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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풍기의 선물의 文化史(4)] 짚신, 낮은 자리에서 올리는 그리움과 존경 

꽃이 아름다운 시절에 그대와 함께 거닐어보리 

김풍기 강원대 사범대학 국어교육과 교수
먼 길 떠나는 스님이나 선비의 다정한 ‘동반자’… 벼농사 짓는 곳이라면 전 세계 어디에서나 애용

▎예로부터 짚신은 먼 길을 떠나야 하는 스님이나 선비에게는 다정한 동반자였다. 해남 미황사 금강 스님과 템플스테이 참가자들이 가벼운 옷차림을 한 채 산책을 하고 있다.
근대 불교의 대표적 선승으로 꼽히는 경허는 만년(晩年)에 갑산, 강계 인근에서 박난주라는 이름의 훈장으로 살아가다가 입적(入寂)했다.

그의 제자로는 ‘남혜월(南慧月) 북수월(北水月)’로 일컬어지는 혜명(慧明, 그의 호가 혜월이다)과 수월을 꼽는다. 혜월은 남쪽에서, 수월은 북간도 지역에서 불법을 전파해서 널리 이름을 떨쳤다.

그러나 수월은 남긴 기록이 거의 없을 뿐 아니라 법문(法門)을 하지 않았기 때문에 그의 법맥(法脈)이 변변하게 전해지지 못했다. 오직 능엄주를 열심히 암송하는 것으로 깨달음을 얻었다고 전한다. 바로 그 수월이 스승 경허가 몸져누웠다는 소식을 듣고 갑산으로 찾아갔다.

몇 날을 걸어 밤에 도착한 수월은 경허가 누워 있는 방문 앞에서 스승을 불렀다. 누구냐고 묻는 경허의 말소리가 방안에서 들렸다. “수월입니다” 하고 대답했지만, 경허는 그런 사람을 모른다고 대답을 하는 것이다. 다시 “스님!” 하고 불렀지만, 자신은 그런 사람이 아니라고 대답하더라는 것이다.

그 대답을 듣는 순간 수월은 스승의 뜻을 알고 조용히 물러났다고 한다. 다음날 아침, 경허의 방문 앞에는 수월이 간밤에 삼아놓은 짚신 몇 켤레가 곱게 놓여 있었다.

짚신은 많은 이야기를 떠올리게 하지만, 나는 늘 스승의 방문 앞에 놓아두었던 수월의 짚신이 먼저 떠오른다. 글도 모르고 법문도 하지 않았고 우리 불교사에 변변한 기록 하나 남기지 않았지만, 수월은 북간도의 중생들을 위해 부단히 몸을 움직이며 시봉(侍奉)했다. 시봉을 받는 스님이 아니라 중생을 시봉하는 스님, 그중에서도 그의 장기는 짚신을 삼아서 나그네들에게 나누어주는 일이었다. 다른 일화가 많지만, 유독 나는 수월의 짚신이 가슴에 남는다.

가난한 자의 가장 친근한 벗

짚신은 오랜 옛날부터 세계적으로 사용되던 신발이었다. 짚신은 벼농사가 이뤄지는 곳에서는 늘 발견되는 신발이었다. 심지어 멕시코 주변의 아메리카 인디언에게서도 우리나라 짚신과 비슷한 형태가 지금까지도 전승되고 있다.

문명의 거대한 물결에 떠밀려서 이제는 민속촌에서나 겨우 볼 수 있는 짚신은, 불과 100여 년 전만 해도 일상생활에서는 떼려야 뗄 수 없는 물품이었다. 동네 사랑방에서는 늘 짚신을 삼는 사람이 있었고, 기나긴 겨울 밤 노인들의 일과 중에도 짚신을 삼는 일이 있었다.

누구나 짚신을 삼았던 것은 아니다. 근대 이전 양반들이나 아낙네들이 짚신을 삼는 일은 기본적으로 없었다. 평민층 이하로 몰락한 양반의 경우에는 자급자족 차원에서 짚신을 삼는 경우는 있었지만, 그마저도 체면 때문에 하기 어려웠다. 오죽하면 ‘딸깍발이’라는 말이 나왔을까. 짚신을 삼기는커녕 신고 다니는 것도 체면에 손상이 된다고 생각해서, 비가 올 때나 신는 나막신 종류를 맑은 날에도 신고 다닌다고 해서 가난한 선비를 딸깍발이라고 불렀다.

조선 말기로 가면 대도시를 중심으로 짚신을 사서 신는 풍조가 늘어난다. 짚을 구하는 것도 마땅치 않거니와 그것을 삼는 것도 일이기 때문이다. 싼 값에 사서 신는 사람이 늘어나자 짚신을 파는 가게도 성업 중이었다. 조선 말기 사옹원(司饔院)에 그릇을 납품하던 공인(貢人)이었던 지규식(池圭植, 1851~?)이 남긴 <하재일기(荷齋日記)>를 보면 짚신을 사러 신발가게를 자주 들른 사실을 볼 수 있다.

당시 물가에 따라 가격은 조금씩 달라졌지만, 1892년 6월 16일자 일기에 보면 딸아이 짚신으로 8전을 줬다고 했다. 같은 날에 김을 맨 일꾼 술값으로 3전을 지불했고 김을 맨 품삯이 2냥이었다고 하니 당시의 물가로 짚신의 가격을 대충이라도 짐작할 수 있다.

일상생활에서 흔히 사용되는 물건일수록 여러 가지 의미를 담고 있다. 하나의 사물에 많은 의미를 읽어낸다는 것은 그 사물이 평소에 우리 생활에 광범위한 효용이 있었다는 의미기도 하다. 짚신의 경우가 그렇다.

근대 이전의 기록에서 짚신은 늘 가난한 선비들의 상징처럼 등장하곤 한다. 물론 앞서 언급한 것처럼 짚신 신기가 창피해서 맑은 날에도 나막신을 신었던 선비들의 행태도 있었지만, 가난을 솔직하게 인정하고(혹은 인정할 수밖에 없어서) 짚신을 신고 다녔던 선비들이 많았다. 그러다 보니 선비들이 직접 신발을 만들어서 자급했던 일이 가난한 선비의 일상 풍경으로 널리 알려지게 됐다.

조선 초기 청백리인 유관(柳寬, 1346~1433)은 성품이 청렴하고 행동이 단정해서 정승을 지낸 사람이었지만 초가 한 칸에 베옷을 입고 짚신을 신으면서 그저 담박하게 살아갔다는 <필원잡기(筆苑雜記)>의 기록도 같은 맥락으로 읽힌다.

가난한 삶의 상징이 짚신이지만 동시에 짚신을 활용해서 가난을 벗어나게 한 사례도 있다. <토정비결>로 널리 알려진 토정(土亭) 이지함(李之菡, 1517~1578)은 1570년 영남지역에 심한 기근이 들어 유랑하는 백성이 늘어나자 그들을 불러 모아서 큰 집을 지어 머물게 한 뒤 여러 가지 일을 가르쳐서 먹고살 방도를 마련해줬다.

그나마 그 일조차 못하는 사람들은 볏짚을 줘서 짚신을 삼도록 했다. 매일 감독하면서 신을 삼도록 했더니, 하루에 열 켤레를 만들 정도가 됐다. 그것을 내다 팔아 쌀을 사서 충분히 생활이 되도록 했다는 것이다. 이유원(李裕元, 1814~1888)의 <임하필기(林下筆記)>(권22)에 나오는 기록이다.

짚신을 통해 돈을 벌도록 하고 백성들의 민생고를 해결했다는 기록의 이면에는 짚신이 갖고 있는 가난의 이미지가 큰 몫을 한 것으로 보인다. 아무리 능력이 없는 사람이라도 일상에서 하찮게 취급되는 물건을 가지고 한 사람의 몫을 하며 살아가도록 하는 힘이 있다는 것, 이처럼 위대한 일이 또 어디 있겠는가.

옛 기록을 읽다 보면 짚신이 가진 뜻밖의 효용을 발견한다. 그중 두어 가지를 살펴보자.

우선 짚신은 민간처방에서 약으로 활용된다. 난산(難産)을 하는 산모에게 짚신을 활용해서 건강을 회복하게 하는 방법이다. <산림경제(山林經濟)>에서는 <동의보감>의 기록을 인용해 다음과 같이 소개했다.

“사람에게 길가에 버려진 짚신 한 짝을 구해서 신코를 잘라오는데 소이(小耳, 짚신코 쪽의 양쪽으로 뚫어진 부분)의 노끈이 달리도록 잘라오게 한다. 그것을 태워 재를 따뜻한 술에 타 먹이면 효험이 있다. 주워온 짚신이 왼발이면 아들을 낳고 오른발이면 딸을 낳으며, 엎어진 신을 주워오면 아이가 죽고, 옆으로 누운 신을 주워오면 경기(驚氣)가 있다”고 기록돼 있다.

때로는 약재로, 때로는 거름으로


▎겨울 농한기를 맞아 시골마을 마을회관에 모인 어르신들이 짚신 등 전통공예품을 만들고 있다.
버려진 짚신에 무슨 의학적 효험이 있을까마는 속수무책으로 당할 수밖에 없는 힘없고 돈 없는 민초들은 그야말로 지푸라기라도 잡는 심정으로 이 방법을 썼을 것이다. 어쩌면 술이 주는 이완작용 덕분일지도 모를 이 처방은 근대 의학이 자리를 잡기 전까지 더러 사용되던 방법이었다.

이와는 달리 짚신을 거름의 용도로 사용하기도 했다. 약초를 심을 때도 비슷한 방법을 썼지만, 호박을 심을 때 짚신을 활용하는 민속은 전국적으로 발견되는 현상이다. 평소에 나들이를 하다가 버려진 짚신을 발견하면 모두 주워서 집으로 가지고 온다. 해진 짚신을 새끼줄에 묶은 뒤 변소 아래쪽 인분 안에 드리워서 담가놓는다. 어떤 곳은 오줌을 담아놓은 장군 안에 넣어둔다.

어느 쪽이든 그렇게 담가놓으면 시간이 흐를수록 인분과 오줌이 짚신에 깊이 스며든다. 일단 그렇게 준비를 한 뒤, 봄이 돼 호박을 심을 때가 되면 그것을 꺼낸다. 호박을 심어본 사람이면 알겠지만, 땅을 파고 호박씨만 덜렁 넣으면 싹이 제대로 트지 않을 뿐 아니라 싹이 트더라도 호박이 실하게 달리지 않는 경우가 많다. 그래서 구덩이를 꽤 크게 파고 그 안에 거름을 넉넉히 넣은 뒤에 호박을 심는다.

그러나 가난한 살림에 거름이라고 해서 풍족했을 리 없다. 그들은 오랫동안 인분과 오줌에 담가뒀던 짚신을 꺼내서 그 안에 호박씨를 넣고 잘 감싼 뒤 구덩이에 그것들을 통째로 넣고 흙으로 덮는다. 이렇게 하면 짚신이 함유하고 있던 거름 성분 덕분에 호박씨가 싹을 틔워서 튼실한 호박을 맺을 기초 체력을 기르는 것이다.

이렇게 많은 의미로 해석될 수 있는 짚신을 선물한다는 것은 또 어떤 맥락일까? 평범한 물건이라도 그것이 선물의 맥락 위에 놓이는 순간 비범한 것이 되는 경우를 많이 접한다. 예전 기록에서는 대체로 스님이 양반에게 선물하는 때가 많다. 양반이 양반에게 한 기록이 없는 것은 아니지만, 스님이 양반에게 한 경우는 심심찮게 보인다.

스님들은 한군데 정착해서 생활하는 것을 금기로 여겼다. 오죽하면 같은 나무 아래에서 이틀을 묵지 말라고 가르쳤겠는가. 선방에서 안거(安居)에 들어갔다가도 그 기간이 끝나면 훌훌 떨쳐 일어나 만행(萬行)을 떠났다.

그들은 늘 새로운 길을 걸었으며, 그렇게 가는 길이 후학들에게 하나의 길잡이가 됐다. 이런 삶을 살다 보니 신발이야말로 가장 가까운 벗이었다. 물건에 집착을 가지지 않았던 스님들의 태도는 발을 보호하기만 하면 값싸고 쉽게 구할 수 있는 짚신이 제격이었다. 그들이 짚신 삼는 것을 일상적으로 했던 것은 이런 환경 때문이었을 것이다.

시주(施主)들의 보시(報施)에 의존해 살아가지만 신도들이 제공하는 물품을 하늘처럼 생각했던 스님들 입장에서, 자급 자족할 수 있는 것은 최대한 그렇게 하려고 애를 썼다.

짚신의 일차적인 용도는 걷는 동안 발을 보호하기 위한 것이다. 만행을 하는 스님들에게나 길을 나선 선비들에게나 짚신은 동반자였다. 고려 말의 학자 관료인 이색(李穡)은 짚신을 이렇게 노래한 바 있다.

“조정의 가죽신발 벗은 지 오래, 산속 정자에서 걷는 야인의 발걸음 가볍다. 홍진에 더럽혀지지 않나니, 내 삶을 지켜주는 네가 고맙구나.”[我脫朝靴久, 山亭野步輕. 紅塵汚不得, 謝汝爲吾生: ‘짚신(초구·草屨)’, <목은집> 권32]

“내 삶을 지켜주는 네가 고맙구나”


▎1900년께 서울 근교 산자락에서 짚신 신고 장죽 물고 화승총을 어깨에 멘 사냥꾼들이 어딘가를 응시하고 있다.
속세의 먼지가 미치지 않는 산속에서 살아가는 야인의 삶을 노래하는 이색은, 가죽신발이 상징하는 권력의 길에서 벗어나 시골선비로서의 길을 걸어가도록 해주는 짚신에 고마움을 표한다.

이런 맥락에서 보면 짚신은 권력의 소용돌이에서 벗어나 담박한 강호자연 속에서의 삶을 구가하는 태도를 표현하는 시적 상관물(相關物)이다. 산에 사는 사람이 선물로 보낸 짚신을 받고 쓴 작품을 보면 그 의미가 어떻게 파악되는지를 알 수 있다. 송시열의 수제자였던 권상하(權尙夏, 1641~1721)는 이렇게 썼다.

“요즈음 병이 많아 깊숙한 집에 누웠는데 무슨 일로 은근히 짚신 부치셨는가? 생각건대 산속에 봄이 한창 좋을 때라, 나를 불러 꽃 핀 시내를 걸어보자는 것이리.”[邇來多病臥深齋, 底事慇懃寄草鞋. 想得山中春正好, 定應招我踏花溪: ‘산인이 짚신을 보내오다, 山人送鞋’, <한수재집> 권1]

사실은 절에서 생계를 위해 짚신을 삼는 일이 많았으므로 스님들이 양반들에게 선물로 돌리는 경우가 많았다. 그러나 위의 시에서는 선물을 보낸 사람이 스님인지 산속에서 은거하고 있는 선비인지 명확하지는 않다. 그저 ‘산인(山人)’으로 지칭된 분이 맥락으로 보건대 어느 쪽이든 관계는 없을 듯싶다. 짚신 선물을 받은 권상하의 시에서 볼 수 있듯이, 선물을 보낸 사람이 누구든 간에 단순히 경제적 차원의 문제가 아니었다.

짚신을 받은 권상하는 자신에게 선물을 보낸 이의 마음을 생각해본다. 흔히 접하는 신발이지만 그것을 보낸 사람의 손길이 은근히 느껴진다. 더욱이 긴 겨울 동안 병 때문에 바깥나들이를 하지 못하던 차에 이런 선물을 받으니 그의 마음이 한층 부풀어 오른다. 짚신을 보낸 사람도 권상하의 사정을 아마도 알고 있었으리라. 작은 선물 하나로 두 사람은 어느새 마음을 나누고 있다.

거리가 아무리 멀어도 그들의 마음은 짚신으로 연결돼 따뜻한 상상을 일으킨다. 선물로 짚신을 보내줬으니 권상하 자신은 그것을 신고 직접 그 사람을 찾아가보는 것이 최고의 답례임을 알고 있다. 게다가 보내준 사람의 마음에는 한창 꽃이 아름다운 시절에 함께 시내를 거닐어보자는 의도임을 짐작해 낸다.

글머리에서 언급했던 수월 스님의 짚신을 다시 떠올려본다. 언제 이승을 떠나 누구도 모를 길을 갈 스승을 위해 밤새 짚신을 삼아서 방문 앞에 살포시 놓아두고 아무 흔적 없이 떠난 수월 스님. 죽음을 앞둔 스승에 대한 가장 깊은 존경과 한없이 자신을 낮추고자 하는 스님의 하심(下心)이 그 짚신에 교차하고 있는 것처럼 내게는 생각됐다.

스님은 인간의 가장 낮은 자리에서 인간의 몸무게를 온몸으로 떠받치면서 서서히 사라지는 짚신의 생애를 따르고자 했던 것처럼 느껴졌다. 평생 짚신을 삼아서 사람들에게 나눠주는 일을 했던 수월 스님의 삶을 생각하면 그렇게 느끼는 것도 무리는 아니다. 그런 점에서 보면 짚신 선물이야말로 나를 낮추고 상대방을 높이고 싶은 마음이 고스란히 스며 있다.

그 신을 신고 떠돌아다닐 것, 어디에도 머무름 없이 늘 새로운 길을 찾아 나아갈 것. 혹은 그대의 소식이 문득 듣고 싶은 날, 내가 보내준 짚신을 신고 나를 찾아와줄 것을 은근히 부탁하고 있다. 짚신을 통해서 선물하는 이나 받는 이 모두 서로에 대한 그리움을 한껏 키우는 것이다.

김풍기 - 강원대 사범대학 국어교육과 교수. 책과 노니는 것을 인생 최대의 즐거움으로 삼는 고전문학자. 매년 전국 대학교수들의 이름으로 발표하는 ‘올해의 사자성어’ [2011년 엄이도종(掩耳盜鐘)]에 선정되는 등 현실에 대한 비판도 잊지 않는다. 저서로 <옛 시에 매혹되다> <조선 지식인의 서가를 탐하다> <삼라만상을 열치다> 등이 있다.

201704호 (2017.03.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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