조선민족혁명당(의열단의 후신)에 들어가 상하이 특구의 행동대와 선전대의 일원으로 암약했다. 이곳에서 김학철이 연상의 여인 송일엽과 사랑하고 이별했던 이야기가 영화처럼 펼쳐졌다.

김학철은 1916년 11월 4일 함경도 원산에서 출생했다. 중학교는 서울에서 유학했다. 보성고보에 재학 중이던 1935년 독립운동에 투신하겠다는 각오로 학비를 들고 교복차림 그대로 서울을 떠났다. 상하이로 향한 것이다. 세상 물정 모르는 햇병아리로 몇 가지 황당한 일을 겪기는 했지만, 압록강을 건너 선양(瀋陽)과 친황다오(秦皇島)·산하이관(山海關)을 거쳐 무사히 상하이역에 도착했다. 중국어를 한마디도 못했던 그는 인력거꾼이 데려다 준 동양관이라는 일본여관에 투숙했다. 학생복차림 탓에 인력거꾼이 일본인으로 오인했던 것이다. 하루 숙박비가 쌀 반 가마니나 되는 비싼 곳에서 하루를 자고는 다음날 부리나케 훙커우(虹口)의 싸구려 중국여관으로 옮겨 갔다.

중국여관으로 숙소를 옮기고는 허기를 달래기 위해 식당을 찾아 나섰다. 운 좋게 걸어서 10분 만에 ‘조선요리 경성(京城)식당’이라는 간판을 발견했다. 실내는 서양식이었다. 그가 허겁지겁 식사를 하는데 치파오 위에 스프링코트를 걸치고 핸드백을 든 30대 후반의 미인이 식당으로 들어섰다.

이 여인은 김혜숙이었다. 당시 서울로 돌아가 독립운동을 펼치다 일본 경찰에 잡혀 투옥돼 있던 정태희(1898~1952, 건국훈장 국민장 추서)의 부인이다. 김혜숙은 김원봉의 조선민족혁명당(본부는 난징)이 상하이에 둔 촉수 중 한 사람이었다. 주인과 잠시 이야기를 나눈 김혜숙은 다짜고짜 김학철의 테이블로 가서 맞은편에 앉았다. 어수룩한 김학철은 자기 집에 빈 방이 있다는 김혜숙의 말에 그날로 숙소를 옮겼다. 2층 집이었는데 그게 바로 아이런리 42호다. 60여 가구가 함께 사는 상하이식 연립주택 가운데 하나다.

김혜숙은 김학철에게 2층 가운데 방을 내주었다. 한쪽은 김혜숙의 방이었고, 다른 한쪽은 김혜숙의 이종사촌동생인 송일엽의 방이었다. 송일엽은 공동조계에 있는 메트로폴리탄(大都會舞廳)이라는 클럽의 ‘택시 댄서’, 손님들의 사교춤 파트너가 되어주는 직업 댄서였다. 자정이 지나야 귀가하고 아침에도 열 시는 넘어야 기동하는 터여서 처음에는 두 사람이 제대로 마주치지도 못했다. 아무튼 상하이에 도착한 지 하루 만에 김학철은 독립운동 조직의 시야에 들었고 안전한 숙소까지 잡았으니 그에게는 나름 행운이었다.

김혜숙의 집에 방을 얻어 산 지 며칠이 지나자 김혜숙은 김학철에게 시내 구경을 시켜주겠다고 했다. 김학철은 윤봉길 의사가 폭탄을 투척한 훙커우(虹口)공원이 어딘지 물었다. 하루 종일 함께 구경을 다닌 다음날 김학철은 자신이 임시정부를 찾아왔다고 털어놨다. 그러나 김혜숙은 실망스러운 답을 했다.

“그 하늘같이 바라고 온 임시정부가 지금은 상하이에 없다고요. 지난번 그 폭탄사건(윤봉길의 훙커우 투탄 의거)으로 이 조계에서 배겨나지 못해 풍비박산했거든요. 사실 임시정부는 상징적 존재에 불과했죠.”

김학철은 크게 실망했다. 그러나 상하이에서 활동하려면 중국어와 영어를 먼저 공부하라는 김혜숙의 말에 따라 중국어와 영어를 공부하기 시작했다. 중국어 교사는 김혜숙이 소개한 심성운(본명 심상휘)이라는 조선인이었다. 김학철이 당시에는 몰랐지만 심성운은 조선민족혁명당 상하이특구 선전부장이었다. 김학철에 관한 김혜숙의 보고를 듣고 김학철을 포섭하기 위한 1단계 조치였던 셈이다. 영어는 김혜숙과 송일엽으로부터 배웠다.

상하이에 도착한 지 두어 달이 되자 순진한 김학철에게 생각지도 못했던 남녀상열지사가 벌어졌다. 김학철의 회고를 인용하면 이렇다.

“어느 날 밤 곤히 자다 어쩐지 가슴이 답답한 느낌이 있어서 돌아누우려 했더니 침대가 유별나게 비좁은 것 같았다. 영문을 몰라 잠이 가득 실린 눈을 떠보니, 아~ 이게 웬일이냐! 술내· 분내·향수내 따위를 뒤섞어 풍기는 여자 하나가 내 싱글베드의 거의 절반을 딱 차지하고 있잖은가. 내가 깜짝 놀라 일어나려 하니 그 여자는 한 번 킥 웃고는 ‘푸울(Fool)!’ 하고 내 목에 팔을 감는 것이었다. 메트로폴리스에서 자정이 퍽 지나서야 돌아온 송일엽이었다.”

긴장과 불안 속에서 살아야 하는 망국노 내지 망명객 신세의 남녀가 가까이 살면서 자연스레 사랑의 터치가 이루어진 것이다. 통속적인 듯하지만, 음미할수록 외국의 어느 골목에서 만난 두 남녀의 애틋한 연분에서는 신비한 아름다움이 느껴진다.

이런 곡절을 거쳐 김학철의 진심을 확인한 조선민족혁명당은 그를 1936년 난징으로 데려가 입당시켰다. 입당한 김학철은 상하이특구의 행동대에 배치돼 돌아왔다. 행동대는 조선인·일본인 등을 대상으로 목표 인물을 처단하거나 금품을 강탈해 활동자금을 조달하는 등 여러 비밀작전을 펼쳤다. 행동대장은 노철룡(일명 최성장, 한국전쟁 당시 북한군 방호산부대 참모장, 전후 군사정변 획책혐의로 총살됨)이었다.

혁명의 길에도 사랑은 있다


▎김학철은 후자좡(胡家庄) 전투에서 허벅지에 총상을 당한 채 포로가 돼 일본 나가사키 감옥으로 이송됐다. 이 과정에서 총상을 제대로 치료받지 못해 결국 한쪽 다리를 절단 해야 했다.
송일엽은 그날 이후 김학철의 연인이자 동지가 됐다. 그녀는 클럽에서 일본인을 상대하면서 얻은 정보를 민족혁명당에 전해주었다. 송일엽의 오빠는, 영국 상하이해관에서 마약거래상에게 받은 뒷돈으로 치부한 어느 조선인을 턴 주인공이다. 그러나 다른 사건에서 일본 경찰과 총격전 끝에 희생됐다.

1937년 7월 일본은 노구교사건을 빌미로 중일전쟁을 터뜨렸다. 전쟁이 터지자 김학철은 상하이행동대에서 선전대로 전보됐다. 중국의 라디오 방송이 매일 밤 10분씩을 조선민족혁명당에 할애했고, 김학철은 ‘동포들에게 고함’이라는 생방송 프로그램에 매일 출연했다. 송일엽도 몇 차례 함께 출연했다.

그러던 1937년 8월 13일 난징의 본부에서 소집령이 떨어졌고, 김학철은 상하이를 떠나야 했다. 김원봉의 조선민족혁명당은 정규 군대를 갖춰 항일독립전쟁을 벌이기 위해 김학철을 포함한 젊은 대원들을 난징으로 소집했던 것이다. 조선민족혁명당의 계획은 국민당정부의 협조를 받아 장제스 측의 군관학교에서 군관 교육을 시켜 정식 군대를 창설한다는 것이었다. 김학철은 군관학교를 졸업하고 1938년 10월 10일 우한(武漢)에서 조선의용대가 창설될 때 창설 멤버가 됐다.

조선의용대 안에는 장제스의 항일 의지가 희박하고 반공에만 집착하는 것에 실망한 대원들이 많았다. 결국 조선의용대의 주력은 타이항산(太行山)의 팔로군(중국공산당 군대)과 합류하기 위해 1941년 초 황하(黃河)를 건너 북상했다. 김학철도 함께 북상했다. 그러나 1941년 일본군과의 후자좡(胡家庄, 이 부분은 연재 7회에서 자세하게 소개할 예정이다) 전투에서 허벅지에 총상을 입은 채 포로가 돼 일본 나가사키 감옥으로 이송됐다. 이 과정에서 총상을 제대로 치료받지 못해 결국 한쪽 다리를 절단해야 했다.

해방 후 그는 외다리로 귀국했다. 서울에서 좌우 갈등이 격해지면서 1946년 월북했다. 6·25전쟁이 터지자 신체가 온전치 못했던 김학철은 중국으로 건너갔다. 베이징(北京)에서는 중국 측이 배려해 이화원(頤和園) 안에 있는 소와전(邵窩殿)이라는 자그마한 전각에서 2년간 살기도 했다. 그 이후 옌볜(延邊)에 정착해 작가로 살았다.

그러나 중국에서의 삶은 또 다른 고난의 협곡이었다. 1957년 중국의 소위 반우파투쟁에 걸려들어 강제노역에 처해지면서 극심한 고통을 겪었다. 이때 김학철은 마오쩌둥(毛澤東)을 신랄하게 비판하는 장편소설 <20세기의 신화>를 썼다. 그러다 1967년 문화혁명의 광풍 속에서 이 미발표 소설이 발각됐다. 그는 반혁명작가로 낙인 찍혀 1977년까지 10년 동안 지옥 같은 감옥살이를 했다. 마오쩌둥이 세상을 뜨고 난 뒤인 1980년에야 복권됐고, 그 이후 계속 작품활동을 하다 2001년 세상을 떠났다.

김학철에게는 조선의용대원 가운데 가장 오래 살아남아 당시를 증언했기 때문에 ‘최후의 분대장’이라는 별칭이 남았다. 그의 일생은 우리가 질곡 속에서 일부러 가리고, 모른 체 지우고, 짐짓 외면했던 치열한 현대사의 한 단면이다.

김학철이 애송이 시절 조선의 독립혁명에 몸을 던져 한편으로는 달콤한 사랑을 맛보며 머물렀던 곳이 바로 아이런리 42호다. 1937년 8월 김학철이 민족혁명당의 소집령을 받고 상하이를 떠나던 날, 연상의 연인 송일엽이 “못 가요, 못 가요. 못 간다니까!” 하고 외치면서 “눈물을 뿌리며 몸부림치던” 곳이기도 하다. 김학철은 “상하이를 떠나면서 미쳐날 지경으로 격동해 헝가리의 시인 페데피의 시 ‘사랑이여’를 읊조리고 읊조리고 또 읊조렸다”고 회상했다.

“그대를 위해서라면, 내 목숨마저 바치리/ 하지만 사랑이여/ 자유를 위해서라면, 내 그대마저 바치리.”

상하이에서 시간 여유가 있거든 아이런리 42호를 찾아보시라. 아니, 일부러라도 한 번쯤 찾아볼 일이다. 지금도 아이런리라는 작은 표지가 문루 상단에 남아 있다. 그 안쪽으로 들어가보라. 어느 집이 42호인지 지금은 확인할 길이 없으나 분명히 어느 독립투사의 애틋한 사랑과 가슴 저린 이별이 그곳에 깃들여 있을 터이다.

와이탄 저격사건의 추억


▎상하이의 상징이기도 한 와이탄 북단의 황푸공원. 이곳에서 의열단의 김익상·오성륜·이종암 등 세 요원이 일본 육군대장 다나카 기이치(田中義一)를 암살하려 했으나 실패했다.
상하이에는 우리가 일일이 확인할 수 없을 만큼 독립운동의 역사가 켜켜이 쌓여 있다. 1910년부터 일본이 중일전쟁을 일으켜 상하이를 점령한 1937년까지 수많은 조선인 독립운동가가 상하이를 오갔으니 얼마나 많은 피와 땀과 사연이 깃들여 있겠는가? 그 가운데 하나가 와이탄(外灘)이다. 상하이를 찾는 외국인은 물론 타지의 중국인 역시 상하이에 오면 꼭 찾는 곳이다.

강변 도로를 따라 근대 서양식 건축이 고풍스러움을 더하고, 강 건너 푸둥(浦東) 지역에는 방송관제탑인 둥팡밍주(東方明珠)와 현대식 고층 빌딩이 즐비하다. 와이탄은 야경이 특히 아름답다. 의열단(단장 김원봉)의 김익상·오성륜·이종암 등 세 요원이 일본 육군대장 다나카 기이치(田中義一)를 암살하려 했던 곳도 와이탄이다.

상하이임시정부가 내분으로 몸살을 앓을 때 김원봉은 임시정부의 외교노선을 비판하면서 의열투쟁을, 그야말로 맹렬하게 전개했다. 김원봉의 의열단은 1922년 다나카 일본 육군 대장을 암살 목표로 잡았다. 다나카는 일본제국의 영토 확장이라는 국가전략의 지도적 이론가였으며, ‘다나카 상주문’이라는 유명한 글을 쓴 장본인이다.

의열단은 다나카가 필리핀에서 도쿄(東京)로 귀국하는 길에 상하이에 들른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이들은 다나카가 상하이 황포탄 부두에서 하선하는 순간을 노렸다. 오성륜이 권총으로 저격하고, 김익상은 폭탄을 던지기로 했다. 최후에는 이종암이 칼로 처단하기로 했다.

김익상은 독립운동에 투신하기 위해 베이징으로 건너갔다 심산 김창숙의 소개로 김원봉을 알게 됐고, 그의 시국담에 감동해 의열단에 합류했다. 그는 1921년 9월 12일 전기수리공으로 가장해 경성의 조선총독부 청사에 들어가 폭탄을 던져 일제를 깜짝 놀라게 했다. 아쉽게도 그가 폭탄을 던진 방은 총독 집무실이 아니라 비서실이었다. 그는 폭탄을 투척한 뒤 총독부 안팎이 소란한 틈을 타 유유히 빠져 나와 베이징으로 귀환했다. 신출귀몰이었다.

와이탄 거사 당일 그곳, 오성륜이 먼저 권총을 쏘았으나 불행히 다나카 뒤에 있던 영국 여성이 총을 맞고 절명했다. 뒤이어 김익상이 폭탄을 던졌으나 한 선원이 발로 차 강물에 빠뜨리는 바람에 불발되고 말았다. 다나카는 곧바로 피신했고, 김익상은 현장에서 체포됐다. 김익상은 일본으로 끌려가 재판을 받고 사형을 선고받았다. 감형을 거쳐 20년을 복역했는데, 출소 후 얼마 되지 않아 일본인 경찰과 함께 나간 뒤 실종됐다고 하니 그들의 손에 죽은 듯하다. 1963년 건국훈장 대통령장이 추서됐다.

오성륜은 도주하면서 경찰 몇 명에게 부상을 입혔다. 자동차를 탈취해 도주했으나 영국 경찰에 붙잡혔다. 영국 경찰은 오성륜의 거주지가 프랑스조계라는 이유로 프랑스에 넘겼고, 프랑스는 다시 일본 영사에게 넘겼다. 오성륜은 일본 영사관 3층 감옥에 수감됐다. 감옥에는 일본인 다섯 명이 수감돼 있었다. 이들 일본인 수감자는 조선인 오성륜을 동정했고, 오성륜은 그들의 도움을 받아 극적으로 탈출했다.

<아리랑> 김산의 멘토, 오성륜


▎상하이의 유명 관광지인 난징둥루 한가운데 스제광창(世纪广场) 서북쪽 모서리의 진장즈싱(锦江之星) 호텔 체인 건물. 고려공산당이 출발한 곳으로, 당시 모습 그대로 서 있다.
오성륜은 한 미국인 집에 숨어 있다 광둥(廣東)을 거쳐 독일 베를린으로 갔다. 이곳에서 독일 아가씨와 연애하면서 한동안 그녀의 집에서 살기도 했다. 이후 오성륜은 독일의 소련 영사를 찾아갔고, 소련은 그를 모스크바로 보내주었다. 모스크바 동양대학에서 공부를 마친 오성륜은 1926년 블라디보스토크를 거쳐 다시 상하이로 돌아왔다. 4년 만에 다시 그 자리로 돌아온 것이다. 마치 한 편의 스파이 영화를 보는 것 같다. 그런 시대였다.

이들이 다나카를 암살하려 했던 곳은 와이탄 북단에 있는 황푸(黃浦)공원이다. 황푸강 건너로는 둥팡밍주 탑이 마주 보인다. 상하이시 인민영웅기념탑과 황푸공원 수문참(水文站)이 있다. 아마도 그 사이 어디쯤 아닐까? 독립운동가의 암살과 밀정의 암약이 툭툭 튕겨 나오던 시대의 상하이였다.

오성륜은 김산의 <아리랑>에서 김산의 멘토로 등장한다. 김산이 열여섯 살이던 1921년, 서른 살의 오성륜을 상하이에서 처음 만났다. 1926년 광저우에서는 한 조가 되어 활동했다. 김산은 공개적인 지도자였고, 오성륜은 그의 뒤에 있는 비밀 지도자였다. 오성륜은 1927년 12월 중국공산당이 일으킨 광저우 봉기에 김산과 함께 참여했다.

그러나 광저우 봉기는 3일천하로 끝나고 중국국민당 군벌에 쫓겨 죽을 고비를 수없이 넘기다 김산과 헤어졌다. 생사를 모르고 서로 죽은 것으로 생각하던 김산과 오성륜은 1928년 10월 상하이에서 우연히 다시 만난다. 두 사람이 재회한 곳도 바로 이곳 와이탄이었다. 김산은 오성륜과 재회 장면을 다음과 같이 구술했다.

“어느 날 나는 황푸강을 쳐다보면서 황푸탄을 따라 무작정 걷고 있었다. 그러다 문득 고개를 들어보니 환각을 하고 있는 것처럼 하나의 얼굴이 나를 향해 다가오는 것이 아닌가. 이럴 수가?(…) 익히 알고 있는 뼈만 앙상한 손으로 내 손을 덥석 잡는 것이었다. 그러자 두 사람의 입에서 동시에 놀란 목소리가 튀어나왔다. ‘네가 죽은 줄 알고 있었어!’ 우리는 마치 한 몸인 듯 얼마 동안은 못 박힌 듯 꼼짝도 않고 서서 아무 말도 하지 못하였다. 이윽고 그의 얼굴에 눈물이 흘러내렸다. 이때 처음으로 나는 오성륜이 우는 표시를 겉으로 드러내는 것을 보았던 것이다!”

이후 오성륜은 무장투쟁을 위해 만주로 갔다. 1930년 중국 공산당 만주성위원회 선전부장이 되었고, 1936년 항일민족 통일전선체인 조국광복회 창립에 주도적 역할을 했다. 1938년 만주지역의 동북인민혁명군과 이외의 항일무장단체가 연합해 창립한 항일무장부대인 동북항일연군 제1로군 군수처장이 되었다. 이 시기에 김일성의 상관이기도 했다. 그러나 1941년 일제에 검거된 이후 변절해 일본 경찰에 협력하다 일제가 패망하자 팔로군에 체포됐다.

와이탄에서 멀지 않은 난징둥루(南京东路)의 보행가 역시 필수 관광 코스의 하나다. 널찍한 보행가를 걸으면서 즐기는 화려한 야경은 중국에 중국이 아닌 곳이 있다는 환상을 심어줄 듯하다. 100년씩은 됐음직한 유럽식 건축에는 라오상하이(老上海)의 정취가 가득하고, 좌우로 즐비한 현대 건축물들은 세련된 의상이나 첨단 IT 기기들과 함께 21세기의 상하이를 자랑한다.

난징둥루에서도 독립운동의 중요한 사적지 하나를 찾아볼 수 있다. 난징둥루의 보행가는 동서로 약 1㎞다. 그 중간에 스제광창(世纪广场)이 있고, 이 광장의 서북방향으로 셴스다루(先施大楼)라는 바로크식 외관을 한 건물이 있다. 상하이를 방문했던 여행객이라면 몇 번이고 스쳐 지났을 곳이다. 이 건물 1층에는 상하이 패션스토어(上海时装商店)가 있고, 2층 이상으로는 진장즈싱(锦江之星)이라는 유명 체인 호텔이 들어서 있다. 주소는 난징둥루 670호. 이 건물은 해방 이전에 상하이 4대 기업 가운데 하나였던 셴스공사가 1917년 백화점과 호텔 등을 개업한 곳이다. 진장즈싱 호텔 입구가 1층의 중간에 있는데, 그 입구에 이 건물이 셴스공사가 있던 곳이라는 동판 표지가 부착돼 있다.

난징둥루(南京东路)에 남은 고려공산당의 자취


▎1, 2. 김학철은 조선의용대의 ‘마지막 분대장’으로 알려진 독립투사이자 반혁명 작가다. 그의 항일문학비와 비문. / 3. 국립현충원 무후선열제단의 김익상 위패
바로 이곳에서 1922년 고려공산당이 창당됐다. 5월 20일부터 23일까지 국내 대표 8인을 비롯해 중국과 러시아에서 온 20여 명이 모여 회의를 했다. 이동휘 위원장을 수위로 13인의 중앙위원을 선임했다.

박헌영도 상하이와 인연이 있다. 박헌영은 1920년 11월 상하이로 왔다. 1921년 3월 고려공산당 산하의 고려공산청년회를 조직했다. 고려공청은 공산당원 중에서도 활동력이 왕성한 청년들의 조직이었다. 박헌영은 1922년 3월 고려공청 중앙총국의 책임비서가 되었다. 그는 국내로 활동기반을 옮기기 위해 입국했다가 체포돼 2년 가까이 옥고를 치렀다. 훗날 그는 국내에서 조선공산당을 창건했고, 일본 제국주의의 극심한 탄압 속에서 검거와 투옥, 출옥과 탈출, 재건과 검거라는 고난의 악순환을 겪어야 했다. ‘고문강자’라고 불릴 정도였다. 명예로운 별칭이지만, 그만큼 극심한 고문을 온몸으로 당해야 했다. 심지어 정신이 이상해지면서 자기 똥을 먹기까지 했다고 한다.

해방 직전 마지막 몇 년 동안 박헌영은 완전히 잠행하며 체포되지 않은 조직원들과 연락하고 있었다. 그는 해방의 순간까지 살아남았다. 해방된 서울에는 “지하에 숨어 있는 박헌영 동지여! 어서 나타나 있는 곳을 알리라! 그리하여 우리의 나아갈 길을 지도하라!”는 포스터가 나붙을 정도로 신망 높은 독립운동가이자 공산주의자였다.

돌이켜보면, 어릴 적 배운 독립운동가는 김좌진·유관순·김구가 전부였다. 그 외에는 모든 것이 희미했다. 특히 공산주의 계열의 독립운동이나 공산당이라는 말은 끼어들 수 없는 금기였다. 그러나 이것은 분단과 이념 대결을 정치적으로 악용한 남과 북의 권력자들이 합작해 만들어낸 허상이었다.

3·1운동에서 확인되듯 독립의 열망은 황제의 나라 제국(帝國)을 되살리는 것이 아니라, 백성의 나라 민국(民國)을 세우자는 것이었다. 이때 독립된 나라를 어떤 시스템으로 세울 것인가에 대해 다양한 주장이 있었다. 사람에 따라 자본주의나 아나키즘 또는 사회주의나 공산주의를 지향했다. 어떤 사회를 지향하든 그들의 공동 목표는 민족의 독립과 국권의 회복이었다. 그런 면에서 사회주의나 공산주의 계열의 독립운동이라고 해서 가리거나 깎아 내릴 이유가 없다.

1920년대 중반 이후 해방까지 조선의 독립운동은, 국내와 만주와 타이항산 등에서 사회주의와 공산주의자의 독립운동이 다수를 점한다. 민족주의 진영에서는 중국에서 김구가 고집스럽게 임시정부라는 간판 아래 활동을 지속했을 뿐이었다. 국내에서도 끝까지 버틴 독립운동가는 조선공산당을 비롯한 사회주의·공산주의 계열이었다. 반면 민족주의 진영의 운동가는 대부분 친일로 변절하고 말았다.

무장투쟁에서도 임시정부의 광복군은 아쉽게도 일본군을 향해 단 한발의 총도 발사하지 못했다. 실제로 일본군을 향해 총을 쏜 것은 타이항산의 조선의용대 혹은 조선의용군과 만주의 동북항일연군이었다. 이것이 실제로 전개된 역사다. 조선 마지막 임금 순종의 장례식에 맞춰 일어난 1926년의 6·10만세운동도 고려공산청년회 책임비서인 권오설이 중심이 돼 산발적 항일투쟁을 한데 모아 투쟁지도부를 결성해 주도한 것이다.

1946년 4월 박헌영은 ‘조선 인민에게 고함’이라는 선언에서 이렇게 썼다.

실제로 전개된 역사는 다르다


▎1920년대 중반 이후 해방까지 조선의 독립 운동은 사회주의와 공산주의자의 독립운동이 다수를 점한다. 1926년 신의주공산당사건으로 일경에 체포된 박헌영(가운데). 오른쪽은 윤덕병이다.
“우리는 공산주의자라는 명목으로 국내에서만 수천의 생명을 희생하였고 (누계로 하면) 6만 년이 넘는 세월을 감옥에서 살았다. 우리가 단독으로 일본 제국주의자의 집중적 공격을 받은 것은 당 발전에 커다란 지장이었으나, 동시에 조선 민족 부르주아의 커다란 수치다. 그들도 당연히 우리와 공동전선으로 일본 제국주의의 지배를 반항하여 투쟁해야 할 것이었다. 그러나 조선 해방사에서 그런 영웅적인 호화로운 기록은 없다. 우리는 새 역사의 첫 페이지에 그 역사적 사명에 충실하였다는 것을 금자(金字)로 기록할 권리가 있다는 것이다.”

이 글은 물론 조선공산당의 정치적 선언이니 그에 따른 수사와 과장이 있다. 그러나 이 글의 주체인 조선공산당을 사회주의자나 공산주의자라는 말로 치환하면 독립운동의 실상에 훨씬 근접하게 된다.

분단 이후 수립된 대한민국 정부가 실정법을 기반으로 부여하는 독립유공자의 영예를, 김일성 정권 수립과 6·25라는 민족적 대비극에 책임이 있는 인물들에게 주지 않는 것은 수긍할 수 있다. 그러나 사회주의·공산주의 사상을 가졌다는 이유만으로 독립운동사에서 그들을 삭제하거나 저평가하는 것은 온당치 않은 일이다. 우리에게는 독립운동의 온전한 역사를 정리해 후손에게 전할 의무가 있다. 상하이 난징둥루 보행가에서 다시 한 번 되새겨본다.

같은 맥락에서 1920년대 중반 민족주의와 사회주의를 포함한 많은 조선인이 독립의 희망을 품고 모여들었던 광저우의 황푸군관학교를 찾아간다. 그곳에서는 <아리랑>의 주인공 김산의 생애를 더듬어볼 수 있을 것이다.

윤태옥 - 중국 인문 다큐멘터리 전문 제작자. 2006년 <다큐멘터리 인문기행 중국(7부작)>(MBC플러스)을 기획, 제작하면서부터 지금까지 매년 6개월 정도 중국을 여행하면서 다큐멘터리를 기획하거나 중국 문화와 역사에 관한 글을 쓴다. 저서 <개혁군주 조조 난세의 능신 제갈량> <중국식객> <중국민가기행> 등이 있다.

201704호 (2017.03.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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