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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재소설] 복거일 소설 ‘이승만’ | 물로 씌여진 이름(제1부 광복) 

제4장 - [2] 일본내막기 

글 복거일 / 그림 조이스 진
미국에서 이승만은 제법 알려진 명사였다. 또 인터뷰 요청이 들어왔다. 비록 지방도시의 이름 없는 잡지였지만, 그는 성실하게 인터뷰에 응했다. 롱이라는 기자는 이승만의 인터뷰에 이어 부인 프란체스카 여사와도 이야기를 나누고 싶어했다. “좋죠.” 힘주어 고개를 끄덕이면서, 이승만은 아내를 돌아보았다. 자신에 관한 기사는 이미 많은 신문과 잡지에 나온 터였다. 그러나 프란체스카에 관한 기사는 나온 적이 없었다. 그는 아내 이야기가 기사로 나오는 것을 보고 싶었다. 아내 프란체스카 여사의 입을 통해 밝혀지는 두 사람의 인연과 이승만의 인간적 풍모, 그리고 독립을 위한 열정.

▎1904년 11월 4일 이승만은 대한제국의 밀사로 미국에 파견됐다. 그는 공식적으로는 주미 대한제국 공사관으로 가는 외교문서들을 지녔지만, 핵심 문서는 시종무관장 민영환(閔泳煥)과 의정부 찬성 한규설(韓圭卨)이 휴 딘스모어(Hugh A. Dinsmore) 상원의원에게 보내는 비밀편지였다. 딘스모어는 1887년부터 1890년까지 주한 미국공사로 일해 두 사람과 친교가 있었다.
1904년 러일전쟁에서 이긴 일본이 조선을 병탄하려는 의도를 노골적으로 드러내자 대한제국 조정에선 미국의 도움을 받으려는 노력이 구체화되었다. 그런 노력의 일환으로 이승만이 밀사로 미국에 파견되었다. 1904년 11월 4일 이승만은 제물포에서 기선에 올랐다. 부친 이경선(李敬善) 옹과 부인 박씨, 아들 태산이 눈물을 흘리면서 그를 배웅했다. 그는 공식적으로는 주미 대한제국 공사관으로 가는 외교문서들을 지녔지만, 핵심 문서는 시종무관장 민영환(閔泳煥)과 의정부 찬성 한규설(韓圭卨)이 휴 딘스모어(Hugh A. Dinsmore) 상원의원에게 보내는 비밀 편지였다. 딘스모어는 1887년부터 1890년까지 주한 미국공사로 일해서 두 사람과 친교가 있었다. 이승만은 12월 6일 샌프란시스코에 상륙했다. 이어 기차로 12월 31일 워싱턴에 닿았다. 서울을 떠난 지 56일 만이었다.

“아, 그랬나요?”

그녀가 흥미롭다는 얼굴로 그를 살폈다.

“밀사의 임무는 성공적으로 수행하셨나요?”

“조선 관리들이 편지를 보낸 사람은 아칸소주 출신 상원의원 휴 딘스모어였습니다. 그분은 조선 주재 미국공사를 지내서 조선에 호의적이었고 조선을 위해 수고를 마다하지 않았습니다. 1905년 2월 나는 딘스모어 상원의원과 함께 존 헤이(John Hay) 국무장관을 만났습니다. 나는 헤이 장관에게 그가 주도한 중국정책을 한국에도 적용해달라고 요청했습니다. 헤이 장관은 중국에 대한 ‘문호개방정책’을 추진했죠. 중국과 무역에서 모든 나라가 동등한 기회를 누리고 중국의 영토적·행정적 일체성은 침해되지 않아야 한다는 정책이었습니다. ‘문호개방정책’은 중국의 독립에 큰 도움이 되었습니다. 내 요청을 듣자 헤이 장관은 ‘조약에 따른 의무를 다하기 위해 최선을 다하겠다’고 말했습니다. 그러니 나로서는 일단 임무를 수행한 셈이죠.”

이승만은 씁쓸한 웃음을 얼굴에 띠었다.

“그 뒤에는 어떻게 되었나요?”

“1905년 여름 하와이의 조선인들이 독립운동단체를 만들고 시오도어 루스벨트(Theodore Roosevelt) 대통령에게 조선이 독립하도록 도와달라고 청원하기로 했습니다. 그때 헤이 장관이 갑작스럽게 사망했습니다. 마침 일본으로 가던 윌리엄 태프트(William Taft) 전쟁 장관이 하와이에 들렀습니다. 조선 독립운동가들은 태프트 장관을 환영하면서 루스벨트 대통령을 만날 수 있도록 주선해달라고 부탁했습니다. 태프트는 선뜻 소개장을 써주었습니다. 그래서 윤병구 목사와 나는 대통령이 여름휴가를 보내던 오이스터베이로 가서 소개장과 청원서를 대통령 비서에게 내밀고 면담을 요청했습니다. 불쑥 찾아가 대통령을 면담하고 싶다고 했으니 비서로서는 황당했겠죠. 그래도 이튿날 대통령 별장으로 오라는 연락을 받았어요. 긴장되어 별장의 응접실에서 초조하게 기다리는데 갑자기 대통령께서 들어오셨어요. 우리는 당황해서 자기소개도 제대로 못하고 선 채 청원서만 불쑥 내밀었습니다.”

이승만이 껄껄 웃자 그녀도 웃음을 지었다.

“대통령께선 ‘나를 찾아주니 기쁘오. 나도 당신 나라를 위해 무슨 일이든 기꺼이 하겠소. 그러나 이 문서는 공식 채널을 통하기 전에는 처리하기 어렵소. 당신네 공사를 시켜 국무부에 제출하시오’ 하셨어요. 그러고는 바로 나가셨습니다. 우리는 정신이 얼떨떨했지만, 크게 고무되었죠. 공사관을 통해 제출만 하면 된다고 생각했죠. 우리는 아직 ‘외교적 수사’가 무엇인지 몰랐거든요.”

웃음기 없는 웃음을 지으면서, 그는 말을 이었다. “그러나 워싱턴으로 돌아와 우리 공사에게 청원서를 국무부에 제출해달라고 했더니, 공사가 ‘정부 훈령이 없는 한 곤란하다’고 거절했어요. 이미 주미 조선공사관은 일본의 영향 아래 있었던 것이죠.”

“그러면 결국 임무를 성공적으로 수행하지 못했다는 말인가요?”

“그런 셈이죠.”

그는 생각에 잠긴 얼굴로 턱을 쓰다듬었다.

“이제 와서 돌아보면 애초에 성공할 수 없는 임무였어요. 일본을 방문하는 길에 하와이에 들른 태프트 장관이 써준 소개장 덕분에 우리가 시오도어 루스벨트 대통령을 만날 수 있었다고 했죠?”

“네.”

“그때 태프트 장관이 일본에 간 것은 일본과 미국의 세력권을 획정하기 위해서였습니다. 미국은 러일전쟁에서 이겨 새로운 강국으로 부상한 일본이 필리핀을 넘보는 것을 걱정했습니다. 일본은 조선에 대한 우월적 지위를 인정받고자 했죠. 그래서 태프트 전쟁장관과 가쓰라타로(桂太郞) 총리는 ‘일본은 필리핀에 대해 어떤 침략적 기도도 갖지 않았다는 것을 확약하고, 미국은 일본의 조선에 대한 배타적 지위를 인정한다’는 점에 합의했습니다. 그런 밀약이 있었다는 것을 우리는 알 길이 없었죠. 거의 스무 해 뒤에야 그 밀약이 공개되었거든요. 그리고 일본이 조선을 병탄할 때의 미국 대통령은 바로 태프트였습니다.”

“그랬군요. 참 반어적이네요.”

그녀가 무겁게 고개를 끄덕였다.

“리 박사님께선 그 뒤로는 어떤 활동을 하셨나요?”

“편지를 전달하는 임무는 수행했지만, 실질적 성과 없이 귀국하게 되었죠. 그래서 고민하다 우여곡절 끝에 미국에 남아 공부하기로 되었습니다. 조지 워싱턴 대학에서 학부를 마치고, 하버드에서 석사과정을 마치고, 프린스턴에서 박사학위를 받았습니다.”

“박사학위를 받으신 것이 언제였나요?”

“1910년이었습니다. 조선이 일본에 병탄되어 없어진 해였죠.”

“아, 그랬군요. 그 뒤에는 어떤 일을 하셨나요?”


▎이승만 박사(맨 앞, 당시 36세)가 크리스마스를 앞두고 YMCA 성경학교에서 행사를 준비하고 있다. 이승만은 1910년부터 두 해 동안 YMCA에서 학생들을 가르쳤다.
“조국은 없어졌지만, 내가 조국에서 할 일은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어요. 그래서 귀국했죠. 두 해 동안 YMCA에서 학생들을 가르쳤어요. 그러나 일본 총독부의 감시가 점점 심해졌어요. 곧 체포될 것 같아 귀국한지 두 해 만에 다시 미국으로 건너 왔습니다. 그리고 기회가 나올 때마다 조선 인민들이 일본의 압제적 지배를 받고 있으며 하루라도 빨리 일본의 무도한 지배에서 벗어나야 한다는 것을 세상에 알려 왔습니다. 국제회의가 열릴 때마다 대한민국 임시정부 대표로 참석하려 시도했죠. 불행하게도, 일본의 힘과 영향이 워낙 커 번번이 실패했습니다. 실은 우리 임시정부는 미국 정부로부터 승인받지 못한 상태입니다. 대한민국 임시정부는 삼십 년 넘게 존속하면서 나라를 잃어버린 조선 인민을 대표해왔지만, 미국 정부는 우리를 성가신 존재로만 여깁니다. 그동안 미국 정부는 일본의 눈치를 너무 많이 봐왔습니다.”

그의 씁쓸한 웃음에 그녀도 미안한 웃음으로 화답했다.

“이제는 달라지기를 희망합니다. 리 박사님, 외국에서 독립운동을 하는 것은 무척 어렵죠?”

그는 흘긋 프란체스카를 쳐다보았다.

“힘들죠. 하지만 나는 불평할 수 없습니다, 내 조국을 위한 일이니까요. 독립운동에 나선 조선 사람들 가운데 많은 사람이 나보다 훨씬 더 힘들게 살았고, 적잖은 사람들이 조국을 위해 목숨을 바쳤습니다. 내 아내는 오스트리아 사람입니다. 그녀에겐 미안하죠.”

“아, 네.”

롱이 프란체스카를 살폈다.

“오스트리아 사람이시라고요?”

프란체스카는 얼굴에 잔잔한 웃음을 띠고 부드러운 눈길로 주름진 남편의 얼굴을 쓰다듬었다.

“실은 미세스 리에게 듣고 싶은 이야기들이 있습니다. 리 박사님과 대담은 아무래도 딱딱해서 미세스 리의 이야기를 함께 싣는 것이 좋을 것 같습니다. 그러면 리 박사님의 인간적인 면이 잘 드러날 것 같습니다.”

롱이 동의를 구하는 낯빛으로 이승만과 프란체스카를 살폈다.

“좋죠.” 힘주어 고개를 끄덕이면서, 이승만은 아내를 돌아보았다. 그 자신에 관한 기사들이야 많은 신문과 잡지에 나온 터였다. 그러나 프란체스카에 관한 기사는 나온 적이 없었다. 그는 아내 이야기가 기사로 나오는 것을 보고 싶었다. 비록 지방도시의 이름 없는 잡지였지만, 기사는 기사였다.

프란체스카가 놀라서 고개를 저었다. 그녀는 가정적인 여인이었고 사람들 앞에 나서는 것을 좋아하지 않았다. 더구나 이승만은 그녀에게 “남에게 남편에 관한 이야기를 일절 하지 않는 것이 좋고, 그것이 현명한 아내의 도리”라고 일러왔다. 자신의 이야기가 기사로 나간다는 것도 마음이 내키지 않았지만, 남편의 명성에 흠이 갈 이야기를 할까 그녀는 두려웠다.

“그러면 미세스 리와 이야기하기 전에, 리 박사님께 마지막 질문을 하겠습니다.”

분위기가 어색하기 전에 롱이 매끄럽게 말했다.

“오랫동안 조국의 독립을 위해 애쓰신 혁명가로서 바라는 것이 무엇인가요? 좀 구체적으로 말씀해 주세요.”

그가 싱긋 웃었다.

“아주 구체적인 희망이 있습니다. 우리나라는 미국과 맺은 수호조약을 파기한 적이 없습니다. 당연히 대한민국 임시정부는 그 조약을 실질적으로 되살리기를 바랍니다. 나는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미국 주재 대표로서 그 조약이 되살아나는 자리에 서고 싶습니다. 1904년 밀사가 되어 태평양을 건널 때 조국으로부터 받은 임무가 그것이니까요.”

그녀가 입술을 굳게 다물고 그의 말을 기록했다. 그리고 진지한 얼굴로 그를 바라보았다.

“나는 리 박사님의 희망이 이루어지기를 진심으로 희망합니다.”

“그러면, 마미.”

그는 위를 가리켰다.

“나는 위로 올라가 미세스 롱에게 선사할 붓글씨를 쓰겠어요. 마미는 여기서 미세스 롱과 이야기를 해요. 나의 인간적 풍모가 잘 드러나게 좋은 이야기들만 해줘요.”

이승만이 서재로 올라가자, 프란체스카는 과일접시를 내왔다. 문득 부드러워진 분위기 속에서 두 여인은 가벼운 이야기들을 나누었다. 이야기는 자연스럽게 이승만의 신변과 일상으로 흘렀다. 그가 워낙 독특한 사람이라, 재미있는 이야기가 많았다.

“두 분께선 언제 결혼하셨나요?”

분위기가 친밀해지자, 롱이 공책을 펼치면서 물었다.

“1934년 10월에요. 뉴욕 몽클레어 호텔에서 결혼식을 올렸어요.”

“그러면 두 분께선 미국에서 만나셨나요?”

“아뇨.”

프란체스카는 웃음 띤 얼굴로 고개를 저었다.

“우리는 스위스 제네바에서 만났어요. 1933년 2월 21일이었어요. 제 운명이 결정된 날이었죠.”

“아까 리 박사님께선 부인이 오스트리아에서 태어나셨다고 하셨는데….”

“네, 맞아요. 저는 비엔나 근교 인처스도르프에서 태어났어요. 1900년에요. 제가 태어난 해는 기억하기 좋죠.”

두 여인은 소리 내어 웃었다.

“이름은 프란체스카 도너였죠. 1933년 초에 어머니와 함께 프랑스를 여행했어요. 돌아오는 길에 제네바에 들렀죠. 이튿날 호텔 식당에서 저녁을 들려고 자리를 잡았는데, 지배인이 미안한 얼굴로 다가오더니 한쪽을 가리켰어요. ‘저기 동양에서 오신 귀빈이 자리가 없습니다. 합석하셔도 괜찮겠습니까?’ 우리가 앉은 식탁이 4인용 식탁이었어요. 우리는 좋다고 했죠. 그랬더니 동양인 노신사가 다가와 프랑스 말로 인사했어요. ‘좌석을 허락해주셔서 감사합니다.’ 식탁에 앉자, 그분은 사우어크라우트에 소시지 한 개와 감자 두 개를 주문했어요. 저는 그 식단에 좀 놀랐어요. 유럽을 찾는 동양 신사들은 늘 비싼 음식을 들고 호화롭게 지냈거든요. 그분은 바로 앞자리에 앉은 어머니나 제게 말을 걸지 않고 조용히 기다리더니, 주문한 음식이 나오자 프랑스 말로 ‘맛있게 드세요’ 하고 인사를 차린 뒤 조용히 식사했어요. 저는 당연히 그분에게 흥미를 느끼고 관찰했죠. 말없이 식사하는 그분에게서 묘하게 사람을 끌어당기는 신비한 기운이 느껴지는 거예요.”

롱이 웃음 띤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부인의 운명이 결정되는 순간이었군요.”

“네. 맞아요.”

두 사람은 다시 소리 내어 웃었다.

“그분이 식사하는 모습을 유심히 살피다 눈이 마주쳤어요. 좀 무안했어요. 그래서 미소를 지으면서 물었어요. ‘동양의 어느 나라에서 오셨나요?’ 그랬더니, 그분은 ‘코리아’라고 힘주어 말했어요. 마침 나는 여행에 나서기 직전 코리아에 관한 글을 읽었어요. 그래서 물었어요. ‘코리아엔 금강산이 있고 양반이 산다지요?’ 그분은 유럽의 젊은 여성이 자기 나라에 관해 안다는 것에 놀라면서 무척 반가워했어요. 그때 지배인이 다가와 그분에게 기자가 찾아왔다고 전했습니다. 그러자 그분은 우리에게 ‘덕분에 즐거운 시간을 가졌습니다. 실례합니다’ 하고 인사한 뒤 급히 자리를 떴어요.”

“아, 두 분이 그렇게 처음 만나셨군요.”

“네. 다음날 제네바에서 발행되는 [라 트리뷘 도리앙]에 그분의 사진이 크게 나왔어요. 그분 인터뷰가 머리기사였어요. 그래서 그분이 싱만 리 박사이고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전권대사로 국제연맹을 찾았다는 것을 알았죠. 당시 국제연맹은 만주국 문제를 다루었는데, 그분은 만주국에 관한 일본의 주장을 통렬히 반박했어요. 그리고 조선문제도 의제로 삼아야 한다고 국제연맹에 요청했어요. 저는 그 기사를 오려 봉투에 담아 호텔 안내인에게 맡겼어요. 봉투에 내 이름은 쓰지 않았는데, 그분으로부터 답장이 왔어요. ‘나에 관한 신문기사를 보내주신 친절에 감사드립니다.’ 그렇게 씌어있었어요. 다음날 다른 신문에도 조선의 독립에 관한 기사가 실렸어요. 그래서 그것도 보내드렸죠. 그랬더니, 그분은 답례로 차를 대접하겠다고 하셨어요. 처음엔 사양하다 그분의 제안을 받아들였죠. 그래서 그분과 함께 아름다운 호수를 바라보면서 이야기하게 되었어요. 저는 그분에게 제네바에 온 사정을 물었고, 그분께선 조선의 처지와 국제 정세를 친절하게 설명해주셨어요. 저로선 처음 듣는 이야기들이었지만, 그분의 열정에, 잃어버린 조국을 되찾아 압제받는 동포들을 자유롭게 만들겠다는 열정에 이내 감복했어요. 그래서 우리는 밀회를 즐기게 되었죠.”

“어머님께선 모르셨나요?”

“어머니는 곧 알아차리셨죠. 어머니는 그분을 좋게 보지 않았어요. 그분이 동양인이라는 점도 있었고, 나이도 많고. 가난하고. 당시 그분은 무척 가난했어요. 전권대사였지만, 임시정부가 무슨 여유가 있어서 자금을 충분히 주었겠어요? 돈이 없어 식사대용으로 날달걀에 식초를 타서 드시는 판이었죠. 어머니로선 딸이 그런 사람에게 마음을 주는데 기겁하셨죠.”

“어떠했을지 상상할 수 있습니다.”

롱이 클클 웃었다. 프란체스카도 따라 웃었다. 그리고 대서양 건너편 고국에 계신 어머니에 대한 그리움이 가슴을 시리게 적시는 것을 느끼면서, 아득한 눈길로 창 밖을 한참 내다보았다.

“두 분의 나이 차가 얼마나 되죠?”

롱이 조심스럽게 물었다.

프란체스카는 상념에서 깨어나 생각을 가다듬었다.

“파피는 저보다 스물다섯 살 위예요. 그분은 1875년에 태어났죠. 그때 파피는 쉰여덟이었어요. 그러나 조국의 독립을 위해 애쓰는 모습에선 젊은이의 열정이 느껴졌어요. 그리고 차츰 마음이 끌렸어요. 그래서 혼자 분주한 독립운동가를 돕기로 했죠.”

롱이 고개를 끄덕이면서 미소를 지었다.

“저는….”

수줍은 미소를 띠면서 프란체스카는 말을 이었다.

“세 자매 가운데 막내였어요. 아버님께선 소다수공장을 경영하셨어요. 아버님께선 막내인 제게 사업을 물려주려 하셨죠. 그래서 저를 상업학교에 보내셨고, 영어를 배우도록 스코틀랜드에 유학도 보내주셨어요. 덕분에 저는 영어 국제통역사 자격도 얻었고, 속기와 타자도 잘했죠. 그래서 파피를 돕는 것은 제가 닦은 기술을 활용하는 셈이었죠.”

“딸들만 있고 아들은 없었는데, 막내딸인 여사께 사업을 물려주려 하셨다는 말씀이죠?”

“네.”

“왜 맏딸이 아니라 막내딸에게 사업을 물려주려 하셨나요?”

“그건 여쭈어보지 않았어요. 아마도 언니들은 주관이 강해서 자기 길을 가겠다고 결심한 것 같아요. 저도 어려서는 의사가 되고 싶었어요. 아버님께서는 제가 수학에 재능이 있어 사업을 물려받아 운영할 만하다고 생각하셨을 수 있어요. 결국 소다수공장은 맏언니가 물려받았어요.”

“수학에 재능이 있으시군요.”

“네. 학교 다닐 때 수학 성적이 좋았어요.”

“리 박사를 돕기 시작했을 때, 어머님께선 어떠셨어요? 찬성하셨나요?”

프란체스카는 조용히 고개를 저었다.

“찬성하실 리 있겠어요? 어머님께선 딸을 보호하기 위해 일정을 단축하고 딸을 채근해 제네바를 떠나셨죠.”

두 사람은 함께 웃었다.

“하지만 어머님의 노력은 허사가 되었고요.”

“네. 어머님께선 제게 파피에게 작별인사를 할 틈도 안 주셨어요. 그래도 저는 어머니 몰래 사우어크라프트 한 병을 사서 호텔 종업원에게 맡기고 떠났어요. 조선 사람들은 김치라고 소금에 절인 채소를 늘 먹는데, 파피는 사우어크라프트가 김치 비슷해서 많이 드신다고 했어요. 그렇게 비엔나로 급히 돌아왔는데, 헤어지니 더 그리워질 수밖에요. 우리는 편지를 주고받으면서 우리 사랑을 확인했어요.”

“두 분께선 언제 다시 만나셨나요?”

“그해 7월 파피가 비엔나에 들르셨어요.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독립운동에 대한 소비에트 러시아의 지원을 요청하러 모스크바로 가시게 되었는데, 비자를 받기 위해 비엔나에 들르신 거죠. 그렇게 해서 우리는 다시 만났어요. 그분은 독립운동을 하는 외교관이라 늘 바빴어요. 저는 어머니의 눈길을 피해 만나야 했고요. 그래도 우리는 숲 속을 거닐고 명소들도 찾으면서 꿈같은 시간을 보냈죠. 그분은 젊었을 적부터 혁명가였고 해외를 떠돈 정치가였지만, 어린아이처럼 순수했고 매사에 성실했어요. 그때 저는 ‘사랑’이라는 조선말을 알게 되었죠. 사랑을 뜻하는 말이죠. 그 아름답고 낭만적인 말을 저는 늘 뇌었어요. 그리고 ‘조용한 아침의 나라’라는 뜻을 지닌 조선을 동경하게 되었어요. 지금도 저는 조선 땅에서 조선 사람들과 함께 살고 싶어요. 저는 조선 음식을 잘 만들어요. 파피 친구들이 모두 제 조선 음식이 맛있다고 그래요.”


▎러일전쟁 후 1905년 1월 5일 여순의 호두산 203고지(러시아군 요새)에서 일본군에 투항하는 러시아 병사들. 승전한 일본은 이후 조선 병탄의 야욕을 표출했고, 대한제국 조정에선 미국의 도움을 받으려는 노력을 구체화했다.
프란체스카의 웃음에 롱이 웃음으로 화답했다.

“한 사람을 사랑하면, 그 사람의 조국도 사랑하게 되는가 보군요. 두 분 다 첫 결혼이었나요?”

“아녜요. 파피는 조선을 떠나기 전에 결혼해서 아들을 두었어요. 뒤에 이혼했고 아들은 어릴 적에 미국에 와서 지내다 필라델피아에서 전염병으로 죽었어요. 파피는 지금도 아들의 죽음을 슬퍼해요. 조선엔 ‘부모가 죽으면 산에 묻고, 자식이 죽으면 가슴에 묻는다’는 속담이 있답니다.”

“오, 멋진 속담이네요. 조선 사람들의 속담들이 마음에 들어요.”

그녀가 얼굴에 웃음을 올렸다가, 프란체스카의 서글픈 얼굴을 보고 이내 지웠다. 잠시 뜸을 들인 다음, 프란체스카가 힘겹게 말을 이었다.

“저도 첫 결혼이 아니었어요. 저는 원래 스무 살 때 자동차경주 선수와 결혼했다 이혼했어요.”

“아, 그러시군요. 리 박사와 결혼에 대해 집안에선 찬성했나요?”

“당연히 반대가 심했죠.”

두 사람은 다시 소리 내어 웃었다.

“아버님께선 제가 결혼한 다음해에 돌아가셨어요. 어머님께선 완강하게 반대하셨어요. 그래도 저는 파피와 결혼하겠다는 뜻을 굽히지 않았어요. 마음이 흔들리다가도 온갖 시련을 극복하면서 독립운동을 하는 파피의 모습을 떠올리면 용기가 되살아났어요. 제가 뜻을 굽히지 않자 어머님께서 탄식하셨어요. ‘나이가 지긋한 동양 신사라 아무 탈이 없을 줄 알고 합석을 허락했다 내 귀한 막내딸을 멀리 시집보내게 되었구나.’ 어머님의 허락을 얻자, 미국에 들어오는 비자를 얻기가 예상보다 힘들었어요. 저는 오스트리아 이민 자격으로 미국에 들어가려 했는데, 이민 목적이 동양인과 결혼이라고 밝힌 것이 문제를 일으켰어요. 미국은 인종차별이 무척 심한 사회잖아요? 특히 동양인들에 대한 차별이 아주 심하죠. 중국인들과 일본인들의 이민을 법적으로 제한하잖아요? 그런데 일본의 식민지 출신이고 국적도 없는 동양인이니 오죽했겠어요?”

“리 박사님은 국적이 없으신가요?”

“조국인 조선은 멸망했고, 본인은 그 멸망한 나라의 여권을 가졌죠.”

“미국에 오래 사셨는데, 미국 시민권을 얻지 않으셨나요?”

“파피는 미국 시민권을 신청할 생각을 한 적이 없어요. 대한민국 임시정부 초대 대통령이 미국의 시민이 되겠다고 나서는 것이 얼마나 초라한 노릇인가, 그런 생각이시죠. 국적이 없으니, 얼마나 성가시겠어요? 제가 결혼하자 미국 국무부 여권과장 쉬플리 여사가 제게 간곡히 당부했어요. 제발 당신 남편을 설득해 미국 시민권을 얻으라고. 파피의 비정규 여권을 내줄 때마다 무척 번거롭고 힘들었다고 그랬어요. 물론 당사자인 파피는 훨씬 큰 어려움을 겪었죠. 그래서 파피에게 그 이야기를 여러 번 했는데, 그때마다 대답은 같았어요. ‘조선이 독립할 터이니 그때까지 기다립시다.’”


▎이승만 전 대통령이 부인 프란체스카 여사와 결혼 후 하와이에 들러 찍은 사진. 이승만은 1933년 제네바 국제연맹회의에서 독립운동을 전개하던 중, 프란체스카 여사를 만나 1934년 10월 뉴욕 몽클레어 호텔에서 결혼했다.
“당당한 무국적이시네요?”

롱이 감탄했다.

“네. 그래요.”

프란체스카가 클클 웃었다.

“결국 파피가 국무부에 가서 비자를 발급해달라고 요청해 일이 풀렸죠.”

“리 박사님께선 독립운동만 하시나요? 다른 일은 하시지 않고?”

“네.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외교관이 직업이죠. 임시정부는 중국에 있고 외교의 중심지인 미국에서의 외교는 파피가 책임지니 파피의 역할도 크고 늘 바쁘세요. 파피는 독립운동만을 위해 사시고 모든 일을 독립운동에 이용하세요. 그 점을 고려하지 않으면 그분의 판단과 행동을 이해할 수 없어요. 무국적자에 미국 시민권이 없어 무척 힘들다고 말씀 드렸죠?”

“네.”

“파피는 대한민국 임시정부 초대 대통령이 미국 시민권을 얻겠다고 나서는 것이 구차스럽다고 생각하는 것만은 아녜요. 그가 미국 국무부에 가서 비정규 여권을 얻을 때마다 국무부 관리들에게 조선이라는 나라가 비록 멸망했지만 그 나라를 되살리려는 사람이 눈앞에 있다는 것을 일깨워주는 효과가 있다고 생각하는 거예요. 여권문제로 어려움을 겪지만, 그것도 독립운동의 한 부분이라 여기죠. 그래서 국무부 관리들은 성가시다고 짜증을 내도, 정작 자신은 태연해요.”

“아, 알겠습니다.”

롱이 클클 웃었다.

“리 박사님 참으로 대단하시네요.”

“매사가 그런 식이에요. 파피는 미국 정부기관을 찾을 때는 으레 외교관 전용 주차장에 차를 세워요. 정식 외교관이 아니고 몇 십 년 전에 멸망한 나라의 임시정부를 위해 일하는 사람이니 분명히 규칙에 어긋나는 짓이죠. 그래도 그분은 태연해요. 만일 누가 시비를 걸면, 19세기에 조선과 미국 사이에 맺어진 수호조약을 조선은 파기한 적이 없다는 이야기부터 시작해서 미국이 잘 못한 것들을 들면서, 자기가 이곳에 주차할 권리가 있다고 주장할 심산이에요. 그렇게 하는 것이 미국 사람들에게 조선이라는 나라가 있었고, 그 나라가 멸망한 것에 대한 책임이 미국에도 있으며, 지금 미국이 일본에 공격당한 것도 근본적으로 그런 사정에서 나왔다고 깨우치는 기회가 된다는 생각이죠. 파피의 명성이, 뭐 우리에게 비우호적인 사람들의 생각엔 악명이 워싱턴에 자자해서인지 아직까지 아무도 파피가 외교관 전용 주차장에 차를 세운다고 시비를 걸지 않았어요.”

“호오, 이보다 더 재미있는 이야기가 없네요.”

롱이 고개를 젖히고 웃음을 터뜨렸다.

“정식 외교관들의 번쩍번쩍한 캐딜락들 가운데 낡은 소형차가 하나 끼어 있는 모습을 보면, 미소와 눈물이 함께 나와요. 그때마다 저는 자신에게 말하죠. ‘대한민국 임시정부를 대표하는 외교관에 걸맞은 차다.’ 우리는 그렇게 살아요.”

“알겠습니다.”

롱이 열심히 적던 손길을 멈추고 웃음 담긴 눈으로 프란체스카를 바라보았다.

“차는 리 박사께서 모시나요?”

“네. 그런데 파피는 너무 차를 빠르게 몰아요. 차를 모는 것도 혁명하는 것처럼 해요.”

롱이 다시 웃음을 터뜨렸다.

신명이 난 프란체스카는 손짓을 하면서 이야기를 이었다.

“파피가 하도 거칠게 차를 몰아서 모두 가슴을 졸여요. 사고가 날 뻔 한 적도 여러 번이에요. 사람들이 뭐라 하면 파피는 태연이 대꾸해요. ‘내가 혁명하는 사람인데 차를 몰다 죽을 일 없어요.’ 그래서 파피가 운전하는 차를 한 번 탄 사람은 절대 다시 타지 않죠. 우리가 뉴욕에서 살 때였어요, 한번은 워싱턴의 프레스클럽에서 연설하려고 뉴욕을 떠났어요. 시간이 급했어요. 파피는 대낮에 헤드라이트를 켜고 마구 달렸어요. 곧 기동경찰의 오토바이 두 대가 사이렌을 울리면서 우리를 뒤쫓기 시작했어요. 그러자 파피는 더 속도를 내서 달렸어요. 저는 새파랗게 질렸죠. 뒤에서 사이렌 소리가 따라와도 파피는 오히려 신이 나서 더 빨리 몰았어요. 기동경찰에 붙잡히면 외교관 면책특권을 내세울 심산이었죠. 물론 정식 외교관이 아니라는 것이 바로 들통 나겠지만, 미국 사람들에게 조선이라는 나라가 있다는 것을 알려주는 교육 과정이 된다는 생각이었죠. 지금도 파피는 조선이 망한 데는 미국 책임이 크다는 것을 주장하는 것에 유난히 큰 즐거움을 느끼는 것 같아요. 옆에서 보면 그래요.”

“그래서 어떻게 되었나요? 기동경찰에 붙잡혔나요?”

“아뇨. 파피가 헤드라이트까지 켜고 달린 덕분에 기동경찰의 추격을 뿌리치고 강연장에 정시에 도착했어요.”

두 사람이 다시 유쾌하게 웃었다. 롱이 믿어지지 않는다는 얼굴로 고개를 저었다.

“파피는 바로 연설을 시작했어요. 사람들은 이내 파피의 연설에 빠져들었어요. 파피는 유머 감각이 뛰어나 심각한 문제를 다루면서도 이야기를 재미있게 하거든요. 박수가 많이 터져 연설이 성공했다는 생각이 들자, 이제는 경찰관들을 상대할 일이 걱정되었어요. 그래서 살며시 살펴보니, 그 경찰관들도 열심히 손뼉을 치고 있었어요. 살았다 싶었죠.”

소리 없이 웃고 나서, 그녀는 말을 이었다.

“연설이 끝나고 파피와 함께 나오는데, 그 두 경찰관들은 파피를 잡을 생각을 하지 않고 제게 부드럽게 말했어요. ‘기동경찰로 근무하면서 우리가 따라잡지 못한 교통법규 위반자는 당신 남편뿐이오. 일찍 천당에 가지 않으려면 부인께서 단단히 조심 시키십시오.’ 그러고는 파피에게 승리를 뜻하는 V자 신호를 보내고 웃으면서 돌아갔어요.”

두 사람은 다시 소리 내어 유쾌하게 웃었다.

“그제야 정신이 번쩍 들었죠. 안 되겠다 싶었어요. 내가 운전해야겠다고 마음먹었죠. 그리고 파피한테 운전을 배워 되도록 제가 차를 몰았어요.”

“그러니까, 비자를 받아서 미국에 들어와 뉴욕에서 결혼하셨군요?”

“네. 저는 원래 천주교 신자였는데, 첫 남편이 개신교 신자였어요. 그래서 다니던 성당에서 제적되고 개신교 신자가 되었죠. 파피도 개신교 신자라서 개신교 의식으로 결혼식을 올렸죠. 배를 타고 1933년 10월 4일 오후 3시 예정시각에 뉴욕항에 닿았죠. 그런데 부두에서 파피가 보이지 않았어요. 둘러보고 또 둘러봐도 파피가 보이지 않자 마음이 하얘졌어요.”

“저런!”

롱이 혀를 찼다.

“부두에서 서성거리면서 별 생각을 다 했어요. 이미 한 번 결혼에 실패했던 터라 왈칵 불안감이 마음을 덮치면서 눈앞이 정말 캄캄해졌어요. ‘또 배신당하는구나’ 하는 생각이 들어 눈물이 났어요. 한 시간 뒤에야 파피가 부인 둘과 함께 나타났어요. 교통정체로 늦었다면서 정말 미안해했어요. 저는 저대로 미안했죠. 잠시나마 파피의 인격을 의심한 것이 너무 부끄러웠어요.”

“그랬군요.”

롱이 고개를 끄덕였다.

“두 분의 결혼은 마지막까지 극적이네요.”

“그런 셈이죠. 파피는 결혼식을 서둘렀어요. 바로 이튿날 뉴욕 시청에 가서 결혼허가서를 발급받았고 다음 날엔 메이시 백화점에 가서 면사포와 결혼반지를 샀죠. 결혼반지를 고르자, 파피는 주머니에서 진주 한 알을 꺼냈어요. 그리고 내게 보이면서 조선의 남쪽 섬 제주도에서 난 진주라고 설명했어요. 저는 작은 다이아몬드 서른여섯 개가 박힌 백금반지가 마음에 들어서 손가락에 끼어보니 꼭 맞았어요. 파피는 제주도 진주에만 마음을 써서, 제가 그 백금반지를 갖고 싶어 한다는 것을 눈치 채지 못했어요. 그래서 제가 제 돈으로 그 반지를 사서 보석상에게 ‘S.R. to F.D. 1934.10.8’이라 새기라고 했어요.”

프란체스카의 눈길이 손가락의 반지로 향했다.

“그 반지인가요?”

“네.”

반지를 만지면서, 그녀는 말을 이었다.

“파피는 제가 결혼식에서 한복을 입기를 바랐어요. 그래서 부두에 나왔던 부인과 함께 제가 집에서 가져온 흰 천으로 한복을 만들기 시작했죠. 그러나 한복을 만들어본 적이 없어서, 결국 실패했어요. 너무 애가 타서 눈이 붓도록 울었어요. 그렇게 해서 나흘 뒤에 결혼식을 올렸죠. 미국인 목사와 한국인 목사 두 분이 주례를 섰고, 결혼서약은 영어와 조선어로 했어요.”

“신혼생활은 어떠셨어요?”

“꿈만 같았죠.”

프란체스카가 손으로 입을 가리고 웃었다.

“어머니의 뜻을 거스르면서 결혼하기로 결심하고 어렵게 비자를 받아 미국까지 오는 과정이 워낙 힘들어서, 신혼살림은 정말 꿈속에서 사는 것 같았어요. 그런데 생각지 못한 문제가 생겼어요. 하와이의 조선 사람들이 저를 반기지 않는 것이었어요. 하와이는 그때나 지금이나 조선 사람들의 근거지이고 파피도 거기서 활동했거든요. 하와이의 조선 사람들은 파피에게 ‘혼자만 오시라’는 전보를 보냈고, 하와이의 동지들은 ‘서양 부인을 데려오시면 모든 동포가 돌아설 테니 꼭 혼자만 오시라’는 전보를 거듭 보냈어요. 그러니 제 마음이 어떠했겠어요?”

“이해할 수 있습니다.”

롱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 전보들을 보니, 결혼을 말리고 제가 떠나올 때 혼자 우시던 어머니 생각이 나면서 눈물이 났어요. 그때 참 많이 울었어요.”

“당시 부인의 심정을 저도 상상할 수 있습니다.”

롱이 고개를 끄덕였다.

“리 박사는 그 전보들을 받고 어떤 반응을 보이셨나요?”

“파피는 그런 반응이야 어느 정도 예상했던 것이니 걱정하지 말라고 저를 안심시켰어요. 파피 자신이 하와이의 학생들에게 가르쳤대요, 조선 사람들은 조선 사람과 결혼해야 한다, 그래야 조선 사람들이 조선 사람들의 정체성을 유지할 수 있고 조선의 독립을 위해 일할 수 있다. 그런데 독립운동의 지도자인 파피가 서양 여자와 결혼했으니 반응이 좋을 리 없었겠죠. 제게 안심하라 했지만, 파피도 좀 충격을 받은 모습이었어요.”

“그랬군요. 그래서요?”

“파피는 제게 함께 하와이로 가자고 했어요. ‘마미를 보면 사람들이 모두 마미에게 반할 거요’ 하고 자신 있게 말했어요. 그리고 자동차로 샌프란시스코까지 갔지요. 먼저 나이아가라 폭포를 구경하고 디트로이트를 거쳐 시카고로 갔어요. 거기서 한 일주일 머무르면서 사람들을 만나고 독립운동에 관해 협의했죠. 머무르는 곳마다 동지들과 후원자들이 있어서, 파피는 그 사람들에게 저를 소개했어요. 소개 정도가 아니라 자랑했어요. 샌프란시스코에 닿으니 마음이 좀 놓였어요. 거기선 채정해(蔡廷楷) 장군을 예방했죠. 채 장군은 상하이 싸움에서 중국군 19로군의 지휘관으로 일본군과 용감하게 싸운 영웅인데, 마침 미국을 방문했어요. 오랜만에 동지들과 후원자들을 만나니 파피는 신명이 났지만, 저는 따라 다니기 바빠 누가 누군지 기억하기도 벅찼어요.”

“그랬겠네요. 뉴욕에서 샌프란시스코까지는 얼마나 걸렸나요?”

“두 달이요. 그 두 달 동안 조선 사람들에 대해 제대로 알게 됐죠.”

프란체스카의 얼굴이 문득 어두워졌다. 창 밖을 내다보면서, 그녀는 가라앉은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우리가 가는 길에 방문한 조선 사람들은 거의 다 가난했어요. 더러 잘 사는 사람도 있었지만, 대부분 변변한 직업도 없이 가난에 찌든 모습이었어요. 어떤 집에선 젊은 여인이 아기에게 젖을 빨리고 있었는데, 제대로 못 먹어서 엄마도 아이도 영양실조에 걸린 모습이었어요. 그 모습을 보자 파피는 목이 메어 그리 말을 잘하는 분이 한마디도 못하고 나오는 눈물을 참느라….”

이야기를 맺지 못하고, 그녀는 손수건으로 눈가의 눈물을 닦고 코를 풀었다.

“그렇게 가난한 사람들이 가까스로 절약한 돈을 독립운동을 위해 내놓는다는 것을 그때 깨달았어요.”

그녀가 물기 어린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도저히 절약할 돈이 있을 것 같지 않은 분들이 쓰러진 조국을 되찾는 일에 쓰라고 찬장에 숨겨놓았던 돈을 내놓는 것이었어요. 그때 비로소 깨달았어요, 왜 파피가 그리도 근검하게 사는지. 왜 유명하고 추종자들이 많은 지도자가 늘 3등 열차와 3등 선실만 골라 타는지.”

“아, 그러셨군요.”

롱의 목소리도 젖어 있었다.

“더 애처로운 이야기도 있어요. 하와이로 떠나기 전 샌프란시스코 바닷가를 거닐다, 파피가 서쪽을 하염없이 바라보기에 제가 그랬어요. ‘고국이 그립죠?’ 입 밖에 내고 보니 바보 같은 이야기로 들렸어요. 20년 넘게 고국을 찾지 못했으니, 파피는 당연히 고국을 그리울 것 아녜요? 파피는 밝게 웃으면서 말했어요. ‘고국이 그리운 거야 당연하지만, 나는 마미가 있으니 외롭지 않소. 나처럼 행운을 잡은 사람은 참으로 드물다오.’ 그러고는 하와이 사탕수수농장에서 일하는 조선인 노동자들 이야기를 해주었어요. 그 사람들은 돈을 미리 받아 빚을 지고 들어온 노동자들이었어요. 원래 사탕수수농사가 아주 고되고 위험해요. 그러니 그 사람들은 실질적으로 노예처럼 일했죠. 그 사람들은 조선 처녀들을 맞아 결혼했는데, 그게 쉬운 일이 아니었죠. 그래서 결혼하지 못하고 죽게 된 사람들은 파피에게 결혼을 위해 저축한 돈을 내놓으면서 독립운동에 써달라고 유언했대요. 그리고 파피 품에 안겨 숨을 거두었대요.”

“오, 그랬군요.”

롱이 무겁게 고개를 끄덕였다.

“다음날 우리는 하와이로 가는 배를 탔어요. 저는 무척 불안했죠. 파피 혼자 오라고 한 하와이 동포들의 전보를 보았으니까요. 파피도 동포들의 반응을 자신할 수 없었는지, 저보고 ‘이번엔 우리를 환영해줄 동지가 아무도 없겠지만, 다음 여행 때엔 달라질 것이오. 힘을 내요’ 하고 말했어요. 막상 호놀룰루 부두에 도착했더니, 우리를 환영하는 사람들로 가득했어요. 무려 3천 명이나 나왔대요.”


▎프란체스카 여사는 이승만에게 하와이 사탕수수농장에서 일한 조선인 노동자들의 이야기를 들었다. “그 사람들은 돈을 미리 받아 빚을 지고 들어온 노동자들이었어요. 실질적으로 노예처럼 일했죠. 원래 사탕수수농사가 고되고 위험해요. 결혼하지 못하고 죽게 된 사람들은 파피에게 저축한 돈을 내놓으면서 독립운동에 써달라고 유언했대요.”
“대단한 환영이었네요.”

“그렇죠? 그때 하와이에 사는 조선 사람들이 한 7천 명 됐대요. 나중에 이야기를 들어보니, 하와이에 사는 파피 동지들이 일일이 찾아다니면서 파피를 환영하자고 설득했대요.”

“독립운동은 아무나 하는 일이 아니라는 생각이 새삼 드네요. 독립운동가의 아내로 낯선 땅에서 사는 것은 힘들 텐데요?”

“아무래도 힘들죠. 독립운동이라는 것이 보기보다 힘들고 위험해요. 파피 말로는, 우리는 그래도 낫대요. 중국에서 독립운동 하는 사람들은 일본 경찰에 쫓기고. 그래도 여기 미국에서도 쉽지는 않아요. 일정한 거처에서 안정된 직업을 가질 수 없고 남의 나라에서 떠돌면서 정치 활동을 하니, 당장 경제적으로 힘들죠.”

그녀는 거실을 둘러보았다.

“이 집도 엄격히 말하면 우리 집이 아니거든요. 독립운동을 위해 헌금한 재미동포들의 집이죠.”

롱이 고개를 끄덕이면서 집안을 둘러보았다.

“부인도 리 박사님을 따라 근검하게 사시는군요.”

“파피를 만나기 전까지 저는 가난을 몰랐거든요. 그래서 처음엔 힘들었고 파피 몰래 눈물도 많이 흘렸어요. 그래도 독립운동자금을 낸 조선 사람들이 어떻게 사는지 제 눈으로 본 뒤에는 저도 가난한 살림이 두렵지 않았어요.”

“혹시 리 박사께서 다른 직업을 가지시려 한 적이 있나요? 하버드에서 박사학위를 받으셨으니, 좋은 직장을 얻으실 수 있을 텐데요.”

“독립운동은 여가에 하는 일이 아녜요. 제가 옆에서 보니 비로소 독립운동가가 얼마나 바쁜지 깨닫게 되었어요.”

“리 박사님은 여가를 어떻게 보내세요? 리 박사님의 취미는 무엇인가요?”

“어쩌다 틈이 나면, 파피는 낚시를 즐기세요. 동지들이나 조선 유학생이 찾아오면 함께 포토맥 강변으로 나가세요. 파피는 고기를 낚으면 바로 풀어줘요. 사람들이 이상하게 여기고 물어보면 ‘나는 고기를 잡으려고 낚시질을 하는 것이 아니라, 낚시를 즐기려고 낚시질을 한다’고 대꾸해요.”

롱이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여사께선 소망이 무엇인가요?”

“여자의 소망이야 다 소박한 것이잖아요? 자기 집에서 남편과 정을 주고받으면서 사는 것 아녜요? 그래서 신혼 때부터 제 꿈은 조선이 다시 독립하는 것이었어요. 그러면 조선에 가서 우리 집을 장만해 안정된 삶을 꾸릴 수 있겠죠. 다만, 파피가 독립운동가로서 훌륭한 일을 하시니, 저는 파피의 건강을 챙기는 데 마음을 쓰죠. 그것이 제가 조선의 독립을 돕는 길이라고 생각하죠.”

두 사람이 이야기를 마치고 서재로 올라왔을 때, 이승만은 먹을 다 갈고 막 붓을 잡은 참이었다. 그가 하는 일을 방해하지 않도록 문간에 서서, 두 사람은 그가 붓글씨를 쓰는 모습을 흥미롭게 지켜보았다.

그는 흰 종이에 힘차게 글씨를 써내려 갔다. 서재에 묵향이 감도는데 붓을 잡은 손길에 힘이 느껴지고 동작이 물 흐르듯 자연스러워, 두 사람은 바라보는 것만으로도 즐거움을 느꼈다.

마침내 그가 구부렸던 몸을 폈다. 붓을 조심스럽게 내려놓고 자신이 쓴 것을 비판적 눈길로 내려다보았다. 그리고 두 여인을 향해 수줍은 웃음을 지어 보였다.

“원래 붓글씨는 ‘조선 종이’라고 하는 특수한 종이에 써야 합니다. 두껍고 질긴데다 변색되지 않고 오래가는 종이죠. 그리고 먹물을 잘 받아들여 글씨 쓰기에 좋아요. 그 종이를 구할 수 없어 문방구에서 종이를 샀는데, 너무 매끄러워서….”

두 여인이 다가와 그의 글씨를 감상했다.

“이것은 중국 문자지요?”

롱이 글씨를 가리키면서 물었다.


▎조선 후기의 문신이자 학자인 윤휴의 초상으로 전해지는 그림. 윤휴는 17세기 조선의 걸출한 사상가이자 시인으로 이름을 알렸다.
“雲間萬國同看月(운간만국동간월) 花發千家共得春(화발천가공득춘)”

“예. 조선은 예전에 중국문자를 썼습니다. 조선 고유의 문자도 있습니다만, 중국문자를 많이 썼죠. 이것은 옛 조선 시인이 지은 시입니다.”

“오, 네!”

롱이 글씨를 들여다보았다.

“무슨 뜻인가요?”

“운간만국동간월. 구름 사이로 만 나라가 같이 달을 바라보고. 화발천가공득춘. 꽃이 피면 천 집안이 함께 봄을 맞는다. 그런 뜻이죠.”

“참으로 멋지네요.”

롱이 감탄했다. 그녀 뒤에서 프란체스카가 흐뭇한 웃음을 지었다.

“이 시구는 윤휴(尹鑴)라는 17세기 조선 시인의 작품입니다. 그분은 뛰어난 사상가였는데, 권력투쟁에 패해 유배된 뒤 자결하도록 강요받았습니다. 이 시구대로 세상사람들이 공유할 수 있는 것은 많죠. 달과 꽃의 아름다움까지 독차지하려는 사람들이 없다면 모두 함께 평화스럽게 살아갈 수 있죠.”

“좋은 말씀이네요.”

롱이 공책을 폈다.

“이 시를 다시 해석해 주시겠어요?”

“그러죠. 구름 사이로 만 나라가….”

이승만의 해석을 공책에 다 적은 그녀가 고개를 들고 그를 바라보면서 진지하게 물었다.

“리 박사님, 아까 미국이 조선과 맺은 수호조약의 내용을 충실히 지키지 않은 것이 오늘의 상황을 초래했다고 하셨는데, 과연 도덕적 행동만으로 좋은 결과를 기대할 수 있을까요? 현실에선 어떤 국가든 모든 일에서 도덕적으로 행동하기는 어렵지 않나요? 국익을 위해 정치적으로 판단해야 하는 경우가 많은 것 아닌가요?”

그가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런 점도 있죠. 그러나 우리는 도덕심을 지녔습니다. 신이 우리에게 도덕심을 준 이유는 무엇인가요? 우리가 어려운 문제를 만났을 때 옳은 길로 가도록 인도하려고 도덕심을 준 것 아닌가요?”

롱이 생각에 잠긴 낯빛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공책에 이승만의 말을 적었다.

“도덕적 행동이 흔히 비현실적 선택이라는 생각은 널리 퍼졌죠. 실제로 우리는 늘 도덕적으로 행동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역사를 살펴보면 도덕적 행동이 현실적 선택으로 판명되는 경우들이 많습니다. 미세스 롱, 저는 도덕적 행동은 언제나 가장 현실적인 선택이라고 생각합니다.”

글씨가 얼마나 말랐는지 살피고서, 그는 말을 이었다.

“필리핀이 좋은 예입니다. 1905년 태프트 장관이 가쓰라 총리를 만나 ‘조선은 일본이 지배하고 필리핀은 미국이 지배한다’고 합의했습니다. 그것은 부도덕한 일이었습니다. 그들도 그 점을 인식했기 때문에 그 협약을 비밀로 했습니다. 그런데 필리핀은 어떻게 됐죠? 그 협약이 일본의 군국주의 팽창정책을 막았나요? 지금 필리핀은 일본군에 짓밟히고 있어요. 수많은 미국 군인이 죽고 다쳤으며, 앞으로 더 많은 피해를 볼 것입니다.”

자신도 모르게 목청이 높아졌음을 깨닫고, 그는 목소리를 낮추었다.

“미세스 롱, 나는 미국이 궁극적으로 이겨서 일본에 빼앗긴 필리핀을 되찾으리라 봅니다. 그러나 그렇게 승리하려면 적어도 몇 십만 명의 미군이 죽어야 할 것입니다. 미국 시민들도 엄청난 희생을 치러야겠죠. 만일 당시에 미국이 도덕적으로 행동해서 조선과의 수호조약에 따른 책임을 이행했다면 지금 필리핀에서 일어나는 일들이 일어났을까요? 당시 조선과의 약속을 지키는 일은 무척 힘들었겠죠. 그래도 지금 돌아보면 그런 행동이 가장 현실적이었다는 결론이 나오죠. 미국의 태도가 확고했다면, 그리고 그런 의지의 상징으로 지금 필리핀에 주둔한 군대의 단 1퍼센트만 조선에 파견했다면 펄 하버도, 필리핀도 무사했을 것입니다.”

간간이 고개를 끄덕이면서, 롱은 열심히 이승만의 말을 받아 적었다.

“어떤 일에서나 처음부터 도덕적으로 행동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한 세대 전에 미국이 조선에 관해서 한 선택과 지금 미국이 필리핀에서 맞은 상황을 연결시키는 것이 논리적으로 약하다고 느껴질 수도 있으니 다른 예를 하나 들죠. 나치 독일이 그들의 공격적 태도를 처음 드러낸 것은 1936년이었습니다. 그해에 히틀러는 라인란트를 재점령했습니다. 베르사유 조약과 로카르노 조약에 따라 독일군이 들어갈 수 없는 지역으로 독일군을 들여보낸 것이죠. 그때 독일의 도전을 막을 책임은 프랑스에 있었습니다. 그리고 그렇게 할 능력도 있었습니다. 히틀러가 라인란트로 보낸 독일군은 겨우 19개 대대였습니다. 실제로 라인강을 건넌 병력은 3개 대대였습니다. 1개 사단도 못 되는 병력이었습니다. 당시 프랑스군은 독일군의 다섯 곱절이나 되었습니다. 그러나 프랑스는 아무런 조치도 취하지 않았습니다. 도발에 맞서 국제질서를 지키겠다는 의지가 없었던 것입니다. 만일 그때 프랑스가 도덕적 용기를 발휘해 독일의 도발에 맞섰다면 역사는 달라졌을 것입니다. 적어도 프랑스가 전쟁에서 완패해 독일의 실질적 식민지가 되는 운명은 피했을 것입니다.”

“아, 그랬나요?”

롱이 고개를 들었다.

“프랑스가 처음부터 그렇게 무력했군요. 결국 히틀러의 위협에 밀려 양보를 거듭했죠.”

“그렇습니다. 라인란트의 재점령을 허용한 도덕적 비겁은 독일의 오스트리아 합병에 형식적 항의만 하는 행태를 낳았고 끝내 주데텐란트를 독일에 내주라고 영국과 프랑스가 체코슬로바키아에 강요하는 얼빠진 짓으로 이어졌습니다. 도덕적 선택은 늘 현실적입니다. 내 이야기는 물론 편향되었을 것입니다. 나는 늘 조선의 이익을 앞세우니까요. 그러나 한 사람의 이야기가 편향되었다고 그것이 모두 그른 것은 아닙니다. 우리는 도덕심이라는 신의 선물을 기쁜 마음으로 써야 합니다. 도덕심이 우리를 인도하는 한, 우리는 잘못된 선택의 위험을 피할 수 있습니다. 미세스 롱, 나는 감히 말합니다, 지금 미국 시민들에게 필요한 것은 도덕심의 발휘라고.”

이승만은 싱긋 웃고서, 종이를 가리켰다.

“이 글씨를 내 긴 이야기를 참을성 있게 들어주신 미세스 롱께 드리고자 합니다. 받아주시면 고맙겠습니다.”

복거일 - 1946년 충남 아산 출생. 1967년 서울대 상과대학 졸업. 1987년 소설 [비명을 찾아서] 발표. 이후 50여 권의 저술을 펴냄. 최근에는 소설 [한가로운 걱정들을 직업적으로 하는 사내의 하루]와 6·25 전쟁사 [굳세어라 금순아를 모르는 이들을 위하여] 및 전기 [리지웨이, 대한민국을 구한 지휘관]이 있다.

조이스 진 - 연세대에서 생물학을 전공했고 현재는 그림을 그리고 있다. [동아일보]에 [세상의 발견]이란 제목으로 그림과 글을 연재 중이다. [그라운드 제로] [서정적 풍경 1, 2] [삶을 견딜 만하게 만드는 것들] 등의 책에 삽화를 그렸고, 연극 [아, 나의 조국] [Attacking ni another direction]의 미술을 담당했다.

201704호 (2017.03.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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