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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동 선비정신의 미학(13)] 죽음 앞 이순신 목숨을 구한 약포(藥圃) 정탁 

“적이 가장 무서워하는 장수를 죽여서야” 

글 송의호 기자 yeeho@joongang.co.kr / 사진 공정식 프리랜서
‘논구이순신차’라는 상소문 올려 선조의 마음 돌려… 류성룡과 함께 퇴계 이황 아래서 가르침받아

▎1980년 경북 예천군 예천읍 고평리 고향에 세워진 약포 정탁을 기리는 정충사(靖忠祠). 약포의 15대 종손인 정경수 씨가 사당의 내력을 설명하고 있다.
1597년. 420년 전 그해도 올해처럼 정유년이었다. 임진왜란 5년 뒤 다시 일본이 조선으로 쳐들어온 정유재란이 발발한 해다. 정유년 2월 26일 삼도수군통제사 충무공 이순신은 파직된 뒤 한산도에서 한양으로 압송된다. 3월 4일 하옥돼 국문(鞫問, 죄수를 신문하는 것)이 시작됐다. 출정하라는 조정의 명령을 어긴 죄였다. 정유재란이 일어나기 직전이다.


임진왜란은 1592년 4월 왜군이 부산포로 쳐들어오면서 시작됐다. 개전 2개월도 안 돼 전 국토는 초토화되고 있었다. 파죽지세였다. 7월 평양까지 북상한 고니시 유키나가(小西行長)는 당시 의주로 피난한 선조에게 “일본 수군 10여 만 명이 서해를 통해 북상할 것”이라고 호언장담한 뒤 “그러면 국왕은 또 어디로 가실 거냐”고 조롱하는 서신을 보낸다.

하늘은 조선을 버리지 않았다. 이순신이 있었기 때문이다. 충무공이 한산대첩을 비롯해 해전에서 잇따라 승리하면서 일본 수군의 서해 진입은 좌절됐다. 충무공의 활약으로 전라도가 지켜지고 서해가 확보되면서 전세는 반전되고 있었다. 왜군의 서해 수로가 막히면서 랴오둥(遼東)·텐진(天津) 등 명(明)나라 본토도 안전해졌다.

조선을 도우러 참전한 명나라는 그때쯤 생각이 달라졌다. 명은 전란 이듬해부터 일본과 화의 협상을 시도한다. 명나라 군대는 왜군과 결전을 피했다. 선조가 믿을 건 이제 우리 수군뿐이었다.

세월이 흘러 정유재란 발발 직전 조정은 삼도수군통제사 충무공에게 가토 기요마사(加藤淸正)를 공격하라는 명령을 내린다. 그러나 충무공은 출정하지 않았다. 당쟁과 모함 속에서 명령 불복종이 파직으로 이어진 것이다.

당시 출정 명령은 첩보전의 결과였다. 전란이 장기화되면서 왜는 제해권을 장악한 충무공을 제거하는 계략을 마련한다. 첩자를 내세웠다. 쓰시마 출신으로 부산을 왕래하며 조선어에 능통한 요시라(要時羅)다. 왜군과 조선군 사이를 오가는 이중간첩이었다. 왜의 지령을 받은 요시라는 경상우병사 김응서에게 1급 정보를 흘린다. 왜장 가토가 모월 모일 군사를 이끌고 바다를 건너 쳐들어올 것이므로 조선의 수군이 기다리고 있다가 습격하라는 내용이다. 김응서는 조정에 바로 보고한다. 출정 명령이 내려진 배경이다.

병석에서 충무공의 구명을 호소


▎서인의 영수 영의정 윤두수는 동인인 약포가 고향으로 내려가자 한강까지 나와 작별을 아쉬워하는 시를 지었다. 읍호정에 시판이 걸려 있다.
하지만 이순신은 왜적의 계략으로 판단하고 출정하지 않았다. 어떤 기록은 이순신이 출정했으나 이미 가토가 바다를 건너 싸우지 못했다고 돼 있다. 그렇다고 해도 전쟁 중인 현지 사령관의 압송은 백성의 분노를 샀다. 왜는 동인·서인의 극렬한 당쟁 구도를 꿰뚫어본 것이다.

당시 조선의 국문은 혹독했다. 이순신은 한 차례 국문을 받고 이미 반죽음 상태가 돼 있었다. 선조는 단호했다.

“이순신이 조정을 기망한 것은 임금을 무시한 죄고, 적을 놓아 주고 공격하지 않은 것은 나라를 저버린 죄며, 심지어 남의 공을 가로채고 모함까지 한 것 또한 엄중한 죄다. 이렇게 죄상이 허다하므로 용서할 수 없으니 법률로 다스려 죽여야 함이 마땅하다. 신하로서 임금을 속인 자는 반드시 죽이고 용서하지 않는다는 걸 보여 줘야 할 것이다.”

선조가 우부승지 김홍미에게 내린 전교(傳敎, 임금이 내린 명령)다. 이순신은 잘못을 인정하지 않았다. 누구도 이순신을 변호하지 못했다. 오히려 모두 처벌을 주장하는 분위기였다. 다시 국문을 앞두고 이순신의 목숨은 말 그대로 바람 앞의 등불이었다.

그때였다. 72세 노대신이 상소문을 올렸다. 우의정을 지낸 지중추부사 약포(藥圃) 정탁(鄭琢, 1526∼1605)이었다. 죽음을 무릅쓰고서다. 약포는 당시 지독한 감기에 걸려 직접 아뢰는 대신 병석에서 호소했다. 충무공의 목숨을 구원해 달라고 청하는 유명한 ‘논구이순신차(論救李舜臣箚)’ 상소문이다.

“(…)이순신은 장수의 재질을 지녔으며 수륙전에 뛰어난 재능을 겸비했습니다. 이러한 인물은 쉽게 얻을 수 없을뿐더러 백성들이 의지하는 바가 무척 크고 적이 매우 무서워하는 사람입니다. 만일 죄명이 엄중하고 조금도 용서할 구석이 없다고 판단해 공과 죄를 서로 비교해 보지 않고 앞으로 더 큰 공을 세울 것인지도 생각하지 않고 또 그간의 사정을 규명하지도 않고 끝내 큰 벌을 내린다면 공 있는 자와 능력 있는 자들은 앞으로 나라를 위해 더 이상 애를 쓰지 않을 것입니다.”

약포의 상소에 이어 류성룡·이원익 등도 이순신의 처벌을 반대하고 나섰다. 선조의 반응에 모두 촉각이 곤두섰다. 놀라운 일이 벌어졌다. 상소문은 선조의 마음을 돌려놓았다. 충무공은 죽음 직전에서 백의종군의 명령을 받고 가까스로 풀려난다. 감옥에서 고초를 겪은 지 28일 만이다. 목숨을 건 신하의 바른 말이 장수를 살리고 이순신은 다시 명량대첩으로 나라를 구했다. 직언(直言)이 나라를 구한 것이다.

3월 1일 약포 선생의 흔적을 찾아나섰다. 약포의 15대 종손 정경수(69) 씨와 통화해 종택이 어디냐고 물었다. 주소를 받았다. 내비게이션은 경북 예천군 예천읍 고평리의 마을 언덕배기로 안내했다. 종손 정씨는 들어가자며 2층 슬라브 양옥으로 기자를 안내했다.

약포는 1558년(명종 13) 문과에 급제해 이·호·예·병·형·공 6조 중 호조를 제외한 5조의 판서와 우의정·좌의정을 지냈다. 자그마치 46년간 관직에 있으며 요직을 두루 거쳤다. 드문 경우다. 이런 위세라면 대개는 종택도 번듯하게 남아 있다. 그러나 솟을대문은커녕 기와 한옥 한 채 전하는 게 없었다. 한때 건설업을 했다는 종손은 서울에 살면서 고향에 집한 채가 있어 한 번씩 내려온다고 했다. 예천 고평리는 약포가 1600년 75세에 낙향한 뒤 거처했던 곳이다. 80세에 별세한 곳도 이곳이다. 약포의 둘째 아들이 살았었다.

고향에는 종택조차 남아 있지 않아


▎1. 정충사 사당에 모셔져 있는 약포 정탁의 초상화. 윗부분에 영조의 찬시가 적혀 있다. / 2. 내성천이 한눈에 들어오는 읍호정. 약포가 76세에 자연을 벗삼기 위해 손수 지은 곳이다.
종손 정씨는 “종택을 건립하는 것도 생각해봤지만 형편상 엄두를 낼 수 없었다”고 아쉬워했다. 약포의 12대손 정상열(84) 씨는 “종택을 보지는 못했지만 50년 전까지 있었다는 말은 들었다”고 했다. 그러나 관련 기록이나 사진은 없었다.

약포의 구명으로 백의종군하던 이순신에게 선조는 다시 삼도수군통제사를 맡긴다. 전세는 악화일로로 치달았다. 조선 수군에게 남은 배는 13척이 전부였다. 한 달 뒤 이순신은 ‘필사즉생 필생즉사(必死則生必生則死)’의 각오로 명량에서 133척의 왜적을 맞아 세계 해전사에 기록된 대승을 거둔다. 후세 사람들은 이를 두고 “이순신을 발탁한 사람은 류성룡이고, 위기에 빠진 이순신을 구한 사람은 정탁”이라고 말했다. 종손 정씨는 “이런 인연으로 충무공 후손들은 얼마 전까지 약포 할배 제사 때 매년 참사하고 호칭도 ‘약포 할아버지’였다”고 말했다.

약포가 구한 인물은 또 있었다. 전라도 담양에서 의병을 일으킨 뒤 거제도 왜적을 공격할 때 선봉장으로 활약한 김덕령이다. 그는 진주에서 장기전에 대비하던 중 명과 왜가 화의를 추진하자 울화가 치밀었다. 한번은 의병장 김덕령이 도체찰사 윤근수의 노비를 벌하다가 죽는 일이 생겼다. 김덕령은 투옥됐다. 약포가 이야기를 듣고 구명에 나선다. 그는 “국가가 전란을 당했을 때는 한 명의 인재라도 아껴야 한다”고 변호했다. 다행히 풀려났다. 김덕령은 이후 이몽학 역모에 휘말려 다시 체포된다. 약포는 결백을 믿고 이번에도 억울함을 호소했으나 김덕령은 고문을 견디지 못하고 끝내 세상을 떠났다.

약포는 이처럼 억울한 사람을 구하는 일이라면 직언을 서슴지 않았다. 한명기(55) 명지대 사학과 교수는 “약포는 언제나 남을 위하고 살리는 약(藥)과 같은 존재였다”고 평가했다. 시대를 근심하고 나라를 염려하는 데는 강직하고 대범했다. 지금의 정치인이 배울 점이다.

그러면서도 원만했다. 약포 전기를 쓴 예천군청 박근노(51) 씨는 “약포는 동인이었지만 당시 서인의 영수 영의정 윤두수와도 친분이 각별했다”고 강조했다. 약포가 벼슬을 그만 둘 생각으로 휴가를 얻어 고향으로 내려오자 윤두수는 한강까지 직접 나와 작별을 아쉬워하는 시를 지었다. 예천 읍호정(挹湖亭)에 그 시가 걸려 있다. 윤두수는 귀향 뒤에도 약포에게 서찰을 보낸다.

종손 정씨가 거처하는 집 뒤로는 약포의 우국(憂國)·충군(忠君) 정신을 기리는 정충사(靖忠祠)가 세워져 있다. 역사가 오래지 않다. 1980년 문중이 땅을 희사하자 나라에서 영정각과 유물각·장판각·관리사를 지었다. 한때는 종손의 어머니가 관리사에 거처했다고 한다. 이곳에 있던 초상화(보물 487호)와 유고·유묵·교지(보물 494호), 목판 등은 2005년 안동 한국국학진흥원으로 모두 옮겨졌다. 지금은 사당에 초상화의 조선시대 모사본만 남아 있다.

나라 걱정과 충심에서 약포는 서애 류성룡과 떼놓을 수 없는 관계다. 나이는 약포가 서애보다 16년 연장(年長)이다. 약포가 태어난 곳은 외가인 예천 용문이지만 본가는 서애와 같은 안동이다. 약포는 17세에 퇴계 이황의 문하에 들어가 서애와 동문수학했다. 둘 다 퇴계의 제자가 된 것이다. 약포는 1558년, 서애는 1566년 각각 문과에 급제해 벼슬길로 나아갔다.

임진왜란이 발발하자 서애는 영의정으로 선조를 모시고 의주로 피난했다. 약포는 좌찬성으로 세자(광해군)를 모시고 강계로 향했다. 최악의 경우 선조가 명나라로 망명할 것에 대비해 조정을 둘로 나눈 것이다. 임금이 있는 곳은 ‘원조정(元朝廷)’, 세자가 있는 곳은 ‘분조(分朝)’라고 했다.

약포는 세자와 함께 종묘사직을 받들고 평안도·황해도·강원도 등지를 잠행하며 정세를 살폈다. 그러면서도 모병과 작전 지휘, 의병장 격려 등 국사를 처리한다. 그때의 기록은 <용사일기(龍蛇日記)>로 남아 있다. 서애·약포는 공교롭게도 이순신을 발탁하고 소생시키는 역할도 맡게 된다. 1598년 임진왜란이 끝난 뒤 서애는 북인으로부터 주화오국(主和誤國, 일본과 화해를 주도해 나라를 망쳤다)이란 탄핵을 받고 삭탈관직을 당한 뒤 낙향했다. 약포는 ‘우회(寓懷)’라는 시를 지어 서애를 위로한다. 1600년 서애의 사면 소식을 듣고 기뻐한 것도 약포였다.

남을 위하고 살리는 약(藥)과 같은 존재


▎약포가 임진왜란 중 광해군(세자)을 모시고 분조(分朝)로 활약할 때 남긴 난중일기인 <용사일기>. 약포는 공로를 인정받아 나중에 우의정에 오른다.
다른 점은 약포는 퇴계와 함께 남명 조식의 문하에도 출입했다. 36세에 진주교수(晉州敎授)로 전근한 게 계기였다. 남명과의 일화.

작별 자리에서 남명이 “집에 소 한 마리가 있는데 군이 끌고 가게”라고 말했다. 어리둥절했다. 그러자 남명이 웃으며 “군의 말(言)과 의기가 너무 민첩하고 날카로우니 날랜 말은 넘어지기 쉬운 지라 더디고 둔한 소를 준다는 것”이라고 했다. 그 말은 관직생활의 지침이 됐다고 한다. 약포는 영남학파의 양대 산맥을 사사하면서 안으로는 남명의 굳건한 심성을 들이고, 밖으로는 퇴계의 온화한 기상을 품는 인물이 됐다.

1599년(74세) 약포는 고향 예천으로 내려왔다. 약포는 고향에서 자연과 벗하며 일개 백성으로 돌아간다. 일찍이 퇴계 선생이 가르친 수양과 절제를 만년에 실천한 것이다. 선비의 삶이다.

고평동 동네에는 향약을 만들었다. <약포집> 연보에는 “신축년(1601년) 4월에 고평동 계약문이 완성되었다”고 적혀 있다. 약포는 여씨향약 가운데 시행할 만한 것을 골라냈다. 그리고는 동민들과 함께 예양(禮讓)을 숭상하고 충효를 권면하며 신의를 돈독히 해 상(喪) 당한 자를 구휼하고 어려움에 처한 사람을 구제했다. 봄가을에는 동회 유사(有司)가 동민 앞에서 (향약을) 한 차례 낭독하고, 농민·장사꾼·천민·노예들에게는 우리 말로 옮겨 이해시켰다. 애민(愛民)의 실천이다. 문중이 정리한 책자에는 이런 일화도 전한다.

약포가 낙향한 뒤 해가 질 무렵 내성천에서 낚시를 하고 있을 때였다. 어디서 온 초립동이 늙은이를 불렀다.


▎경북 예천군 호명면 황지리 내성천 산기슭에 있는 도정서원(道正書院). 서원의 사당에는 약포의 위패가 모셔져 있다.
“낚시하는 늙은이, 저 건너에 약포가 사시는가?”

“그렇소만.”

“내가 약포에게 볼일이 있어 가는 길인데 나를 좀 업어 건네주게나.”

약포는 그날도 허름한 촌로의 모습이었다. 약포는 어처구니가 없었지만 태연히 초립동을 등에 업어 물을 건너기 시작했다. 내성천을 다 건널 무렵 초립동이 다시 물었다.

“요새 약포는 무슨 일로 소일하는가?”

약포는 다시 태연하게 대답했다.

“네, 약포는 요새 낚시를 즐기다가 초립동도 업어 물을 건네준답니다.”

종손 정씨는 고평동에서 내성천 건너편 도정서원(道正書院)으로 기자를 안내했다. 예천군 호명면 황지리 금모래 강 내성천이 내려다보이는 동호(東湖) 언덕이다. 내성천변 절벽 위에 읍호정이 있었다. 약포가 76세에 손수 지어 이름을 붙인 정자다. 종손은 “정자 이름에 물을 가슴으로 퍼올린다는 뜻이 담겨 있다”고 설명했다. 물이 비켜가지 않고 퍼올려져야 복이 들어온다는 것이다. 읍호정에선 널찍한 내성천이 한눈에 들어왔다. 어디와 견주어도 손색없는 풍광이다. 읍호정 안쪽이 도정서원이다. 약포와 그의 셋째 아들 청풍자 정윤목의 위패가 모셔져 있다.

약포의 묘소는 안동시 풍산읍 오미리에 있었다. 옮겨간 경북도청의 지척이다. 거기선 하회마을도 서애의 묘소도 자동차로 10분 거리다. 약포는 임진왜란의 또 다른 주역이지만 서애에 가려 상대적으로 덜 알려져 있다.

북한의 핵 개발에 대응하려는 고고도미사일방어(THAAD, 사드) 배치를 두고 갈등이 확대되고 있다. 국내 문제를 넘어 지금은 중국까지 경제 보복에 나서는 등 국제 문제로 비화하고 있다. 대통령 선거에 나서려는 주자들은 저마다 다른 대응책을 쏟아내고 있다. 안보도 진영논리에 휘둘리고 있다. 요즘 들어 정세가 흡사 대한제국 말기 같다는 우려가 나오고 있다. 임진왜란 시기와도 닮아 있다. 박근혜 전 대통령 탄핵 정국에서는 ‘가짜뉴스’도 쏟아졌다. 역사는 되풀이 된다. 극렬한 당쟁 속에서도 목숨을 걸고 사자후를 토해낸 나라를 살리는 바른 말이 그리운 시절이다. 지금 약포의 기개와 직언이 필요하다.

- 글 송의호 기자 yeeho@joongang.co.kr / 사진 공정식 프리랜서

[박스기사] 약포가 구명한 명나라 풍수전략가 두사충 - 조선 최고의 풍수가로 명성 떨치고 두릉 두씨의 시조가 되다


▎경북 안동시 풍산읍 오미리에 있는 약포의 묘소.
약포 정탁은 임진왜란 시기 조선 사람의 목숨만 구한 게 아니었다.

조선을 도우러 참전한 명나라 군대의 지관도 죽음에서 아슬 아슬하게 벗어나는 은혜를 입었다.

명나라 장수 이여송(李如松)은 왜군을 격파하며 평양성을 탈환한다. 승전의 기쁨도 잠시, 이어진 임진강 벽제관 전투에서 왜군 복병에게 대패를 당한다.

패전의 모든 책임은 진지의 위치를 잡는 임무를 맡은 일급 참모이자 풍수전략가인 두사충(杜師忠)에게 돌려졌다. 군령으로 참수형이 떨어졌다. 좌찬성 약포는 이여송을 찾아가 두사충에게는 죄가 없다고 변호한다. 참패의 원인이 진지의 위치가 아니라 병사들의 사기 문제였음을 역설했다. 지세도 명과 조선이 다르다는 걸 주지시켰다. 그러면서 약포는 “죽이느니 차라리 나에게 달라”며 마침내 두사충의 목숨을 구한다.

정승 셋 나온다는 문경시 가은읍 명당

두사충은 약포의 은혜를 갚기 위해 <감여유결(堪輿遺訣)>이라는 풍수지리서를 지어 예천지역 명당 10곳을 일러 주었다. 그 뒤로 예천지역 많은 풍수가 이 명당을 찾기 위해 몰려들었지만 지금까지 찾아낸 곳은 호명면 황지리 논실과 용문면 노사리 두 곳뿐이라고 한다.

두사충은 약포의 집터도 잡아주었다. 후손 중 정승 셋은 나온다는 문경시 가은읍 명당이다. 하지만 약포는 집 짓는 노역으로 인한 민폐를 염려해 포기했다고 한다. 약포 의 묘터도 잡아주었다. 두사충은 약포를 모시고 말 고삐를 잡던 하인인 구종(驅從)에게 문경시 동로면 생달리에 있는 천하명당 연주패옥혈(連珠佩玉穴: 구슬이 꿰어진 줄 가운데의 옥 모양)을 일러주었다. 그 뒤 구종이 약포의 아들에게 그 위치를 알려주려 가다가 인근에 이르렀을 때 갑자기 말이 발길질을 해 구종은 차여 죽었다고 전해진다. 정경수 종손은 “구종이 딴청을 부리는 걸 아마도 말이 알아챈 것”이라고 설명했다. 결국 명당은 찾지 못하고 사람을 죽인 말도 죽여 오래된 반송 밑에 묻었다고 한다. 전국의 풍수들이 지금도 이 명당을 찾기 위해 동로면으로 자주 발걸음을 옮긴다는 것이다. 두사충은 이후 조선으로 귀화해 당대 최고의 풍수로 명성을 떨쳤다. 두사충의 묘는 대구시 수성구 만촌동 형제봉 산기슭에 있다. 묘 아래 모명재(慕明齋)란 재실이 있고, 두사충은 한국 두릉 두씨의 시조가 됐다. 중국 관광객이 들러가는 명소이기도 하다.

201704호 (2017.03.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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